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아카데믹판 h.v. G.J.P.J. Bolland(Leiden A.H. Adriani, 1907)
A.Bewusstsein
I.Die sinnliche Gewissheit oder das Dieses und das Meinen
II.Die Wahrnehmung oder das Ding und die Täuschung
III.Kraft und Verstand, Erscheinung und uebersinnliche Welt S.117-
Dieses Reich der Gesetze ist zwar die Wahrheit des Verstandes, welche an dem Unterschied, der in dem Gesetze ist, den ‚Inhalt‘ hat ; es ist aber zugleich nur seine ‚erste Wahrheit‘ und füllt die Erscheinung nicht aus. Das Gesetz ist in ihr gegenwärtig, aber es ist nicht ihre ganze Gegenwart ; es hat unter immer ㅣ anderen Umständen eine immer andere Wirklichkeit.
이 법칙들의 왕국은 확실히 오성의 진리이며, 법칙 속의 차이에서 내용을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 첫 번째 진리일 뿐이며, 현상을 채우지는 못한다.
법칙은 현상 속에 현존하지만, 그것이 현상의 전체 현존은 아니다. 법칙은 항상 다른 상황 속에서 항상 다른 현실태를 가지기 때문이다[앞 문장에서, 감각적 세계의 진정한 모습은 그 속에 내재된 법칙들임을 보였는데, 따라서 법칙은 오성의 인식 대상이며, 오성이 감각적 혼돈 속에서 찾아낸 ‘내용 있는 차이’, 즉 구조화된 진리이지만, 이것은 ‘첫 번째 진리’일 뿐임. 즉 법칙은 중요한 통찰이지만, 여전히 추상적입니다. 왜냐하면 법칙은 일반성(보편성)이지만, 현상은 특수한 상황 속에서 실현되기 때문. 그러므로 법칙은 현실에 항상 다르게 드러나고, 그것만으로는 현상의 개별성과 구체성을 설명할 수 없음. 그러므로 "법칙은 현상 안에 존재하지만, 현상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하면서 헤겔은 법칙과 현실 사이의 ‘매개’를 더 깊이 사유해야 할 필요성을 암시. 현실은 단지 법칙이 기계적으로 드러나는 자리가 아니라, 법칙이 살아 움직이며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변형하는 자리임. 즉 하나의 법칙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단지 법칙이 추상적이라서가 아니라, 현실 자체가 구체적이며 자기 운동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 따라서 헤겔은 이 법칙의 일반성을 넘어서는 더 깊은 구조, 즉 이성적인 개별성’이나 ‘내적 필연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암시].
상동 117-118
Es bleibt dadurch der Erscheinung ‚für sich‘ eine Seite, welche nicht im Inneren ist, oder sie ist in Wahrheit noch nicht ‚als Erscheinung‘, als ‚aufgehobenes Fürsichsein‘, gesetzt. Dieser Mangel des Gesetzes muss sich an ihm selbst ebenso hervortun. Was ihm zu mangeln scheint, ist, dass es zwar den Unterschied selbst an ihm hat, aber als allgemeinen, unbestimmten ; insofern es aber nicht ‚das‘ Gesetz überhaupt sondern ‚ein‘ Gesetz ist, hat es die Bestimmtheit an ihm und es sind damit unbestimmt ‚viele‘ Gesetze vorhanden. Allein diese Vielheit ist vielmehr selbst ein Mangel ; sie widerspricht nämlich dem Princip des Verstandes, welchem als Bewusstsein des einfachen Inneren die an sich allgemeine ‚Einheit‘ das Wahre ist ; die vielen Gesetze muss er darum vielmehr in ‚Ein‘ Gesetz zusammenfassen lassen, wie z. B. das Gesetz, nach welchem der Stein fällt und das Gesetz, nach welchem die himmlischen Sphären sich bewegen, als Ein Gesetz begriffen worden ist.
그로 인해 현상에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측면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내부에 있지 않거나, [측면 혹은 현상은] 아직 진정으로 '현상으로서', 즉 '지양된 자기존재'로서 정립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법칙의 결핍은 법칙 자체 안에서 드러나야만 한다[1. "현상은 여전히 '그 자체로서' 하나의 측면을 가진다" : 법칙이 현상의 진리라고 했지만, 현상 전체를 완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말. 즉 현상에는 법칙 속에 포섭되지 않는 어떤 잔여, 자기 고유의 독립적 측면이 남아 있다는 뜻
2. "내면에 속하지 않은 측면" : 이 "자기 고유의 측면"은 법칙이 내포하고 있는 본질(Inneres)에 아직 포함되지 않은 부분. 다시 말해, 현상이 단순히 ‘법칙의 표현’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
3. "현상은 아직 진정으로 '현상으로서' 정립되지 않았다" : 헤겔의 용어로 "현상"은 단순한 외면적 드러남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본질을 담고 있는 드러남, 즉 지양된 자기존재이어야 함. 그러나 지금의 현상은 그 수준까지 이르지 못한, 불완전한 현상임.
4. "이 결핍은 법칙 자체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 : 헤겔은 단순히 "법칙이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고, 법칙 자체가 자기 결핍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 이는 법칙이 자기 모순을 통해 스스로를 넘어서는 계기를 낳는다는 의미. 결국 이 모순을 통해 법칙 → 개념 → 이성의 전개로 나아감]. 그것(법칙)이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이 차이를 그 자체 안에 가지고는 있지만, 그 차이가 보편적이고 불확정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법칙 일반’이 아니라 '하나의' 법칙일 경우, 그것은 규정성[특정성]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불확정인 다수의 법칙들이 존재하게 된다[1. "법칙이 결여하고 있는 것" : 헤겔은 여기서 '법칙'이 가진 내적 한계를 말함. 겉보기에는 법칙이 차이(Differenz), 즉 변화를 포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차이가 너무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라는 것이 문제
2. "차이를 보편적, 불확정적인 것으로만 갖고 있다" :
예: "모든 물체는 떨어진다"라는 법칙이 있다면, 이것은 차이를 포괄하지만, 실제로 어떤 물체가, 언제, 어떻게 떨어지는지는 말하지 않음. 즉 법칙은 변화를 일반적인 틀 안에서만 제시할 뿐, 구체적인 정합성이나 필연성은 결여되어 있다는 것
3. "‘법칙 일반’이 아니라 '하나의' 법칙일 경우" : 만약 이 일반적 개념을 벗어나, 어떤 특정한 법칙을 말하고자 한다면, 예를 들어 "철은 산소와 만나면 산화된다" 같은 법칙은, 특정 대상을 특정 조건에서 말하므로 규정성(Bestimmtheit)을 가짐
4. "불확정 다수의 법칙이 생겨난다" : 그런데 이렇게 되면, 자연 전체를 설명하려면 수많은 개별 법칙들이 필요하게 됨. 법칙이 통일적 설명이 아니라, 나열된 복수성으로 바뀌게 되는 것.
요약하면, 법칙은 그 자체로 차이를 포함하지만, 너무 보편적이고 추상적임. 그래서 특정 법칙으로 내려오면, 무수히 많은 법칙들이 생겨나게 되고, 이는 다시 통일된 진리로서의 법칙 개념을 위협하게 됨. 이는 결국 법칙 개념의 모순을 드러내며, 이 모순을 통해 사고는 더 높은 단계인 이성적 개념(개별성과 보편성의 통일)으로 나아가게 됨]. 그러나 이러한 다수성은 오히려 그 자체로 하나의 결핍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내면의 의식으로서의 오성의 원리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자체 내적으로 보편적인 ‘통일성’이 진리다. 따라서 오성은, 예를 들어 돌이 떨어지는 법칙과 천상의 천체들이 운동하는 법칙이 하나의 법칙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이 다수의 법칙들을 하나의 법칙으로 통합하도록 요구받게 된다[오성의 원리는 보편적 통일성을 추구하지만 다수의 개별 법칙들은 이 원리에 결핍이자 모순. 그래서 이 법칙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법칙으로 환원(통합)되어야 함. 이 과정은 단순한 오성에서 이성으로 이행하는 계기를 보여줌].
상동 118
Mit diesem Ineinanderfallen aber verlieren die Gesetze ihre Bestimmtheit ; das Gesetz wird immer oberflächlicher und es ist damit in der Tat nicht die Einheit ‚dieser bestimmten‘ Gesetze, sondern ein ihre Bestimmtheit weglassendes Gesetze des Falles der Körper an der Erde und der himmlischen Bewegung in sich vereint, sie beide in der Tat nicht ausdrückt. Die Vereinigung aller Gesetze in der ㅣ ‚allgemeinen Attraction‘ drückt keinen Inhalt weiter aus als eben den bloßen Begriff des Gesetzes selbst, der darin als ‚seiend‘ gesetzt ist ; die allgemeine Attraction sagt nur dies, dass ‚Alles einen beständigen Unterschied zu Anderem‘ hat.
그러나 이러한 함께 섞임(Ineinanderfallen) 속에서,
법칙들은 그 규정성을 상실하게 된다. 법칙은 점점 더 피상적이 되어, 결국 실제로는 '이러한 특정한 법칙들'의 통일이 아니라, 그들의 규정성이 제거된 하나의 법칙, 예컨대 지상의 물체의 낙하와 천체의 운동을 하나로 통합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이 둘 모두를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법칙이 되는 것이다[오성은 법칙을 통해 통일성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현실 세계의 구체적 다양성과 차이를 삭제해버리게 되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 모든 법칙의 통일이 ‘만유 인력(allgemeine Attraction)’ 속에 이뤄졌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법칙이라는 개념 자체 ― 즉, 존재하는 것처럼 정립된 그 개념 ― 외에 또 다른 내용을 표현하지 않으며, 이 만유 인력이란 것은 결국 모든 것은 다른 것과 끊임없는 차이를 가진다는 사실만을 말할 뿐이다[헤겔은 오성이 설정하는 보편적 법칙이 궁극적으로 피상적인 형식 논리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봄. 이런 문제의식은 이후 이성(이념)으로의 이행에서, 구체적 자기운동을 내포하는 개념으로 나아가야 함을 암시].
상동 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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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논리학 출간 200주년 기념 학술회에서 발표된 논문집(Hegel -200 Jahre Wissenschaft der Logik, h.g.v. Anton Friedrich Koch et al.(Hamburg : Felix Meiner Verlag, 2014))에서 새롭게 알게된 흥미로운 사실은 원래 정신현상학은 그 부제가 학의 체계(System der Wissenschaft)라고 명명된 바가 암시하듯, 이성 장 뒤에는 논리학과 관련된 서술이 이어질 예정이었고 이 책의 출판사와도 헤겔은 그렇게 계약을 했으나, 1806년 부활절 전에 헤겔이 논리학 부분을 건너 뛰는 수정안을 출판사에 알리자 출판업자는 대노했다고 한다. 그 뒷부분은 이후 7개월에 걸쳐 역사철학 및 형이상학과 관련 깊은 정신, 절대정신, 절대지 장으로 채워진다. 이에 대한 부채의식이 작용했는지, 헤겔은 예나의 강사직을 떠나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에서 교장직을 맡으면서 논리학(Wissenschaft der Logik)을 발표하는데, 이는 정신현상학 출간 후 약 5년이 지나서 였다. 핀카드는 헤겔의 논리학 저술은 김나지움 학생들의 논리교육을 위한 교재로 고안되었다고 했지만, 이런 목적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텍스트 :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아카데믹판 h.v. G.J.P.J. Bolland(Leiden A.H. Adriani, 1907)
A.Bewusstsein
III.Kraft und Verstand, Erscheinung und uebersinnliche Welt S.110-
Dieses wahrhafte Wesen der Dinge hat sich jetzt so bestimmt, dass es nicht unmittelbar für das Bewusstsein ist, sondern dass dieses ein mittelbares Verhältnis zu dem Inneren hat und als Verstand durch diese Mitte des Spiels der Kräfte in den wahren Hintergrund der Dinge blickt. Die Mitte, welche die beiden Extreme, den Verstand und das Innere, zusammenschließt, ist das entwickelte Sein der Kraft, das für den Verstand selbst nunmehr ein ‚Verschwinden‘ ist. Es heißt darum ‚Erscheinung‘. Denn Schein nennen wir das Sein, das unmittelbar an ihm ㅣ selbst ein Nichtsein ist ; es ist aber nicht nur ein Schein, sondern Erscheinung, ein ‚Ganzes‘ des Scheins. Dieses Ganze als Ganzes oder Allgemeines ist es was das ‚Innere‘ ausmacht, das ‚Spiel der Kräfte‘ als ‚Reflexion‘ desselben in sich selbst.
