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관한 주제를 다시 상기할 때 우선 떠오르는 철학자는 미셸 푸코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2004년 발표된 '푸코와 신학'에 관한 영미권 학자들의 논문집을 흝어 봤다. '푸코와 신학'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연결같지만 푸코의 <성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권력과 지식이 신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역사에서 고전주의 시대 이후 기독교는 중요한 배경이자 담론의 발판이었다. 쾌락의 기제를 다변화시키는 논의를 펼친 푸코는 Saint Homo로서 카톨릭의 변종 철학자로 볼 수 있는 논점도 이 책에 보인다. 칼 슈미트처럼 외화된 정치권력 보다는 내재화된 권력현상에 주목하는 푸코의 권력이론이 다시 조명될 수 있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한 학자는 규범적 정당성을 중심으로 토의적 방식에 주력하는 하버마스에게 푸코의 방식은 미학적 방식으로 대비된다고 한다. 이런 방식은 아도르노에게도 보이지만, 푸코의 지적 계보는 독일적 맥락보다는 레비 스트로스와 같은 프랑스의 문화 인류학적 맥락에 밀착해 있다. 지적 반경 자체가 상이한 것이다. 한때 푸코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전개한 이성비판에 공감한다는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으나 계보학적으로나 접근방식으로도 푸코의 문제의식은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푸코의 철학은 서구중심주의적 담론의 질서에 갇히지 않는, 차이와 타자를 지향하는 사유에 더 다가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방법론적으로 푸코와 아도르노의 연결이 어색한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푸코와 칼 슈미트는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사회철학적으로나 법철학적으로 권력에 대해 논할 때 푸코와 슈미트는 피해갈 수 없는 준령임에 분명하다.
* Michel Foucault and Theology : The Politics of Religious Experience, ed.J.Bernauer&J.Carrette(Routledge, 2014)
https://youtu.be/rTWXbZkoehQ?si=8lnxu2TfIh9Dzm0L
Search
'서술 Beschreibung'에 해당되는 글 31건
- 2025.01.11 미셸 푸코
- 2024.12.31 비극의 연말 2
- 2024.11.28 도시 열전 : 서울 어느 변두리 독서실 1
- 2024.11.21 시청평 : 독일 vs 헝가리 남자축구 국가대표전
- 2024.09.11 니클라스 루만 : 구별의 사회이론 1
일요일인 29일 어제 아침 무안공항에서 일어난 제주항공사의 보잉 737-800 기의 사고 소식은 큰 충격이다. 같은 달 초에 일어난 비상계엄은 인명살상을 비켜갔지만, 어제의 비행사고로 꼬리칸에 탑승한 승무원 2명을 제외한 탑승객 179명 전원이 참사를 당했다. 현재까지 주요 사고원인은 과도하게 지속된 비행시간에 따른 기체의 피로누적, 저가항공사에 고질적으로 문제시된 정비불량, 그리고 활주로 밖의 착륙유도등을 지탱하던 토목 시설물로 보도된다.
어제 뉴스에서는 동체착륙하던 비행기가 외벽에 충돌하며 폭발하는 것을 계속 보여주면서도 이 강력한 벽의 정체에 대한 보도는 없어서 착륙 후 자체 폭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날 밤 한 국내 토목공학자가 사고 영상을 상세히 분석한 자체 방송에서 이 벽이 안에 콘크리트 보강체가 내장된 약 5미터 높이의 단단한 토사층으로 보인다는 관찰을 알렸다. 이 구조물만 아니었어도 대형참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란 점에서, 철새 도래지에 2007년 정치적 입김으로 건설된 공항을 관리하는 당국도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무엇보다 안전을 도외시한 저가 영업이 이런 엄청난 참사의 발단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정확한 사고원인규명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소소한 재해와 위험요소가 누적되어 중대재해가 일어난다는 것은 여러차례 반복적으로 보아온 일이다. 유일하게 활황인 조선업계의 조선소 현장에서는 30일 오전에 있었던 22살 잠수부의 사고를 포함해 올해 1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들은 주로 하청과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우발적으로만 보이지 않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일이 재연되는 것은 또다른 사회적, 국가적 비극이다. 이런 비극을 막는 것은 겉만 번지르한 선진국 타령 보다 선행할 일이다.
21일 오블완 연속 주행을 마치고 잠시 글쓰기를 쉬려 했는데, 오늘 뜻밖의 소식을 듣고 글을 이어간다.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에 살던 사촌형이 있었다. 나와는 나이 차이가 꽤 있는 편이라 별로 기억할 만한 일은 없었으나, 고3 시절 우연찮게 동네의 독서실을 같이 다니게 됐다. 형은 신학대학원 시험준비를 위해 이 독서실을 끊은 것이었고, 나는 동네의 다른 독서실에서 있다가 이 독서실로 옮긴 것이었다. 그 다른 독서실에는 동네 친구들과 같이 있었는데, 가끔 한적한 주말 밤에 거기서 술판을 벌이며 나름 수험생의 스트레스를 풀곤 했는데, 독서실 주인한테 걸려서 미운털이 박힌 상태였다. 어느 밤 내 자리 주위에서 떠들던 친구들 덕에 주인한테 한 소리를 듣고 나만 쫏겨나다시피 그곳을 나와 다른 독서실을 간 것이었는데, 어차피 가까운 동네다 보니 거기에도 다른 친구들이 있는건 그렇다치고, 그 형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 독서실에 다니며 깊은 밤에 휴게실에서 형은 성서 이야기를 자신의 진로와 연관지어 하기도 했다. 성향과 외모로 봐서는 신학생 보다는 군인이 더 어울릴듯 보였는데, 결국 합격하고 신학대 박사까지 밀고 나갔다.
