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 : 혈투의 귀향길

영화 Film 2012. 7. 23. 17:5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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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회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조선족은 애매한 정체성에 갇혀 있다. 민족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한 민족적 동근원성이 이들을 특이한 외국인으로 분류시킨다. 멀게는 삼국시대부터 가깝게는 조선 말기의 간도 영토분쟁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압록강 너머 만주 일대는 중국와 조선의 완충지대였다(그래서 間島인가?). 특히 일제 식민시대에 간도는 삶의 폭압과 일제의 폭정에 시달린 이들을 맞아준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연변 조선족 자치주까지 이룬 지금의 조선족, 2010년에 나온 이 영화의 첫장면이 말하듯 인구가 80만에 이르지만 그 태반이 한국에서 불법 내지 합법적 활동으로 삶을 영위해 가는 조선족은 언제까지 이 영화에서와 같은 불온한 집단으로 낙인받을까?

 

아내가 한국으로 떠나 버린 뒤, 아내의 불법 한국 이주를 위해 들어간 브로커 비용에 허덕이던 구남에게 구세주가 나타난다. 개장수를 하며  연변 조선족의 한국 밀항 루트를 관리하는 면사장. 그의 또 다른 사업은 살인청부였는데, 그가 5만 8천 위안이 찍힌 통장을 미끼로 구남을 돌아오지 못할 배편으로 한국에 보낸 것이다. 영화는 구남의 열흘간의 서울 일정을 흔들리는 카메라로 따라간다. 그렇게 복잡할 것 없는 스토리라인 위에 영화는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이 베어있다. 도끼질이 난무하는 난투 장면과 트레일러가 전복되고 차량들이 뒤엉켜 박살나는 질주 장면은 영화적 허구가 아닌, 영화적 사실성에 승부를 건 감독의 근성을 드러낸다. 촬영현장에서 스텝들이 두들겨 맞고 대거 교체되었다는 풍문이 프레임 밖에서 역력히 보인다.  

 

얼마 전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 조선족의 잔혹한 살인사건은 이 영화를 부각시킨다. 사람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람은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처럼 취급되는 것일까? 몇 년 전인가, 연변 조선족을 다룬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한 조선족은 한국민에 대한 증오감을 드러냈다. 살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밀항을 불사하며 기회의 땅으로 몰려 오는 조선족에게 여전히 한국은 구한말의 조선과 일제 치하의 식민지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다가서기 힘든 땅이다. 그러나 나는 구남을 비롯해, 그 연변인들이 거세게 파도치는 황해 한 가운데 밀항선의 밑바닥에서 온몸을 비틀어 견뎌내며 한국에 상륙하려는 분투에서, 그들의 생존의지나 다른 삶을 향한 거친 욕망을 너머 어떤 진실의 염원이 보인다. 생계를 위해서든 독립을 위해서든 그들의 조상이 떠나야만 했던 고국에, 여전히 그들을 거부하는 조국에 온 몸을 던져 오려는 그들의 몸부림은 그들의 역사적 권리를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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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무덤3

창작 Produktion 2012. 7. 15. 22:5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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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천황의 국가가 아니지만

종묘의 기괴함은 천황제가 부럽지 않다. 

 

현인신을 모시지 않는 현실주의가

오히려 조상신 앞에서는 쩔쩔맨다.

 

군사 쿠테타로 왕조를 건설하고

남방과 북방의 이민족 침략으로 쑥대밭이 된 조선

500년 왕조의 연명을 위해 나라를 넘겼어도 

이 땅 곳곳에 왕조의 잔재는 살아 있다.

 

패악한 군주의 무덤도 역사적 유산이 되는 나라

 

시퍼런 군사독재자의  딸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되는 나라

 

대한민국 만만디 !

