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책들 Bücher 2019. 5. 29. 21:2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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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 관한 축약 정리본.

 

계몽의 개념

 

계몽은 옛부터 인간을 공포로부터 구제하고 주인으로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계몽의 정신을 선구적으로 선포한 베이컨이 염두한 지식은 가부장적인 것으로서 자연과 인간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신화를 파괴할 정도가 되기위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폭력을 행사한다. 신화의 파괴, 즉 탈마법화는 애니미즘과 의미를 버리는 것인데, 이는 서구철학이 그리스 이전 자연철학의 신화적 세계관과 뒤섞여 받아들인 범주들에 내재한 , 자연에 주술적으로 영향을 미칠려는 힘이라는 환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계몽은 신화의 근본원리를 주관의 자연에의 투사로 보고 신화적 형상을 주체로 환원시킨다. 여기서 더 나아가 계몽은 통일적 파악을 위해 세세한 것까지 포섭하는 체계를 목표로 한다. 이러한 통일성의 추구는 등가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시민사회에서도 나타난다. 수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가상으로 몰려 추방되며 신들과 질은 파괴된다. 그런데 계몽의 제물이 되버린 신화 자체도 계몽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올림푸스의 신들은 더이상 직접적인 원초적인 힘이 아니라, 이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위계질서로서, 이것은 체계화하는 정신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몽으로 넘어간 신화는 자연을 객체의 지위로 떨어뜨리고, 그 댓가로 인간은 힘이 행사되는 대상으로부터 소외된다. 반면 주술 속에서의 지배는 계몽과 같은 정복으로서가 아니라 형상과 사물이 친숙성과 유사성의 관계에서 그 목적을 추구한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자아의 자격으로서의 대상에 대한 사유의 자립화는 보이지 않는 힘을 자신과 닮은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투사)에 의해서 획득횐다. 여기서 질을 상실한 자연은 일회적이고 견본적인 것과 구별되는 특수한 대속가능성이 아닌, 보편적으로 대체가능한 것으로 된다. 그런데 계몽의 성격을 띤 신화의 주제가 파멸을 준비하는 운명의 필연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계몽도 파괴적인 결과를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획일화를 위해 계몽이 택한 도구인 추상화가 대상에 대해 갖는 관계는 신화에서의 운명이 대상에 대해 갖는 관계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개념영역의 추상화의 전제인 주체와 객체 사이의 거리로부터 발생하는 지배는 실제적인 지배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유는 미메시스적 마법이나 대상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터부시한다. 그런데 미메시스적 마법이 낯설고 초월적인 것을 보고 발설하는 공포의 외침을 통해 주체와 객체가 혼재된 상황에서 동일적인 것을 비동일적인 것으로 보는 모순을 표현함으로써 죽은 것을 산 것과 동일시 한다면, 계몽은 미지의 것이 더이상 없을 때 공포로부터 면제된다고 상상한다. 이것은 과격해진 신화적 불안이다. 실증주의에 있어 밖이라는 관념자체가 불안의 원천이다.

상형문자의 경우처럼 문자(기호)는 형상의 기능을 총족시켰으며, 신화는 어떤 존재나 과정을 상징으로 기능시킴으로써 반복되는 자연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과학과 문학이 구별되면서 기호와 형상의 분리가 일어나 진리의 해체를 가속화시킨다. 즉 기호로서의 언어는 계산의 도구로, 형상으로서의 언어는 모상에 만족해야 한다. 이러한 분리속에서 노동을 통해 지배되는 자연(유용성)에서 벗어나는 예술은 추방된다. 반면 독자적인 예술은 자기완결적인 영역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주술과 공통점을 갖으나, 영향력을 포기한다는 점에서는 후자와는 구별된다. 그러나 영향력의 포기에서 만들어지는 형상은, 생동하는 존재의 요소들을 스스로의 내부에서 지양시킴으로써 생동하는 존재와는 대립되는 순수한 형상, 특수자 속에서 전체가 나타나는 것, 곧 심미적 가상(Schein)이 된다. 여기서 기호와 형상의 분리는 지양된다. 그런데 시민사회는 지식의 한계를 예술이 아닌 신앙을 위해 설치하는데, 신앙이 지식에 대한 대립 또는 일치를 지속적으로 제시하지 않게 됨으로써 스스로 제한되어 정신과 현존재의 분리를 영속화하는 사적 개념에 머무르게 된다. 소명으로 삼은 화해가 좌절될 때 나오는 광신은 신앙 원리 자체의 실현이다.

초자연적인 힘의 행사를 집행하는 사회기구를 갖춘 부족은 영적 세계를 담당하는 주술사를 정점으로 질서지워진다. 영원히 동일한 자연운행은 제식의 단조로운 노동의 리듬을 통해 복종받는 자에게 주입된다. 여기서 물신을 통해 상징적으로 기능하는 반복되는 자연은 사회적 억압의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학문의 연역적 형식도 위계질서와 강압을 반영한다. 사유형식의 사회적 성격은 다수에 의해 개개 인간을 압도하는 것으로서, 사유형식 속에 있는 것은 집합성과 지배의 통일체이지 직접적인 사회적 보편성이나 연대감은 아니다.

특정한 부정은 세계를 무 또는 전체로 설명하는 것을 신화로 보고, 이를 금기시하면서 우상화된 형상의 허위성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런 금기를 무시하는 것은 헤겔에서 뿐만 아니라 계몽에서도 나타난다. 계몽이 사유를 사유하라는 요청을 무시하고 사유를 수학적 장치로 환원시킴으로써 얻는 댓가는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것 아래 이성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역사적․인간적 의미를 고찰함으로써 눈 앞에 보이는 현상을 개념을 통해 매개시키는 인식, 곧 직접적인 것에 대한 특정한 부정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로써 계몽은 신화로 돌아가며, 신화의 숙명론에 의해서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 사실적인 것을 수학적 형식에 포섭하는 것이나 현재적인 것을 의식(儀式)속의 산화적 과정에 연결시키는 것 속에서 새로운 것은 벌써 규정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낧은 것이 되어버리기는 현존재 뿐만 아니라 현존재를 도식화하는 지식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인간은 지배대상인 객체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정신이 물화되고,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에서 그의 척도는 객관성에의 동화에 의거하게 된다.

