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아카데믹판 h.v. G.J.P.J. Bolland(Leiden A.H. Adriani, 1907)
A.Bewusstsein
III.Kraft und Verstand, Erscheinung und uebersinnliche Welt S.110-
Dieses wahrhafte Wesen der Dinge hat sich jetzt so bestimmt, dass es nicht unmittelbar für das Bewusstsein ist, sondern dass dieses ein mittelbares Verhältnis zu dem Inneren hat und als Verstand durch diese Mitte des Spiels der Kräfte in den wahren Hintergrund der Dinge blickt. Die Mitte, welche die beiden Extreme, den Verstand und das Innere, zusammenschließt, ist das entwickelte Sein der Kraft, das für den Verstand selbst nunmehr ein ‚Verschwinden‘ ist. Es heißt darum ‚Erscheinung‘. Denn Schein nennen wir das Sein, das unmittelbar an ihm ㅣ selbst ein Nichtsein ist ; es ist aber nicht nur ein Schein, sondern Erscheinung, ein ‚Ganzes‘ des Scheins. Dieses Ganze als Ganzes oder Allgemeines ist es was das ‚Innere‘ ausmacht, das ‚Spiel der Kräfte‘ als ‚Reflexion‘ desselben in sich selbst.
사물들의 이 참된 본질은 이제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그것은 의식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은 오히려 내부와 매개된 관계를 가지며, 그리고 의식은 오성으로서 이 힘들의 운동[사물들 사이의 힘의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중간 단계를 통해 사물들의 참된 배후를 들여다본다. 양 극단, 오성과 내면을 서로 결합시키는 중간은 힘의 전개된 존재이며, 이 존재는 이제 오성에게는 하나의 '소멸'이다. 그래서 이것을 '현상'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자체에서 직접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가상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힘의 운동(힘들의 상호작용)은 오성과 사물의 내부를 연결하지만, 이 힘의 운동은 결국 사라지기에 덧없는 현상임. 오성은 현상을 통과하여 내면(본질)에 이름].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가상일 뿐만이 아니라 현상, 즉 가상의 '전체'이다. 이 전체로서의 전체 또는 보편이야말로 '내면'을 구성하는 것, 즉, '힘들의 작용'이 그 자체 안에서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다[현상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가상이 아니라, 다양한 현상들이 하나의 통합된 체계를 이루는 것. 이 현상 전체가 바로 사물의 Inneres(내면, 본질)을 이룸. 이 현상들의 체계는 힘들의 상호작용(Spiel der Kräfte)이며, 이 상호작용은 자기 자신을 반영(Reflexion)함. 즉 힘들이 단순히 외부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전체적인 구조를 스스로 만들어냄)
상동 110-111
In ihm sind für das Bewusstsein auf gegenständliche Weise die Wesen der Wahrnehmung ‚so gesetzt‘, wie sie an sich sind, nämlich als unmittelbar in das Gegenteil ohne Ruhe und Sein sich verwandelnde Momente, das Eins unmittelbar in das Allgemeine, das Wesentliche unmittelbar in das Unwesentliche und umgekehrt. Dieses Spiel der Kräfte ist daher das entwickelte Negative ; aber die Wahrheit desselben ist das Positive, namlich das Allgemeine‘, der ‚ansichseiende‘ Gegenstand.
그 속에서 [지각의 결과로 도달한 "das Spiel der Kräfte" (힘들의 상호작용) 또는 Erscheinung], 의식에게 지각의 본질들이 대상적인 방식으로[운동 그 자체, 즉 변증법적 부정과 전환이 이제 대상처럼 보인다는 것. 이는 정신현상학 전체의 방법론적 전환을 뜻함. 더이상 '존재하는 것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들이 어떻게 모순 속에서 서로를 규정하고 소멸시키는지를 인식하는 것] 그것들이 그 자체로 어떤 것인지 그대로 수립된다. 즉 어떠한 고요함이나 고정된 존재도 없이 직접적으로 정반대의 것으로 변해버리는 계기들로서, 즉 하나[단독자]는 직접적으로 보편자로,
본질적인 것은 즉시 비본질적인 것으로,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힘들의 운헁은 그러므로 전개된 부정이다. 그러나 그것의 진리는 긍정, 즉 보편자,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상이다[힘들의 운행은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전환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사라지는 과정. 이 운동은 ‘자기의 폐기’, ‘지속적인 전환’이라는 점에서 부정인 것. 힘’의 개별적 양상들은 더 이상 자립적인 실재로 남아 있지 않으며, 모든 구체적인 것은 사라지고 그 과정만이 남음. 그러나 이 부정 속에서 나타나는 진정한 실재는 바로 '긍정적인 것', 즉 모든 순간적인 차이를 초월하여 유지되는, 그 모든 운동과 소멸을 관통하여 드러나는 보편자. 그것은 곧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an sich seiender Gegenstand)' — 다시 말해, 주체가 아닌 대상이면서, 동시에 더 이상 단순한 감각적 대상도 아닌 이성의 대상인 것].
