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한자 뜻을 풀어보면 힘쓸 勞에 움직일 動이다. 한자만 놓고 본다면 뭔가 힘들게 일을 한다는 의미다. 이런 노동이란 말에는 노동을 폄하하는 듯한 역설이 보인다. 즉 노동을 뭔가 피해야만 하는 고충같은 일로 비출 수 있다. 왜 노동에 대한 이런 불손한 생각이 드는 걸까? 누가 감히 신성한 노동을 부정할 수 있을까? 땀흘려 일한 농부의 노동없이 목구멍에 밥을 밀어 넣을 수 있을까? 지배와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 역사의 이면엔 장대한 노동의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해 마르크스라면 냉소적으로 응대했을 것이다. 그 자신도 생계를 위해 철도 사무원 자리에 기웃거렸지만 끝내 룸펜으로 남았던 철학자답게 독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를 가리켜 자기 집안도 건사하지 못한 무능한 가장이라고 핀잔하는 것은 아담 스미스나 칸트를 가리켜 장가도 못간 노총각이라고 비난하는 것만큼 무지한 발상이다. 더욱이 룸펜의 상태는 노동을 색안경을 쓰고 인식한 이 세속의 철학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실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여담을 걷어내서 보면, 노동에 마르크스가 투사한 의미를 볼 수 있다. 19세기 영국의 대형 굴뚝에서 솟아나는 거대한 연기 속에서 마르크스는 산업의 혁명적 진보 뿐만 아니라 처참한 노동의 위기를 목격하고 노동을 헤겔의 외화 개념을 적용해 인식했다. 그것은 노동이 유적 존재인 인간의 외화된 활동으로서 인간에게 대립해 있다는 것이다. 즉 노동은 인간에게 이제 낯설어 지고, 원래 인간이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어쩔 수 없이 할 수 밖에 없는 상태로 인간 안에서 인간과 대립해 있는 채로 수행된다. 1862년 맨체스터의 공장에서 주당 평균 84시간으로 강제되는 살인적 노동은 분명 노동자에게 대립해 있다. 이러한 살인적 노동 조건은 외양과 법적 형식을 정비해 현재 한국사회에서도 강제된다. 지난 5월 16일 창원의 두산중공업 터빈공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가 신호수가 배치되지 않은 작업장에서 업무중 지게차에 치여 또다시 사망하는 사고를 비롯해,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도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과 학생들에게도 여전히 가혹한 노동조건이 관철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힘들고 위험하고 고단한 이런 노동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모든 노동에 무슨 문제가 있기에, 노동의 소외가 특정 계급의 노동자가 아니라 인류라는 전체에 일어나는 것인가? 노동 소외의 본질에 대한 마르크스의 서술을 보자.
“노동자가 더 힘을 들여 노동하면 할수록, 그가 자신에게 대립되도록 창조한 낯선 대상적 세계는 더욱더 강력해지며, 그 자신, 즉 그의 내적 세계는 더욱더 가난해지며, 그에게 그 자신의 것으로 귀속되는 것은 더욱더 적어진다...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대상 속으로 불어넣는다. 그러나 그 생명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게 귀속된다...그가 대상에게 부여했던 생명이 그에게 적대적이고 낯설게 대립한다...노동자는 그의 노동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으로 그의 육체를 쇠약하게 만들고, 그의 정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에 있다...그의 노동은 그러므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 강제노동이다...노동자의 활동은 그의 자기 활동이 아니다. 노동자의 활동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 속하며, 그 자신의 상실이다.”1)
이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마르크스는 인류가 자본가와 프로레타리아라는 두 적대 계급으로 선명히 갈라지는 양상을 노동을 매개로 보여준다. 그는 이런 이분의 양상을 임금과 함께 국민경제학이 추상한 개념인 지대와 자본을 통해서도 설명하는데, 토지의 분할로 인해 토지들이 대토지 소유자에게로 합병되는 양상은 소자본가들이 프로레타리아로 전락해 거대한 산업예비군에 합류되는 양상에 대응된다. 여기서 청년 마르크스는 노동을 임금으로, 토지를 지대로, 신용은 자본으로 흡수시키는 인류의 적으로 자본가를 지적하지만, 노년의 마르크스는 이 적을 더 이상 인격체의 껍질을 갖지 않은 자본Capital, 자기 스스로 운동하는 자본으로 탈바꿈시킨다. 여기서 프로레타리 대 자본가, 프로레타리아 대 자본이라는 이분법은 변함이 없다. 결국 자본가도 자기증식하는 자본의 운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렇듯, 사업이라는 쇼를 하는 자본가도 자본에 종속된다면 노동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점에서 베블렌이 노동자도 자본가가 되려고 한다고 본 관찰은 마르크스와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가 자본가, 자본가가 자본이 되지 않고서는 중간을 허락하지 않는 저 자본과 프로레타리아 사이에서 언제나 누구든 프로레타리아로 몰락할 위기에 놓이기 때문이다. 프로레타리아는 자본의 이해를 위해 언제든 실업과 임노동을 오고 갈 수 있는 불안정 상태에 있다. 