칸트와 니체

칸트 Kant 2008. 8. 29. 12:5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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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한다"와 "하고자 한다"는 동사개념이 결국 의지의 문제로 귀착된다면, 결과적으로 이 두 독신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그 귀결에 이르는 과정과 방법은 얼마나 상이한가. 한 사람은 오성의 명증성을 사용해 이성의 체계적 비판의 작업으로서 당위를 끌어낸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이성 밖에서 이성을 주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의지의 문제에 다가섰다. 방식과 과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접점과 이 접점의 해리 지점을 추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일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중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하여" 장에서 낙타의 비유를 통해 칸트를 염두해 두고 있다. 낙타에서 사자, 어린아이로 가는 정신의 단계적 변화에서 낙타는 가장 낮은 수준의 정신 단계로서 인식의 괴로운 노동을 수행하는 자이다. 인식론에서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나가는 칸트의 도정은 법철학에서 미완의 종결을 이룬다. 형이상학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엄밀하게는 도덕의 형이상학으로서, 인간 존재의 도덕성을 인과율로 규정된 자연이나 초월적인 신적인 존재의 요청으로부터 탈각시키려는 것이 칸트의 목적이다. 자연성은 인간을 구속시킬 수 있으나 그의 자유를 침범하지는 못한다. 신적인 존재는 인간의 도덕을 완성시키거나 근거짓지는 못하지만 도덕을 함양할 수 있는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도덕은 인간의 자유로부터 성립해야 하는데, 이것이 <실천이성비판>과 <도덕 형이상학>의 과제이다. 여기서 칸트가 법철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를 법실증주의자의 전형으로 몰아 붙인다. 왜냐하면 도덕법은 자유의 인식근거로서 강력한 규범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

니체에게는 칸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체계를 완성시키는 것이 엄중하고 지난한 인식의 노동, 단조로운 인식의 고통으로 그려진다. 이에 비해 사자는 모든 전제 조건을 부수는 부정의 의미를 상징한다. 용에게 일격을 가하는 사자의 비유는 망치를 들고 기존의 철학을 부수는 회의주의를 암시한다. 정합적인 체계를 만들려는 시도와 이를 부정하는 회의주의의 대립은 고대부터 있었는데, 인과율을 부대연상이라는 심리적 작용으로 설명하려는 흄과 이를 반박하는 칸트의 논의는 이 논쟁의 근대적 재현이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는 누구인가?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영원한 놀이인 어린아이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이 물음을 이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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