상동 111
Das ‚Sein‘ desselben ‚für das‘ Bewusstsein ist vermittelt durch die Bewegung der ‚Erscheinung‘, worin das ‚Sein der Wahrnehmung‘ und das Sinnlichgegenständliche überhaupt nur negative Bedeutung hat, das Bewusstsein also daraus sich in sich als in das Wahre reflektiert, aber als Bewusstsein wieder dieses Wahre zum gegenständlichen ‚Inneren‘ macht und diese Reflexion der Dinge von seiner Reflexion in sich selbst unterscheidet, -wie ihm die vermittelnde Bewegung ebenso noch eine gegenständliche ist.
그 존재[대상의 존재]는 의식에 대해 '현상'의 운동을 통해 매개된다[의식은 이제 감각적 대상이나 지각된 대상을 단순한 실재로 받아들이지 않음. 그것들은 ‘현상’이며 그 현상은 지속적으로 소멸하고 반전되는 운동, 즉 부정의 운동이자 힘들의 놀이'로 들어남]. 여기서 '지각의 존재'와 감각적 대상 일반은 단지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진다. 그래서 의식은 이로부터 자신을 참된 것으로서 자기 안에서 반성하지만, 동시에 의식으로서 이 참된 것을 [대상화된 외부와 마찬가지로] 다시 대상적인 '내부'로 만들고 사물의 이 반성과 자신의 자기 내적 반성을 구별한다. – 이처럼 매개된 운동 역시 여전히 의식에게는 대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의식은 자신의 내적 반성과, 현상의 외적 반성을 구분. 즉, 자기 자신이 진리를 드러낸다고 느끼지만, 여전히 그것을 자신 밖의 대상처럼 다루고 있는 것. 매개적 운동조차도 '아직은 대상적'으로 이해됨. 즉 의식은 아직 이 운동을 자기 자신의 본질로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
상동
Dieses Innere ist ihm daher ein Extrem gegen es ; aber es ist ihm darum das Wahre, weil es darin als in dem ‚Ansich‘ zugleich die Gewissheit seiner selbst oder das Moment seines Fürsichseins hat ; aber dieses Grundes ist es sich noch nicht bewusst, denn das ‚Fürsichsein‘, welches das Innere an ihm selbst haben sollte, wäre nichts anderes als negative Bewegung. Aber diese ist dem Bewusstsein noch die ‚gegenständliche‘ verschwindende Erscheinung, noch nicht sein ‚eigenes‘ ㅣ Fürsichsein und das Innere ist ihm daher zwar Begriff, allein es kennt die Natur des Begriffes noch nicht.
이 내부는 의식에게 하나의 극단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안에서 있음(Ansich)’ 동시에 자기 자신의 확실성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의 계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의식에게 참된 것이다. 하지만 의식은 이 근거[그것이 참되다는 이유]를 아직 의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내면이 그 자체로서 갖고 있어야 할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는 부정의 운동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의식은 현상 너머에 ‘진짜 실재’로서 내부를 설정하지만 이 내부는 자기 자신(의식)과 대립되는 극으로 존재, 즉 '나’ 밖에 있는 진리로 간주됨. 이 '내면’은 단순히 외적인 진리가 아니라, 의식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실성을 그 안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참된 것으로 여겨짐. 즉 그것은 ‘안에 있는 것(Ansich)’일 뿐 아니라, 의식의 자기확신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함. 그러나 의식은 아직 이를 깨닫지 못함. 즉 내면이 의식의 자기확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 즉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Fürsichsein)의 계기를 포함한다는 점을 의식은 아직 자각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란 부정적 운동일 뿐이기 때문. 'Fürsichsein’은 단순한 자족적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초월하는 운동. 따라서 의식은 이 운동이 자기 자신(즉, 의식 주체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외부에 있는 진리를 보듯이 진리로서 ‘내면’을 보고 있는 것]. 그러나 이것[부정적 운동,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은 의식에게 아직 ‘대상적'으로 사라지는 현상이며, 아직은 자기 것인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Fürsichsein)가 아니다. 따라서 내부는 의식에게 개념이지만, 의식은 이 개념의 본성을 아직 알지 못한다[부정적 운동으로서의 내부는 아직 의식에게 외부 대상으로 남아 있음. 즉 의식은 그것을 자기의 본질로 느끼지 않고, 외부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으로만 보는 것. 의식은 그 내면, 즉 본질적 진리가 바로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함. 내면(Inneres)은 실제로 개념, 즉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매개하며 다시 자기로 귀결되는 변증법적 자기 운동이지만 의식은 이 개념의 본성, 즉 개념이 단지 추상적 정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기운동임을 아직 이해하지 못함. 즉 비록 내면이 사실상 개념이라는 점을 눈치채고 있지만, 그 개념이 무엇인지, 즉 자기 자신 안에서 운동하는 힘이라는 점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
