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선포의 헌법상 근거와 정치신학
12.3 계엄사태에서 비롯된 내란국면은 법적 공방을 둘러싸고 여론분열의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법적일 뿐만 아니라 일반 상식의 차원에서 2시간 35분간 지속된 계엄은 이미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는 순간, 아니 계엄 자체를 이미 모의하는 순간 헌법을 위반한 것이다. 어느 누구나 대통령이 정치적인 이유로 계엄령을 시행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대통령 스스로도 계엄선포 대국민 방송에서 그리고 헌재에서 야당의 횡포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말이 정치적인 이유로 계엄을 한 것이라고 실토한 것임을 대통령은 알지 못하더라도 대다수 국민들은 알고 있다. '전시나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서 질서유지를 위해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는 헌법 77조 규정에 '정치적인 이유'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하지만 비상사태에 대한 규정을 두고 해석의 여지를 확보하려는 것이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진영에서 준비하는 방어논리의 주요 근거를 위해 요구된다면, 바로 여기서 카를 슈미트의 정치신학(1922)이 주목될 수 있다.
슈미트에게 비상사태 또는 예외상황은 법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다. 그가 예외상황에 주목하는 것은 법의 원천, 기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보편 윤리의 목적론적 중단이 가능한가?' (주1)라고 제기하여 1920년대 유행하던 예외개념은 슈미트에게 법의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적 개념으로 변용된다. 즉 슈미트에게 예외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사실의 차원이 아니라 가설적인 차원에서 법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전용된 것이다. 정치신학에서 예외는 마치 참다운 현실인식, 본질을 직관할 수 있는 인식의 계기를 제공해주는 현상처럼 묘사되지만, 어디까지나 방법론적 도구에 다름 아니다. 물론 예외는 마치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의식을 떠받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듯이, 정상성을 사방에서 위협하는 근본적 사태로 비춰지긴 하지만 슈미트의 의도는 예외개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주권개념을 끌어내는데 있다.
법의 작동이 정지된 예외상황에서 슈미트는 주권자가 나타난다고 본다. 왜냐하면 법의 작동이 멈취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정치신학 1장의 첫문장 '주권자는 예외상황을 결정한다'는 명제는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예외상황에서 비로서 주권이 실체화되는데, 주권은 예외상황의 아노미를 억제시키는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법의 기능중지를 중지시킨다. 이것이 바로 결정이다. 두번째, 주권자는 어떤 사태가 예외상황인지, 즉 비상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그런 무정부상태를 방지하기 위해 예외상황을 결정한다. 정치신학 1장에서 '주권자는 극도의 위급이 실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를 제거하기 위해 무엇이 일어나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결정한다'(주2)는 문장은 주권자에게 예외상황에 대한 판단 권한을 부여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이 두번째 해석이 유효하다면, 주권자는 계엄선포의 요건도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그런가?
이에 대해서는 정치신학에서 근본구도로 상정된 예외개념으로 법의 기원과 정당성을 설명하는 것이 과연 성공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여기에 뒤따르는 주권자로 슈미트가 지시하는 대상이 무엇이며 그것이 유효할 수 있는지 살펴 봄으로써 대답할 수 있다.