자기유지라는 목적이에 벗어나서 직접적인 삶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는 신화적 공포를 자아낸다. 철저히 목적지향적인 이성은 다른 모두를 제작하는데 소용되는 보편적 도구로 쓰이며, 자기유지의 강압적 성격에서 유래하는 논리법칙의 배타성을 띄어 생존과 파멸을 참과 거짓의 원리에 반영한다. 이러한 양자택일이 계몽의 본질인데, 이것이 불가피한 것은 지배가 불가피한 것과 같다. 인간이 자연 밑에 굴복하든지, 자연을 지배하에 두든지 해야하기 때문이다. 시민적 상품경제의 확대와 함께 인간의 노동은 지배의 강요아래 신화로부터 멀어져 갔지만, 지배 밑에서 인간의 노동은 다시 신화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와같은 신화, 지배 그리고 노동의 뒤얽힘은 호머의 《오디세이》에서 볼 수 있다. 오디세우스가 견뎌야 했던 다양한 죽음으로부터의 유혹을 통해 그의 인격의 동일성과 삶의 통일성이 확고해 진다. 그 과정에서 과거를 현재를 위한 유용성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것으로 구제하려는 충동은 거부된다. 이런 충동은 예술에 의해서 가능하다. 예술이 인식으로 간주되기를 포기하고 실천과 유리될 때, 이것은 사회적 실천으로부터 관대한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사이렌의 노래는 아직 이런 예술로 무력화되지는 않았다. 사이렌은 방금 지나간 과거를 금방 불러 냄으로써 저항할 수 없는 즐거움을 약속하지만 그 대가로 미래를, 각자가 살아온 전체 시간을 지불할 때만 각자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는 가부장적 질서의 포기를 요구한다. 사이렌의 노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불가항력성은,인류가 동질적이고 목적지향적인 남성적 자아로 형성될 때 까지 자신에게 무서운 것을 가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기유지는 자아를 잃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짝을 이룬다. 자아가 정지되는 행복감을 죽음과 같은 잠으로 보상하는 마약의 도취는 자기유지와 자기절멸을 매개시키는 오랜 사회장치 중의 하나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자아의 노력이다. 죽음과 행복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던 오디세우스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귀를 밀납으로 틀어막은 선원들은 여가마저 노동의 재창출을 위한 휴식으로 전이시키는 노동자와 같다. 귀를 자유롭게 방치하면서 마스트에 묶인채, 감미로운 유혹에 정신이 아찔할 수록 더욱 강하게 끈이 조여지도록 한 오디세우스의 처지는, 자신의 힘의 증대로 행복에 가까이 다가 갈수록 더욱 완고하게 행복에 몸을 맡기기를 거부하는 시민들과 같다. 풀어달라고 호소하는 오디세우스의 아름다운 심취를 모르는 선원들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둔다. 이들은 하나로 묶여진 억압자와 자신들의 삶을 재생산하는 것이며,따라서 억압자도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벗어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사이렌의 유혹은 무력한 예술로 중화된다. 선사시대 이후 이런 식으로 에술향유와 노동은 갈라진 것이며, 예술은 명령하는 노동의 대응물일 뿐만 아니라, 양자는 자연에 대한 사회의 지배라는 강압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배가 가장 강력한 힘으로서 지닌 대표성은 진보에 있어서와 마친가지로 퇴보에 있어서도 결정적 역할을 한다. 지배자는 사물의 비자율적인 부분과만 관계하며 사물을 순수하게 향유할 뿐 노동에의 참여와 경영권을 상실한다. 반면 피지배자는 자연물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강압 밑에서 절망적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을 향유한다고는 할 수 없다. 역사상 진보속에서 순환하는 어떤 지배도 이런 대가를 치룬다. 인류의 역사성과 지식이 노동분업에 의해 세분화됨으로써 인류는 더 원시적인 단계로 되돌아 가도록 강요당한다. 왜냐하면 기술에 의해 생활이 편리해지면서 지배는 더 강력한 억압에 의해 본능을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상상력이 위축된다. 또 사유가 일관성의 수립으로 퇴보하는 것은 사유의 빈곤뿐 아니라 경험의 그것도 초래한다. 왜냐하면 사회적․경제적․학문적 장치가 복잡하고 정교해 질수록 육체가가지고 있는 체험능력은 빈곤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관계와 감정을 꿰뚫는 총체적 사회의 매개에 의해서 인간은 강제된 집합성 속에서 질을 상실해 버린 단순한 유적 존재로 몰락한다. 이러한 퇴행은 지배자들의 술수에 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고대의 숙명론이 자기 자신에게 벗어나려는 과정 속에서 초래한 마지막 형태의 산업사회의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필연성이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배의 도구들은 사유와 함께 모든 사람에 의해 접근가능해야 한다. 그래서 지배는 자신과는 상이한 합리성을 허용하게 된다. 즉 모두를 위해 존재한다는 수단의 객관성은 이미 지배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며, 이러한 비판의 수단으로서 사유는 성장한다. 그러나 이런 반성의 사유는 상실됐다. 그렇다고 인간에 대한 체계의 폭력이 가중되는 상황을 사유가 깨뜨릴 수는 없다. 그러나 사유는 자신의 철두철미한 인식에 의해서 자신과 더불어 양자택일,일관성,이율배반의 논리가 강압적 메카니즘으로서의 잊혀진 자연임을 폭로할 수 있다. 사유가 분리의 기능인 거리화와 대상화라는 인식기능을 포기하지 않고는 필연성으로부터의 도피인 진보와 문명을 멈출 수는 없더라도, 필연성에 대항하기 위해 세운 지배의 술책들을 미래의 자유를 위한 보증으로 오인하지는 않는다. 문명의 진보는 지배의 세련화와 함께 지배의 해체에 대한 시각 또한 새롭게 한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혁명적 실천은 사회가 사유를 경직시키는 수단인 의식부재 앞에서 쉽게 굴복하지 않는 이론에 달려 있다.

 

부언설명1 오디세우스

 

