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A.) Vernunft
B. Selbstbewusstsein
텍스트 :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아카데믹판 h.v. G.J.P.J. Bolland(Leiden A.H. Adriani, 1907)
A.Bewusstsein
I.Die sinnliche Gewissheit oder das Dieses und das Meinen
II.Die Wahrnehmung oder das Ding und die Täuschung
III.Kraft und Verstand, Erscheinung und uebersinnliche Welt S.117-
B. Selbstbewusstsein
IV.Die Wahrheit der Gewissheit seiner Selbst
a.Selbstständigkeit und Unselbstständigkeit des Selbstbewusstseins ; Herrschaft und Knechtschaft S.151-
b.Freiheit des Selbstbewusstseins ; Stoicismus, Skepticismus und das unglückliche Bewusstsein S.164-
C.(AA.) Vernunft
V.Gewissheit und Wahrheit der Vernunft S.194-
(A)Beobachtende Vernunft S.205-
*게시된 번역과 해설은 AI를 바탕으로 수정•편집한 것입니다. 다른 번역이나 해설 제안 적극 환영합니다.
Die beiden Seiten eines organischen Gesetzes wären also zwar wohl zu beobachten, allein nicht Gesetze der Beziehung derselben, und die Beobachtung reicht nicht darum nicht zu, weil sie 'als Beobachtung' zu kurzsichtig wäre und nicht empirisch verfahren, sondern von der Idee ausgegangen werden sollte, - denn solche Gesetze, wenn sie etwas Reales wären, müssten in der Tat wirklich vorhanden und also zu beobachten sein, - sondern weil der Gedanke von Gesetzen dieser Art keine Wahrheit zu haben sich erweist.
따라서 유기적 법칙의 양 측면(내적과 외적)은 실제로 관찰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법칙은 아니다. 이러한 관찰의 한계는 단지 ‘관찰’이라는 방식이 너무 근시안적이어서, 또는 경험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념으로부터 출발해야 했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러한 법칙들이 실재적인 것(Real)이라면, 그것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따라서 관찰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종류의 법칙들에 대한 사유가 진리성을 갖는다고 입증될 수 없다[“유기적 법칙”이라는 개념 자체가 왜 성립할 수 없는지를 밝히는 대목
🧩 문장 구조 해설
“Die beiden Seiten eines organischen Gesetzes wären also zwar wohl zu beobachten”
→ 내적(Inneres)과 외적(Äußeres)이라는 두 측면 자체는 관찰할 수 있다.
“allein nicht Gesetze der Beziehung derselben”
→ 그러나 이 둘의 관계(즉, 내적이 외적을 규정한다는 법칙)는 관찰될 수 없다.
→ 즉, “감수성이 신경계 형태를 결정한다” 같은 식의 법칙적 관계는 성립하지 않음
“die Beobachtung reicht nicht darum nicht zu, weil …”
→ “관찰이 부족한 이유”가 경험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
→ 즉, “더 정밀하게 관찰하면 보일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런 법칙 개념이 틀렸다.
“denn solche Gesetze, wenn sie etwas Reales wären, müssten … zu beobachten sein”
→ 만약 그런 법칙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감각적으로도 관찰될 수 있어야 한다.
→ 그런데 관찰되지 않는다 → 따라서 그런 법칙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sondern weil der Gedanke von Gesetzen dieser Art keine Wahrheit zu haben sich erweist.”
→ 결론: 그런 종류의 법칙에 대한 사유의 형식 자체가 잘못된 것
→ 즉, “유기체의 내적 원리와 외적 형태 사이의 일대일 대응 법칙”이라는 생각은 유기적 전체성의 본성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허위임
🧠 철학적 해설
이 대목에서 헤겔은 경험적 인식의 한계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법칙”이라는 개념 자체가 유기적 존재에는 부적절하다는 점을 밝힌 것. 무기적 자연에서는 법칙이 가능함 — 개별 요소들이 외적으로 연결됨. 그러나 유기적 자연은 내적 목적성과 자기반성 구조를 가지므로,
내적(Inneres)과 외적(Äußeres)은 서로 ‘규정 관계’가 아니라 자기 동일성의 두 양상임. 따라서 “감수성 ↔ 신경계”, “자극성 ↔ 근육계”와 같은 상관적 법칙은
표면적으로만 성립하는 관찰자의 **표상적 사고(‘Vorstellen’)**에 불과함. 유기체는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는 외적 연결의 대상이 아니라, 개념 그 자체가 현실화된 자기운동적 전체임
이 문단으로 헤겔은 곧이어 다음 단계 —즉, 유기체를 개념으로 파악하는 이성의 전환으로 넘어감. 그 부분은 「이성」 장의 ‘개념적 인식(die begriffliche Erkenntnis)’ 단락의 출발점이 됨].
상동 230
Es ergab sich für ein Gesetz das Verhältnis, dass die allgemeine organische Eigenschaft an einem organischen Systeme sich zum Dinge gemacht und an ihm seinen gestalteten Abdruck hätte, so dass beide dasselbe Wesen wären, das eine mal als allgemeines Mo-ment, das andere mal als Ding vorhanden. Aber
ausserdem ist auch die Seite des Inneren für sich ein Verhältnis mehrerer Seiten, und es bietet sich daher zuerst der Gedanke eines Gesetzes an, als eine Beziehung der allgemeinen organischen Tätigkeiten oder Eigenschaften auf einander.