사물들의 이 참된 본질은 이제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그것은 의식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은 오히려 내부와 매개된 관계를 가지며, 그리고 의식은 오성으로서 이 힘들의 운동[사물들 사이의 힘의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중간 단계를 통해 사물들의 참된 배후를 들여다본다. 양 극단, 오성과 내면을 서로 결합시키는 중간은 힘의 전개된 존재이며, 이 존재는 이제 오성에게는 하나의 '소멸'이다. 그래서 이것을 '현상'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자체에서 직접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가상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힘의 운동(힘들의 상호작용)은 오성과 사물의 내부를 연결하지만, 이 힘의 운동은 결국 사라지기에 덧없는 현상임. 오성은 현상을 통과하여 내면(본질)에 이름].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가상일 뿐만이 아니라 현상, 즉 가상의 '전체'이다. 이 전체로서의 전체 또는 보편이야말로 '내면'을 구성하는 것, 즉, '힘들의 작용'이 그 자체 안에서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다[현상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가상이 아니라, 다양한 현상들이 하나의 통합된 체계를 이루는 것. 이 현상 전체가 바로 사물의 Inneres(내면, 본질)을 이룸. 이 현상들의 체계는 힘들의 상호작용(Spiel der Kräfte)이며, 이 상호작용은 자기 자신을 반영(Reflexion)함. 즉 힘들이 단순히 외부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전체적인 구조를 스스로 만들어냄)
상동 110-111
In ihm sind für das Bewusstsein auf gegenständliche Weise die Wesen der Wahrnehmung ‚so gesetzt‘, wie sie an sich sind, nämlich als unmittelbar in das Gegenteil ohne Ruhe und Sein sich verwandelnde Momente, das Eins unmittelbar in das Allgemeine, das Wesentliche unmittelbar in das Unwesentliche und umgekehrt. Dieses Spiel der Kräfte ist daher das entwickelte Negative ; aber die Wahrheit desselben ist das Positive, namlich das Allgemeine‘, der ‚ansichseiende‘ Gegenstand.
그 속에서 [지각의 결과로 도달한 "das Spiel der Kräfte" (힘들의 상호작용) 또는 Erscheinung], 의식에게 지각의 본질들이 대상적인 방식으로[운동 그 자체, 즉 변증법적 부정과 전환이 이제 대상처럼 보인다는 것. 이는 정신현상학 전체의 방법론적 전환을 뜻함. 더이상 '존재하는 것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들이 어떻게 모순 속에서 서로를 규정하고 소멸시키는지를 인식하는 것] 그것들이 그 자체로 어떤 것인지 그대로 수립된다. 즉 어떠한 고요함이나 고정된 존재도 없이 직접적으로 정반대의 것으로 변해버리는 계기들로서, 즉 하나[단독자]는 직접적으로 보편자로,
본질적인 것은 즉시 비본질적인 것으로,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힘들의 운헁은 그러므로 전개된 부정이다. 그러나 그것의 진리는 긍정, 즉 보편자,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상이다[힘들의 운행은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전환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사라지는 과정. 이 운동은 ‘자기의 폐기’, ‘지속적인 전환’이라는 점에서 부정인 것. 힘’의 개별적 양상들은 더 이상 자립적인 실재로 남아 있지 않으며, 모든 구체적인 것은 사라지고 그 과정만이 남음. 그러나 이 부정 속에서 나타나는 진정한 실재는 바로 '긍정적인 것', 즉 모든 순간적인 차이를 초월하여 유지되는, 그 모든 운동과 소멸을 관통하여 드러나는 보편자. 그것은 곧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an sich seiender Gegenstand)' — 다시 말해, 주체가 아닌 대상이면서, 동시에 더 이상 단순한 감각적 대상도 아닌 이성의 대상인 것].
상동 111
Das ‚Sein‘ desselben ‚für das‘ Bewusstsein ist vermittelt durch die Bewegung der ‚Erscheinung‘, worin das ‚Sein der Wahrnehmung‘ und das Sinnlichgegenständliche überhaupt nur negative Bedeutung hat, das Bewusstsein also daraus sich in sich als in das Wahre reflektiert, aber als Bewusstsein wieder dieses Wahre zum gegenständlichen ‚Inneren‘ macht und diese Reflexion der Dinge von seiner Reflexion in sich selbst unterscheidet, -wie ihm die vermittelnde Bewegung ebenso noch eine gegenständliche ist.
그 존재[대상의 존재]는 의식에 대해 '현상'의 운동을 통해 매개된다[의식은 이제 감각적 대상이나 지각된 대상을 단순한 실재로 받아들이지 않음. 그것들은 ‘현상’이며 그 현상은 지속적으로 소멸하고 반전되는 운동, 즉 부정의 운동이자 힘들의 놀이'로 들어남]. 여기서 '지각의 존재'와 감각적 대상 일반은 단지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진다. 그래서 의식은 이로부터 자신을 참된 것으로서 자기 안에서 반성하지만, 동시에 의식으로서 이 참된 것을 [대상화된 외부와 마찬가지로] 다시 대상적인 '내부'로 만들고 사물의 이 반성과 자신의 자기 내적 반성을 구별한다. – 이처럼 매개된 운동 역시 여전히 의식에게는 대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의식은 자신의 내적 반성과, 현상의 외적 반성을 구분. 즉, 자기 자신이 진리를 드러낸다고 느끼지만, 여전히 그것을 자신 밖의 대상처럼 다루고 있는 것. 매개적 운동조차도 '아직은 대상적'으로 이해됨. 즉 의식은 아직 이 운동을 자기 자신의 본질로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
상동
Dieses Innere ist ihm daher ein Extrem gegen es ; aber es ist ihm darum das Wahre, weil es darin als in dem ‚Ansich‘ zugleich die Gewissheit seiner selbst oder das Moment seines Fürsichseins hat ; aber dieses Grundes ist es sich noch nicht bewusst, denn das ‚Fürsichsein‘, welches das Innere an ihm selbst haben sollte, wäre nichts anderes als negative Bewegung. Aber diese ist dem Bewusstsein noch die ‚gegenständliche‘ verschwindende Erscheinung, noch nicht sein ‚eigenes‘ ㅣ Fürsichsein und das Innere ist ihm daher zwar Begriff, allein es kennt die Natur des Begriffes noch nicht.
이 내부는 의식에게 하나의 극단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안에서 있음(Ansich)’ 동시에 자기 자신의 확실성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의 계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의식에게 참된 것이다. 하지만 의식은 이 근거[그것이 참되다는 이유]를 아직 의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내면이 그 자체로서 갖고 있어야 할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는 부정의 운동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의식은 현상 너머에 ‘진짜 실재’로서 내부를 설정하지만 이 내부는 자기 자신(의식)과 대립되는 극으로 존재, 즉 '나’ 밖에 있는 진리로 간주됨. 이 '내면’은 단순히 외적인 진리가 아니라, 의식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실성을 그 안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참된 것으로 여겨짐. 즉 그것은 ‘안에 있는 것(Ansich)’일 뿐 아니라, 의식의 자기확신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함. 그러나 의식은 아직 이를 깨닫지 못함. 즉 내면이 의식의 자기확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 즉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Fürsichsein)의 계기를 포함한다는 점을 의식은 아직 자각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란 부정적 운동일 뿐이기 때문. 'Fürsichsein’은 단순한 자족적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초월하는 운동. 따라서 의식은 이 운동이 자기 자신(즉, 의식 주체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외부에 있는 진리를 보듯이 진리로서 ‘내면’을 보고 있는 것]. 그러나 이것[부정적 운동,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은 의식에게 아직 ‘대상적'으로 사라지는 현상이며, 아직은 자기 것인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Fürsichsein)가 아니다. 따라서 내부는 의식에게 개념이지만, 의식은 이 개념의 본성을 아직 알지 못한다[부정적 운동으로서의 내부는 아직 의식에게 외부 대상으로 남아 있음. 즉 의식은 그것을 자기의 본질로 느끼지 않고, 외부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으로만 보는 것. 의식은 그 내면, 즉 본질적 진리가 바로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함. 내면(Inneres)은 실제로 개념, 즉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매개하며 다시 자기로 귀결되는 변증법적 자기 운동이지만 의식은 이 개념의 본성, 즉 개념이 단지 추상적 정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기운동임을 아직 이해하지 못함. 즉 비록 내면이 사실상 개념이라는 점을 눈치채고 있지만, 그 개념이 무엇인지, 즉 자기 자신 안에서 운동하는 힘이라는 점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
상동 111-112
In diesem ‚inneren Wahren‘, als dem absolut Allgemeinen, welches vom ‚Gegensatz‘ des Allgemeinen und Einzelnen gereinigt und ‚für den Verstand ‚ geworden ist, schließt sich erst über der ‚sinnlichen‘ als der ‚erscheinenden‘ Welt nunmehr eine ‚übersinnliche‘ als die ‚wahre‘ Welt auf, über dem verschwindenden ‚Diesseits‘ das bleibende ‚Jenseits‘, ein Ansich, welches die erste und darum selbst unvollkommene Erscheinung der Vernunft oder nur das reine Element ist, worin die Wahrheit ihr ‚Wesen‘ hat.
이 ‘내적인 참됨’, 즉 절대적 보편자 안에서, 그것은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대립으로부터 정화되었고, 오성에 대해 자체로 있게 되었다. 이로써 비로소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세계 위에, 이제 감각 너머의 세계, 즉 진정한 세계가 열리며, 사라지는 이편의 세계 너머에 남아있는 저편의 세계, 그 자체 안에 있는 것, 이성의 첫 번째, 따라서 여전히 이성의 불완전한 현상이거나,
진리가 그 본질을 지니고 있는 순수한 요소가 드러난다[초감각적 세계는 단순히 종교적 저편이 아니라, 이해가 형식적으로 구축한 개념의 세계].
상동 112
‚Unser Gegenstand‘ ist hiermit nunmehr der ‚Schluss‘, welcher zu seinen Extremen das Innere der Dinge und den Vetstand und zu seiner Mitte die Erscheinung hat ; die Bewegung dieses ‚Schlusses‘ aber giebt die weitere Bestimmung dessen, was der Verstand durch die Mitte hindurch im Inneren erblickt und die Erfahrung, welche er über dieses Verhältnis des Zusammengeschlossenseins macht.
우리의 대상은 이제 '결합(Schluss)'이며, 이는 그 극단으로서 사물의 내면과 오성을, 그리고 그 중간항으로 현상을 갖는다. 그러나 이 '결합'의 운동은 오성이 중간항을 통과하여 내면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의 더 나아간 규정을 제공하며, 오성이 이 결합 관계에 대해 만들어내는 경험을 가져다준다.
상동
Noch ist das Innere ‚reines Jenseits‘ für das Bewusstsein. Denn es findet sich selbst in ihm noch nicht ; es ist ‚leer‘, denn es ist nur ‚das Nichts der Erscheinung‘ und positiv das einfache Allgemeine. Diese Weise des Inneren zu sein, stimmt unmittelbar denjenigen bei, welche sagen, dass das Innere der Dinge nicht zu erkennen sei ; aber der Grund würde anders gefasst werden müssen. Von diesem Inneren, ㅣ wie es hier unmittelbar ist, ist allerdings keine Kenntnis vorhanden, aber nicht deswegen, weil die Vernunft zu kurzsichtig oder beschränkt oder wie man es sonst nennen will wäre(worüber hier noch nichts bekannt ist, denn so tief sind wir noch nicht eingedrungen), sondern um der einfachen Natur der Sache selbst willen, weil nämlich im ‚Leeren‘ nichts erkannt wird, oder von der anderen Seite ausgesprochen, weil es eben als das ‚Jenseits‘ des Bewusstseins bestimmt ist. Das Resultat ist freilich dasselbe, wenn ein Blinder in den Reichtum der übersinnlichen Welt(wenn sie einen hat, er sei nun eigentümlicher Inhalt derselben, oder das Bewusstsein selbst sei dieser Inhalt) und wenn ein Sehender in die reine Finsternis, oder wenn man will in das reine Licht, wenn sie nur dieses ist, gestellt wird : der Sehende sieht in seinem reinen Lichte so wenig als in seiner reinen Finsternis und gerade so viel als der Blinde in der Fülle des Reichtums, welcher vor ihm läge.
