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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A.) Vernunft
B. Selbstbewusstsein

텍스트 :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아카데믹판 h.v. G.J.P.J. Bolland(Leiden A.H. Adriani, 1907)

A.Bewusstsein
I.Die sinnliche Gewissheit oder das Dieses und das Meinen
II.Die Wahrnehmung oder das Ding und die Täuschung    
III.Kraft und Verstand, Erscheinung und uebersinnliche Welt  S.117-
B. Selbstbewusstsein
IV.Die Wahrheit der Gewissheit seiner Selbst
a.Selbstständigkeit und Unselbstständigkeit des Selbstbewusstseins ; Herrschaft und Knechtschaft S.151-
b.Freiheit des Selbstbewusstseins ; Stoicismus, Skepticismus und das unglückliche Bewusstsein S.164-
C.(AA.) Vernunft
V.Gewissheit und Wahrheit der Vernunft S.194-
(A)Beobachtende Vernunft S.205-

*게시된 번역과 해설은 AI를 바탕으로 제가 수정•편집한 것입니다. 다른 번역이나 해설 제안 적극 환영합니다.

Solcher Gegenstand, welcher den Process in der Einfachheit des Begriffes an ihm hat, ist das 'Orga-nische'. Es ist die absolute Flüssigkeit, worin die Be-stimmtheit, durch welche es nur 'für Anderes' wäre, aufgelöst ist. Wenn das unorganische Ding die Bestimmtheit zu seinem Wesen hat und deswegen nur mit einem anderen Dinge zusammen die Vollständigkeit der Momente des Begriffes ausmacht und daher in die Bewegung tretend verloren geht, so sind dagegen an dem organischen Wesen alle Bestimmtheiten, durch welche es für Anderes offen ist, unter die organische einfache Einheit gebunden; es tritt keine als wesentlich auf, welche sich frei auf Anderes bezöge und das Organische erhält sich daher in seiner Beziehung selbst.

이러한 대상 ― 개념의 단순성 속에 과정을 내재하는 대상 ―그것이 바로 유기적인 것(Organisches) 이다. 유기적인 것은 절대적인 유동성(absolute Flüssigkeit) 으로서, 그것이 단지 ‘타자를 위한 것(für Anderes)’이 되게 하는 모든 규정성(Bestimmtheit)이 그 안에서 해소되어 있다. 반면 무기적인 것(Unorganisches) 은 그 규정성을 그 자체의 본질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직 다른 어떤 사물과 결합함으로써만 개념의 모든 계기(moment)의 완전성을 구성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운동 속으로 들어가면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반하여 유기체에서는,
그것이 타자를 향해 열려 있게 하는 모든 규정성이
하나의 단순한 유기적 통일성 아래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규정성도 타자에 자유롭게 관계하는 독립적 본질로 나타나지 않으며, 유기체는 자기의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이 문단은 헤겔 『정신현상학』 「이성」 장의 마지막 부분 중에서도, 자연 관찰의 최고 형태로서 ‘유기체(Organisches)’, 즉 생명체를 다루는 대목. 여기서 이성은 “자연적 존재 속의 개념(Begriff)”이 가장 순수하게 실현된 형태를 유기적 생명에서 발견
헤겔에게 유기체는 자연의 최고 형태임. 그 이유는 ‘개념(Begriff)’이 현실태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유기체이기 때문. 즉, 유기체는 더 이상 외적 관계(인과적 작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목적과 수단, 결과가 하나로 통일되는 존재 —바로 ‘개념의 현실태(Realität des Begriffs)’임. 그래서 헤겔은 여기서 "유기체는 개념의 단순성 속에서 그 과정을 지니는 대상”이라 말하는 것. 이것은 자연 속에서 이성이 자기 자신(개념)을 발견한 순간을 뜻함. 이 단락은 바로 이어지는 대목 ―즉 “유기체의 관찰(Beobachtung des Organischen)” ― 로 넘어가며, 이성이 이제 생명 속에서 자기 자신(개념)의 운동을 본격적으로 관찰하기 시작].

상동 219

Die Seiten des Gesetzes, auf dessen Beobachtung hier der Vernunftinstinct geht, sind, wie aus dieser Bestimmung folgt, zunächst die organische Natur und die unorganische in ihrer Beziehung auf einander. 1) Diese letztere ist für die organische eben die ihrem einfachen Begriffe entgegengesetzte Freiheit der losgebundenen Bestimmtheiten, in welchen die individuale Natur zugleich aufgelöst ist, und aus deren Continuität sie zugleich sich absondert und für sich ist. Luft, Wasser, Erde, Zonen und Klima sind solche allgemeine Elemente, die das unbestimmte einfache Wesen der Individualitäten ausmachen und worin diese zugleich in sich reflectiert sind.

여기서 이성이 본능적으로 그 관찰을 향해 나아가는 법칙의 [양쪽] 측면들은 앞선 규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우선 이 둘의 상호관계에서 유기적 자연과 무기적 자연이다. 이 가운데 무기적 자연은, 유기적 존재에 대해 볼 때, 그것의 단순한 개념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해방된 규정성들의 자유[다시 말해 결속을 벗어나 흩어진 규정성들의 자유로운 영역]이다. 그 안에서 개체적 자연[개별 생명체의 본성]은 동시에 해체되어 있으며,
그러나 또한 바로 그 연속성(Continuität)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고,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한다. 공기, 물, 땅, 기후대, 그리고 기후 등은 이러한 보편적 요소들로서, 개별적 존재자들의 불확정하고 단순한 본질을 형성하며, 동시에 그 안에서 각각의 개체는 자기 자신으로 반사되어 있다[이제 「이성」 장의 ‘유기적 자연의 관찰(Beobachtung der organischen Natur)’ 부분으로 진입하는 대목. 이 문장은 유기체(Organisches) 와 무기적 자연(Unorganisches) 의 상호관계를 헤겔이 처음으로 개념적으로 정식화하는 단락
이 문단은 유기체의 존재방식을 그 외적 조건(무기적 자연) 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함. 헤겔에게 유기체는 단순히 생명체가 아니라, 개념(Begriff)이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구체적 현실임. 그러나 유기체는 완전히 독립된 실체가 아님. 그는 무기적 자연, 즉 환경(공기, 물, 토양, 기후 등)에 의존하며,그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고, 동시에 그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내는 운동을 수행합니다. 즉 유기체는 다음의 변증법적 구조를 지님
1.무기적 자연:외적 연속성(공기, 물, 기후 등), 해체된 규정성들의 자유
2.유기체의 의존:개체는 이 연속성 속에서 자신을 유지해야 함
3.자기분리(Self-differentiation):그러나 동시에 이 연속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독립적 개체로 존재
4.자기반사(Reflexion in sich):외적 관계를 자기 내로 통합함으로써 자신을 유지
이것이 바로 생명의 본질 ―“환경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구분짓는 존재” ―즉 '자기관계로서의 외관계’임
🔹 요약
이성은 이제 자연 속에서 법칙(Gesetz) 을 찾으며,그 법칙의 두 항은 유기적과 무기적 자연임. 무기적 자연은 유기적 개념에 반대되는 자유로운 규정성들의 장이며 유기체는 이 외적 연속성 속에서 자신을 해소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분리되어 자립적 존재로 섬. 동시에 유기체는 그 외적 환경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반사적으로 유지]

상동

Weder die Individualität ist schlechthin an und für sich, noch das Elementarische, sondern in der selbstständigen Freiheit, in welcher sie für die Beobachtung gegen einander auftreten, ver-ㅣhalten sie sich zugleich als 'wesentliche Beziehungen', aber so dass die Selbstständigkeit und Gleichgültigkeit beider gegen einander das Herrschende ist, und nur zum Teil in die Abstraction übergeht.

개체성(Individualität)도 단연코 ‘그 자체로서(an und für sich)’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원소적[무기적, das Elementarische]인 것도 그러하지 않다.
그러나 이 둘은, 관찰에 나타나는 바에 따르면,
서로 독립적인 자유 속에서 마주 서 있으면서,
동시에 본질적인 관계(wesentliche Beziehungen) 로서 서로를 관계한다. 다만 이 관계는 그렇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독립성과 상호 무관성(Gleichgültigkeit)이 지배적인 것이며, 양자의 내적 관련성은 부분적으로만 추상적(Abstraktion) 형태로 드러날 뿐이다[유기체와 그것의 무기적 조건(환경) 사이의 상호 독립성과 상호의존성을 동시에 규정하는 대목
1.유기체는 환경과 완전히 독립된 실체가 아님. 왜냐하면 유기체는 공기, 물, 온도, 토양 등 환경적 조건에 의존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
2.그러나 관찰의 수준에서는, 즉 이성이 아직 ‘개념(Begriff)’으로 파악하기 전의 단계에서는, 유기체와 환경이 서로 독립된 것처럼 보임. 즉 각각이 ‘자기 자유 속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나타남
3.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기체와 환경은 서로 본질적 관계(wesentliche Beziehung) 를 맺고 있음. 그러나 이 관계는 아직 ‘개념적’ 수준에서 파악되지 않았기에,
단지 추상적(Abstraktion) 인 형태 — 즉 모호한 연관성 — 으로만 인식됨
🔹 요약
개체(유기체)와 환경(무기적 자연)은 모두
서로에 대해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관계적. 하지만 ‘관찰하는 의식’의 입장에서는 그 관계의 내적 필연성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독립성(자유와 무관성) 이 우세하게 보임. 즉, 관찰은 관계의 필연성을 추상적 수준에서만 인식함
이 대목은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관계가 단순한 외적 상호작용이 아니라, 생명 자체의 욕구와 활동, 다시 말해 생명의 자기운동으로 발전. 이 부분에서 헤겔은 ‘생명(Leben)’을 개념의 자기운동으로 해석하는 첫 단계로 들어서게 됨].

상동 219-220

Hier ist also das Gesetz, als die Beziehung eines Elements auf die Bildung des Organischen vorhanden, welches das elementarische Sein ein mal gegen sich über hat, und das andre mal es an seiner organischen Reflexion darstellt. Allein solche 'Gesetze', dass die Tiere, welche
der Luft angehören, von der Beschaffenheit der Vögel, welche dem Wasser, von der Beschaffenheit der Fische sind, nordische Tiere ein dickbehaartes Fell haben und so fort, zeigen sogleich eine Armut, welche der organischen Mannigfaltigkeit nicht entspricht. Ausserdem dass die organische Freiheit diesen Bestimmungen ihre Formen wieder zu entziehen weiss, und notwendig allenthalben Ausnahmen solcher Gesetze oder Regeln, wie man sie nennen wollte, darbietet, so bleibt dies an denjenigen selbst, welche unter sie fallen, eine so oberflächliche Bestimmung, dass auch der Ausdruck ihrer Notwendigkeit nicht anders sein kann und es nicht über den 'grossen Einfluss' hinausbringt, wobei man nicht weiss, was diesem Einflusse eigentlich angehört und was nicht. Dergleichen Beziehungen des Organischen auf das Elementarische sind daher in der Tat nicht 'Gesetze' zu nennen, denn teils erschöpft, wie erinnert worden, eine solche Beziehung ihrem Inhalte nach gar nicht den Umfang des Organischen, teils bleiben aber auch die Momente der Beziehung selbst gleichgültig gegen einander und drücken keine Notwendigkeit aus.

여기서 ‘법칙’이란, 어떤 원소적 요소(Element)가 유기적 존재(Organisches)의 형성과 맺는 관계로서 제시된다. 즉, 한편으로는 원소적 존재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유기체의 반사적 구조 속에서 드러나는 그러한 관계로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칙들’ — 예를 들어, 공기 속에 사는 동물은 새의 성질을, 물 속에 사는 동물은 물고기의 성질을 갖는다거나, 북방의 동물은 두꺼운 털가죽을 갖는다는 식의 것들 — 은 유기적 다양성에 결코 부합하지 못하는 빈곤함을 즉시 드러낸다. 게다가 유기체의 자유(organische Freiheit)는 이러한 규정들로부터 언제나 자기의 형식을 벗어나 버릴 줄 알며, 따라서 이러한 ‘법칙’ 혹은 ‘규칙’이라 부를 만한 것들은 어디서나 필연적으로 예외를 갖는다. 또한, 설령 그것들이 적용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규정은 너무나 피상적이어서, 그 ‘필연성’이라는 표현 또한 단지 “큰 영향(grosser Einfluss)” 정도의 말로 그칠 뿐이다. 그런데 이 ‘영향’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 여기에 속하는지, 또 무엇이 속하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기적인 것과 원소적인 것의 관계들은 실상 ‘법칙’이라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 앞서 말했듯이 이런 관계들은 내용상 유기적인 존재 전체의 범위를 결코 포괄하지 못하며, 둘째, 이러한 관계의 계기들 자체도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게 남아 있으므로, 그 어떤 필연성(Notwendigkeit)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짜[이 부분에서 헤겔은 자연과학적 ‘법칙의 관찰’이 유기적 생명에 적용될 수 있는가를 문제 삼으며, 핵심 비판은 다음과 같음
(1) 자연과학적 ‘법칙’의 외적 연관성
자연과학은 유기체를 분석할 때, 특정한 ‘원소’(예: 공기, 물, 열, 추위 등)와 생명체의 ‘형태’ 사이의 외적 관계를 찾아내려 함
예를 들어,
공기 속의 동물 → 새,
물 속의 동물 → 물고기,
북쪽 지역의 동물 → 털이 두꺼움,
등과 같은 ‘상관관계적 법칙’을 세우려 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이런 관계는 단순한 경험적 유비에 불과할 뿐, 그것은 유기체의 ‘내적 필연성’을 드러내지 않음
(2) 유기적 자유 (organische Freiheit)
헤겔이 “유기적 자유”라고 부르는 것은, 생명체가 외적 조건들(환경, 기후 등)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고, 자기 고유의 구조와 목적성에 따라 그것들을 ‘자유롭게 변용’하는 능력임. 즉, 생명은 단순히 외적 요소의 기계적 결과가 아니라, 자기 내적인 형식적 원리를 지닌 존재임. 따라서 자연과학적 ‘법칙’이 “환경 → 형태”의 관계로 유기체를 설명하려 할 때, 그 설명은 언제나 예외를 만나게 됨. 왜냐하면 유기체는 동일한 환경 속에서도 자유롭게 다양한 형태를 취하기 때문
(3) 이러한 관계가 ‘법칙’이 될 수 없는 이유
헤겔은 마지막 문장에서 이 관계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법칙(Gesetz)”이 아니라고 단언하는데 이유는 두 가지로  내용적으로 부족함: 유기체의 전체적 구조와 운동을 설명할 수 없음. 형식적으로 필연성 결여: 관계하는 두 항(예: 물–물고기)이 서로 내적 필연 관계가 아닌, 단순 병렬적 대응일 뿐임. 결국 이런 ‘법칙’은 단지 “큰 영향” 정도의 막연한 말로 표현될 뿐, 진정한 과학적 혹은 합리적 인식이 아닙니다.
(4)철학적 함의
이 구절은 헤겔이 “이성의 관찰적 태도”를 넘어 "이성의 자기인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임. 즉, 자연 속에서 법칙을 찾으려는 태도(관찰적 이성)는 외적 인과성만을 다루며, 유기체의 내적 통일성을 파악하지 못함. 이로부터 이성은 점차 “법칙을 발견하는 주체”로서 자기 자신, 즉 이성의 자기 활동을 인식하는 방향으로 이행하는데, 그것이 곧 다음 단계인 “이성, 자기 자신을 찾다”(Die Vernunft, die sich selbst findet)의 전개로 이어짐].

상동 220

Im Begriffe der Säure liegt der 'Begriff' der Base, wie im Begriffe ㅣder positiven die negative Elektricität; aber so sehr auch das dickbehaarte Fell mit dem Norden oder der Bau der Fische mit dem Wasser, der Bau der Vögel mit der Luft, zusammen angetroffen' werden mag, liegt im Begriffe des Nordens nicht der Begriff dicker Behaarung, des Meeres nicht der des Baues der Fische, der Luft nicht der des Baues der Vögel. Um dieser Freiheit beider Seiten gegen einander willen 'giebt' es auch Landtiere, welche die wesentlichen Charaktere eines Vogels, des Fisches haben u. s. f. Die Notwen-digkeit, weil sie als keine innere des Wesens begriffen werden kann, hört auch auf, sinnliches Dasein zu haben und kann nicht mehr an der Wirklichkeit beobachtet werden, sondern ist aus ihr 'herausgetreten'. So an dem realen Wesen selbst sich nicht findend, ist sie das, was 'teleologische Beziehung' genannt wird, eine Beziehung, die dem bezogenen äusserlich und daher vielmehr das Gegenteil eines Gesetzes ist. Sie ist der von der notwendigen Natur ganz befreite Ge-danke, welcher sie verlässt und über ihr sich für sich bewegt.