하나의 법칙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하였다. 즉, 보편적인 유기적 성질이 어떤 유기적 체계 속에서 사물로 만들어져 그 안에 자기의 형상적 자국(gestalteter Abdruck)을 남김으로써 이 둘[보편적 성질과 구체적 기관]은 같은 본질을 가지며, 한 번은 보편적 계기로서, 다른 한 번은 사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내적 측면 자체도 그 안에서 여러 측면들의 관계가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제 법칙의 개념은 여러 보편적 유기적 활동들 혹은 성질들 상호 간의 관계로서의 법칙이라는 생각으로 제시된다[유기체의 내적·외적 관계 논의가 끝난 뒤, 이제 유기체 내부의 여러 활동(혹은 속성)들 사이의 관계, 즉 ‘내적 법칙’의 가능성을 검토하기로 방향을 전환하는 대목
🧩 문장 해설
“Es ergab sich für ein Gesetz das Verhältnis…”
앞 문단에서의 결론을 요약. 즉 유기적 법칙이란 “보편적 성질(예: 감수성, 자극성, 재생성)”과 “그 구체적 체계(신경계, 근육계, 생식계)”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는 것.
“die allgemeine organische Eigenschaft ... an ihm seinen gestalteten Abdruck hätte”
보편적 속성(예: Sensibilität)이 구체적 기관체계 속에서 ‘형상화된 흔적’을 갖는다는 뜻.
→ 즉, 내적 속성이 외적 형태로 표현됨.
→ 그러나 헤겔은 이것이 단순 대응이 아니라,
‘동일한 본질의 두 양태’임을 강조
“so dass beide dasselbe Wesen wären …”
내적 성질과 외적 기관은 ‘같은 본질의 두 형태’이다.
따라서 둘 사이의 법칙적 관계는 “본질의 자기관계”이지, 외적 인과가 아님
“Aber ausserdem ist auch die Seite des Inneren für sich ein Verhältnis mehrerer Seiten …”
이제 시선이 바뀜: 유기체의 내부 그 자체도 단일한 단위가 아니라, 여러 작용(감수성·자극성·재생성)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어 있음. 따라서 관찰자는 이제 이 내적 활동들 사이의 관계, 즉 ‘내적 법칙’을 탐구하려는 단계로 들어감.
“eine Beziehung der allgemeinen organischen Tätigkeiten oder Eigenschaften auf einander”
바로 여기서 헤겔이 새롭게 제시하는 “법칙의 형태”:
유기체 내부의 보편적 기능들 간의 상호 규정 관계,
즉 ‘감수성 ↔ 자극성’, ‘자극성 ↔ 재생성’ 등과 같은 상관적 연결
🧠 철학적 의미
이 문장은 이전 단락과 이후 단락의 전환점임. 이전까지는: 내적(Inneres) ↔ 외적(Äußeres)의 관계가 법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유를 논함. 이제부터는:
내적 그 자체 — 즉, 유기체의 내적 기능들의 상호 관계 — 가 법칙적 관계로 파악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데 헤겔의 결론은 곧 드러남. 이 내부적 법칙조차도 ‘진정한 법칙’이 될 수 없음. 왜냐하면 유기적 전체는 고정된 법칙의 항들로 환원되지 않으며, 각 활동은 전체의 자기운동 속에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임. 유기체는 감수성, 자극성, 재생성이라는 분화된 계기들을 가지지만,
이들은 상호 독립적 인과 관계가 아니라, 자기 전체성의 세 가지 상호 침투하는 운동 형식임].
상동
Ob ein solches möglich ist, muss sich aus der Natur einer solchen Eigenschait entscheiden. Sie ist aber, als eine allgemeine Flüssig-keit, teils nicht etwas, das nach der Weise eines Dinges beschränkt und in dem Unterschiede eines Daseins sich hält, das seine Gestalt ausmachen sollte, sondern die Sensibilität geht über das Nervensystem hinaus und durch alle anderen Systeme des Organismus hin-durch; — teils ist sie allgemeines Momént, das we-ㅣsentlich ungeschieden und unzertrennlich!) von Reac-tion oder Irritabilität und Reproduction ist.
그러한[즉, 유기적 속성들 사이의법칙]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은 그러한 성질의 자체의 본성으로부터 결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 성질은, 보편적 유동성으로서, 사물의 방식으로 한정되어 일정한 존재의 구별 속에서 머물러 자신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수성(Sensibilität)은 신경계(Nervensystem)를 넘어서서 유기체의 모든 체계들 전체를 관통하여 퍼져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본질적으로 보편적 계기로서, 반응 및 자극성, 재생으로부터 분리될 수도 떼어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이 문장은 앞의 전환부와 유기적 법칙 논의의 마지막 전개 사이를 이어주는 핵심 부분으로, 헤겔이 ‘감수성(Sensibilität)’이라는 보편적 속성을 사례로 들어, 유기적 속성들 사이의 법칙적 관계가 왜 불가능한가를 설명하는 대목
🧩 문장 해설
“Ob ein solches möglich ist…”
앞 문장에서 말한 “유기적 성질들 사이의 법칙 관계”가
과연 가능한지 따져보겠다는 문제 제기.
“muss sich aus der Natur einer solchen Eigenschaft entscheiden.”
법칙의 가능성은 경험적 관찰이 아니라,
그 속성의 개념적 본성(Natur) 에 달려 있음
→ 즉, 헤겔은 경험적 인과가 아니라 개념적 필연성의 층위에서 따지고 있음.