상동 111-112
In diesem ‚inneren Wahren‘, als dem absolut Allgemeinen, welches vom ‚Gegensatz‘ des Allgemeinen und Einzelnen gereinigt und ‚für den Verstand ‚ geworden ist, schließt sich erst über der ‚sinnlichen‘ als der ‚erscheinenden‘ Welt nunmehr eine ‚übersinnliche‘ als die ‚wahre‘ Welt auf, über dem verschwindenden ‚Diesseits‘ das bleibende ‚Jenseits‘, ein Ansich, welches die erste und darum selbst unvollkommene Erscheinung der Vernunft oder nur das reine Element ist, worin die Wahrheit ihr ‚Wesen‘ hat.
이 ‘내적인 참됨’, 즉 절대적 보편자 안에서, 그것은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대립으로부터 정화되었고, 오성에 대해 자체로 있게 되었다. 이로써 비로소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세계 위에, 이제 감각 너머의 세계, 즉 진정한 세계가 열리며, 사라지는 이편의 세계 너머에 남아있는 저편의 세계, 그 자체 안에 있는 것, 이성의 첫 번째, 따라서 여전히 이성의 불완전한 현상이거나,
진리가 그 본질을 지니고 있는 순수한 요소가 드러난다[초감각적 세계는 단순히 종교적 저편이 아니라, 이해가 형식적으로 구축한 개념의 세계].
상동 112
‚Unser Gegenstand‘ ist hiermit nunmehr der ‚Schluss‘, welcher zu seinen Extremen das Innere der Dinge und den Vetstand und zu seiner Mitte die Erscheinung hat ; die Bewegung dieses ‚Schlusses‘ aber giebt die weitere Bestimmung dessen, was der Verstand durch die Mitte hindurch im Inneren erblickt und die Erfahrung, welche er über dieses Verhältnis des Zusammengeschlossenseins macht.
우리의 대상은 이제 '결합(Schluss)'이며, 이는 그 극단으로서 사물의 내면과 오성을, 그리고 그 중간항으로 현상을 갖는다. 그러나 이 '결합'의 운동은 오성이 중간항을 통과하여 내면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의 더 나아간 규정을 제공하며, 오성이 이 결합 관계에 대해 만들어내는 경험을 가져다준다.
상동
Noch ist das Innere ‚reines Jenseits‘ für das Bewusstsein. Denn es findet sich selbst in ihm noch nicht ; es ist ‚leer‘, denn es ist nur ‚das Nichts der Erscheinung‘ und positiv das einfache Allgemeine. Diese Weise des Inneren zu sein, stimmt unmittelbar denjenigen bei, welche sagen, dass das Innere der Dinge nicht zu erkennen sei ; aber der Grund würde anders gefasst werden müssen. Von diesem Inneren, ㅣ wie es hier unmittelbar ist, ist allerdings keine Kenntnis vorhanden, aber nicht deswegen, weil die Vernunft zu kurzsichtig oder beschränkt oder wie man es sonst nennen will wäre(worüber hier noch nichts bekannt ist, denn so tief sind wir noch nicht eingedrungen), sondern um der einfachen Natur der Sache selbst willen, weil nämlich im ‚Leeren‘ nichts erkannt wird, oder von der anderen Seite ausgesprochen, weil es eben als das ‚Jenseits‘ des Bewusstseins bestimmt ist. Das Resultat ist freilich dasselbe, wenn ein Blinder in den Reichtum der übersinnlichen Welt(wenn sie einen hat, er sei nun eigentümlicher Inhalt derselben, oder das Bewusstsein selbst sei dieser Inhalt) und wenn ein Sehender in die reine Finsternis, oder wenn man will in das reine Licht, wenn sie nur dieses ist, gestellt wird : der Sehende sieht in seinem reinen Lichte so wenig als in seiner reinen Finsternis und gerade so viel als der Blinde in der Fülle des Reichtums, welcher vor ihm läge.
