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간도1 들여다 보기

영화 Film 2007. 5. 16. 17:4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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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랍다. 중국 대륙영화를 제외하곤 홍콩 영화란 주윤발 시대의 홍콩 느와르나 액션 코메디가 전부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시나리오도 탄탄하고 재미도 있으면서 무게감있는 갱영화일 줄은 몰랐다. 최근 개봉되는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가 '무간도'의 리메이크란 점이 이 영화의 무게를 반증한다.

무간도는 열반경에 나오는 18번째 지옥을 말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한 스파이의 내면 상태를 암시한다.  

유덕화, 양조위의 주연도 돋보이지만 황추생(황국장), 증지위(한침)의 조연도 볼만하다.

영화 종반부에서 다른 삶(선한  삶)을 살고 싶다는 경찰 간부직 스파이 유건명(유덕화)에게, 경찰신분을 숨긴채 갱스파이로 젊음을 소진한 진영인(양조위)이 코웃음친다. 그러자 유건명은 진영인에게 자신을 죽일 거냐고 묻자 진영인은 다시 코웃음치며 자신은 경찰이라고 한다. 이때 유건명의 이 한마디가 카메라 원격조정으로 화면을 급변시키면서 그대로 진영인이 유건명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게 한다.

                                                 "그걸 누가 아는데?"

경찰 후보생 시절에 갱스파이 임무를 위해 특채로 뽑힌 진영인이 경찰학교에서 추방되는 형식으로 나갈 때 그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단 두 사람, 면접관과 황국장 뿐이었다. 이 영화는 초반부에 이 면접관의 장례행렬을 보여 주면서 본래 경찰 신분인 진영인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지탱하던 한 축이 붕괴되는 것을 보여준다. 한침을 올가미를 만들어 합법적으로 구속하기 위해 진영인과 접선을 했던 황국장이 갱들에게 무참하게 죽임을 당해 남았던 한 축 마져 무너진 후,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진영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유건명 한사람으로 전도된다. 즉 진영인은 자신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고 이 신분을 증명할 데이타를 이미 삭제해 버린 사람을 놓고 총을 겨누는 것이다.  

진영인으로서는 유건명을 죽여서는 안된다. 죽이면 자신의 신분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살인범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유건명은? 경찰 고위직으로 승승장구하는 자신의 입신을 위해 그는 자신 외에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정리되는 것을 지켜본다. 영화상으로 유건명이 진영인과 진정으로 '합작'을 바란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자신을 살려준 경찰 내부의 또다른 부하 스파이를 여지없이 살해하는 것을 보면, 그가 믿는 것은 그 자신 밖에 없다고 보는 편이 유력하다. 단지 진공 엠프로 음악듣기를 좋아하는 취미의 공통성이 '합작'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제 자신 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법칙과 규율이 없는 곳으로 '나도 나가고 싶다'라는 유건명의 말은 승자의 반성일 뿐이다. 그래서 도덕은 강자를 위한 것인가?

*영화 시작부에 대여섯명의 청년들이 한침의 설교를 듣고 경찰학교에 입사하는 것을 보면, 경찰 내부에 유건명의 정체를 아는 스파이가 또 있을 수 있고, 진영인이 죽은지 6개월 후 그의 신분이 회복되는 점은 이런 이야기 구도를 희석시킬 소지가 있으나, 정체성이라는 주제의 골격을 드러내는데 의의가 있을 뿐이다.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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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 이야기

책들 Bücher 2007. 5. 15. 17:3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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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으로 잘 알려진 허먼 멜빌의 단편이다. 절판된 책인데 논술고사의 여파로 재출간되었다고 한다. 역시 입시의 힘은 무섭다. 금주차 한겨례 21에도 논술예상문제가 부록으로 수록될 정도이니. 

오래전에 보았던 '좀머씨 이야기'와 흡사한 면이 있는 이야기다. 도대체 저 멀대같은 인간은 왜 밤이나 낮이나 온종일 걷기만 하며, 역시 멀대같은 창백한 한 인간은 필경만을 하고 다른 업무지시에 대해선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거부만을 하는 것일까. 보통 사람으로서는 보기 힘든 괴이한 면들이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두 명 다 죽음을 선택한다. 선택당하지 않고.