사물의 내면은 여전히 의식에게는 '순수한 저편'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아직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어 있다' — 왜냐하면 단지 '현상의 무(無)'일 뿐이며, 긍정적으로는 단순한 일반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면의 존재 방식은 사물의 내면은 인식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견해와 즉각적으로 일치하지만, 그 근거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즉각 주어진 내면에 대해서는 실제로 어떠한 인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이 너무 근시안적이거나, 제한되어 있거나, 혹은 다른 식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은 아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여기서 아직 아무것도 알려진 바 없으며, 우리는 아직 그만큼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사물 자체의 단순한 성격 때문이며, 다시 말해 '비어 있는 것'에서는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다른 쪽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의식의 '저편'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물론 동일하다. 즉, 한 맹인이 초감각적인 세계의 풍요로움 속에 놓여 있다 해도(그 세계가 어떤 고유한 내용을 가지고 있든, 혹은 그 내용이 의식 그 자체이든), 혹은 한 눈 밝은 사람이 순수한 어둠 속에, 또는 원한다면 순수한 빛 속에 놓여 있다 해도 — 단지 그것이 순수한 빛일 뿐이라면 — 그는 순수한 빛 속에서나 순수한 어둠 속에서나 똑같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맹인이 자신의 앞에 놓인 풍요로움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헤겔 특유의 비유적 설명 방식. 의식이 그 '내면'이나 '초감각적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 너무 풍요롭기 때문도, 혹은 너무 밝거나 어둡기 때문도 아니라, 그것이 '순수한 일반성' 또는 '비어 있음'으로서 어떤 구체성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
상동 112-113
Wenn es mit dem Inneren und dem Zusammengeschlossensein mit ihm durch die Erscheinung weiter nichts wäre , so blieb nichts übrig, als sich wahr zu nehmen, von dem wir wissen, dass es nicht wahr ist, oder damit doch in dem Leeren, welches zwar erst als Leerheit von gegenständlichen Dingen geworden, aber ‚als Leerheit an sich‘ auch für die Leerheit aller geistigen Vethältnisse und der Unterschiede des Bewusstseins als Bewusstseins genommen werden muss, -damit also in diesem ‚so ganz ㅣ Leeren‘, welches auch das ‚Heilige‘ genannt wird, doch etwas sei, es mit Träumereien, ‚Erscheinungen‘, die das Bewusstsein sich selbst erzeugt, zu erfüllen. Es müsste sich gefallen lassen, dass so schlecht mit ihm umgegangen wird, denn es wäre keines Besseren würdig, indem Träumereien selbst noch besser sind als seine Leerheit.
만약 내면과 그것과의 연결이 현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면, 결국 남는 것은 현상에 머무르는 것, 즉 — 우리가 진실이 아님을 아는 —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혹은 단지 비어 있음 속에 머무는 것이다. 이 비어 있음은 비록 처음에는 대상적인 사물들의 결여로 생겨난 것이지만, '그 자체로서의 비어 있음'으로 또한 모든 정신적 관계들 및 의식으로서 의식의 차이들에 대한 비어 있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 그러므로 이 '그야말로 완전히 비어 있는 것' 속에서, 그것이 '신성한 것'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을 피하려는 이유에서 나는] 결국 의식이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이나 '현상'들로 그것을 채우게 되는 것이다['내면'과 '현상'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것이 빈 껍데기처럼 느껴질 수 있는 위험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대목 : 만일 내면(또는 본질)이 단지 "현상을 통해서만 연결된 것"으로 남아 있다면, 우리는 결국 내용 없는 '거룩함'이라는 빈 공간만을 마주하게 되고, 그것을 꿈이나 자기기만으로 채우게 된다고 경고. 이 문단은 '종교적 공허'나 '영적 자기기만'에 대한 철학적 풍자]. 그것은 그렇게 형편없이 다루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더 나은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꿈 같은 환상조차도 그 비어 있음보다는 더 낫기 때문이다[단지 "비어 있음"으로 남는 내면(또는 신성함)이 어떤 본질적 내용 없이 공허하게 유지된다면, 그것은 차라리 환상이나 망상보다 못하다고는 비판. 이는 자기기만이라도 어떤 내용이 있는 쪽이 낫다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본질이 단지 "비어 있는 신성함"으로 고정될 경우 생기는 무의미함을 강하게 꼬집는 대목].
상동 113-114
Das Innere oder das übersinnliche Jenseits ist aber ‚entstanden‘ ; es ‚kommt‘ aus der Erscheinung her und sie ist seine Vermittlung, oder ‚die Erscheinung ist sein Wrsen‘ und in der Tat seine Erfüllung. Das Übersinnliche ist das Sinnliche und Wahrgenommene, gesetzt, wie es in ‚Wahrheit‘ ist ; die Wahrheit‘ des ‚Sinnlichen‘ und Wahrgenommenen aber ist, ‚Erscheinung ‚ zu sein. Das Übersinnliche ist also die ‚Erscheinung‘, ‚als Erscheinung‘. Wenn dabei gedacht wird, das Übersinnliche sei ‚also‘ die sinnliche Welt, oder die Welt, wie sie ‚für die unmittelbare sinnliche Gewissheit und Wahrnehmung‘ ist, so ist dies ein verkehrtes Verstehen ; denn die Erscheinung ist vielmehr nicht die Welt des sinnlichen Wissens und Wahrnehmens als seiende, sondern sie ‚als aufgehobene‘ oder in Wahrheit als ‚innere‘ gesetzt. Es pflegt gesagt zu werden, das Übersinnliche sei ‚nicht‘ die Erscheinung ; dabei wird aber unter der Erscheinung nicht die Erscheinung verstanden, sondern vielmehr die sinnliche‘ Welt als selbst reale Wirklichkeit.
내면 혹은 초감각적 저편은 그러나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현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현상이 그것의 매개이며, 또는 '현상이 그것의 본질'이며 실제로 그것의 충만함이다. 초감각적인 것은 감각적이고 지각된 것이 마치 '진리에' 놓인 것이지만, 감각적이고 지각된 것의 진리는 '현상'이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초감각적인 것은 '현상된 것으로서의 현상'이다[초감각적 세계(또는 '내면')가 어떤 초월적 차원에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 세계(지각되고 감각된 세계)의 진리로부터 매개되어 나온 것임을 보여줌. 즉,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그 자체로 현상'이며, 그 현상된 것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초감각적인 것]. 이때 초감각적인 것이 '따라서' 감각적 세계, 혹은 '직접적인 감각적 확신과 지각'에 대해[지각에 의해 주어지는] 있는 세계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왜냐하면 현상은 단지 존재하는 감각적 인식과 지각의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지양된 것으로서', 또는 참된 의미에서 '내면적인 것으로서'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초감각적인 것은 '현상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여기서 '현상'이라는 말은 실제로는 '현상'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인 실재로서의 감각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현상을 감각적으로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비판하며, 진정한 '현상'이란 그 감각적 세계가 부정(aufgehoben)되어 내면으로 전환된 것, 즉 참된 의미에서 파악된 것임을 말함. 헤겔은 '초감각적인 것'이 단순히 감각을 넘어선 다른 차원이 아니라, 감각 세계를 통해 드러난 '진실로서의 현상'이라고 강조].
상동 114
Der Verstand, welcher unser Gegenstand ist, befindet sich auf eben dieser Stelle, dass ihm das Innere nur erst als das allgemeine noch unerfüllte ‚Ansich‘ geworden ; das Spiel der Kräfte hat nur eben diese negative Bedeutung, nicht an sich und nur diese positive, das ‚Vermittelnde‘ aber außer ihm zu sein. Seine Beziehung auf das Innere durch die Vermittlung aber ist seine Bewegung, durch welche es sich ihm erfüllen wird. -‚Unmittelbar‘ für ihn ist das Spiel der Kräfte ; das ‚Wahre‘ aber ist ihm das einfache Innere ; die Bewegung der Kraft ist daher ebenso nur als ‚Einfaches‘ überhaupt das Wahre. Von diesem Spiele der Kräfte haben wir aber gesehen, dass es diese Beschaffenheit hat, dass die Kraft, welche ‚sollicitiert‘ wird von einer anderen Kraft, ebenso das Sollicitierende ‚ für diese andere ist, welche selbst erst hierdurch sollicitierende wird.
우리의 대상인 오성은 지금 막 그 내면이 오성에게 아직 충족되지 않은 보편적인 '자체로서 있음(Ansich)'으로서만 되어 있는 지점에 머물러 있다. 힘들의 작용은 단지 이러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며, 즉 자체로서 있음은 아니고, 또한 오직 이러한 긍정적인 의미, 즉 그것[힘들의 작용]을 매개하는 것은 오성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오성이 사물의 내면을 파악하려 하지만 아직 그 내면(진리의 본질)을 단지 추상적이고 공허한 "보편성(Ansich)"으로만 파악하고 있다는 것. 즉 오성은 아직 "내면"을 실질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전의 "힘과 현상" 절에서 나타났던 힘들의 상호작용은 그 자체로 본질(진리)이 아니라, 단지 그 본질에 이르는 매개로만 이해되고 있다는 것]. 그러나 내면과의 관계는 매개를 통한 것으로, 바로 그 관계가 오성 자신의 운동이며, 이 운동을 통해 내면이 오성에게 충만하게 될 것이다. — 오성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은 힘들의 작용이지만 오성에게 ‘진리’는 단순한 내면이다. 따라서 힘의 운동도 단순한 것으로서만이 진리이다[오성이 사물의 내면(진리)을 파악하기 위해 겪는 운동(자기 전개)을 강조. 오성은 지금은 외적 현상인 "힘들의 유희"만을 직접적으로 마주하지만, 그것을 통해 매개적으로 내면에 이르려 함. 즉, 진리는 단순하고 보편적인 내면이며, 힘의 운동 전체 역시 단순성 속에서 파악될 때 비로소 진리에 이른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이 힘들의 작용이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보았다. 즉, 다른 힘에 의해 '촉발(solicitiert)'되는 힘은, 바로 그로 인해 다른 힘에게는 '촉발하는 것'이 되며, 그 다른 힘 역시 바로 이로 인해 비로소 촉발하는 것이 된다[힘들의 상호작용이 일방적인 원인과 결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말함. 어떤 힘이 다른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 동시에, 그 자체로 다른 힘에 영향을 주는 역할도 하게 되는데, 이는 상호 매개적 관계, 또는 상호 규정성(Wechselbestimmung)을 말하며, 모든 규정이 단순히 외재적이지 않고, 자기 안에서 서로를 규정하고 전도되며 운동한다는 '변증법적 구조'를 이룸].
상동 115
Es ist hierin ebenso nur der unmittelbare Wechsel oder das absolute Austauschen der ‚Bestimmtheit‘ vorhanden, welche den einzigen ‚Inhalt‘ des Auftretenden ausmacht, entweder allgemeines Medium oder negativ Einheit zu sein. Es hört in seinem bestimmten Auftreten selbst unmittelbar auf, das zu sein, als was es auftritt ; es sollicitiert durch sein bestimmtes Auftreten die andere Seite, die sich hierdurch ‚äußert‘ ; d. h. diese ist unmittelbar jetzt das, was die erste sein sollte. Diese beiden Seiten, das ‚Verhältnis‘ des Sollicitierens und das ‚Verhältnis‘ des bestimmten entgegengesetzten Inhalts ist ‚jedes für sich‘ die absolute Verkehrung und Verwechslung. Aber diese beiden Verhältnisse sind selbst wieder dasselbe, und der Unterschied der ‚Form‘, das Sollicitierte ㅣund das Sollicitierende zu sein, ist dasselbe, was der Unterschied des ‚Inhalts‘ ist, das Sollicitierte als solches, nämlich das passive Medium ; das Sollicitierende hingegen das tätige, die negative Einheit oder das Eins.
여기에는 오직 즉각적인 교대 또는 '규정성'의 절대적인 교환만이 존재하며, 이 규정성은 나타나는 것의 유일한 내용으로, 그것은 일반적 매개이거나 부정적 통일성 중 하나이다[힘들의 상호작용은 고정된 본질이나 자립적 존재가 아니라, 항상 즉각적으로, 절대적으로 바뀌는 규정성의 형태를 띤다는 것. 규정성은 각 힘이 나타나는 방식 또는 형태를 의미하며, 그것은 딱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일반적 매개체는 다른 힘들이 나타나는 장 또는 매개 역할을 하며, 부정적 통일성은 자신 안으로 수렴하며 다른 것을 부정하는 자기 동일성 또는 응축된 중심으로의 수렴. 이 문장은 결국 힘의 본질은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두 가지 규정성 간의 끊임없는 교환 그 자체이며, 이 교환은 항상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운동임을 강조]. 그것은 그 특정한 나타남 속에서 곧바로, 자기가 나타났던 바로 그것이기를 멈춘다. 그것은 자기의 특정한 나타남을 통해 다른 쪽을 자극하고, 그로 인해 다른 쪽이 자신을 드러낸다; 즉, 그 다른 쪽이 곧바로 지금은 첫 번째 것이 되어야 했던 바로 그것이다[두 힘 사이의 역할이 뒤바뀐다는 것. 즉 두 힘이 고정된 위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역할을 넘나들며 교환]. 이 두 측면, 즉 자극 관계와 특정한 반대되는 내용의 관계[하나는 형식(형태)의 관계: 자극하는 힘 vs 자극받는 힘. 다른 하나는 내용(실질)의 관계: 능동적 단일성 vs 수동적 매개체]는 각각 그 자체로 절대적인 전도이며 뒤바꿈이다. 그러나 이 두 관계는 다시 동일한 것이며, '형식'의 차이, 즉 자극받는 것과 자극하는 것이 되는 차이는 곧 '내용'의 차이와 동일한 것이다. 자극받는 것은 그 자체로 수동적인 매개이고, 자극하는 것은 능동적인, 부정적 통일성, 즉 '하나됨(Eins)'이다.
