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글쓰기

단상 Vorstelltung 2025. 10. 4. 04:4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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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매일 아침에 30분에서 1시간 가량 '정신현상학'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데 의식 장을 다룬 꼭지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적지 않은 분량으로 나갔는데, 앞으로 자기의식, 이성, 정신, 절대정신, 절대지 장에 관해서 쓴다면 어느 정도 분량이 나갈지 가늠이 안된다. '정신현상학'을 아직 다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 책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글쓰기와 독서의 경주같기도 하다. 마치 거북이와 개미의 경주처럼. 일단 목표는 올해까지 이 시합을 마치는 것으로 잡았지만 다급할 이유는 없다. 그냥 생활의 일부로 밀고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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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강독 : 관찰하는 이성

헤겔 Hegel 2025. 9. 27. 01:5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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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A.) Vernunft
B. Selbstbewusstsein

텍스트 :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아카데믹판 h.v. G.J.P.J. Bolland(Leiden A.H. Adriani, 1907)

A.Bewusstsein
I.Die sinnliche Gewissheit oder das Dieses und das Meinen
II.Die Wahrnehmung oder das Ding und die Täuschung    
III.Kraft und Verstand, Erscheinung und uebersinnliche Welt  S.117-
B. Selbstbewusstsein
IV.Die Wahrheit der Gewissheit seiner Selbst
a.Selbstständigkeit und Unselbstständigkeit des Selbstbewusstseins ; Herrschaft und Knechtschaft S.151-
b.Freiheit des Selbstbewusstseins ; Stoicismus, Skepticismus und das unglückliche Bewusstsein S.164-
C.(AA.) Vernunft
V.Gewissheit und Wahrheit der Vernunft S.194-
(A)Beobachtende Vernunft S.205-

*게시된 번역과 해설은 AI를 바탕으로 제가 수정•편집한 것입니다. 다른 번역이나 해설 제안 적극 환영합니다.

Dieser Idealismus ist in diesem Widerspruche, weil er den 'abstracten Begriff' der Vernunft als das Wahre behauptet, daher ihm unmittelbar ebensosehr die Realität als eine solche entsteht, welche vielmehr nicht die Realität der Vernunft ist, während die Vernunft zugleich alle Realtät sein sollte; diese bleibt ein unruhiges Suchen, welches in dem Suchen selbst die Befriedigung des Findens für schlechthin unmöglich erklärt. - So inconsequent aber ist die wirkliche Vernunft nicht, sondern nur erst die 'Gewissheit', alle Realität zu sein, ist sie in diesem 'Begriffe' sich bewusst als 'Gewissheit, als Ich noch nicht die Realität in Wáhrheit zu sein und ist getrieben, ihre Gewiss-heit zur Wahrheit zu erheben, und das 'leere' Mein zu erfüllen.

이 관념주의는 이 모순 속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의 ‘추상적 개념’을 참된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그에게 즉각적으로 성립하는 현실성은 오히려 이성의 현실성이 아닌 것인 반면, 이성은 동시에 모든 현실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 관념주의는 하나의 불안한 탐구로 머물며, 그 탐구 속에서조차 찾음의 만족을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의 이성은 그렇게 모순적으로 일관성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현실이다’라는 확신에 머무르는 한에서만, 이성은 스스로 ‘확신’으로서만 의식될 뿐, 아직 ‘실제로는 현실이 아님’을 자각한다. 그리고 이 확신을 참된 진리로 끌어올리며, 그 ‘빈 나의 것(Mein)’을 채우도록 밀려나게 된다[이 대목은 헤겔이 빈 이상주의(leerer Idealismus)의 자기모순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참된 이성’의 운동을 제시하는 부분
1.빈 이상주의의 모순
추상적 개념(“나는 모든 현실이다”)만을 붙잡다 보니, 실제로는 자기와 무관한 현실(감각적 현실, 사물 자체 등)을 여전히 본질로 두게 됨. 이로써 이성은 “모든 현실이 나다”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나 아닌 현실이 있다”라고 말하는 자기모순에 빠짐
그래서 ‘탐구(현실을 채우려는 시도)’를 계속하지만, 그 탐구가 결코 만족에 이를 수 없음을 스스로 선언하는 셈임
2.헤겔의 전환
그러나 “실제 이성”은 단순히 이런 추상적 확신에 머무르지 않음. 처음에는 단순히 “나는 모든 현실이다”라는 확신만 있으나, 곧 스스로 "아직은 진리로서 현실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자각을 하게 됨. 이 자각은 이성을 추동하여 자기 확신을 ‘진리’로 고양하고, 추상적 “나의 것(Mein)”을 채우게 만듬
✅ 요약:
헤겔은 이 구절에서, “빈 이상주의”는 추상적 자기확신에 머물기 때문에 끝없는 탐구 속의 불만족에 빠진다고 비판. 그러나 참된 이성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확신이 ‘아직은 진리가 아님’을 깨닫고, 그 확신을 구체적 현실 속에서 실현하려는 운동으로 나아감].

상동 204

Dieses Bewusstsein, welchem das Sein die Bedeutung des 'Einen' hat, sehen wir nun zwar wieder in das Meinen und Wahrnehmen hineingehen, aber nicht als in die Gewissheit eines nur 'Anderen', sondern mit der Gewissheit, dieses Andere selbst zu sein. Früher ist es ihm nur 'geschehen' ., manches an dem Dinge wahrzunehmen und zu 'erfahren'; hier stellt es die Beobachtungen und die Erfahrung selbst an.