사물의 내면은 여전히 의식에게는 '순수한 저편'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아직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어 있다' — 왜냐하면 단지 '현상의 무(無)'일 뿐이며, 긍정적으로는 단순한 일반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면의 존재 방식은 사물의 내면은 인식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견해와 즉각적으로 일치하지만, 그 근거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즉각 주어진 내면에 대해서는 실제로 어떠한 인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이 너무 근시안적이거나, 제한되어 있거나, 혹은 다른 식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은 아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여기서 아직 아무것도 알려진 바 없으며, 우리는 아직 그만큼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사물 자체의 단순한 성격 때문이며, 다시 말해 '비어 있는 것'에서는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다른 쪽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의식의 '저편'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물론 동일하다. 즉, 한 맹인이 초감각적인 세계의 풍요로움 속에 놓여 있다 해도(그 세계가 어떤 고유한 내용을 가지고 있든, 혹은 그 내용이 의식 그 자체이든), 혹은 한 눈 밝은 사람이 순수한 어둠 속에, 또는 원한다면 순수한 빛 속에 놓여 있다 해도 — 단지 그것이 순수한 빛일 뿐이라면 — 그는 순수한 빛 속에서나 순수한 어둠 속에서나 똑같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맹인이 자신의 앞에 놓인 풍요로움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헤겔 특유의 비유적 설명 방식. 의식이 그 '내면'이나 '초감각적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 너무 풍요롭기 때문도, 혹은 너무 밝거나 어둡기 때문도 아니라, 그것이 '순수한 일반성' 또는 '비어 있음'으로서 어떤 구체성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
상동 112-113
Wenn es mit dem Inneren und dem Zusammengeschlossensein mit ihm durch die Erscheinung weiter nichts wäre , so blieb nichts übrig, als sich wahr zu nehmen, von dem wir wissen, dass es nicht wahr ist, oder damit doch in dem Leeren, welches zwar erst als Leerheit von gegenständlichen Dingen geworden, aber ‚als Leerheit an sich‘ auch für die Leerheit aller geistigen Vethältnisse und der Unterschiede des Bewusstseins als Bewusstseins genommen werden muss, -damit also in diesem ‚so ganz ㅣ Leeren‘, welches auch das ‚Heilige‘ genannt wird, doch etwas sei, es mit Träumereien, ‚Erscheinungen‘, die das Bewusstsein sich selbst erzeugt, zu erfüllen. Es müsste sich gefallen lassen, dass so schlecht mit ihm umgegangen wird, denn es wäre keines Besseren würdig, indem Träumereien selbst noch besser sind als seine Leerheit.
만약 내면과 그것과의 연결이 현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면, 결국 남는 것은 현상에 머무르는 것, 즉 — 우리가 진실이 아님을 아는 —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혹은 단지 비어 있음 속에 머무는 것이다. 이 비어 있음은 비록 처음에는 대상적인 사물들의 결여로 생겨난 것이지만, '그 자체로서의 비어 있음'으로 또한 모든 정신적 관계들 및 의식으로서 의식의 차이들에 대한 비어 있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 그러므로 이 '그야말로 완전히 비어 있는 것' 속에서, 그것이 '신성한 것'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을 피하려는 이유에서 나는] 결국 의식이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이나 '현상'들로 그것을 채우게 되는 것이다['내면'과 '현상'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것이 빈 껍데기처럼 느껴질 수 있는 위험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대목 : 만일 내면(또는 본질)이 단지 "현상을 통해서만 연결된 것"으로 남아 있다면, 우리는 결국 내용 없는 '거룩함'이라는 빈 공간만을 마주하게 되고, 그것을 꿈이나 자기기만으로 채우게 된다고 경고. 이 문단은 '종교적 공허'나 '영적 자기기만'에 대한 철학적 풍자]. 그것은 그렇게 형편없이 다루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더 나은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꿈 같은 환상조차도 그 비어 있음보다는 더 낫기 때문이다[단지 "비어 있음"으로 남는 내면(또는 신성함)이 어떤 본질적 내용 없이 공허하게 유지된다면, 그것은 차라리 환상이나 망상보다 못하다고는 비판. 이는 자기기만이라도 어떤 내용이 있는 쪽이 낫다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본질이 단지 "비어 있는 신성함"으로 고정될 경우 생기는 무의미함을 강하게 꼬집는 대목].