극소수의 자본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 프로레타리아로 몰락하는 상황은 신자유주의의 본질인 공포정치와 다름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상황이 과연 인간이라는 유적 존재를 위협하는 것인가? 자본이 된다면 이런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은가? 그러나 자본은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자본은 유적 존재일 수 없다. 자본이 유적 존재가 아니므로, 자본가는 유적 존재를 부정한다. 인간이 유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의 사회성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자본은 사회성을 파괴한다. 유적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의 문구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인간이 유물론적 의미에서 자유롭지 않다면, 즉 이러저러한 것을 회피하는 소극적 힘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개성을 발휘하는 적극적 힘 덕분에 자유롭다면, 사람들은 개개인의 범죄를 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범죄의 반사회적 발생 장소를 파괴하고 각인에게 그의 본질적 생활 발현을 위한 사회적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만약 인간이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다면, 사람들은 환경을 인간적인 것으로 형성하여야 한다. 만약 인간이 그 본성상 사회적이라면, 그는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사회 속에서야 비로서 전개하게 되는 것이고,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의 힘을 개별적 개인의 힘이라는 견지에서 아니라 사회적 힘이라는 견지에서 가늠하여야 한다.”2)
2.국가는 아직도 필요한가
지금 시점에서 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촌스럽다. 국가사회주의가 몰락한 지 벌써 17년이 경과한 상황에서, 일부 문구는 폐기처분의 대상으로까지 몰린다. 과연 폐기처분할 문구인지, 아직 유효한 문구인지 그 대표적 프로그램을 살펴 보자.
이것은 프로레타리아가 자본가를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서 국가를 활용하는데 초점이 있다. 여기서 ①,④,⑤,⑥,⑦,⑧은 국가사회주의의 전형적 프로그램이다. ⑩은 어린이를 위한 공공 무상교육과 어린이의 공장노동폐지인데, 이것은 적어도 개도국을 제외한 국가에서 어느 정도 성취된 프로그램이므로 생략했다. ②번의 경우에는 자유민주의 국가에서 정권의 향방에 따라 정책적 조율이 가미될 수 있는 부분이고, ③의 경우에는 폐지까지는 무리라도 역시 세제로 조율할 수 있는 사안이다. 생산수단이 사회적 통제를 받는 ①의 경우는 단일한 토지중과세를 주장한 헨리 조지의 지대론을 예시한다. 자본의 사적 소유를 철폐시키고 자본을 프로레타리아 독재라는 사회적 힘으로 전환시켜 생산력을 고취시킨다는 계획이 이 프로그램들에 있다. 정치권력이란 한 계급[프로레타리아]이 다른 계급[자본가]을 억압하기 위한 폭력이며, 이 권력으로 사적 소유라는 낡은 생산관계를 폭력적으로 폐기하면 프로레타리아라는 계급의 지배, 곧 국가사회주의도 폐기될 것이라는 마르크스외 엥겔스의 선언4)은 반은 성공했고 반은 실패했다. 성공은 폭력적인 정권창출이고, 실패는 국가사회주의 이후 국가가 오히려 민족의 분열과 함께 강화됐다는 사실이다. 그 사이에는, 이런 방책들이 나라마다 다양할 것이라는 그들의 말처럼, 세습 수령제 사회주의 국가라는 변종도 낳았다. 무엇보다 그들의 치명적 오류는 강화된 국가에 있다. 전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기대했던 그들의 신념을 비웃듯, 민족으로 갈린 노동자들 끼리 총을 겨누는 사태도 일어 났다. 그렇다면 전세계 노동자의 단결과 국가의 폐기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아직 실현되지 않는 하나의 규제적 이념인가? 이에 대해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가 국가의 폐기를 너무도 안이하게 인식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의 업적은 자본의 운동과 필연적 붕괴라는 법칙을 창안한 점에 있지 공산주의에 대한 면밀한 계획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오류가 면제되지는 않는다. 가라타니처럼 국가의 폐기를 하나의 규제적 이념으로 받아 들인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폐기하도록 해야 한다는 당위로 인식한다면 그만이다. 목적의 왕국은 실현되지 않더라도 실현해야 한다는 의지로 마치 언제인가 실현될지도 모르는 미래의 완료에 기여를 하고 있다는 착각을 준다. 그러나 실효적 지배로서 작용하고 있는 국가의 장력은 부정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힘에 빠져드는 마력 덩어리다. 왜 그런가? 그것은 사적 소유가 자본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국가사회주의가 보여주는 점은 사적 소유가 오히려 국가기관의 편에서 독점되고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즉 사유재산은 국가가 걷어내는 세금으로 축적된 재산도 의미한다.