이 존재(Sein)가 ‘하나(Eines)’라는 의미를 지니는 이 의식이 이제 우리는 다시 ‘심상(Meinen)’과 ‘지각(Wahrnehmen)’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다른 것’에 대한 확실성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다른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확실성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전에는 사물에 대해 이것저것을 지각하고 ‘경험한다’는 것이 그저 우연히 ‘일어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식이 스스로 관찰을 수행하고 경험을 산출한다[해설
1.‘존재가 하나라는 의미를 지니는 의식’
여기서 의식은 존재(Sein)를 단순히 외부의 어떤 낯선 것, “다른 것”으로 보지 않고, 그것이 하나로 통일된 것(Eines)이라는 의미로 파악함. 즉, 존재와 자신이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진 상태임
2.의견과 지각으로의 귀환
의식은 다시 ‘의견(즉각적이고 주관적인 확신)’과 ‘지각(대상을 받아들이는 행위)’의 단계로 돌아가지만 단순히 외부 사물에 대한 확실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각된 다른 것이 사실은 자기 자신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새로운 자기 확신을 갖고 돌아가는 것임
3.수동적 경험에서 능동적 관찰로
이전에는 사물이 우연히 주어지고, 의식은 그냥 ‘겪는’ 존재였음. 즉, 사물과 경험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대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였음. 그러나 이제는 의식이 자발적으로 관찰을 수행하고 경험을 구성함. 이는 곧 자연과 대상을 단순히 겪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태도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
4.정리
이 구절은 의식이 더 이상 수동적으로 세계를 맞이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속에서 능동적으로 관찰하고 경험을 만들어내는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명. 이것은 과학적 관찰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음].

상동 205

Meinen und Wahrnehmen, das für uns früher sich aufge-hoben, wird nun von dem Bewusstsein für es selbst aufgehoben; die Vernunft geht darauf, die Wahrheit zu 'wissen', was für das Meinen und Wahrnehmen ein Ding ist, als Begriff' zu finden, d.h. in der Ding-heit nur das Bewusstsein ihrer selbst zu haben. Die Vernunft bat daher jetzt ein allgemeines 'Interesse' an der Welt, weil sie die Gewissheit ist, Gegenwart in ihr zu haben, oder dass die Gegenwart vernünftig ist. Sie sucht ihr Anderes, indem sie weiss, daran nichts Anderes als sich selbst zu besitzen; sie sucht nur ihre eigene Unendlichkeit.

이전에 우리에게 있어서 이미 지양된 바 있는 의견(Meinen)과 ‘지각(Wahrnehmen)’이 이제는 의식 자신에게도 지양된다. 이성은 진리를 '알고자’ 나아가는데, 곧 의견과 지각에 있어 사물인 것을 개념으로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즉 사물성(Dingheit)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의식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이성은 세계에 대한 보편적 ‘관심(Interesse)’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성은 세계 속에서 자기의 현재를 가지는 확신, 혹은 현재가 이성적이라는 확신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자기의 ‘다른 것’을 찾는데, 그것은 곧 그 다른 것 안에 자기 자신밖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이성이 찾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무한성이다[해설
1.Meinen und Wahrnehmen의 지양
앞에서 '의견’과 ‘지각’이 그 자체의 한계를 드러내며 넘어섰는데, 이제 의식 자신도 그것들을 ‘지양된 것’으로 파악함. 즉, 단순한 주관적 확신이나 외적 인상에 머무르지 않고,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려 함
2.이성이 알고자 하는 것
이성은 사물을 단순히 ‘거기에 있는 것’으로 두지 않고, 그것을 개념(Begriff) 속에서 파악하고자 함. 즉, 사물의 본질을 자기와의 관계, 자기 인식 속에서 이해하려는 것. 사물 속에서 곧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
3.세계에 대한 보편적 관심
이성은 이제 세계 전체에 관심을 가짐. 왜냐하면 이성은 세계 속에 자기 자신이 실재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며, 세계가 근본적으로 합리적이라는 믿음을 갖기 때문잉
4.자기 자신을 찾는 운동
이성이 세계에서 찾는 ‘다른 것’은 사실상 자기 자신임. 세계 속에서 마주치는 타자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을 반영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성은 이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의 무한성을 추구하는 것임
5.정리
이 구절은 의식이 ‘이성’으로 전환하는 핵심 지점을 보여줌. 더 이상 사물을 ‘그냥 있는 것’(Meinen, Wahrnehmen)으로 두지 않고, 사물 속에서 개념을 찾으며, 그 개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함. 이로써 이성은 세계에 대해 보편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며, 세계가 근본적으로 합리적이라는 확신 속에서 움직임. 궁극적으로 이성이 찾는 것은 세계 속에 드러난 자기 자신의 무한성임].

상동

Zuerst sich in der Wirklichkeit nur ahnend, oder sie nur als das 'Ihrige' überhaupt wissend, schreitet sie in diesem Sinne zur allgemeinen Besitznehmung des ihr versicherten Eigentums, und planzt auf alle Höhen und in alle Tiefen das Zeichen ihrer Souveränität. Aber dieses oberflächliche 'Mein' ist ㅣnicht ihr letztes Interesse; die Freude dieser allgemeinen Besitznehmung findet an ihrem Eigentume noch das fremde Andere, das die abstracte Vernunft nicht an ihr selbst hat.

처음에 이성은 현실성 속에서 단지 막연히 예감하듯이 자신을 느끼거나, 혹은 그것을 단순히 ‘자기의 것’ 일반으로만 알 뿐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이성은 자기에게 보장된 소유물에 대한 보편적 소유화( Besitznehmung )로 나아가며, 모든 높고 깊은 곳마다 자기 주권의 표식을 심는다. 그러나 이러한 피상적 ‘나의 것(Mein)’은 이성의 최종적 관심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보편적 소유화의 기쁨 속에서조차 이성은 여전히 자기 소유물 안에서 낯선 타자(Andere)를 발견하기 때문인데, 추상적 이성은 자기 자신 안에서는 그런 타자를 갖지 않는다[해설
1.막연한 자기-예감
처음에 이성은 현실성 속에서 자신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렴풋이 예감하는 수준에 머뭄. 현실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파악하긴 하지만, 이는 매우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임
2.보편적 소유화
이런 태도에서 이성은 현실 세계 전체를 자기의 소유물로 삼으려 함. “높고 깊은 곳마다 주권의 표지를 세운다”는 표현은, 이성이 모든 영역(자연, 인간, 문화 등)에 자기 이성을 투사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라고 선언하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줌
3.피상적 ‘나의 것’
그러나 이러한 ‘소유 선언’은 피상적인 단계에 불과함. 단순히 모든 것을 “내 것”이라 부른다고 해서, 곧바로 그것이 진정한 자기 자신과 합일되는 것은 아님
4.타자의 발견
이성은 자신이 차지한 소유물 속에서 여전히 자기와 낯선 다른 것, 즉 자기에 속하지 않는 요소를 발견하게 됨. 추상적 이성은 자기 자신 안에서는 그런 ‘타자’를 가지지 않으므로, 세계 속에서 이 타자의 문제와 마주하게 되는 것
5.정리
이 구절은 이성이 세계를 단순히 “나의 것”으로 소유화하려는 첫 단계와 그 한계를 보여즴. 이성은 세계 전체를 자기 소유로 선언하며 주권을 과시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소유물 속에 여전히 낯선 타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함. 따라서 단순한 ‘소유화’와 ‘추상적 자기 동일성’은 이성의 최종 목적이 될 수 없으며, 더 깊은 자기-타자 변증법을 통해 나아가야 함을 암시함].

