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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에서 주류세가 세금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떨어지는 추세라 정부에서 술소비를 진작시키려고 한다는 뉴스가 있다. 젊은 세대의 술 소비가 준 것이라기 보다는 술을 퍼마실 젊은 세대가 사라지고 있다는 현실의 반영이다. 포도주통에 둥그렇게 모여 앉은 청년들의 왁자지껄한 수다 속에 맥주잔이 부딪치는 흥겨운 술자리를 밖에서 쳐다보며 한잔 하고 싶은 노인의 심정을 노래한 장면( Bläck Fööss - Drink doch ene met 1976)이 이제 혼자서 술을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보다 이따금 지나가는 젊은 행인들의 모습 속에 지난 세월을 회상하는 노인들로 채워진 술집의 풍경으로 뒤바뀌고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대비일지도 모른다. 미래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는 어느 정도 예측의 시나리오를 다각도로 돌린다고 해도 상상을 빗겨가는 문제이기도 하다. 인구소멸의 시대에 새로운 세대의 인구가 정말 필요하다면 극단적으로 인간 배양의 기술이 대두될 수도 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영화같은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얼마전 대학에 다니던 보육원 출신 대학생이 스스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몇 차례에 걸쳐 양부모의 선택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결국 보육원을 나와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오래되고 기능이 낡긴 했어도 아직까지 가족이라는 제도는 개별인간을 지켜주는 방어막 이상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애써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족 중심의 사회상이 미래로 갈수록 약화될 것이라는 예측에는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 물론 재벌이나 왕가처럼 자본과 권력의 세습이 필요한 특권층에게 가족은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한편,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전통이 강한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아직 인구정체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근대 계몽기 이래 기능 중심의 사회변동에 맞춰 보편주의적 인권감각을 갖고 사회를 통한 개인의 자기실현을 이상으로 내세웠던 사회사상가들이 대두됐는데, 이들의 철학적 전통을 20세기 전반기에 비판적으로 복원시키는 학자들이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사회연구소에 모여 들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벤야민,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그리고 전기 하버마스 시절 만큼의 명망을 현재 이 연구소가 이어가고 있는지는 학문 밖 사람의 소견으로 알 수는 없으나 헤겔과 마르크스까지 소환하는 이들의 지적 전통은 바로 아래 사진의 아도르노 당크몰 처럼 박제된 유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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