상동 113-114
Das Innere oder das übersinnliche Jenseits ist aber ‚entstanden‘ ; es ‚kommt‘ aus der Erscheinung her und sie ist seine Vermittlung, oder ‚die Erscheinung ist sein Wrsen‘ und in der Tat seine Erfüllung. Das Übersinnliche ist das Sinnliche und Wahrgenommene, gesetzt, wie es in ‚Wahrheit‘ ist ; die Wahrheit‘ des ‚Sinnlichen‘ und Wahrgenommenen aber ist, ‚Erscheinung ‚ zu sein. Das Übersinnliche ist also die ‚Erscheinung‘, ‚als Erscheinung‘. Wenn dabei gedacht wird, das Übersinnliche sei ‚also‘ die sinnliche Welt, oder die Welt, wie sie ‚für die unmittelbare sinnliche Gewissheit und Wahrnehmung‘ ist, so ist dies ein verkehrtes Verstehen ; denn die Erscheinung ist vielmehr nicht die Welt des sinnlichen Wissens und Wahrnehmens als seiende, sondern sie ‚als aufgehobene‘ oder in Wahrheit als ‚innere‘ gesetzt. Es pflegt gesagt zu werden, das Übersinnliche sei ‚nicht‘ die Erscheinung ; dabei wird aber unter der Erscheinung nicht die Erscheinung verstanden, sondern vielmehr die sinnliche‘ Welt als selbst reale Wirklichkeit.
내면 혹은 초감각적 저편은 그러나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현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현상이 그것의 매개이며, 또는 '현상이 그것의 본질'이며 실제로 그것의 충만함이다. 초감각적인 것은 감각적이고 지각된 것이 마치 '진리에' 놓인 것이지만, 감각적이고 지각된 것의 진리는 '현상'이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초감각적인 것은 '현상된 것으로서의 현상'이다[초감각적 세계(또는 '내면')가 어떤 초월적 차원에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 세계(지각되고 감각된 세계)의 진리로부터 매개되어 나온 것임을 보여줌. 즉,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그 자체로 현상'이며, 그 현상된 것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초감각적인 것]. 이때 초감각적인 것이 '따라서' 감각적 세계, 혹은 '직접적인 감각적 확신과 지각'에 대해[지각에 의해 주어지는] 있는 세계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왜냐하면 현상은 단지 존재하는 감각적 인식과 지각의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지양된 것으로서', 또는 참된 의미에서 '내면적인 것으로서'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초감각적인 것은 '현상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여기서 '현상'이라는 말은 실제로는 '현상'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인 실재로서의 감각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현상을 감각적으로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비판하며, 진정한 '현상'이란 그 감각적 세계가 부정(aufgehoben)되어 내면으로 전환된 것, 즉 참된 의미에서 파악된 것임을 말함. 헤겔은 '초감각적인 것'이 단순히 감각을 넘어선 다른 차원이 아니라, 감각 세계를 통해 드러난 '진실로서의 현상'이라고 강조].
상동 114
Der Verstand, welcher unser Gegenstand ist, befindet sich auf eben dieser Stelle, dass ihm das Innere nur erst als das allgemeine noch unerfüllte ‚Ansich‘ geworden ; das Spiel der Kräfte hat nur eben diese negative Bedeutung, nicht an sich und nur diese positive, das ‚Vermittelnde‘ aber außer ihm zu sein. Seine Beziehung auf das Innere durch die Vermittlung aber ist seine Bewegung, durch welche es sich ihm erfüllen wird. -‚Unmittelbar‘ für ihn ist das Spiel der Kräfte ; das ‚Wahre‘ aber ist ihm das einfache Innere ; die Bewegung der Kraft ist daher ebenso nur als ‚Einfaches‘ überhaupt das Wahre. Von diesem Spiele der Kräfte haben wir aber gesehen, dass es diese Beschaffenheit hat, dass die Kraft, welche ‚sollicitiert‘ wird von einer anderen Kraft, ebenso das Sollicitierende ‚ für diese andere ist, welche selbst erst hierdurch sollicitierende wird.