상동 205-206

Die Vernunft ahnet sich als ein tieferes Wesen, denn das reine Ich 'ist' und muss fordern, dass der Unterschied, das mannigfaltige Sein, ihm als das Seinige selbst werde, dass es sich als die Wirklichkeit anschaue und sich als Gestalt und Ding gegenwärtig finde. Aber wenn die Vernunft alle Eingeweide der Dinge durchwühlt und ihnen alle Adern öffnet, dass sie sich daraus entgegenspringen möge, so wird sie nicht zu diesem Glücke gelangen, sondern muss an ihr selbst vorher sich vollendet haben, um dann ihre Vollendung erfáhren zu können.

이성은 자기 자신을 순수한 ‘나(Ich)’ 그 자체 이상의 더 깊은 본질로 예감하며, 따라서 차이와 다채로운 존재(Sein)가 자기 자신의 것으로 되어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이성은 자신을 현실성으로 관조하고, 자기 자신을 형상(Gestalt)과 사물(Ding)로서 현존하는 것으로 발견한다. 그러나 이성이 사물들의 모든 내장을 뒤지고, 그 모든 혈관을 열어, 마치 그 속에서 자신이 튀어나오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이성은 그 행복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이성은 먼저 자기 자신 안에서 완성되어야만, 그 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완성을 경험할 수 있다[이 대목은 이성이 자기 자신을 더 깊은 본질로 예감하면서도, 외부 탐구만으로는 그 충족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하는 구절임
1.이성의 예감 (ahnen)
이성은 단순한 주체적 ‘나’ 이상의 깊은 본질임을 스스로 예감함. 따라서 외부 세계의 다양성과 차이가 자기 자신의 것으로 드러나기를 요구함. 즉, “세계 전체가 곧 나의 현존”이라는 확신을 추구
2.자기 자신을 현실성으로 보고자 하는 이성
이성은 자신을 단순한 내적 주체가 아니라, 외부적 사물과 구체적 형상 속에서 만나고자 함.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외부 세계 안에서 ‘객관적으로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하려는 충동이 있음
3.사물 해부의 한계
이성은 자연과 사물의 심층을 파헤치고(“모든 내장을 뒤지고, 모든 혈관을 연다”),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바람. 이는 곧 자연과학적 해부·분석의 은유로 읽을 수 있음. 하지만 이 길은 이성에게 진정한 충족(“행복”)을 주지 못함
4.내적 완성의 필요
이성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세계 속에서 만날 수 있으려면, 먼저 자기 자신 안에서 완결(Volendung)을 성취해야 함. 즉, 내적 자기 성찰과 자기 개념의 확립이 선행되어야, 그 다음에야 외부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음
5.정리
이 구절은 외부 탐구(자연 해부, 분석)만으로는 이성이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없고, 먼저 자기 자신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 이는 단순한 경험적 관찰의 한계를 넘어, 이성이 자기 본질을 스스로 확립해야 한다는 철학적 요구로 이어짐].

상동 206

Das Bewusstsein 'beobachtet'; d. h. die Vernunft will sich als seienden Gegenstand, als wirkliche, sinnlich gegenwärtige Weise finden und haben. Das Bewusstsein dieses Beobachtens meint und sagt nur, dass es nicht sich selbst' , sondern im Gegenteil 'das
Wesen der Dinge als der Dinge' erfahren wolle. Dass dieses Bewusstsein dies meint und sagt, liegt darin, dass es Vernunft 'ist', aber ihm die Vernunft noch nicht als solche Gegenstand ist. Wenn es die 'Ver-nunft' als gleiches Wesen der Dinge und seiner selbst wüsste, und dass sie nur in dem Bewusstsein in ihrer eigentümlichen Gestalt gegenwärtig sein kann, so würde es vielmehr in seine eigene Tiefe steigen und sie darin suchen, als in den Dingen. Wenn es sie in dieser gefunden hätte, würde sie von da wieder heraus an die Wirklichkeit gewiesen werden, um in dieser ihren sinnlichen Ausdruck anzuschauen, würde aber ihn sogleich wesentlich als 'Begriff' nehmen.

의식은 ‘관찰한다.' 즉 이성은 자신을 존재하는 대상, 실제적이고 감각적으로 현존하는 방식으로 발견하고 소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관찰의 의식은 단지 이렇게 ‘의도하고 말할’ 뿐이다. 곧 자기 자신을 경험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로서의 사물들의 본질’을 경험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도와 말하기가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곧 이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은 아직 자기 자신을 그런 대상으로 가지지 못한 상태에 있다. 만약 의식이 이성을, 사물들과 자기 자신 모두의 동일한 본질임을 알고, 또 이성이 오직 의식 속에서 그 고유한 형식으로 현존할 수 있음을 안다면, 의식은 오히려 사물들 속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심연 속으로 내려가 그 이성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곳에서 이성을 발견한다면, 거기서 다시 현실성으로 이끌려와 이성이 그 현실 속에서 감각적 표현을 가지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것은 곧바로 그 감각적 표현을 본질적으로 ‘개념(Begriff)’으로 이해할 것이다[해설
1.관찰(Beobachten)로서의 이성
의식은 ‘관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감각적으로 주어진 현실 속에서 발견하려 함. 그러나 이 의식은 여전히 “나는 자기 자신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본질을 보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2.왜 그런가?
그 이유는 단순한데, 그것은 이성이기 때문임. 하지만 문제는, 이성이 아직 자기 자신을 명시적으로 대상으로 삼지 못했다는 데 있음. 만약 이성이 자기 본질을 알게 된다면 이성이 사물과 자기 자신 모두의 동일한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의식은 더 이상 바깥의 사물들 속에서 이성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내면 깊이로 향할 것
3.내면에서 다시 현실로
만약 의식이 내면에서 이성을 발견한다면, 거기서 다시 현실로 나아가, 이성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감각적으로 표현되는지를 보게 됨. 그러나 이제는 그 감각적 현실을 단순히 ‘사물’로 두지 않고, 그것을 곧바로 개념으로 파악하게 될 것임
4.정리
이 구절은 관찰 의식의 모순을 보여주는데, 의식은 사물 속에서 본질을 찾으려 하지만, 사실 그 본질은 자기 자신의 이성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관찰은 외적 대상만을 향하게 됨. 그러나 자기 안에서 이성을 발견한다면, 현실 속의 감각적 대상 역시 개념으로 파악된 자기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음.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성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지이며, 그렇지 못할 때는 관찰이 외부 탐구에 머물고, 그럴 때 이성은 자기 본질을 놓치게 됨].