"엥겔스나 레닌과 달리 마르크스는 코뮤니즘을 소비-생산협동조합에서 찾았다. '자본론'에서 그는 그것을 '개체적 소유의 재건'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협동조합에서는 각자가 자유로운 소유자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의 폐기라고 하면 곧 국유화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사유재산이란 어떤 의미에서 국유재산이고, 그 증거로 우리는 그 소유에 대해 국가에 세금을 내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사유재산의 폐기란 국유재산의 폐기, 즉 국가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다."5)
자본의 상부구조 내지 프로레타리 독재의 수단으로 그려지던 국가는 오히려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운동하는 기관으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곤봉으로 위협을 하면서도 공익이라는 수혜를 베푸는 국가는 그래서 또 다른 탐욕의 대상으로까지 그려진다. 그러나 국가의 존립기반인 세수가 어떤 근거에서 이루어 진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국가의 극복을 위한 대안은 매우 간단하다. 국민의 5대 의무라고 일컬어진 규정 중, 국방의 의무라는 규정은 현재 위협받고 있다. 유권자 중 53%의 침묵 속에 등장한 정권은 마치 국가개조의 전권을 수행해야 한다는 듯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데 국가기관에 동력을 제공하는 납세의 의무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제기는 별로 없고 의례적인 용법으로 국민의 혈세라는 말만 사용되곤 한다. 세수를 건드려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은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정권을 창출한 지배세력에 있다. 그런데 지방세를 사용해 전시용 건설사업을 수행하고 부동산 값 앙등의 역할까지 맡는 자치단체와, 기업에 프랜들리하기 위해 법인세를 탕감하고 그 세액 손실을 공기업 매각으로 보전하며 대규모 토목공사와 신형무기사업에 천문학적 지출을 계획하는 국가에 제동을 건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렵다. 감시 정도가 아니라 제동을 걸려면 현실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자치단체나 국가 기관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논리와 마찬가지만, 문제는 출세를 해도 별 수 없는 전례를 지난 10년간 보아 왔다는 사실이다. 권력의 밖에서 권력은 타도 대상이지만 권력의 편에서 권력은 너무도 유혹적이다. 너무 앞서지 말자. 단, 납세의 의무라는 판에 박힌 규정에 대해서 다른 규정을 제시할 수 있는 대중의 상상력을 기대해 보자. 촛불 하나가 거대한 들불로 번져가는 현정세는 그러한 상상이 하나의 사회적 힘으로 전화되는 정치실험이다.
3.연재를 마치며
애초에 의도했던 계획에서 이 연재가 도달한 지점은 산정상은 아닐지라도 산정상이 저멀리 보이는 고원의 어디쯤일 것이다. 저 먼 곳에는 『자본론』이란 거대한 산맥이 펼쳐져 있다. 『자본론』을 펼치기 전에 『자본론』을 이성으로 읽을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도 읽어 보라는 듯 또 하나의 정언명령을 창안한 청년 마르크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여러모로 부족한 이 연속서평을 끝맺는다.
“인간을 인간이라고 전제하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신뢰하고만 교환할 수 있다. 네가 예술을 향유하기를 바란다면 너는 예술적인 소양을 쌓은 인간이어야 한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너는 현실적으로 고무하고 장려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어야만 한다...네가 사랑을 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사랑으로서의 너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너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너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6)
1)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권 중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박종철출판사, 2003), 73-7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