‘산(acid)’의 개념 속에는 이미 ‘염기(base)’의 개념이 놓여 있으며, ‘양전기(positive Elektricität)’의 개념 속에는 ‘음전기(negative Elektricität)’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털이 두꺼운 동물이 북쪽 지역에서 발견된다거나, 물고기의 구조가 물과, 새의 구조가 공기와 함께 발견된다고 해도, ‘북쪽(Norden)’의 개념 속에는 ‘두꺼운 털’의 개념이 들어 있지 않으며,
‘바다(Meer)’의 개념 속에는 ‘물고기의 구조’의 개념이, ‘공기(Luft)’의 개념 속에는 ‘새의 구조’의 개념이 들어 있지 않다. 바로 이러한 양쪽 측면의 상호 자유[환경과 유기체가 서로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기]때문에, 새나 물고기의 본질적 특징을 가진 육상 동물들도 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 속에서는, 그 ‘필연성’이 더 이상 존재의 내적 본질로서 이해될 수 없으므로, 그것은 감각적으로 주어진 현실 속에서 사라지고, 현실에서 관찰될 수 없게 된다. 즉, 그 필연성은 현실로부터 “벗어나(outgetreten)”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필연성이 현실적 존재 속에서 발견되지 않게 되면, 그것은 소위 '목적론적 관계(teleologische Beziehung)’라고 불리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관계 맺는 대상에게 외적인 것이며, 따라서 오히려 법칙(Gesetz)의 정반대이다. 즉 그것은, 자연의 필연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순수한 사유(Gedanke)이며, 자연을 떠나 그 위에서 자기 자신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사유인 것이다[헤겔이 “유기적 법칙의 관찰”이 실패한 뒤 그 이유를 좀 더 철저히 분석하고 이전 구절의 사유를 한층 더 깊이 밀어붙임. 그는 이제 ‘내적 필연성(Notwendigkeit)’이 결여된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변형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목적론적 관계(teleologische Beziehung)”임
(1) 내적 필연성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헤겔은 먼저 산과 염기, 양전기와 음전기의 예를 드는데, 이들은 상호 내적으로 규정되는 개념들임. 즉, 산은 염기를 통해, 양전기는 음전기를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음. 이런 관계는 진정한 ‘법칙’의 구조, 곧 내적 필연적 관계를 이룸. 반면, '북쪽-두꺼운 털’, ‘물-물고기’, ‘공기-새’와 같은 관계는 단순히 경험적으로 ‘함께 존재’할 뿐, 그 개념들 사이에는 내적 관련이 없음. ‘북쪽’의 개념 속에 ‘두꺼운 털’이 논리적으로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임. 즉, 이런 관계는 경험적 병렬, 외적 결합일 뿐임
(2) 필연성의 소멸 → 목적론으로의 전환
이제 헤겔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는데, 이러한 외적 관계 속에서는 더 이상 내재적 필연성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필연성은 “현실적 존재 안에서 사라진다”. 그 결과, 인간은 그 필연성을 현실 바깥, 즉 사유 속에만 두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목적론적 관계(teleologische Beziehung)”임
(3) 목적론적 관계 = 외적 관계의 사유적 보상
‘목적론적 관계’는 자연적 대상들 간의 내적 필연성이 보이지 않을 때, 사유가 그것을 외부에서 “목적”이라는 형식으로 덧붙이는 것. 즉, “물고기의 지느러미는 물 속에서 헤엄치기 위해 있다”라는 식의 설명이 그것이지만, 헤겔에게 이것은 진정한 법칙이 아님. 왜냐하면 목적론적 관계는 대상의 본성에 내재하지 않고, 대상 외부에서 사유가 덧붙인 설명이기 때문. 그래서 그는 “오히려 법칙의 정반대”라고 말함
(4) 이로부터 이성의 자기 운동으로
이 대목은 『정신현상학』의 “관찰하는 이성”이 실패하고, 그 다음 단계인 “실천적 이성(이성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함)”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임. 자연 속에서 법칙을 관찰하려는 시도 → 실패 (내적 필연성 부재) 사유가 스스로 필연성을 덧붙임 → 목적론. 이제 이성은 자연 밖에서 스스로를 운동시키는 사유, 즉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는 이성으로 이행. 여기서 헤겔은 이성이 자연적 대상에서 자기 근거를 찾는 대신, 그 근거를 자기 안에서, 즉 사유의 자기운동 속에서 찾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음].

상동 220-221

Wenn die vorhin berührte Beziehung des Organischen auf die elementarische Natur das Wesen desselben nicht ausdrückt, so ist es dagegen in dem 'Zweck-begriffe' enthalten. Diesem beobachtenden Bewusstsein zwar ist er nicht das eigene 'Wesen' des Orga-nischen, sondern fällt ihm ausser demselben und ist dann nur jene 'äusserliche' teleologische Beziehung. Allein wie vorhin das Organische bestimmt worden, ist es in der Tat der reale Zweck selbst, denn indem es sich in der Beziehung auf Anderes selbst erhält, ist es eben dasjenige natürliche Wesen, in welchemㅣdie Natur sich in den Begriff reflectiert und die an der Notwendigkeit auseinandergelegten Momente einer Ursache und einer Wirkung, eines Tätigen und eines Leidenden, in Eins zusammengenommen, so dass hier etwas nicht nur als 'Resultat' der Notwendigkeit auf-tritt, sondern, weil es in sich zurückgegangen ist, ist das Letzte oder das Resultat ebensowohl das Erste, welches die Bewegung anfängt, und sich der Zweck, den es verwirklicht. Das Organische bringt nicht etwas hervor, sondern erhält sich nur, oder das was hervorgebracht wird, ist ebensosehr schon vorhanden als es hervorgebracht wird.

앞서 논의된, 유기체와 원소적 자연과의 관계가 그 유기체의 본질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 본질은 오히려 ‘목적 개념(Zweckbegriff)’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관찰하는 의식에게 있어서 이 ‘목적 개념’은 유기체의 고유한 본질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유기체 밖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단지 저 '외적 목적론적 관계’(äusserliche teleologische Beziehung)로 있게 된다. 그러나 앞서 유기적인 것을 규정한 바에 따르면, 유기체는 실제로 현실적 목적(realer Zweck)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유기체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 자기 자신을 개념 속으로 반성(reflektieren)하는 그러한 자연적 존재이며, ‘필연성’ 속에서 분리되어 있던 원인과 결과,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의 두 계기를 하나로 통일한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어떤 것이 단지 필연성의 결과로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 자신 안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마지막 혹은 결과가 동시에 처음[원인]이 된다. 이것이 운동을 일으키고, 이것이 실현시키는 것이 목적(Zweck)이다. 유기체는 어떤 외적인 것을 산출(produzieren)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자기 자신을 보존(erhalten)할 뿐이며, 또 그것이 산출하는 것은, 산출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것이기도 하다[유기적 법칙의 관찰이 실패한 뒤,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목적 개념(Zweckbegriff)’, 즉 목적론적 이성의 자기 이해로 나아가는 핵심 구절
이 대목에서 헤겔은 유기체를 단순한 기계적 결과나 외적 목적의 실현체로 보는 관찰적 시각을 넘어서, 유기체 자체가 ‘목적 그 자체’(reales Zweck)임을 밝히고 있음. 이것이 바로 ‘이성의 목적론적 자기이해’의 핵심
(1) 유기체와 외적 목적론의 차이
관찰적 의식에게 목적은 항상 외적임. 즉, “이 기관은 저 기능을 위해 존재한다”, “이 구조는 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와 같은 설명. 여기서 ‘목적’은 유기체 외부에 있는 원인처럼 취급됨. 하지만 헤겔에게유기체는 본래 그 자체로 목적임.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보존을 통해, 자기 자신을 수단이자 결과로 삼는 운동을 하기 때문
(2) 자기 안으로의 반성 — 개념의 현현
헤겔은 “자연이 자기 자신을 개념 속으로 반성한다”고 표현. 이 말은, 유기체 안에서 자연은 더 이상 외적 인과성의 단순 연쇄(원인–결과)가 아니라, 그 둘을 통일한 자기운동으로 나타난다는 뜻임. 즉 원인(활동하는 것)과 결과(받는 것)의 분리 → 필연성의 수준
원인=결과, 활동=자기보존 → 목적(Zweck)의 수준
따라서 유기체는 자연의 단순 결과가 아니라, 자연이 자기 자신을 내적으로 조직한 형식, 즉 자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원인과 결과로 삼는 자연임
(3) 결과가 곧 원인 — 목적의 변증법
헤겔의 유명한 통찰이 바로 여기에 있음
“Das Letzte oder das Resultat ist ebensowohl das Erste.”
즉, 결과가 동시에 시작점이라는 것. 이것은 목적론적 구조의 자기순환성을 말함. 유기체는 어떤 외적 산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산출하면서 보존하는 존재,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목적”임
(4) “산출되지 않은 산출” – 존재와 생성의 일치
“Das, was hervorgebracht wird, ist ebensosehr schon vorhanden.”
유기체는 자기 자신을 산출하면서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임. 이는 ‘생성’과 ‘존재’의 변증법적 통일을 표현임. 이 점에서 유기체는 단순한 자연적 사물이 아니라, 개념이 현실화된 자연 — 즉, ‘정신의 전단계’로서의 존재로 이해됨. 이로써 이성은 자연의 외부 관찰자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목적적 이성)을 인식하는 주체로 나아가게 됨
요컨대 이 대목은 “유기체 =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목적”이라는 테제를 통해, 이성(사유)의 자기 내재화된 자연형태를 제시하고 있음. 이로부터 『정신현상학』은 다음 단계 — 이성이 자기 자신을 실천적으로, 즉 윤리적·사회적 현실 속에서 인식하는 단계 — 로 넘어감].

상동 221-222

Diese Bestimmung ist, wie sie an sich und wie sie für den Vernunftinstinct ist, näher zu erörtern, um zu sehen, wie er sich darin findet, sich aber in seinem Funde nicht erkennt. Der Zweckbegriff also, zu dem die beobachtende Vernunft sich erhebt, wie es ihr
'bewusster Begriff' ist, ist ebensosehr als ein 'Wirk-liches' vorhanden und ist nicht nur eine äussere Beziehung desselben, sondern sein Wésen. Dieses Wirk-liche, welches selbst ein Zweck ist, bezieht sich zweck-mässig auf Anderes, d. h. seine Beziehung ist eine zufällige, nach dem, was beide unmittelbar sind; unmittelbar sind beide selbstständig und gleichgültig gegen einander.

이 규정[유기체의 목적 개념]을 그 자체로서(an sich) 그리고 이성 본능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좀 더 자세히 고찰해야 한다. 그래야 이성 본능이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만, 그 발견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관찰하는 이성이 스스로 상승하여 파악한 목적 개념은, 그의 의식적 개념일 뿐 아니라, 동시에 현실적인 것으로도 존재한다. 즉, 그것은 단지 외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의 본질인 것이다. 이 현실적인 것, 즉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인 것은, 다른 것과 목적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이 관계는 그들의 즉자적 존재(즉, 그 자체로 있는 것)에 따르면 우연적이며, 양자는 각각 자립적이고 서로에 대해 무관심(gleichgültig)하다[이 문단은 앞서의 유기체 = 현실적 목적” 논의를 '이성의 자기의식적 수준’에서 다시 검토한 것. 즉, 이성은 유기체를 관찰하면서 '목적의 개념’을 포착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이성)의 본질을 아직 인식하지 못함
(1) 이성 본능(Vernunftinstinkt)
헤겔이 말하는 이성 본능(Vernunftinstinkt)은 이성이 아직 자기 자신을 의식적으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합리성을 추구하는 충동을 뜻함. 즉, 인간은 본능적으로 세계에서 목적성과 질서를 찾음. 즉 그는 세계 속에서 “합리적인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 즉 이성의 자기 운동으로는 아직 이해하지 못함. 그는 단지 그것을 외적 현실에서 “관찰”할 뿐임
(2) 관찰하는 이성과 목적 개념의 상승
이성이 자연 속에서 법칙을 관찰하다가, 단순한 인과관계로는 생명체를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닫고 ‘목적 개념’으로 상승했지만 이성은 아직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함. 왜냐하면 그것이 발견한 목적 개념을 자연 속의 대상으로만 보았기 때문. 즉, “목적이 자연 속에 있다”고는 알지만, 그 목적을 만들어내는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아직 보지 못하는 것
(3) 현실적 목적(Wirklicher Zweck)의 모순 구조
헤겔은 이제 유기체(“현실적인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을 인정함. 하지만 동시에, 그 유기체가 타자와 관계 맺을 때, 그 관계는 여전히 우연적이며 외적임.
“Seine Beziehung ist eine zufällige, ... beide sind selbstständig und gleichgültig gegeneinander.” 즉, 유기체는 자기 안에서는 목적적 통일이지만,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기계적, 외적, 우연적인 관계를 맺음. 따라서 이성은 이 목적적 구조 속에서 자신의 진리를 어렴풋이 발견하지만, 그것이 이성 자신(즉, 사유의 자기 운동)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을 여전히 자연의 현상으로만 봄
(4) “자신을 발견하지만,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 문장은 헤겔의 이성 장(章) 전체를 압축한 문장 중 하나입니다.
“wie er sich darin findet, sich aber in seinem Funde nicht erkennt.”
즉,
이성(Vernunft)은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이성의 원리, 목적성, 내적 필연성)을 발견하지만 그 발견을 아직 자기 자신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자연 속의 목적”으로만 이해. 이는 곧, 객관적 이성의 발견 → 주관적 이성의 자각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단계임
요컨대, 이 대목은 이성이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목적적 합리성)을 발견하지만, 아직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 자각하지 못한 상태를 설명. 이로써 『정신현상학』의 전개는 다음 단계 — “이성, 자기 자신을 찾다” (Die Vernunft, die sich selbst findet) — 로 넘어갈 준비를 마침].

상동 222

Das Wesen ihrer Beziehung aber ist ein anderes als sie so zu sein scheinen, und ihr Tun hat einen anderen Sinn als es 'unmittelbar' für das sinnliche Wahrnehmen ist; die Notwendigkeit ist an dem, was geschieht, verborgen, und zeigt sich erst am Ende, aber so dass eben dies Ende zeigt, dass sie auch das Erste gewesen ist.') Das Ende aber zeigt diese Priorität seiner selbst dadurch, dass durch die Veränderung,ㅣwelche das Tun vorgenommen hat, nichts Anderes herauskommt als was schon war. Oder wenn wir vom Ersten anfangen, so geht dieses an seinem Ende oder in dem Resultate seines Tuns nur zu sich selbst zurück und eben hierdurch erweist es sich ein solches zu sein, welches sich selbst zu seinem Ende hat, also als Erstes schon zu sich zurückgekommen, oder an und für sich selbst ist. Was es also durch die Bewegung seines Tuns erreicht, ist es selbst und dass es nur sich selbst erreicht, ist sein 'Selbstgefühl'. Es ist hiermit zwar der Unterschied dessen, was es ist und was es sucht, vorhanden, aber dies ist nur der Schein eines Unterschieds und hierdurch ist es Begriff an ihm selbst.

그러나 그들의 관계의 본질은 그렇게 보이는 그대로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의 행위(운동)도 감각적 지각에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필연성은 일어나는 일 속에 숨겨져 있으며, 그것은 끝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그런데 바로 이 끝은 필연성이 처음부터 시작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끝이 자기 자신의 선행성을 보여주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행위가 취한 변화를 통해서 다른 어떤 것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이 드러날 뿐이다. 혹은 처음(Erstes)에서 시작해서 본다면, 그 처음은 자신의 행위의 끝(결과)에서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바로 그로써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목적으로 갖는 것, 즉 이미 처음부터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 것, 즉 자립적인 것(an und für sich selbst)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그것이 자신의 행위의 운동을 통해 도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 도달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의 '자기감각(Selbstgefühl)’이다. 따라서 그것이 ‘무엇인지’와 ‘무엇을 추구하는지’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이 차이는 단지 차이의 외관(Schein)일 뿐이며, 바로 이 점에서 그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 개념이다[이 대목은 헤겔이 ‘목적’과 ‘결과’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밝히면서, 이성이 관찰하던 목적 개념이 사실상 이성 자신의 자기운동임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철학적 결절점임
(1) 감각적 지각과 필연성의 차이
감각적으로 보이는 것은 원인–결과의 외적 연속임. 그러나 그 안에는 감각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필연성(necessitas)이 숨어 있으며, 이 필연성은 오직 결과(끝)에서만 드러남
👉 즉, 현상 속에 감춰진 본질은 끝에서만 드러난다는 것으로 이건 헤겔 논리학의 핵심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vgl. Wirklichkeit = Einheit von Möglichkeit und Notwendigkeit)
(2) 목적과 결과의 동일성
헤겔은 말함
“Am Ende zeigt sich, dass sie auch das Erste gewesen ist.”
목적이 실현된 결과는 사실상 처음부터 이미 그 목적 자체였음. 즉, 결과는 단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던 것의 드러남. 이것이 바로 목적적 필연성(teleologische Notwendigkeit)의 구조임
Anfang(Zweck)⟶Mittel(Tun)⟶Ende(Resultat)
=Anfang
(3)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존재
목적이 결과와 동일하다는 것은, 이 운동을 이끄는 주체가 자기 자신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았다는 뜻임. 즉, 어떤 외적 타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운동 — 곧 자기 목적적 운동임. 헤겔의 표현으로는:
„welches sich selbst zu seinem Ende hat“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목적으로 갖는 것”
(4) 자기감각(Selbstgefühl)
이 운동이 끝에 이르러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
그 존재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 즉 Selbstgefühl을 갖음. 이건 개념(Begriff)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과정의 정서적·직접적 측면임. 이성은 외부 대상에서 목적을 찾는 듯했지만, 결과적으로 찾은 것은 자기 자신임
(5) 차이의 외관 — 개념의 자기동일성
헤겔은 덧붙임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차이는 단지 외관이다.”
처음(목적)과 끝(결과), 주체와 객체, 목적과 수단의 차이는 현상적(Schein)일 뿐이고, 본질적으로 이 운동은 자기동일적임. 따라서 이 운동은 단순한 자연적 과정이 아니라 Begriff(개념)의 운동임
Begriff=
Zweck – Mittel – Ergebnis의 자기동일적 운동
이 대목은 이성이 자연에서 목적성을 발견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목적적 운동이 곧 이성 자신의 자기운동임을 밝히는 순간임. 이는 헤겔 『정신현상학』에서 관찰적 이성이 실천적 이성으로 이행하는 논리적 전환점이며,
동시에 『논리학』의 목적론(teleologie)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임. 이 부분은 『논리학』의 목적론(der Zweck)과 『정신현상학』 이성 장의 대응 구조로 비교할 수 있음].

