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도시는 시골과 반대되는 의미로 쓰이나 대도시 사람들은 흔히 대도시와 멀리 동떨어진 소도시를 시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소도시 사람들은 도시 외곽 멀리에서 농경이 주된 경제활동인 지역이 시골이며 자신들은 엄연히 도시인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소도시 내에서도, 간혹은 대도시 주변에도 농지가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도시와 시골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 그런 구별이 행정적 단위의 구분 이외에 달리 가능할까? 더군다나 근현대사회는 도시의 팽창과 함께 한다. 김포시도 하나의 도시인데 거대 도시 서울로의 편입 논란은 그런 도시팽창의 기형적 면모이기도 하다.
도시의 팽창은 시골이라 불리던 지역을 더 주변화, 이질화시키고 도시와 도시 간에는 경쟁적 관계도 개입된다. 일자리와 사람이 몰리는 도시에 상업과 주거가 집중된다. 혹은 인위적으로 적막한 시골에 산업단지나 행정기구가 들어서서 새로운 큰 도시를 만들기도 한다. 창원, 울산, 포항, 세종 처럼. 혹은 독일의 마부르크처럼 구교와 신교의 종교적 전통과 봉건 영주의 정치적 영향력의 결합으로 도시가 형성된 경우도 있다. 궁예의 철원, 그리고 한양도 정치적 산물이다.
도시의 팽창이 가져오는 결과는 도시와 도시 사이에 지리적 완충지처럼 펼쳐진 영역을 좁힌다. 서울 외곽의 수도권은 위성도시들로 물샐틈 없이 둘러쌓여 있다. 또한 교통의 발달은 도시로의 예속을 심화시킨다.
사실상 도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삶을 영유하기 위한 중요 거점이다. 도시와 시골의 경계가 모호하더라도 시골과 도시는 상호의존적이다. 더이상 활용가치가 없는 도시의 부지를 엄청난 노력을 들여 비옥한 농토로 바꾸는 도시농부들도 있다. 도시와 시골의 상호침투는 도시와 도시 간에도 이뤄진다. 도시는 분명 행정의 중요 단위이고 이에 근거해 운영되지만 도시의 풍경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 각자의 개성으로 그려진다. 도시는 어쩌면 인물사진의 배경처럼 남아있기도 하지만 한 세대와 함께 몰락하기도 한다. 세대와 세대가 공유할 수 있는 도시의 외형적 유산의 빈곤은 속도감있는 변화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전쟁과 자연재해와 같은 비극의 그것일 수도 있다.
국가라는 유무형의 장력에 비해 도시의 장력에 사람들은 더 끌린다. 사람이 도시를 거닌다고 하지 국가를 거닌다고 하지는 않는다. 도시의 규모가 작을수록, 보폭으로 둘러볼 만한 규모일 수록 도시는 더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반면, 규모가 큰 도시는 행정의 비대와 함께 도시국가로도 불린다.
'도시란 무엇인가?' 라는 무모한 질문은 도시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의 꼬리표를 계속 남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한, 어쩌면 거기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한 도시는 우리에게 말을 걸도록 무언의 속삭임을 건다. 이것에 대답하는 것이 도시에 사는 사람의 의무일 수도, 취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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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직장생활을 할 때 안국동의 한 오래된 집에서 방을 잡고 다녔다. 정독도서관으로 가는 길목의 옆골목을 빙 돌아 깊숙한 또다른 골목 끝자락에 있던 집이었다. 근처의 부동산을 통해 잡은 방이었는데, 알고보니 이 부동산을 운영하는 할아버지의 집이었다.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그 가족이 쓰는 본채 옆에 사랑방처럼 딸린 방에 월세를 주고 있던 곳이었다. 도서관이 가까워서 잡은 방이었는데, 막상 도서관 앞에 사니 잘 가지 않게 됐다. 백수시절에 자주 다니던 도서관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는 휴일날에도 발길이 잘 가지 않았다.
안채 너머에도 세를 놓은 방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있던 사랑채에는 방이 두 개 더 있었는데, 각 방에는 나보다 나이가 좀더 있는 남자 2명이 살고 있었다. 한 명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강사였고, 또 한 명은 집이 있는데도 나와 살고 있는 아저씨였다. 형님으로 부르곤 했던 이 아저씨와 몇번 저녁을 같이 먹고 일요일날 근처의 목욕탕에도 함께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역시 출퇴근하기 바쁜 직장생활에 쫓겨 잠만 자러 들어갔던 것 외에 별달리 기억할 만한 일들은 없었다.
오래된 목조가옥이라 화재예방을 위해 방에서 취사를 할 수 없었고 여름날엔 모기향도 전기모기향을 써야했고, 세탁기가 없어서 손빨래를 해야했다. 아무튼 이런 곳에서 3개월 가량 지냈는데도, 이 당시 직장생활 3개월의 기억에 비해 이 집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거기서 끼니는 어떻게 해결했는지, 심지어 화장실은 어떠했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가 한번 와서 자고 갔던 일이 있었고 후배를 정독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 데려왔던 일은 기억한다.
한번은 어느 가을날, 월욜까지 휴가를 내고 토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춘천에서 있던 행사에 참가했다. 일요일에 돌아와야 했는데 휴가로 맘이 놓여선지, 일요일 오후 술집에서 술을 너무 마셔서 그대로 거기서 잠들고 말았다. 매정하게도 함께 있던 일행들은 나를 놔두고 모두 가버렸다. 다음날 피곤이 가시지 않은 몸을 끌고 돌아왔고, 방에 들어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자러 들어가는 일 말고는 외면하고 싶던 방이었나 보다.