예외를 통한 법의 정당화와 주권의 문제
마리아노 크로체와 안드레아 살바토레는 정치신학에 대한 법학적 독해를 하면서 예외는 정치적 질서의 무근거성을 예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법학자(특히 슈미트)의 '구원적' 힘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정치신학은 법적 정상성의 문제를 해명하는데 실패한 것이라고 말한다. 슈미트 자신도 예외적 결정은 법의 본질을 포착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는데, 1922년에 그는 예외를 '정상화'시키고 이를 법과 국가의 주요한 특징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그 이후 여기서 손을 뗐다는 것이다. 이는 "예외가 일상생활에 아무런 안정된 근거를 제공할 수 없는, 부정기적인 극도의 상황임을 인지했던 것이고 따라서 그는 예외의 역할과 범위를 수정해야 했는데, 이는 질서와 안정보다는 무질서와 혼돈을 일으키는 잠재적 위험사태를 피하려는 것이었다."(주3)
즉 시론적으로 슈미트는 예외라는 실존철학적 개념을 끌어들이면서 역시 예외를 통해 주권이론을 펼친 장 보댕의 국가이론을 결합시켜 법이론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시도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예외를 통해 주권이 발생한다는 명제는 가설적이고 실험적인 설명일 수 있으나 예외 개념 자체의 불확정성과 모호함 때문에 설득력을 상실한다. 더군다나, 예외를 통한 결정주의로 법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슈미트의 시도는 그의 비판대상인 한스 켈젠의 법실증주의를 답습하고 있다. 마리아노 크로체와 안드레아 살바토레는 방법론적으로 달랐지만 놀랍게도 일치하는 점을 이 두 학자에게서 발견한다. 그것은 법질서의 동일성을 결정짓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그들이 매우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법 정초와 관련해 내재적이거나 외재적인 법의 본성에 대해서, 그리고 이런 것이 법학의 영역에 해당하는지에 관해서나 불일치했다. 켈젠에게 규율(order)의 근원적 정초는 판사가 고려할 일이 아니다. 규율은 가정적인 근본 규범의 견지에서 고유한 동일성과 통일성, 완결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슈미트의 이론적 체계에서 결정에 의해 수행된 역할은 근본 규범에 의해 수행된 역할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결정은 누가 주권자인지, 이런 관점에서 무엇이 타당한 법 질서인지 확정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법은 적극적(positive) 본성을 지녔고 어떠한 내용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법(law)의 타당성이 법 외부에서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법적(legal) 타당성은 법적 기계의 논리로부터 기원한다는데 동의한다.ㅣ 슈미트와 달리 켈젠에게 이 기계는 법 수립의 계기를 포함하지 않는다."(주4)
즉 정치신학에서 켈젠의 무근거적인 법적 정당화 작업을 비판하면서 예외를 통해 법의 원천을 드러내려는 슈미트의 시도는 다시 켈젠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것인데, 비록 슈미트는 우회로를 거치지만 결국은 켈젠과 마찬가지로 법의 기계적 체계 앞에서 멈춰 선다. 다만 슈미트는 켈젠과 달리 이 법적 기계에 법 정초를 위한 결정의 역할도 부여함으로써 더욱 더 능동적인 법 기계로 치닫는데, 그것은 바로 예외상황을 결정하는 주권자다. 정치신학에서 슈미트가 주권이론의 전형으로 인용하는 장 보댕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절대주의 왕권을 옹호하며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이론가다. 비록 그에게 주권자란 군주에게만 한정되지 않는 영속적이고 불가분적인 절대 존재자이지만, 어디까지나 강력한 입헌 군주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슈미트가 염두하는 주권자는 오늘날 민주주의 헌법체계의 서두를 여는 국민주권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정치신학을 발표하고 그 다음 해에 발표한 글 오늘날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 Die geistesgeschichtliche Lage des heutigen Parlamentarismus(1923)에서 슈미트는 의회주의와 전쟁선포를 하면서 당대 이탈리아에서 승리한 파시스트 정권에 경도됐다(주5). 결국 그에게 끝없이 논쟁만 이어가는 의회주의에 포위된 것으로 보였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돈과 무질서'에 마침표를 찍고 결단하는 독재자를 긍정하는 길로 슈미트는 들어서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카를 슈미트의 예외를 통한 법의 정당화 작업과 마찬가지로 그가 염두한 주권자는 현대 민주주의
헌법체계에 부합하기에는 설득력이 없을 뿐더러 시대착오적인 한계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주권자가 비상사태를 결정할 수 있다는 그의 핵심명제는 정치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타당성과 개연성을 상실한다.
