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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 단편은, 일제시대 강진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독립운동가와 함께 연해주로 떠난 8살 장남이 일본 첩자 혐의로 몰려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당하고 난 뒤, 70여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2002년 서울 월드컵에 다녀간 얘기를 소재로 한다. 혁명의 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국가는 물론 모국어도 팽개쳐 버린 이 장남은 고국에 와서도 또다시 고국을 잊어야 한다는 역설에 부딪쳤다. 2002년 온 나라를 뒤덮은 붉은 물결에 동요된 어떤 흥분감이 혁명을 외치던 지난 세월 소련의 인민대열에서 자신의 국적을 숨기고 혁명에 동요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일깨운다. 언뜻 이해하기 힘든  심정이지만, 소련의 몰락 이후 더해진 어떤 당혹감이 월드컵의 붉은 물결을 만나면서 이 노인에게 '대한민국'이란 외침을 허위로 보이게 한 것인지 모른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군중의식 외에 악마들의 외침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너도 나도 빨간 셔츠를 입고 동요하던 사람들에게 한때의 즐거운 일탈감 내지 동질감이라는 추억 외에 다른게 있을리 없다. 굴절당한 삶을 지속해야 했던 노인에게만 그 심층이 보여졌을 뿐이다.
 
<천년의 돛배>(2006)
단편 소설집의 첫번째 작품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과 신화적 상상, 그리고 사실성이 결합된 원형질적인 작품이다. 상상의 허위를 벗기기 보다는 상상을 지켜주는 사람들의 공감을 보여준다. 눈 길 위에서 멀어져 간 자식의 발자국을 보며 닿을 수 없어도 마음이 가는 것처럼, 천년의 바위는 끊임없는 모녀 간의 그리움을 상징하며, 이 그리움에 사람들은 공감의 돛대를 꽂은 것이다. 그런데 이 돛배는 과연 실제하는 것일가?  

<지하실>,<이상한 선물>, <태평양 항로의 문주란 설화>
여기까지 실린 이 책의 단편들에서  이청준은 고향, 고국이라는 인간 원형의 귀향처를 그리워하면서도 갈 수 없는 심정을 반복하고 있다. 그 자신도 쫏기듯이 고향을 떠나야 했고, 우즈베키스탄이나 멕시코에 있는 이민 3세대의 조부도 쫏기듯이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로 떠밀려야 했다. 그리움과 회한의 정서는 노년의 작가에게 드리운 그림자다. 고향, 고국을 그리워 하지만, 더이상 그곳에 갈 수 없는 이율배반의 심정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남도의 백성 수만이 일본군에 납치되어 세계 곳곳으로 팔려나갔다는 역사적 사실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을 지켜준 고국, 자신을 지켜준 고향이 없다는 데서 고국, 고향은 버려야할, 잊어야 할 장소다. 단편의 형식을 빌린, 그리고 세상과의 작별을 얼마 안남겼었던 노작가의 회한의 정서가 삶을 덧없게 채색한다.    

<부처님은 어찌하시렵니까><조물주의 그림>
소설이 아니라 작가와 비교적 가까이 지낸 친우들에 대한 뒷얘기같은 이야기들이다. 이 책의 그림을 그린 동향지기 화가 김선두와 그의 형, 그리고 박상륭의 편지. 특히 임권택에 대해 다룬 <조물주의 그림>은 Y 감독의 미학적 의식이 얼마나 고전주의적인지 보여준다. 황혼녁 남해에 낚시배를 띄워 바다 한 가운데에서 두 사람이 바라본 일몰의 광경에서 부터 전란의 추격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여학생이 숨어있던 바위에서 나와서 바라본 검은 산의 모습들. 자연이 빚은 산하와 인간이 갈군 지경들에서 이미지를 찍어내는 일은 또다른 고역이자 강행군임을 작가는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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