상동 115-116
Hierdurch verschwindet aller Unterschiede ‚besonderer Kräfte‘, die in dieser Bewegung vorhanden sein sollten, gegen einander überhaupt ; denn sie beruhten allein auf jenen Unterschieden und der Unterschied der Kräfte fällt ebenso mit jenen beiden nur in Einen zusammen. Es ist also weder die Kraft noch das Sollicitieren und Sollicitiertwerden, noch Bestimmtheit, bestehendes Medium und in sich reflectierte Einheit zu sein, weder einzeln für sich etwas, noch sind es verschiedene Gegensätze, sondern was in diesem absoluten Wechsel ist, ist nur der Unterschied als allgemeiner‘ oder als ein solcher, in welchen sich die vielen Gegensätze reduciert haben. Dieser ‚Unterschied als allgemeiner‘ ist daher ‚das Einfache an dem Spiele der Kraft selbst‘ und das Wahre desselben ; er ist das ‚Gesetz der Kraft‘.
이로 인해 이 운동 안에서 서로를 대립하는 ‘특수한 힘들’ 사이의 모든 차이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 차이들은 오직 [앞서 언급된] 저 차이들에만 근거하고 있었으며, 힘들 사이의 차이 역시 그 둘[형식과 내용의 차이]과 함께 하나로 귀결되기 때문이다[앞서 언급된 두 가지 차이란 형식의 차이: 자극하는 것 vs 자극받는 것,
내용의 차이: 통일성(negative Einheit, Eins) vs 매개체(Medium). 그런데 이 두 차이는 이미 이전 문장에서 같은 구조의 두 측면일 뿐이라고 밝혀짐. 그렇다면 그로 인해 생긴 ‘힘들 사이의 개별적 차이’ 또한 사실상 근거를 잃게 됨. 결국 헤겔은 "힘들의 본질적 차이는 없다"는 사실을 통해, 모든 개별성이 어떻게 보편적 매개 구조 속에서 소멸되고 종합되는가를 드러냄]. 그러므로 그것은 힘도 아니고, ‚자극하고 자극받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는 매개체이자 자신 안에 반성된 통일체인 규정성도 아니며, 그 자체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대립물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인 변화 속에 있는 것은 단지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서의 차이이거나, 많은 대립들이 이 차이 속으로 환원된 것이다. 이 ‘보편적 차이’는 따라서 바로 ‘힘의 운동 자체에 있는 단순한 것’이며, 그것의 진리이다. 이것이 바로 ‘힘의 법칙’이다[개별적 실체나 양상들은 없다. '힘’이나 ‘자극/반응’, ‘매개체/통일성’ 등의 구별들은 고정된 실체가 아님.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도 않고, 서로 완전히 분리된 ‘대립’도 아님. 모든 특수한 규정들은 끊임없는 상호 교환(Verkehrung, Wechsel) 속에서 해체되고 종합됨. 이 교환 속에서 남는 것은 보편적 차이뿐임. 이 보편적 차이는 힘들의 작용 속에 있는 ‘단순한 것’, 즉 그 진리이며, 이것이 바로 자연이나 정신 속에서 힘들이 따르는 법칙].
상동 116
Zu dem ‚einfachen Unterschied‘ wird die absolut wechselnde durch ihre Beziehung auf die Einfachheit des Inneren oder des Verstandes. Das Innere ist zunächst nur ‚das an sich Allgemeine ; dieses an sich einfache Allgemeine ist aber wesentlich ebenso absolut ‚der allgemeine Unterschied‘, denn es ist das Resultat des Wechsels selbst, oder der Wechsel ist sein Wesen ; aber der Wechsel, als im Inneren gesetzt, ist, wie er in Wahrheit ist, in dasselbe hiermit als ebenso absolut allgemeiner beruhigter sich gleich bleibender Unterschied aufgenommen. Oder die Negation ist wesentliches Moment des Allgemeinen, und sie oder die Vermittlung also im Allgemeinen ist ‚allgemeiner Unterschied‘. Er ist im ‚Gesetzt‘ ausgedrückt, als dem ‚beständigen‘ Bilde der unstäten Erscheinung. Die ‚übersinnliche‘ Welt ist hiermit ein ‚ruhiges Reich von Gesetzen‘, zwar jenseits der wahrgenommen Welt, denn diese stellt das Gesetz nur durch beständige Veränderung dar, aber in ihr ebenso ‚gegenwärtig‘, und ihr unmittelbares stilles Abbild.
절대적으로 변화하는 현상이 단순한 차이로 되는 것은 그것이 내부 혹은 오성의 단순성과 관련을 맺음으로써이다. 이 내부는 처음에는 단지 '그 자체로서의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그 자체로 단순한 보편자는 본질적으로 또한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변화의 결과이며, 즉 변화가 그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부 속에 설정된 변화는, 그것이 실제로 그러하듯, 바로 그 동일한 것 안에[내부에] 이에 따라 또한 절대적으로 보편적이고 안정된, 스스로 동일하게 유지되는 차이로서 받아들여진 것이다[외부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변화가 내부에서 구조화되어 평형 상태를 이룬 차이로 변환되었고, aufgenommen "받아들여진 것이다”. 즉, 이 변화는 단순한 소란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이제는 법칙의 형태로 내면에 수용되었다는 의미]. [단순한 차이는 '변화하는 힘들의 운동'이 '내면적 보편자'와 관계를 맺으며 형성된 결과. 내부 즉 오성에 의해 파악된 보편자는 처음에는 단순한 '그 자체로 보편자(an sich Allgemeine)'이지만 이 보편자는 단순히 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Wechsel), 즉 힘들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므로, 그 자체로 차이를 내포하는 보편자. 이 변화는 이제 외적인 운동이 아니라, 내부 속에 정착된 운동으로서 '법칙'이 됨] 또는 부정은 보편자의 본질적 계기이며, 부정 또는 매개는 보편자 안에서 ‘보편적 차이’이다. 이 보편적 차이는 ‘법칙’ 안에서, 즉 불안정한 현상의 ‘지속적인’ 형상으로서 표현되어 있다. 이리하여 ‘초감각적’ 세계는 ‘법칙들의 고요한 왕국’이며, 분명히 지각된 세계 너머에 있는데, 왜냐하면 그 지각된 세계는 법칙을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초감각적 세계는 그 지각된 세계 안에 ‘현재’하며, 그 직접적이고 조용한 ‘형상’이다[1. Negation als wesentliches Moment des Allgemeinen
→ “부정은 보편자의 본질적 계기다”
헤겔에게서 보편성은 단지 정적인 동질성이 아니라, 차이를 내포하고 통일시키는 운동성을 가짐. 그러므로 “부정”은 필연적으로 보편자 속에 들어 있으며, 그 부정을 통한 매개가 보편적 차이를 구성합니다.
2. Gesetz als beständiges Bild der unstäten Erscheinung
→ “법칙은 불안정한 현상의 지속적인 형상이다.”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 일정한 규칙성(=법칙)이 드러남. 법칙은 현상의 유동적인 표현들을 통일적으로 포착한 형상이며, 운동 속의 정지된 진리
3. übersinnliche Welt = ruhiges Reich von Gesetzen
→ “초감각적 세계는 법칙들의 고요한 왕국이다.”
감각적 세계(=지각된 세계)는 변화무쌍하지만, 그 아래에는 변하지 않는 원리, 즉 법칙들이 구조로서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초감각적 세계’임. 이는 단순히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도 현존.
4. die sinnliche Welt als unmittelbares stilles Abbild des Gesetzes
→ “감각적 세계는 법칙의 직접적이며 고요한 형상이다.”
다시 말해, 감각적 현실은 그 자체로 초감각적 진리(법칙)의 표현으로서, 초감각적 세계는 저 너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내면 구조로 현재하는 것. 즉 이 초감각적 세계는 지각된 세계의 저편이 아니라, 그 현상의 진실한 모습으로, 이 세계 안에 내재해 있다는 것].
상동 117
텍스트 :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아카데믹판 h.v. G.J.P.J. Bolland(Leiden A.H. Adriani, 1907)
A.Bewusstsein
III.Kraft und Verstand, Erscheinung und uebersinnliche Welt S.104-
Hier sind diese beiden Seiten Momente der Kraft ; sie sind ebensowohl in einer Einheit, als diese Einheit, welche gegen die für sich seienden Extreme als die Mitte erscheint, sich immer in eben diese Extreme zersetzt, die erst dadurch sind. Die Bewegung, welche sich vorhin als das Sichselbstvernichten wiedersprechender Begriffe darstellte, hat also hier die ‚gegenständliche‘ Form und ist Bewegung der Kraft, als deren Resultat das Unbedingtallgemeine als ‚Ungegenständliches‘ oder als ‚Inneres‘ der Ding hervorgeht.
여기서 이 두 측면은 힘의 계기들이다. 그들은 하나의 통일 속에 있는 동시에, 이 통일 자체는 각각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극단들에 대하여 하나의 중간처럼 드러난다. 그러나 이 중간은 끊임없이 바로 이 극단들로 분열되며, 바로 그 분열을 통해서만 그 극단들은 존재하게 된다. 앞서 모순된 개념들이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운동으로 나타났던 그 운동은, 이제 여기서 대상적인 형식을 취하게 되었고 힘의 운동으로 나타난다[힘의 운동이라는 객관적 형식으로 전환된 것. 즉 같은 구조지만 더 구체화된 현실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 그리고 이 운동의 결과로서 무조건적 보편자는 더 이상 대상적인 것이 아니라 비대상적인 것 또는 사물의 내면으로 드러난다[이 보편자는 이제 더 이상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대상이 아니라 사물의 ‘내면(Inneres)’, 즉 본질, 힘의 배후에 있는 원리로 등장한 것. 이것은 대상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개념으로 파악되는 원리,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성의 대상임].
상동
Die Kraft ist, wie sie bestimmt worden, indem sie ㅣ als solche, oder als ‚in sich reflektiert‘ vorgestellt wird, die eine Seite ihres Begriffes, aber als ein substantiiertes Extrem, und zwar das unter der Bestimmtheit des Eins gesetzte ; hiermit ist das ‚Bestehen‘ der entfalteten Materien von ihr ausgeschlossen und ein Anderes‘ als sie.
힘은 앞서 규정된 대로, 그 자체로 또는 '자기 자신 안에 반영된 것'으로 파악될 때, 그 개념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이 측면은 확증된 극단으로서, 더우기 하나라는 규정을 지닌 것으로 설정된다[자기 안에 수축된 힘이 실체화된 것, 독립된 항으로 드러난다는 것. 비유 : 양극을 가진 자석에서 한쪽 극이 자기 안으로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는 상태]. 이로써 전개된 물질들의 존재는 그 힘(자기 내면화된 힘)으로부터 배제되며, 그것들은 힘과는 다른 것으로 설정된다[힘의 자기 내면화는 곧 대립항의 생성을 가져온다는 것. 즉 힘이 내면화되어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는 순간,그로부터 ‘현상들’은 떨어져 나가 힘과는 구분되는 타자라는 또다른 항이 생기는 것].
상동 104-105
Indem es notwendig ist, dass ‚sie selbst‘ dieses ‚Bestehend‘ sei, oder dass sie sich ‚äussere‘, stellt sich ihre Äußerung so vor, dass ‚jenes Andere‘ zu ihr ‚hinzutritt‘ und sie sollicitiert ; aber in der Tat, indem sie ‚notwendig‘ sich äußert, hat sie dies, was als ein anderes Wesen gesetzt war, an ihr selbst. Es muss zurückgenommen werden, dass sie als ‚ein Eins‘ und ihr Wesen, sich zu äussern, als ein anderes zu ihr von außen Hinzutretendes gesetzt wurde : sie ist vielmehr selbst dieses allgemeine Medium des Bestehens der Momente als Materien, oder ‚sie hat sich geäussert‘, und das andere Sollicitierende sein sollte, ist sie vielmehr.
힘 자신이 바로 그 ‘존재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혹은 자신을 '외화'해야 할 필연성 때문에, 그 외화는 마치 그 ‘다른 것’이 외부에서 다가와 힘을 자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힘이 필연적으로 자신을 외화할 때 그렇게 해서 외부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사실 힘 자체의 내면 속에 있는 것이다[힘이 외부에서 어떤 자극을 받아 움직인 것처럼 보이는 그 대상은 실은 힘 자체의 구성 요소임. 즉, 자기 내면의 필요성에 따라 외화가 일어나는 것]. 힘이 '하나’이자 그 외화하려는 본질을 외부에서 오는 어떤 다른 것으로 설정되었던 것은 철회되어야 한다. 오히려 힘은 자신이 바로 그 계기들이 이 물질들로서 존재하게 되는 보편적 매개체이다. 또는 힘은 스스로를 외화한 것이며, 힘을 자극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다른 것은 실은 힘 자신이었다[세계를 구성하는 원리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상호 포함되며 전개된다는 것].