“Sie ist aber, als eine allgemeine Flüssigkeit…”
“보편적 유동성(allgemeine Flüssigkeit)”이라는 표현은 헤겔이 감수성(Sensibilität)의 본질을 설명할 때 자주 쓰는 은유로, 감수성이 어떤 고정된 기관에 갇힌 실체가 아니라, 유기적 전체의 살아 있는 흐름임을 뜻함.
“nicht etwas, das nach der Weise eines Dinges beschränkt...”
즉, 감수성은 사물처럼 경계가 있는 실체가 아니라,
모든 기관을 관통하며 작용하는 보편적 성질임
→ 따라서 신경계만의 성질로 한정할 수 없다.
“teils ist sie allgemeines Moment ... unzertrennlich von Irritabilität und Reproduction”
또 다른 측면에서, 감수성은 자극성·재생성과 분리될 수 없다.
→ 이 셋은 유기체의 세 가지 상호 내재적 계기일 뿐,
서로 독립된 항들이 아니므로
그들 사이에 “법칙적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무의미
🧠 철학적 요점
헤겔의 주장은 명확. 유기체의 내적 성질들(감수성, 자극성, 재생성)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므로, 그들 사이의 ‘법칙’은 성립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임.
보편적 유동성 — 감수성은 특정 기관에 한정되지 않음.→ “신경계”는 단지 그 한 표현일 뿐, 감수성은 전체 생명운동의 흐름.
상호 내재성 — 감수성, 자극성, 재생성은 서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 전체가 자신을 세 가지 측면에서 드러내는 것→ 그러므로 “그 사이의 관계 법칙”을 세우는 것은 실체적 분리를 전제하는 오해임].
상동 230-231
Denn als Reflexion in sich, hat sie schlechthin die Reaction an ihr. 2) Nur Insichreflectiertsein ist Passivität, oder totes Sein, nicht eine Sensibilität, so wenig als Action, was dasselbe ist als Reaction 3), ohne Insichreflectiertsein Irritabilität ist. Die Reflexion in der Action oder Reaction und die Action oder Reaction in der Reflexion ist gerade dies, dessen Einheit das Organische ausmacht, eine Einheit, welche mit der organischen Reproduction gleichbedeutend ist.
왜냐하면 감수성(Sensibilität)은 자기 안으로의 반성(Reflexion)으로서, 그 자체 안에 이미 반응(Reaction)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 안으로 반성된 존재(Insichreflectiertsein)만은 수동성, 또는 죽은 존재이지, 감수성이 아니다. 그리고 행위(Action) — 즉 반응(Reaction) — 역시 자기 안으로의 반성이 없이 자극성(Irritabilität) 일 수는 없다. 행위나 반응 안에서의 반성과 반성 안에서의 행위나 반응, 바로 이것이, 그 통일 속에서 유기적인 것을 구성하는 것이며, 이러한 통일은 곧 유기적 재생성과 동일한 것이다[이 문단은 앞의 구절 — “die Sensibilität … ist unzertrennlich von Irritabilität und Reproduction” — 에 대한 결정적인 철학적 해설 부분. 헤겔은 이제 감수성(Sensibilität), 자극성(Irritabilität), 재생성(Reproduction) 의 내적 관계를 개념적으로 통일해 설명
🧩 구절별 해설
① “Denn als Reflexion in sich, hat sie schlechthin die Reaction an ihr.”
감수성(Sensibilität)은 단순한 수동적 수용 능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으로 반성하는, 즉 자기 내적 관계성으로서의 운동임. 그러므로 감수성 속에는 이미 반응이 내재해 있음. 감수성은 단순히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반응적 느낌의 운동임
② “Nur Insichreflectiertsein ist Passivität, oder totes Sein...”
단순한 자기 내적 반성만으로는 실제 생명적 감각이 아니라 죽은 수동성일 뿐임. 즉, ‘내면화’가 정지된 상태에서는 감수성도, 자극성도 없음
→ 순수한 내향성은 생명적이지 않음
③ “so wenig als Action ... ohne Insichreflectiertsein Irritabilität ist.”
반대로, 행위(또는 반응) 만 있고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즉 자기 내적 반성 없이 작용만 있다면, 그것은 자극성(Irritabilität)도 될 수 없음. 따라서 감수성 ↔ 자극성은 서로를 내포함. 감수성은 내향적 활동이며, 자극성은 외향적 반응이지만 양자는 서로 내재적으로 반사(反射) 되어 있음.
④ “Die Reflexion in der Action ... ist ... das Organische.”
헤겔의 결론: '반성 속의 작용’과 '작용 속의 반성’의 통일이 바로 유기적 생명임
감수성(Sensibilität) → 반성적 내향 운동
자극성(Irritabilität) → 외향적 반응 운동
양자의 통일 = 재생성(Reproduction), 즉 자기 자신을 보존·갱신하는 운동
🩺 요약
헤겔이 말하는 유기적 생명(Organisches) 은 “반성(in sich) 과 작용(Reaktion) 의 상호 내재적 통일”
로 정의됨. 감수성만 있으면 죽은 수동성, 자극성만 있으면 맹목적 운동, 이 둘이 서로 안에서 반성하는 운동일 때 유기체가 성립함. 그 결과 이 통일된 자기운동이 곧 Reproduktion, 즉 자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낳는 생명임].