신화와 계몽이 뒤엉켜 있는 호머의 《오디세이》는 오디세우스―시민적 개인의 모형―가 자연의 힘인 신화를 통과하여 자아의 형성(자기유지)으로 나아가는 도정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빌라모비츠의 표현대로 자신의 내부에 있는 자연적 본능을 이성이 다스림으로써 자연에 대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강안한 자아의 동일성을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아을 해체할 수 있는 모험에 자신을 내 던진다. 이것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책략으로서 그 메카니즘은 희생의 세속화된 형태인 선물이다. 등가의 원칙을 충족시키는 선물에 의해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신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희생이 계획적으로 수행될 경우 행위의 대상인 신을 기만하여 신의 힘을 인간적 목적을 위해 해체시킬 뿐만 아니라 사이비 목자가 신심이 두터운 교구민에 대한 기만으로 넘어가 예배를 통해 본래적인 책략을 행사하도록 한다. 이러한 희생의 기만적 성격이 지닌 희생자의 불별성이라는 가상은 태고적의 사람들이 자아를 실체로 믿는 가상처럼 아주 오래된 것이다. 극런데 자아는 희생에 의한 대속이라는 주술적 힘을 더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즉 자연과의 유연한 관계는 깨지는 것이다. 복구를 꿰한다는 희생의 주장은 거짓임이 증명된다. 희생제도는 피지배자와 자연이 동시에 당하는 폭력행위다. 따라서 책략은 희생을 해소시키기 위해 이와같은 희생의 비진리를 주관적으로 전개시키는 것이다. 종족 일원의 피는 집합체적 육체 속에 흡입되다는 피로 물든 합리성이나, 지배적인 이성이 수가 급증한 집단을 그 육체를 먹으로써 삶을 유지하는 방법인 희생을 필요로 했던 경우, 그리고 체계적인 사냥의 발전으로 인간희생의 합리성이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느끼게 된 민간종교가 완성되기 이전의 상황 등은 이를 설명해 준다. 이와같이 희생의 필연성은 허위에 찬 합리성으로 폭로될지 모르나 희생해위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게 희생의 비합리성이다. 책략이 파고드는 곳은 희생의 합리성과 비합리성 사이에 존재하는 틈이다. 즉 희생은 그 비합리서으로 말미암아 덧없는 것으로 증명되지만 동시에 자신이 지닌 합리성에 의해 존속된다. 한편 사화가 문명화되면서 자아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 신화의 한 요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외부의 자연과 다른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자아의 적대감은 인간 내부의 자연도 부정해야 하는 대가를 치뤄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 자신이 자연이라는 인식을 포기하는 순간 사회적 진보와 물질적 정신적 힘의 강화 그리고 의식 자체마저 파괴할 소지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유지가 가능한 것과 유지되어야 하는 것도 삶이지만, 지배와 억압을 당하며 자기유지에 의해 해체되는 것은 바로 생동하는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지배할려는 정신은 물리적으로 신화적 힘에 대항할 수는 없고 자연의 우월성을 반복해서 인정하고 탈영혼화된 자연의 경직성을 모방하는 책략을 취한다. 이러한 꾀로 외부의 힘처럼 자신 또한 탈마법화시킬 때 살아남기가 가능하며, 이것의 대가는 보편적이며 분리되지 않는 행복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즉 신화적 형상들의 순환의 매계기는 선행하는 계기를 보상하는 반복의 연속인데, 오디세우스는 이러한 운명의 불가피성에 대항해 보편성을 주장하나 보편성도 운명의 불가피성과 섞여 있다. 그래서 그는 노예의 처지로서 자연과의 계약을 준수한다. 그러나 그는 계약에서 빈 틈을 발견함으로써 그 계약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특별히 규정되지 않는 마스트에의 묶임에 의해서 정해진 항로를 통과하는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노래의 힘에 압도되면서도 그 노래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신화적 형상이 지녀온 권리의 정당성은 파기된다. 그 존재이유는 그것을 준수하지 못하는 것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와 사이렌의 만남으로 인해 병든 서구의 노래의 모순은 심금을 울리는 힘을 예술음악에 부여한다. 이렇게 계약이 파기되는 것은 말과 대상의 관계가 단일한 직접성의 의미로부터 벗어나 의미의 견고성에 틈을 내는 것이다. 이로인해 말과 사물을 변경시킬 뿐만 아니라 의도에 관한 의식이 발생하게 된다. 오디세우스가 자기를 유지하는 책략은 이와같이 단어와 사물 사이의 관계를 주재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한편 책략은 고대 그리스 초기의 원시적인 자급자족적 부정기교환에 근거한 것으로서 올바른 계약이행에도 불구하고 계약의 한 당사자를 기만에 빠뜨린다.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오디세우스의 모험적인 행동방식이 지닌 비합리성은 책략속에 침전되는데, 이는 원주민의 희생을 통해 자연에 대한 무기력을 부의 증대의 도덕적 근거로 전환시켜 준다. 합리적 이성 속에 숨겨져 있는 속이느냐 파멸하느냐의 양자 택일이 기만이 드러내는 치부다.

행복을 지양된 고통속에서 찾을려는 오디세우스에게 무위도식하며서도 취할 수 있는 로트파켄의 연(蓮)밥의 유혹은 채집단계로의 퇴행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기유지와는 무관한 꽃밥의 향취는 행복의 본래적인 귀향에로의 자극이다. 다음으로 오디세우스의 교활한 책략에 걸려든 키클로펜 폴리펨은 로트파켄보다 더 이후인 야만시대를 대변하는 것으로서 노동조직이 아직 정비되지 않는 사냥과 목동의 시대를 의미한다. 이는 노동없이도 가능한 퐁요로움을 문명이 비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는 객관적 법의 결속력에 의해서 조직되어 있지는 않지만 자기유지가 가능한 좁은 영역에서는 나름대로 질서와 화해를 지닌다. 그러나 거인은 원색적인 멍청한 괴물로 낙인찍힐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확고부동한 동일성을 획득하지 못한 것인데, 합리적 이성이 이에 동화되는 것은 이름을 통한 책략(오디세우스-우데아스)에 의해 완수된다. 이 사건의 의미는 주체인 오디세우스가 자신을 주체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을 부인하고 무정형한 것에 동화됨을써 자신의 삶을 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의 자기부정으로서 이름에 의도를 삽입시킴으로써 이름을 주술적인 영역에서 빠져나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동화를 통해 빠져 나오려는 그 강압적인 자연연관의 윤회사슬에 다시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책략은 우둔한 체하는 영리함에 의해 가능한데, 우둔한 체하는 것을 포기하고 본색을 드러내면 책략은 우둔함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상술하면, 말은 물리적 힘을 속일 수 있으나 자신에 대해 적시에 제동을 걸기는 힘들다. 말의 흐름은 겉으로 표현된 것의 패러디로서 의식의 흐름, 즉 사유자체를 동반한다. 다시말해 사유란 현실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유와 현실이 같은 것인양 취급하는 주관적 환상에 빠진다. 왜냐하면 현실과 사유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영리한 사람이 다변의 유혹에 빠지고 마는 것은, 물리적 힘에 비해 말의 장점은 취약한 것인데 이런 장점을 꼭 붙들고 있지 않으면 그런 장점이 빠져나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기인한다. 이렇게 선사시대에 나타난 말의 신화적인 강압은 후에 계몽된 말의 칼끝이 자신에게 되돌아 오도록 만드는 재난 속에서 영구화된다.

