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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Literatur'에 해당되는 글 100건

  1. 2009.03.27 실정법의 거부
  2. 2009.03.14 형이상학의 처지
  3. 2009.03.12 전여사의 증상
  4. 2008.12.22 집문제
  5. 2007.04.11 금강경에 관해

실정법의 거부

문학 Literatur 2009. 3. 27. 14:1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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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면...어떻게 저항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정말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 봅시다...우리의 저항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제국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물질적으로 불가능하도록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군인은 전투를 거부해야 하고, 예비군은 복무하기를 거부해야 하고, 노동자는 무기를 배나 항공기에 선적하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룬다티 로이, <9월이여,오라> 중

로이가 제시한 이러한 행동지침은 작년 촛불집회 때 나온 여러 행동강령을 연상시킨다. 조선일보에 광고를 내는 광고주 불매운동, 미쇠고기 운송 차량 저지, 한 의경의 양심고백..결국 보잘것 없는 초라한 패분만 남았지만, 도대체 이렇게도 하지 않고 어떻게 이 반이성적인 정권과 세계화의 패권에 맞설 수 있나? 실정법은 인민의 의사가 주체적으로 반영되어 만들어진 법이 아니라, 특수 맥락에서 정초되어 인민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진 법이다. 이것이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과정에 대해  정작 그 법의 적용을 받아야 하는 이들은 소외되어 있다. 한 개인의 거친 양심과, 이에 대한 공감과 집단적 실천이 반란을 혁명으로 이끌어 올린다. 부당한 법의 행사를 거부한 이들을 종국적으로 철창에 보내려 한다면, 집단적으로 10만의 인민이 동시에 이 법의 행사를 거부해 버리면 법은 무력화된다. 연 30만명에 이르는 입대자 중의 1/3이 집총거부를 한다면, 이들을 과연 영창으로 보낼수 있을까? 법이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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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의 처지

문학 Literatur 2009. 3. 14. 23:4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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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진행중에 있는 <순수이성비판> 독해를 이중으로 다시 시작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 2/3정도 나간 독해를 그대로 진행하면서 처음부터 다시 읽는 것이다. 번역본으로만 본다면 순서대로 죽 나가는게 좋지만 원서를 중심으로 읽으려 하다보니 속도가 더뎌 이런 방법을 쓴다.  서론, 선험적 분석론(요소론과 변증론), 선험적 방법론의 논의가 너무도 복잡스러워서 삼중 사중의 독해로 파고 들어가는 방법도 괜찮을 것 같다. 마치 철벽의 요새를 사방에서 공격하는 것처럼.

머릿말에서 당대 형이상학의 격추된 위상을 말하면서 칸트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중 트로이왕의 아내 헤쿠바(Hecuba)를 인용한다. 그러고 보면 <순수이성비판>도 마르크스의 <자본 : 정치경제학비판>처럼 건조한 서술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modo maxima rerum, tot generis natisque potens-nunc trahor exul, inops. - Ovid. Metam.

eben noch die Allerhöchste, mächtig durch so viel Schwiegersöhne und Kinder...werde ich jetzt, verstoßen und hilflos, hinweggeführt. - Übersetzung des Herausgebers.

그래도 한때는 많은 사위들과 손주들 덕에 최고의 지위에서 권력을 누렸는데, 이제 버림받고 의지할 데 없이 이리 저리 끌려다니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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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사의 증상

문학 Literatur 2009. 3. 12. 13:3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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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에 전여옥 의원의 증상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의사의 진단이 있었다고 하는데...

 "전 의원은 폭행으로 인해 경추염좌(목이 삔거고)

몸 전체 다발성 찰과상,(몸 전체가 긁혔다는거고)

두뇌타박상, 뇌진탕(이건 의사소견상 나타나는 증상일 수 있지만 이 사람의 평상시

행동을 참고해 보면 선천적인 질병일 수도 있지 않은가 보고요)

왼쪽 눈 각막 손상(눈 비비다가도 각막손상은 흔히 됩니다)..."

다른 건 몰라도 경추염좌는 유독 기억납니다. 경추염좌..교통사고 중 뒤차로부터 추돌당했을 때 흔히 나오는 진단..나도 이거 2번 받았는데 피곤하면 가끔 목이 뻐근해 지는게 그때의 충격이 되돌아오는 느낌..나이들어 그런 것일 수도 있겠고..업무의 피로와 짜증이 머리를 압박하는데서 오는 현상일 수도 있고..생각의 무게를 떠받치는 목뼈의 노고일 수도 있겠고,,그런데 전여사는 가벼운 몸싸움을 몸소 하고서 온갖 합병증세를 보이니..오버 구라 캡숑 우리 전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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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문제

