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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20 신앙과 철학2
  2. 2011.03.01 연재물 : 신앙과 철학 1

신앙과 철학2

창작 Produktion 2011. 3. 20. 10:4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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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글에서 저는 종교적 신념으로 공통의 합의를 만들 수 없다고 했으며, 이에 대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도 비슷한 관점을 끌어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트윗을 보다 보니, 로크가 이런 말도 했다는군요.   

"각 개인이 종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합당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가 공공활동의 기반이 되어서는 안된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어떻게 통치의 적절한 기초가 된단 말인가"
 
종교의 문제, 그러니까 신이 있느냐 없느냐, 사후 세계가 있냐 없냐의 문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며, 안다고 해도 그 앎에는 다양한 종교적 신념의 차이가 있으므로 이 알 수 없고, 안다고 해도 서로 합의할 수 없는 신념으로 공공활동의 기반을 마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에도 말했다시피, 종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종교가 현실의 힘으로 작용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도대체 일본의 대지진이 이들의 신앙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여의도 체육관 교회의 목사는 악담을 퍼붓고, 전철에서 기독 노인은 일본에서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났다고 괴성을 지릅니다. 이것은 종교가 저 소망교회 교민들의 정치 참여와 같은 현실의 영역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 영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거죠.
 
사실, 기독교로 치면, 일본이 한국보다 더 오래되고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치밀한 경전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일본과는 달리, 한국의 기독교 수용은 신비적 복음주의 일파에서 비롯됐다는 종교사적 근거도 있습니다(그 전폭제는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평양의 대규모 부흥집회). 함석헌과 같은 이들은 오히려 일본을 통해 계수된 기독교를 받아들여 독창적인 주의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현실은 종교의 영역으로부터 끊임없는 간섭과 영향에 놓여 있습니다. 심지어 갑오농민전쟁 조차도 동학이라는 신흥종교의 배경없이 이해할 수는 없는 사건입니다. 오래 전에 정읍에 생명운동을 하는 청년모임에 간 일이 있었는데, 여기서 동학을 오랜 기간 공부한 박맹수란 분과 뒤풀이 때 동학에 대해 얘기하다가 제가 결국 동학은 새로운 신비주의 종교가 아니냐는 얘기를 했더니, 이분은 동학이란 모든 종교를 포함하면서도 초월한 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때 술이 잔뜩 취한 상태라 정확한 말은 기억안나지만, 저한테 동학은 또 하나의 종교로 생각되었지만, 이 분에게는 종교이면서 종교 이상의 가치로 읽혀졌습니다. 표영삼의 <동학>을 보면, 최제우가 도를 깨우치는 과정에는 분명 신비주의적인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시형을 필두로 억압받는 조선민중의 투쟁과 어우러져 전개되는 동학은 시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굵직한 운동으로 퍼져 나간 거죠. 이런 핍박의 과정은 제정 로마시대에 기독교가 수용되는 과정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종교는 피압박 민중의 눈물을 닦아 주고 위안을 주며, 때로는 힘을 보태주는 데에서, 그 부당한 현실참여에 대한 비판을 감수할 여지가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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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물 : 신앙과 철학 1

창작 Produktion 2011. 3. 1. 00:5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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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카페에 재미삼아 연재글을 올려 봤다. 과연 계속 이어질지..

이 곳은 주로 책을 소개하는 카페로 굳어진 느낌이 들지만, 다른 형식의 글을 올려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런 주제로 한번 글을 처볼려고 합니다.

'신앙'과 '철학'이란 용어는 서로 상극이라 할 만큼 상호 배제적인 면도 있지만 일종의 공통점도 있습니다. 고리타분한 주제라는 거죠. 하지만 신앙이란 적어도 대한반도에서는 현실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무시못할 신념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진행하면 너무 무거운 감이 듭니다. 저는 여기서 신앙과 철학에 대해 어떤 몰개성적인 견지에서, 지구를 벗어난 외계인의 관찰자적 관점으로 이 주제를 추상화시켜 진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극히 사적이기는 하지만, 저의 경험을 비추어서 얘기를 진행하는게 저로서도 더 수월한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이른바 성년이라고 불리는 시기에 저는 인습적으로 받아들여온 신앙을 철학으로, 그것도 제도화된 학문의 형태로 된 '철학'으로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그 극복의 방법은 학문적인 수련이 아니라, 단지 교회를 더이상 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은 하나의 빛좋은 명분인 셈이었죠. 오히려 종교에 대한 상대주의적인 관점은 좀 더 이른 고등학교 시절에 생겼습니다. 전농동의 한 독서관에서 늦은 밤에 친구와 종교토론을 하면서 저는 자신의 믿음에 철저한 이슬람과 역시 자신의 믿음에 철저한 크리스찬 중 누구의 신앙이 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겠냐고 항변했는데, 이 친구는 이런 관점을 단호히 거절했죠. 나중에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읽으면서 저의 이런 상대주의가 바로 종교적 신념의 통약불가능성과 상통한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통약가능한 가치관, 그러니까 공통의 합의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가치를 종교적 신념으로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거죠.  

상이한 종교적 신념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의미없다는 것, 즉 종교적 상대주의를 인정한다고 해도,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하나의 종교라고 몰아붙일 수 있겠지만, 일단 종교를 긍정한다고 했을 때 최소한의 전제는 내세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합니다. 무종교주의자에게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종교라고 부르기엔 어색합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다른 주요 종교 중에서도 가장 종교같지 않은 교의입니다. 제 생각에 불교에서 말하는 내세의 수위들은 메타포이며, 불교의 최종 목적지는 일체의 업을 초월한 자아의 완전한 적멸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생성도 없고 소멸도 없는 상태, 완전한 죽음의 상태, 너와 나도 없고, 당연히 의식과 무의식도 없는 완벽한 적막. 하지만 살아있는 인간에게 이런게 과연 상상 가능할까요? 없음은 있음을 전제하지 않고서 상상할 수 없습니다.  

현실의 불교도 저 생기발악적인 기독교적처럼 기복주의로 흐르기는 합니다만, 그 본질은 철저한 생의 부정이면서 내세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반종교적인 면모가 있으며, 여기서 불교를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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