상동 222-223

Ebenso ist aber das Selbstbewusstsein beschaffen, sich auf eine solche Weise von sich zu unterscheiden, worin zugleich kein Unterschied herauskommt. Es findet daher in der Beobachtung der organischen Natur nichts Anderes als dieses Wesen; es findet sich als ein Ding, als ein Leben, macht aber noch zwischen dem, was es selbst ist und was es gefunden, einen Unterschied, der aber keiner ist. Wie der Instinct des Tieres das Futter sucht und verzehrt, aber damit nichts Anderes herausbringt als sich, so findet auch der Instinct der Vernunft in seinem Suchen nur sie selbst.

그러나 자기의식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러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지만, 그 구별 속에서 결국 아무런 차이도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자기의식은 유기적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결국 이러한 본질(dieses Wesen)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신을 하나의 사물로서, 하나의 생명으로서 발견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본래 무엇인지(자기 자신)와 관찰을 통해 발견한 것 사이에 하나의 차이를 두는데 —그러나 그 차이는 실제로는 차이가 아니다. 마치 동물의 본능(Instinkt)이 먹이를 찾아 먹지만,
그 행위를 통해 결국 자기 자신[생명 그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산출하지 못하듯이, 이성의 본능도 탐구 속에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발견한다[이 부분은 헤겔 『정신현상학』 「이성」 장의 마지막, 즉 ‘목적론적 관찰’의 결론부에 해당하며, 이 장 전체의 사유를 마무리짓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임. 이성(Verstand)이 자연을 관찰하면서 자신을 외부에 투사해 놓은 것(자연 속의 목적)을 다시 자기 자신으로 되찾는 과정이 여기서 끝남
이 구절은 헤겔이 이성의 운동을 '자기 탐색의 자기귀환’으로 결론짓는 순간임. 즉, 이성이 세계 속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는 통찰임
(1) “차이를 내지만 차이가 나오지 않는다”
sich auf eine solche Weise von sich zu unterscheiden, worin zugleich kein Unterschied herauskommt.
이 문장은 헤겔적 변증법의 정수. 자기의식은 자기 자신을 외부화하여 자기로부터 구별된 대상을 만들어내지만 그 대상은 결국 자기 자신이 낳은 것이므로, 진정한 타자는 아님. 따라서 자기 자신과의 차이 속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됨. 이것이 바로 자기의식의 변증법이고, ‘자기와의 관계 속에서 차이를 만들되, 그 차이가 곧 자기로 회귀하는 운동’임
(2)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이성
앞서 “유기적 자연의 목적성”을 관찰한 이성은, 그 목적성(목적을 위한 구조, 내적 필연성)을 통해 자기 자신의 합리적 구조를 본 것임. 그러므로 이성이 관찰한 것은 자연 속의 이성 — 즉 자연에 내재한 자기 자신이었음. 헤겔이 말하듯:
“Es findet … nichts Anderes als dieses Wesen.”
“그것은 자기 자신의 본질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 즉, 이성은 자연 속의 합리성을 찾다가, 그 합리성 자체가 자기 자신의 이성적 구조임을 깨닫게 됨
(3) ‘이성의 본능’ – Instinkt der Vernunft
이 표현은 헤겔이 의식의 발전을 생명적 비유로 묘사할 때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임. 동물의 본능이 먹이를 찾는 이유는 생존하기 위해서이며, 그 결과는 자기 자신(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것임. 마찬가지로 이성의 본능은 진리·법칙·목적을 탐구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자기 자신(이성)을 발견하는 것임. 즉, 이성의 탐구는 자기 자신을 먹는 생명적 운동 — 자기 소화의 운동임. 이성은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섭취함으로써 자신을 확장
“Wie der Instinct des Tieres das Futter sucht und verzehrt, aber damit nichts Anderes herausbringt als sich...”
이 구절은 『정신현상학』 전체의 구조(정신이 자기 자신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는 운동)를 요약하는 은유
(4)철학적 의의
이 대목은 “관찰적 이성”의 종결점이며, 다음 단계인 실천적 이성(Handelnde Vernunft)으로 넘어가는 논리적 매개 역할을 함. 즉, 이성이 더 이상 외부 세계에서 ‘법칙’을 발견하려 하지 않고, 이제 스스로 ‘법칙’을 설정하고 실현하는 주체로 전환. 이것이 바로 실천적 이성으로의 이행. 이 구절을 중심으로 “이성의 본능(Instinkt der Vernunft)” 개념이 『정신현상학』 전체(특히 정신–종교 장)에서 '이성의 자기귀환’이 ‘정신의 자기전개’로 바뀌는 다리 역할].

상동 223

Das Tier endigt mit dem Selbstgefühle. Der Vernunftinstinct hingegen ist zugleich Selbstbewusstsein, aber weil er nur Instinct ist, ist er gegen das Bewusstsein auf die Seite gestellt und hat an ihm seinen Gegensatz. Seine Befriedigung ist daher durch diesen entzweit; er findet zwar sich selbst, nämlich den Zweck, und ebenso diesen Zweck als Ding, aber der Zweck fällt ihm erst-lich ausser dem Dinge, welches sich als Zweck dar-stellt. Dieser Zweck als Zweck ist zweitens zugleich 'gegenständlich'; er fällt ihm daher auch nicht in sichㅣals Bewusstsein, sondern in einen anderen Verstand.

동물의 생명 활동은 [먹이 섭취, 번식 등 생존 운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유지하며, 그 결과는] 자기 자신을 ‘느끼는’ 수준에서 멈춘다.[즉, 의식 없는 자기확인이다.]반면에 이성의 본능은 동물과 달리 자기의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본능’으로만 작용하기 때문에, 그는 의식과 분리된 한 편에 서 있으며,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대립자(Gegensatz)를 갖는다. 따라서 그의 만족(Befriedigung)은 이러한 분열로 인해 찢어져 있다. 그는 분명 자기 자신, 곧 목적을 찾아내지만, 이 목적은 또한 사물(Ding)로서 주어진다. 그러나 그 목적은 그 사물과는 별개의 것으로 떨어져 있다. 이 '목적으로서의 목적’은 또한 동시에 '대상적(gegenständlich)’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신 안[즉 자기 의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지성’(Verstand)안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이 부분은 바로 앞 구절 — “이성의 본능(Instinkt der Vernunft)”이 자기 자신을 자연 속에서 발견하는 대목 — 에 이어서, 그 발견의 분열을 다루는 문단. 즉, 이성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을 외부의 대상으로서 발견한다는 점에서 분열된 상태에 머문다는 내용
(1)이성은 자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면서도, 그 발견이 진정한 자기 확신으로 이어지지 않음. 왜냐하면 그가 발견한 목적이 여전히 외부의 사물 속에 있고,
또는 자기 외부의 지성(Verstand) 속에 있다고 믿기 때문. 그래서 만족은 항상 불완전한 만족, 즉 Entzweiung 속의 Befriedigung임
(2)"다른 지성(ein anderer Verstand)”의 의미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함. 이성은 아직 자기 자신을 ‘세계의 합리성’의 근원으로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합리성을 다른 존재, 즉 신적 지성, 자연의 이성, 목적의 설계자에게 투사함. 따라서 이 대목은 이미 신학적·형이상학적 관념(예: 신의 목적론)이 인간 이성의 자기소외된 형태임을 예시. 인간이 “신의 이성”을 발견할 때, 사실상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이성적 본질의 투사(projektive Entäußerung)이기 때문. 이성이 이제 곧 깨닫게 되는 것은,  “그 ‘다른 지성’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 깨달음이 바로 다음 장(‘실천적 이성’)에서 전개되는 내용임. 즉, 이성의 자기소외 → 자기회복의 변증법이 여기서 이미 예고되고 있음].

상동 223-224

Näher betrachtet liegt diese Bestimmung ebenso wohl in dem Begriffe des Dinges, dass es 'Zweck an ihm selbst' ist. Es nämlich erhält 'sich'; d. h. zu-gleich, es ist seine Natur, die Notwendigkeit zu verbergen und in der Form 'zufälliger' Beziehung darzu-stellen, denn seine Freiheit oder sein 'Fürsichsein' ist eben dieses, sich gegen sein Notwendiges als ein Gleichgültiges zu verhalten; es stellt sich also selbst als ein solches dar, dessen Begriff ausser seinem Sein falle.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규정[목적으로서의 존재]은 사물(Ding)의 개념 속에도 포함되어 있다. 즉, 사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Zweck an ihm selbst) 이다.
→ ‘목적’이라는 규정은 단지 유기체나 생명체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일반, 즉 사물 그 자체의 본질적 구조로 확장됨. 모든 사물은 스스로 존재를 유지하며, 그 자체 안에 자기목적성을 지님

왜냐하면 사물은 자기를 유지한다(‘sich erhält’).
즉, 그것의 본성은 필연성을 감추고, 그것을 우연적 관계의 형태로 드러내는 것이다.
→ 모든 존재자는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려 하지만 이 자기 유지의 운동(내적 필연성)은 감추어져 있고, 겉으로는 마치 단순한 외적 우연 관계처럼 나타남. 예: 물이 끓는 것은 온도 변화라는 ‘우연한 조건’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물 자체의 본성(필연성)이 그러한 변화를 필연적으로 일으키는 것임

왜냐하면 사물의 자유(Freiheit), 즉 자기-존재(Fürsichsein)란 바로 자신의 필연(Notwendiges)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자유”란 여기서 인간의 의지적 자유가 아니라, 존재자의 자립성임. 사물은 자기 내적 필연성에 의해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외부적으로 드러낼 때는 마치 그 필연성이 아무 관련 없는 것처럼 보여 줌. 즉, “자기 안의 법칙으로 존재하면서도, 외부적으로는 우연적 존재처럼 나타나는 것” — 이것이 사물의 자유임

따라서 사물은 자기 자신을 그런 존재로 드러낸다 —
곧, 그 개념(Begriff)이 그 존재(Sein) 밖에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로.
→ 사물은 본래 개념(즉, 내적 필연성)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만, 감각적으로 드러날 때는 마치 그 개념이 자신과 무관하게 외부에 있는 것처럼 나타남. 즉, 존재와 개념이 분리된 듯이 보이는 것이 자연적 사물의 현상형식임
[이 문단은 앞의 “이성의 본능(Instinkt der Vernunft)” 단락을 마무리하면서, 이성이 관찰하는 “목적성(Zweckmäßigkeit)”이 사실상 자연물(Ding) 자체의 구조임을 밝히는 대목. 즉, ‘목적 개념(Zweckbegriff)’이 단지 의식의 외부적 사유가 아니라, 사물 자체(Ding an sich selbst)의 내적 구조로 드러난다는 것을 설명함. 그런데 이 ‘사물 자체’ 역시 자기 안의 필연성을 가려서 우연처럼 보이게 만드는 존재이기에, 이성은 여전히 진리를 왜곡된 형태로만 파악하게 됨
존재와 개념의 분리(Entzweiung)
이성은 자연을 관찰하면서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함. 즉, 사물의 개념(그것이 왜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가)과 사물의 현존(그것이 그렇게 ‘있는’ 상태)이 분리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 이성은 그래서 사물의 내적 필연성을 ‘외부의 목적’—즉 신의 계획이나 자연의 이성—으로 투사하게 됨. 그러나 실제로 그 필연성은 사물 안에 내재해 있음
이 구절은 자연적 존재의 자기 목적성을 통해, 이성이 자연 속 필연성을 인식하려 하지만 아직 외적으로만 본다는 상황을 정리함. 여기서 “사물은 자기 자신을 보존한다(Es erhält sich)”는 말은, 『논리학』의 실체(Substanz) 개념이 『정신현상학』에서 목적(Zweck) 개념으로 변형되어 나타난 것임. 즉, 모든 존재는 자기 안에 목적적 운동을 지니며, 이성은 이를 “자기 자신과 닮은 것”으로서 인식하지만, 아직은 그것을 자기 밖의 우연적 질서로서만 봄. 이 분열된 인식은 곧 다음 단계인 👉 ‘실천적 이성 (die praktische Vernunft)’ 으로의 이행을 준비함. 거기서 이성은 “자연 속 목적”을 더 이상 외부의 것이 아니라 “내가 세우는 목적”으로 자각하게 됨].

상동 224

Ebenso hat die Vernunft die Notwendigkeit, ihren eigenen Begriff als ausser ihr fallend hiermit als 'Ding' anzuschauen, als ein solches, gegen das sie, und das hiermit gegenseitig gegen sie und gegen seinen Begriff, 'gleichgültig' ist. Als Instinct bleibt sie auch innerhalb dieses Seins oder der Gleichgültigkeit stehen und das Ding, welches den Begriff ausdrückt, bleibt ihm ein Anderes als dieser Begriff, der Begriff ein Anderes als das Ding. So ist das organische Ding für sie nur so Zweck an ihm selbst, dass die Notwendigkeit, welche in seinem Tun als verborgen sich darstellt, indem das Tuende darin als ein gleichgültiges Für-sichseiendes sich verhält, ausser dem Organischen selbst fällt.

마찬가지로, 이성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의 개념(Begriff)을 자기 밖에 떨어져 있는 것, 곧 '사물(Ding)’로 바라보게 된다.
→ 즉, 이성은 자기 자신의 본질(합리적 목적성)을 자연 속에서 관찰하지만, 그것을 자기 내면의 이성적 본성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외부의 “사물” 속에 객관화된 형태로 봄. 이것이 바로 이성이 자기 자신을 대상화(Vergegenständlichung)하는 방식이며, 동시에 소외의 기초임

그 사물은 이성에 대해 무관한(Gleichgültig) 존재로 나타나며, 이성 또한 그것에 대해 무관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그 사물은 자기 자신의 개념(Begriff)에 대해서도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 이성은 자기 개념이 외부의 사물 속에 객관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 사물은 마치 이성과 아무 상관없는 외적 존재로 나타남. 사물 자체도 자기의 개념(목적성)과 분리된 것처럼 보임. 즉, 이성과 사물, 사물과 그 개념이 서로 분리되어 각각 독립된 것처럼 보임

이성이 본능(Instinkt)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이 존재(Sein) — 즉, 이 무관성(Gleichgültigkeit) 속에 머물러 있다.
→ 이성이 단순한 탐구 본능으로 작동하는 한,
이 분열된 관계(이성 vs. 사물, 개념 vs. 존재)를 그 자체로 그대로 받아들임. 즉, 이성은 아직 반성적으로 “이 무관성이 자기 자신의 산물임”을 자각하지 못함

그리고 그 개념을 표현하는 사물은 여전히 그 개념과 다른 것으로 남는다. 그 개념 또한 그 사물과는 다른 것으로 남는다.
→ 이성은 사물 속에서 자기 개념(즉, 목적성)을 보지만, 그 개념과 사물이 하나의 동일한 실체임을 인식하지 못함. 따라서 “사물”은 단지 외적 현상으로, “개념”은 그에 대한 주관적 설명으로만 이해됨. 이성은 아직 개념과 존재의 통일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 있음

따라서 유기적인 사물은 이성에게 있어서 그 자체 안에 목적을 지닌 존재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 활동 속에 숨겨져 있는 것으로 제시된 필연성(Notwendigkeit)은
행위하는 존재[즉, 유기체]가 무관한 독립자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필연성은 결국 유기체 자체 바깥으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이해된다.
→ 유기체의 행위(예: 생명 유지, 자기 보존)는 사실상 내적 필연성의 표현이지만, 이성은 그것을 우연적 과정처럼 보며, 그 필연성을 유기체 밖, 즉 외부의 목적이나 신적 지성에 돌람. 결국, 자연의 목적성은 여전히 외재적 목적으로 해석됨
[이 구절은 헤겔 『정신현상학』의 “관찰하는 이성(Beobachtende Vernunft)” 마지막 단락 중에서도,
이성이 자기 자신을 “자연의 목적성” 속에서 관찰하지만 — 여전히 그것을 자기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는 한계, 즉 이성의 자기소외(Entfremdung)를 명확히 드러내는 결정적인 부분. 이 대목은 “이성의 본능(Instinkt der Vernunft)”이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만, 그 발견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사물(Ding) 속의 “외적인 목적성”으로 취급하는 상태를 분석
(1) 이성의 자기소외
이성의 본질은 ‘개념(Begriff)’, 즉 필연성과 목적성의 통일임. 그러나 이성은 자연을 관찰할 때 자기의 개념을 외부의 사물로 투사함. 그 결과, 이성 ↔ 사물, 사물 ↔ 개념이 서로 무관하게 분리된 것처럼 보임→ 이성은 자기 자신을 자기 밖에서 바라보는 상태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성의 소외(Entfremdung)임
(2) “무관성(Gleichgültigkeit)”의 의미
“Gleichgültig”는 단순히 ‘무심하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관계는 맺지만, 내적 통일은 없는 상태를 의미. 즉, 이성과 자연, 개념과 사물은 서로 관계하고 있으면서도 진정한 내적 통일성을 결여한 상태에 있음→ 이성은 자연을 관찰하면서 “관계”를 인식하지만,
그 관계를 단순한 외적 상호작용으로만 봄. 이때 목적성은 내재적 필연성이 아니라 외적 의도성으로 오해됨
(3) 유기체의 목적성에 대한 오해
유기체의 자기유지 행위는 내적 필연성의 작용이지만,
이성은 그것을 “우연한 적응”이나 “외적 목적 실현”으로 봄. 그래서 그 안에 숨어 있는 필연성(Notwendigkeit)은 유기체 자체가 아니라, 그 밖의 어떤 힘(자연의 이성, 신의 목적)에 속한다고 여김→ 결국 이성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필연적 구조를
외부의 존재로 투사(projizieren)하고, 그로 인해 자기 자신과 대상 사이에 거리(Entzweiung)를 유지]

상동

-- Da aber das Organische als Zweck an
ihm selbst sich nicht anders verhalten kann denn als wechein solches, so ist auch dies erscheinend und sinnlich gegenwärtig, dass es Zweck an ihm selbst ist, und es wird so beobachtet. Das Organische zeigt sich als ein
Sichselbsterhaltendes und Insichzurückkehrendes und Lurückgekéhrtes. Aber in diesem Sein erkennt dieses beobachtende Bewusstsein den Zweckbegriff nicht, oder dies nicht, dass der Zweckbegriff nicht sonst irgendwoㅣin einem Verstande, sondern eben hier existiert und als ein Ding ist. Es macht zwischen dem Zweckbe-griffe und zwischen dem Fürsichsein und Sichselbst-erhalten einen Unterschied, welcher keiner ist. Dass er keiner ist, ist nicht für es, sondern ein Tun, das zufällig und gleichgültig gegen das, was durch dasselbe zu stande kommt und gegen die Einheit erscheint, welche doch beides zusammenknüpft; - jenes Tun und dieser Zweck fallen ihm auseinander.