 

 

*연산군묘의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362호(지정일 : 1991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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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승리

단상 Vorstelltung 2012. 7. 12. 23:3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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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출신 현역 국회의원의 시를 교과서에서 추방하고자 했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시도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들에게 시는 정치의 수단 정도로 인식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시가 도대체 정치적일 수 있느냐는 의문은 우문이지만,  즉 시는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고 충분히 그래야만 한다고 하더라도, 시 그 자체는 세상에 던져진 하나의 요동치는 창작물로서 끊임없는 해석과 창조를 겪어야 하는 생물같은 것이다. 국회의원직은 대단한 자리이지만, 시인에게 이 직책은 시작(詩作)이라는 운명에 비해 실로 껍데기에 불과한 작위일 뿐이다. 이런 인식의 백지상태에서 삭제 권고를 하려 했던 평가원은 스스로 가장 정치적인, 가장 치졸한 의미에서 정치보복적인 의중을 드러내고 만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교과서 등재 여부가 아니라, 시를 정치신인의 현란한 수사 쯤으로 보는 용렬한 발상, 그리고 이런 멘붕이 교육권력을 좌지우지 한다는 점이다. 시경이나 용비어천가가 보여준 바 처럼 유교 전통의 동북아 정치질서에서 시는 치민의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기는 했다. 그래서 백성의 머리에 효과적이고 인상깊게 각인시키기 위해 시의 각운과 운율에 병적으로 집착한 면도 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에서 시는 가장 개인적인 내면의 분출로 달구어진 채 목적성을 숨긴다. 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면, 그건 교훈시로 분류될 뿐이다. 시는 시 자체가 목적이 될 때, 그리서 그 유통과 수명이 오직 시 자체에 달려 있을 때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시는 시인이 거주하는 집이자 시인이 영구히 거주할 수 없는 집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한 명의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더러는 양계를 하거나, 정치적 인간으로서 소명의 제도적 실현을 위해 정치참여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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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풍경

단상 Vorstelltung 2012. 7. 9. 20:5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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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88학번 동문 선배의 결혼식이 있었다. 학생운동을 줄기차게 하다가 졸업 후에는 시민단체에서 일하며 결혼적령기를 넘겼는데, 이제야 결혼을 한 것이다. 워낙 인간관계가 폭넓고 정감있는 사람이라 결혼식장은 많은 인파로 들썩였다. 식사를 마치고 피로연으로 맥주집을 잡았는데 학부 동문과 운동권에 있던 사람들, 시민단체 동료들로 일요일 오후의 맥주집은 활기찮다. 나는 결혼식 이후의 술자리가 길어질 것으로 예상되어 미리 월요일 휴가까지 낸 상태였는데, 결국 3차까지 술자리가 이어졌고, 한 동네에 사는 선후배들과 택시를 타고 자정이 되서야 귀가했다. 모처럼 흥겹고 질퍽한 결혼식 뒤풍경이었다.

 

아침에 늦잠을 자고 뭘할까 하다가 우선 텃밭 생각이 났다. 그 전에 금곡에 있는 부모님 산소가 떠올랐다. 제 밭을 가꾸면서도 부모 산소의 잡초는 애써 잊어온 것일까. 가봤더니 무연고자의 무덤처럼 망초가 불끈불끈 솟아 있고 온갖 잡풀로 뒤범벅이었다. 40분가량 솎아 내자 겨우 무덤 모양이 나왔다. 이어 텃밭에 들러 가지를 따고 하남매장에 수박사러 갔다가 일하시는 활동가분에게 가지를 드렸다. 가지와 고추는 물만 주어도 잘 자라는데 토마토와 참외는 무척 뜸을 들인다. 자연의 맹목성은 획일적이진 않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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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출근길

창작 Produktion 2012. 6. 30. 23:1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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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의 이른 아침 전철은

번듯한 직장인들을 집어 삼키고 내어 뱉는다

 

토요일 이른 아침 전철은

헐벗은 생활인들을 실어 나르고 헉헉 거린다

 

어둡고 굳은 표정으로 문간에 기댄

중년 사내의 작업 조끼 속 셔츠는

여름 감기로 고열에 시달릴지 모를 아이의 거친 숨결에 펄럭이더라도

그의 작업화는 일터를 기다린다.

 

배차 간격만 줄어들 뿐 주말이 없는 전철

주말도 없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의  땀으로

지구는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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