문학 Literatur 2008. 12. 22. 08:3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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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자 경향신문에 건설-부동산 관리를 하는 데이비스랭드앤씨아의 대표 이문수 씨의 인터뷰가 실렸다. 요지는 현재 건설사가 독점하다시피 도맡은 기획,개발,건축,시공,감리,시행의 전과정을 각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분담해서 맡는 전환이  필요하며, 주택사업은 고급화와 범용화가 병행되야 한다는 것이다. 범용화란 선진국처럼 주택을 이용하는 대다수 계층의 부담을 완화시키도록 공공임대주택사업을 확장하는 것이다. 최소 30%인 선진국의 공공임대주택 비율에 비해 한국은 고작 2%만이 공공임대주택이며, 하물며 이런 미미한 임대주택에 대해선 편협한 시각이 강해 기피대상으로 낙인된다. 고급화란 돈많은 건축주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건축물의 실용도 뿐만 아니라 설계자의 미학적 감각도 활용해 건축물을 그냥 건물이 아니라 작품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건설사업을 더많은 이익을 내는 투기적 목적으로 내달렸던 건설사의 시대를 접고 그야말로 공공성과 실용성, 예술성을 갖춘 사업으로 변모시키자는 얘기인데, 어떻게 보면 극단의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관점으로도 보이지만,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의 바탕인 집문제의 해결없이 고급스러움만을 쫒는 건축은 마치 모래밭에 쌓은 구조물과 마찬가지로 아찔한 것이다.  100만채의 집이 남아도는데 841만명이 무주택자라는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택시장의 왜곡과 과잉 뿐만 아니라 수도권 집중현상도 살펴 봐야 한다.

예전에 어느 대기업 건설사의 광고에 이런 것이 있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값비싼 아파트에서 사는 이들의 자부심을 높여주는 문구지만, 집없는 사람들도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는 문구로 변경은 안되는가? 한쪽에서는 휘황찬란한 주택이 하늘로 솟구치고, 이것을 침흘리며 바라보는 홈리스들이 시궁창같은 주거지로 몰리는 한, 이들에게 한국은 시궁창같은 국가이면서 '너희들의 국가'이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자유란 악마의 선물이며, 그런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범죄다. 어떤 사회의 현재 상태가 소위 이상적인 '문명사회'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알고 싶다면, 사회의 약자들이 어떤 처지인가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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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 관해

문학 Literatur 2007. 4. 11. 10:0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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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점없는 노선

   테오 앙겔플로스의 『율리시즈의 시선』은 사건진행틀을 호머의 『오디세이』에서 빌려 왔으나 완전한 귀향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에필로그를 달리한다. 물론 이것은 이 영화의 형식과 관련된 필자의 해석이지만 감독의 생각은 도의적 귀향의식을 지향한다고 본다. 즉 발칸반도 일대의 정의(justice)가 도륙당하는 현장에 주인공인 하비 키이텔이 오직 세계 최초의 시선(필름)을 찾기 위해 뛰어들어, 이 필름과는 상관없이 일어나게 된 일종의 서정적 다짐 내지 선(善)에의 의지를 에필로그에 흘린 점에서 세계사의 혼란에 초연히 방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미지 창출을 천직으로 하는 앙겔플로스같은 영화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보다 더욱 무겁고 진지한 시도는 타르코프스키가 이미 시적인 정서로 스크린에 담아 냈다. 히틀러가 전인민에게 빵을 분배하겠다는 편집증적인 일념으로 자신의 책임의식을 광기어린 철십자상에 쏟아 붓듯이 예술가는 정의의 복권을 위해 자신의 광기를 활용하겠다는 것인가. 물론 이 둘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비약이다. 그러나 남을 위한 다고 절실히 자각하고 실천하는 행위가 위선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배제한다면 윤리적 각오가 깃든 광기를 히틀러의 그것과 견주는 것이 황당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마음의 처소를 찾아 헤매는 혜가(慧可)를 달래주는 달마(達磨)대사는 마음을 소급불가능한 것, 곧 그 움직임의 방향은 물론 위치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본다(오진탁, 26). 이런 점에서 볼 때 누가 자신의 마음을 지배한다고 할 것이며 이에 더 나아가 자신의 도덕의식이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성인(聖人)의 덕성조차 일종의 〈울분〉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를 들어 세속적 욕망을 차단시킨다는 목표아래 심신순결훈련으로 혼탕에 들어간 남녀 제자들 중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여성에게 단발령을 내린 간디의 시도를 Erik  H. Erikson은 〈도덕적 잔혹성〉을 벗어나지 못한, 육체에 대한 미련의 잔영으로 본다(김우창, 287). 물론 그러한 세계사적 개인에 대한 정신분석학자의 날카로운 지적은 소아병적 발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각고한 노력으로 보편적 의도를 실행한 세계사적 위인이 자신의 목적에 다다르면 무용지물이 되고마는 결과는 위대함과 특출남을 혐오하는 시기심 많은 사람들과의 화해점이기 때문이다(헤겔, 92). 이런 점에서 인문학의 특성은 양날도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반성의 예리함이 타자는 물론 자신에게도 향해 있으므로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無住를 위한 훈련에 부합될 것이다. 無住에의 집착, 곧 반성을 목적으로한 반성, 의심을 위한 의심, 반대를 위한 반대는 경계의 대상이겠지만.
   만인을 보살피겠다는 도덕가의 만용은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돌보겠다는 보살의 고뇌에 다름아니다. 『금강경』에 따르면 이러한 보시욕(布施慾)은 자기라는 망상의 흔적(我相)과 타자라는 망상의 흔적(人相)이 남아있어 "자기가 없으면 다른 사람도 있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없으면 중생 세계가 자연히 적멸해질 것"(오진탁, 35)을 모르는 무지의 소산이다. 필자는 無我를 불교적 맥락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조명해 본다면 타자에 대한 관심과 '나' 자체의 타자성에 대한 탐구로 볼 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한다. 그런데 타자에 대한 관심의 단서를 '나'에 대한 관심, 곧 '나'의 타자성, '나'의 대상화에서 찾는 것이 그 역의 방법보다 비교적 수월함은 아테네의 광장에서 자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젊은이들에게 호소하는 소크라테스의 외침*이나 일종의 주체철학인 유학의 修身모델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또 맑스주의와는 달리 투쟁에서 주체를 실체화하는 것에 반대하여 주체의 부재를 상정하면서도 개인(individuals)을 처음이자 마지막 구성요소로 중시할 뿐만 아니라 미시개체(sub-individuals)마저 포괄하는 푸코의 말(Foucault, 208)은 '나'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하나의 시도로 생각된다. 

