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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17.02.07 두 권의 책
  2. 2017.01.09 근현대 러시아 단편선1
  3. 2011.01.16 음악의 전염성 : 크로이체르 소나타
  4. 2011.01.14 러시아 문학

두 권의 책

책들 Bücher 2017. 2. 7. 06:5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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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우연찮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역사적 배경이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라는 것을 알고 이 책을 보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생겼다. 마치 달의 후면을 볼 수 있는 듯한 관심의 발동이라고 느낀 것은, 러시아 인민의 관점에서 이 전쟁을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인데, 전쟁의 역사가 자국의 경우가 아니라면 가해자 중심으로 기술된 것에 익숙한 것도 원인이겠다. 특히 이 전쟁의 양상이 이렇게 잘 알려진 문호의 대작에서 다뤄졌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도 다소 어처구니가 없다. 이 책이 집 어딘가에서 굴러다닐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뒤져 보았으나 허사여서 도서관에서 대출을 했으나 범우사의 구역본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반납했다. 할 수 없이 최신 번역본을 구하러 나섰는데 문학동네 판은 4권중 1권만 출판되어 있다. 마치 지난날 토마스 만의 <요셉 이야기>(살림)를 읽던 것 처럼, 독자의 독서와 역자의 번역이 동시진행될 상황이다.

 

그사이 도스트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열린책들)와 손병홍의 <논리로 보는 패러독스 패러독스로 배우는 논리>(새문사)를 읽고 있다. 40년간의 지하생활에서 시작되는 <수기>의 1부는 예상치 못한 독백의 서술이어서 이것이 소설인지 수필인지 구분을 어렵게 하지만 2부로 넘어가면서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소설은 그렇다치지만, 에세이의 성격의 글이나 논문의 경우는 논리법칙의 구속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수기>의 이중 작가는 가상의 논적을 두면서 글을 진행하는데 이것은 그의 수기의 개연성을 측정하는 장치이다. 손병홍은 저 책에서 세상사에서 진행되는 역설적인 논증의 양상을 극단적으로는 허리케인, 보통의 경우는 바다의 파도에 비유하고 논리규칙을 명확히 추출할 수 있는 퍼즐놀이는 파도타기로 본다. 인간은 어떤 완성이나 목적이 아니라 그 목적 이후의 해체를 염원한다는 지하생활자의 비이성적 욕망론은 논증이라고 보다는 주장이겠지만, 주장의 개연성을 위해서는 논증의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으며, 문학을 논증의 틀로 보려고 하는 것은 패러독스한 현실에 대한 논리의 침투라고도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존재하지 않지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곧 반박할 수 없는 것이 엄밀히 말해 패러독스는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패러독스란 참으로 인정된 전제로부터 타당하게 추론된 결론이 일반의 상식과 믿음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거짓인 명제를 말한다.

 

이에 대해 대표적으로 알려진 패러독스의 예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대머리의 패러독스다. 대머리의 패러독스를 명제로 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제)

대머리는 머리카락의 수가 0개인 사람이다.

대머리인 사람에게 머리카락이 1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대머리다.

대머리인 사람에게 머리카락이 2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대머리다.

대머리인 사람에게 머리카락이 n+1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대머리다.

(결론)

머리카락의 수가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그는 대머리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역설이라고 말하는 것은 참도 거짓도 아닌, 판단불가의 상태인데 반해 논리적으로 패러독스란 거짓 논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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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러시아 단편선1

문학 Literatur 2017. 1. 9. 06:3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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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알렉산드르 뿌슈낀)

젊은 시절의 모욕에 대한 복수를 위해 자기 몫의 한 발을 간진한 채 결전의 날을 기다리는 일상은 매우 비일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복수는 상대의 가슴에 총격을 가하는 것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굴욕을 끌어내는 데 있다.

 

외투(니꼴라이 고골)

필사 전담 9급 공무원의 외투를 둘러싼 의외의 판타지 소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라는 괴이한 이름의 이 공무원은 필사의 업무에 혼신과 열정을 쏟을 정도이지만(바틀비의 무미건조한 필사에 비해) 가족도 없고 가난하기는 바틀비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외투에 대한 욕망에 있어서는 다르다. 이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거대했으면 자신의 청원을 무시한 장관에게 사후에도 달려 들었을까.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상품사회의 단면이다(그의 봉급을 넘어선 외투를 사고자 그가 재단사와 벌인 흥정과 검약). 바틀비의 놀랍고 위험스러운 점은 이런 사회에 대한 거부다.

 

무도회가 끝난 뒤(레프 톨스토이)

화려한 무대회가 끝난 뒤 벌어지는 일상의 잔악함. 연대장이 이른 아침 출근을 위해 늦은 새벽까지 무도회장에 머물지 않았던 이유라는 것이 화려한 무도회장의 분위기와 극렬히 대조된다. 일상의 천상과 지옥을 동시에 보려고 했던 대문호 말년의 관심사가 엿보인다.    

 

슬픔(안톤 체호프)

눈내리는 밤, 마수걸이도 못한채 눈에 파묻혀 가는 마부와 마차. 이 밤에 그의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이는 승객도, 동료도 아니었다.

