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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서 원전 밀집도가 가장 높은 국가, 도호쿠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 붕괴 사고가 일어났을 때 원전 수출의 호재를 외칠 정도로 콘크리트로 대갈통을 꽉 채운 당국자들이 에너지 정책을 몰아붙이는 후안무치의 국가, 이런 자들에게 정권을 이어준 대다수 국민들은 먹을거리의 안정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지만 그들의 생활을 이어주는 에너지원의 위험성과 불평등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 멀리 부산 기장군에서 사망유예를 위해 긴급 수혈 2000억이 요구되는 고리 원전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울산의 신고리 원전에서 뽑아낼 전기를 송출하기 위한 한전의 밀양 송전탑 건설에 목숨을 던지며 10년간 투쟁한 노인들의 존재를 그들은 보상요구로만 보는 걸까? 사리에 분명한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천만 수도권 인구와 산업이 돌아가려면 햇빛만 가지고 되겠냐? 더군다나 원전들은 모두 수도권에서 300km 이상 떨어져 있으니 만약의 사고가 일어난다 해도 크게 상관없는 일 아니냐? 내일은 생각않고 오늘 잘 처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이라도 좋다는 논리와 다름 없다. 그렇다. 한국에서는 지금만을 생각하는 유령이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오늘 마시고 죽자는. 그러나 어른들에게 무감각한 핵재앙이 초등생들에게서 민감한 반응이 나오는 점은 세대 격차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준다. 삶은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며, 삶의 지속성이 담보되어야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삶이 있다. 파괴된 강토를 물려줄 수 밖에 없는 선대는 후대에게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미래세대가 온전히 사용할 강토를 강탈한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가동중인 원전 자체의 위험과 원전 폐기물의 초역사적 잔존의 위험을 안겨주지 않는 것은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의가 온전히 구현되지 않는다면, 세대간 전쟁이 필요하다. 자, 초등생들이여 일어나 단결하라! 보관중인 비비탄 총기와 플라스틱 도끼를 들고  거리로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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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또 다른 어려움

주장 Behauptung 2012. 4. 10. 22:5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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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로 읽는 책이 박경리의 『토지』인데, 아무래도 도서관에서 이 긴 소설을 대출해  있다 보니 중간 중간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발생한다. 거의 한 주에 1권 이상은 읽는 셈이지만, 2권을 2주 안에 읽는다는 건 자기 나름의 준칙을 지키지 못한다면, 대출한도가 2주에 그치는 실정상 안정스럽게 1권만 빌리면서 읽는게 편하다. 하지만 준칙을 개떡같이 알다보니 중간 중간 텀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런 텀이 여유처럼 느껴진다. 내일은 19대 선거일..이 소설을 읽다가 생각난 건데, 동족상쟁의 한국전쟁은 제 힘으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이 백성이 겪을 수 밖에 없던 대가, 씨바 500년 400년 묵은 대가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여파는 이 시점까지 미치고 있다. 박근혜가 날 뛰는 형국은 더욱 그렀다. 아버지의 유훈 정치인가? 백성을 발라 먹으려면 적색도  섞을 줄 알아야 한다는 꼼수를 깨친지 오래일 거다.  그래도 아니잖아. MB 실정이 못마땅했으면 침묵하지 말고 나왔어야지. 평상시에는 여느 때처럼 공주 행세 했으면서 왜 선거 때에 잔 다르크 행세냐? 그게 폼 나는 줄은 아는구나..기집애.. 솔직하자. 지지 정당은 없지만, 너네는 안되지 않겠니..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씨바. 너희 놈들한테  백성은 노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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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당

주장 Behauptung 2012. 2. 24. 10:0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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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당에 기여한 바도 없어 탈당이니 뭐니 할 건덕지는 없는 일이긴 하다. 오늘 주소지 이동 때문에 당사무국에 변경 신청을 하려다 탈당을 결심했다. 뭐랄까. 그냥 물타기로 어물쩍 진보신당에 올라타기 보다는 그래도 내가 결단을 하고 싶은, 선택의 몫을 남겨 두고 싶은것 같다. 아래는 당원 발언대에 올린 탈당계.

안녕하세요

2002년에 사회당에 입당했지만 유령당원으로 있어왔던 사람입니다. 이번의 통합과정을 관심있게 지켜 보았으며, 어떤 기대도 있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듭니다. 지금으로서는 제 개인적인 소신에 따라 진보신당의 입당여부를 결정하고 싶습니다. 

탈당처리 바랍니다.

OOO 드림

탈당계를 올리고 얼마 후 친구의  댓글이 올라오고, 조금 전엔 이번 통합과정의 논란을 주도한 O형의 전화가 왔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당적이 인간을 갈라놓을 수 없는 일이니 너무 섭섭해할 건 없다. 아래글은 당게에 한 번 더 올린 글.  

