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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학정치단편과 1940년도의 역사철학테제가 상이한 시대적 단층을 이루고 있는 것과 아울러 이 사유의 퇴적물들은 희미하게나마 연속적이면서 극심한 단절을 보이고 있다. 이 길지 않은 두 단편들에서 훨씬 더 분량이 적은 첫번째 것은 두번째에 비해 오히려 의미이해가 더 쉽지 않은 아포리아로 신비적 색채도 풍긴다. 1921년도 라는, 변증법적 신학들이 신학과 법학에서 노도처럼 일어나는 시기에 분명 벤야민도 빠져들고 만 사유의 자취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불분명한 계시적 풍모도 지닌 신학정치단편을 19년 후의 테제와 연관시켜 보려는 시도는 마치 다리를 걸쳐 놓을 저편 뚝방의 지대가 허물어져서 당장 교량건설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이어 보려는 시도는 또 다른 관점, 그러면서도 철학자로 온당히 규정되어야 할 벤야민을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면서 그의 문제의식이 현재적인 것으로 여전히 유효한지 음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야콥 타우베스는 벤야민의 신학정치단편에서 전도서 기자의 세상사에 대한 덧없음의 한숨을 발견한다. 지혜가 있으나 없으나 부자이거나 말거나 모두 죽음으로 무화시키는 솔로몬의 탄식이 벤야민에게서도 이어지고 있다고 보면서 타우베스는 벤야민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메시아주의자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 메시아는 역사철학테제에서 그런 신앙고백의 대상으로 읽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메시아는 과거인들, 특히 억압받는 이들의 전통을 비로서 새롭게 밝혀주는 미래인들의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콘텍스트를 통해 새롭게 해석되는 성서처럼 메시아는 콘텍스트를 통해 새롭게 나타난다.

역사 인식의 주체가 투쟁하는, 억압받는 계급이라는 테제12에서 인식(Erkenntnis)의 의미 : 이들이 가장 많이 위험에 노출된 상황에서 과거의 이미지가 현재와 병기하여 성좌구조처럼 나타나는 것을 포착하는 것. 이 이미지의 포착은 서사와 같은 연속적 시간상이라는 설명의 틀로 이루어질 수 없음.

신학정치 단편의 첫 문장에 관한 의미 해석 : "메시아 자신이 비로서 모든 역사적인 사건을 종결시킨다"에서 벤야민이 염두하는 메시아는 당시의 그와 마찬가지로 억압받는 계급으로도 볼 수 있음. 왜냐하면 가장 첨예한 투쟁조건에서 살아가는 계급으로부터 그 사건의 의미가 밝혀지기 때문이며, 이는 인식의 고통이면서 메시아가 들어오는 문이기도 함(현재 세대는 과거 세대에게 마치 메시아적인 힘이 있는 존재로 기다려지고 있던 사람들. 하지만 미약한 힘)

세속적인 것의 추구가 메시아적인 왕국의 도래를 촉진한다는 것은 행복이 어느 누구에게는 몰락을 촉진하기 때문. 즉 [타자가 누리는] 행복의 무거운 하중으로 짓눌리는 존재자들이 있다는 것. "이 세속적인 것을 메시아적인 것과 관련시키는 것이 역사철학의 과제"에서 역사철학은 그 자신의 역사철학테제 암시. 따라서 신학정치단편은 신학이 아닌 정치, 사회철학적 주제의식을 드러내는데(신정정치의 거부) 이는 타우베스의 해석과 상이.

"개별인간의 내적인, 마음에 있는 직접적인 메시아적인 것의 강렬함은 고통이라는 의미에서 불행을 통과해 가기 마련이다"에서 메시아적인 것의 강렬함은 고통이며, 이 고통의 하중, 즉 불행은 억압받는 계급에게 집중. 이 고통은 인식이기도 함. 아는 것이 향유되는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아담의 원죄의식처럼 앎이 강요되는 사회현상.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 내재된 지식이 작업하달 단말기로서의 기능으로 심화발전. 쿠팡의 로켓배송 단말기

따라서 벤야민의 기획은 '자본 : 정치경제학 비판'의 또 다른 전개방식. 즉 맑스의 미완의 과제, 필요에 따른 분배가 보장되는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으로서의 공산사회를 향한 지향점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방법은 사회문화사적 전면관찰(파사주 프로젝트)을 통한 자본 비판. 여기서 자본은 맑스주의 식으로 이해된 일면적 자본 만이 아닌, 상징자본도 포함. 이는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에 연결.