상동 231
Es folgt hieraus, dass in jeder Weise der Wirklichkeit dieselbe Grösse der Sensibilität - indem wir zuerst das Verhältnis derselben und der Irritabilität zu einander betrachten - vorhanden sein muss als der Irritabilität, und
dass eine organische Erscheinung ebensosehr nach der einen als nach der anderen aufgefasst und bestimmt, oder wie man will 'erklärt', werden kann.
이로부터 다음이 귀결된다. 현실성[유기적 존재의 구체적 실재성]의 모든 양상 안에는 감수성이 자극성과 동일한 크기(Grösse)로 —여기서 우리는 감수성과 자극성의 상호관계를 관찰할 수 있는 바—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유기적 현상도 감수성의 관점에서나 자극성의 관점에서나 동등하게 파악되고 규정되거나, 말하자면 ‘설명될’ 수 있다[감수성(Sensibilität)과 자극성(Irritabilität)의 관계를 “양적 동등성”으로 정식화하는 대목
🧩 구절 해설
① “Es folgt hieraus...”
→ 앞 문단(감수성과 자극성의 상호 내재성)에 대한 귀결. 헤겔은 이제 질적 통일에서 양적 상응성(Grösse) 으로 넘어감. 즉, 유기체는 단지 감수성과 자극성이 ‘본질상 하나’일 뿐 아니라, 그들의 양적 비율도 서로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논리임
② “dieselbe Grösse der Sensibilität ... vorhanden sein muss als der Irritabilität”
→ 감수성과 자극성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된 반대항이므로, 한쪽이 강하면 다른 쪽도 그만큼 강해야 함. 감수성(받아들이는 능력)만 크고 자극성(반응하는 능력)이 약하면→ 수동적이고 마비된 생명. 반대로 자극성만 강하고 감수성이 약하면→ 맹목적이고 자기-조절 불가능한 운동임. 유기적 생명은 이 둘의 내적 균형 안에서만 유지됨
③ “eine organische Erscheinung ... ebensosehr nach der einen als nach der anderen ... erklärt werden kann”
→ 어떤 생명현상도 감수성의 측면에서든 자극성의 측면에서든 동등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뜻임. 예를 들어:
심장 박동은 자극성(Irritabilität)의 발현이지만,
동시에 신경적 감수성(Sensibilität)의 반응이기도 함. 감각적 인식은 감수성이지만, 그 자체로 반응적 활동이기도 함. 따라서 생명현상은 양쪽 중 하나의 원리로만 ‘환원’될 수 없으며, 항상 쌍방의 통일적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함
🔍 요약적 해설 문장
유기적 생명은 감수성과 자극성의 내적 동일성 위에 서 있지만 이 동일성은 단지 개념적 통일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성 속에서 양적 균형으로 드러남. 그러므로 모든 유기적 현상은 감수성과 자극성의 동시적 표현으로,
어느 한 쪽으로만 ‘설명’될 수 없음].
상동
Dasselbe, was der Eine etwa für hohe Sensibilität nimmt, kann ein Anderer eben so gut für hohe Irritabilität, und Irritabilität von derselben Höhe, betrachten. Wenn sie Factoren genannt werden und dies nicht ein bedeutungsloses Wort sein soll, so ist eben damit ausge-sprochen, dass sie 'Momente' des Begriffes sind, alsoㅣder reale Gegenstand, dessen Wesen dieser Begriff ausmacht, sie auf gleiche Weise an ihm hat, und wenn er auf die eine bestimmt wird als sehr sensibel, er ebenso auf die andere als ebensosehr irritabel auszusagen ist.
한 사람이 어떤 것을 높은 감수성의 징표로 본다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똑같이 높은 자극성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자극성은 바로 그와 같은 정도의 높이를 가진다. 이것들이 요소들(Faktoren) 이라고 불릴 때, 그것이 단지 아무 의미 없는 말이 아니라면,
그 말 속에는 이미 다음이 함축되어 있다. 즉, 이것들은 개념의 계기이며, 따라서 그 개념의 본질을 이루는 실재적 대상은 이것들을 동일한 방식으로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 대상이 한 측면에서는 “매우 감수적(sensibel)”이라고 규정된다면,
그는 다른 측면에서는 똑같은 정도로 자극적이라고
똑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유기체 법칙(organische Gesetze)에 관한 마지막 부분으로, 감수성과 자극성의 관계를 개념적으로 결론짓는 대목
🧩 해설
이 문단은 헤겔식 유기체 개념의 핵심을 아주 짧게 응축한 문장임. 핵심은 “감수성”과 “자극성”이 서로 다른 두 속성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개념적 통일성 안의 두 계기(Momente) 라는 점임
🔹 1. “Dasselbe … kann ein Anderer … betrachten.”
감수성과 자극성은 실험적으로나 현상적으로는 다른 성질처럼 보이지만, 개념적으로는 동일한 현상의 두 해석일 뿐임. “높은 감수성”이라고 불리는 것도 다른 시점에서는 “높은 자극성”임→ 즉, 같은 실재를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
🔹 2. “Wenn sie Factoren genannt werden …”
“Faktoren”이라는 말이 단순한 통계적 요소가 아니라, 개념의 계기라는 뜻임을 강조. 즉, 감수성과 자극성은 서로 독립된 실체들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적 운동(Begrifflichkeit) 안에서 서로를 규정하고 반영하는
상호규정적 요소들임
🔹 3. “der reale Gegenstand … sie auf gleiche Weise an ihm hat”
“그 개념의 본질을 이루는 실재적 대상(der reale Gegenstand)” = 유기체(Organismus)
유기체는 이 두 계기를 동일한 정도로 자기 안에 지님.