그러나 유기적인 것은 그 자체가 자기 안에서의 목적(Zweck an ihm selbst) 이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 사실 — 즉, 유기체가 자기 자신 안의 목적이라는 사실 — 은
감각적으로 현존하고 이성은 그것을 그러한 방식으로 관찰한다.
→ 유기체는 단순히 외적 작용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실현하는 존재임. 따라서 이성은 감각적 관찰 속에서도 “유기체가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운동을 보게 됨

유기체는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것,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것, 그리고 그리하여 이미 되돌아온 존재(Zurückgekehrtes)로 나타난다.
→ 생명체는 스스로의 활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유지하며, 그 활동의 결과는 항상 자기 자신으로 귀결됨. 즉, 행위와 결과가 동일한 것, 원인과 목적이 하나인 존재,
이것이 바로 유기체의 ‘목적적 존재’의 본질임

그러나 이러한 존재[즉,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유기체]속에서, 이 관찰하는 의식은 그 목적 개념을 인식하지 못한다.
→ 이성은 유기체의 목적적 구조를 눈앞에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성이 이성 자신이 가진 개념적 구조와 동일한 것임을 자각하지 못함

즉, 그것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 목적 개념이 어디 먼 지성[예컨대 신의 존재]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그리고 하나의 사물(Ding) 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 이성은 여전히 “목적 개념”을 외부의 어떤 초월적 지성(Verstand, 신적 이성)에 속한 것으로 봄. 하지만 사실상 그 목적 개념은 자연적 사물 자체 속에 내재해 있음. 헤겔은 바로 이것이 이성의 자기소외(Entfremdung) 라고 지적하는 것

이성은 '목적 개념’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함(Fürsichsein)’ 및 ‘자기 자신을 보존함(Sichselbsterhalten)’
사이에 차이를 두지만 사실 이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 차이이다.
→ 유기체의 자기 보존 활동은 바로 그 자체로 목적 개념의 현현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찰하는 이성은
‘유기체의 활동’과 ‘목적 개념’을 서로 다른 두 것으로 봄. 즉, “개념”과 “현상”을 분리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성의 잘못된 이중성임. 그는 개념을 외부의 관념으로 두고, 실제 활동(유기체의 자기 보존)을 단순한 현상으로만 봄

그러나 그 차이가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성에게 드러나 있지 않다.
→ 이성은 그 분리가 허상임을 보지 못함. 그는 자기 자신(이성의 개념)이 이미 자연 속에 실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함

오히려 이성에게 있어서 행위(Tun)는 그 결과와 무관한 우연적이고 무심한 행위(zufällig und gleichgültig) 로 보인다. 그리고 그 행위와 결과를 묶어주는 통일성[목적과 실현의 내적 연관성]은
그에게 단지 ‘겉으로만 나타나는 것(erscheint)’ 으로 남는다.
→ 이성은 유기체의 행위를 내적 필연성의 작용으로 보지 않고, 그저 외적 조건 속에서 일어나는 우연한 과정으로 봄. 이 행위와 그 결과 사이의 진정한 통일(즉, 목적적 자기실현)은 그에게 단지 ‘겉모습’으로만 주어짐

그리하여 이성에게 있어서 그 행위(Tun) 와 그 목적(Zweck) 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이것이 바로 이성의 자기소외의 완성된 형태임
[이 구절은 헤겔 『정신현상학』의 “관찰적 이성(Die beobachtende Vernunft)” 장의 마지막 꼭지 중 하나로, 이성이 유기체(Organisches)를 ‘목적으로서의 존재(Zweck an ihm selbst)’로 관찰은 하지만,
그 관찰 속에서 자기 자신(즉, 목적 개념)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부분
유기체의 목적성은 이성의 구조와 동일. 유기체는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존재. 이는 이성의 자기관계(자기 자신을 아는 이성)와 구조적으로 동일함. 그러나 이성은 그 동일성을 인식하지 못함. 이성은 유기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봄. 즉, 이성은 자기 자신을 자기 바깥에서 관찰한다. 따라서 이성은 자기 자신과 분리된 채, 소외된 인식에 머뭄.  이성은 “자연 속의 목적성”을 보지만, 그 목적이 자기 자신(이성의 개념)이라는 것을 모름. 그래서 행위와 목적, 주체와 객체, 개념과 실재가 분열되어 보임.
이성이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을 외부적으로 발견하는 한, 그것은 여전히 관찰자(der Beobachter)에 머뭄. 그러나 이제 이성은 깨닫기 시작함. ‘그 목적은 내 안에 있다. 내가 바로 그 개념이다.’ 이 깨달음이 바로 이성의 실천화, 즉 자기 자신을 세계의 합리성의 주체로 자각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계기임].

상동 224-225



https://youtu.be/p85m_yPqhkI?si=4Ol-mPg3L4VF-t-k

정신현상학 강독32 : 자연관찰에서의 혼란, 이름없는 쥬드 20251002144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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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강독 : 관찰하는 이성

헤겔 Hegel 2025. 9. 27. 01:5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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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A.) Vernunft
B. Selbstbewusstsein

텍스트 :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아카데믹판 h.v. G.J.P.J. Bolland(Leiden A.H. Adriani, 1907)

A.Bewusstsein
I.Die sinnliche Gewissheit oder das Dieses und das Meinen
II.Die Wahrnehmung oder das Ding und die Täuschung    
III.Kraft und Verstand, Erscheinung und uebersinnliche Welt  S.117-
B. Selbstbewusstsein
IV.Die Wahrheit der Gewissheit seiner Selbst
a.Selbstständigkeit und Unselbstständigkeit des Selbstbewusstseins ; Herrschaft und Knechtschaft S.151-
b.Freiheit des Selbstbewusstseins ; Stoicismus, Skepticismus und das unglückliche Bewusstsein S.164-
C.(AA.) Vernunft
V.Gewissheit und Wahrheit der Vernunft S.194-
(A)Beobachtende Vernunft S.205-

*게시된 번역과 해설은 AI를 바탕으로 제가 수정•편집한 것입니다. 다른 번역이나 해설 제안 적극 환영합니다.

Dieser Idealismus ist in diesem Widerspruche, weil er den 'abstracten Begriff' der Vernunft als das Wahre behauptet, daher ihm unmittelbar ebensosehr die Realität als eine solche entsteht, welche vielmehr nicht die Realität der Vernunft ist, während die Vernunft zugleich alle Realtät sein sollte; diese bleibt ein unruhiges Suchen, welches in dem Suchen selbst die Befriedigung des Findens für schlechthin unmöglich erklärt. - So inconsequent aber ist die wirkliche Vernunft nicht, sondern nur erst die 'Gewissheit', alle Realität zu sein, ist sie in diesem 'Begriffe' sich bewusst als 'Gewissheit, als Ich noch nicht die Realität in Wáhrheit zu sein und ist getrieben, ihre Gewiss-heit zur Wahrheit zu erheben, und das 'leere' Mein zu erfüllen.

이 관념주의는 이 모순 속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의 ‘추상적 개념’을 참된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그에게 즉각적으로 성립하는 현실성은 오히려 이성의 현실성이 아닌 것인 반면, 이성은 동시에 모든 현실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 관념주의는 하나의 불안한 탐구로 머물며, 그 탐구 속에서조차 찾음의 만족을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의 이성은 그렇게 모순적으로 일관성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현실이다’라는 확신에 머무르는 한에서만, 이성은 스스로 ‘확신’으로서만 의식될 뿐, 아직 ‘실제로는 현실이 아님’을 자각한다. 그리고 이 확신을 참된 진리로 끌어올리며, 그 ‘빈 나의 것(Mein)’을 채우도록 밀려나게 된다[이 대목은 헤겔이 빈 이상주의(leerer Idealismus)의 자기모순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참된 이성’의 운동을 제시하는 부분
1.빈 이상주의의 모순
추상적 개념(“나는 모든 현실이다”)만을 붙잡다 보니, 실제로는 자기와 무관한 현실(감각적 현실, 사물 자체 등)을 여전히 본질로 두게 됨. 이로써 이성은 “모든 현실이 나다”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나 아닌 현실이 있다”라고 말하는 자기모순에 빠짐
그래서 ‘탐구(현실을 채우려는 시도)’를 계속하지만, 그 탐구가 결코 만족에 이를 수 없음을 스스로 선언하는 셈임
2.헤겔의 전환
그러나 “실제 이성”은 단순히 이런 추상적 확신에 머무르지 않음. 처음에는 단순히 “나는 모든 현실이다”라는 확신만 있으나, 곧 스스로 "아직은 진리로서 현실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자각을 하게 됨. 이 자각은 이성을 추동하여 자기 확신을 ‘진리’로 고양하고, 추상적 “나의 것(Mein)”을 채우게 만듬
✅ 요약:
헤겔은 이 구절에서, “빈 이상주의”는 추상적 자기확신에 머물기 때문에 끝없는 탐구 속의 불만족에 빠진다고 비판. 그러나 참된 이성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확신이 ‘아직은 진리가 아님’을 깨닫고, 그 확신을 구체적 현실 속에서 실현하려는 운동으로 나아감].

상동 204

Dieses Bewusstsein, welchem das Sein die Bedeutung des 'Einen' hat, sehen wir nun zwar wieder in das Meinen und Wahrnehmen hineingehen, aber nicht als in die Gewissheit eines nur 'Anderen', sondern mit der Gewissheit, dieses Andere selbst zu sein. Früher ist es ihm nur 'geschehen' ., manches an dem Dinge wahrzunehmen und zu 'erfahren'; hier stellt es die Beobachtungen und die Erfahrung selbst an.

이 존재(Sein)가 ‘하나(Eines)’라는 의미를 지니는 이 의식이 이제 우리는 다시 ‘심상(Meinen)’과 ‘지각(Wahrnehmen)’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다른 것’에 대한 확실성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다른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확실성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전에는 사물에 대해 이것저것을 지각하고 ‘경험한다’는 것이 그저 우연히 ‘일어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식이 스스로 관찰을 수행하고 경험을 산출한다[해설
1.‘존재가 하나라는 의미를 지니는 의식’
여기서 의식은 존재(Sein)를 단순히 외부의 어떤 낯선 것, “다른 것”으로 보지 않고, 그것이 하나로 통일된 것(Eines)이라는 의미로 파악함. 즉, 존재와 자신이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진 상태임
2.의견과 지각으로의 귀환
의식은 다시 ‘의견(즉각적이고 주관적인 확신)’과 ‘지각(대상을 받아들이는 행위)’의 단계로 돌아가지만 단순히 외부 사물에 대한 확실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각된 다른 것이 사실은 자기 자신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새로운 자기 확신을 갖고 돌아가는 것임
3.수동적 경험에서 능동적 관찰로
이전에는 사물이 우연히 주어지고, 의식은 그냥 ‘겪는’ 존재였음. 즉, 사물과 경험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대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였음. 그러나 이제는 의식이 자발적으로 관찰을 수행하고 경험을 구성함. 이는 곧 자연과 대상을 단순히 겪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태도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
4.정리
이 구절은 의식이 더 이상 수동적으로 세계를 맞이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속에서 능동적으로 관찰하고 경험을 만들어내는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명. 이것은 과학적 관찰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음].

상동 205

Meinen und Wahrnehmen, das für uns früher sich aufge-hoben, wird nun von dem Bewusstsein für es selbst aufgehoben; die Vernunft geht darauf, die Wahrheit zu 'wissen', was für das Meinen und Wahrnehmen ein Ding ist, als Begriff' zu finden, d.h. in der Ding-heit nur das Bewusstsein ihrer selbst zu haben. Die Vernunft bat daher jetzt ein allgemeines 'Interesse' an der Welt, weil sie die Gewissheit ist, Gegenwart in ihr zu haben, oder dass die Gegenwart vernünftig ist. Sie sucht ihr Anderes, indem sie weiss, daran nichts Anderes als sich selbst zu besitzen; sie sucht nur ihre eigene Unendlichkeit.

이전에 우리에게 있어서 이미 지양된 바 있는 의견(Meinen)과 ‘지각(Wahrnehmen)’이 이제는 의식 자신에게도 지양된다. 이성은 진리를 '알고자’ 나아가는데, 곧 의견과 지각에 있어 사물인 것을 개념으로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즉 사물성(Dingheit)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의식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이성은 세계에 대한 보편적 ‘관심(Interesse)’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성은 세계 속에서 자기의 현재를 가지는 확신, 혹은 현재가 이성적이라는 확신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자기의 ‘다른 것’을 찾는데, 그것은 곧 그 다른 것 안에 자기 자신밖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이성이 찾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무한성이다[해설
1.Meinen und Wahrnehmen의 지양
앞에서 '의견’과 ‘지각’이 그 자체의 한계를 드러내며 넘어섰는데, 이제 의식 자신도 그것들을 ‘지양된 것’으로 파악함. 즉, 단순한 주관적 확신이나 외적 인상에 머무르지 않고,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려 함
2.이성이 알고자 하는 것
이성은 사물을 단순히 ‘거기에 있는 것’으로 두지 않고, 그것을 개념(Begriff) 속에서 파악하고자 함. 즉, 사물의 본질을 자기와의 관계, 자기 인식 속에서 이해하려는 것. 사물 속에서 곧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
3.세계에 대한 보편적 관심
이성은 이제 세계 전체에 관심을 가짐. 왜냐하면 이성은 세계 속에 자기 자신이 실재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며, 세계가 근본적으로 합리적이라는 믿음을 갖기 때문잉
4.자기 자신을 찾는 운동
이성이 세계에서 찾는 ‘다른 것’은 사실상 자기 자신임. 세계 속에서 마주치는 타자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을 반영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성은 이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의 무한성을 추구하는 것임
5.정리
이 구절은 의식이 ‘이성’으로 전환하는 핵심 지점을 보여줌. 더 이상 사물을 ‘그냥 있는 것’(Meinen, Wahrnehmen)으로 두지 않고, 사물 속에서 개념을 찾으며, 그 개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함. 이로써 이성은 세계에 대해 보편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며, 세계가 근본적으로 합리적이라는 확신 속에서 움직임. 궁극적으로 이성이 찾는 것은 세계 속에 드러난 자기 자신의 무한성임].

상동

Zuerst sich in der Wirklichkeit nur ahnend, oder sie nur als das 'Ihrige' überhaupt wissend, schreitet sie in diesem Sinne zur allgemeinen Besitznehmung des ihr versicherten Eigentums, und planzt auf alle Höhen und in alle Tiefen das Zeichen ihrer Souveränität. Aber dieses oberflächliche 'Mein' ist ㅣnicht ihr letztes Interesse; die Freude dieser allgemeinen Besitznehmung findet an ihrem Eigentume noch das fremde Andere, das die abstracte Vernunft nicht an ihr selbst hat.

처음에 이성은 현실성 속에서 단지 막연히 예감하듯이 자신을 느끼거나, 혹은 그것을 단순히 ‘자기의 것’ 일반으로만 알 뿐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이성은 자기에게 보장된 소유물에 대한 보편적 소유화( Besitznehmung )로 나아가며, 모든 높고 깊은 곳마다 자기 주권의 표식을 심는다. 그러나 이러한 피상적 ‘나의 것(Mein)’은 이성의 최종적 관심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보편적 소유화의 기쁨 속에서조차 이성은 여전히 자기 소유물 안에서 낯선 타자(Andere)를 발견하기 때문인데, 추상적 이성은 자기 자신 안에서는 그런 타자를 갖지 않는다[해설
1.막연한 자기-예감
처음에 이성은 현실성 속에서 자신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렴풋이 예감하는 수준에 머뭄. 현실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파악하긴 하지만, 이는 매우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임
2.보편적 소유화
이런 태도에서 이성은 현실 세계 전체를 자기의 소유물로 삼으려 함. “높고 깊은 곳마다 주권의 표지를 세운다”는 표현은, 이성이 모든 영역(자연, 인간, 문화 등)에 자기 이성을 투사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라고 선언하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줌
3.피상적 ‘나의 것’
그러나 이러한 ‘소유 선언’은 피상적인 단계에 불과함. 단순히 모든 것을 “내 것”이라 부른다고 해서, 곧바로 그것이 진정한 자기 자신과 합일되는 것은 아님
4.타자의 발견
이성은 자신이 차지한 소유물 속에서 여전히 자기와 낯선 다른 것, 즉 자기에 속하지 않는 요소를 발견하게 됨. 추상적 이성은 자기 자신 안에서는 그런 ‘타자’를 가지지 않으므로, 세계 속에서 이 타자의 문제와 마주하게 되는 것
5.정리
이 구절은 이성이 세계를 단순히 “나의 것”으로 소유화하려는 첫 단계와 그 한계를 보여즴. 이성은 세계 전체를 자기 소유로 선언하며 주권을 과시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소유물 속에 여전히 낯선 타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함. 따라서 단순한 ‘소유화’와 ‘추상적 자기 동일성’은 이성의 최종 목적이 될 수 없으며, 더 깊은 자기-타자 변증법을 통해 나아가야 함을 암시함].