다음의 과제 : 파사주 프로젝트라는 소비의 사회 해체 구상으로 이 억압적인 질서로부터의 출구가 가능한가?

https://youtu.be/qOV_1XobtzQ?si=9a_SFN2x1TImTqQ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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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 야콥 타우베스, 조효원 역 [바울의 정치신학]Die politische Theologie des Paulus, 그린비 2013.

로마서에서 바울은 주사위 놀이같은 신의 자의적 선택론(예정설)의 비유로 도공과 도자기의 예를 든다. 도자기는 도공에게 자신을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따질 하등의 권리가 없는 것이, 만든 자의 판단과 선택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자기가 의식을 가진 것이라면, 더군다나 최근 식물에게서도 소통을 관찰할 수 있다는 연구가 나온 마당에 최소한 푸념으로라도 자신의 제작자에게 따져 물을 여지가 없지는 않다. '나를 왜 이렇게, 아니 도대체 나를 왜 만들었냐'고. 이런 물음 자체도 창조자가 거부한다면, 창조에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심각한 결함이라도? 선택받지 않을 자는 도대체 왜 창조를 했던 것일까?

로마서에서 예정설의 전거를 마련한 바울은 혹시 이 역설적 상황을 타개하려고 고민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에(로마서 7:19-20) 공력으로도 불가능하다면, 창조의 실수를 수정하려는 방안의 하나로 그의 구원관이 마련된 것은 아닐까? 도대체 '내'가 신에게 선택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선택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창조주의 의중을 자신을 위해 전용한 것으로, 임의로 판단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선택을 받음에도 한정된 유효기간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보다 단순한 하나의 논리적 귀결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래야 선택된 민족 편협적인 구원관을 벗어나 보편적인 종교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원초적 죄와 속죄(대속), 그리고 구원으로 이어지는 완결구도다.

타르소 출신의 로마시민이자 유대인 바울의 신학적 전략을 이런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물론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관과는 동떨어져 있다.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벤야민의 신학정치 단편, 니체와 프로이트의 반그리스도적 바울론을 통해 타우베스가 제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단절된 것으로 판결된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불화를 해소할 수 있다는 해석,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라는 파국과 창조의 덧없음에 관한 벤야민과 바울의 공감, 죄의식과 원한감정으로 바울을 몰고가는 니체와 프로이트의 부정적 바울 해석에 대한 진중한 평가다.

나는 타우베스의 바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참조해 바울의 신학적 전략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는지 묻는다. 인간의 연약함에 따른 사랑의 절대적 필요성을 드러내는 고린도후서 11장에 근거해 타우베스는 바울의 천재성을 발견한다(133-134쪽). 이것은 비단 구원에 대한 인간적 방법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그토록 바울이 율법을 죄와 동일시할 정도로 부정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다시 도자기와 도공의 비유로  돌아가 보면, 사도는 토기장이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는지 묻는다(로마서 9:20-21). 이 물음은 창조자가 의도적이자 일방적으로 피조물의 '용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확언이다. 그렇다면 창조에 실수란 것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적 결정과 행위에 실수를 물을 수 없더라도, 책임은 없는 것인가? 이것이 감히 인간이 신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이라해도 요청, 설득할 여지는 없는 것인가? 불완전하고 죄의 상태에 있는 신체를 타고 난 인간이 저마다의 연약함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마치 파국을 몰고 올 메시아의 재림이 계속 연기되듯이, 신에게 어떠한 조치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람들 간의 사랑의 연대만이 개별인간의 약함을 이겨낼 수 있는 최후의 실천적 방안이다. 창조의 불완전함이 새로운 약속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인 바, 그 교리적 매개는 신체를 타고 났지만 부활한(죽음을 이겨낸), 그래서 신이 된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충만으로 열방은 구원의 문턱에 다다를 수 있다.