키로케의 신비로운 이야기는 본래의 주술적인 단계를 보여준다. 주술은 망각의 힘으로서 시간의 질서 속에 세워진 자아의 확고한 의지를 해체시킨다. 그런데 키로케는 태양신의 딸이며 대양신의 손녀라는 출신성분으로부터 자연의 특정한 요소를 우위에 두는 것과 대립되는 난혼이나 창녀의 특성을 지닌다. 즉 행복을 보장하나 행복하게 만들어준 자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창녀의 이중성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반드시 그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손님들에게 치명상을 가하지 않으며 그녀가 야수로 만들어버린 사람들도 평화롭다. 즉 마법에 빠진 인간들은 신화적 명령의 손아귀에 떨어지지만 신화적 명령은 그들 내부에 억압되어 있던 자연도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화해의 가상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호모의 묘사에서 그러한 쾌락의 흔적을 감지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희생자가 문명화될 수록 그러한 흔적은 좀더 강력하게 삭제된다. 고작해야 지저분한 돼지로 몰릴 뿐이다. 즉 性이나 선사시대에 가까운 도취와 각성은 억압되고 추방된 후각과 연관을 맺으나 후각의 쾌락은 직립보행을 포기한 자의 부자유스러운 킁킁거림으로 왜곡되는 것이다. 따라서 계몽과 신화의 대결 속에 있는 유혹녀는 강력한 유혹의 힘을 갖지만 방어력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는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면서도 무기력한 수수께끼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자연의 대변자로서의 시민사회의 여성을 반영한다.

이런 정도로 만족하기 위한 사회의 타협점이 결혼이다. 여성의 힘은 남성을 통해서만 매개되므로 무력해지는 것이다. 키로케의 마법에 반체념적으로 걸려드는 오디세우스는 그녀에 대한 동경에 자신을 빠뜨리는 대가로 명령, 즉 난혼금지와 남성의 지배를 충족시킨다. 키로케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보장하는 쾌락에 대해 그 쾌락이 경멸당하는 대가를 치루게 된다.키로케라는 마지막 창녀는 최초의 여성적 성격, 즉 시민적 차거움을 내보인다. 이런 태도는 사랑의 금지를 실천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는 항상 더 많이 사랑하는 자인데 교환의 세계에서는 더 많은 것을 제공하는 자가 잘못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감정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에서조차 차거운 메카니즘이 침투하므로 고독의 재생산은 계속 확대된다. 키로케에게서처럼 여성에게 남은 영향력은 남성적인 자기유지에 도움을 주는 한도로 축소된다. 그러나 성적인 문제에 관해서 모든 관계의 질서를 확립하는 것은 비싼 대가를 치룬다. 오디세우스와 페네로페와의 실제적인 결혼은 달콤하지만 애절한 슬픔이 깃든 것이다. 귀향한 오디세우스를 보고 페네로페는 놀란 나머지 말을 잃었으나 그의 남루한 차림때문에 자연스러운 반응을 숨기고 실수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사회질서의 압력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페네로페는 가부장적 질서를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남성적 성격과 동일하게 만들 때까지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퀴즈를 알아맞춘 오디세우스에게 그녀는 애교를 떨면서 그의 고난은 그들의 보장된 영원한 약속에 대한 신들의 질투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역사에 있어 인간적인 것은 항상 인간적인 것의 구호밑에 숨겨진 야만의 언저리에서 번창하듯이 결혼에 있어서 화해는 억압의 둘레를 맴돌면서 커간다.

방황의 마지막 종착역은 저승세계인데, 이곳에는 빛의 종교에 의해 추방된 무기력한 모권적 형상들(환영)이 있다. 이러한 형상들에 언어를 부여하려면 살아있는 기억의 담보로서 제물로 바쳐진 피가 필요하다. 이렇게 얻어진 언어를 통해 신화적인 침묵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주체가 환영에 불과한 이러한 형상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을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서 주체는 그 형상들이 헛되이 약속하고 있는 것에 참여할 수 있다. 즉, 오디세우스가 그들이 죽은 자(가상)임을 알아보고, 자기유지의 당당한 제스쳐를 통해 헛개비에 희생당하기 보다는 그들을 쫓아버린 후에야 그는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렇게 거세당한 신화들이 모여있는 죽음의 세계는 고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신하를 결정적으로 넘어서는 가장 오래된 층이다. 지옥의 문을 부수거나 죽음을 무효화하는 모티브는 반신화적인 사상의 핵심에 전거로 제공된다. 이러한 반신화적 요소는 포세이돈과 화해하기 위해, 노를 키로 오해할 수 있는 문명권(바다를 알고 소금으로 간을 칠 줄 아는 이들이 사는 곳)에 오디세우스가 들어감으로써 화해를 위한 제물을 마련한다는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에도 포함되어 있다. 이 화해의 암시속에서 오해는 찡그린 포세이돈을 웃게 만들고 이런 웃음 속에서 분노는 사그러드는 것이다. 따라서 웃음은 고향으로 가능 길을 약속해 주는 것이다. 이렇듯 모험을 감행하게 하는 것은 향수이며 이런 모험을 통하여 주체는 선사의 세계로부터 탈출한다.

주어지는 소유의 확고한 질서가 잃어버린 원초상태에 대한 모든 동경과 향수가 생겨나는 인간소외의 원인이지만, 모든 동경과 향수가 지향하는 고향이라는 관념을 형성시킨 기반은 바로 이 정착생활과 확고한 소유인 것이다. 이러한 주체형성의 원역사(오디세이)의 과정에서 신화의 소설로의 전이가 일어난다. 여기서 문명이 선사시대에 대해 자행하는 복수는 끔찍한 것이며, 이런 복수 속에서 문명은 선사시대에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문명이 신화와 구별되는 방식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폭력을 자각하도록 만드는 자의식이다. 웅변적인 어투나 신화적인 노래와는 상반되는 언어, 지나간 재난을 회상 속에서 계속 붙들 수 있는 가능성, 이런 것들이 호모적인 탈출의 법칙이다. 끔찍한 이야기를 재미거리인양 천연덕스럽게 끌고 나갈 정도의 차가운 거리를 유지하는 화술은 오히려 잔혹함이 노래 속에서 장엄한 운명으로 승격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그러나 이야기를 잠시 멈추는 것은 휴지부를 설정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휴지부는 보고된 것을 이미 오래전에 지난간 것으로 변형시키는데, 이러한 변형에 의해 예전부터 문명이 결코 완전히 꺼버리지는 못하는 자유의 가상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부언설명2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

 