상동 205-206

Die Vernunft ahnet sich als ein tieferes Wesen, denn das reine Ich 'ist' und muss fordern, dass der Unterschied, das mannigfaltige Sein, ihm als das Seinige selbst werde, dass es sich als die Wirklichkeit anschaue und sich als Gestalt und Ding gegenwärtig finde. Aber wenn die Vernunft alle Eingeweide der Dinge durchwühlt und ihnen alle Adern öffnet, dass sie sich daraus entgegenspringen möge, so wird sie nicht zu diesem Glücke gelangen, sondern muss an ihr selbst vorher sich vollendet haben, um dann ihre Vollendung erfáhren zu können.

이성은 자기 자신을 순수한 ‘나(Ich)’ 그 자체 이상의 더 깊은 본질로 예감하며, 따라서 차이와 다채로운 존재(Sein)가 자기 자신의 것으로 되어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이성은 자신을 현실성으로 관조하고, 자기 자신을 형상(Gestalt)과 사물(Ding)로서 현존하는 것으로 발견한다. 그러나 이성이 사물들의 모든 내장을 뒤지고, 그 모든 혈관을 열어, 마치 그 속에서 자신이 튀어나오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이성은 그 행복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이성은 먼저 자기 자신 안에서 완성되어야만, 그 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완성을 경험할 수 있다[이 대목은 이성이 자기 자신을 더 깊은 본질로 예감하면서도, 외부 탐구만으로는 그 충족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하는 구절임
1.이성의 예감 (ahnen)
이성은 단순한 주체적 ‘나’ 이상의 깊은 본질임을 스스로 예감함. 따라서 외부 세계의 다양성과 차이가 자기 자신의 것으로 드러나기를 요구함. 즉, “세계 전체가 곧 나의 현존”이라는 확신을 추구
2.자기 자신을 현실성으로 보고자 하는 이성
이성은 자신을 단순한 내적 주체가 아니라, 외부적 사물과 구체적 형상 속에서 만나고자 함.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외부 세계 안에서 ‘객관적으로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하려는 충동이 있음
3.사물 해부의 한계
이성은 자연과 사물의 심층을 파헤치고(“모든 내장을 뒤지고, 모든 혈관을 연다”),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바람. 이는 곧 자연과학적 해부·분석의 은유로 읽을 수 있음. 하지만 이 길은 이성에게 진정한 충족(“행복”)을 주지 못함
4.내적 완성의 필요
이성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세계 속에서 만날 수 있으려면, 먼저 자기 자신 안에서 완결(Volendung)을 성취해야 함. 즉, 내적 자기 성찰과 자기 개념의 확립이 선행되어야, 그 다음에야 외부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음
5.정리
이 구절은 외부 탐구(자연 해부, 분석)만으로는 이성이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없고, 먼저 자기 자신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 이는 단순한 경험적 관찰의 한계를 넘어, 이성이 자기 본질을 스스로 확립해야 한다는 철학적 요구로 이어짐].

상동 206

Das Bewusstsein 'beobachtet'; d. h. die Vernunft will sich als seienden Gegenstand, als wirkliche, sinnlich gegenwärtige Weise finden und haben. Das Bewusstsein dieses Beobachtens meint und sagt nur, dass es nicht sich selbst' , sondern im Gegenteil 'das
Wesen der Dinge als der Dinge' erfahren wolle. Dass dieses Bewusstsein dies meint und sagt, liegt darin, dass es Vernunft 'ist', aber ihm die Vernunft noch nicht als solche Gegenstand ist. Wenn es die 'Ver-nunft' als gleiches Wesen der Dinge und seiner selbst wüsste, und dass sie nur in dem Bewusstsein in ihrer eigentümlichen Gestalt gegenwärtig sein kann, so würde es vielmehr in seine eigene Tiefe steigen und sie darin suchen, als in den Dingen. Wenn es sie in dieser gefunden hätte, würde sie von da wieder heraus an die Wirklichkeit gewiesen werden, um in dieser ihren sinnlichen Ausdruck anzuschauen, würde aber ihn sogleich wesentlich als 'Begriff' nehmen.

의식은 ‘관찰한다.' 즉 이성은 자신을 존재하는 대상, 실제적이고 감각적으로 현존하는 방식으로 발견하고 소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관찰의 의식은 단지 이렇게 ‘의도하고 말할’ 뿐이다. 곧 자기 자신을 경험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로서의 사물들의 본질’을 경험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도와 말하기가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곧 이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은 아직 자기 자신을 그런 대상으로 가지지 못한 상태에 있다. 만약 의식이 이성을, 사물들과 자기 자신 모두의 동일한 본질임을 알고, 또 이성이 오직 의식 속에서 그 고유한 형식으로 현존할 수 있음을 안다면, 의식은 오히려 사물들 속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심연 속으로 내려가 그 이성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곳에서 이성을 발견한다면, 거기서 다시 현실성으로 이끌려와 이성이 그 현실 속에서 감각적 표현을 가지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것은 곧바로 그 감각적 표현을 본질적으로 ‘개념(Begriff)’으로 이해할 것이다[해설
1.관찰(Beobachten)로서의 이성
의식은 ‘관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감각적으로 주어진 현실 속에서 발견하려 함. 그러나 이 의식은 여전히 “나는 자기 자신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본질을 보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2.왜 그런가?
그 이유는 단순한데, 그것은 이성이기 때문임. 하지만 문제는, 이성이 아직 자기 자신을 명시적으로 대상으로 삼지 못했다는 데 있음. 만약 이성이 자기 본질을 알게 된다면 이성이 사물과 자기 자신 모두의 동일한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의식은 더 이상 바깥의 사물들 속에서 이성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내면 깊이로 향할 것
3.내면에서 다시 현실로
만약 의식이 내면에서 이성을 발견한다면, 거기서 다시 현실로 나아가, 이성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감각적으로 표현되는지를 보게 됨. 그러나 이제는 그 감각적 현실을 단순히 ‘사물’로 두지 않고, 그것을 곧바로 개념으로 파악하게 될 것임
4.정리
이 구절은 관찰 의식의 모순을 보여주는데, 의식은 사물 속에서 본질을 찾으려 하지만, 사실 그 본질은 자기 자신의 이성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관찰은 외적 대상만을 향하게 됨. 그러나 자기 안에서 이성을 발견한다면, 현실 속의 감각적 대상 역시 개념으로 파악된 자기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음.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성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지이며, 그렇지 못할 때는 관찰이 외부 탐구에 머물고, 그럴 때 이성은 자기 본질을 놓치게 됨].

상동

Die ㅣVernunft, wie sie 'unmittelbar' als die Gewissheit des Bewusstseins alle Realität zu sein auftritt 1), nimmt ihre Realität im dem Sinne der 'Unmittelbarkeit des Seins' , und ebenso die Einheit des Ich mit diesem gegenständlichen Wesen in dem Sinne einer 'unmittel-baren Einheit', an der sie die Momente des Seins und des Ich noch nicht getrennt und wieder vereinigt, oder die sie noch nicht erkannt hat. Sie geht daher als beobachtendes Bewusstsein an die Dinge, in der Meinung, dass sie diese als sinnliche, dem Ich entgegengesetzte Dinge in Wahrheit nehme; allein ihr wirkliches Tun widerspricht dieser Meinung, denn sie 'erkennt' die Dinge, sie verwandelt ihre Sinnlichkeit in 'Begriffe', d. h. eben in ein Sein, welches zugleich Ich ist, das Denken somit in ein seiendes Denken, oder das Sein in ein gedachtes Sein, und behauptet in der Tat, dass die Dinge nur als Begriffe Wahrheit haben. Für dieses beobachtende Bewusstsein wird darin nur dies, was 'die Dinge' sind, für uns aber, was 'es selbst' ist; das Resultat seiner Bewegung aber wird dies sein, für sich selbst dies zu werden, was es an sich ist.

이성은 ‘직접적으로’ 의식의 확실성으로서 모든 현실성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성은 자기의 현실성을 ‘존재의 직접성’이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이며, 또 이 ‘대상적 본질’과의 나의 '통일’도 아직은 단순한 직접적 통일로서 파악한다. 따라서 이성은 존재(Sein)와 자아(Ich)의 두 순간을 아직 분리했다가 다시 결합하는 것으로 알지 못하고, 다시 말해 그것을 아직 인식하지 못한 상태이다. 이성은 따라서 관찰하는 의식으로서 사물들에 접근하면서, 그것들을 감각적이며 자아에 대립된 사물로서 참되게 파악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성이 하는 행위는 이 생각과 모순된다. 이성은 사물들을 ‘인식’하는데, 곧 그것들의 감각성을 ‘개념(Begriff)’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즉 동시에 자아인 존재,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존재, 곧 사유된 존재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성은 사물들이 오직 개념으로서만 진리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관찰하는 의식에게는 이 안에서 단지 ‘사물들이 무엇인가’만이 드러나지만, 우리에게는 ‘그 의식 자신이 무엇인가’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 운동의 결과는, 이성이 자기 자신에게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있는 그것’이 되는 것이다[해설
1.직접적 확실성으로서의 이성
처음에 이성은 모든 현실이 자기와 동일하다는 확신으로 등장하지만 이 확신은 단지 직접적(unmittelbar) 형태로만 존재할 뿐, 사유적으로 매개된 인식은 아님
2.존재와 자아의 미분화 상태
이성은 세계(존재)와 자기(자아)의 관계를 아직 분리하고 다시 통합하는 운동으로 파악하지 못함. 즉, ‘존재 = 자아’라는 통일을 단순히 사실로 받아들일 뿐, 그 내적 과정을 이해하지 못함
3.관찰하는 의식으로서의 이성
이성은 세계를 관찰하면서, “나는 단순히 외부의 감각적 사물을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일을 하고 있음
4.사물의 개념화
이성은 사물의 감각적 모습을 개념(Begriff) 으로 바꿔내고 있음. 곧, 사물의 존재를 단순히 외적 현상으로 두지 않고, “사유된 존재”, 즉 자아와 연결된 것으로 전환함. 결과적으로 이성은 사물들이 오직 개념 속에서만 진리성을 가진다고 주장하게 됨
5.우리의 시각과 의식의 시각
관찰하는 의식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사물들이 무엇인가”가 드러날 뿐임. 하지만 우리(철학적 관찰자)에게는, “그 의식 자신이 무엇인가”가 드러남
6.운동의 결과
결국 이성은 자기의 운동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본래부터 그러한 존재(즉, 존재와 자아가 동일한 것)로 나타나게 됨. 즉, 이성이 자기 자신에게 자기 본질을 실현된 것으로 경험하는 단계로 나아감
7.정리
이 구절은 관찰하는 이성의 이중성을 드러냄. 겉으로는 외부의 감각적 사물을 관찰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사물을 개념 속에 끌어들이고, 존재를 ‘사유된 존재’로 변환하고 있는 것. 따라서 관찰 의식은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지만, 그 운동의 결과로 결국 이성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고 자기 본질을 실현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됨].

상동 206-207

'Das Tun' der beobachtenden Vernunft ist in den Momenten seiner Bewegung zu betrachten, wie sie die Natur, den Geist, und endlich die Beziehung beider als sinnliches Sein aufnimmt, und sich als seiende Wirklichkeit sucht.

관찰하는 이성의 ‘행위(Das Tun)’는 그 운동의 계기들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이 행위는 자연(Natur), 정신(Geist),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자의 관계를 감각적 존재(sinnliches Sein)로서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자신을 현존하는 실재로 찾으려는 것이다[이 구절은 “관찰하는 이성(die beobachtende Vernunft)”이 전개되는 전체 구조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문장
1.‘Das Tun’ – 관찰하는 이성의 행위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이성이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구체적인 실천 양식, 즉 “관찰” 활동을 뜻함. 이성은 자신을 실재하는 존재로 경험하고자 하며, 그 길은 “관찰”을 통해 열림
2.운동의 세 계기
이성은 자기 실재를 찾기 위해 세 영역을 차례로 관찰
자연(Natur): 외부 세계, 물리적·생물학적 현상들을 대상으로 관찰
정신(Geist): 인간 사회, 역사, 문화, 심리 등 의식과 공동체를 대상으로 관찰
자연과 정신의 관계: 양자를 매개하는 감각적 현상 ― 특히 인간 개체를 감각적 존재로서 관찰(예: 생리학적·심리학적 연구).
3.이성의 목표
이성은 이런 관찰을 통해 결국 자기 자신을 현실 속에서 발견하려고 함. 즉, 자연이나 정신을 단순히 외적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개념과 합리성을 확인하려는 것
4.정리
이 한 문장은 곧 “관찰하는 이성” 장의 구조적 개요임. 이성이 관찰을 통해 자신을 찾는 과정은
① 자연의 관찰 → ② 정신의 관찰 → ③ 양자의 통일(자연 속 정신, 정신 속 자연)의 관찰 로 전개되고, 그 전체 목표는 이성이 자기 자신을 구체적 현실 속에서 확인하는 것].

상동 207


https://youtu.be/LK7E2GZ04Cc?si=LeS5fX-unwbEsmqj

정신현상학 강독30 : 피히테의 공허한 관념론 비판, 불멸의 칸트와 예나의 낭만주의202509261510 금

예나의 낭만주의 운동에 관련된 또 다른 주요인물은 노발리스와 쉴러. 휄더린도 피히테의 강의를 듣기 위해 잠시 예나에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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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A.) Vernunft
B. Selbstbewusstsein

텍스트 :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아카데믹판 h.v. G.J.P.J. Bolland(Leiden A.H. Adriani, 1907)

A.Bewusstsein
I.Die sinnliche Gewissheit oder das Dieses und das Meinen
II.Die Wahrnehmung oder das Ding und die Täuschung    
III.Kraft und Verstand, Erscheinung und uebersinnliche Welt  S.117-
B. Selbstbewusstsein
IV.Die Wahrheit der Gewissheit seiner Selbst
a.Selbstständigkeit und Unselbstständigkeit des Selbstbewusstseins ; Herrschaft und Knechtschaft S.151-
b.Freiheit des Selbstbewusstseins ; Stoicismus, Skepticismus und das unglückliche Bewusstsein S.164-
C.(AA.) Vernunft
V.Gewissheit und Wahrheit der Vernunft S.194-

*게시된 번역과 해설은 AI를 바탕으로 제가 수정•편집한 것입니다. 다른 번역이나 해설 제안 적극 환영합니다.

Die Vernunft ist die Gewissheit alle 1) Realität zu sein. Dieses 'Ansich' oder diese 'Realität' ist aber noch ein durchaus Allgemeines, die reine 'Abstraction' der Realität. Es ist die 'Positivität', welche das Selbstbewusstsein an sich selbst, für sich ist, und Ich daher nur die reine Wesenheit des Seienden, oder die einfache 'Kategorie'.

이성은 모든 현실이 자기 자신이라는 확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체로서의 것(Ansich)’ 또는 이러한 ‘현실’은 아직 전적으로 일반적인 것으로, 현실의 순수한 추상일 뿐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기의식의 ‘긍정성(Positivität)’이며, 따라서 ‘나(Ich)’는 존재하는 것의 순수한 본질, 곧 단순한 ‘범주(Kategorie)’일 뿐이다[해설
1.이성의 자기확신
여기서 헤겔은 "이성은 모든 현실이다라는 정의를 내림. 즉, 의식이 더 이상 세계와 대립된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자기 안에 있고 자기와 동일하다는 확신에 도달했다는 뜻임
2.하지만 아직 추상적
이 확신은 내용적으로는 비어 있고 추상적임. "나는 모든 것이다"라는 말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구체적 규정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순수한 일반성일 뿐임
3.Positivität와 Kategorie
Positivität는 자기의식이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가장 단순한 태도를 말함. 이 단계에서 ‘나’는 세계를 규정하는 복잡한 범주가 아니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의 본질 자체, 즉 가장 추상적인 범주(Kategorie)일 뿐임. 따라서 이성은 아직 구체적인 인식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나는 모든 현실이다”라는 공허한 선언에 머물러 있음
👉 정리하면 이 구절은 이성이 자기 자신을 세계 전체와 동일한 것으로 확신하는 순간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그것이 아직 내용 없는 추상적 동일성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함. 그래서 헤겔은 여기서부터 이성이 어떻게 구체적인 인식 과정(자연 연구, 경험, 실천 등)을 통해 내용을 채워가는지를 전개하게 됨. 이제 ‘단순한 Kategorie’에서 시작해 어떻게 이성은 구체적 인식 단계(관찰, 법칙, 목적 등)로 전개].

상동 199

Die Kategorie, welche sonst die Be-
stimmt' des Seienden überhaupt oder des Seienden ab RuMr gegen das Bewusstsein, ist jetzt 'Wesenheit' oder einem Bese fache 'Einheit' des Seienden nur als denkende Wirk-derhir lichkeit, oder sie ist dies, dass Selbstbewusstsein und Sein 'dasselbe' Wesen sind, - 'dasselbe', nicht in der Vergleichung, sondern an und für sich. Nur der einseitige schlechte Idealismus lässt diese Einheit wieder als Bewusstsein auf die eine Seite und ihr gegenüber ein 'Ansich' treten.

범주(카테고리)는, 이전에는 존재 일반 또는 의식에 대립된 존재를 규정하는 것을 존재의 본질로 여겼으나 이제는 본질, 곧 단순한 하나의 통일로 존재하는 것을 단지 사유하는 현실성으로 지닐 뿐이다. 즉 범주는 자기의식과 존재가 동일한 본질이라는 것, 그것도 단순한 비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다만 일면적이고 잘못된 관념론만이 이 동일성을 다시금 의식이라는 한쪽 편에 두고, 그 반대편에 ‘자체로서의 존재(Ansich)’를 대립시킨다[해설
1.‘범주(Kategorie)’의 변용
전통적으로 범주는 존재의 규정성을 나타내는 형식(예: 칸트의 범주들)으로서, 주관(의식)과 객체(존재)를 매개하는 도구였음. 하지만 이제 헤겔에게 범주는 단순히 “의식 바깥에 있는 존재를 규정하는 형식”이 아니라, 사유적 현실성 자체, 즉 “자기와 존재가 하나”라는 본질적 통일을 뜻함
2.자기의식과 존재의 동일성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기의식과 존재가 단순히 비교해서 같아 보인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동일하다(an und für sich dasselbe)는 것임. 즉, 의식이 인식 행위를 통해 외부 존재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존재와 자기의식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한다는 이상주의적 입장을 드러냄
3.‘나쁜 관념론’(schlechter Idealismus) 비판
헤겔은 일면적인 관념론(예: 피히테의 주관주의적 이상주의)을 비판함. 그들은 의식과 세계(Ansich)를 여전히 양극으로 나누어 두고, 그 관계를 설명하려 하지만 진정한 이성적 통찰에서는 이런 대립은 초월되고, 의식과 존재가 이미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점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 헤겔의 주장임
✅ 정리
이 구절은 칸트 이후의 범주론을 넘어, 자기의식과 존재의 통일을 사유하는 헤겔의 이상주의 입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줌. 즉, “범주 = 존재의 규정”에서 “범주 = 자기의식과 존재의 동일성”으로 전환되며, 이를 통해 의식과 세계의 근본적 분리를 허물고자 하는 것].