상동 105
Sie existiert also jetzt als das Medium der entfalteten Materien. Aber sie hat. gleich wesentlich die Form des Aufgehobenseins der bestehenden Materien, oder wesentlich ‚Eins‘ ; dies ‚Einssein‘ ist hiermit jetzt, da. ‚sie‘ gesetzt ist als das Medium von Materien, ‚ein Anderes als sie‘, und sie hat dieses ihr Wesen außer ihr. Indem sie aber notwendig dies sein muss, als was sie ‚noch nicht‘ gesetzt ist, so ‚tritt dieses Anderes hinzu‘ und sollicitiert sie zur Reflexion in sich selbst, oder hebt ihre Äußerung auf. In der Tat aber ist sie selbst dieses Insichreflectiertsein, oder dies Aufgehobensein der Äußerung : das Einssein verschwindet, wie es erschien, nämlich als ein Anderes ; sie ist es selbst, sie ist in sich zurückgedrängte Kraft.
힘은 이제 전개된 물질들의 매개체로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존재하는 물질들의 소멸됨이라는 형식을 본질적으로 지니거나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이러한 '하나됨'은 힘이 물질들의 매개로 설정된 지금 그와는 다른 것이며, 힘은 자신의 본질을 자기 바깥에 가지게 된 것이다[힘의 두 가지 양상 : 첫번째로 힘은 전개된 물질들의 매개체로 존재, 즉 현상계(여러 다양한 물질들)의 기반이 되는 매우 구체적이고 다수적인 형태로 작동. 두번째로 힘은 모든 개별성의 소멸, 즉 '하나(Eins)’로의 환원이라는 추상적이고 내적인 통일성도 본질로 가지고 있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힘이 물질들의 매개로 기능하면서, 그 하나됨은 힘의 외부에 있는 것처럼 된다. 즉, 힘은 자기 본질(Eins)을 스스로 바깥에 외화해버렸고, 따라서 자기 자신과 분리된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에 이름]. 그러나 힘은 아직 설정되지 않은 것[힘이 자기 본질(Einssein)과 일치하지 않고, 외화된 상태로 존재하는]으로서 반드시 되어야만 하므로, 그 다른 것이 덧붙여지고, 그것을 자극하여 자기 자신 안으로의 반성으로 이끈다. 다시 말해 그것의 외화를 소멸시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자신이 바로 이 자기 안으로의 반성이거나 혹은 이 외화의 소멸이다. 즉 하나됨은 마치 외부에 있는 어떤 다른 것처럼 나타났지만 사라진다. 그것은 곧 자기 안으로 되돌아간 힘, 바로 자신이다[자기 자신을 외화하고, 그 외부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다시 돌아오는 운동].
상동
Das, was als Anderes auftritt und sie sowohl zur Äußerung als zur Rückkehr in sich selbst sollicitiert, ㅣ ist, wie sich unmittelbar ergibt, ‚selbst Kraft‘, denn das Andere zeigt sich ebensowohl als allgemeines Medium, wie als Eins und so dass jede dieser Gestalten zugleich nur als verschwindendes Moment auftritt. Die Kraft ist hiermit dadurch, dass ein Anderes für sie und sie für ein Anderes ist, überhaupt noch nicht aus ihrem Begriffe herausgetreten ; es sind aber zugleich zwei Kräfte vorhanden und der Begriff beider zwar derselbe, aber aus seiner Einheit in die Zweiheit hervorgegangen.
외부의 다른 것으로 나타나서 힘을 외화하게 하고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자극하는 것은, 이는 곧바로 드러나듯, 그 자체가 힘이다. 왜냐하면 그 다른 존재는 일반적인 매개체이자 동시에 하나[일반적인 매개체는
앞서 말한 자기 외화된 힘, 그리고 Eins는 자기 자신으로 수렴된 내면적 통일체로서의 힘]로 나타나며, 이러한 각각의 모습은 동시에 사라지는 계기로 드러날 뿐이기 때문이다. 힘은, 다른 것이 자신을 위해 있고 자신도 다른 것을 위해 있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도 아직 자기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힘이 자신 외부에 어떤 타자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여전히 자기 자신의 개념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다는 것. 즉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외부조차 자기 개념 안에서 나온 자기 자신의 모습임]. 그러나 이제 두 개의 힘이 존재하게 되었고[하나의 힘이 자기 안에서 갈라지며 두 개의 독립된 힘으로 나타난다는 것. 이건 단순히 ‘하나가 둘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타자’를 만들어내는 자기 분화의 과정], 그 둘의 개념은 동일하지만, 하나의 개념이 둘로 나뉘어 나온 결과이다[개념은 동일. 즉 두 힘은 본질적으로 하나인 것. 하지만 그것이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이원성(이중성)으로 나타남. 이것은 곧, 주체와 객체, 원인과 결과(?), 힘과 반작용 같은 이원성이 하나의 근원적인 개념에서 출발한다는 것].
상동 105-106
Statt dass der Gegensatz durchaus wesentlich nur Moment bliebe, scheint er sich durch die Entzweiung in ganz selbstständige Kräfte‘ der Herrschaft der Einheit entzogen zu haben ; was es mit dieser Selbstständigkeit für eine Bewandtnis hat, ist näher zu sehen. Zunächst tritt die zweite Kraft, als das Sollicitierende und zwar als allgemeines Medium seinem Inhalte nach gegen die auf, welche als sollicitiertr bestimmt ist ; indem aber jene wesentlich Abwechslung dieser beiden Momente und selbst Kraft ist, ist sie in der Tat gleichfalls ‚nur erst‘ allgemeines Medium ‚indem sie dazu sollicitiert wird‘, und ebenso auch nur negative Einheit, oder zum Zurückgehen der Kraft Sollicitierendes, dadurch, dass sie sollicitiert wird‘. Es verwandelt sich hiermit auch dieser Unterschied, der zwischen beiden stattfand, dass das eine das ‚Sollicitierende‘ sein sollte, in dieselbe Austauschung der Bestimmtheiten gegen einander.
대립은 본래 필연적으로 단지 하나의 계기로 남는 대신에[둘로 나뉜 것처럼 보이는 힘의 구분은 사실 전체 안의 한 순간, 한 측면일 뿐이어야 한다는 것], 지금 그것은 둘로 나뉘어 완전히 독립된 두 힘으로 되어 단일한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이제 두 힘은 서로 상호의존적이기보다는, 마치 각자가 자율적 실체인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이는 표면적 인식의 착각이며, 실제로는 여전히 하나의 전체 안의 변증법적 운동이라는 것], 이러한 독립성이 실제로 무엇인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두 번째 힘은 자극을 주는 자로서, 그리고 그 내용상 보편적인 매개체[개별적이지 않고 보편적 작용의 장(場)]로서, 자극받는 힘에 대해 맞서는 방식으로 나타난다[이 둘의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 즉 곧 역할이 바뀌게 되는데, 이것이 변증법적 운동]. 그러나 저 힘은 본질적으로 이 두 계기의 교대이며 힘 자체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단지 보편적 매개체로서 존재할 뿐이고, 그것도 자극을 받음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다[자극자로서 기능할 때조차 그것은 외부의 자극(자기 외적 계기)에 의해 촉발된 것. 능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능동성 자체도 수동적 계기에서 비롯된다는 것]. 마찬가지로, 단지 부정적인 통일성, 즉 힘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자극자일 뿐이며, 그조차도 자극을 받음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 사이에 존재했던 —즉 한쪽은 자극자, 다른 쪽은 피자극자라는 — 차이 역시, 이제는 서로의 규정을 교환하는 동일한 교대관계로 전환된다.
상동 106
Das Spiel der beiden Kräfte besteht hiermit in diesem entgegengesetzten Bestimmtsein beider, ihrem Füreinandersein in dieser Bestimmung und der absoluten unmittelbaren Verwechslung der Bestimmungen, einem Übergangen, wodurch allein diese Bestimmungen sind, in denen die Kräfte ‚selbstständig‘ ㅣaufzutreten scheinen. Das Sollicitierende ist z. B. als allgemeines Medium und hingegen das Sollicitierte als zurückgedrängte Kraft gesetzt ; aber jenes ist allgemeines Medium selbst nur dadurch, dass das andere zurückgedrängte Kraft ist, oder diese ist vielmehr das Sollicitierende für jenes und macht dasselbe erst zum Medium.
이로써 두 힘의 작용은 다음과 같은 것에 있다: 서로 반대되는 규정을 지닌 두 힘이, 이 규정 속에서 서로를 위한 존재로 머물며[두 힘이 단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방식으로만 존재 가능하다], 그 규정들이 절대적으로 즉각적으로 서로 전도되는 데에 있으며, 이러한 전환을 통해서만 그 규정들이 존재하게 되고[정지된 상태로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 전환을 통해서만 어떤 ‘규정’도 있을 수 있다], 바로 그러한 규정들 속에서 그 힘들은 자립적인 것처럼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힘은 그 자체로는 실체가 아니며, 이러한 관계적 운동과 전환의 장 안에서만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임]. 예컨대, 자극하는 힘은 일반적 매개로 설정되고, 반면 자극받는 쪽은 억눌린 힘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이 일반적 매개는 다른 쪽이 억눌린 힘으로 존재함으로써만 그렇게 되는 것이며[매개로서의 기능은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의 억제 상태와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 오히려 그 억눌린 힘이야말로 그에 대한 자극자이며, 그로 인해 앞의 힘은 비로소 매개가 된다.
상동 106-107
Jene hat nur durch das Andere seine Bestimmtheit und ist sollicitierend nur insofern es vom anderen dazu sollicitiert wird, sollicitierend zu sein ; und es verliert ebenso unmittelbar diese ihm gegebene Bestimmheit, denn diese geht an das Andere über, oder vielmehr ist schon an dasselbe übergegangen. Das fremde die Kraft Sollicitierende tritt als allgemeines Medium auf, aber nur dadurch, dass es von ihr dazu sollicitiert worden ist, d. h. aber, ‚sie setzt‘ es so und ‚ist‘ vielmehr selbst wesentlich‘ allgemeines Medium ; sie setzt das Sollicitierende so, darum weil diese andere Bestimmung ‚ihr‘ wesentlich, d. h. weil ‚sie vielmehr sie selbst ist‘.
한쪽 힘은 다른 것에 의해 비로소 자기 규정을 가지며,
자극하는 자가 되는 것도 오직 다른 힘이 그것을 자극자가 되도록 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그리고 그것이 즉시 그 부여된 규정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그 규정이 다른 쪽으로 이전되었거나 오히려 이미 이전된 상태이기 때문이다[자극자라는 역할은 잠시 머무는 것이지 지속되지 않음. 즉 자극자와 피자극자의 역할은 순간적으로 교차]. 힘을 자극하는 외적인 것은 일반적인 매개체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 그로부터 자극을 받아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즉, 본래 그 힘이 상대를 그렇게 설정한 것이며, 본질적으로 자기가 바로 그 일반적 매개체이다. 그 힘은 자극하는 자를 그렇게 설정하지만, 그 이유는 그러한 ‘다른 규정’이 본래 자기 자신에게 본질적이라서, 즉 그 '다른 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타자(der Andere)”는 사실상 ‘자기 자신’의 한 순간이라는 것. 자기와 타자의 경계가 근본적으로 모호함. 타자(다른 힘, 외부의 것)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설정한 것으로서, 자기의 한 표현일 뿐만].
상동 107
Zur Vervollständigung der Einsicht in den Begriff dieser Bewegung kann noch darauf aufmerksam gemacht werden, dass sich die Unterschiede selbst in einem gedoppelten Unterschiede zeigen, einmal‘ als Unterschiede ‚des Inhalts‘, indem das eine Extrem in sich reflektierte Kraft, das andere aber Medium der Materien ist, ‚das anderemal‘ als Unterschiede der ‚Form‘, indem das eine Sollicitierendes, das andere Sollicitiertes, jene tätig, dieses passiv ist. Nach dem Unterschiede des Inhalts ‚sind‘ sie überhaupt, oder für uns unterschieden ; nach dem Unterschiede der Form aber sind Sie selbstständig, in ihrer Beziehung sich von einander selbst abscheidend und entgegengesetzt.
이 운동의 개념에 대한 통찰을 완성하기 위해 주목할 점은, 그 차이들 자체가 이중의 차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번은 내용의 차이로서, 한쪽 극은 자기 안으로 반성된 힘이지만 다른 한쪽은 물질들의 매개체이다[하나는 ‘응축되고 통일된 내적 힘’, 다른 하나는 ‘분산된 외적 장(場)’ 같은 개념]. 다른 하나는 형식의 차이로, 하나는 자극하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자극받는 힘으로서, 전자는 능동적이고 후자는 수동적이다[이로써 힘의 개념이 단지 물리적이지 않고, 존재론적·논리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제시]. 내용상의 차이에 따르면 그 둘은 일반적인 것으로, 혹은 [인식 주체인] 우리에게는 구별된 것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형식상의 차이에 따르면 그들은 자립적인 존재들이며, 서로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분리하고 대립적으로 존재한다[내용에 있어서는, 두 힘은 단지 다르게 보일 뿐이다. 즉 우리가 개념상으로 구분하는 것이지, 그것이 진정한 실체적 분열은 아님. 그러나 형식에 있어서는, 이 두 힘은 실제로 각자 자기 자신으로 서 있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대립을 통해 구체화됨. 즉 내용적 차이는 지성의 구분에 가깝고, 형식적 차이는 존재론적 분열과 대립을 수반].
