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에 다녀 오다

여행 Reise 2010. 12. 6. 11:3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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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두 가족이 한 차에 타서 2박 3일간 전라 남도에 다녀왔다. 여행의 동기는 만난지 오래된 장흥의 옛 벗을 만나기 위함인데, 쉽게 가기 힘든 남도행이니 가서 두루 여기 저기 둘러볼 참이었다. 숙소는 지리산 자락에 있는 한 통신사의 수련관이었는데, 정작 지리산은 바라만 보고 왔다.
 
금요일 휴가를 내고 늦은 아침에 출발해서 중부-호남 고속도로로 내려가 담양에 도착했다. 메타세쿼이어라는 겨울철 황량한 가로수길과  대나무 숲으로 덮힌 언덕으로 이루어진 죽녹원을 들렀는데, 이날 추운 바람이 불어 하늘로 솟은 대나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판옥선들끼리 부딛는 소리처럼 드럭드럭 거렸다. 죽녹원은 이정표 안내가 잘 되어 있었지만, 약간 미로같은 구조라서 잘못 돌면 빠져 나오기 힘든 길도 있었다. 날씨만 따듯했으면 더 둘러보기 좋은 곳이었다. 죽녹원을 나와 동행한 친구 가족이 스마트폰으로 탐색한 이름난 떡갈비 집에서 식사를 겸한 반주를 했다. 골목길에 자리잡은 식당은 밖에서 보기엔 전형적인 시골 읍내 식당처럼 허름해 보였으나, 방송을 타면서 유명세를 탔는지 원래 유명했는지 식당은 초저녁인데도 북적거렸다. 전날 술을 마셨지만, 잎새주로 마신 술맛은 이날 저녁이 가장 포근하고 흥겨운 취기를 주었다. 저녁을 먹고 국도같은 88고속도로를 타고 지리산에 있는 숙소에 들어와 볼링을 치고 막걸리를 마셨다. 

다음날, 숙소에서 아침을 일찍 들고 바로 장흥으로 출발했다. 구례에서 순천, 벌교, 보성을 거쳐 장흥까지 2시간 정도 걸렸다. 달리는 국도 옆에 남해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중이라 길은 조만간 급속도로 빨라질 것이다. 가는 길 중간 중간에 좌측 창가로 거대한 담수호 같은 은빛 바다가 이따금식 보였다. 이청준의 <천년의 돛배>를 연상시키는 바다다. 장흥에는 그 친구 때문에 10년 전에 와보고 이번이 두번째인데, 그때 봤던 제암산의 기괴함은 변함이 없다. 길다란 상권으로 변모한 장흥읍 중앙거리에서 4년째 장사를 하고 있는 친구는 생각보다 번듯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대개의 자영업이 그렇지만, 자리를 잡기 위해 힘겹게 살아온 세월이 느껴졌다. 결혼하기 전, 읍내에서 동떨어진 농가에서 살던 친구는 이제 읍내에 들어와 살고 있고, 옛집은 그대로 있는데, 방치된 채 관리가 안되 걱정이란다. 고향에서 나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지만 집안의 불운을 겪은 후 잠시 대처로 나가 살아 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아 귀향을 했고, 이제 고향에 정착한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결혼 전, 초라한 세간살림에서 변모한 모습은 마치 4만5천 인구의 장흥이 변모한 모습같았다. 친구가 만들어준 대형 피자를 먹고 난 후 손님 치루기에 바쁜 가게를 빠져 나와 5일장과 토요시장이 열리는 장터를 둘러 보고, 수문해수욕장에 들렀다가 다시 친구의 가게에 왔다. 오랜만에, 그리고 처음 만난 친구들의 가족들에게 장사로 바쁜 일손에 제대로 대접도 못해 줬다고 아쉬워 하며 친구는 새로 출시했다는 파닭을 포장해 주고 아이들 용돈을 찔러 주면서 아쉬운 작별을 했다. 다음에 만나면 술 한잔 하자는 말을 남기고.

저녁 밤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두 가족을 태운 차는 구례군으로 접어 들고 있었다. 길게 뻗어 있는 지리산의 한 자락을 굽어 보면서 저곳에서 싸우다 죽어간 이들을 노래한  '지리산'이 나도 몰래 나왔다. 이날 밤에는 노래방에라도 가서 이 노래를 부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장흥 친구가 준 맛있는 파닭으로 맥주를 마시고 나니 꽤 피곤했다. 잠시 친구와 수련관 주변을 둘러 보며 마지막 밤을 보냈다. 우리와 동년배로 이 통신사의 부사장으로 영입된 낙하신 인사, 직장에 관한 이러저런 얘기. 문득 이 친구가 죽녹원에서 하던 말이 떠오른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꿋꿋하게 대지에 박힌 채 산들거리는 대나무처럼 직장생활도 유연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거센 바람이 불면 대나무는 얼마나 흔들리며 얼마나 서로들 부딪치며  때로 그 끝은 얼마나 예리한 무기인가. 다음날 먹구름도 넘지 못하는 지리산을 저 멀리 보며 남원, 장수를 거쳐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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