상동

- Diese Kategorie nun oder 'ein-fache' Einheit des Selbstbewusstseins und des Seins hat aber an sich den 'Unterschied', denn ihr Wesen ist eben dieses, im 'Anderssein' oder im absoluten Unterschiede unmittelbar sich selbst gleich zu sein. Der Unterschied 'ist' daher, aber vollkommen durch-sichtig und als ein Unterschied, der zugleich keiner ist; er erscheint als eine 'Vielheit' von Kategorien. Indem der Idealismus die 'einfache Einheit' des Selbstbewusstseins als alle Realität ausspricht und sie unmit-telbar', ohne  sie als absolut negatives Wesen-nur dieses hat die Negation, die Bestimmtheit oder den ㅣUnterschied an ihm selbst, - begriffen zu haben, zum Wesen macht, so ist noch unbegreiflicher als das erste dieses zweite, dass in der Kategorie 'Unterschiede' oder 'Arten' seien.

이 범주, 곧 자기의식과 존재의 단순한 통일성은, 그 자체로 차이를 내포한다. 왜냐하면 그 본질은 바로 ‘다른 것 속에서(Anderssein)’ 혹은 절대적 차이 속에서도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이는 존재하되, 완전히 투명하며, 동시에 차이가 아닌 차이이다. 그것은 범주들의 다수성으로 나타난다. [주관적] 관념주의가 자기의식의 단순한 통일성을 모든 현실이라고 선언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곧바로 본질로 삼아버릴 경우—즉, 그것이 절대적 부정적 존재로서, 오직 이 부정성, 규정성, 혹은 차이를 그 자체 안에 가지는 것으로 파악되지 않은 채 본질로 삼아버릴 경우—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두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이 범주 안에 ‘차이들’ 혹은 ‘종류들(Arten)’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범주는 단순한 동일성이지만, 그 안에 차이를 본질로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
1.범주는 동일성과 차이의 통일
범주는 “자기의식과 존재가 동일하다”는 단순한 동일성으로 규정되지만, 그 본질은 차이를 포함한 동일성임. 즉, 자기 자신이면서도 다른 것 속에서 동일한 자기 자신으로 나타난다는 것.
2.차이의 성격
이 차이는 “투명한 차이”임. 즉, 차이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것은 동일성을 깨뜨리지 않는 차이임. 그래서 차이는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것처럼 기능
3.범주의 다수성
이 차이는 구체적으로 여러 범주들의 다수성으로 나타남. 즉, 하나의 범주(자기의식=존재)에서 여러 세부 범주(질, 양, 관계, 등등)가 파생되는 구조임. 이건 칸트의 범주론(질·양·관계·양태의 네 표)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움
4.‘나쁜 이상주의’ 비판
잘못된 이상주의(schlechter Idealismus)는 자기의식과 존재의 단순한 동일성을 선언하지만, 그 동일성이 스스로 차이를 산출하는 과정(즉 부정성과 규정성의 운동)을 간과함. 그래서 “어떻게 동일성에서 다양한 차이가 나올 수 있는가?”라는 난점을 풀지 못함
✅ 요약
이 구절은 동일성(자기의식=존재)은 차이를 본질로 갖는다는 헤겔의 변증법 원리를 범주론에 적용한 것임. 단순한 동일성이 자기 안에서 차이를 발생시키며, 그 결과 범주의 다수성이 나타남. 그러나 단순히 동일성만을 주장하는 ‘나쁜 이상주의’는 이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헤겔의 비판임].

199-200

Diese Versicherung überhaupt, so wie die Versicherung von irgend einer 'bestimmten Anzahl' der Arten derselben, ist eine neue Versiche-rung, welche es aber an ihr selbst enthält, dass man sie sich nicht mehr als Versicherung gefallen lassen müsse. Denn indem im reinen Ich, im reinen Verstande selbst der Unterschied anfängt, ist damit gesetzt, dass hier die 'Unmittelbarkeit', das 'Versichern' und 'Finden' aufgegeben werde und das 'Begreifen' anfange.

일반적인 이 확신[자기의식이 존재라는 주장]뿐 아니라, 그것의 ‘어떤 일정한 수(Anzahl)’의 종(Arten)을 단언하는 확신도, 사실상 새로운 확신일 뿐이다. 그러나 그 자체 안에, 그것을 더 이상 [단순한] 확신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내포한다. 왜냐하면 순수한 ‘나(Ich)’, 곧 순수한 ‘오성(Verstand)’ 안에서 차이가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것은, 여기에서 ‘직접성(Unmittelbarkeit)’, ‘확신(=Versichern)’과 [단순한] ‘발견(Finden)’이 포기되고, 그 대신 ‘파악(Begreifen)’이 시작되어야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이 구절은 지금까지의 관념주의적 확신에서 사유의 전환점이 드러나는 대목
1.“Versicherung”은 단순한 확언, 보장
관념주의가 “나는 모든 현실이다”, “자기의식과 존재는 동일하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내용 없는 확언(Versicherung)임. 이 단계에서는 여전히 “발견했다(Finden)”, “그렇다고 단언한다”는 식으로 직접성에 머무름.
2.“bestimmte Anzahl der Arten”
여기서 헤겔은 칸트의 범주 도표(질·양·관계·양태)를 겨냥함. 즉, 동일성에서 여러 “종류(Arten)”나 “수(Anzahl)”의 범주들을 단순히 나열해도, 그것은 여전히 “새로운 확언”에 불과함
3.전환점: Begreifen
그러나 자기의식이 존재라는 “단순 동일성” 안에서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함. 이것은 더 이상 “그렇다”고 단언하는 차원이 아니라, 왜, 어떻게 동일성 안에서 차이가 생기고, 그것이 어떻게 체계화되는가를 파악(Begreifen)하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함을 뜻함. 즉, 단순한 직관적 확신(“나는 나다”)에서 개념적 사유(변증법적 파악)로 넘어가는 순간임
✅ 요약
이 구절은 “순수한 동일성(나는 나다)”의 확언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동일성 안에 내재하는 차이를 사유하면서 논리적·변증법적 전개(=Begreifen)로 이행해야 한다는 전환을 선언함. 헤겔 논리학의 본격적 진입을 알리는 징후라고 볼 수 있음].

상동 200

Die Vielheit der Kategorien aber auf irgend eine Weise wieder als einen Fund, z. B. aus den Urteilen, aufnehmen und sich dieselben so gefallen lassen, ist in der Tat als eine Schmach der Wissenschaft anzu-sehen; wo sollte noch der Verstand eine Notwendigkeit aufzuzeigen vermögen, wenn er dies an ihm selbst, der reinen Notwendigkeit, nicht vermag?

그러나 범주의 다수성을 단순히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하나의 ‘발견(Fund)’으로서, 예컨대 판단에서 끌어내어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 용납하는 것은, 실로 학문에 대한 수치로 간주되어야 한다. 만약 오성이 바로 그 자체에서, 즉 순수한 필연성에서조차 필연성을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면, 대체 어디에서 오성이 필연성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이 대목은 헤겔이 칸트의 범주론과 같은 “범주 나열식” 형식을 강하게 비판하는 부분
1.비판의 대상: 칸트의 범주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범주들을 ‘판단의 형식’에서 도출해 표로 제시했습니다(질, 양, 관계, 양태).
하지만 헤겔의 눈에는, 이것은 체계적 필연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저 “찾아낸(Fund)” 나열에 불과함
2.‘Schmach der Wissenschaft’ = 학문의 수치
철학, 특히 논리학이 “필연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단순히 “발견했다”고만 한다면, 그것은 과학(학문)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 즉, 범주들의 체계는 단순 나열이 아니라 필연적 전개로 보여져야 한다는 요구임
3.헤겔의 요구: Notwendigkeit (필연성)
진정한 철학은 개념 자체(=순수한 Notwendigkeit)로부터 범주들을 논리적으로 도출해야 함. 그렇지 않다면, 범주는 우연적 집합일 뿐, “과학적”일 수 없음
✅ 요약
이 구절은 범주의 나열식 이해(칸트식 도식)를 비판하며, 참된 과학적 철학은 범주들의 다수를 단순히 “발견된 것”으로 두지 않고, 개념의 내적 운동(필연성)으로부터 전개해야 한다는 헤겔의 논리학적 원칙을 천명한 것].

상동

https://youtu.be/2x1OHSCBbnI?si=IqzRBEc6Uc3X2zmF

정신현상학 강독28 : 이성, 자기입증의 길 20250922141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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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친구

헤겔 Hegel 2025. 9. 21. 06:2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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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부터  '정신현상학'을 다시 읽기시작해 오늘로 자기의식 장을 넘기고 이성 장에 들어섰다. 이렇게 계속 이 책을 읽어 나가고 헤겔 관련서만을 집중적으로 읽는 동기는 분명 이 텍스트가 주는 어떤 마력때문이다. 그것은 이 책이 제시하는 무한성에 비해 그 저자가 안고 있는 철저한 유한성에 기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그가 쓴 것이지만 그 영향력에서 뿐만 아니라 그 출생에서도 그의 것만은 아니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정신현상학'에 관한 긴 글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형태로 결과물이 나올지는 아직 미정이다.

근래는 역시 예전에 읽다 중단한 테리 핀카드의 헤겔 전기를 다시 읽으면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 핀카드 보다 4년 후 나온 발터 예쉬케의 헤겔 전기는 저자가 역사학자인가 싶을 정도로 세밀한 문헌전거와 아울러 글도 핀카드 만큼 잘 쓴다. 문사철의 저력은 이런데서 보인다. 헤겔의 종교철학에 경도했던 예쉬케는 몇 해 전 작고했다.  1945년도 생.

헤겔의 프랑크푸르트 시절, 그를 한적하지만 봉건적인 스위스의 베른에서 이곳으로 탈출시켜 준 튜빙겐의 교우 휄더린은 당시 예나에서 후기 칸트주의로 바람을 일으킨 피히테의 영향으로 시적이자 철학적으로 달아 올라 있었고 헤겔은 이에 깊게 자극받았다. 그러나 휄더린은 철학에 집중하기에는 여린 감수성이 짙었고 앓고 있던 정신병이 깊어져 갔다. 휄더린의 영향력이 긍정적인 자극이 아니라 부담으로 작용할 시점에 닥친 아버지의 죽음과 그에 따른 얼마간의 상속유산은 헤겔이 가정교사 자리를 벗어나 직업 철학자로 나아갈 자그마한 기반이 됐고, 이 새로운 직업의 기회를 구체화하기 위해 헤겔은 예나에서 이미 신진의 유망한 철학자로 자리를 잡은, 역시 튜빙겐의 교우 셸링에게 자존심을 굽히고 편지를 쓴다. 헤겔의 베른 시절 이후 두 사람은 편지 왕래가 없었다. 철학의, 특히 칸트 철학의 세부 분야에 파고 들어가고 있던 셸링을 폄하하며 헤겔은 민중을 선도할 대중철학자로 자신의 앞날을 그렸었지만 이제 이게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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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강독 : 불행한 의식3

헤겔 Hegel 2025. 9. 16. 16:2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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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Selbstbewusstsein

텍스트 :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아카데믹판 h.v. G.J.P.J. Bolland(Leiden A.H. Adriani, 1907)

A.Bewusstsein
I.Die sinnliche Gewissheit oder das Dieses und das Meinen
II.Die Wahrnehmung oder das Ding und die Täuschung    
III.Kraft und Verstand, Erscheinung und uebersinnliche Welt  S.117-
B. Selbstbewusstsein
IV.Die Wahrheit der Gewissheit seiner Selbst
a.Selbstständigkeit und Unselbstständigkeit des Selbstbewusstseins ; Herrschaft und Knechtschaft S.151-
b.Freiheit des Selbstbewusstseins ; Stoicismus, Skepticismus und das unglückliche Bewusstsein S.164-

Wenn das Bewusstsein für sich selbstständiges Bewusstsein und ihm die Wirklichkeit an und für sich nichtig wäre, würde es in der Arbeit und in dem Ge-nusse zum Gefühle seiner Selbstständigkeit gelangen, dadurch dass es selbst es wäre, welches die Wirklichkeit aufhöbe. Allein indem diese ihm Gestalt des Unwandelbaren ist, vermag es nicht sie durch sich aufzuheben, sondern indem es zwar zur Vernichtung der Wirklichkeit und zum Genusse gelangt, so geschieht für es dies wesentlich dadurch, dass das Unwandelbare selbst seine Gestalt preisgiebt und ihm zum Genusse über-lässt.

만일 의식이 자기 자신을 자립적인 의식으로 여기고, 현실이 그것에 대해 그 자체로 무(無)라면, 의식은 노동과 향유 속에서 현실을 자기가 소멸시킨다는 사실을 통해 자기 자립성의 감정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불변자의 형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의식은 그것을 스스로 소멸시킬 수 없다. 오히려 의식이 현실을 파괴하고 향유한다 하더라도, 이는 본질적으로 불변자가 자기의 형상을 내어주어, 그것을 의식에게 향유하도록 맡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이 구절은 불행한 의식이 노동과 향유 속에서 자기 확신을 얻을 수 없는 이유를 더 분명히 설명하는 대목
여기서 헤겔은 노동과 향유의 주체가 불행한 의식이 아니라, 불변자(절대자)임을 강조함. 불행한 의식은 현실을 없애는 주체가 아니라, 절대자가 자기 형상을 내어줌으로써 현실이 소멸되고 향유되는 것을 경험할 뿐임. 따라서 노동과 향유 속에서 얻는 확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증이 아니라, 절대자에 의존한 수동적 확증임. 즉, 불행한 의식은 여전히 자기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세우지 못하고, 모든 것을 불변자의 은혜로 돌리는 구조에 머무름
👉 이 대목 이후로 불행한 의식은 점점 더 자기 부정 → 불변자 의존의 운동을 강화하다가, 결국 자기와 불변자의 일치를 직접 추구하는 세 번째 단계(양심·회개·은총의 차원)로 나아감].

상동 185

Das Bewusstsein tritt hierin seinerseits gleichfalls als Wirkliches auf, aber ebenso als innerlich gebrochen, und diese Entzweiung, sich in ein Ver-ㅣhältnis zur Wirklichkeit oder das Fürsichsein und ein Ansichsein zu brechen, stellt sich in seinem Arbeiten und Geniessen dar. Jenes Verhältnis zur Wirklichkeit ist das Verändern oder das Tun, das Fürsichsein, das dem einzelnen Bewusstsein als solchem angehört. Aber es ist darin auch an sich: diese Seite gehört dem unwandelbaren Jenseits an; sie sind die Fähigkeiten und Kräfte, eine fremde Gabe, welche das Unwandelbare ebenso dem Bewusstsein überlässt, um sie zu gebrauchen.

의식은 이 관계 속에서 자기 또한 현실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깨어진(gebrochen) 존재로 드러난다. 이 분열은 자기 자신을 현실과의 관계, 즉 자기-위해-존재(Fürsichsein)와 자기-안에-존재(Ansichsein)로 갈라놓는데, 그것이 바로 노동과 향유 속에서 나타난다. 현실과의 관계라는 것은 변형하거나 행위하는 것, 즉 개별적 의식으로서의 자기-위해-존재이다. 그러나 동시에 의식은 그 안에서 자기-안에-존재이기도 하다. 이 측면은 불변하는 저편(Jenseits)에 속한다. 이러한 능력들과 힘들은 낯선 선물(fremde Gabe)이며, 불변자가 그것을 의식에게 내어주어 사용하도록 맡겨둔 것이다[이 부분은 불행한 의식이 자기의 노동과 향유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
여기서 불행한 의식의 핵심적인 이중성이 다시 확인됨
1.노동과 향유의 주체성
겉보기에는 의식이 스스로 현실을 변형하고 사용하면서 자기 주체성을 실현하는 듯 보임. 이것이 “Fürsichsein(자기-위해-존재)”의 측면임
2.노동과 향유의 종속성
그러나 그 힘과 능력은 불변자(절대자)로부터 “빌려온 것”에 불과함. 따라서 의식은 자기 행위를 자율적 성취가 아니라, 절대자가 내어준 “은혜의 산물”로만 경험함. 이것이 “Ansichsein(자기-안에-존재)”의 측면이며, 불행한 의식의 분열을 심화시킴
👉 정리하면, 불행한 의식은 자기 활동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주체가 아닌 존재임. 스스로 노동하고 향유하지만, 그 힘은 자기 것이 아니라 절대자의 것이므로, 결국 자기의 행위 속에서도 자기 소외를 경험하게 됨. 지금까지의 불행한 의식의 전개 : ① 순수의식(경건) → ② 욕망과 노동 → ③ 자기-위해-존재와 자기-안에-존재의 분열].