그냥 메일로 탈당계를 보내면 그만일 일을 공개적으로 올린 이상, 저의 탈당에 대해 응답을 해주신 세 분께 그래도 책임있는 답변을 하는 것이 도리라고 보며 탈당을 둘러싼 몇 가지 생각을 풀어보려 했는데 글쓰기가 여의치 않습니다. 집단과 개인 사이의, 그 화해하기 힘든  지점들에서 생각의 구름이 준령을 넘지 못하고 걸려 있는듯 합니다. 사회당의 외부에서 관찰자적 입장에 있었지만서도,  성격이 상이한 조직에 묶여 있는 한 명의 생활인으로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조직의 관성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부분들과 최근 통합의 과정에서 정치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당과 다양한 의사를 지닌 당원의 그 통약불가능한 괴리가 겹쳐지면서 사회당에 대해서만큼은 더 높은 잣대의 이해력과 수용력의 요구가 탈당이라는, 당원으로서의 최후 파업에 이르도록 했습니다. 집단의 이해와 개인의 이해는 합치될 수 없으며, 공동의 꿈을 꾸고 있다고 연출될 수 있을 뿐인데, 이 연출이 폭로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집단이 개인을 배반할 수도 있지만 개인이 집단을 배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배반은 권력을 가진 쪽에서 권력이 없는 쪽을 버리는 일입니다. 지금까지의 사회당에 대해 권력 운운의 얘기가 가당치 않은 일인지 모르지만, 이제 사회당은 어쩔 수 없이 권력관계망에 들어설 수 밖에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싸움과 즐거운 축제가 어우러진 앞날이 그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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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 나올줄 알았다. 60년 이상 휴전 중이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생산된 총알의 사용 시점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군수업자들의 눈들이 다시 한반도에 집중하는가? 전쟁책동을 서슴치 않는 이런 언론이 한국의 이른바 주류다.   

"오산·수원의 지휘관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육·해·공 합동으로 3일 내에 북한 장사정포의 최소 70%를 파괴하는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만약 북한이 도발해도 국민이 3일 만 참아주면 북한의 핵심 목표를 폭격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말했다...최종적으로는 국가가 ‘제한적 무력응징’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압박으로도 북한에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하더라도 국가가 무력응징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게 되어야 한다. 행여 사회 일각에 스며들어 있는 패배주의 때문에 못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전쟁을 결심할 수 있어야 전쟁을 피할 수 있다."[2010.05.23,20:02분 중앙일보 사설칼럼, 작성자 : 김진]

군비상승의 억제력으로 전쟁을 막는다는 논리를 넘어서 군사위협으로 북한을 궁지에 몰겠다는 논리다. 원인규명이 석연치 않은 천안함 사건을 놓고 내일 있을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전에 군사적 응징을 주문하는 이런 주장은 단지 지방선거만을 겨냥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단지 선거 때문에 수도권 1,000만 명의 목숨을 생사의 기로에 내놓을 수 있는가? 행여나 미국의 물리력을 믿고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리고 국민들이 '잘 참아준다'고 해도 쉽게 끝날 수 있을까? 두 세계 강국 앞에 전장을 제공하는 역할 외에 한반도의 실익은 무엇이겠는가?  한반도가 무슨 워털루 정도의 들판인가? 인민이 방향없는 총탄에 갈가리 찢어 죽더라도, 전쟁을 외치는 자들은 전쟁의 참화 밖에서 괴뢰정권의 창출만 모색하는 비탄의 역사를 또 반복하겠다는 건가? 또다시 한반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전쟁책동을 중단하라!    

전문 참조 : http://news.joins.com/article/806/4190806.html?ctg=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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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문제에 대한 한가지 방안

주장 Behauptung 2009. 12. 21. 17:3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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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제기되는 번역에 대한 볼멘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린다. 오역을 정당화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옮겨주는 자의 수고없이 원문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다만 그 부실을 최소화하려는 열의와 결백을 바랄 뿐이다. 

어제부터 김병익이 번역한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보고 있는데 억지스러운 한자어 번역이 눈에 띈다. Big Brother를 대형(大兄)으로, INGSOC(Englnad Socialism)을 영사(영국 사회주의)로 옮기는 번역엔 창의성은 없지만 사기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제대로 된 한국말을 창안할 수 없다면 이런 불편한 번역이 오히려 안전한 것이다. 더욱 안전을 기하려고 한다면, 대역문고처럼 역문과 원문을 일일히 대조한 책을 출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어느 정도 해당언어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바로 일일히 대조할 수 있도록 한다면, 제멋대로 의역하거나 적당히 무지를 감추는 행태는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이라는 사실에 기반해 번역이라는 상상이 활개를 치면서도 비약하지 않는 적정선을 지키는 것, 그것은 원문대조 방식의 출판에서 기대할 수 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전자북이 보편화된다면 더욱 손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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