헌법위반의 중대성과 파시즘의 발흥
헌재의 대통령 탄핵심판의 핵심쟁점은 계엄선포 후 현재까지 명확히 드러난 헌법위반 사실과 함께 대통령의 헌법위반에 중대성이 있느냐에 있다. 헌법 위반이라는 사실만으로는 탄핵사유가 성립될 수 없다는 판례(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때문에 헌법위반의 중대성을 놓고 헌재에서 청구인측과 피청구인측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이미 정치적인 이유로 계엄을 선포한 것 자체만으로도 헌법을 중대하게 위반한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높을 뿐더러, 내란죄 보다 상대적으로 헌법침해의 정도가 낮은 국정농단으로 박근혜의 대통령 파면이 이뤄진 전례를 볼 때, 도대체 어떻게 헌법을 위반해야 내란죄 보다 더 중대하게 헌법을 위반할 죄가 있을지 의구심을 들게한다. 더군다나 현재까지 진행된 상황을 볼 때 대통령은 자신의 결백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헌재의 대통령 탄핵이 기각되면 헌재는 대통령이 2차 계엄도 시도할 수 있는 면죄부를 주는 셈이다. 잠시 지금까지 내란정국의 주요 국면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계엄선포 2024.12.03
국회 계엄해제 의결 2024.12.04
탄핵(1,2차) 2024.12.16
공조본청구, 서부지법의 체포영장 발부 12.31
공수처,국수본의 체포집행(1,2차) 2025.01.15
중앙지법의 체포적부심 기각 2025.01.16
서부지법의 구속영장 발부 2025.01.18
(탄핵반대진영의 서부지법 소요사태 발생)
검찰청구, 중앙지법의 구속기간연장 기각 01.24
검찰 기소 2025.01.27
헌재 10차 변론 종결,형사재판개시 2025.02.20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가 헌재에서 인용되지 않으면 3달 가까이 진행된 이 모든 과정이 도미노처럼 무너질 개연성이 높다. 지난 주 형사재판 준비기일에 중앙지법 해당 형사부에 청구된 대통령측의 구속적부심은 헌재의 결론을 바라보고 있다. 사법부가 최고 권력자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의혹은 이제 사법부가 여론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처지에 놓이게 했다. 탄핵찬성만큼 과반 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탄핵반대 여론은 마치 양당제로 갈린 총선과 대선의 지지율 양상으로 그려지며, 이것은 헌법재판관 8명중 3명은 탄핵에 반대할 수 있다는 해괴한 셈법으로 이어진다. 대통령 탄핵인용을 위한 헌재의 의결정족수는 6명 이상이다(주6).
세계사의 혼돈 국면에 그래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치와 경제 체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던 국가에서 이런 위험한 도박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은 어쩌면 그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일상에 만연된 파시즘이다. 미셸 푸코는 자신의 주적으로 간주한 파시즘에서 세가지 얼굴을 본다.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같은 역사적 파시즘, 파시즘에 관한 언설과 행위 또는 열망에서 보이는 개인적 파시즘, 서구의 사고에서 권력의 형식이자 실재로의 접근로로 성역화한 '법, 한계, 거세, 빈틈'과 같은 범주의 우울한 공격성의 파시즘'(주7)이 바로 메두사의 머리같은 파시즘의 모습이다. 한국 사회의 내면에 두번째, 세번째 얼굴로 대표되는 파시즘의 경향이 만연되어 있다면, 헌재의 결정은 첫번째 얼굴로 대표되는 파시즘에 합법의 길을 터주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각주
1. 이 문제제기는 1843년 키에르케고르가 코펜하겐에서 익명으로 출판한 공포와 전율 : 요하네스 드 실렌티오의 변증 시 Frygt og Baeven : Dialektisk Lyrik af Johannes de Silentio 에서 제시된 세가지 문제유형 중 첫번째다. 이 책의 이례적인 성공은 작가로서 자신의 이름에 불멸성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고 일기에 기록할 정도로 키에르케고르를 고무시켰다. Konrad Paul Liessmann, Sören Kierkegaard zur Einführung(Hamburg:Junius, 1993), S.57-58 참조. 한편, 이 첫번째 문제제기는 공포와 전율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 보다 더 사랑해야할 그 아들 이삭에 대한 윤리적 의무를 정지시키는 것이 보편 윤리의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가능한가?" S. Kierkegaard, Furcht und Zittern, in Gesammelte Werke 4.Abteilung, h.v., E. Hirsch & H. Gerdes(Gütersloher Verlagshaus Gerd Mohn, 1982), S.61.