상동 185-186

In seinem Tun ist demnach das Bewusstsein zunächst in dem Verhältnisse zweier Extreme: es steht als das tätige Diesseits auf einer Seite und ihm gegenüber die passive Wirklichkeit, beide in Beziehung auf einander, aber auch beide in das Unwandelbare zurückgegangen und an sich festhaltend. Von beiden Seiten löst sich daher nur eine Oberfläche gegen einander ab, welche in das Spiel der Bewegung gegen die andere tritt. Das Extrem der Wirklichkeit wird
durch das tätige Extrem aufgehoben; sie von ihrer Seite kann aber nur darum aufgehoben werden, weil ihr unwandelbares Wesen sie selbst aufhebt, sich von sich abstösst und das Abgestossene der Tätigkeit preisgiebt.

그의 행위 속에서 의식은 우선 두 극의 관계에 서 있다. 한쪽 극으로서 그것은 행위하는 현세(Diesseits)이고, 그 반대쪽 극은 그것에 대립하는 수동적 현실이다. 양자는 서로 관계를 맺지만, 동시에 모두 불변자(Unwandelbares) 속으로 되돌아가 거기에 붙들려 있다. 따라서 양쪽에서 서로 마주하는 것은 단지 겉모습(표면)일 뿐이며, 그 겉모습들만이 서로의 운동 속에 들어간다. 현실의 극은 행위하는 극에 의해 소멸된다. 그러나 현실이 소멸되는 것은 오직 그것의 불변적인 본질이 스스로 현실을 소멸시키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밀어내어, 그 밀려난 것을 활동에게 내맡기기 때문일 뿐이다[불행한 의식이 자기의 활동(노동·행위) 속에서 어떻게 현실과 불변자 사이의 삼중적 구조를 드러내는지를 보여줌
헤겔은 여기서 불행한 의식의 활동 구조를 다음과 같이 두 극으로 설명
(a) 활동하는 주체(의식, Diesseits)
(b) 수동적 대상(현실, Wirklichkeit)
그러나 이 둘은 자립적이지 않음. 둘 다 불변자에 속해 있으며, 불변자의 힘에 의해 존재함. 따라서 의식이 현실을 소멸시킬 때, 사실상 그것은 자기 힘이 아니라 불변자가 자기 형상을 내어줌으로써 가능한 일임. 따라서 의식의 행위는 자립적이지 않음. 활동과 대상의 소멸은 단순히 표면적 운동일 뿐, 그 배후의 본질적 힘은 불변자임. 즉, 의식이 행위 속에서 자기 확신을 세우는 듯하지만, 사실은 다시 자기 소외를 반복하는 것임
👉 요약하면, 불행한 의식은 자기 활동에서조차 자기 힘을 발견하지 못하고, 모든 행위를 불변자의 작용으로 돌리게 됨. 이 때문에 불행한 의식은 자기 자신을 무력한 존재로 경험하게 됨.
불행한 의식의 ‘노동과 향유’ → ‘행위와 현실의 이중 구조’ → ‘불변자에 귀속’ 으로 전개].

상동 186

Die tätige Kraft erscheint als 'die Macht', worin die Wirklichkeit sich auflöst; darum aber ist für dieses Bewusstsein, welchem das 'Ansich' oder' das Wesen ein ihm Anderes ist, diese Macht, als welche es in der Tätigkeit auftritt, das Jenseits seiner selbst. Statt also aus seinem Tun in sich zurückzukehren und sich für sich selbst bewährt zu haben, reflectiert es vielmehr diese Bewegung des Tuns in das andere Extrem zurück, welches hierdurch als rein Allgemeines, als die absolute Macht dargestellt ist, von der die Bewegung nach allen Seiten ausgegangen,ㅣund die das Wesen sowohl der sich zersetzenden Extreme, wie sie zuerst auftraten, als des Wechsels selbst sei.

행위하는 힘은 현실이 스스로 해체되어 사라지는 권력(Macht)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의식에게 있어서, ‘자체(Ansich)’ 또는 본질(Wesen)은 자기와 다른 어떤 것이므로, 자기의 행위 속에서 나타나는 바로 그 힘은 자기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너머의 저편(Jenseits)이다. 따라서 의식은 자기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 속으로 되돌아와 자기 자신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행위의 운동을 다시 반대의 극으로 반사(reflektieren)시키며, 이로써 그 반대 극은 순수한 보편자, 절대적 권력으로 나타난다. 모든 운동은 그로부터 사방으로 흘러나온 것이며, 처음에 등장했던 두 극의 해체된 본질이자, 양자 사이의 교환 그 자체의 본질로 드러난다[불행한 의식의 행위(노동·활동)가 자기 자신에게 귀속되지 못하고, 다시 저 너머(Jenseits)로 반사되는 과정을 설명
행위하는 힘은 현실을 소멸시키는 힘임. 의식은 활동 속에서 대상(현실)을 부정하고, 이것이 마치 자기의 힘인 것처럼 드러남. 그러나 불행한 의식은 자기 힘을 인정하지 못함. 자기 안에 본질(Ansich)이 있다고 보지 않고, 본질은 언제나 타자, 저편(Jenseits)에 있다고 생각함. 따라서 자기 행위에서 나온 힘조차도 불변자의 힘, 즉 외부의 절대적 권력에 귀속시킴. 그 결과 자기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입증하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활동과 그 운동은 불변자의 권력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돌려버림. 이렇게 불변자는 점점 더 절대적 권력, 보편자로 강화됩니다.
👉 요약하면, 불행한 의식은 자기 활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세우는 데 실패함. 오히려 활동 속에서 나타나는 힘을 불변자의 권능으로 돌려, 스스로를 무력화하고, 불변자의 절대적 위상을 높여버려 점점 더 철저히 자기 부정으로 빠져듬].

상동 186-187

Dass das unwandelbare Bewusstsein auf seine Gestalt Verzicht tut und sie preisgiebt, dagegen das einzelne Bewusstsein 'dankt', d. h. die Befriedigung des Bewusstseins seiner Selbstständigkeit sich versagt und das Wesen des Tuns von sich ab dem Jenseits zu-weist, - durch diese beiden Momente des gegenseitigen sich Aufgebens beider Teile entsteht hiermit allerdings dem Bewusstsein 'seine' Einheit mit dem Unwandel-baren.

불변하는 의식이 그 자신의 형상을 포기하고 그것을 내어주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해 개별적 의식이 “감사”(dankt)한다는 것은 곧 자기의 자립성에 대한 만족을 스스로 거부하고 행위의 본질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떼어내어 저편(Jenseits)에 귀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이 두 가지, 즉 양쪽 모두가 서로를 포기하는 이 순간들을 통해 의식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불변자와의 합일을 얻게 된다[이 구절은 불행한 의식이 노동과 향유의 맥락에서 자기와 불변자 사이에 성립하는 특이한 “합일”을 설명하는 대목
1.불변자 측의 양보
불변자는 자기 “형상”(Gestalt), 즉 구체적 현실성의 모습을 포기하고, 그것을 의식에게 내어줌. 이렇게 해서 의식은 향유(Genuss)의 대상을 받게 됨
2.의식 측의 양보
개별적 의식은 그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자립성의 충족을 포기함. 행위의 성과나 본질을 자기 것이 아니라 불변자의 것, 즉 저편에 돌려줌. 여기서 “감사한다”(dankt)는 표현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자기 힘을 부정하고 불변자에게 귀속시키는 태도를 의미함
3.합일의 성립
불변자가 자기 모습을 내어주고, 의식이 자기 성취를 포기하는 상호적 자기 부정이 동시에 이루어짐. 바로 이 “상호적 자기 포기”(gegenseitiges Aufgeben)에 의해, 불행한 의식은 불변자와의 합일을 경험. 하지만 이 합일은 여전히 왜곡된 합일인데, 왜냐하면 의식이 자기 자신을 불변자와 동등하게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합일을 얻기 때문
👉 요약하면, 불행한 의식은 노동과 향유 속에서 자기와 불변자가 서로 “양보”하는 구조를 통해 일종의 합일에 도달. 그러나 이 합일은 참된 상호 인정이 아니라, 의식의 자기 부정과 불변자에의 종속을 통해 매개되는 불완전한 합일임].

상동 187

Allein zugleich ist diese Einheit mit der Trennung afficiert, in sich wieder gebrochen, und es tritt aus ihr der Gegensatz des Allgemeinen und Einzelnen wieder hervor Denn das Bewusstsein entsagt zwar 'zum Scheine' der Befriedigung seines Selbstgefühls, erlangt aber die 'wirkliche' Befriedigung desselben, denn es ‚ist‘ Begierde, Arbeit und Genuss gewesen ; ‚es‘ hat als Bewusstsein ‚gewollt‘, ‚getan‘, und ‚genossen‘.

그러나 동시에 이 합일은 다시 분열에 의해 영향받아, 그 자체 안에서 다시금 부서지고, 그로부터 보편과 개별의 대립이 다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의식은 비록 겉으로는 자기감정의 충족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충족을 얻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욕망하였고, 노동하였으며, 향유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의식으로서 원했고, 행했고, 누렸던 것이다[이 구절은 앞에서 설명된 불행한 의식의 “합일”이 여전히 내적 분열을 안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
1.합일의 깨짐
앞에서는 불변자와 개별적 의식이 서로를 “포기”함으로써 일종의 합일이 성립하는 듯 보였으나 헤겔은 즉시 이것이 내적으로 깨어진 합일임을 지적
2.겉모습과 실제의 차이
의식은 마치 자기 자립성의 충족(“자기감정의 만족”)을 포기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만 실제로는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충족시키고 있음
3.자기 충족의 근거
왜냐하면 의식은 실제로 욕망했고(Begierde), 노동했고(Arbeit), 향유(Genuss)했기 때문. 즉, 그것은 여전히 자기 활동의 주체로서 작용했으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만족시킨 것임
4.결과: 대립의 재출현
따라서 불변자와의 합일은 유지되지 않고, 보편(불변자)과 개별(자기 의식)의 분열이 다시 나타남. 즉, 의식은 불변자에 모든 것을 귀속시켰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의 활동을 통해 자기 만족을 얻었으므로, 두 차원은 다시 분리됨
👉 이 구절은 불행한 의식이 결코 단순히 자기를 비워내고 불변자에 몰입하는 합일에 머무를 수 없음을 보여줌. 왜냐하면 그것이 행하고 누리는 한, 항상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충족하기 때문. 이 대목은 다음 단계 ― 곧 불행한 의식이 자기의 내적 분열(자기 자신 안에서의 주인-노예 관계 같은 구조)로 넘어감].

상동

Sein 'Danken' ebenso, worin es das andere Extrem als das Wesen anerkennt und sich aufhebt, ist selbst sein eigenes Tun, welches das Tun des anderen Extrems aufwiegt und der sich preisgebenden Wohltat ein
'gleiches' Tun entgegenstellt; wenn jenes ihm seine 'Oberfläche' überlässt, so dankt es 'aber auch', und tut darin, indem es sein Tun, d. h. sein 'Wesen' selbst aufgiebt, eigentlich mehr als das andere, das nur eine Oberfläche von sich abstösst.

그의 ‘감사(Danken)’ 또한 마찬가지다. 거기서 의식은 다른 극을 본질로 인정하고 자신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 ‘감사’ 자체가 바로 의식 자신의 행위이며, 따라서 다른 극의 행위를 상쇄하고, 그 자신을 내어주는 은혜에 대해 동일한 행위를 돌려준다. 만일 저쪽이 자기의 ‘표면’을 내어준 것이라면, 의식은 ‘감사’를 통해 또한 행위하고, 자기의 행위―즉 자기의 본질 자체―를 내어줌으로써, 사실상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한다. 왜냐하면 저쪽은 자기의 표면만을 밀쳐냈을 뿐이기 때문이다[이 구절은 불행한 의식이 불변자(또는 ‘저편’)와 맺는 관계 속에서 ‘감사(Danken)’의 모순적 성격을 드러내는 부분
1.‘감사’의 구조
불행한 의식은 불변자(저편)가 자기 일부(“표면”)를 내어주는 것을 은혜(Wohltat)로 받음.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의식은 자기 자신의 행위를 포기함으로써 ‘감사’를 표현함
2.은혜와 보답의 비대칭성
불변자가 버리는 것은 “표면”에 불과함. 그러나 불행한 의식은 ‘감사’를 통해 자기의 본질적 행위, 즉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셈이 돰. 따라서 불행한 의식은 사실상 더 많은 것을 내주는 쪽임
3.결과적 긴장
이로써 겉보기에는 불변자와의 상호 인정(은혜 ↔ 감사)이 이루어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비대칭적 관계가 심화됨. 불행한 의식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더 내어주어야 하는 쪽으로 남음
👉 이 구절은 불행한 의식의 내적 모순이 점점 심화되는 장면임. 겉으로는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불변자와의 관계가 비대칭적 희생 구조로 고착되고, 의식은 자기 자신을 더 철저히 부정하는 자리에 머물게 됨. 여기서 바로 이어지는 대목은 자기부정이 반복되면서 불행한 의식이 Askese 즉 금욕으로 나아감].

상동

Die ganze Bewegung reflectiert sich also nicht nur im wirklichen Begehren, Arbeiten und Geniessen, sondern sogar selbst im Danken, worin das Gegenteil zu geschehen scheint, in das 'Extrem der Einzelnheit'. Das Bewusstsein fühlt sich darin als dieses Einzelne und lässt sich durch den Schein seines Verzichtleistens nicht ㅣtäuschen, denn die Wahrheit desselben ist, dass es sich nicht aufgegeben hat; was zu stande gekommen, ist nur die gedoppelte Reflexion in die beiden Extreme, und das Resultat die wiederholte Spaltung in das entgegengesetzte Bewusstsein des 'Unwandelbaren' und das Bewusstsein des 'gegenüberstehenden' Wollens, Voll-bringens, Geniessens, und des auf sich Verzichtleistens selbst, oder der fürsichseienden Einzelnheit überhaupt.

따라서 전체 운동은 단지 실제적인 욕망, 노동, 향유 속에서만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것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는 감사 속에서도, 단적으로 개별성의 극단에서도 반영된다. 의식은 여기서 자기 자신을 이 개별자로서 느끼며, 자신의 포기에 대한 외양에 의해 기만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포기의 진실은, 의식이 자신을 실제로 포기하지 않았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단지 양 극단에서의 이중적 반영이며, 그 결과는 다시금 불변자에 대립된 의식에서의 반복된 분열 곧 불변자에 대립하는 원함, 행함, 향유함, 그리고 바로 자기 포기 자체의 의식, 즉 일반적으로 말해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는 개별성의 의식이다[이 대목은 불행한 의식의 두 번째 관계 ― 욕망, 노동, 향유, 그리고 감사 ― 가 어떻게 끝내 다시 분열로 귀결되는지를 요약하는 대목
1.겉보기의 포기 ↔ 실제의 자기 보존
‘감사’는 불행한 의식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듯한 외양을 띄지만 실제로는 의식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음. 왜냐하면 ‘감사’라는 행위조차 결국 자기 자신의 행위이기 때문
2.반영의 이중 구조
욕망, 노동, 향유, 그리고 감사까지 모두 양 극 ― (a) 불변자와 (b) 자기 자신(개별자) ― 사이에서 반영된 운동으로 귀결됨. 따라서 통합이 아니라, 다시금 분열의 반복으로 이어짐
3.결론: 끊임없는 자기분열
의식은 불변자에 대한 의식과, 그것에 맞서는 자기 개별성의 의식 사이에서 오락가락함. 심지어 자기 포기(Verzicht)조차 개별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되므로, 불행한 의식은 스스로의 분열을 강화하는 길로만 들어서게 됨
👉 이 대목은 불행한 의식이 욕망·노동·향유·감사의 모든 국면에서 결국 자기 자신을 통일적 주체로 확립하지 못하고, 분열을 반복한다는 점을 드러냄.이제 이어지는 전개에서, 헤겔은 이 의식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더욱 철저히 부정하는 Askese (금욕) 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게 됨].

상동 187-188

Es ist damit das dritte Verhältnis der Bewegung dieses Bewusstseins eingetreten, welches aus dem zweiten als ein solches hervortritt, das in Wahrheit durch sein Wollen und Vollbringen sich als selbstständiges erprobt hat. Im ersten Verhältnisse war es nur 'Begriff' des wirklichen Bewusstseins oder das innere Gemüt, welches im Tun und Genusse noch nicht wirklich ist; das zweite ist die Verwirklichung, als äusseres Tun und Geniessen; hieraus aber zurückgekehrt ist es ein solches, welches sich als wirkliches und wirkendes Bewusstsein 'erfahren', oder dem es 'wahr' ist, 'an und für sich' zu sein. Darin ist aber nun ... der Feind in seiner eigensten Gestalt aufgefunden.

따라서 이러한 의식의 운동은 세번째 관계로 들어서는데, 두번째에서 이 의식은 그의 의지와 행함으로 스스로 자립적일 수 있는지 시험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첫번째 관계에서 그것은 실제 의식의 '개념' 또는 내적 심정일 뿐이었는데 이것은 아직 실제로 행해지고 향유되는 것이 아닌 반면 두번째는 외적 행위와 향유로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이로부터 되돌아서 자신을 실제적이고 능동적인 의식으로 경험한다. 즉 그것에게 '참'된 것은 즉대자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거기서 반대자가 그의 고유한 형상으로 발견된다.