저마다 사랑의 빚 외에 타인에게 질 빚이 없다면 법은 완성되는 것(로마서 13:8-9)일 뿐만 아니라 필요없는 것으로 전락한다(아감벤에 의하면 법의 작용정지katargeín). 있지만 있지 않은 것과 다름 없는 법의 역설적 상태로 말이다. 법의 이러한 '마비상태'는 법의 문을 끈질긴 인내로 닫으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카프카의 시골사람에게도 볼 수 있다. 시간과 함께 죽어가는 현존질서의 현실적 근거인 법, 법의 작동은 그래서 또한 죽음의 법이다(고린도전서 15:56). 하지만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어디까지가 이 세계의 끝, 나아가 시간의 끝이 어디인지 기약할 수 없는 한 법의 문은 닫혀 있더라도 언제든 열려질 수 있는 상태다. 시간의 끝 혹은 세계의 끝에 대한 사고는 칸트가 선험적 변증론에서  이성이 경험을 넘어선 것을 사고할 때 빠지게 되는 이율배반처럼 그 사고 자체가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소멸하면서도 썩어가는 것을 사랑하려고 했다는 타우베스에 대한 역자의 해석(304쪽)과는 다른 관점에서, 자기 삶의 종점에 다다른 이 유대철학자는 혹시 자신의 유한성을 시공의 유한성으로 해석하고 싶은 형이상학적 욕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무한생성론을 주장하는 니체에게 인류의 역사란 허공을 가르는 모기의 비행처럼 가느다랗고 미약한 순간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에게도 벤야민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는 덧없는 것일 뿐일까? 아니면, 바울에서 마르치온과 벤야민, 그리고 타우베스로 이어지는 메시아주의는 경험 밖의 문제설정으로 경험세계에 영향을 미치려는 가상적 실천의 전략일까? 이런 전략은 아도르노의 미학적 방법과 얼마나  다를까? 탈가치화로 종교가 쇠퇴하는 시점이라해도  메시아주의는 그래도 교회와 신도라는 기반이 있다. 비록 지지의 양상은 다를 지라도. 이런 점에서 그들의 신학은 순수한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정치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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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경제 관련

논문 Abhandlung 2018. 1. 16. 10:1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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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어소시에이션과 윤리적 경제

구 일 섭

*근래 가상화폐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논란을 보고 참고용으로 게시합니다. 각주가 필요하신 분은 메일 주시면 파일 보내드립니다.  메일 :  streetphila@naver.com.

** 이 글은 2010년 가을 작성한 미발표 논문을 부분 수정한 것입니다.

 

상호작용과 정언명령

사회 속에서 개인은 일정한 상호작용을 하는 관계의 장에 놓여 있다. 상호작용의 방식과 성격은 관계에 따라 상이하지만,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 보면, 전략적 상호작용과 우애적 상호작용으로 구분된다. 전략적 상호작용이란, 관계의 상대방을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행위 유형이며, 우애적 상호작용이란 관계의 상대방을 목적 자체로 삼는 행위 유형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에 따라 이 두 가지 상호작용은 혼재될 수 있다. 기능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짐멜은 세계에서 진행되는 모든 사건과 과정을 전체 내에 있는 부분들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함으로써, 중심개념(예를 들어 진리, 가치, 객관성)을 상대화시키고, 확고부동한 가치들을 요소들 내의 생동적 상호작용으로의 대체하려고 한다.그러나 실체적 목적사회의 관계로부터 벗어나 친교의 순수성에 도달하려는 것은 과도한 형식주의의 추구라는 비판에 직면한다.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짐멜은 목적사회의 현실을 이미 긍정한 상태에서 이를 초월하는 관점을 제시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경제생활을 심급으로 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관계가 전략적 상호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을 일단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제생활로 주도되는 경험세계에 대한 이러한 긍정은 칸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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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서평 : 정치경제학 비판

논문 Abhandlung 2017. 7. 4. 07:5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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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학기 고대문화 연속서평

             

Pre-Capital : 마르크스의 근대 경제사 비판의 원천 탐사3

『경제학 철학 초고』외 : 청년 마르크스가 제기한 노동과 국가의 문제


구일섭

 