→ 감수성이 높다는 것은 자극성도 그만큼 강하다는 것.
→ 감수성과 자극성은 서로의 조건이자 같은 리듬의 두 위상.
🔹 5. 철학적 함의
이 구절은 실험적 생리학의 법칙(감수성 vs. 자극성)을
단순한 경험적 구분이 아니라 개념적 동일성의 두 계기로 해석함으로써, “관찰하는 이성”이 끝내 도달하는 변증법적 전환점을 보여줌. 즉, 유기적 실재는 더 이상 “밖에서 관찰되는 상관관계”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자기-운동하는 개념적 통일체임이 드러남. 이로써 “관찰하는 이성”은 다음 단계 — 자기의식적 이성 — 으로 넘어갈 준비를 마침].
상동 231-232
Werden sie unterschieden, wie notwendig ist, so sind sie es dem Begriffe nach, und ihr Gegensatz ist
'qualitativ'. Aber ausser diesem wahren Unterschiede auch noch als seiend und für die Vorstellung, wie sie Seiten des Gesetzes sein könnten, verschieden gesetzt, erscheinen sie in 'quantitativer' Verschiedenheit. Ihr eigentümlicher qualitativer Gegensatz tritt somit in die 'Grösse' und es entstehen Gesetze der Art, dass z. B. Sensibilität und Irritabilität im umgekehrten Ver-hältnisse ihrer Grösse stehen ), so dass, wie die eine wächst, die andere abnimmt, oder besser gleich die Grösse selbst zum Inhalte genommen, dass die Grösse von etwas zunimmt, wie seine Kleinheit abnimmt.
이 둘(즉, 감수성과 자극성)이 구별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개념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며, 그들의 대립은 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참된 구별 외에, 그들이 존재하는 어떤 것이자 표상 속에서 마치 법칙의 두 ‘측면’처럼 서로 다른 것으로 설정될 때, 그들은 양적인 차이로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그들 고유의 질적 대립이
‘크기(Grösse)’의 차이로 전도되어 버리며,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종류의 법칙이 생긴다. 예컨대, 감수성과 자극성이 서로의 크기에 반비례한다 —즉, 하나가 커질수록 다른 하나는 작아진다는 식이다. 혹은 다른 식으로 말하면, “어떤 것의 크기가 증가함에 따라, 그것의 소(小)함이 감소한다” 라는 식으로 크기 자체가 내용을 취한다[유기적 법칙 논의의 마지막 변증적 전환 부분으로, ‘질적 대립(Qualität)’과 ‘양적 차이(Quantität)’의 전도가 어떻게 생명 현상 이해를 왜곡시키는지를 보여주는 구절
🧩 해설
이 짧은 문단은 헤겔이 자연과학적 생리학의 법칙 개념을 비판하면서 “질적 차이(Qualität)”와 “양적 차이(Quantität)”를 혼동한 관찰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핵심 구절
🔹 1. “Werden sie unterschieden … so sind sie es dem Begriffe nach”
감수성(Sensibilität)과 자극성(Irritabilität)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이 구별은 단지 경험적 차이가 아니라,
개념적으로 필요한 질적 차이임. 즉, 두 속성은 서로를 매개하는 관계적 통일체의 내적 구별이지, 두 개의 독립된 실체적 “것들”이 아님
✅ ‘질적 구별’이란 — 하나의 개념(Begriff) 안에서,
자기 안의 대립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구별이다.
🔹 2. “Aber … auch noch als seiend und für die Vorstellung … verschieden gesetzt”
그러나 “관찰하는 의식”은 이 둘을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두 성질로 놓고, 각각을 법칙의 한쪽 항(Seite) 으로 봄으로써 개념적 질적 차이가외적 표상 속의 양적 차이로 바뀌게 됨
⚙️ 예: 감수성이 “많다 / 적다”, 자극성이 “세다 / 약하다” 이런 식으로 정도(Grösse) 로서 다뤄짐.
🔹 3. “Ihr eigentümlicher qualitativer Gegensatz tritt somit in die Grösse”
즉, 질적 대립이 “크기”의 대립으로 전도됨. 철학적으로 말하면, 질(Qualität) 이 양(Quantität) 으로 환원되어 버린 것. 이는 “법칙(Law)”이 더 이상 내적 필연성을 표현하지 못하고 단순한 경험적 상관관계의 수준으로 전락했음을 뜻함
🔹 4. “Es entstehen Gesetze … im umgekehrten Verhältnisse ihrer Grösse stehen”
예: “감수성이 커질수록 자극성은 작아진다.”
→ 이건 생리학적 상관관계로 흔히 제시되던 명제(18~19세기 생리학의 ‘상반 법칙’).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이런 법칙은 내용상 공허함
“감수성이 크면 자극성이 작다”
→ “어떤 것이 크면, 그것의 작음은 줄어든다.” 결국 자기 동일적 공허한 명제로 귀착됨.
🔹 6. 변증법적 전환의 의미
이 구절 이후 헤겔은 곧바로
“이성의 관찰적 태도”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계기, 즉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이성(이성의 자기의식)”으로 넘어감. 그 이유는 경험적으로 ‘법칙’을 찾으려 했던 관찰이 결국 공허한 양적 상관관계의 반복으로 끝나기 때문. 따라서 진정한 법칙은 외적 경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자기 안에서, 개념의 자기운동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관찰하는 이성 → 자기 자신을 아는 이성”의 변증적 이행].
