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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아르파이어, 역사의 천사  L'angelo Della Storia : 발터 벤야민의 죽음, 그 마지막 여정, 정병선 옮김(오월의 봄, 2017)

우선 소설의 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약간의 허구적 조연으로 동원되었지만 심야의 피레네 산맥에서 난파된 벤야민과 조우할 충분한 개연성 있는, 반프랑코 전선의 젊은 전사이자 실존인물인 라우레아노의  이야기는 다큐에 가깝다. 단지 우울하게만 전개될 수 있는 벤야민 만의 서사에 활기를 주는 장치로만 볼 수 없는 라우레아노의 역사적 행군은 또다른 벤야민의 역사철학과 만난다. 군사적 용어인 행군과 학문적 용어인 철학의 역사적 만남이 얼마나 생소했던지 이 극적인 만남은 오래 가지 못하지만 다 쓰러져가는 불빛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줄 만큼의 큰 힘을 이 유럽의 불온한 지성, 그렇지만 불멸에 가까운 영향력을 남기게 될 벤야민에게 보태준다. 마치 유럽을 탈출하려는 벤야민에게 손을 건네준 수 많은 이들, 아도르노나 숄렘, 호르크하이머, 바타이유, 아렌트 등등의 인물들과 달리 비록 그의 이름도 모르던 사회주의자 라우레아노에게 벤야민은 도움이 절실한 유대 망명객일 뿐이었다.

오래 전부터 나의 관심으로부터 방치되어 있던 이 소설책을 읽게 된 우선적 동기는 신학정치단편과 역사철학테제에 있다. 수박 겉핡기 식으로 십여 년 전 읽은 이 글들을 야콥 타우베스 덕에 다시 읽으면서다. 죽은 이들이 어쩌면 살아가는 이들을 자극하는 일이 독서의 보람인가? 벤야민은 말한다. 행복에의 추구는 반대동력으로 몰락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소설에서 과연 벤야민의 최후는 라우레아노에게 고난의 험행길에서 소생의 길을 열어 줬다. 죽은 이들의 지적 전통은 자양분처럼 삶을 이어나갈 자산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거대한 도서관은 부활을 염원하는 피라미드일 것이다.

시종일관 작가가 벤야민을 다루는 방식에는 장난기와 더불어 약간의 조롱도 있다. 마치 학창시절 학교를 아지트로 삼아 날라다니는 청춘이 제 앞가림은 못하지만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지적 역량과 예의를 갖춘 백면서생 급우를 놀리듯이. 역사라는 거대한 파도를 고도의 관측대에서 관찰하며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기는 하지만 정작 그런 관찰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합리화하면서 신체의 연약함과 우울증에 굴복할 수 밖에 없던 것일까? 작가의 놀림은 그런 아쉬움의 표현이 아닐까? 지식인이란 허울을 벗겨서 보면 이런 벤야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가 말한 세계정치의 과제는 아직도 완료되지 않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이율배반을 넘어서는 것이이말로 살아 남은 자들의 몫이다.

https://youtu.be/diEVtaleyIU?si=f8HxLon2uIsB1Zg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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