상동

Die ㅣVernunft, wie sie 'unmittelbar' als die Gewissheit des Bewusstseins alle Realität zu sein auftritt 1), nimmt ihre Realität im dem Sinne der 'Unmittelbarkeit des Seins' , und ebenso die Einheit des Ich mit diesem gegenständlichen Wesen in dem Sinne einer 'unmittel-baren Einheit', an der sie die Momente des Seins und des Ich noch nicht getrennt und wieder vereinigt, oder die sie noch nicht erkannt hat. Sie geht daher als beobachtendes Bewusstsein an die Dinge, in der Meinung, dass sie diese als sinnliche, dem Ich entgegengesetzte Dinge in Wahrheit nehme; allein ihr wirkliches Tun widerspricht dieser Meinung, denn sie 'erkennt' die Dinge, sie verwandelt ihre Sinnlichkeit in 'Begriffe', d. h. eben in ein Sein, welches zugleich Ich ist, das Denken somit in ein seiendes Denken, oder das Sein in ein gedachtes Sein, und behauptet in der Tat, dass die Dinge nur als Begriffe Wahrheit haben. Für dieses beobachtende Bewusstsein wird darin nur dies, was 'die Dinge' sind, für uns aber, was 'es selbst' ist; das Resultat seiner Bewegung aber wird dies sein, für sich selbst dies zu werden, was es an sich ist.

이성은 ‘직접적으로’ 의식의 확실성으로서 모든 현실성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성은 자기의 현실성을 ‘존재의 직접성’이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이며, 또 이 ‘대상적 본질’과의 나의 '통일’도 아직은 단순한 직접적 통일로서 파악한다. 따라서 이성은 존재(Sein)와 자아(Ich)의 두 순간을 아직 분리했다가 다시 결합하는 것으로 알지 못하고, 다시 말해 그것을 아직 인식하지 못한 상태이다. 이성은 따라서 관찰하는 의식으로서 사물들에 접근하면서, 그것들을 감각적이며 자아에 대립된 사물로서 참되게 파악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성이 하는 행위는 이 생각과 모순된다. 이성은 사물들을 ‘인식’하는데, 곧 그것들의 감각성을 ‘개념(Begriff)’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즉 동시에 자아인 존재,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존재, 곧 사유된 존재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성은 사물들이 오직 개념으로서만 진리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관찰하는 의식에게는 이 안에서 단지 ‘사물들이 무엇인가’만이 드러나지만, 우리에게는 ‘그 의식 자신이 무엇인가’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 운동의 결과는, 이성이 자기 자신에게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있는 그것’이 되는 것이다[해설
1.직접적 확실성으로서의 이성
처음에 이성은 모든 현실이 자기와 동일하다는 확신으로 등장하지만 이 확신은 단지 직접적(unmittelbar) 형태로만 존재할 뿐, 사유적으로 매개된 인식은 아님
2.존재와 자아의 미분화 상태
이성은 세계(존재)와 자기(자아)의 관계를 아직 분리하고 다시 통합하는 운동으로 파악하지 못함. 즉, ‘존재 = 자아’라는 통일을 단순히 사실로 받아들일 뿐, 그 내적 과정을 이해하지 못함
3.관찰하는 의식으로서의 이성
이성은 세계를 관찰하면서, “나는 단순히 외부의 감각적 사물을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일을 하고 있음
4.사물의 개념화
이성은 사물의 감각적 모습을 개념(Begriff) 으로 바꿔내고 있음. 곧, 사물의 존재를 단순히 외적 현상으로 두지 않고, “사유된 존재”, 즉 자아와 연결된 것으로 전환함. 결과적으로 이성은 사물들이 오직 개념 속에서만 진리성을 가진다고 주장하게 됨
5.우리의 시각과 의식의 시각
관찰하는 의식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사물들이 무엇인가”가 드러날 뿐임. 하지만 우리(철학적 관찰자)에게는, “그 의식 자신이 무엇인가”가 드러남
6.운동의 결과
결국 이성은 자기의 운동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본래부터 그러한 존재(즉, 존재와 자아가 동일한 것)로 나타나게 됨. 즉, 이성이 자기 자신에게 자기 본질을 실현된 것으로 경험하는 단계로 나아감
7.정리
이 구절은 관찰하는 이성의 이중성을 드러냄. 겉으로는 외부의 감각적 사물을 관찰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사물을 개념 속에 끌어들이고, 존재를 ‘사유된 존재’로 변환하고 있는 것. 따라서 관찰 의식은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지만, 그 운동의 결과로 결국 이성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고 자기 본질을 실현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됨].

상동 206-207

'Das Tun' der beobachtenden Vernunft ist in den Momenten seiner Bewegung zu betrachten, wie sie die Natur, den Geist, und endlich die Beziehung beider als sinnliches Sein aufnimmt, und sich als seiende Wirklichkeit sucht.