보통과 다름을 사람들은 좀처럼 받아들기 힘들어 한다. 형평법원장으로 나오는 주인공과 같은 섬세한 배려는 기대하기 힘들다. 어느 고용주가 자신의 업무지시를 아무런 근거없이 단지 '그러고 싶지 않다'라는 말로 거부하는 직원을 견딜 수 있을까. 당장 소리를 버락 지르며 짐싸고 나가라고 할 것이다. 바로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한 늙은 변호사가 기괴한 대상으로 몰리는 한 인간에 보이는  반응이다. 나중에 풍문으로 들은 바틀비에 대한 신상, 그러니까 그가 미수령우편물처리담당자였다는 이력만으로 바틀비에 관해 변호사는, 아니 멜빌은 답을 알려 주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이질감으로 삶의 수위는 깊어지는 것일까.  

2005/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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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의 위기, 일상의 위기

책들 Bücher 2007. 5. 14. 17:3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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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조속히 처리할 일이 있어 사무실에 평소보다 일찍 왔다. 산을 넘어 오면서  예전에 연수를 받던 중 한 시민단체 간사가 자신은 늙어서 부시와 함께 무덤에 가고 싶다는 말이 떠올랐다. 짬짬히 김재명의 '석유, 욕망의 샘'(프로네시스, 2007)을 보면서, 미국 대외정책의 중심축이 석유를 기점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을 굳히게 한다. 20세기 초반까지 본래 국경 구분이 모호했던 중동에 석유를 둘러싼 이권분쟁으로 강대국들이 경계를 긋시 시작한 이래, 석유 때문에 내국민 간에는 물론 국제적 분쟁의 원인이 된다는 별 새로울게 없는 사실은,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흔들릴 수 없는 상식으로 굳어진 면이 있다. 그러나 미국이 벌이고 있는 아프카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침공, 그리고 고조되는 이란의 위기 등 국지적 분쟁의 원인이 너무나도 우리에게 필요한 석유라는 편의적 자원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일상적 진실에 부딪치게 한다. 아프카니스탄은 아직 발굴되지 않는 미래 석유자원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1차 석유파동을 초래한 1973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난 후 , 산유국간의 가격 담합체인 OPEC의 주요 구성원인 이란의 팔레비 왕은  석유값을 코카콜라 값으로 올릴 수 있지 않냐고 했다. 코카 콜라 1 배럴은 900원 대  환율로 200달러다. 산유국간의 담합이든, 강대국의 석유 주권 개입이든, 가능한 대체 자원의 확보이든, 석유의 위기는 일상생활의 위기로 몰려오는데 주말만 되면 차를 타고 깨끗한 자연의 품으로 가고 싶어하는 바램들을 바이오 디젤이 얼마나 채워줄지 기대된다. 일을 처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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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3년, 이미 그 전에 성리학에 기반한 실행으로 조정에서 인정받아 단계를 뛰어넘어 승진을 하던 조광조는 태조 때 부터 내려오던 미신적 제의, 즉 왕실에서 초제나 기우제 등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관청인 소격서를 혁파할 것을 주장한다. 이런 제의는 도교적 이단으로서 성리학의 이념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조광조에게도 중종에게도 이 소격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이 문제는 중종과 조광조 간의 힘의 대결로 귀결되고 만다. 소격서 혁파 주장은 조선 초기부터 줄곧 제기된 주장이라 새로울 게 없는 일이지만 조광조는 이 소격서 폐지여부가 앞으로 자신이 행사할 정치적 영향력을 어떠한 타협이나 절충도 없이 관철하기 위한 포석으로 여겨 끈질지게 밀어 붙인다. 결국 조광조를 따르던 대간들이 사직을 불사하며 왕에게 압박을 가하고, 삼정승도 이들에 동조함에 따라 중종은 소격서를 폐지할 수 밖에 없었지만, 1년 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실각되고나자 중종은 소격소를 다시 부활시킨다.