 

입맞춤(안톤 체호프)

퇴역 장성의 대저택 서재에서 있었던 신비한 접촉은 어리숙한 랴보비치 중위를 끝없는 허상의 로맨스에 빠뜨리지만,  대자연의 숨결에서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계시 보다는 무위를 느끼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의 공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스물여섯과 하나(막심 고리끼)

지하의 크렌젤리나 비스켓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일해야 하며, 주인에게는 물론 위층의 수예여공들에게도 천대를 받는 26명의 알탕 제빵사들은 숭배의 대상이 필요했지만 이 대상에 대한 검증도 요구한다. 숭배만이 아니라 진실을 원하는 점에서 그들은 더이상 노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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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전염성 : 크로이체르 소나타

문학 Literatur 2011. 1. 16. 15:4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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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집의 수도관까지 얼려버린 냉혹한 한파의 주말 동안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다 읽었다. 교훈적 소설가답게, 이 책은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굴복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 주고 있다.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은 <가정의 행복>에서 정신에 복속되는 것으로 화합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세 작품에서 타협불가능한 파국으로 몰리고 만다. 뒤의 세 편은 모두 톨스토이 만년의 작품이라고 하니, 결국 육체적 욕망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해갈되지 않는 것이며, 그 완벽한 해소는 오직 죽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적 사랑관을 톨스토이가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마직막 작품인 <신부 세르게이>는 성욕 뿐만 아니라 명예욕과도 일전을 벌이고, 결국 방랑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다. 한 때 스테판 카사츠키라는 촉망받던 장교였다가 수도사가 된 후 명성을 날린 세르게이는 보잘것 없는 평범한 인생이지만 마음착한 파센카를 만나면서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일상의 소박한 삶에 충실한 농군과 같은 삶이 가치있다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도덕가로서 욕망을 바라보는 톨스토이의 몇 몇 구절.

"평생을 한 여자 또는 한 남자만 사랑한다는 것은 양초 하나가 평생 탄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크로이체르 소나타>, 포즈드니세프의 말, 183.

"아편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 또는 흡연자가 이미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듯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여자들과 관계를 맺은 사람은 정상인이 아니라 영원히 타락한 인간, 바로 호색한이 되는 겁니다."
상동, 193.

"그[예브게니]는 그녀[스테파니다]를 만질 수만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그녀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가까이에서 어둠 속에서라도 그녀와 마주치기만을 바랐다. 단지 사람들과 그녀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스스로를 억제하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한 수치심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는 조건들, 가령 어둠 속이나 동물적인 욕정이 수치심을 압도해 버릴 수 있는 만남의 조건들을 자신이 찾고 있음을 또한 알고 있었다."
<악마>, 368.

매우 아름다운 베토벤의 소나타 9번 Kreutzer를 잔혹스러운 결말을 향한 치정의 동력으로 삼는 것은 아무래도 가혹한 도덕심이다. 참고로 Kreutzer은 이 곡의 헌정을 받은 인물로 곡의 내용과 상관없지만, Kreuz는 독일어로 십자가, 교차점을 뜻한다. 평행하다가 어긋나듯 만나는 두 악기의 곡예가 포즈드니셰프에게는 간통으로 보였던 것이다. 

*소나타 9번은 다음 링크 참조 : http://blog.daum.net/okbon/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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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

문학 Literatur 2011. 1. 14. 09:5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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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도서관에 『닥터 지바고』를 반납하고 어떤 소설책을 볼까 서가를 두리번 거리다 러시아 소설에 눈이 갔다. 도스트예프스키의 주요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20여년 전에 읽었지만, 전집으로 나온 책들을 보자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단 건너 뛴 후 고른 책이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아직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와 같은 대작을 읽지 않았지만, 마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견줄만한 대작들을 당장 접하기엔 웬지 부담감이 들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 나온 작가 연보를 보다가, 톨스토이가 투르게네프와 체홉, 도스트예프스키, 고리끼가 동시대인들일 뿐만 아니라, 특히 투르게네프와 체홉, 고리끼와는 직접 만남을 가질 정도로 친교가 있었지만, 도스트예프스키에 대해선 그의 『죄와 벌』때문에 다소 적대적인 관계였다는 걸 알게 됐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인생의 특정 시기에 형성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이다. 현재 초기작인 <가정의 행복>을 읽고 있는데, 중년 남성과 나이어린 신부 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질곡이 나이어린 신부의 관점에서 그려지고 있다. 부모님을 차례로 여의고 시골영지에서 보모와 동생, 하인들과 함께 사는 '나'는 아버지의  절친한 젊은 친구였던 세르게이 미하일리치를 후견인으로 맞아 들인다. 그가 집을 자주 방문함에 따라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을 틔우게 되고, 결국 결혼까지 하지만, '나'의 요청에 따라 시골 생활의 안정과 고요를 벗어나 도시로 이사를 해 사교계를 드나들면서 '나'는 남편과 감정의 골이 깊이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시골에서 오랫동안 교제한 남자라고는 미하일리치 밖에 없었던 '내'가  사교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맘껏 고무된 것을 보면서 남편은 절망한다.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하면서 사교계를 주의하라고 한 남편의 경고는 기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사랑관의 변화를 『그 후』에서 『문』에 걸쳐 보여주듯이, 서로 다른 사랑의 감정을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보여준다.

텍스트 : 레프 톨스토이, 이기주 역『크로이체르 소나타』(임프린트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8, 초판1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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