우리의 대상인 오성은 지금 막 그 내면이 오성에게 아직 충족되지 않은 보편적인 '자체로서 있음(Ansich)'으로서만 되어 있는 지점에 머물러 있다. 힘들의 작용은 단지 이러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며, 즉 자체로서 있음은 아니고, 또한 오직 이러한 긍정적인 의미, 즉 그것[힘들의 작용]을 매개하는 것은 오성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오성이 사물의 내면을 파악하려 하지만 아직 그 내면(진리의 본질)을 단지 추상적이고 공허한 "보편성(Ansich)"으로만 파악하고 있다는 것. 즉 오성은 아직 "내면"을 실질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전의 "힘과 현상" 절에서 나타났던 힘들의 상호작용은 그 자체로 본질(진리)이 아니라, 단지 그 본질에 이르는 매개로만 이해되고 있다는 것]. 그러나 내면과의 관계는 매개를 통한 것으로, 바로 그 관계가 오성 자신의 운동이며, 이 운동을 통해 내면이 오성에게 충만하게 될 것이다. — 오성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은 힘들의 작용이지만 오성에게 ‘진리’는 단순한 내면이다. 따라서 힘의 운동도 단순한 것으로서만이 진리이다[오성이 사물의 내면(진리)을 파악하기 위해 겪는 운동(자기 전개)을 강조. 오성은 지금은 외적 현상인 "힘들의 유희"만을 직접적으로 마주하지만, 그것을 통해 매개적으로 내면에 이르려 함. 즉, 진리는 단순하고 보편적인 내면이며, 힘의 운동 전체 역시 단순성 속에서 파악될 때 비로소 진리에 이른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이 힘들의 작용이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보았다. 즉, 다른 힘에 의해 '촉발(solicitiert)'되는 힘은, 바로 그로 인해 다른 힘에게는 '촉발하는 것'이 되며, 그 다른 힘 역시 바로 이로 인해 비로소 촉발하는 것이 된다[힘들의 상호작용이 일방적인 원인과 결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말함. 어떤 힘이 다른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 동시에, 그 자체로 다른 힘에 영향을 주는 역할도 하게 되는데, 이는 상호 매개적 관계, 또는 상호 규정성(Wechselbestimmung)을 말하며, 모든 규정이 단순히 외재적이지 않고, 자기 안에서 서로를 규정하고 전도되며 운동한다는 '변증법적 구조'를 이룸].
상동 115
Es ist hierin ebenso nur der unmittelbare Wechsel oder das absolute Austauschen der ‚Bestimmtheit‘ vorhanden, welche den einzigen ‚Inhalt‘ des Auftretenden ausmacht, entweder allgemeines Medium oder negativ Einheit zu sein. Es hört in seinem bestimmten Auftreten selbst unmittelbar auf, das zu sein, als was es auftritt ; es sollicitiert durch sein bestimmtes Auftreten die andere Seite, die sich hierdurch ‚äußert‘ ; d. h. diese ist unmittelbar jetzt das, was die erste sein sollte. Diese beiden Seiten, das ‚Verhältnis‘ des Sollicitierens und das ‚Verhältnis‘ des bestimmten entgegengesetzten Inhalts ist ‚jedes für sich‘ die absolute Verkehrung und Verwechslung. Aber diese beiden Verhältnisse sind selbst wieder dasselbe, und der Unterschied der ‚Form‘, das Sollicitierte ㅣund das Sollicitierende zu sein, ist dasselbe, was der Unterschied des ‚Inhalts‘ ist, das Sollicitierte als solches, nämlich das passive Medium ; das Sollicitierende hingegen das tätige, die negative Einheit oder das Eins.
여기에는 오직 즉각적인 교대 또는 '규정성'의 절대적인 교환만이 존재하며, 이 규정성은 나타나는 것의 유일한 내용으로, 그것은 일반적 매개이거나 부정적 통일성 중 하나이다[힘들의 상호작용은 고정된 본질이나 자립적 존재가 아니라, 항상 즉각적으로, 절대적으로 바뀌는 규정성의 형태를 띤다는 것. 규정성은 각 힘이 나타나는 방식 또는 형태를 의미하며, 그것은 딱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일반적 매개체는 다른 힘들이 나타나는 장 또는 매개 역할을 하며, 부정적 통일성은 자신 안으로 수렴하며 다른 것을 부정하는 자기 동일성 또는 응축된 중심으로의 수렴. 이 문장은 결국 힘의 본질은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두 가지 규정성 간의 끊임없는 교환 그 자체이며, 이 교환은 항상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운동임을 강조]. 그것은 그 특정한 나타남 속에서 곧바로, 자기가 나타났던 바로 그것이기를 멈춘다. 그것은 자기의 특정한 나타남을 통해 다른 쪽을 자극하고, 그로 인해 다른 쪽이 자신을 드러낸다; 즉, 그 다른 쪽이 곧바로 지금은 첫 번째 것이 되어야 했던 바로 그것이다[두 힘 사이의 역할이 뒤바뀐다는 것. 즉 두 힘이 고정된 위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역할을 넘나들며 교환]. 이 두 측면, 즉 자극 관계와 특정한 반대되는 내용의 관계[하나는 형식(형태)의 관계: 자극하는 힘 vs 자극받는 힘. 다른 하나는 내용(실질)의 관계: 능동적 단일성 vs 수동적 매개체]는 각각 그 자체로 절대적인 전도이며 뒤바꿈이다. 그러나 이 두 관계는 다시 동일한 것이며, '형식'의 차이, 즉 자극받는 것과 자극하는 것이 되는 차이는 곧 '내용'의 차이와 동일한 것이다. 자극받는 것은 그 자체로 수동적인 매개이고, 자극하는 것은 능동적인, 부정적 통일성, 즉 '하나됨(Eins)'이다.