중종은 조광조를 등용함으로써,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자신에게 부담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는 반정공신들을 제어할 수 있었지만, 소격서 논쟁으로 왕의 권위를 궁지에 몰아 세우며 밀어붙이는 조광조를 결코 곱게 볼 수는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소격서 따위는 별 문제거리가 아니며, 당시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이를 문제삼는 것은 꼰꼰한 유생의 불필요한 집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정략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발판이라면, 결코 경시할 수 없다. 사실 조광조가 성리학적 이념에 부합한 정치를 구현한다는 것도 공자에 의해 윤색된 먼 상고시대의 통치를 이상화해 신하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즉 소격서 논란에서 조광조의 내면을 압박한 것은 원리주의적 유생의 양심이라기 보다는 왕의 권위에 일격을 가하려는 모험주의적 정략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고속승진을 하다가 36살의 나이에 사약을 받은 젊은 정암은 정치가로서는 실패했지만 그 실패 때문에 조선 성리학의 계보(정몽주-길재-김굉필-조광조)를 잊는 성현으로 추대되어, 남명과 같은 사림들의 숭배를 받게 된 것이다. 즉 정치가로서의 그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로서의 그를 기리는 것이다.    

참고문헌 : 정두희, '조광조'(아카넷, 2000)

2007/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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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티 전략

카테고리 없음 2007. 4. 13. 11:0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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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전략서인 스티븐 카터의 『르네상스 메니지먼트』와 교양서인 피에르 레비의 『집단지성』에는 하나의 공통된 논의가 있다. 공통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 둘다 현재의 시대적 흐름에서 공유하는 점이 있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그 공통점은 자발적 조직에 두는 강조이다. 레비는 사회적 유대를 겨냥한 과거의 조직이 몰 중심의 조직이었다면 현재는 나노, 분자 중심의 조직이 관건이라고 말한다. 몰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분자 하나 하나의 자발성 보다는 중심 핵의 통제에 의해 움직이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말한다. 반면 분자 중심이라는 것은 분자 하나 하나의 개별성과 차이성에서 전체의 활력이 발생한다고 보는 자치 체제를 말한다. 그리고 레비는 이러한 분자 중심의 비유를 통해 인간을, 인간 지성을 강조한다. 어떠한 집단체제 방식이 있다하더라도 이것을 창조하고 지속시킬 인간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한 집단이 중심지도부의 몰락으로 전멸의 위기에 처할 지라도 인간 개개인의 힘에 의해 집단이 살아남을 수도 있다. 또한 아무리 잘 정비된 체제라고 할지라도 인간이 움직이지 않는 한, 그것은 죽어있는 체제에 불과하다. 다만 레비는 기술체제의 발전을 인간이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점을 강조한다. 신화시대의 개념인 희생, 신, 충성과 같은 특정 고정점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유대 방식이 기술체제의 발전 덕분으로 유동성을 갖는 유연한 방식의 통합으로 대체가능함을 말한다. 즉 과도한 책임을 특정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이를 기술체제에 맡켜 구성원에게 고르게 분산시키는 기술 진보를 이용해야 함을 말해준다.

우리나라 처럼 인터넷 망이 전역 곳곳에 뚫려있고 거대 온라인 기업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커뮤니티가 구축된 상황에서 그러한 자발적 조직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진부할지 모른다. 다만 자발적 조직의 결합을 위한 물적 기술적 조건은 너무도 풍부히 마련되어 있지만 이것을 최적으로 활용하는 지성의 풍토는 아직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지성이란 연구실에 코박고 있는 집단들의 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사람들-레비의 표현을 빌면 소방수, 경찰, 간호사, 사회보장요원,NGO멤버,스포츠센터 지도원 등 신프로레타리아 사람들이 의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의 그것이다. 제도권 미디어 장치가 코방귀뀌는 이들의 목소리가 공중에 흔적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충분히 기술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발화가 가진 개별성을 최대한 변질시키지 않기 위해서 기술적 중개자는 집단의 담화 지형을 실시간으로 계산하고 검산한다."(레비)

2004/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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