상동
Dass so die Extreme nach diesen beiden Seiten nichts ‚an sich‘, sondern diese Seiten, worin ihr unterschiedenes Wesen bestehen sollte, nur verschwindende Momente, ein unmittelbares Übergehen jeder in die entgegengesetzte sind, dies wird für das Bewusstsein in der Wahrnehmung der Bewegung der Kraft. Für uns aber war, wie oben erinnert, auch noch dies, dass an sich die Unterschiede als Unterschiede des Inhalts und der Form‘ verschwanden und auf der Seite der Form dem Wesen nach das ‚Tätige‘, ‚Sollicitierende‘ oder ‚Fürsichseiende‘ dasselbe war auf der Seite des Inhalts als in sich zurückgedrängte Kraft, -das ‚Passive‘, ‚Sollicitierte‘, oder ‚Füreinandersseiende‘ auf der Seite der Form dasselbe, was auf der Seite des Inhalts als allgemeines Medium der vielen Materien sich darstellte.
이렇게 극단들이 이 두 측면에 있어서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 차별화된 본질이 자리한다고 여겨졌던 이러한 측면들이 단지 사라지는 계기들이며, 각각이 반대되는 것으로 즉각적으로 넘어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의식에게는 '힘의 운동'을 인식함으로써 일어난다[우리가 대립되는 항들을 고정된 실체로 여기는 것은 착각이며, 사실 이들은 서로를 전제로 하며 끊임없이 넘어가고 사라지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 그러나 우리에게는, 앞서 상기된 것처럼, 다음 또한 분명하였다: 곧, 그 자체로 보았을 때, 내용과 형식의 차이가 사라졌으며, 형식의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능동적', '자극하는 자', 혹은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는 자'는 내용의 측면에서는 '자기 안으로 되돌아간 힘'과 동일한 것이며, 반면에 '수동적', '자극받는 자', 혹은 '타자에게 존재하는 자'는 내용의 측면에서는 여러 물질들의 일반적 매개로 나타난 것과 동일하다[내용과 형식의 구분이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며, 그 구분은 결국 사라지는 관계임을 강조. 외적인 형식상의 차이(예: 활동/수동)가 실은 내용상에서도 하나의 동일한 본질에서 나오는 것. 즉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것(Fürsichsein)은 실은 자기 안에 움츠러든 힘(즉, 자기 자신을 내면화한 것)이고,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것(Füreinandersein)은 일반적인 외부 세계의 매개적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은 것].
상동 108
Es ergibt sich hieraus, dass der Begriff der Kraft durch die Verdopplung in zwei Kräfte ‚wirklich‘ wird, und wie er dies wird. Diese zwei Kräfte existieren als für sich seiende Wesen, aber ihre Existenz ist eine solche Bewegung gegen einander, dass ihr ‚Sein‘ vielmehr ein reines ‚Gesetztsein durch ein Anderes‘ ist, d. h. dass ihr Sein vielmehr die reine Bedeutung des ‚Verschwindens‘ hat ; sie sind nicht als Extreme, die etwas Festes für sich behielten und nur eine äußere Eigenschaft gegen einander in die Mitte und in ihre Berührung schickten, sondern was sie sind, sind sie nur in dieser Mitte und Berührung.
이로부터 다음이 도출된다: 힘의 개념은 두 개의 힘으로 이중화됨으로써 '현실적인 것'이 되며, 또한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도 드러난다. 이 두 힘은 각각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실체'로서 존재하지만, 그 존재는 서로에 대한 하나의 '운동'으로 되어 있어서,
그 '존재'는 오히려 순전히 '타자에 의해 설정된 존재'일 뿐이다. 즉 그 존재는 오히려 '소멸(사라짐)'이라는 순수한 의미를 가진다[독립적 실체처럼 보이는 것들의 실체성을 해체하고, 그것들이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그 존재 자체가 소멸 또는 관계적 설정일 뿐임을 보여줌. 이는 변증법의 핵심으로, 자기와 타자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개념이 구체화되고, 동시에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 그것들[두 힘]은 그 자신을 위해[각각 독립적으로] 고정된 어떤 것을 지니고 있으면서,
서로에 대해 단지 외적인 성질만을 가운데[중심]와 그 접촉[상호작용]에 보냈던 ‘극단들’이 아니라, 그것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오직 바로 이 '가운데[중간지대]'와 '접촉' 안에서만 그러한 것이다[힘들이 정체성을 갖는 방식은 서로의 중심에서의 상호작용, 즉 접촉 안에서만 가능. 다시 말해, 이 힘들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 의미를 가진다는 것. 즉 서로의 중간지점에 보내져 접촉된 속성들만이 존재성을 가짐].
상동
Es ist darin unmittelbar ebensowohl das Insichzurückgedrängt- oder das Fürsichsein‘ der Kraft wie die Äußerung, das Sollicitieren wie das Sollicitiertsein, ㅣ diese Momente hiermit nicht an zwei selbstständige Extreme verteilt, welche sich nur eine entgegengesetzte Spitze böten, sondern ihr Wesen ist dies schlechthin, jede nur durchs Andere und was jede so durchs Andere ist, unmittelbar nicht mehr zu sein, indem sie es ist.
여기에는 곧바로, ‘자신 속으로 수축된 상태’ 혹은 ‘힘의 자립적 존재’(Fürsichsein)가 그 외화인 자극함’(Sollicitieren), '자극받음’(Sollicitiertsein)과 똑같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러한 모든 계기들은 두 개의 독립적인 극단들에 분할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그것들이 단지 서로 대립된 정점을 내밀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은 다음과 같다: 각각은 오직 다른 것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그렇게 다른 것을 통해 존재하게 되는 그 순간에, 즉 그가 그러한 것이 되는 동시에, 이미 더 이상 그러한 것이 아니다[힘의 다양한 측면(예: 내면적 수축, 외적 표현, 자극함과 자극받음)은
각각 두 개의 극단에 분산되어 있는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존재. '자신이 되려는 순간, 자신이 아니다'
이 문장이 가장 역설적이면서도 중요한 부분. 한 계기가 다른 것에 의해 자신의 역할이 규정될 때, 그 순간에는 이미 더 이상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상호 의존적 순간일 뿐임].
상동 108-109
Sie haben hiermit in der Tat keine eigenen Substanzen, welche sie trügen und erhielten ; der Begriff‘ der Kraft erhält sich vielmehr als ‚das Wesen‘ in seiner ‚Wirklichkeit‘ selbst und die Kraft als wirkliche ist schlechthin nur in der Äußerung, welche zugleich nichts anderes als ein Sichselbstaufheben ist.
이로써, 그들[두 힘]은 사실상 자신들을 지탱하거나 보존해주는 고유한 실체들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힘의 개념’은 바로 그 현실성 속에 본질을 갖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힘’은 오직 그 외화에만 있으며, 그 외화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일 뿐이다[힘은 외적 실체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의 운동 속에서 존재를 확보. 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외적으로 드러난다는 것(Äußerung)을 의미하지만 그 드러냄 자체가 동시에 자기소멸임. 즉 "힘은 드러나야 존재하고, 드러나는 순간 사라진다."].
상동 109
Diese ‚wirkliche‘ Kraft, vorgestellt als frei von ihrer Äußerung und für sich seiend, ist die in sich zurückgedrängte, aber diese Bestimmtheit ist in der Tat, wie sie ergeben hat, selbst nur ein Moment der Äußerung‘. Die Wahrheit der Kraft bleibt also nur der ‚Gedanke‘ derselben und haltungslos stürzen die Momente ihrer Wirklichkeit, ihre Substanzen und Ihre Bewegung in eine ununterschiedene zusammen, welche nicht die in sich zurückgedrängte Kraft ist(denn diese ist selbst nur ein solches Moment), sondern diese Einheit ist ihr ‚Begriff‘, ‚als Begriff‘.
자기의 외화로부터 자유롭고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된 이 '실제적인' 힘은 자기 안으로 억제된 것이지만 이 규정성은 사실상, 앞서 드러났듯이, 단지 외화의 한 순간일 뿐이다[실제적인 힘 = 자기 안으로 억제된 힘. 힘은 잠재된 상태로 이해가능. 즉 외화되지 않은 채 내부에 머무르는 상태, 이것이 'in sich zurückgedrängt' (자기 안으로 억제된) 힘. 그러나 이 상태조차도 '표현(Äußerung)'의 일부. 중요한 전환점은 이 '억제됨' 자체도 그저 표현의 한 순간일 뿐이라는 점. 즉 잠재성과 현현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의 국면일 뿐임]. 힘의 진리는 결국 단지 그것의 사유로 머무를 뿐이며, 그 힘의 현실성의 계기들, 그것의 실체들과 운동은 모두 지탱 없이 무차별적으로 무너져내린다. 그것은 자기 안으로 억제된 힘이 아니라(왜냐하면 그것 역시 단지 한 순간에 불과하므로) 오히려 그 통일은 그것의 '개념', 그것이 '개념으로서'인 것이다[힘의 진리는 감각적·경험적 실체나 운동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개념적 통일 속에 있다는 것. 즉 이 통일은 사유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며, 이로써 "힘"은 '자기 자신을 개념적으로 아는 것', 즉 진정한 의미에서 Begriff als Begriff로 전개. 비유 : 생명력, 중력, 자아… 이런 '힘'들은 외적인 작용(움직임, 표현 등)으로 드러나지만, 그 각각의 현상은 진짜 힘의 본질이 아니라 단지 순간적인 국면들일 뿐임. 결국 '힘'이란 그 모든 현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 자체, 즉 순수한 사유의 구조임].
상동
Die Realisierung der Kraft ist also zugleich Verlust der Realität ; sie ist darin vielmehr ein ganz Anderes geworden, ㅣ nämlich die ‚Allgemeinheit‘, welche der Verstand zuerst oder unmittelbar als ihr Wesen erkennt, und welche sich auch als ihr Wesen an ihrer sein sollenden Realität an den wirklichen Substanzen erweist.
힘의 현실화는 동시에 현실성의 상실이다. 그것은 오히려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는데, 그것은 오성이 처음에 혹은 직접적으로 그 본질로서 인식한 '보편성'이다. 그리고 이 보편성은 그것이 실현되어야 할 현실성에서, 즉 실재적 실체들에서 그 본질로 드러난다[힘이라는 개념이 외적인 움직임으로 실현될수록 그 본래의 실체성을 잃고, 오히려 모든 구체적 현상을 포괄하는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보편성으로 돌아온다는 것. 즉, 힘이 외적으로 드러날수록, 그것은 더 이상 진정한 실재가 아님. 진짜 실재는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라지는 힘, 또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구조 혹은 개념임].
상동 109-110
Insofern wir das ‚erst‘ Allgemeine als den ‚Begriff‘ des Verstanden betrachten, worin die Kraft noch nicht für sich ist, so ist das zweite jetzt ihr ‚Wesen‘, wie es sich ‚an‘ und ‚für‘ sich darstellt. Oder umgekehrt, betrachten wir das erste Allgemeine als das ‚Unmittelbare‘, das ein ‚wirklicher‘ Gegenstand für das Bewusstsein sein sollte, so ist dieses zweite als das ‚Negative‘ der sinnlich gegenständlichen Kraft bestimmt ; es ist sie, wie sie in ihrem wahren Wesen nur als ‚Gegenstand des Verstandes‘ ist. Jenes erst wäre die in sich zurückgedrängte Kraft oder sie als Substanz, dieses zweite aber ist das ‚Innere‘ der Dinge, als ‚Inneres‘, welches mit dem Begriffe als Begriff dasselbe ist.