칸트에 있어 “다른 사람의 인도가 없는 오성”이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오성이며, 이성은 “오성행위의 목표로서 어떤 집합적 통일체”를 설정하는데 이것이 체계다. 그는 라이크니츠나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합리성을 “좀더 높은 類와 좀더 낮은 종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체계적인 상관관계를 안수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계몽이란 의미에서 사유란 통일적인 학문질서의 수립 안에서 원리들로 부터 사실인식을 도출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식이란 원리들 밑에 다른 일체를 포섭하는 것이고, 체계속에 분류해 넣는 판단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개념적으로 고정된 상관관계는 광기나 거짓, 합리화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보편자로부터 특수자를 일끌어내는 능력”인데, 보편자와 특수자가 같은 성질이라는 것은 칸트에 의하면 “순수오성의 틀”에 의해 보증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지각작용은 이미 오성에 일치하게 구조화하는 지적 메카니즘의 무의식적 작용(선험적 전제)으로서, 주관적 판단이 행하는 사물의 이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물이 자아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사물에는 객관적 질로서 오성이 이미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틀, 즉 지각작용에 지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어떠한 인상도 개념으로 포섭될 수 없고 체계도 불가능한다. 여기서 미성숙을 개탄하는 계몽가가 유의해야 할 것은 원리와 사실 판단의 올바른 결합이 유지되고 있는가이다. 그러나 체계는 자연과의 조화를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사실들이 체계로부터 예측되는 것처럼 사실들은 체계를 보증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들은 고통스러운 실제(Praxis)에 속한다. 이에 반해 이론의 검증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지각작용은 물리학에서는 실험기구를 통해 가시적인 전기 스파크로 축소된다. 그런데 체계와 관찰이 일치되지 않는 곳인 사유―왜냐하면 예기치 못한 사건에 부딧치는 것은 체계적인 사유의 빈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는 우선 고립된(실험기구처럼 조작된) 시각적 인상들과 충돌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실천(Praxis)과도 갈등을 일으킨다. 이러한 체계를 계몽은 사실을 능숙하게 요리하며 자연을 지배하는 데 있어 주체를 가장 효과적으로 지지해 주는 것으로 이용한다. 그 원리는 자기유지의 원리다.

초월적이며 초개인적인 자아로서 이성은 인류의 자유로운 공동체적 삶이라는 이념을 포함하는데, 이 공동체적 삶 속에서 인류는 보편적인 주체로 스스로를 조직하며 순수한 이성과 경험적 이성 사이의 모순을 단호한 전체의 입장에서 지양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성은 계산적 사유의 기관이 되는데, 이러한 사유는 자기유지라는 목적을 위해 세계를 조정하며 단순한 감각적인 재료들을 복속되는 재료들로 만들기 위해 대상을 마련하는 기능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보편과 특수, 개념과 개별 사례의 관계를 외부로부터 조정하는 도식화 작업이 지니는 진정한 본성은 궁극적으로 산업사회의 이해관계이다. 여기서 학문일반이 자연과 인간에 대해 취하는 행태는 보험학이라는 특수학문이 삶과 죽음에 대해 취하는 행태와 다르지 않다. 누가 죽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보험회사의 책임과 사건사이의 관계다. 이러한 학문 자체가 스스로에 대한 의식을 상실했다. 학문은 단순한 도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작픔은 단순한 조작으로서의 경험을 초월한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그 자체의 원리에 입각해서 오늘날 계몽에 의해 탄핵된다. 왜냐하면 학문이란 노동의 다른 형식들과 마찬가지로 체계의 강압 밑에서 그 자신의 목표에 대해 더이상 반성하지 않는 기술적인 실천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사실로서의 윤리적인 힘에 대한 칸트의 호소처럼, 도덕론은 도덕 자체가 아무런 근거가 없다라는 의식에서 나오는 일종의 폭력행위이다. 칸트는 상호존중의 의무를 이성의 법칙으로부터 도출하려고 시도하지만, 그것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어떤 근거도 그의 《비판》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런데도 단순한 법형식의 존중이라는 칸트의 모티브를 믿는 시민은 계몽되었다기 보다는 미신에 빠진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윤리적인 힘들은 학문적인 이성 앞에서는 비윤리적인 힘들―윤리적인 힘들은 자신 안에 숨겨진 가능성에 의해서 보다는 권력과의 화해로 나가는 그 순간에 비윤리적인 힘들로 변하는데―만큼이나 중립적인 행동방식이 아니다. 이것은 이론으로부터 어떤 편차도 허용하지 않는 계몽의 결실이 보여준다. 즉, 19세기 상인이 칸트적인 상호존중과 사랑(정언명령)에 묶여 있었다면, 바로 그 계급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파시즘은 강철의 규율에 의해 자신의 신민들을 도덕적인 감정로부터 면제시켜주게 되자 어떤 규율도 더이상 지킬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느낀 것들을 종합하는 통일체인 자아, 가능한 모든 논리 형식이 필연적으로 의존하는 자아는 물질적 생존의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 산물로서, 마지막으로는 소유를 박탈당한 시민을 떠나 대기업의 총수들에게 넘어가 굴복한 대중사회의 재생산방식의 총화가 되었다. 사유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자연으로 되돌려 진다. 왜냐하면 이성의 사용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려를 배제할 경우, 중립적인 이성은 개인 또는 집단의 상황에 따라 전쟁이나 평화, 관용이나 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목표에 대해 중립적인 이성은 계산과 계획의 기관이며 그것의 요소는 조종이다. 스포츠팀처럼 조직된 사회에서는 구성원에 대한 대체후부가 준비되어 있으며, 어떤 기능도 활용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시민적 실존의 세부사항까지 합리화시킨다. 실제적인 목표를 결여한 전체 삶의 조직화 장치들은 단순한 향략보다는 조직을 만들어 내려는 미친듯한 활동 자체가 목표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피안에서 구현될 수 있었던 조화와 완성을 근대시대의 계몽이 지상으로 끌어내려 체계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의 산물이 국민들을 조작하는 총체화된 국가인 것이다. 이성은 목적없는 합목적성이 되었으며, 이는 모든 목적 속에서 팽팽한 긴장을 일으키는 계획을 위해 고안된 계획인 것이다.

이성은 어떤 내용적인 목표도 설정하지 않으므로, 어떤 감정적인 끌림도 이성에서는 배제된다. 즉, 신화의 외부의 힘들과 마찬가지로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충동도 신 또는 악마적 근원을 가진 살아있는 힘인 반면, 계몽은 연관관계나 의미나 생명을 완전히 주관성 속에 밀어 넣는다. 그런데 주관성이란 이러한 환수과정속에서 비로서 구성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시민철학은 신화로부터 인간을 해방(자기유지)시켰으나 자기파괴로 나가게 된다. 왜냐하면 시민적 질서의 총체성이란 종극에 가서은 보편자와 특수자, 즉 사회의 자아 모두를 집어삼킬 공포임을 부곽시키기 때문이다. 상류층의 자기유지는 파시스트적인 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이며, 개인들의 자기유지는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불의에 순응하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이성의 비합리성은 현대의 실증주의와 유사하게 감정이나 종교나 예술을 인식이라 불릴만한 어떤 것으로부터도 고립시키려 든다. 비합리주의는 직접적인 삶을 위해 차거운 이성에 족쇄를 채우려 하지만 이로써 삶을 사상에 적대적인 원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성은 자신의 매력을 스스로 신뢰할 수 없으므로 감정숭배를 통한 보완을 필요로 한다. 이로써 감정은 이데올로기로 부상하지만 현실 속에서 감정이 겪는 경멸은 제거되지 않는다. 즉, 자연적 충동으로서의 자기유지에 요구되는 조직과 체계들만이 이성적이며 감정은 양념에 불과한 것이다.