그후 몇 해가 지나서 형이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할 때 나한테 도움을 요청해서 몇 개월간 논문 입력작업을 도왔다. 주제는 성서에 나타난 지옥에 관한 것이었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그 지옥이라는 것이 히브리 용어로 보면,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식으로 화염에 불타는 그런 현장이 아니라, 야곱과 라합의 아들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로 빠져버린 구덩이와 같은 어원이라는 점에서 볼 때 매우 일상적인 의미로 읽혔다.
그 이후로 한 동네에 살면서도 따로 만나서 얘기한 일이 드물었고, 서로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후일만을 기약했다. 촉망받던 신학박사 루터가 생을 달리한 나이대와 비슷하지만 아쉽다.
부다페스트, 2024년 11월 19일 오후 9시
가끔 TV에서 중계되는 분데스리가는 건성으로 보는데 이따금 있는 국가대표전은 좀더 흥미롭게 본다. 이날 경기가 그렇다. 헝가리도 유럽의 강팀인 점은 알고 있으나 전반전 경기력으로 볼 때 침투는 독일이 잘하는 편이지만 힘과 압박은 헝가리가 앞서 보였다. 다만 골 결정력과 골 연결력의 테크닉은 확실히 독일이 앞선다.
독일 대표팀은 절반 이상이 주로 근동과 아프리카에서 귀화한 선수로 구성된 반면 헝가리는 대부분 자국 출신 선수로 포진되어 있다. 홈경기의 이점을 살려 헝가리의 거친 플레이가 빈번하다. 전반전은 헝가리의 압박이 돋보이며 양팀 무득점으로 마무리됐으나 후반에 확실히 독일의 경기력이 살아 났다. 더 빠른 침투와 정확한 패스를 이어가던 독일은 몇차례 기회를 놓친 후 득점에 성공한다. 골키퍼 선방으로 빠르게 튕겨나간 공을 놓치지 않고 통쾌하게 골대 깊숙히 골망을 터뜨린 것이다. 헝가리도 몇 차례 기회가 있었고, 기습공격으로 골을 성공시켰으나 옵사이드 판정을 받는다. 헝기리의 막판 추격전은 후반 추가시간 4분을 향해 가면서 단단한 독일의 수비벽을 뚫고 슛을 날리지만 한 수비수의 팔 언저리를 맞고 공은 골대를 벗어난다. 심판은 경기 종료를 하려고 하는데 관중들이 핸들링이라고 난리다. 결국 심판은 비디오 판독에 들어가고 페널킥을 선포한다.
다소 불안한 기색의 헝가리 페널키커는 우측방향으로 기우는 독일 골키퍼를 완전히 속이고 정 가운데로 살짝 공을 성공시킨다. 1 대 1. 경기는 바로 종료된다.
경기가 끝난 후 국가대항전이 더군다나 무승부로 끝나서인지 양팀 선수들은 국가 리그에서 풀려나 클럽 리그의 동료로 서로를 축하한다. 경기 중 거친 플레이는 마치 장난이었다는 듯이.
오랫동안 중단했던 루만의 '사회의 사회'를 다시 읽는다.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나 문단과 문단의 연결이 원할치 않은 단절을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여의치 않으나 내용으로나 방법으로나 이런 독특한 이론을 자기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마치 '천 개의 고원'이나 '파사주 프로젝트'의 진입로와 퇴로가 온전히 독자에게 맡겨진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하나의 요약이나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학문사적 맥락에서 루만의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체계이론의 본론과 각론(사회체계이론과 부분 체계이론들)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진입의 문제다. 특히 학문세계 밖에서라면 더욱더 그렇다.
한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루만이 도덕을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보는 점이다. 덕이라는 것은 온전히 인간에게 소급되는 것으로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자질이지만 생득적인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커뮤니케이션은 구별을 위한 활동으로 정의될 수 있다. 동식물세계에도 커뮤니케이션 활동이 있겠으나 인간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그런 활동은 19세기에 들어서야 활용될 수 있었기에 역사성이 빈약하다. 한편 왜 구별인가? 가히 주제의식이라고 할 만큼 루만이 구별에 집중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선과 악, 옳음과 틀림, 정의와 불의 등등의 이항대립적 이분은 끊임없이, 때로는 그 위치를 바꿔가며 진행하는 운동에 가깝다.
구별은 어떤 사태나 현상을 이해하는 주요한 방법이다. 정상상태로부터 비상사태, 즉 예외상황을 판별하는 것을 칼 슈미트가 주권자의 권리로 파악하는 것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구별의 활동은 도처에서 강도를 달리하며 행해지는 일이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본래적으로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이 아님, 비인간으로부터 도출하는 것이 용이하면서도 주도적인 방식이었다. 마치 자유라는 것은 굴종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구별은 하나의 권리인가, 인식인가? 권리라는 것은 구별의 권한이 상이하게 나눠질 수 있다는 것이고,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출발점인 관찰이 상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찰의 지점에 따라 인식이 상이할 수 있다는 것으로 구별은 유효한가?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 것처럼, 구별되지만 언제든 구별이 무력해지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는 양당제 교대 정권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당들의 기원이 어찌 됐든 서로를 스스로 구별짓지만 교대로 국민의 선택을 받듯이 구별되면서도 구별되지 않는 역설이 일어난다. 어쩌면 민주주의는 구별이 더욱 섬세하고 다양할 수록 비로서 작동하는 원리일지도 모른다. 역설적 선택은 사실 강요에 가깝기 때문이다.
https://youtu.be/XW1fe20I5Z4?si=yeuV_gWWTZmNc1D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