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서술 Beschreibung'에 해당되는 글 26건

  1. 2007.05.09 소격서 논란에서 드러난 힘의 충돌
반응형


중종 13년, 이미 그 전에 성리학에 기반한 실행으로 조정에서 인정받아 단계를 뛰어넘어 승진을 하던 조광조는 태조 때 부터 내려오던 미신적 제의, 즉 왕실에서 초제나 기우제 등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관청인 소격서를 혁파할 것을 주장한다. 이런 제의는 도교적 이단으로서 성리학의 이념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조광조에게도 중종에게도 이 소격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이 문제는 중종과 조광조 간의 힘의 대결로 귀결되고 만다. 소격서 혁파 주장은 조선 초기부터 줄곧 제기된 주장이라 새로울 게 없는 일이지만 조광조는 이 소격서 폐지여부가 앞으로 자신이 행사할 정치적 영향력을 어떠한 타협이나 절충도 없이 관철하기 위한 포석으로 여겨 끈질지게 밀어 붙인다. 결국 조광조를 따르던 대간들이 사직을 불사하며 왕에게 압박을 가하고, 삼정승도 이들에 동조함에 따라 중종은 소격서를 폐지할 수 밖에 없었지만, 1년 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실각되고나자 중종은 소격소를 다시 부활시킨다.

중종은 조광조를 등용함으로써,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자신에게 부담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는 반정공신들을 제어할 수 있었지만, 소격서 논쟁으로 왕의 권위를 궁지에 몰아 세우며 밀어붙이는 조광조를 결코 곱게 볼 수는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소격서 따위는 별 문제거리가 아니며, 당시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이를 문제삼는 것은 꼰꼰한 유생의 불필요한 집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정략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발판이라면, 결코 경시할 수 없다. 사실 조광조가 성리학적 이념에 부합한 정치를 구현한다는 것도 공자에 의해 윤색된 먼 상고시대의 통치를 이상화해 신하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즉 소격서 논란에서 조광조의 내면을 압박한 것은 원리주의적 유생의 양심이라기 보다는 왕의 권위에 일격을 가하려는 모험주의적 정략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고속승진을 하다가 36살의 나이에 사약을 받은 젊은 정암은 정치가로서는 실패했지만 그 실패 때문에 조선 성리학의 계보(정몽주-길재-김굉필-조광조)를 잊는 성현으로 추대되어, 남명과 같은 사림들의 숭배를 받게 된 것이다. 즉 정치가로서의 그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로서의 그를 기리는 것이다.    

참고문헌 : 정두희, '조광조'(아카넷, 2000)

2007/03/22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