상동 115-116
Hierdurch verschwindet aller Unterschiede ‚besonderer Kräfte‘, die in dieser Bewegung vorhanden sein sollten, gegen einander überhaupt ; denn sie beruhten allein auf jenen Unterschieden und der Unterschied der Kräfte fällt ebenso mit jenen beiden nur in Einen zusammen. Es ist also weder die Kraft noch das Sollicitieren und Sollicitiertwerden, noch Bestimmtheit, bestehendes Medium und in sich reflectierte Einheit zu sein, weder einzeln für sich etwas, noch sind es verschiedene Gegensätze, sondern was in diesem absoluten Wechsel ist, ist nur der Unterschied als allgemeiner‘ oder als ein solcher, in welchen sich die vielen Gegensätze reduciert haben. Dieser ‚Unterschied als allgemeiner‘ ist daher ‚das Einfache an dem Spiele der Kraft selbst‘ und das Wahre desselben ; er ist das ‚Gesetz der Kraft‘.
이로 인해 이 운동 안에서 서로를 대립하는 ‘특수한 힘들’ 사이의 모든 차이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 차이들은 오직 [앞서 언급된] 저 차이들에만 근거하고 있었으며, 힘들 사이의 차이 역시 그 둘[형식과 내용의 차이]과 함께 하나로 귀결되기 때문이다[앞서 언급된 두 가지 차이란 형식의 차이: 자극하는 것 vs 자극받는 것,
내용의 차이: 통일성(negative Einheit, Eins) vs 매개체(Medium). 그런데 이 두 차이는 이미 이전 문장에서 같은 구조의 두 측면일 뿐이라고 밝혀짐. 그렇다면 그로 인해 생긴 ‘힘들 사이의 개별적 차이’ 또한 사실상 근거를 잃게 됨. 결국 헤겔은 "힘들의 본질적 차이는 없다"는 사실을 통해, 모든 개별성이 어떻게 보편적 매개 구조 속에서 소멸되고 종합되는가를 드러냄]. 그러므로 그것은 힘도 아니고, ‚자극하고 자극받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는 매개체이자 자신 안에 반성된 통일체인 규정성도 아니며, 그 자체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대립물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인 변화 속에 있는 것은 단지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서의 차이이거나, 많은 대립들이 이 차이 속으로 환원된 것이다. 이 ‘보편적 차이’는 따라서 바로 ‘힘의 운동 자체에 있는 단순한 것’이며, 그것의 진리이다. 이것이 바로 ‘힘의 법칙’이다[개별적 실체나 양상들은 없다. '힘’이나 ‘자극/반응’, ‘매개체/통일성’ 등의 구별들은 고정된 실체가 아님.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도 않고, 서로 완전히 분리된 ‘대립’도 아님. 모든 특수한 규정들은 끊임없는 상호 교환(Verkehrung, Wechsel) 속에서 해체되고 종합됨. 이 교환 속에서 남는 것은 보편적 차이뿐임. 이 보편적 차이는 힘들의 작용 속에 있는 ‘단순한 것’, 즉 그 진리이며, 이것이 바로 자연이나 정신 속에서 힘들이 따르는 법칙].
