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군대시절, 연병장 사열대 옆에 키작은 돌덩이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軍命如山"."군대의 명령은 산과 같다"는 이 글귀는 언뜻보면 멋지게 보이나 무서운 말이다. 군대에서의 명령은 산이 내려 앉은 것과 같아서 한번 발동되면 거부할 수 없는, 움직일 수 없는 산과 같다는 말이다. 군대에서 명령을 그토록 강조하고, 아니 명령 자체가 군대의 본질인 점은 인간사회의 가장 사악한 본능을 충족시키려는 목적, 즉 위협과 승전 때문이다. 이 목적은 물론 이보다 더 큰 목적, 즉 그 사회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겠지만, 이런 목적론의 계열을 추적해 들어가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로 저 무서운 말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전시적 상황뿐이다. 한순간에 생존이 뒤바뀔 수 있는 비정상적인 폭력적 상황에서 군대라는 체계는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되는 전쟁기계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율성이니 도덕이니 하는 말들은 공허한 단어들일 뿐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 즉 전시와, 전시에 버금가는 작전상황에서 명령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군대는 그야말로 거대한 블래호크의 다운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우리의 일상과 너무도 거리가 멀지만, 종종 우리는 이러한 군대적 문화가 암암리에 통용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왜? 당장 세계 저편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엄연히 한국군이 파병되어 가 있듯, 세계에는 국지적 전쟁의 화염이 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다른 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팽배해질 정도로, 경제대국의 군비가 증강하고 있는 상황은 분명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이런 세계정세를 벗어나 이 사회의 현실을 보더라도, 인간의 생명활동이 생존경쟁 내지 생존투쟁이라는 이름의 격전장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회가 그런 전시적 분위기의 면모를 띤다면, 분명 군대에서 통용되는 명령체제가 그대로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는 위험이 산재해 있다. 연세의료원의 파업, 이랜드 사건 등은 그러한 위험사회의 흐름에 제동을 거는 지엽적 사례의 일면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런 사회 현실의 장력이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순전히 가상적인 상태에서 왜 군대가 인간의 자율성을 파괴할 수 있는지 논해 보겠다. 그리고 인간이 과연 자율적일 수 있을지, 그리고 그럴만한 자격과 능력을 갖춘 존재자인지는 확신하기 보다는 일단, 그럴 수 있다고 가정해 본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전시에서 대량학살을 감행한 전범이나 잔혹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친 전직 경찰, 혹은 대형비리에 연루된 회사간부가 법정의 추궁에 냉랭히 대답하는 이런 답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이 답변에는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오직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므로, 오히려 상을 줘야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울분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런 울분은 정당한 것인가? 이 울분은 한 인간으로서 그의 자율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 뿐더라, 이런 자율성을 행사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비분이 되어야 하지만, 여전히 그는 타율적으로 자신에게 명령한 상사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자신은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처벌을 하려면 명령을 한 주체에게서 해야지 왜 자신을 닥달하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 볼 수 있다. "당신은 그런 명령이 옳다고 보았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그 명령을 수행한 건가요?" 이에 대해서 여전히 자신은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다. 즉 자신의 생각을 바탕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정신을 가진 존재자로 인간을 정의한다면, 그는 이런 정의에서 전혀 부합할 수 없는 그런 존재자, 즉 인간이 아닌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기계처럼 일할 수 있다. 군대가 인간에게 끼치는 해악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을 생각없는 기계로 양산하는 군대, 군대적 문화의 타파는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찾아 가는 하나의 실천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