관찰하는 이성의 ‘행위(Das Tun)’는 그 운동의 계기들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이 행위는 자연(Natur), 정신(Geist),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자의 관계를 감각적 존재(sinnliches Sein)로서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자신을 현존하는 실재로 찾으려는 것이다[이 구절은 “관찰하는 이성(die beobachtende Vernunft)”이 전개되는 전체 구조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문장
1.‘Das Tun’ – 관찰하는 이성의 행위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이성이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구체적인 실천 양식, 즉 “관찰” 활동을 뜻함. 이성은 자신을 실재하는 존재로 경험하고자 하며, 그 길은 “관찰”을 통해 열림
2.운동의 세 계기
이성은 자기 실재를 찾기 위해 세 영역을 차례로 관찰
자연(Natur): 외부 세계, 물리적·생물학적 현상들을 대상으로 관찰
정신(Geist): 인간 사회, 역사, 문화, 심리 등 의식과 공동체를 대상으로 관찰
자연과 정신의 관계: 양자를 매개하는 감각적 현상 ― 특히 인간 개체를 감각적 존재로서 관찰(예: 생리학적·심리학적 연구).
3.이성의 목표
이성은 이런 관찰을 통해 결국 자기 자신을 현실 속에서 발견하려고 함. 즉, 자연이나 정신을 단순히 외적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개념과 합리성을 확인하려는 것
4.정리
이 한 문장은 곧 “관찰하는 이성” 장의 구조적 개요임. 이성이 관찰을 통해 자신을 찾는 과정은
① 자연의 관찰 → ② 정신의 관찰 → ③ 양자의 통일(자연 속 정신, 정신 속 자연)의 관찰 로 전개되고, 그 전체 목표는 이성이 자기 자신을 구체적 현실 속에서 확인하는 것].

상동 207


https://youtu.be/LK7E2GZ04Cc?si=LeS5fX-unwbEsmqj

정신현상학 강독30 : 피히테의 공허한 관념론 비판, 불멸의 칸트와 예나의 낭만주의202509261510 금

예나의 낭만주의 운동에 관련된 또 다른 주요인물은 노발리스와 쉴러. 휄더린도 피히테의 강의를 듣기 위해 잠시 예나에 거주.

www.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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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A.) Vernunft
B. Selbstbewusstsein

텍스트 :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아카데믹판 h.v. G.J.P.J. Bolland(Leiden A.H. Adriani, 1907)

A.Bewusstsein
I.Die sinnliche Gewissheit oder das Dieses und das Meinen
II.Die Wahrnehmung oder das Ding und die Täuschung    
III.Kraft und Verstand, Erscheinung und uebersinnliche Welt  S.117-
B. Selbstbewusstsein
IV.Die Wahrheit der Gewissheit seiner Selbst
a.Selbstständigkeit und Unselbstständigkeit des Selbstbewusstseins ; Herrschaft und Knechtschaft S.151-
b.Freiheit des Selbstbewusstseins ; Stoicismus, Skepticismus und das unglückliche Bewusstsein S.164-
C.(AA.) Vernunft
V.Gewissheit und Wahrheit der Vernunft S.194-

*게시된 번역과 해설은 AI를 바탕으로 제가 수정•편집한 것입니다. 다른 번역이나 해설 제안 적극 환영합니다.

Die Vernunft ist die Gewissheit alle 1) Realität zu sein. Dieses 'Ansich' oder diese 'Realität' ist aber noch ein durchaus Allgemeines, die reine 'Abstraction' der Realität. Es ist die 'Positivität', welche das Selbstbewusstsein an sich selbst, für sich ist, und Ich daher nur die reine Wesenheit des Seienden, oder die einfache 'Kategorie'.

이성은 모든 현실이 자기 자신이라는 확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체로서의 것(Ansich)’ 또는 이러한 ‘현실’은 아직 전적으로 일반적인 것으로, 현실의 순수한 추상일 뿐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기의식의 ‘긍정성(Positivität)’이며, 따라서 ‘나(Ich)’는 존재하는 것의 순수한 본질, 곧 단순한 ‘범주(Kategorie)’일 뿐이다[해설
1.이성의 자기확신
여기서 헤겔은 "이성은 모든 현실이다라는 정의를 내림. 즉, 의식이 더 이상 세계와 대립된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자기 안에 있고 자기와 동일하다는 확신에 도달했다는 뜻임
2.하지만 아직 추상적
이 확신은 내용적으로는 비어 있고 추상적임. "나는 모든 것이다"라는 말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구체적 규정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순수한 일반성일 뿐임
3.Positivität와 Kategorie
Positivität는 자기의식이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가장 단순한 태도를 말함. 이 단계에서 ‘나’는 세계를 규정하는 복잡한 범주가 아니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의 본질 자체, 즉 가장 추상적인 범주(Kategorie)일 뿐임. 따라서 이성은 아직 구체적인 인식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나는 모든 현실이다”라는 공허한 선언에 머물러 있음
👉 정리하면 이 구절은 이성이 자기 자신을 세계 전체와 동일한 것으로 확신하는 순간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그것이 아직 내용 없는 추상적 동일성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함. 그래서 헤겔은 여기서부터 이성이 어떻게 구체적인 인식 과정(자연 연구, 경험, 실천 등)을 통해 내용을 채워가는지를 전개하게 됨. 이제 ‘단순한 Kategorie’에서 시작해 어떻게 이성은 구체적 인식 단계(관찰, 법칙, 목적 등)로 전개].

상동 199

Die Kategorie, welche sonst die Be-
stimmt' des Seienden überhaupt oder des Seienden ab RuMr gegen das Bewusstsein, ist jetzt 'Wesenheit' oder einem Bese fache 'Einheit' des Seienden nur als denkende Wirk-derhir lichkeit, oder sie ist dies, dass Selbstbewusstsein und Sein 'dasselbe' Wesen sind, - 'dasselbe', nicht in der Vergleichung, sondern an und für sich. Nur der einseitige schlechte Idealismus lässt diese Einheit wieder als Bewusstsein auf die eine Seite und ihr gegenüber ein 'Ansich' treten.