예전의 모든 변화들, 즉 前애니미즘으로부터 주술로의, 모계문화로부터 부계문화로의, 노예적인 다신교로부터 카톨리적인 위계질서로의 모든 변화는 옛 신화를 새로운 계몽된 신화로, 위대한 어머니를 여호와로, 토템에 대한 경배를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로 대치시켰다. 예전의 모든 속박들은 터부시되었는데, 더 나아가 계몽은 시민계급이 지배체제로서 억압의 주체가 되자 이 계급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계몽의 반권위적인 경향은 계몽을 시민계급에게도 결국은 적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로써 계몽의 반권위적 원리는 궁극에 가서은 계몽 자신의 대립물로 변한다. 이러한 원칙이 초래하는 모든 선천적 구속들의 폐기는 지배자로 하여금 그때 그때 자신에에 유리한 구속들을 명령하고 조작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한다―이러한 왜곡에 대해 수수한 합리화가 어떤 실제적인 강점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형식화된 이론으로 침묵할 뿐이다―.인류애의 이름으로 권위와 위계질서가 미덕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사드나 니테의 작품에서 보이는데, 사드의 경우 실천이성에 대해 비타협적인 비판을 가하면서도 열정을 씻은 초연한 무감동(합리적 사고)을 강조한다. 즉 사드의 범죄집단은 문명 자체의 무기(합리적 사고)로 문명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류계급의 문화유산인 초연한 무감동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직면하여 닥치는 위협을 경감시킴으로써 보편성에 대한 방어를 하게된다. 이것이 시민계급의 사적 영역에 자리잡게 된다. 한편 줄리엣과 마찬가지로 니체는 과학적 증명 없이 저주받을 것을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로, 또한 증명없이 승인된 것들을 타기의 대상으로 변모시켜 가치의 전도, 금지된 것에의 용기를 제기함으로써 강자의 지배를 본래적인 것으로서 예찬한다. 강자의 정복과 약자의 굴복이 선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사드와 니체는 이성이 형식화된 이후 보편과 특수의 동일성에 대한 감각적인 느낌으로서, 또한 자연화된 매개로서 동정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알았다. 동정은 인류역사상 꾸준히 시민적 덕목이었던 남성적 유능함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억제되지 않는 그것의 폭발의 원천은 여성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사드와 니체는 동정이 죄라는 그들의 교리가 해묵은 시민적 유산임을 알았다.왜냐하면 동정심은 필수불가한 엄격함과 강인함을 무력하게 안드는 것, 즉 영웅들을 흐느끼게 만들어 여성처럼 행동하게 함으로써 국가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동정심은 그것의 실천이 예외적이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비인간성의 법칙을 확인하는 것, 즉 동정심이 완화시키고 싶어하는 보편적 소외의 법칙을 묵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는 피시스트도 범했다. 쇼펜하우에에게 있어서 인간성의 회복을 희망하는 것은 불행 밖에는 희망할 것이 없는 사람의 주제넘는 망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동정심의 적대자들은 인간을 불행과 동일시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불행의 존재자체가 모욕이었다. 그들은 절망적으로 힘을 찬양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 힘으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다.

이성의 형식화로 말미암아 모든 목표가 필연성이나 객관성의 성격을 상실하게 되자 불의, 증오, 그리고 파괴가 번창하게 된다. 지배는 경제적인 힘이라는 옷(잉여생산)으로 치장하지만 스스로가 목적이 되어 살아 남는다. 줄리엣은 범죄의 동기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 궁극목적은 향락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향락은 우상(미신)의 계기로서 다른 무엇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반면에 자연은 향락을 모르며 욕구를 채우는 것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향락은 사회적인 확고한 질서로부터 나온 것으로, 향락은 이 질서를 빠져나와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한다. 노동의 강압으로부터, 자아의 속박으로부터, 특정한 사회기능에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의 꿈이 지배없고 훈육없는 저 선사시대로 돌아갈 때 인간은 향락의 마술을 느낀다. 사유란 공포스러운 자연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이 자연은 마지막에는 사유에 의해 완전히 결박당하고 만다. 향락은 자연의 복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향락 속에서 인간은 사유로부터 면제되어 문명으로부터 탈출한다. 고대사회에서 그러한 귀환은 축제를 통해 집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여기서 사회질서는 탈선과 광기에 함몰당한다. 그러나 문명과 계몽이 증가함에 따라 강화된 지배는 향락을 합리적인 것으로, 즉 완전히 제압되지 못한 자연에 바치는 공물로서 용인한다. 즉 향락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는 피지배자들에게 약간의 숨통을 터주면서 향락은 조종의 대상이 되며 마침내는 향락산업에 완전히 흡수된다. 줄리엣은 향락에 반대하여 사랑의 정신적이고 낭만적인 부드러움을 변질되 성적 욕망으로 분해함으로써 최상의 행복 뿐 아니라 가까운 행복마저도 너무나 빈약하게 만드는 평범성에 떨어진다. 그런데 사랑 속에서는 인간의 신격화가 일어나는데, 이것이 본래의 인간 정열인 것이다. 연인에게 보내는 무한한 존경과 경탄 속에서 여성의 실제적인 예속성은 항상 새롭게 승화된다. 이러한 예속성의 승인을 토대로 양성은 이따금씩 다시 화해하는 것이다. 여성은 굴복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며 남성은 승리를 그녀에게 양보한다. 기독교를 통해 이성간의 위계질서, 즉 여성적인 성격에 비해 남성적인 소유질서를 우위에 놓았던 질곡은 결혼 속에서 마음의 결합으로 승화되었다. 이러한 결합은 이성간의 저 행복했던 前가부장적 과거를 아련히 상기시킨다. 그러나 거대 산업사회의 출현으로 사랑은 축출된다. 여기서 가정은 경제 주체의 지위를 상실하고, 기업가의 자율성을 직업여성을 포함한 모든 생산자들이 자신의 성격으로 만들려고 한다. 화해를 가능케 했던 결혼의 결과물인 가정은 취업의 확장으로 파탄에 빠진다. 이러한 화해의 파멸은 비단 근대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랑 속에서 여성을 숭고한 무엇으로 높이는 것은 기독교보다 앞선 모계 사회 단계에까지 소급된다. 사드는 기사도 정신을 무당으로서 예언자적 기능을 했던 여성들에 대해 선조들이 가졌던 경외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이 경외심이 숭배를 일으킨다. 따라서 기시도란 미신의 품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숭배나 사랑의 원리는 기독교 통치자들이 가진 정교한 오성이나 다른 더욱 정교한 무기들에 의해 부인된다. 예를 들어 루터주의는 정신적인 자유, 곧 약자인 여성에 대한 긍정을 현실적인 억압의 긍정과 직접적으로 동일시한다. 또한 기독교 시대에 있어 떨쳐 버릴 수 없는 여성에 대한 증오는 마돈나 숭배를 마녀 박해로 상쇄시키는 곳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신성한 가부장적 지배질서에 은밀히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드는 前기독교적 예언녀의 이미지에 대한 복수다. 이와 동일하게 계몽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자연의 마지막 잔재, 곧 여성을 굴복시켜야 한다. 그러나 여자를 짓밟는 순간에 나오는 강자의 쾌활한 웃음은 자연상태에 가깝다. 이러한 쾌락은 부드러움 보다는 잔혹함과 어울린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사랑을 이성에 대한 지독한 증오로 본다. 즉 성적 매력이란 그 본질에 있어 사디즘적인 것으로 고통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공포스러운 자연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해서 사물화된 세계에 있어 직접성(?)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사랑은 차겁게 식고 왜곡되어 사물로 전락한 인간들에게 나누어 진다. 여기서 비롯된 광기는 살아있는 한 극복이 불가능한 지배의 위력에 자신을 동화시킨다. 여기서의 상상력은 스스로 잔혹해짐으로써만 자신의 잔혹성을 견뎌낼 수 있다.