순서 


1.유적 존재를 위협하는 노동

2.국가는 아직도 필요한가

3.연재를 마치며

 

1.유적 존재를 위협하는 노동


노동의 한자 뜻을 풀어보면 힘쓸 勞에 움직일 動이다. 한자만 놓고 본다면 뭔가 힘들게 일을 한다는 의미다. 이런 노동이란 말에는 노동을 폄하하는 듯한 역설이 보인다. 즉 노동을 뭔가 피해야만 하는 고충같은 일로 비출 수 있다. 왜 노동에 대한 이런 불손한 생각이 드는 걸까? 누가 감히 신성한 노동을 부정할 수 있을까? 땀흘려 일한 농부의 노동없이 목구멍에 밥을 밀어 넣을 수 있을까? 지배와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 역사의 이면엔 장대한 노동의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해 마르크스라면 냉소적으로 응대했을 것이다. 그 자신도 생계를 위해 철도 사무원 자리에 기웃거렸지만 끝내 룸펜으로 남았던 철학자답게 독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를 가리켜 자기 집안도 건사하지 못한 무능한 가장이라고 핀잔하는 것은 아담 스미스나 칸트를 가리켜 장가도 못간 노총각이라고 비난하는 것만큼 무지한 발상이다. 더욱이 룸펜의 상태는 노동을 색안경을 쓰고 인식한 이 세속의 철학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실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여담을 걷어내서 보면, 노동에 마르크스가 투사한 의미를 볼 수 있다. 19세기 영국의 대형 굴뚝에서 솟아나는 거대한 연기 속에서 마르크스는 산업의 혁명적 진보 뿐만 아니라 처참한 노동의 위기를 목격하고 노동을 헤겔의 외화 개념을 적용해 인식했다. 그것은 노동이 유적 존재인 인간의 외화된 활동으로서 인간에게 대립해 있다는 것이다. 즉 노동은 인간에게 이제 낯설어 지고, 원래 인간이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어쩔 수 없이 할 수 밖에 없는 상태로 인간 안에서 인간과 대립해 있는 채로 수행된다. 1862년 맨체스터의 공장에서 주당 평균  84시간으로 강제되는 살인적 노동은 분명 노동자에게 대립해 있다. 이러한 살인적 노동 조건은 외양과 법적 형식을 정비해 현재 한국사회에서도 강제된다. 지난 5월 16일 창원의 두산중공업 터빈공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가 신호수가 배치되지 않은 작업장에서 업무중 지게차에 치여 또다시 사망하는 사고를 비롯해,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도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과 학생들에게도 여전히 가혹한 노동조건이 관철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힘들고 위험하고 고단한 이런 노동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모든 노동에 무슨 문제가 있기에, 노동의 소외가 특정 계급의 노동자가 아니라 인류라는 전체에 일어나는 것인가? 노동 소외의 본질에 대한 마르크스의 서술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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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서평 : 국부론

논문 Abhandlung 2017. 6. 18. 09:5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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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학기 고대문화 연속서평

        

                    Pre-Capital : 마르크스의 근대 경제사 비판의 원천 탐사

                                      1.스미스의 『국부론』

                             

구일섭

 

1.도입부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처럼 산 사람의 두뇌를 압박한다.”

             

                                                   (마르크스, 『루이보나빠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중)


일본의 탁월한 문예비평가인 가라타니 고진은 아사다 아키라와의 대담에서 위에 인용한 책을 언급한다.1) 이미 25년이나 지난 이 대화에서 칸토의 집합론과 소쉬르의 기호학, 마르크스의 자본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구조동일성이라는 형식에서 서로 참조되는데, 중심 없는 구조로서 전능한 자본의 힘은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에 비유된다. 프랑스 대혁명이 보나빠르트로 대표되는 부르조와 혁명으로 퇴락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책을 가라타니가 위상수학과 관련지어 논의하는 것이 비약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저 사유의 유목민들에게는 새롭고 즐거운 실험이다. 이렇듯 우리가 단지 먼 과거로부터만이 아니라 인접한 시대의 타학문에서도 사유를 적극적으로 참고하고 자극받을 수 있는 양식은 오늘날의 전유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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