범주(카테고리)는, 이전에는 존재 일반 또는 의식에 대립된 존재를 규정하는 것을 존재의 본질로 여겼으나 이제는 본질, 곧 단순한 하나의 통일로 존재하는 것을 단지 사유하는 현실성으로 지닐 뿐이다. 즉 범주는 자기의식과 존재가 동일한 본질이라는 것, 그것도 단순한 비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다만 일면적이고 잘못된 관념론만이 이 동일성을 다시금 의식이라는 한쪽 편에 두고, 그 반대편에 ‘자체로서의 존재(Ansich)’를 대립시킨다[해설
1.‘범주(Kategorie)’의 변용
전통적으로 범주는 존재의 규정성을 나타내는 형식(예: 칸트의 범주들)으로서, 주관(의식)과 객체(존재)를 매개하는 도구였음. 하지만 이제 헤겔에게 범주는 단순히 “의식 바깥에 있는 존재를 규정하는 형식”이 아니라, 사유적 현실성 자체, 즉 “자기와 존재가 하나”라는 본질적 통일을 뜻함
2.자기의식과 존재의 동일성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기의식과 존재가 단순히 비교해서 같아 보인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동일하다(an und für sich dasselbe)는 것임. 즉, 의식이 인식 행위를 통해 외부 존재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존재와 자기의식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한다는 이상주의적 입장을 드러냄
3.‘나쁜 관념론’(schlechter Idealismus) 비판
헤겔은 일면적인 관념론(예: 피히테의 주관주의적 이상주의)을 비판함. 그들은 의식과 세계(Ansich)를 여전히 양극으로 나누어 두고, 그 관계를 설명하려 하지만 진정한 이성적 통찰에서는 이런 대립은 초월되고, 의식과 존재가 이미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점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 헤겔의 주장임
✅ 정리
이 구절은 칸트 이후의 범주론을 넘어, 자기의식과 존재의 통일을 사유하는 헤겔의 이상주의 입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줌. 즉, “범주 = 존재의 규정”에서 “범주 = 자기의식과 존재의 동일성”으로 전환되며, 이를 통해 의식과 세계의 근본적 분리를 허물고자 하는 것].

상동

- Diese Kategorie nun oder 'ein-fache' Einheit des Selbstbewusstseins und des Seins hat aber an sich den 'Unterschied', denn ihr Wesen ist eben dieses, im 'Anderssein' oder im absoluten Unterschiede unmittelbar sich selbst gleich zu sein. Der Unterschied 'ist' daher, aber vollkommen durch-ver bernm sichtig und als ein Unterschied, der zugleich keiner leh il en ist; er erscheint als eine 'Vielheit' von Kategorien. Indem der Idealismus die 'einfache Einheit' des Selbstbewusstseins als alle Realität ausspricht und sie unmit-telbar', ohne  sie als absolut negatives Wesen-nur dieses hat die Negation, die Bestimmtheit oder den ㅣUnterschied an ihm selbst, - begriffen zu haben, zum Wesen macht, so ist noch unbegreiflicher als das erste dieses zweite, dass in der Kategorie 'Unterschiede' oder 'Arten' seien.

이 범주, 곧 자기의식과 존재의 단순한 통일성은, 그 자체로 차이를 내포한다. 왜냐하면 그 본질은 바로 ‘다른 것 속에서(Anderssein)’ 혹은 절대적 차이 속에서도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이는 존재하되, 완전히 투명하며, 동시에 차이가 아닌 차이이다. 그것은 범주들의 다수성으로 나타난다. [주관적] 관념주의가 자기의식의 단순한 통일성을 모든 현실이라고 선언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곧바로 본질로 삼아버릴 경우—즉, 그것이 절대적 부정적 존재로서, 오직 이 부정성, 규정성, 혹은 차이를 그 자체 안에 가지는 것으로 파악되지 않은 채 본질로 삼아버릴 경우—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두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이 범주 안에 ‘차이들’ 혹은 ‘종류들(Arten)’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범주는 단순한 동일성이지만, 그 안에 차이를 본질로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
1.범주는 동일성과 차이의 통일
범주는 “자기의식과 존재가 동일하다”는 단순한 동일성으로 규정되지만, 그 본질은 차이를 포함한 동일성임. 즉, 자기 자신이면서도 다른 것 속에서 동일한 자기 자신으로 나타난다는 것.
2.차이의 성격
이 차이는 “투명한 차이”임. 즉, 차이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것은 동일성을 깨뜨리지 않는 차이임. 그래서 차이는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것처럼 기능
3.범주의 다수성
이 차이는 구체적으로 여러 범주들의 다수성으로 나타남. 즉, 하나의 범주(자기의식=존재)에서 여러 세부 범주(질, 양, 관계, 등등)가 파생되는 구조임. 이건 칸트의 범주론(질·양·관계·양태의 네 표)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움
4.‘나쁜 이상주의’ 비판
잘못된 이상주의(schlechter Idealismus)는 자기의식과 존재의 단순한 동일성을 선언하지만, 그 동일성이 스스로 차이를 산출하는 과정(즉 부정성과 규정성의 운동)을 간과함. 그래서 “어떻게 동일성에서 다양한 차이가 나올 수 있는가?”라는 난점을 풀지 못함
✅ 요약
이 구절은 동일성(자기의식=존재)은 차이를 본질로 갖는다는 헤겔의 변증법 원리를 범주론에 적용한 것임. 단순한 동일성이 자기 안에서 차이를 발생시키며, 그 결과 범주의 다수성이 나타남. 그러나 단순히 동일성만을 주장하는 ‘나쁜 이상주의’는 이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헤겔의 비판임].

199-200

Diese Versicherung überhaupt, so wie die Versicherung von irgend einer 'bestimmten Anzahl' der Arten derselben, ist eine neue Versiche-rung, welche es aber an ihr selbst enthält, dass man sie sich nicht mehr als Versicherung gefallen lassen müsse. Denn indem im reinen Ich, im reinen Verstande selbst der Unterschied anfängt, ist damit gesetzt, dass hier die 'Unmittelbarkeit', das 'Versichern' und 'Finden' aufgegeben werde und das 'Begreifen' anfange.