상동 232
Wird diesem Gesetze aber ein bestimmter Inhalt ge-geben, etwa so, dass die Grösse eines Loches zunimmt, je mehr das abnimmt, was seine Erfüllung ausmacht, so kann dieses umgekehrte Verhältnis ebenso in ein gerades verwandelt und ausgedrückt werden, dass dieㅣGrösse des Loches in geradem Verhältnisse der Menge des Weggenommenen zunimmt, — ein tautologischer Satz, er mag als directes oder umgekehrtes Verhältnis ausgedrückt werden, der in seinem eigentümlichen Ausdrucke nur dieses heisst, dass eine Grösse zunimmt, wie diese Grösse zunimmt.
그런데 이 법칙에 어떤 구체적인 내용을 부여해 본다면, 예컨대 “구멍의 크기는 그것을 채우던 것이 줄어드는 만큼 커진다”라고 한다면, 이 역비례 관계는 마찬가지로 정비례 관계로도 바꾸어 표현될 수 있다. 즉 “구멍의 크기는 제거된 양에 비례하여 커진다”라는 식으로. 그리하여, 그것이 역비례로 표현되든 정비례로 표현되든, 결국 그것은 동어반복적 명제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 “고유한 표현”이란 다름 아니라 “어떤 크기가 증가함에 따라, 그 크기가 증가한다”는 말일 뿐이다[이 문장은 앞의 “질적 대립이 양적 대립으로 환원되는” 관찰 이성의 한계를 논리적으로 폭로하는 절정 부분으로서 헤겔 특유의 변증법적 풍자가 돋보이는 대목
🧩 해설
이 문단은 앞 문단(“감수성과 자극성의 반비례 법칙”)을 논리적·형식적 수준에서 전복하는 것. 헤겔은 여기서 경험적 법칙이 공허한 형식적 반복에 불과함을
“구멍(Loch)”의 예를 들어 풍자적으로 드러냄
🔹 1. ‘구멍’의 예 — 감각적 비유를 통한 논리 폭로
“구멍의 크기가 커질수록, 그것을 채우는 물질의 양은 줄어든다.”→ 얼핏 들으면 ‘역비례 관계’처럼 들림.
그러나 동시에, “구멍의 크기는 제거된 물질의 양에 비례하여 커진다.”→ 정비례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음.
➡️ 결론: ‘역비례’냐 ‘정비례’냐는 단지 표현 방식의 문제일 뿐, 아무런 실질적 차이를 주지 않음
🔹 2. “Tautologischer Satz” — 공허한 자기 반복
‘구멍의 크기는 커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커지기 때문이다.’→ 논리적 내용이 전혀 없는, 순환적 진술. 헤겔은 이런 식의 자연과학적 ‘법칙’들이 결국 내용 없는 동일성을 반복하는 것임을 폭로함. 즉, ‘법칙’이라 부를 만한 내적 필연성(begriffsnotwendige Einheit)이 아니라 단지 외적 상관관계(äußeres Verhältnis) 의 기술일 뿐이라는 것.
🔹 3. 철학적 핵심 — 개념의 결여
‘법칙’이란 단순히 두 크기의 상관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가 개념적으로 왜 필연적인가를 설명해야 함. 그런데 이 “감수성–자극성 법칙”이나 “구멍의 크기 법칙”은 그 필연성을 전혀 내포하지 못함. 따라서 이런 “법칙”은 “법칙 같은 표상(scheinbares Gesetz)”일 뿐, 이성의 진정한 대상이 아님
🔹 4. 구조적 의미
이 문장은 “관찰하는 이성”이 마주치는 자기 모순의 완결점얌. 감수성(Sensibilität)과 자극성(Irritabilität)의 관계를 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양적 관계로 환원할 때, 법칙은 순환적 자기 동일성으로 붕괴함. 따라서 이성은 이제 자연의 관찰에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야 함].
상동 232-233
Wie das Loch und das, was es erfüllt und weggenommen wird, qualitativ entgegengesetzt, aber wie das Reale dersel-ben, und dessen bestimmte Grösse in beiden, eins und dasselbe, und ebenso Zunahme der Grösse und Abnahme der Kleinheit dasselbe ist und ihre bedeutungsleere Entgegensetzung in eine Tautologie hinausläuft, - so sind die organischen Momente gleich unzertrennlich in ihrem Realen und in ihrer Grösse, die die Grösse desselben ist.