우리가 '처음'의 보편성을, 아직 힘이 자기 자신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오성의 개념으로 고찰한다면, 이제 두 번째는, 자기 자신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드러나는 바, 그것[힘]의 본질이다[처음에는 '힘'을 머릿속 추상적인 그림처럼 이해되지만 그 힘이 실제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내적 본질과 외적 현상으로 나타낼 때 비로소 힘은 진짜 힘(두 번째 단계, 본질)으로 드러난다는 것]. 또는 반대로, 우리가 첫 번째 보편성을 의식에게 있어서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대상이어야 할 것으로 간주한다면, 이 두 번째는 감각적으로 대상적인 힘의 '부정'으로 규정된다. 즉 그것은 오직 '오성의 대상'으로서만 그것의 참된 본지로 있는 것이다[처음의 보편성은 의식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실제적인 대상'이 되려고 함. 이 단계에서는 힘이 ‘구체적인 것’처럼 나타나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임. 두 번째 단계에서 힘은 이 ‘감각적 실체성’을 부정. 즉 힘은 감각적,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존재를 넘어서,
오직 사유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됨. 여기서 'Negative'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감각적 대상성(구체성)을 극복하고, 더 높은 차원(오성의 대상)으로 나아가는 의미]. 저 첫 번째 것은 자기 안으로 되돌려진 힘 혹은 실체로서의 힘일 것이다. 하지만 이 두 번째 것은 사물들의 '내부(Inneres)'이며, 이 '내부'는 개념(Begriff)으로서의 개념과 동일하다[첫 번째에서는
힘이 자기 안에 응축되어 있고, 어떤 실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낮만 두 번째에서는 힘이 더 이상 외적 실체로 남아 있지 않고, 사물들의 '내부'(Inneres) —
즉, 보이지 않는 본질로 파악됨. 이때 '내부'는 단순한 숨겨진 무엇이 아니라, 개념 그 자체임. 힘’의 본질은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개념이라는 것. 즉 사물의 진리는 보이는 힘이 아니라, 오성적 사유를 통해 파악되는 본질임]
상동 110
텍스트 :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아카데믹판 h.v. G.J.P.J. Bolland(Leiden A.H. Adriani, 1907)
A.Bewusstsein
III.Kraft und Verstand, Erscheinung und uebersinnliche Welt S.99-
Dem Bewusstsein ist in der Dialektik der sinnlichen Gewissheit das Hören und Sehen u. s. w. vergangenen und als Wahrnehmen ist es zu Gedanken gekommen, welche es aber erst im unbedingt Allgemeinen zusammenbringt. Dieses Unbedingte wäre nun selbst wieder nichts anderes als das auf eine Seite tretende ‚Extrem‘ des ‚Fürsichseins‘, wenn es als ruhiges einfaches Wesen genommen würde, denn so träte ihm das Unwesen gegenüber;
감각적 확실성의 변증법에서 듣기와 보기 등등은 의식에게서 사라지고 지각으로서 의식은 개념에 도달하지만 의식은 무제약적 보편 속에서 비로서 이것들을 하나로 모은다. 이 무제약자가 고요하고 단순한 본질로 간주될 경우, 그것은 이제 다시금 ‘자립적 존재’라는 한쪽 극단으로 나타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의 반대편에 비본질이 맞서게 되기 때문이다.
상동 99
aber auf dieses bezogen wäre es selbst unwesentlich und das Bewusstsein nicht aus der Täuschung des Wahrnehmens herausgekommen, allein es hat sich als ein solches ergeben, welches aus einem solchen bedingten Fürsichsein in sich zurückgegangen ist. Dieses unbedingte Allgemeine, das nunmehr der wahre Gegenstand des Bewusstsein ist, ist noch als ‚Gegenstand‘ desselben; es hat seinen ‚Begriff‘ noch nicht als ‚Begriff‘ erfasst. Beides ist ㅣwesentlich zu unterscheiden; dem Bewusstsein ist der Gegenstand aus dem Verhältnisse zu einem Anderen in sich zurückgegangen und hiermit ‚an sich‘ Begriff geworden, aber das Bewusstsein ist noch nicht für sich selbst der Begriff und deswegen erkennt es in jenem reflektierten Gegenstande nicht sich.
그러나 그것(Unbedingte)이 이에 관계되는 한, 그것 자체도 비본질적인 것이며, 의식은 지각의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의식에게는 바로 그러한 제약적인 자립적 존재로부터 스스로 안으로 되돌아기는 것[반성작용]이 일어난다. 이제 의식의 참된 대상이 된 이 무제약적 보편은 여전히 의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즉, 그것은 아직 자기 자신의 ‘개념’을 ‘개념’으로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대상으로서의 개념과 개념으로서의 개념의 구별. 후자는 의식이 개념을 자기 자신의 사고 과정으로 파악하는 상태]. 의식에게 대상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벗어나 스스로 안으로 되돌아갔으며, 이로써 대상은 ‘자체로서’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의식은 아직 자기 자신에게 개념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반성된 대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즉, 대상은 개념적으로 구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그것을 자기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음].
상동 99-100
‚Für uns‘ ist dieser Gegenstand durch durch die Bewegung des Bewusstseins so geworden, dass dieses in das Werden desselben verflochten und die Reflexion auf beiden Seiten dieselbe, oder nur Eine ist ; weil aber das Bewusstsein in dieser Bewegung nur das gegenständliche Wesen, nicht das Bewusstsein als solches zu seinem Inhalte hatte, so ist für es das Resultat in gegenständlicher Bedeutung zu setzen und das Bewusstsein noch von dem Gewordenen zurücktretend, so dass ihm dasselbe als Gegenständliches das Wesen ist.
‘우리에게’ 이 대상은 의식의 운동을 통해 이렇게 형성되었으며, 의식이 그 대상의 생성 과정에 얽혀 있고, 양측의 반성이 동일하거나 단지 하나일 뿐이다[변증법적 과정에서 의식이 대상을 반성(reflektieren)하는 것과 대상이 의식 속에서 반성되는 것이 결국 동일한 과정.
즉, 의식과 대상의 반성 작용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동일한 과정이 된다는 것. 결국, 대상은 단순히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 속에서 형성]. 그러나 의식이 이 운동 속에서 의식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대상적 본질만을 그 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의식에게 있어 그 결과는 여전히 대상적인 의미로 정립된다. 따라서 의식은 아직 그 형성된 결과(Gewordene)로부터 물러나 있으며, 그 결과가 여전히 의식에게는 외부의 대상적 본질로 남아 있다[의식은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대상을 형성하지만, 아직 자신을 대상 속에서 인식하지 못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 즉, 의식이 대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전의 상태를 설명하는 부분. 헤겔의 변증법에서 자기 인식(self-consciousness)의 형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의식이 더 이상 대상을 외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대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함].
상동 100
Der Verstand hat damit zwar seine eigene Unwahrheit und die Unwahrheit des Gegenstandes aufgehoben und was ihm dadurch geworden, ist der Begriff des Wahren als ‚an sich‘ seiendes Wahres, das noch nicht Begriff ist, oder das des ‚Fürsichseins‘ des Bewusstseins entbehrt und das der Verstand, ohne sich darin zu wissen, gewähren lässt ; dieses treibt sein Wesen für sich selbst, so dass das Bewusstsein keinen Anteil an seiner freien Realisierung hat, sondern ihr nur zusieht und sie rein auffasst. ‘Wir’ haben hiermit noch für erste an seine Stelle zu treten und der Begriff zu sein, welcher das ausbildet, was in dem Resultate enthalten ist ; an diesem ausgebildeten Gegenstände, der dem Bewusstsein als ein Seiendes sich darbietet, wird es sich erst zum begreifenden Bewusstsein.
이로써 오성이 자기 자신의 비진리와 대상의 비진리를 폐기한 결과로 오성에게 주어진 것은, ‘자체로서(an sich)’ 존재하는 참된 것의 개념이지만, 그것은 아직 개념이 아니거나, 의식의 자립적 존재(Fürsichsein)를 결여한 상태이다. 그리고 오성은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 채,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오성은 대상의 모순을 폐기하고, 대상이 단순한 감각적 실체가 아니라, ‘자체로서 참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지만 그것을 진정한 개념으로 정립하지는 못하고, 단순히 ‘자체로 존재하는 진리’로만 받아들임. 즉 오성은 대상을 분석하고 개념화하지만, 그것이 의식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즉, 자립적 존재로서 의식의 역할)는 성찰하지 않음으로써 오성은 이러한 상태를 변증법적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태도를 취함]. 이것(dieses)은 자기 본질을 스스로 전개해 나가며, 의식은 그 자유로운 실현 과정에 아무런 참여도 하지 않고, 단지 그것을 지켜보며 순수하게 받아들일 뿐이다[여기서 dieses는 앞 문맥에서 언급된 **대상(혹은 개념적 진리)**을 가리킴. 대상은 자기 본질을 스스로 전개하며 발전해 나가지만, 이 과정에서 의식이 능동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즉 의식은 단순히 대상이 전개되는 모습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뿐, 그것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고 단순히 그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auffassen)뿐인, 달리 말해 의식이 단순히 대상을 외부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 즉 의식이 아직 대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단계]. ‘우리’는 비로서 그 자리에 나아가, 결과 속에 포함된 것을 전개하는 개념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개된 대상, 즉 의식에게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그 대상 속에서, 의식은 이제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의식이 된다[우리(즉, 철학적 사유)는 단순히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개념을 전개해야 함. 대상은 단순한 외부적 존재가 아니라, 그 속에 포함된 본질을 개념적으로 분석하고 변증법적으로 발전시켜야할 존재임].
상동
Das Resultat war das Unbedingtallgemeine, zunächst in dem negativen und abstracten Sinne, dass das Bewusstsein seine einseitigen Begriffe negierte und sie abstrahiert, nämlich sie aufgab ; das Resultat hat aber an sich die positive Bedeutung, dass darin die Einheit ‚des Fürsichseins‘ und ‚des Füreinanderesseins‘ oder der absolute Gegensatz unmittelbar als dasselbe Wesen gesetzt ist. Es scheint zunächst nur die Form der Momente zu einander zu betreffen, aber das Fürsichsein und das Füranderesseins ist ebensowohl der ‚Inhalt‘ selbst, weil der Gegensatz in seiner Wahrheit keine andere Natur haben kann als die sich im Resultate ergeben hat, dass nämlich der in der Wahrnehmung für wahr gehaltene Inhalt in der Tat nur der Form angehört und in ihre Einheit sich auflöst. Dieser Inhalt ist zugleich allgemein ; es kann keinen anderen Inhalt geben, der durch seine besondere Beschaffenheit sich dem entzöge, in diese unbedingte Allgemeinheit zurückzugehen. Ein solcher Inhalt wäre irgend eine bestimmte Weise für sich zu sein und zu Anderem sich zu verhalten ;
그 결과는 절대적 보편으로서, 처음에는 부정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에서, 즉 의식이 자기 자신의 일면적인 개념들을 부정하고, 그것들을 추상화하여 포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결과는 그 자체로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데, 그 안에서 ‘자립적 존재'와 ‘서로를 위한 존재'의 통일, 즉 절대적 대립이 곧 동일한 본질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과정이 단지 여러 계기들의 형식에만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립적 존재(Fürsichsein)와 서로를 위한 존재(Füreinandersein)는 단순한 형식적 관계가 아니라 내용 그 자체이기도 하다[즉, 이 두 개념이 단순히 개념적 구별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적 성격을 형성하는 요소]. 왜냐하면, 대립이 참된 의미에서 그 결과 속에서 드러난 본성과 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지각 속에서 참된 것으로 여겨졌던 내용은 실제로는 단지 형식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결국 그것은 형식의 통일 속에서 해소된다. 이 내용은 동시에 보편적이다. 특정한 성질을 가짐으로써 이 절대적 보편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다른 내용은 있을 수 없다[어떤 특정한 내용도 단지 개별적인 것으로만 머물지 않고, 결국 보편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 만약 그런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곧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스스로 존재하며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가지는 것일 것이다[만약 그런 내용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개별성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개념이지만, 이러한 개별적인 존재 역시 궁극적으로는 보편적 개념 속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것].
상동 101
Weil aber dieses Unbedingtallgemeine Gegenstand für das Bewusstsein ist, so tritt an ihm der Unterschied der Form und des Inhalts hervor und in der ㅣGestalt des Inhalts haben die Momente das Aussehen, in welchem sie sich zuerst darboten, einerseits allgemeines Medium vieler bestehender Materien und andererseits in sich reflectiertes Eins, worin ihre Selbstständigkeit vertilgt ist, zu sein. Jene ist die Auflösung der Selbstständigkeit des Dinges oder die Passivität, die ein Sein für ein Anderes ist, dieses aber das ‚Fürsichsein‘ ; es ist zu sehen, wie diese Momente in der unbedingten Allgemeinheit, die ihr Wesen ist, sich darstellen.
그러나 이 절대적 보편이 의식에게 대상이 되는 순간, 그 안에서 형식과 내용의 구별이 드러나고 내용의 형태속에서, 이 여러 계기들은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편으로 그것들은 많은 독립적인 물질들이 존재하는 보편적 매개체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은 자기 자신 속으로 반성된 '하나(Eins)’로서, 그 속에서 개별적 독립성이 소멸된 것으로 나타난다. 전자는 사물의 독립성이 해소되는 것, 즉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수동성이며, 후자는 자립적 존재다. 이제 이러한 계기들이, 그 본질인 절대적 보편성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상동 101-102
Es erhellt zunächst, dass sie dadurch, dass sie nur in dieser sind, überhaupt nicht mehr auseinanderliegen, sondern wesentlich an ihnen selbst sich aufhebende Seiten sind und nur das Übergehen derselben in einander gesetzt ist. Das eine Moment erscheint also als das auf die Seite getretene Wesen, als allgemeines Medium oder als das Bestehen selbstständiger Materien ; die ‚Selbstständigkeit‘ dieser Materien aber ist nichts anderes als dieses Medium, oder dieses ‚Allgemeine‘ ist durchaus die ‚Vielheit‘ solcher verschiedenen Allgemeinen. Das Allgemeine ist an ihm selbst in ungetrennter Einheit mit dieser Vielheit heißt aber, diese Materien sind jede wo die andere ist ; sie durchdringen sich gegenseitig, -ohne sich zu berühren, weil umgekehrt das viele Unterschiedene eben so selbstständig ist.