2. 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 Vier Kapitel zur Lehre von der Souveränität, neunte Auflage(Berlin:Duncker&Humblot, 2009), S.14.
3. Mariano Croce & Andrea Salvatore, Carl Schmitt‘s Institutional Theory : The Political Power of Normal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3), p.12.
4. 상동 22-23.
5. Reinhard Mehring, Carl Schmitt zur Einführung(Hamburg:Junius, 2017), S.35-37.
6. 헌법 제113조 및 헌법재판소법 제23조(ChatGPT)
7. Michel Foucault and Theology : The Politics of Religious Experience, ed.J.Bernauer&J.Carrette(Routledge, 2014), 4장. 미셸 푸코의 종교철학 : 반파시스트적 삶을 위한 서론 James Bernauer p.78.
*작성 : 2월 17, 19, 24일
https://youtu.be/-7ccwARbers?si=Cp1fAcqg_A71BQ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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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학정치단편과 1940년도의 역사철학테제가 상이한 시대적 단층을 이루고 있는 것과 아울러 이 사유의 퇴적물들은 희미하게나마 연속적이면서 극심한 단절을 보이고 있다. 이 길지 않은 두 단편들에서 훨씬 더 분량이 적은 첫번째 것은 두번째에 비해 오히려 의미이해가 더 쉽지 않은 아포리아로 신비적 색채도 풍긴다. 1921년도라는, 변증법적 신학들이 신학과 철학, 법학에서 노도처럼 일어나는 시기에 분명 벤야민도 빠져들고만 사유의 자취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불분명한 계시적 풍모도 지닌 신학정치단편을 19년 후의 테제와 연관시켜 보려는 시도는 마치 다리를 걸쳐 놓을 저편 뚝방의 지대가 허물어져서 당장 교량건설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이어 보려는 시도는 또 다른 관점, 그러면서도 철학자로 온당히 규정되어야 할 벤야민을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면서 그의 문제의식이 현재적인 것으로 여전히 유효한지 음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야콥 타우베스는 벤야민의 신학정치단편에서 전도서 기자의 세상사에 대한 덧없음의 한숨을 발견한다. 지혜가 있으나 없으나 부자이거나 말거나 모두 죽음으로 무화시키는 솔로몬의 탄식이 벤야민에게서도 이어지고 있다고 보면서 타우베스는 벤야민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메시아주의자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 메시아는 역사철학테제에서 그런 신앙고백의 대상으로 읽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메시아는 과거인들, 특히 억압받는 이들의 전통을 비로서 새롭게 밝혀주는 미래인들의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콘텍스트를 통해 새롭게 해석되는 성서처럼 메시아는 콘텍스트를 통해 새롭게 나타난다.
역사 인식의 주체가 투쟁하는, 억압받는 계급이라는 테제12에서 인식(Erkenntnis)의 의미 : 이들이 가장 많이 위험에 노출된 상황에서 과거의 이미지가 현재와 병기하여 성좌구조처럼 나타나는 것을 포착하는 것. 이 이미지의 포착은 서사와 같은 연속적 시간상이라는 설명의 틀로 이루어질 수 없음.
신학정치 단편의 첫 문장에 관한 의미 해석 : "메시아 자신이 비로서 모든 역사적인 사건을 종결시킨다"에서 벤야민이 염두하는 메시아는 당시의 그와 마찬가지로 억압받는 계급으로도 볼 수 있음. 왜냐하면 가장 첨예한 투쟁조건에서 살아가는 계급으로부터 그 사건의 의미가 밝혀지기 때문이며, 이는 인식의 고통이면서 메시아가 들어오는 문이기도 함(현재 세대는 과거 세대에게 마치 메시아적인 힘이 있는 존재로 기다려지고 있던 사람들. 하지만 미약한 힘)
세속적인 것의 추구가 메시아적인 왕국의 도래를 촉진한다는 것은 행복이 어느 누구에게는 몰락을 촉진하기 때문. 즉 [타자가 누리는] 행복의 무거운 하중으로 짓눌리는 존재자들이 있다는 것. "이 세속적인 것을 메시아적인 것과 관련시키는 것이 역사철학의 과제"에서 역사철학은 그 자신의 역사철학테제 암시. 따라서 신학정치단편은 신학이 아닌 정치, 사회철학적 주제의식을 드러내는데(신정정치의 거부) 이는 타우베스의 해석과 상이.