상동 116
Zu dem ‚einfachen Unterschied‘ wird die absolut wechselnde durch ihre Beziehung auf die Einfachheit des Inneren oder des Verstandes. Das Innere ist zunächst nur ‚das an sich Allgemeine ; dieses an sich einfache Allgemeine ist aber wesentlich ebenso absolut ‚der allgemeine Unterschied‘, denn es ist das Resultat des Wechsels selbst, oder der Wechsel ist sein Wesen ; aber der Wechsel, als im Inneren gesetzt, ist, wie er in Wahrheit ist, in dasselbe hiermit als ebenso absolut allgemeiner beruhigter sich gleich bleibender Unterschied aufgenommen. Oder die Negation ist wesentliches Moment des Allgemeinen, und sie oder die Vermittlung also im Allgemeinen ist ‚allgemeiner Unterschied‘. Er ist im ‚Gesetzt‘ ausgedrückt, als dem ‚beständigen‘ Bilde der unstäten Erscheinung. Die ‚übersinnliche‘ Welt ist hiermit ein ‚ruhiges Reich von Gesetzen‘, zwar jenseits der wahrgenommen Welt, denn diese stellt das Gesetz nur durch beständige Veränderung dar, aber in ihr ebenso ‚gegenwärtig‘, und ihr unmittelbares stilles Abbild.
절대적으로 변화하는 현상이 단순한 차이로 되는 것은 그것이 내부 혹은 오성의 단순성과 관련을 맺음으로써이다. 이 내부는 처음에는 단지 '그 자체로서의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그 자체로 단순한 보편자는 본질적으로 또한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변화의 결과이며, 즉 변화가 그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부 속에 설정된 변화는, 그것이 실제로 그러하듯, 바로 그 동일한 것 안에[내부에] 이에 따라 또한 절대적으로 보편적이고 안정된, 스스로 동일하게 유지되는 차이로서 받아들여진 것이다[외부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변화가 내부에서 구조화되어 평형 상태를 이룬 차이로 변환되었고, aufgenommen "받아들여진 것이다”. 즉, 이 변화는 단순한 소란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이제는 법칙의 형태로 내면에 수용되었다는 의미]. [단순한 차이는 '변화하는 힘들의 운동'이 '내면적 보편자'와 관계를 맺으며 형성된 결과. 내부 즉 오성에 의해 파악된 보편자는 처음에는 단순한 '그 자체로 보편자(an sich Allgemeine)'이지만 이 보편자는 단순히 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Wechsel), 즉 힘들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므로, 그 자체로 차이를 내포하는 보편자. 이 변화는 이제 외적인 운동이 아니라, 내부 속에 정착된 운동으로서 '법칙'이 됨] 또는 부정은 보편자의 본질적 계기이며, 부정 또는 매개는 보편자 안에서 ‘보편적 차이’이다. 이 보편적 차이는 ‘법칙’ 안에서, 즉 불안정한 현상의 ‘지속적인’ 형상으로서 표현되어 있다. 이리하여 ‘초감각적’ 세계는 ‘법칙들의 고요한 왕국’이며, 분명히 지각된 세계 너머에 있는데, 왜냐하면 그 지각된 세계는 법칙을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초감각적 세계는 그 지각된 세계 안에 ‘현재’하며, 그 직접적이고 조용한 ‘형상’이다[1. Negation als wesentliches Moment des Allgemeinen
→ “부정은 보편자의 본질적 계기다”
헤겔에게서 보편성은 단지 정적인 동질성이 아니라, 차이를 내포하고 통일시키는 운동성을 가짐. 그러므로 “부정”은 필연적으로 보편자 속에 들어 있으며, 그 부정을 통한 매개가 보편적 차이를 구성합니다.
2. Gesetz als beständiges Bild der unstäten Erscheinung
→ “법칙은 불안정한 현상의 지속적인 형상이다.”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 일정한 규칙성(=법칙)이 드러남. 법칙은 현상의 유동적인 표현들을 통일적으로 포착한 형상이며, 운동 속의 정지된 진리
3. übersinnliche Welt = ruhiges Reich von Gesetzen
→ “초감각적 세계는 법칙들의 고요한 왕국이다.”
감각적 세계(=지각된 세계)는 변화무쌍하지만, 그 아래에는 변하지 않는 원리, 즉 법칙들이 구조로서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초감각적 세계’임. 이는 단순히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도 현존.
4. die sinnliche Welt als unmittelbares stilles Abbild des Gesetzes
→ “감각적 세계는 법칙의 직접적이며 고요한 형상이다.”
다시 말해, 감각적 현실은 그 자체로 초감각적 진리(법칙)의 표현으로서, 초감각적 세계는 저 너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내면 구조로 현재하는 것. 즉 이 초감각적 세계는 지각된 세계의 저편이 아니라, 그 현상의 진실한 모습으로, 이 세계 안에 내재해 있다는 것].
상동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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