사유의 역사에서 부정은 매시기마다 미신의 기저를 이루는 경제현실이 붕괴되는 특수한 상황에 알맞는 힘을 행사한다. 신을 초인으로 대체시키고자 했던 니체의 시도는 신을 다시 구출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였다. 이것은 신적인 법칙을 자율성으로 변형시키려 했던 칸트의 계획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즉, 이들은 모두 외적인 힘으로부터의 독립, 즉 계몽의 본질로서 규정된 조건없는 성숙을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사드와 마찬가지로 니체는 온화한 진보주의지인 논리실증중의자들보다 더 철저히 합리성에 집착함으로써 시민사회와 지배 사이에 존재하는 뗄 수 없는 밀착관계(지배와 이성의 동일성)를 무자비하게 폭로한다. 또한 니체는 그가 그토록 증오했던 동정심을 부정함으로써 지배의 야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니체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온갖 위안과 보장에 의해 매일 매일 배반당하고 있다 할 때, 이러한 부정속에서 인간에 대한 흔들림없는 신뢰를 구제했던 것이다.

 

문화산업

 

문화산업은 기술적으로 설명된다. 문화산업은 상품처럼 수많은 장소에서 동일한 상품에 대한 동일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재생산과정이 요구되며, 수요가 산재해 있기 때문에 경영에 의한 조직화와 계획이 필요하게 된다. 이는 규격품이란 본래 소비의 욕구에서 나왔기 때문에 별 저항없이 받아들여 진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가려져 있는 것은 문화산업의 조종과 이러한 조종의 부메랑 효과인 수요가 만드는 순환고리로서 이러한 순환 고리 속에서 체계의 통일성은 사실 점점 촘촘해지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인 설명뒤에 은폐되어 있는 것은 기술이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할 수 있는 기반은 사회에 대한 경제적 강자의 지배력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기술적인 합리성이란 지배의 합리성 자체다. 이러한 합리성은 스스로로부터 소외된 사회가 갖게 된 강압적인 성격이다. 이런 성격이 강요하는 것은 조직과 경젱에서 필요로 하는 차이전략을 제외하고 질을 양의 법칙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종합매체가 꾀하는 예술의 융합(말과 형상, 음악의 일치)은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성공리에 실현된다. 왜냐하면 드러난 현실을 비판없이 반영하는 감각적 요소들은 원칙적으로 동일한 기술적 작업과정 속에서 생산되며 이러한 작업과정의 통일성은 곧 사회현실의 본질, 곧 투자된 자본의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도식이 감각적인 다양성을 근본개념과 연과지을 수 있는 능력을 주체에게서 기대했다면 산업은 주체로부터 그러한 능력을 빼앗아간다. 따라서 소비자가 직접 분류할 것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다. 생산자들이 그러한 분류를 다 끝내 놓았다. 그들이 내놓는 오락물의 내용들은 겉보기에는 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변화없는 반복일 뿐이다. 내용물의 세부사항들의 존재이유란 그들이 오직 전체틀을 유지하기 위한 구성부분이 됨으로써 그 틀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의 반성능력의 상실은 영화에서 역력하다. 유성영화는, 관람자가 줄거리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사건의 흐름에서 자유롭게 빠져나와 이런저런 상상과 반성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좋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제물들로 하여금 영화를 현실과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도로 유도한다. 즉, 문화상품의 속성은, 제작물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민첩성과 관찰력과 상당한 사전 지식을 요구하지만 관객으로하여금―재빨리 스쳐지나가는 사실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불가능하도록 만든다는 데 있다. 이러한 영화나 유흥들로부터 이미 관중들은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으며 그들은 그것에 대해 자동적으로 반응한다. 이렇게 여가시간까지 소비를 노리는 문화산업은 하자없는 규격품들을 만들듯이 인간들을 재생산하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전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것조차 기계적으로 복제가능한 틀 속에 천편일률적으로 끼워 넣는 능력은 소재들를 검토하는 치밀성에 있어 이전의 어떤 시도보다도 앞선다. 기존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새로운 효과를 창출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압력으로 인해 관습의 힘은 증가된다. 이를 통해서 문화산업의 최종생산물과 일상적 현실의 치이에서 오는 긴장을 완화시키는 기술이 완벽해 질수록 문화산업의 영향은 점점 더 절대적이 된다. 이것은 자연의 패러디일 뿐이다. 이러한 양식이 지니는 보편적인 구속력은 다루기 힘든 소재에 대해서는 더이상 실험해 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보편과 특수의 화해, 또는 대상의 특수한 요구가 규칙과 화해하는 것은 극단간의 긴장이 더이상 문제되지 않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다. 서로 접촉하고 있는 극단들은 음울한 동일성이 되어버렸다. 보편자가 특수자를 대체할 수 있으며 逆도 가능하다.