‘구멍’과 그것을 채우는 것, 그리고 제거된 것은
질적으로는 대립되어 있으나, 그 실재적인 것과 그들의 정해진 크기에서는 둘 다 동일한 하나이며, 마찬가지로 크기의 증가와 작음의 감소도 실은 하나이어서,이 둘의 의미 없는 대립은 결국 동어반복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유기적 계기들[예컨대 감수성과 자극성]도 그 실재에서는 분리될 수 없으며, 그들의 ‘크기’ 역시 동일한 것의 크기일 뿐이다[이 문단은 “구멍(Loch)”의 예시를 정리하면서, 그 논리적 구조를 유기적 생명의 경우로 되돌려 연결하는 대목. 즉, “감수성–자극성 법칙”이 왜 본질적으로 공허한지를, ‘질적 대립(qualitativer Gegensatz)’과 ‘양적 동일성(quantitative Identität)’의 전도를 통해 보여주는 구절
🧩 해설
이 문장은 앞서의 “구멍의 예시”를 유비적으로 유기체에 적용하면서, 관찰적 이성이 ‘양적 대립’으로 법칙을 구성하는 오류를 총괄적으로 비판
🔹 1. “Wie das Loch … qualitativ entgegengesetzt … aber wie das Reale derselben … eins und dasselbe”
‘구멍’과 ‘그것을 채우는 물질’은 질적으로는 반대입니다.(하나는 ‘비어 있음’, 다른 하나는 ‘채움’) 그러나 그들의 실재적 측면(Reales) — 즉 ‘양(量)’ — 은
동일한 하나의 현실을 다른 측면에서 표현한 것일 뿐임
⚙️ 구멍의 크기가 커진다는 것은 단지 ‘물질이 덜 채워졌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 뿐임. 즉, 질적 대립이 양적 동일성으로 환원되면서, 그 차이는 형식적·공허한 차이로 남음
🔹 2. “Zunahme der Grösse und Abnahme der Kleinheit dasselbe ist”
“크기의 증가”와 “작음의 감소”는 완전히 같은 뜻임. 그런데도 관찰하는 이성은 이 둘을 ‘법칙적 관계’ 로 표현함. 헤겔은 이것을 Tautologie(동어반복) 라고 부름
🔁 “A가 커질수록 B가 작아진다” → “A의 크기가 커질수록, A의 작음이 줄어든다.”
결국 이런 법칙은 내용상 자기 동일한 명제를 반복할 뿐, 개념적 설명력을 갖지 못함
🔹 3. “so sind die organischen Momente gleich unzertrennlich …”
이제 헤겔은 구멍의 예시를 유기적 구조의 경우로 확장함. 감수성(Sensibilität)과 자극성(Irritabilität)은
서로 다른 계기처럼 보이지만, 실재적으로는 한 유기체의 동일한 실재적 운동의 두 표현일 뿐임. 따라서 그 둘을 양적으로 비교(“감수성이 세면 자극성은 약하다”)하는 법칙은 자기모순적 형식논리일 뿐임
☞ 유기체의 각 계기들은 질적으로 구별되지만, 실재적으로(=개념적으로) 는 하나의 운동(자기반성적 생명 활동)임
🔹 4. 결론
즉, 이 문장은 이렇게 요약
감수성–자극성의 반비례 법칙은, ‘구멍의 크기와 채움의 양’처럼, 질적 대립을 양적 동일성으로 환원한 공허한 명제에 불과. 따라서 “관찰하는 이성”이 설정한 이런 유기적 법칙들은 진정한 ‘법칙’이 아니라, 형식적 동일성의 반복, 즉 “이성이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형태의 자기표현”에 지나지 않음
🧭 다음 전환 예고
이 대목 이후, 헤겔은 다음 단계로 넘어감. 관찰적 이성이 더 이상 외적 자연 속에서 참된 법칙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자, 이제 그 법칙의 근거를 자기 자신 안에서 찾게 됨→ “이성은 자신을 발견하였으나, 아직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정신현상학』 “이성” 장의 결정적 전환점이며,
곧 이어 “이성의 자기의식화(이성의 자기 인식)”로 진입하게 됨].
상동 233
Eines nimmt nur mit dem Anderen ab und nimmt nur mit ihm zu, denn Eines hat schlechthin nur Bedeutung, insoweit das Andere vorhanden ist, - oder vielmehr es ist gleichgültig, eine organische Erscheinung als Irritabilität oder als Sensibilität zu be-trachten, schon überhaupt, und ebenso wenn von ihrer Grösse gesprochen wird, wie es gleichgültig ist, die Zunahme eines Loches als Vermehrung seiner als der Leerheit oder als Vermehrung der herausgenommenen Fülle auszusprechen.
하나는 오직 다른 것과 더불어 감소하며, 다른 것과 더불어 증가할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는 다른 것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유기적 현상을 자극성으로 보건, 감수성으로 보건 무관하며, 그 크기에 대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는 하나의 구멍이 커지는 것을 ‘빈틈의 증가’로 말하든, ‘제거된 충만함의 증가’로 말하든 똑같이 무관한 것과 같다[감수성(Sensibilität)과 자극성(Irritabilität)이 서로를 규정하므로, 양적 대립을 설정해도 결국 아무 내용이 없다”는 이야기
해설
1) 감수성과 자극성은 서로 독립된 속성이 아님
헤겔은 유기체의 기본적 성질(감수성, 자극성, 재생성)이 개별 속성처럼 관찰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이라고 말함. 그래서 다음 두 문장 모두 똑같은 의미임
“이 유기체는 감수성이 강하다.”
“이 유기체는 자극성이 강하다.”