  앎의 훈련, 곧 〈진리놀이〉를 통해 〈자기 자신의 변형〉을 〈시험〉하는 푸코는 성의 역사라는 실증적 작업을 통해 자신의 문제틀을 경험적으로 고찰해 보려는 '미완성 교향곡'을 남긴 것이다(푸코, 23). 이러한 작업은 나를 통해 남을 이해한다는 소박한 忠恕 개념이 지닌 의도성으로부터 자유롭다. 자유로운 대신 의미의 담지가 고정적일 수 없는 지식의 팽창적 가지치기가 무의미하고 무계획적인 혼돈의 분화(分化·噴火)라고만은 할 수 없다. 비록 一以貫之**라는 화끈한 성인의 경지는 이제는 이상적인 꿈에 불과하나 예술작품에서 나타나는 이질적인 일관성(김우창, 295)은 一以貫之의 지양된 해석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바흐의 셀 수 없는 작품을 바흐의 것으로 들리게 하는 심미적 지향성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미학의 방법론이 도덕이나 지식영역, 더 나아가 사회체제에 순수히 형식상으로나마 파급될 수 있을 지에 대한 기대는 말그대로 추상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군자의 성정(性情)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詩經』을 편찬한 공자의 이상, 즉 고대 중국의 〈카오스〉와 같은 〈대륙적 상황〉에서 원활한 통치를 위해 요구되는 〈직관적, 시적 능력〉(정재성, 30)은 현대에의 적용가능성에 있어서 희박한 것은 둘째치고 대중기만을 위한 선동 내지 고도의 지배기술인 〈문화산업〉의 전략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판단만으로 증식하는 현상들의 다차성을 수용할 수 없다. 전체화되면서 개별화되는, 미분화되면서 분화되어가는, 자기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이미 자기 것이 아닌 '나'의 타자, 솜씨 좋은 채찍질로 몰 수 있는 욕망이면서도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 모든 것이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의미성의 농락(籠絡). 그렇게 우리는 표류하고 있고 노선은 뒤엉켜 있다. 갈 수 없는 고향***이기에 고향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인가?   
참고문헌
오진탁 편,『감산의 금강경 풀이』(서울 : 서광사 1992).
김우창, "문학과 철학 사이에서 : 데까르뜨적 양식에 대하여,"『철학과 현실』?호, p.287.
헤겔, 『역사철학강의』(서울 : 삼성 1993), 김종호 역.
Michel Foucault, Power/Knowledge : Selected Interviews and Other Writing 1972-1977, edit., tran. Colin Gordon(New York : Patheon Books 1980).
미셀 푸코, 『성의 역사』2권(나남 1991), 문경자 역.
정재서, 『동양적인 것의 슬픔』(살림 1996).
주)
*비약하면 전통적인 서양철학, 특히 근대에 있어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이 주체모델이라 할 수    있으며,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들춰낸 것 조차도 크게는 주체철학의 확대라고 볼 수도 있다. 왜    냐하면 이전에 의식의 너머에 묻혀 있던 무의식이 부분적이나마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무의식을 걸러내는 의식철학의 그믈망이 좁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論語 衛靈公 第十五.
***갈 수 없는 고향   
    저  멀리 저 산 마루에  해 가 걸 리면
    쓸   쓸 한 내 맘에도  노 을이 지네

    물  결 따라 출 렁이는 그 리운 얼굴
    어   두 운 강 내음이 내 맘을 적 시네
 
    갈 수  없 는 그리운  그리운  내고 향
    나는  가고 싶지만
    내 가  갈수 가 없네

199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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