에어푸르트는 튜링겐주의 주도이며 옛 동독지역이다. 독일의 정 중앙에 위치한 고도시로 이곳의 광장은 튜링겐주에 관한 뉴스가 나올 때면 배경화면으로 줄곧 등장한다. 2차 대전 말기 미군의 폭격을 비교적 덜 받아 중세시대 때 세워진 광장의 성전과 같은 고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지만 폭격으로 뼈대만 남아 지붕도 없는 교회가 그대로 있기도 하다.
비자문제가 잘 풀리지않아 답답한 심정에 길거리로 나가 광장을 돌고 돌아오는 길은 문제를 잊게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에어푸르트의 고시가지도 무덤덤히 자리를 잡고 있는 돌들처럼 언제 다시 와도 그대로인 풍경으로 남아있을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정릉은 어떤가? 정릉시장의 아릇한 야경은 먼 도시의 전통시장에나 남아있다. 과거세대와 미래세대가 공유할 일상의 장소가 사라져가는 변화의 시대에도 이 시기가 되면 언제나 그렇듯이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옛날 산촌의 판자집 같은 목재 구조물이 추억의 불빛을 밝힌다.
앞선 세대가 후속 세대에게 물려줄 것은 무엇이어야 하나? 높은 차액을 실현한 집값의 고공행진으로 하늘 높이 올라가려는 아파트로? 에어푸르트 광장 성당의 첨탑도 하늘을 찌른다.
이성계의 몽골 출신 부인의 무덤은 원래 현재의 정동에 있었는데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 도성 밖의 현재 정릉으로 옮겼다고 한다. 정릉은 미아로에서 도봉로로 이어지는 중간 지점 서편의 북악산 자락에 있는데, 내부순환도로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정릉에는 어린 시절 큰 댁이 있어서 가봤던 기억이 선명하다. 언덕배기에 있는 고택이었는데, 여느 변두리의 산동네같은 느낌이었고, 북적북적한 시장은 산 아래에 있었다. 그후 종암로에서 정릉으로 꺽어져 올라가는 샛길인 아리랑고개에 업무상 많이 갔었는데, 어린 시절 봤던 동네는 사라지고 대나무숲같은 아파트 군락이 형성됐다. 그나마 내부순환로 북쪽의 정릉일대가 덜 개발되어 있었는데, 미아리로 넘어가는 솔샘로에서 밀고 내려오는 아파트 군단에 점령되어 가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내부순환로 밑의 정릉로는 북악터널을 거쳐 평창동으로 이어진다. 터널을 사이로 두고 전통적 부촌과 서민촌으로 나눠지고 아파트군의 공격은 터널을 넘어서기 어렵다. 변두리 산촌에 형성됐던 서민의 보금자리는 아파트에 밀려 외곽으로 밀려 나는데, 이제는 외곽에서도 아파트가 밀려온다. 아파트의 협공이고 아파트의 연속이며 아파트의 부활이다.
외국여행이라야 일본에나, 그것도 일과 관련되어 나가 본 적이 전부였고, 살아볼 작정으로 간 곳이 라이프치히였다. 일단 무비자로 나가는 것이라 입국심사를 생각해 무비자 3개월 간격을 두고 왕복권을 끊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과 중앙역을 거쳐 라이프치히 중앙역에 도착했다. 작센의 전통적 대도시답게 중앙역 규모와 모양새는 프랑크푸르트와 비슷하다.
외국땅에 여행이라면 모를까 살려고 가는 것은 생존을 건 모험이다. 간혹 퇴직 후 외국여행을 좀 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계속 일을 하다가 쉬는 것도 오래 못할 일이다. 더군다나 외국땅에서는 오죽할까. 오자마자 구직활동에 들어갔지만 여의치 않았고, 생각보다 언어의 장벽은 너무 높았다. 옛 동독 지역이었던 라이프치히에서는 영어도 잘 쓰지 않는 것으로 보였고, 한국회사는 옛 서독 지역에 몰려 있었다.
노는 것도 작정을 해도 질리기 마련이라는데 놀러 간 것도 아닌 외국생활은 하루 하루가 지나갈수록 초조해져 갔다. 외국땅에서 외국인으로 백수로 지낸다는 것은 겉보기에나 그럴듯한 빛좋은 개살구다. 마침 라이프치히에 있을 때 한국에서 프라이부르크와 베를린으로 여행 온 사람들의 연락을 받았다. 만날만한 심정이 아니었다.
라이프치히에 온지 한 달도 안되서 아무래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귀국 비행기표를 들여다 봤다. 어차피 2개월이나 남은 것 좀더 맘편히 지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49유로 티켓도 없던 때라 주로 걸어 다녔다. 독일 어느 도시도 그렇겠지만 특히 20세기 초반의 도시 풍모가 그대로 남아있는 라이프치히는 걷기에 좋은 평지다. 돌을 박아놓은 길이 많아 우돌톨하지만 아스팔트길에 비할 바 안된다. 건물들은 소공동의 한국은행처럼 연수가 오래된 것들이 많다. 바흐가 음악감독으로 오래 봉직했던 전통은 음대로 유학생들을 끌어 들인다.
하루는 저녁에 실내 축구장에서 1시간 가량 뛰었다. 무슨 생각에선지 한국에서 올 때 축구화를 챙겨 왔다. 뛰고 나니 걷기 힘들 정도로 발바닥이 아팠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지낸 곳이 마침 축구경기장 근방이었다. 그때 라이프치히는 분데스리가에서 지금과 같은 강팀은 아니었지만 축구가 있는 날의 분위기는 거의 월드컵 본선 경기처럼 고조된다. 원정온 샤크 응원팀은 축구장 길목의 가판주점을 점령한다. 가끔 싸우듯이 양 팬들의 목소리가 거칠게 부딪치고, 경기 종료 후에도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요한 밤길에 낙옆처럼 가로등불이 깔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