"개별인간의 내적인, 마음에 있는 직접적인 메시아적인 것의 강렬함은 고통이라는 의미에서 불행을 통과해 가기 마련이다"에서 메시아적인 것의 강렬함은 고통이며, 이 고통의 하중, 즉 불행은 억압받는 계급에게 집중. 이 고통은 인식이기도 함. 아는 것이 향유되는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아담의 원죄의식처럼 앎이 강요되는 사회현상.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 내재된 지식이 작업하달 단말기로서의 기능으로 심화발전. 쿠팡의 로켓배송 단말기
따라서 벤야민의 기획은 '자본 : 정치경제학 비판'의 또 다른 전개방식. 즉 맑스의 미완의 과제, 필요에 따른 분배가 보장되는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으로서의 공산사회를 향한 지향점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방법은 사회문화사적 전면관찰(파사주 프로젝트)을 통한 자본 비판. 여기서 자본은 맑스주의 식으로 이해된 일면적 자본 만이 아닌, 상징자본도 포함. 이는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에 연결.
다음의 과제 : 파사주 프로젝트라는 소비의 사회 해체 구상으로 이 억압적인 질서로부터의 출구가 가능한가?
https://youtu.be/qOV_1XobtzQ?si=9a_SFN2x1TImTqQb


텍스트 : 야콥 타우베스, 조효원 역 [바울의 정치신학]Die politische Theologie des Paulus, 그린비 2013.
로마서에서 바울은 주사위 놀이같은 신의 자의적 선택론(예정설)의 비유로 도공과 도자기의 예를 든다. 도자기는 도공에게 자신을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따질 하등의 권리가 없는 것이, 만든 자의 판단과 선택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자기가 의식을 가진 것이라면, 더군다나 최근 식물에게서도 소통을 관찰할 수 있다는 연구가 나온 마당에 최소한 푸념으로라도 자신의 제작자에게 따져 물을 여지가 없지는 않다. '나를 왜 이렇게, 아니 도대체 나를 왜 만들었냐'고. 이런 물음 자체도 창조자가 거부한다면, 창조에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심각한 결함이라도? 선택받지 않을 자는 도대체 왜 창조를 했던 것일까?
로마서에서 예정설의 전거를 마련한 바울은 혹시 이 역설적 상황을 타개하려고 고민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에(로마서 7:19-20) 공력으로도 불가능하다면, 창조의 실수를 수정하려는 방안의 하나로 그의 구원관이 마련된 것은 아닐까? 도대체 '내'가 신에게 선택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선택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창조주의 의중을 자신을 위해 전용한 것으로, 임의로 판단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선택을 받음에도 한정된 유효기간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보다 단순한 하나의 논리적 귀결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래야 선택된 민족 편협적인 구원관을 벗어나 보편적인 종교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원초적 죄와 속죄(대속), 그리고 구원으로 이어지는 완결구도다.
타르소 출신의 로마시민이자 유대인 바울의 신학적 전략을 이런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물론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관과는 동떨어져 있다.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벤야민의 신학정치 단편, 니체와 프로이트의 반그리스도적 바울론을 통해 타우베스가 제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단절된 것으로 판결된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불화를 해소할 수 있다는 해석,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라는 파국과 창조의 덧없음에 관한 벤야민과 바울의 공감, 죄의식과 원한감정으로 바울을 몰고가는 니체와 프로이트의 부정적 바울 해석에 대한 진중한 평가다.
