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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0.01.07 소설책 두 권
  2. 2008.08.04 길읺은 시민, '토니오 크뢰거' : 경멸과 동경의 예술가

소설책 두 권

서술 Beschreibung 2010. 1. 7. 09:1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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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부터 현재까지 좀처럼 글을 쓸말한 여유가 없지만,그래도 출퇴근 전철과 깊은 밤에 잠깐식 소설책은 본다. 다시 펼쳐든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중 1편 야곱의 이야기와 조지 오웰의 『1984년』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1984년』은 중반에 줄리엣의 고백으로 다소 상투적이긴 하더라도 예상못한 반전이 일어나면서 이야기가 흥미진진해 진다. 야곱의 이야기는 몇 줄 안되는 구약의 구절을 현실감있게 복원시키는 토마스 만의 주도면밀한 상상력에 빨려 든다. 실제로 토마스 만이 근동을 답사하고 취재를 하고 난 후 고 소설을 쓴 점은, 마치 범죄 영화를 만들기 위해 30년간 형무소로 쓰인 알카트라즈 섬을 답사하고 수감자들을 취재했던 마이클 만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취재는 오늘날 창작의 기본이다. 책상머리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도 무시할 수 없으나, 이제 작가는 도서관과 인터넷을 물론, 현장의 답사를 통해서 상상력에 현실의 갑옷을 입힌다. 창작의 고통은 단지 머리 속의 고통이 아니라 전신의 노동에서 비롯되는 고생이다. 고통없이 산출이 있던가.    

창세기편 중 에사오를 피해 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문 야곱의 이야기에서, 야곱은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7년간 라반에게서 종살이를 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간단히 처리된 7년이라는 수를 놓고 만은 7년이란 수의 막막함과 덧없음을 상술한다. 하루 하루가 지나 7일의 한주가 되고, 한주가 모여 한달이 되고, 계절이 바뀌어 1년이 되듯, 되돌아 보면 7년은 마치 하루의 7일인 한 주 처럼 흘러간다. 여기에 바로 만의 맹점이 있다. 창세기의 짧은 구절에 놓인 시간의 공백을 면밀히 채워 나가는 전형을 만은 탁월하게 보여준다.   

조지 오웰의 당에 날리는 일침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어떤 점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납득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공적 사건에 충분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가장 악랄한 현실침해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이 정상적이다. 마치 한 알의 곡식이 소화되지 않고 새 몸뚱이를 거쳐 탈없이 그대로 나오듯.."(『1984년』,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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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비주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서양 철학사에서 '경멸'이라는 단어를 사회적 주제로 부곽시킨다. 경멸이란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갖는 불쾌한 감정이다. 경멸의 대상인 후자의 인간이 불쾌를 유발할 수도 있지만, 경멸을 느끼는 전자의 인간이 불쾌를 생산할 수도 있다. 경멸이 발생하는 원인을 이 양자의 어떤 지점에서 명확히 갈라 규명하려는 것은 심리학적 탐구를 포함한 경험과학이 떠맡을 문제지만, 2,000년 전에도 있었던 이런 감정이 새삼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래서 고대 철학사에서부터 경멸은 한 무리의 사유 집단이 걷잡을 수 없는 수효의 군중을 교양화시키기 위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경멸을 비로서 사회적 주제로 파악한 철학자는 니체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지상의 인민에게 쏟아내는 비극적 서사시는 인민에 대한 경멸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슬로터디예크가 말하듯, 경멸을 가린채 대중에게 아부하는 헤겔이나 마르크스에 비해 니체야 말로 솔직한 철학자인 셈이다. 그러나 이게 다인가? 경멸의 베일 너머에는 또한 질투심이 도사리고 있다. 집시여인인 에스메랄드를 사랑하는 노틀담의 꼽추 콰지모도를 경멸하는 부주교 클로드에게도 질투심이 유발된다. 질투심은 한편으로 증오로 치닫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차이가 있는 두 인간을 동화시키도록 촉구할 뿐만 아니라, 질투를 유발하는 인간을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욕망의 샘이다. 이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와 토니오 크뢰거는 유사한 점이 있다. 즉 이들의 질투심에는 어떤 동경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동경의 대상은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운명애이며 토니오 크뢰거에게는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일상의 부르조아적 시민의 생활세계이다.

토니오가 동경의 대상으로 삼은 북구의 사람들에 비해, 자신과 같은 예술가들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는 대중을 경멸하면서도 대중 속에서 예술의 의미를 찾는 시민 예술가로 자신을 정립시키려 한다. 시민 계급이란 자신의 지위를 주어 받은 것이 아니라 투쟁하고 쟁취한, 생성해 만들어낸 사회적 창작물이다.  토니오가 고난을 모르고 양심이 없는 지중해 연안 사람을 혐오하고 거센 바닷바람에 단련된 북구 사람을 동경하는 이면에는, 그의 고향에 대한 애증 섞인 정서도 있겠지만, 이러한 사회성의 배경도 있다. 자신과 같은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시민사회에서 변화의 움직임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는 촉수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변화를 일으키는 작용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가가 일상의 사회를 벗어나 자신만의 천상으로 비상하는 것은, 마치 신, 자유, 불멸성과 같은 칸트의 선험적 이념이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유의 비행을 감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쩌면 칸트처럼 소박하게도, 토니오는 이 거친 물결이 흐르는 강의 양안에서 굳건한 다리를 세우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술가에게 다리라는 건축물이 가능한 것인가?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소명, 아니 저주를 부여받은 예술가에게 견고한 다리는 모순된 건축물이다. 이런 건축은 예술가가 개입할 수는 있으나 전담할 수는 없는 문제다. 왜냐하면 현실에 강하게 밀착되어 자기 소리를 분명히 내는 시끄러운 무리배들이 예술가들에게 떠밀릴 일은 없기 때문이다.  

28살의 나이에 발표한 이 자전적 단편에서 토마스 만의 유년과 청년 시절의 소외된 의식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 그리고 책임있는 예술인의 상에 대한 의지와 더불어, 젊은 작가의 특권인 방랑의 유희를 읽을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마치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연상시킨다. 오직 방향없고 배설적인 경멸로 가득찬 『호밀밭의 파수꾼』에 비해 이 작품에서는 어떤 숭고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조짐이 드러난다. 인생의 특정한 시절,  한때의 비상함으로 추억되는 빛바랜 <젊은날의 초상>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바다의 물결 소리가 내게까지 올라옵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는 한 세계가 들여다 보입니다. 그 세계는 나한테서 질서와 형상을 부여받고 싶어서 안달입니다."(107-108)

텍스트 :  토마스 만 단편선, 안삼환 외 역(민음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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