문화산업을 통해 진정한 양식이라는 관념은 지배의 심미적인 등가물임이 드러난다. 양식을 단순한 심미적 법칙성으로 보는 관념은 과거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인 것이다. 기독교적인 중세에서나 르네상스에서도 통일적인 양식이란 그때 그때 상이한 사회적 힘의 구조를 표현하는 것이지 보편성이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피지배자의 어두운 경험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예술가들이란 결코 매끈하고 완전한 양식을 구현한 사람들이 아니라 카오스적인 고통의 표현에 대항하기 위한 강인함으로서, 즉 양식을 부정적인 진리로서 작품속에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러한 작품들의 양식은 표현된 것에 그 어떤 힘을 부여하는데 이러한 힘이 없다면 삶은 아무 소리도 못내고 죽음 속으로 흘러들어가 버렸을 것이다. 모든 예술작품에서 양식이란 하나의 약속이다. 어떤 표현이 양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진정한 보편성과 화해하려는 희망 속에서 지배적인 보편성의 형식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양식 속에 침전되는 전통과의 대결말고는 달리 고통을 위한 표현을 발견할 길이 예술에는 없다. 예술작품에서 현실을 넘어서는 요소를 양식으로부터 분리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양식이란 실제로 실현된 조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양식은 내용과 형식, 안과 밖, 개인과 사회의 조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화가 있는 곳 또는 동일성을 향한 열정적인 노력이 어쩔 수 없이 좌절하는 곳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작품의 양식이 옛날부터 자기부정에 까지 이르는 좌절에 스스로를 노출시킨다면 열등한 예술작품은 동일성에 대한 대용물로서 다른 작품과의 유사성에 매달린다. 문화산업에 오면 이러한 모방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양식을 넘어서는 무엇이 되려는 노력은 포기하면서 문화산업이 폭로하는 양식의 비밀은 사회적인 위계질서에 대한 순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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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벨롱겐의 노래

책들 Bücher 2019. 3. 17. 19:0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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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공부를 띄엄띄엄 오래 했지만 도대체 실용적인 방식으로 빠르게 익히고 듣기 위주의  학습을 위해 두번째로 다락원의 대역문고를 샀다. 잘 팔리지가 않으니 최근의 이 시리즈는 5편 밖에 없다. 근 20년 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첫번째로 산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깨어진 항아리>는 두달간의 출퇴근 차량에서 약 30 시간 이상은 들은 터라 건너 뛸 때가 되긴 했다. 비록 아직 문장을 읽지 않고서는 들리지 않는 문구가 있기 하지만.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시기 이래 구전으로 전해져 오던 영웅들의 이야기가 1200년 경 서사시로  집대성된 이야기 중 하나인  <니벨롱겐의 반지>는 네덜란드의 왕 지그프리트의 죽음과 이에 대한 크림힐트의 복수로 세우진 두 축으로 구성된다.  서사시의 문장틀을 A2 수준의 어학학습에 맞도록 뜯어 고친 프란츠 슈페히트의 편집본으로 아마도 독일에서 초등 졸업생 정도의 어학 실력으로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단계다.  동화책 정도도 읽고 듣고 쓸 수 없는 수준이라면 철학책은 오죽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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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포도주

책들 Bücher 2019. 2. 4. 08:4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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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한테 받은 노트북의 무선설정을 한달 내내 방치하다가 이제야 했다. 평일은 어렵더라도, 주말에 틈틈히 쓰는 글에 집중하고자 인터넷 사용을 제한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아무래도 불편했다. 앞으로의 미래는 신체에 이식된 스마트폰을 통해 모든 것과 연결되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불안해 보이지만, 열고 닫는 것은 사람의 선택일 뿐이다.

이냐치오 실로네의 <빵과 포도주>를 읽고 있다. 그렇고 그렇게 익숙한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의 반파시스트 사회주의 지하운동조직의 이야기지만, 신부로 숨어들어간 설정은 재미있다. 책 자체의 내용은 가볍지 않지만 이런 설정 자체가 내용의 무거움을 반감시켜 준다. 웃기기 위해서 울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웃음은 진정성을 회전시키는 윤활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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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성과 변화

책들 Bücher 2018. 11. 12. 12:5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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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변화가 생기면서 한달 넘게 마음을 못잡고 있다가 이제 조금 안정화되어 가는 중에 예전에 영화로 본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The Reader 를 읽고 있다. 영화에서 다 재현되지 못한 부분을 읽는 것이 색다른 맛인데, 그중에서도 나치 수용소와 더불어 전쟁범죄를 다루는 재판장에서도 이 범죄에 대한 어떤 마비증세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관성의 힘을 확인하게 된다. 지멘스에서 일하다 부족한 수용소 감시인력의 채용공고를 보고 나찌에 부역한 한나에게 재판장은 나약한 여성인력을 아우슈비츠로 차출하면서 그들을 죽음의 가스실로 보내는 것을 알지 못했느냐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 한나는 밀려들어오고 밀어내야 하는 인력을 관리하던 자신의 입장에 당신이 서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 재판장이 한나에게 그녀가 지멘스에서 계속 일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없었겠냐고 반문한 것은 관성의 기계적 반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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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유에선지 여행기는 잘 읽지 않는 편이지만,  스페인 남부지역(카스티야, 안달루샤, 발렌시아) 여행에 관한 페데리코의 이 책은 선뜻 외면하지 않게 하는 어떤 매력이 있다. 제목 그대로 여행지의 인상과 풍경을 그리면서도 그 지역의 특이한 이력을 세밀하진 않더라도 여행자의 느낌으로 역시 풍경화시키는 것은 어쩌면 여행기라는 장르가 응당 취해야 할 내용이지만 진부하진 않다. 현재의 모습 속에 과거의 기억을 상연시키는 방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행기라는 것을 쓰려면 여행 전에 여행지에 관한 온갖 이야기들을 마치 짐처럼 내면에 차곡차곡 꾸려야 한다. 작가가 이런 준비를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작가로선 국내 여행이기에 굳이 이런 필요까지 없을지도 모른다-오래된 유적을 안내하는 이들이 그런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이슬람 침략자들에게 대적하기 위한 요새로 세워진 성전이 수도원으로 헌납된 곳에선 중세 엘시드의 무훈담과 수도사의 성가가 혼재되어 있다. 도미니크, 베네딕토와 같은 고색창연한 수도원의 전통이 유럽과 이슬람의 궁전과 결부된 스페인은 터키와 유사한 지정학적 운명을 보인다. 유럽 끝머리의 거대한 땅은 좁은 해협을 통해 아프리카의 열풍이 유럽으로 몰아치는 너른 길목이었다.

같이 움직이는 동행들과의 일정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여행이지만 작가는 오로지 자신의 인상에 집중한다. 마치 자신이 세상에 남기는 유일한 저서가 바로 이 책이라는 것을 암시라도 하듯이.   

Aus irgendeinem Grund werden Reiseberichte selten gelesen, aber Federicos Buch über Reisen in Südspanien(Kastilien, Andalusien und Valencia) hat einen Charme, der mich sicherlich nicht fernhalten wird. Wie der Titel zeichnet der Künstler Eindrücke und Landschaften von Reisenzielen, aber auch Landschaften mit den Gefülen des Reisenden, auch wenn die Datails der einzigartigen Geschichte der Region nicht detailliert sind. Dies ist wahrscheinlich etwas, das das Genre des Reisenliteratur annehmen sollte, aber es ist nicht banal. Es sollte gesagt werden, dass dies eine Möglichkeit ist, Erinnerungen an die Vergangenheit in der Gegenwart zu präsentie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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