우선 분명한 것은, 그것들[계기들 혹은 즉자존재와 타자존재]이 이 보편성(unbedingte Allgemeinheit)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들이 더 이상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 속에서 스스로를 지양하는 측면들이고 따라서, 그 계기들이 서로로 이행(Übergehen)하는 것만이 설정되어 있다[서로 대립되는 개념들이 단순히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로 전환되는 과정 자체가 본질. 즉 자립적 존재는 단순히 고립된 상태가 아니라, 타자를 위한 존재로 전환되며, 반대로 타자를 위한 존재도 다시 자립적 존재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만 의미를 가짐]. 그 한 계기는 곧 본질이 한쪽으로 나타난 것, 즉 보편적 매개체 또는 독립적인 물질들의 존속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들의 독립성은 사실상 이 매개체 자체와 다르지 않으며, 이 보편성은 철저하게 그러한 다양한 보편성들의 다수성일 뿐이다[우리는 사물들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것들처럼 보지만, 사실 그것들은 하나의 보편적 매개체 속에서 존재. 예를 들어, 개별적인 물방울들이 모여 하나의 바다가 되는 것처럼, 개별적인 사물들은 결국 더 큰 보편적 구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함. 즉 개별적인 것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결국 보편적 구조 속에서 존재하며, 이 보편성이 없이는 개별성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 다시 말해, 개별적인 것들은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보편적 매개체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개별성과 보편성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 보편성은그 자체로 이 다수성과 분리되지 않은 통일 속에 있다. 즉 이 개별적인 물질들은 각각 다른 것들이 존재하는 바로 그곳에 있다. 그것들은 서로를 관통하지만 직접적으로 접촉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반대로 각각의 다수적인 차이는 역시 여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동 102
Damit ist zugleich auch ihre reine ‚Porosität‘ oder ihr Aufgehobensein gesetzt ; dieses Aufgehobensein wieder, oder die Reduction dieser Verschiedenheit zum ‚reinen Fürsichsein‘ ist nichts anderes als das Medium selbst und dies die ‚Selbstständigkeit‘ der Untetschiede. Oder die selbstständig gesetzten gehen unmittelbar in ihre Einheit und ihre Einheit unmittelbar ㅣ in die Entfaltung über, und diese wieder zurück in die Reduction. Diese Bewegung ist aber dasjenige was ‚Kraft‘ genannt wird :
이로써 동시에 이 개별적인 것들의 ‘순수한 투과성’ 즉 그것들의 폐기됨이 설정된다[개별적인 것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보편성 속에서 상호 침투하며 경계가 흐려지는 상태를 말함.
Porosität (투과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개별적인 것들이 단단한 실체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서로 스며들면서도 보편성 속에서 존재함을 강조. 하지만 이와 동시에 개별적인 것들은 Aufgehobensein, 즉 변증법적 폐기(지양, Aufheben) 상태에 있음. 개별성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 속에서 해소되면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유지]. 그러나 이 폐기됨이란 것은, 다시 말해 이러한 차이들이 ‘순수한 자립적 존재'로 환원됨은 다름 아닌 그 매개체 자체이며, 또한 그것이곧 차이들의 독립성이다[즉, 개별적인 것들은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보편적 매개체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개별성이 보편성을 통해 정의됨을 의미. 또한 이러한 개별성들의 독립성 자체도 결국 보편성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 즉 독립적으로 설정된 것들은 즉각적으로 그 통일 속으로 들어가며, 그 통일은 다시 전개로 넘어가고, 그리고 다시 환원으로 돌아간다[이는 개별성과 보편성이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매개하며 순환하는 과정을 나타냄]. 이러한 운동이 바로 ‘힘'이라 불리는 것이다[힘이란 단순히 어떤 물리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개별성과 보편성이 서로를 매개하며 끊임없이 운동하는 과정 자체를 의미].
상동 102-103
das eine Moment derselben, nämlich sie als Ausbreitung der selbstständigen Materien in ihrem Sein, ist ihre ‚Äußerung‘, sie aber als das Verschwundensein derselben ist die in sich aus ihrer Äußerung zurückgedrängt e‘, oder ‚‘die eigentliche Kraft‘. Aber erstens die in sich zurückgedrängte Kraft ‚muss‘ sich äussern und zweitens in der Äußerung ist sie ebenso ‚in sich‘ selbst seiende Kraft, als sie in diesem Insichselbstsein Äußerung ist.
이 힘의 한 순간은, 즉 독립적인 사물들이 그 존재 속에서 확장된 것은 바로 이 힘의 '발현'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독립적인 사물들이 사라지는 것으로서의 힘은
그 발현에서 다시 자신 속으로 밀려 들어간 것, 즉 '진정한 힘'이다. 그러나 첫째, 자신 속으로 밀려 들어간 힘은 반드시 발현해야 한다. 그리고 둘째, 그 발현 속에서도, 그것은 여전히 자기 자신 속에 존재하는 힘이며[이것은 힘이 단순한 발현이 아니라, 그 발현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존재라는 점을 의미. 예를 들어, 자석이 철을 끌어당긴 후에도 자기장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과 같은 현상] 동시에 그 자기 자신 속에서의 존재가 바로 발현이다[힘은 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적인 존재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 예를 들어, 중력은 공간 속에서 항상 존재하지만,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예: 사물이 떨어지는 현상) 자체가 바로 중력의 발현].
상동 103
Indem wir so beide Moment in ihrer unmittelbaren Einheit erhalten, ist eigentlich der Verstand, dem der Begriff der Kraft angehört, ‚der Begriff‘, welcher die unterschiedenen Momente als unterschiedene trägt, denn ‚an ihr selbst‘ sollen sie nicht unterschieden sein ; der Unterschied ist hiermit nur im Gedanken. Oder es ist im Obigen nur erst der Begriff der Kraft, nicht ihre Realität gesetzt worden ; in der Tat aber ist die Kraft das Unbedingtallgemeine, welches, was es ‚für ein Anderes‘, ebenso an sich selbst ist, oder welches den Unterschied(denn er ist nichts anderes als das Füreinanderessein) an ihm selbst hat. Dass also die Kraft in ihrer Wahrheit sei, muss sie ganz vom Gedanken frei gelassen und als die Substanz dieser Unterschiede gesetzt werden, d. h. ‚einmal‘ ‚sie‘ als diese ganze Kraft wesentlich ‚an und für sich‘ bleibend und ‚dann‘ ihre ‚Unterschiede‘ als ‚substantial‘ oder als für sich bestehende Momente.
우리가 이처럼 두 계기[발현과 자체 수렴]를 그들의 직접적인 통일 속에서 보존함으로써, 사실상 힘개념에 속하는 오성은 곧 이 구별된 두 순간을 구별된 채로 유지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힘 그 자체(an ihr selbst)에서는 이 두 계기가 구별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차이는 오직 사유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오성은 여기서 차이를 인식하고, 구별을 만들어내는 능력. 힘 자체에서는 두 모멘트가 구별되지 않지만,
오셍은 그 둘을 사유 속에서 ‘구별된 채로 파악. 예: 우리는 ‘중력’이라는 힘이 ‘잠재된 상태’이면서 동시에 ‘작용하는 상태’를 갖는다고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실제 중력 자체는 이런 구분 없이 항상 동일한 힘으로 존재]. 또는 앞에서 제시된 것은 아직 힘의 개념일 뿐, 그 실재는 아직 제시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힘은 무조건적 보편자로서, 이는 타자에 대한 것인 동시에, 동일하게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며, 또는 그것은 차이를 (왜냐하면 그 차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서로-존재(Füreinandersein)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차이(Differenz)’ = 서로 존재함. 힘은 자기 자신 안에 차이를 가지고 있는데,
이 ‘차이’란 단순한 분열이 아니라, 사물들이 서로에 대해 존재하는 방식, 즉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형식임.
예를 들어, 자석과 철은 서로를 전제로 하여 작용하므로, 이 힘은 상호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차이를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 그러므로 힘이 그 진리 안에 있게 되기 위해서는[개념으로서의 힘이 아닌, 실제 진리로서의 힘] 그것은 사유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놓여져야 하며[힘을 단지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한계에서 벗어나, 실재적인 존재로서 이해하라는 것], 그리고 이 힘은 이 차이들의 실체로 설정되어야 한다. 즉, 한편으로는 힘 자체가 전체적인 힘으로서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 있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an und für sich)이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차이들(즉, 두 모멘트)이 실체적인 것, 혹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für sich bestehende) 계기로 설정되어야 한다.
상동
Die Kraft als solche, oder als in sich zurückgedrängte ist hiermit für sich als ein ‚ausschliessendes‘ Eins, welchem die Entfaltung der Materien ein ‚anderes bestehendes ㅣWesen‘ ist, und es sind so zwei unterschiedene selbstständige Seiten gesetzt. Aber die Kraft ist auch das Ganze, oder sie bleibt, was sie ihrem Begriff nach ist, nämlich diese ‚Unterschiede‘ bleiben reine Formen, oberflächliche ‚verschwindene Momente‘.
그 자체로서의 힘, 즉 자기 안으로 수축되어 있는 힘은 스스로에 대해 하나의 ‘배타적인' 단일자인데, 이 단일자에게 물질들의 전개는 다른 하나의 존재하는 본질이다. 이로써 두 개의 서로 다른 자립적인 측면이 설정된다[힘은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하나는 자기 내부에 있는 순수한 힘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로 펼쳐진 물질적 차이들로서, 이 둘은 구별되며, 서로 독립된 실체처럼 설정된다는 것]. 그러나 힘은 또한 전체이며, 혹은 그 개념에 따라 그 자체로 항상 그러한 것[전체]으로 머문다. 즉 이러한 '차이들'은 순수한 형식들로 남아 있으며, 피상적이며 '소멸해가는 계기들'에 불과하다[비유 : 힘이란 바다와 같고, 그 위에 이는 파도(차이들)는 각기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바다의 일부일 뿐이며, 결국은 형태만 다를 뿐이며, 다시 사라져 본래의 전체로 귀속됨].
상동 103-104
Die ‚Unterschiede‘ der in sich ‚zurückgedrängten‘ eigentlichen Kraft und der Entfaltung‘ der selbstständigen Materien wären zugleich gar nicht, wenn sie nicht nicht ein ‚Bestehen‘ hätten, oder die Kraft wäre nicht, wenn sie nicht auf diese entgegengesetzte Weise ‚existierte‘ ; aber ‚sie existiert auf diese entgegengesetzte Weise‘ heisst nichts anderes als ‚beide Momente sind selbst zugleich selbstständig. Diese Bewegung des Sichbeständigverselbstständigens der beiden Momente und ihres Sichwiederaufhebens ist es also, was zu betrachten ist. Es erhellt im allgemeinen, dass diese Bewegung nichts anderes ist als die Bewegung des Wahrnehmens, worin die beiden Seiten, das Wahrnehmende und das Wahrgenommene zugleich, einmal als das ‚Auffassen‘ des Wahren eins und ununterschieden, dabei aber eben sowohl jede Seite in sich reflektiert oder für sich ist.
자기 안으로 수축된 본래의 힘과 자립적인 물질들의 전개라는 이 차이들은, 그들 각각이 존재함을 갖지 않는다면 동시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는 힘은 이런 서로 반대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힘이 이러한 반대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두 계기들이 동시에 스스로 자립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두 계기들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립화하고 다시 스스로를 지양하는 이 운동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고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명확해지는 것은, 이러한 운동이란 사실 다름 아닌 지각의 운동이라는 점이다[힘의 운동과 지각의 구조는 동일한 구조]. 그 지각 속에서는 두 측면, 즉 지각하는 것과 지각되는 것이 동시에 진리를 파악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이자 구별되지 않은 것처럼 작용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각각은 자기 안에 반영된 존재, 즉 스스로를 위한 존재로도 존재한다[지각은 단순히 ‘보기’가 아니라 진리를 붙잡는 과정, 즉 인식 행위.
이 과정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하나처럼 작동하지만, 동시에 각자가 자립적으로 존재함. 결국 의식은 객체와의 구분 속에서 자신을 파악하면서도, 그 객체 속에서 자신과 동일한 구조를 발견하는데, 이것이 바로 의식의 자기반성 구조 그리고 결국 절대적 자기-인식으로 가는 길의 초입].
상동 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