나는 타우베스의 바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참조해 바울의 신학적 전략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는지 묻는다. 인간의 연약함에 따른 사랑의 절대적 필요성을 드러내는 고린도후서 11장에 근거해 타우베스는 바울의 천재성을 발견한다(133-134쪽). 이것은 비단 구원에 대한 인간적 방법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그토록 바울이 율법을 죄와 동일시할 정도로 부정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다시 도자기와 도공의 비유로 돌아가 보면, 사도는 토기장이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는지 묻는다(로마서 9:20-21). 이 물음은 창조자가 의도적이자 일방적으로 피조물의 '용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확언이다. 그렇다면 창조에 실수란 것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적 결정과 행위에 실수를 물을 수 없더라도, 책임은 없는 것인가? 이것이 감히 인간이 신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이라해도 요청, 설득할 여지는 없는 것인가? 불완전하고 죄의 상태에 있는 신체를 타고 난 인간이 저마다의 연약함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마치 파국을 몰고 올 메시아의 재림이 계속 연기되듯이, 신에게 어떠한 조치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람들 간의 사랑의 연대만이 개별인간의 약함을 이겨낼 수 있는 최후의 실천적 방안이다. 창조의 불완전함이 새로운 약속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인 바, 그 교리적 매개는 신체를 타고 났지만 부활한(죽음을 이겨낸), 그래서 신이 된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충만으로 열방은 구원의 문턱에 다다를 수 있다.
저마다 사랑의 빚 외에 타인에게 질 빚이 없다면 법은 완성되는 것(로마서 13:8-9)일 뿐만 아니라 필요없는 것으로 전락한다(아감벤에 의하면 법의 작용정지katargeín). 있지만 있지 않은 것과 다름 없는 법의 역설적 상태로 말이다. 법의 이러한 '마비상태'는 법의 문을 끈질긴 인내로 닫으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카프카의 시골사람에게도 볼 수 있다. 시간과 함께 죽어가는 현존질서의 현실적 근거인 법, 법의 작동은 그래서 또한 죽음의 법이다(고린도전서 15:56). 하지만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어디까지가 이 세계의 끝, 나아가 시간의 끝이 어디인지 기약할 수 없는 한 법의 문은 닫혀 있더라도 언제든 열려질 수 있는 상태다. 시간의 끝 혹은 세계의 끝에 대한 사고는 칸트가 선험적 변증론에서 이성이 경험을 넘어선 것을 사고할 때 빠지게 되는 이율배반처럼 그 사고 자체가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소멸하면서도 썩어가는 것을 사랑하려고 했다는 타우베스에 대한 역자의 해석(304쪽)과는 다른 관점에서, 자기 삶의 종점에 다다른 이 유대철학자는 혹시 자신의 유한성을 시공의 유한성으로 해석하고 싶은 형이상학적 욕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무한생성론을 주장하는 니체에게 인류의 역사란 허공을 가르는 모기의 비행처럼 가느다랗고 미약한 순간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에게도 벤야민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는 덧없는 것일 뿐일까? 아니면, 바울에서 마르치온과 벤야민, 그리고 타우베스로 이어지는 메시아주의는 경험 밖의 문제설정으로 경험세계에 영향을 미치려는 가상적 실천의 전략일까? 이런 전략은 아도르노의 미학적 방법과 얼마나 다를까? 탈가치화로 종교가 쇠퇴하는 시점이라해도 메시아주의는 그래도 교회와 신도라는 기반이 있다. 비록 지지의 양상은 다를 지라도. 이런 점에서 그들의 신학은 순수한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정치신학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어소시에이션과 윤리적 경제
구 일 섭
*근래 가상화폐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논란을 보고 참고용으로 게시합니다. 각주가 필요하신 분은 메일 주시면 파일 보내드립니다. 메일 : streetphila@naver.com.