일반적인 이 확신[자기의식이 존재라는 주장]뿐 아니라, 그것의 ‘어떤 일정한 수(Anzahl)’의 종(Arten)을 단언하는 확신도, 사실상 새로운 확신일 뿐이다. 그러나 그 자체 안에, 그것을 더 이상 [단순한] 확신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내포한다. 왜냐하면 순수한 ‘나(Ich)’, 곧 순수한 ‘오성(Verstand)’ 안에서 차이가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것은, 여기에서 ‘직접성(Unmittelbarkeit)’, ‘확신(=Versichern)’과 [단순한] ‘발견(Finden)’이 포기되고, 그 대신 ‘파악(Begreifen)’이 시작되어야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이 구절은 지금까지의 관념주의적 확신에서 사유의 전환점이 드러나는 대목
1.“Versicherung”은 단순한 확언, 보장
관념주의가 “나는 모든 현실이다”, “자기의식과 존재는 동일하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내용 없는 확언(Versicherung)임. 이 단계에서는 여전히 “발견했다(Finden)”, “그렇다고 단언한다”는 식으로 직접성에 머무름.
2.“bestimmte Anzahl der Arten”
여기서 헤겔은 칸트의 범주 도표(질·양·관계·양태)를 겨냥함. 즉, 동일성에서 여러 “종류(Arten)”나 “수(Anzahl)”의 범주들을 단순히 나열해도, 그것은 여전히 “새로운 확언”에 불과함
3.전환점: Begreifen
그러나 자기의식이 존재라는 “단순 동일성” 안에서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함. 이것은 더 이상 “그렇다”고 단언하는 차원이 아니라, 왜, 어떻게 동일성 안에서 차이가 생기고, 그것이 어떻게 체계화되는가를 파악(Begreifen)하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함을 뜻함. 즉, 단순한 직관적 확신(“나는 나다”)에서 개념적 사유(변증법적 파악)로 넘어가는 순간임
✅ 요약
이 구절은 “순수한 동일성(나는 나다)”의 확언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동일성 안에 내재하는 차이를 사유하면서 논리적·변증법적 전개(=Begreifen)로 이행해야 한다는 전환을 선언함. 헤겔 논리학의 본격적 진입을 알리는 징후라고 볼 수 있음].

상동 200

Die Vielheit der Kategorien aber auf irgend eine Weise wieder als einen Fund, z. B. aus den Urteilen, aufnehmen und sich dieselben so gefallen lassen, ist in der Tat als eine Schmach der Wissenschaft anzu-sehen; wo sollte noch der Verstand eine Notwendigkeit aufzuzeigen vermögen, wenn er dies an ihm selbst, der reinen Notwendigkeit, nicht vermag?

그러나 범주의 다수성을 단순히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하나의 ‘발견(Fund)’으로서, 예컨대 판단에서 끌어내어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 용납하는 것은, 실로 학문에 대한 수치로 간주되어야 한다. 만약 오성이 바로 그 자체에서, 즉 순수한 필연성에서조차 필연성을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면, 대체 어디에서 오성이 필연성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이 대목은 헤겔이 칸트의 범주론과 같은 “범주 나열식” 형식을 강하게 비판하는 부분
1.비판의 대상: 칸트의 범주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범주들을 ‘판단의 형식’에서 도출해 표로 제시했습니다(질, 양, 관계, 양태).
하지만 헤겔의 눈에는, 이것은 체계적 필연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저 “찾아낸(Fund)” 나열에 불과함
2.‘Schmach der Wissenschaft’ = 학문의 수치
철학, 특히 논리학이 “필연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단순히 “발견했다”고만 한다면, 그것은 과학(학문)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 즉, 범주들의 체계는 단순 나열이 아니라 필연적 전개로 보여져야 한다는 요구임
3.헤겔의 요구: Notwendigkeit (필연성)
진정한 철학은 개념 자체(=순수한 Notwendigkeit)로부터 범주들을 논리적으로 도출해야 함. 그렇지 않다면, 범주는 우연적 집합일 뿐, “과학적”일 수 없음
✅ 요약
이 구절은 범주의 나열식 이해(칸트식 도식)를 비판하며, 참된 과학적 철학은 범주들의 다수를 단순히 “발견된 것”으로 두지 않고, 개념의 내적 운동(필연성)으로부터 전개해야 한다는 헤겔의 논리학적 원칙을 천명한 것].

상동

https://youtu.be/2x1OHSCBbnI?si=IqzRBEc6Uc3X2zmF

정신현상학 강독28 : 이성, 자기입증의 길 20250922141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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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자모

잡다 Vielerlei 2025. 9. 21. 15:3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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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 이름 | 대문자 | 소문자 | 발음(고대/현대ㅣ비고

ㅣ1ㅣ알파 (ἄλφα)       | Α   | α    | \[a]                                     | ‘아’        |
| 2  | 베타 (βῆτα)       | Β   | β    | \[b] (고대) → \[v] (현대)                    | ‘베타/비타’    |
| 3  | 감마 (γάμμα)      | Γ   | γ    | \[g] (앞에 ε, ι 오면 \[y])                   | ‘감마’       |
| 4  | 델타 (δέλτα)      | Δ   | δ    | \[d] (고대) → \[ð] (th in *this*)          |            |
| 5  | 엡실론 (ἒ ψιλόν)   | Ε   | ε    | \[e]                                     | ‘짧은 에’     |
| 6  | 제타 (ζῆτα)       | Ζ   | ζ    | \[zd]/\[dz] (고대) → \[z] (현대)             |            |
| 7  | 에타 (ἦτα)        | Η   | η    | \[ɛː] (긴 에, 고대) → \[i] (현대)              |            |
| 8  | 쎄타 (θῆτα)       | Θ   | θ    | \[tʰ] (고대) → \[θ] (th in *think*)        |            |
| 9  | 이오타 (ἰῶτα)      | Ι   | ι    | \[i]                                     | ‘이오타’      |
| 10 | 카파 (κάππα)      | Κ   | κ    | \[k]                                     | ‘카파’       |
| 11 | 람다 (λάμβδα)     | Λ   | λ    | \[l]                                     | ‘람다’       |
| 12 | 뮈 (μῦ)          | Μ   | μ    | \[m]                                     | ‘뮤/미’      |
| 13 | 뉘 (νῦ)          | Ν   | ν    | \[n]                                     | ‘뉴/니’      |
| 14 | 크시 (ξῖ)         | Ξ   | ξ    | \[ks]                                    | ‘크시/크사이’   |
| 15 | 오미크론 (ὂ μικρόν) | Ο   | ο    | \[o] (짧은 오)                              |            |
| 16 | 파이 (πῖ)         | Π   | π    | \[p]                                     | ‘파이’       |
| 17 | 로 (ῥῶ)          | Ρ   | ρ    | \[r] (rolled r)                          |            |
| 18 | 시그마 (σῖγμα)     | Σ   | σ, ς | \[s]                                     | 어말형은 ς     |
| 19 | 타우 (ταῦ)        | Τ   | τ    | \[t]                                     |            |
| 20 | 윕실론 (ὖ ψιλόν)   | Υ   | υ    | \[y]/\[u] (고대), \[i] (현대)                | ‘위프실론/입실론’ |
| 21 | 피 (φῖ)          | Φ   | φ    | \[pʰ] (고대), \[f] (현대)                    |            |
| 22 | 키 (χῖ)          | Χ   | χ    | \[kʰ] (고대), \[x]/\[χ] (현대 독일어 *Bach* 소리) |            |
| 23 | 프시 (ψῖ)         | Ψ   | ψ    | \[ps]                                    | ‘프시/프사이’   |
| 24 | 오메가 (ὦ μέγα)    | Ω   | ω    | \[ɔː] (긴 오, 고대) → \[o] (현대)              | ‘큰 오’      |