누가 “이건 감수성의 증가다”라고 말해도, 다른 사람은 “아니다, 자극성의 증가다”라고 말할 수 있음. 둘 다 틀리지 않기 때문임
2) 양적 대립을 세우는 것도 무의미해짐
전통적 생리학이나 관찰학은 감수성이 크면 자극성은 작아지며, 자극성이 증가하면 감수성이 감소한다고. 하지만 헤겔은 이런 양적 반비례 법칙이 의미 없다고 지적. 왜냐하면 감수성과 자극성은 애초에 하나의 동일한 유기적 단일성을 다른 관점에서 본 것에 불과하기 때문
3) “구멍”의 비유가 말하는 것
구멍이 커진다는 것은 빈 공간이 많아졌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채워진 물질이 줄어들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음. 둘 중 어느 표현을 쓰든 같은 사실을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일 뿐, 둘 사이에 ‘법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님. 헤겔이 보기에 감수성과 자극성의 관계도 이와 같음. 감수성과 자극성은 유기체 안에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동일한 실재이며 둘 사이의 양적 반비례 같은 “법칙”은 사실상 내용 없는 말장난임. 그 이유는 하나는 오직 다른 하나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지기 때문. 따라서 두 속성을 대립적으로 관찰하는 시도는 유기적 본질을 왜곡].
상동
Oder eine Zahl, z. B. 'Drei', bleibt gleich gross, ich mag sie positiv oder negativ nehmen, und wenn ich die Drei zu Vier vergrössere, so ist das Positive wie das Negative zu Vier geworden: - wie der Südpol an einem Magnete gerade so stark ist als sein Nordpol, oder eine positive Elektricität oder eine Säure gerade so stark als ihre negative, oder als die Base, worauf sie einwirkt. - Ein solches Grosses, als jene Drei oder ein Magnet u.s. f., ist ein 'organisches' Dasein; es ist dasjenige, was vermehrt und vermindert wird, und wenn es vermehrt wird, werden 'beide'ㅣFactoren desselben vermehrt, so sehr als 'beide' Pole des Magnets oder als die beiden Elektricitäten, wenn ein Magnet u. s. f. verstärkt wird, zunehmen.
또는 예컨대 ‘삼(3)’이라는 수는 내가 그것을 양(+)으로 취하든 음(–)으로 취하든 똑같이 같은 크기를 가진다. 그리고 내가 그 삼을 사(4)로 늘리면, 그 양수도 음수도 모두 사가 된 것이다. 마치 자석에서 남극이 북극과 똑같은 세기를 지니는 것처럼, 혹은 양(+)전기나 산이 그에 대응하는 음전기나 염기와 똑같은 세기를 지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크기, 즉 그 ‘삼’이나 자석 따위는 하나의 ‘유기적’ 현존재이다. 그것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바로 그것이며, 만약 그것이 증가한다면 그 요소를 이루는 양쪽 모두 증가한다. 마치 자석 등이 강화되면 두 극이 모두 강해지듯이, 혹은 두 전기(양전기와 음전기)가 동시에 증가하듯이 말이다[감수성과 자극성의 양적 대립이 왜 성립할 수 없는지를 다시 한 번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부분
해설
문단의 요지는 매우 단순. 한 유기적 현실(organisches Dasein)이 커지면, 그것을 이루는 서로 대립된 두 요소도 함께 커지지, 반비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1) “삼(3)은 양수든 음수든 동일한 크기다”
헤겔이 말하고 싶은 핵심은 +3이라 부르든 –3이라 부르든, “크기”라는 면에서는 똑같이 3이라는 것. 3을 4로 키우면, +3이 +4가 되듯 –3도 –4가 됨. 즉 양적 변화는 전부가 함께 변하는 하나의 동일한 크기에 대한 말일 뿐임. 이는 감수성/자극성에 대한 잘못된 논의를 비판하기 위한 예비적 비유임
2) 자석의 북극과 남극, 양전기와 음전기
자석을 강하게 만들면 어떻게 되는가? 북극만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남극도 똑같이 강해짐. 둘은 서로 대립하지만 동일한 실체의 두 필연적 극이기 때문. 전기(+)와 전기(–), 산과 염기에서도 같은 논리가 작동
3) 이것을 유기체의 감수성/자극성에 적용해보면
헤겔의 비판:
유기체에서 감수성(Sensibilität)과 자극성(Irritabilität)을 두 개의 독립된 ‘량’처럼 보고
“감수성이 크면 자극성은 작아진다” 같은 반비례 법칙을 세우는 것은 오류. 실은 둘 다 하나의 동일한 유기적 전체의 두 측면임. 따라서 유기체가 “강해지고” “활발해지면” 감수성과 자극성이 함께 증가하는 것이지
둘이 서로를 감소시키는 관계가 아님].
상동 233-234
- Dass beide ebensowenig nach Intension und Extension verschieden sind, das Eine nicht an Extension ab-, dagegen an Intension zunehmen kann, während das Andere
umgekehrt seine Intension vermindern, dagegen an Extension zunehmen sollte, fällt unter denselben Begriff leerer Entgegensetzung; die reale Intension ist ebenso schlechthin so gross als die Extension, und umgekehrt.
두 요소가 강도(Intension)와 범위(Extension)의 면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 즉 하나가 범위에서는 줄어들면서 강도는 커지고, 반대로 다른 하나는 강도가 작아지면서 범위는 커진다는 식의 대비는 모두 공허한 대립에 속한다. 실제적 강도는 본질상 그 범위와 똑같이 크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강도와 범위를 서로 따로 분리해서 서로 반비례한다고 말하는 사고 자체가 틀렸다는 것. 헤겔에게서 강도(Intension)와 범위(Extension)은 주어진 동일한 실체의 서로 다른 관점에서의 표현임. 그러니 두 지표가 반대로 움직인다고 말하면 실은 “같은 실체가 증가하면서 감소한다” 같은 모순적 서술이 되어버림. 그가 “빈(entleert) 대립”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
상동 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