** 이 글은 2010년 가을 작성한 미발표 논문을 부분 수정한 것입니다.
상호작용과 정언명령
사회 속에서 개인은 일정한 상호작용을 하는 관계의 장에 놓여 있다. 상호작용의 방식과 성격은 관계에 따라 상이하지만,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 보면, 전략적 상호작용과 우애적 상호작용으로 구분된다. 전략적 상호작용이란, 관계의 상대방을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행위 유형이며, 우애적 상호작용이란 관계의 상대방을 목적 자체로 삼는 행위 유형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에 따라 이 두 가지 상호작용은 혼재될 수 있다. 기능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짐멜은 세계에서 진행되는 모든 사건과 과정을 전체 내에 있는 부분들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함으로써, 중심개념(예를 들어 진리, 가치, 객관성)을 상대화시키고, 확고부동한 가치들을 요소들 내의 생동적 상호작용으로의 대체하려고 한다.그러나 실체적 목적사회의 관계로부터 벗어나 친교의 순수성에 도달하려는 것은 과도한 형식주의의 추구라는 비판에 직면한다.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짐멜은 목적사회의 현실을 이미 긍정한 상태에서 이를 초월하는 관점을 제시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경제생활을 심급으로 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관계가 전략적 상호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을 일단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제생활로 주도되는 경험세계에 대한 이러한 긍정은 칸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2008년 1학기 고대문화 연속서평
Pre-Capital : 마르크스의 근대 경제사 비판의 원천 탐사3
『경제학 철학 초고』외 : 청년 마르크스가 제기한 노동과 국가의 문제
구일섭
순서
1.유적 존재를 위협하는 노동
2.국가는 아직도 필요한가
3.연재를 마치며
1.유적 존재를 위협하는 노동
노동의 한자 뜻을 풀어보면 힘쓸 勞에 움직일 動이다. 한자만 놓고 본다면 뭔가 힘들게 일을 한다는 의미다. 이런 노동이란 말에는 노동을 폄하하는 듯한 역설이 보인다. 즉 노동을 뭔가 피해야만 하는 고충같은 일로 비출 수 있다. 왜 노동에 대한 이런 불손한 생각이 드는 걸까? 누가 감히 신성한 노동을 부정할 수 있을까? 땀흘려 일한 농부의 노동없이 목구멍에 밥을 밀어 넣을 수 있을까? 지배와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 역사의 이면엔 장대한 노동의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해 마르크스라면 냉소적으로 응대했을 것이다. 그 자신도 생계를 위해 철도 사무원 자리에 기웃거렸지만 끝내 룸펜으로 남았던 철학자답게 독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를 가리켜 자기 집안도 건사하지 못한 무능한 가장이라고 핀잔하는 것은 아담 스미스나 칸트를 가리켜 장가도 못간 노총각이라고 비난하는 것만큼 무지한 발상이다. 더욱이 룸펜의 상태는 노동을 색안경을 쓰고 인식한 이 세속의 철학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실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여담을 걷어내서 보면, 노동에 마르크스가 투사한 의미를 볼 수 있다. 19세기 영국의 대형 굴뚝에서 솟아나는 거대한 연기 속에서 마르크스는 산업의 혁명적 진보 뿐만 아니라 처참한 노동의 위기를 목격하고 노동을 헤겔의 외화 개념을 적용해 인식했다. 그것은 노동이 유적 존재인 인간의 외화된 활동으로서 인간에게 대립해 있다는 것이다. 즉 노동은 인간에게 이제 낯설어 지고, 원래 인간이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어쩔 수 없이 할 수 밖에 없는 상태로 인간 안에서 인간과 대립해 있는 채로 수행된다. 1862년 맨체스터의 공장에서 주당 평균 84시간으로 강제되는 살인적 노동은 분명 노동자에게 대립해 있다. 이러한 살인적 노동 조건은 외양과 법적 형식을 정비해 현재 한국사회에서도 강제된다. 지난 5월 16일 창원의 두산중공업 터빈공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가 신호수가 배치되지 않은 작업장에서 업무중 지게차에 치여 또다시 사망하는 사고를 비롯해,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도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과 학생들에게도 여전히 가혹한 노동조건이 관철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힘들고 위험하고 고단한 이런 노동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모든 노동에 무슨 문제가 있기에, 노동의 소외가 특정 계급의 노동자가 아니라 인류라는 전체에 일어나는 것인가? 노동 소외의 본질에 대한 마르크스의 서술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