특징
모음이 7개나 있음: α, ε, η, ι, ο, υ, ω
소문자 σ는 어말일 때 특별한 형태(ς)를 사용
발음은 고대/현대 차이가 있으므로, 고대 그리스어 공부 시에는 보통 에라스무스식 발음(Erasmian pronunciation)을 사용

예시 단어
λόγος (로고스) = 말, 이성, 이치
ἀνθρωπος (안트로포스) = 인간
φιλοσοφία (필로소피아) = 철학 (지혜를 사랑함)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Κρῆτες ἀεὶ ψεῦσται)

외우는 요령
그리스 알파벳은 24자밖에 안 되어서, 조금만 연습하면 금방 익힐 수 있습니다.
알파~델타: A B Γ Δ →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수학·과학에서 자주 봄)
에타·쎄타: H(에타), Θ(쎄타) → "H는 에타, O에 막대기 달린 건 쎄타"
미드라인: Ι (이오타), Κ (카파), Λ (람다), Μ (뮤), Ν (뉴), Ξ (크시)
‘두 오’: Ο (오-미크론, 작은 오), Ω (오-메가, 큰 오) → 작은 오 vs 큰 오
파이~프시: Π (파이), Ρ (로), Σ (시그마), Τ (타우), Υ (윕실론), Φ (파이), Χ (키), Ψ (프시)
끝내기: Ω (오메가) → 성서에도 "나는 알파와 오메가"

암기 팁
수학/물리에서 쓰이는 기호와 연결해서 기억하기
Δ(델타) = 변화
Σ(시그마) = 합
π(파이) = 원주율
Ω(오메가) = 저항
철학 용어에서도 익숙한 단어 찾기
λόγος (로고스), φύσις (휘시스, 자연), ψυχή (프쉬케, 영혼)

고대 vs 현대 발음 비교
| 글자      | 고대(에라스무스식)          | 현대(그리스어)            | 비고       |
| Β (베타)  | b                   | v                   | 소리가 바뀜   |
| Γ (감마)  | g (앞에 ε, ι 오면 \[y]) | \[ɣ] (독일어 r 비슷)     |          |
| Δ (델타)  | d                   | ð (th in *this*)    |          |
| Η (에타)  | 긴 ē \[ɛː]           | i                   | 긴 모음 단순화 |
| Θ (쎄타)  | tʰ (거센 소리)          | θ (*think*)         |          |
| Υ (윕실론) | \[y] (프랑스어 u)       | i                   |          |
| Φ (피)   | pʰ (거센 p)           | f                   |          |
| Χ (키)   | kʰ (거센 k)           | \[x]/\[χ] (Bach 발음) |          |
| Ω (오메가) | 긴 ō \[ɔː]           | o                   | 긴 모음 단순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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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친구

헤겔 Hegel 2025. 9. 21. 06:2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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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부터  '정신현상학'을 다시 읽기시작해 오늘로 자기의식 장을 넘기고 이성 장에 들어섰다. 이렇게 계속 이 책을 읽어 나가고 헤겔 관련서만을 집중적으로 읽는 동기는 분명 이 텍스트가 주는 어떤 마력때문이다. 그것은 이 책이 제시하는 무한성에 비해 그 저자가 안고 있는 철저한 유한성에 기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그가 쓴 것이지만 그 영향력에서 뿐만 아니라 그 출생에서도 그의 것만은 아니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정신현상학'에 관한 긴 글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형태로 결과물이 나올지는 아직 미정이다.

근래는 역시 예전에 읽다 중단한 테리 핀카드의 헤겔 전기를 다시 읽으면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 핀카드 보다 4년 후 나온 발터 예쉬케의 헤겔 전기는 저자가 역사학자인가 싶을 정도로 세밀한 문헌전거와 아울러 글도 핀카드 만큼 잘 쓴다. 문사철의 저력은 이런데서 보인다. 헤겔의 종교철학에 경도했던 예쉬케는 몇 해 전 작고했다.  1945년도 생.

헤겔의 프랑크푸르트 시절, 그를 한적하지만 봉건적인 스위스의 베른에서 이곳으로 탈출시켜 준 튜빙겐의 교우 휄더린은 당시 예나에서 후기 칸트주의로 바람을 일으킨 피히테의 영향으로 시적이자 철학적으로 달아 올라 있었고 헤겔은 이에 깊게 자극받았다. 그러나 휄더린은 철학에 집중하기에는 여린 감수성이 짙었고 앓고 있던 정신병이 깊어져 갔다. 휄더린의 영향력이 긍정적인 자극이 아니라 부담으로 작용할 시점에 닥친 아버지의 죽음과 그에 따른 얼마간의 상속유산은 헤겔이 가정교사 자리를 벗어나 직업 철학자로 나아갈 자그마한 기반이 됐고, 이 새로운 직업의 기회를 구체화하기 위해 헤겔은 예나에서 이미 신진의 유망한 철학자로 자리를 잡은, 역시 튜빙겐의 교우 셸링에게 자존심을 굽히고 편지를 쓴다. 헤겔의 베른 시절 이후 두 사람은 편지 왕래가 없었다. 철학의, 특히 칸트 철학의 세부 분야에 파고 들어가고 있던 셸링을 폄하하며 헤겔은 민중을 선도할 대중철학자로 자신의 앞날을 그렸었지만 이제 이게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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