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의 래리에 대한 사랑이 열정없는 그것이었음을 작가가 지적하는 대목. 이런 점에서는 래리도 마찬가지였다.
"열정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파스칼은, 가슴은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다고 말했지.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건 열정이 가슴을 사로잡으면 가슴은 사랑을 위해 세상을 잃어도 좋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그럴듯한, 심지어는 결정적인 이유들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야. 그래서 명예를 희생시켜도 좋고 치욕도 그리 큰 대가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지. 열정은 파괴적인 거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넬과 키티 오셰이도 결국 ㅣ 열정 때문에 파멸로 치닫고 말았잖아. 그리고 열정은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려. 그러고 나면 수년 동안 인생을 허비했다는 걸 깨닫고 비참한 기분이 들겠지.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면서 무서운 질투의 고통을 견뎌 내고 그 모든 쓰디쓴 치욕을 삼켜야 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 자신이 가진 애정을 전부 가난한 매춘부에게 소진했음을, 어리석고 하찮은 존재에게 자신의 꿈을 모두 걸었음을, 껌 한 쪽만도 못한 상대에게 영혼을 전부 쏟아부었음을 깨닫는 비참한 순간이 찾아오는 거지."
서머셋 몸, 『면도날』The Razor's Edge(1944) 안진환 역(민음사, 2010, 1판2쇄), 280-281.
모처럼의 휴일, 지역의 자그마한 어린이날 행사장에서 아이들과 적당히 놀고 집에서 적당히 쉬었다. 이청준의 『축제』를 읽으며 이걸 다른 언어로 번역된 걸 읽으면 어떨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이청준 식의 특유 문형에 전라도의 사투리들. 결국 번역문은 어느 정도 문체의 느낌상으로나 의미상 손실을 감안하고 읽을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