따라서 이제 이 의식의 운동에서 세 번째 관계가 나타난다. 이것은 두 번째 관계에서, 의식이 자기의 ‘의지하고 행하는’ 활동을 통해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시험해 본 결과로서 드러난다. 첫 번째 관계에서는, 그것은 단지 현실적 의식의 개념, 혹은 행동과 향유 속에서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내적 심정(Gemüt) 에 불과했다.
두 번째 관계에서는, 그것은 욕망하고, 행동하고, 향유하는 외적 실천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자신 안으로 되돌아온 의식은 이제 자신을 실제적이고 작동하는 의식으로 경험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그 자체로 존재한다(an und für sich)’ 는 것을 참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속에서, 이제 적(Feind)이 자기 자신의 가장 고유한 모습으로 발견된다[불행한 의식의 세 번째 관계, 즉 Askese(금욕적 태도) 로 넘어가는 극적 순간을 나타냄
1단계 (개념/내적 심정)
불행한 의식은 처음에 자기와 절대적인 것 사이의 분열을 내적 느낌으로만 경험했음(안다흐트, Sehnsucht)
2단계 (행위/외적 실천)
욕망, 노동, 향유, 감사 등을 통해 이 분열을 극복하려 했으나 그 행위들조차 자신이 아닌 불변자에 의해 가능하다고 느끼며, 결국 자기 확증에 실패함
3단계 (Askese/자기부정)
이제 의식은 자기의 행위와 성취를 통해서 스스로가 현실적 존재임을 알게 됨.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큰 적으로 발견함. 이 때문에 불행한 의식은 자기 자신과 싸우는 길, 즉 자기부정·금욕(Askese) 의 길로 들어서게 됨
👉 요약하면, 이 구절은 불행한 의식이 “이제 나는 현실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다”라는 자각에 도달하는 순간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바로 그 순간 자기 안에서 분열과 적대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며, 그래서 다음 단계인 금욕적 실천으로 나아가게 되는 결정적 전환점임].

상동 188

Im Kampfe des Gemüts ist das einzelne Bewusstsein nur als musicalisches, abstractes Moment; in der Arbeit und dem Genusse, als der Realisierung dieses wesenlosen Seins, kann es unmittelbar 'sich' vergessen, und die bewusste 'Eigenheit' in dieser Wirklichkeit wird durch das dankende Anerkennen niedergeschlagen. Dieses Niederschlagen ist aber in Wahrheit eine Rückkehr des Bewusstseins in sich selbst und zwar in sich als die ihm wahrhafte Wirklichkeit.

마음의 투쟁 속에서 개별적 의식은 단지 음악적인, 추상적인 순간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노동과 향유 속에서는 이 무상한 존재가 현실화되며, 그 속에서 의식은 곧바로 자기를 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의 자각된 개별성은 감사하는 인정에 의해 억눌린다. 그러나 이 억눌림은 실상 의식이 자기 자신 안으로 되돌아가는 것, 즉 자기에게 참다운 현실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1.Gemüt im Kampfe
"Gemüt"가 내적 투쟁 속에 있을 때, 그 안에서의 Einzelnes(개별적 자아)는 단지 "musikalisch-abstraktes Moment"로 나타남. 이는 곧, 앞서 말한 Andacht나 reines Gefühl처럼 구체적 내용 없는 정서적 순간, 추상적 울림에 불과하다는 뜻.
2.Arbeit und Genuss
그러나 Arbeit und Genuss 속에서는 이 추상적이고 무력한 Sein이 현실적으로 실현됨. 이 활동 속에서 개별적 자아는 일시적으로 sich vergessen (자기 망각)할 수 있음.
3.Dankendes Anerkennen
그리고 그 망각, 곧 자신의 "bewusste Eigenheit"를 포기하는 것은 Dank을 통해 일어남. 즉, 자신이 한 활동이나 성취를 "내가 했다"가 아니라 "Unwandelbares(불변자, 절대자)가 나를 통해 하게 했다"며 인정하는 것.
4.Wahrheit dieses Niederschlagens
하지만 이 자기 부정(Anerkennen als Niederschlagen)은 사실상 자기 소멸이 아님.
오히려 Rückkehr des Bewusstseins in sich selbst: 자아가 자신을 "wahre Wirklichkeit"로 되찾는 계기임.
5.해석적 코멘트
헤겔은 여기서 Unglückliches Bewusstsein의 특유한 모순을 드러냄. 표면적으로는 자아가 자신을 부정하고 절대자에게 모든 행위를 돌리는 것처럼 보이지만(겸손, 감사, 자기부정) 실상은 자아가 이러한 행위를 "자신이 수행했다"는 점을 의식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확증이 일어남. 따라서 이 과정은 단순한 자기 부정이 아니라, 부정을 통해 자기를 되찾는 매개적 자기회귀로 기능함].

상동

Dieses dritte Verhältnis, worin diese wahrhafte Wirklichkeit das eine Extrem ist, ist die Beziehung derselben auf das allgemeine Wesen, als der Nichtigkeit, und die Bewegung dieser Beziehung ist noch zu betrachten.

이 세 번째 관계에서, 이 참다운 현실성이 한쪽 극이 되는 것은, 그것이 보편적 본질 ― 즉 무(無)로 규정된 것 ― 과 맺는 관계이다. 그리고 이 관계의 운동은 아직 고찰되어야 한다[📌 여기서 dieses dritte Verhältnis는 앞서 나온 Unglückliches Bewusstsein의 세 번째 단계(자신을 실제적이고 활동적인 의식으로 경험한 단계)를 가리킴. 이때 의식은 자기 자신을 „wahre Wirklichkeit“(참다운 현실성)으로서 파악하지만, 동시에 이 현실성이 보편적 본질(Wesen), 즉 als der Nichtigkeit와 관계 맺게 됨. 따라서 이 구절은 개별적 자아가 자기 현실성을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보편성(절대적 본질, Jenseits)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음을 말함. 이 세 번째 관계 부분(즉, 'Unglückliches Bewusstsein'의 마지막 운동)이 다음 장(„Die Vernunft“)으로 넘어가는 고리].

상동

Was zuerst die entgegengesetzte Beziehung des Bewusstseins betrifft, worin ihm seine Realität unmittelbar das Nichtige ist, wird also sein wirkliches Tun zu einem Tun von Nichts, sein Genuss Gefühl seines Unglücks. Hiermit verlieren Tun und Genuss allen allgemeinen Inhalt und Bedeutung, denn dadurch hätten sie ein An- und Fürsichsein, und beide ziehen sich in die Einzelnheit zurück, auf welche das Be-wusstsein, sie aufzuheben, gerichtet ist.

먼저 의식의 반대되는 관계를 살펴보면, 의식에게 자기의 현실성이 곧바로 무(無)로 드러나는 관계에서, 그 실제적 행위는 곧 무(無)의 행위가 되고, 그 향유는 자기 불행의 감각이 된다. 이로써 행위와 향유는 모든 보편적 내용과 의미를 상실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을 통해서만 그것들이 어떤 ‘자체로서의’(An-und-Fürsichsein) 성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위와 향유는 모두 개별성 안으로 되돌아가며, 의식은 그것들을 소멸시키려는 방향으로 지향하게 된다[📌 해설
여기서 헤겔은 불행한 의식의 세 번째 국면을 다루고 있음. 의식은 자신의 현실적 활동(행위, 향유)을 무의미한 것으로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무(無), 즉 참된 본질과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 따라서 의식은 행위와 향유에서 보편적 의미를 찾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안의 개별성에 매여 있게 됨. 이렇게 되면 의식은 자기 행위와 향유를 스스로 폐기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들어가며, 이는 곧 자기부정적 운동을 강화시킴].

상동 189

Seiner als 'dieses wirklichen Einzelnen' ist das Bewusstsein sich in den tierischen Functionen bewusst. Diese, statt unbefangen als etwas, das an und für sich nichtig ist und keine Wichtigkeit und Wesenheit für den Geist erlangen kann, getan zu werden, weil sie es sind, in welchen sich der Feind in seiner eigentümlichen Gestalt zeigt, sind vielmehr Gegenstand des ernstlichen Bemühens und werden gerade zum Wichtigsten.

의식은 자기 자신을 ‘이 현실적인 개별자’로서 동물적 기능들 속에서 의식한다. 이러한 기능들은, 그것들이 그 자체로서는 무(無)에 속하고, 정신에 대하여 어떠한 중요성이나 본질성도 가질 수 없으므로 무심히 수행되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적(敵)이 자기 고유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리이기에, 진지한 몰두의 대상이 되고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으로 된다[해설
헤겔이 말하는 “tierische Functionen”(동물적 기능)이란 기본적인 신체적 욕구와 생리적 활동(예: 먹기, 마시기, 성적 충동 등)을 가리킴. 원래라면 이러한 기능들은 정신에게는 단순히 자연적이고 부차적인 것이며, 본질적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들임.그러나 불행한 의식은 이 자리에서 “자기와의 적대적 분열”을 경험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기능들을 심각하게 여기며 영적 투쟁의 무대로 삼음.따라서 원래 무의미하고 부차적이어야 할 것이, 의식에게는 가장 중요한 전투의 현장이 됨👉 이 구절이 불행한 의식의 금욕주의적 태도(Askese)와 연결].

상동

Indem aber dieser Feind in seiner Niederlage sich erzeugt, das Bewusstsein, da es sich ihn fixiert, vielmehr statt frei davon zu werden, immer dabei verweilt und sich immer verunreinigt erblickt, und indem zugleich dieser Inhalt seines Bestrebens statt eines Wesentlichen das Niedrigste, statt eines Allgemeinen das Einzelne ist, so sehen wir nur eine auf sich und ihr kleines Tun beschränkte und sich bebrütende, eben so unglückliche als ärmliche, Persönlichkeit.

그러나 이 적(敵)은 패배 속에서 오히려 스스로를 산출한다. 의식은 그것을 고정시키는 과정에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커녕 언제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며, 따라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더럽혀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동시에, 그 노력의 내용은 본질적인 것 대신 가장 비천한 것이며, 보편적인 것 대신 개별적인 것일 뿐이므로, 우리는 단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사소한 행위에만 갇혀서 그것을 되새기며, 불행하면서도 초라한 인격을 보게 된다[해설
Feind(적)은 불행한 의식이 자기 안에서 싸우는 분열된 자아, 즉 동물적 욕구와 그에 대한 거부의 대상임. 이 적은 패배할 때마다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다시 생겨남. 즉, 억압하려는 욕구가 억압 속에서도 계속 되살아난다는 것. 따라서 의식은 자신을 정화하려 하지만 오히려 계속 “더럽혀진” 상태로 경험함. 이렇게 해서 불행한 의식은 보편적 정신적 자유를 얻지 못하고, 아주 작은 자기 행위들(금욕, 자기 검열 등)에만 집착하는, 초라하고 내향적으로 웅크린 인격으로 나타남 👉 이 대목은 불행한 의식의 금욕주의적 태도(Askese)의 내적 한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구절임. 여기서 불행한 의식이 종교적 자기부정의 단계로 넘어감].

상동

Aber an beides, das Gefühl seines Unglücks und die Armlichkeit seines Tuns, knüpft sich ebenso das Bewusstsein seiner Einheit mit dem Unwandelbaren. Denn die versuchte unmittelbare Vernichtung seines wirklichen Seins ist vermittelt durch den Gedanken ㅣdes (nwandelbaren und geschieht in dieser Beziehung Die 'mittelbare' Beziehung macht das Wesen der negativen Bewegung aus, in welcher es sich gegen seine Einzelnheit richtet, welche aber eben so als 'Beziehung an sich' positiv ist, und für es selbst diese seine Einheit hervorbringen wird.

그러나 자기 불행의 감정과 자기 행위의 빈곤함—이 두 가지 모두에 의식은 또한 불변자와의 자기 일치의 의식을 매달아 건다. 왜냐하면 자기 현실적 존재를 직접적으로 무(無)로 만들려는 시도는 불변자라는 사유에 매개되어서만 일어나며, 이 관계 안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 매개된 관계가 바로 부정적 운동의 본질을 이룬다. 그 운동 속에서 의식은 자기 개별성을 부정하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자체로서 관계’이므로 긍정적이다. 따라서 이 부정의 운동은 의식에게 바로 그 자신의 불변자와의 일치를 산출하게 된다[불행한 의식의 세 번째 단계(자기부정, 금욕)의 전환점을 보여주는 대목
1.부정의 운동은 단순한 파괴가 아님
불행한 의식은 자기 개별성(욕망, 육체, 자기적 행위)을 없애려 함.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자기 파괴가 아니라, 항상 불변자(신, 절대자)라는 사유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짐. 즉, 자기 부정은 “불변자를 의식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
2.부정 속에서 긍정이 발생
자기 개별성을 부정하는 것은 동시에 불변자와의 관계를 맺는 행위임. 따라서 자기 부정(Askese)은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불변자와의 일치를 긍정적으로 성취하려는 운동이 됨. 헤겔은 이를 “부정은 곧 긍정이다”라는 변증법적 원리로 설명함
👉 요약하면 불행한 의식이 자기 개별성을 억누르고 파괴하려는 그 부정적 행위는, 단순한 자기 파괴가 아니라 불변자와 하나 되려는 매개적 운동이며, 따라서 결국 긍정적 일치를 산출한다는 것이 헤겔의 주장. 이 부분을 초기 기독교의 수도원적 금욕주의와 연결되는데 이는 단순한 자기 억압이 아니라 불변자(신)와 하나 되려는 긍정적 운동으로 이해됨. 이렇게 보면, 헤겔의 불행한 의식은 단순한 개인 심리학이 아니라, 역사 속 기독교 수도원 운동 전체를 철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음].

상동 189-190

Diese unmittelbare Beziehung ist hiermit ein Schluss, in welchem die sich zuerst als gegen das 'Ansich' entgegengesetzt fixierende Einzelnheit mit diesem anderen Extreme nur durch ein drittes zusammengeschlossen ist. Durch diese Mitte ist das Extrem des unwandelbaren Bewusstseins für das unwesentliche Bewusstsein, in welchem zugleich auch dies ist, dass es ebenso für jenes nur durch diese Mitte sei und diese Mitte hiermit eine solche, die beide Extreme einander vorstellt und der gegenseitige Diener eines jeden bei dem anderen ist. Diese Mitte ist selbst ein bewusstes Wesen, denn sie ist ein das Bewusstsein als solches vermittelndes Tun; der Inhalt dieses Tuns ist die Vertilgung, welche das Bewusstsein mit seiner Einzelnheit vornimmt.

직접적인 관계는 따라서 하나의 ‘삼단논법’인데, 여기서 처음에는 ‘자기-것(Ansich)’에 맞서 고정된 개별성이, 오직 제3항을 통하여서만 그 다른 극과 결합한다. 이 매개를 통해 불변적 의식의 극은 비본질적인 의식에게 현존하며, 동시에 또 이 점도 그러하다. 즉 불변적 의식 역시 오직 이 매개를 통해서만 그 의식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매개는 양 극단을 서로에게 제시하며, 각각이 다른 쪽에게 다가가도록 하는 상호적인 봉사자이다. 이 매개는 스스로 하나의 ‘의식적 존재’인데, 그것은 의식을 의식으로서 매개하는 활동이며, 그 활동의 내용은 의식이 자기의 개별성을 소멸시키는 것이다[이 구절은 불행한 의식의 세 번째 태도―즉,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면서도 그 부정을 매개하는 제3항(Mitte)을 통해 불변자와 관계하는 단계를 설명
1.“Schluss” (삼단논법, 매개)
불행한 의식은 스스로와 불변자(Ansich) 사이에 직접적 일치를 이루지 못함. 그래서 두 극단(개별적 의식 ↔ 불변자)을 연결하는 매개(Mitte)가 필요함. 이 구조는 헤겔 논리학의 Schluss (삼단논법: 개별–보편–특수의 매개) 개념을 반영함
2.Mitte als bewusstes Wesen (매개는 의식적 존재)
이 매개는 단순한 추상적 고리나 논리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의식적 존재임. 즉, 자기와 불변자 사이에서 “중재하는 자(der Vermittler)”로 등장함. 역사적으로는 사제, 성직자, 교회 제도에 해당
3.Vermittelndes Tun (매개하는 행위)
이 매개의 활동은 단순한 연결이 아니라, 개별적 의식이 자기 개별성을 부정하고 없애는 과정임. 불행한 의식은 자기 자신을 직접 불변자에게 내놓지 못하기 때문에, 중재자를 통해 자기 부정을 수행함. 따라서 “Mitte 늣 고백과 사제의 사죄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4.결론
여기서 헤겔은 기독교의 교회 제도(특히 성례, 고백, 성직자)가 어떻게 불행한 의식과 불변자의 간격을 메워주는 “제3항”으로 기능하는지를 서술하는 것. 그러나 이 매개는 여전히 외적이며, 불행한 의식은 아직 자기 자신이 불변자임을 자각하지 못함. 따라서 이 단계는 자기소외의 지속이자 동시에 자기화해의 준비 단계임
👉 요약하면, 이 구절은 불행한 의식의 자기부정이 ‘직접적 관계’에서 실패하고, 그것을 매개하는 제3의 의식적 존재(사제, 교회)를 통해서만 불변자와 이어진다는 점을 보여줌].

상동 190

In ihr also befreit dieses sich von dem Tun und Genusse als dem seinen; es stösst von sich als für sich seiendem Extreme das Wesen seines 'Willens' ab und wirft auf die Mitte oder den Diener die Eigenheit und Freiheit des Entschlusses, und damit die 'Schuld' seines Tuns. Dieser Vermittler, als mit dem unwandelbaren Wesen in unmittelbarer Beziehung, dient mit seinem 'Rate' über 'das Rechte'.

따라서 이(불행한 의식)는 그 소멸의 활동에서 그 자신의 작용과 향유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며, 자기 자신을 하나의 자기-존재하는 극으로서, 그 의지의 본질을 자신에게서 밀쳐내어 중재자 혹은 봉사자에게 자기 결단의 독자성과 자유, 그리고 그 행위의 죄책을 던져버린다. 이 매개자는 불변하는 본질과 직접적인 관계 속에 있으므로, ‘옳은 것(das Rechte)’에 관하여 조언을 베푸는 역할을 한다[해설
여기서 Mitte oder Diener(중재자/봉사자)는 종교적 맥락에서 사제(교회 권위자)를 가리킴. 불행한 의식은 자기 행위의 죄책과 결단의 자유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그것을 사제에게 넘겨 버림. 따라서 ‘옳음’(das Rechte)과 행위의 정당성은 이제 자기 안에서가 아니라, 매개자를 통해 규정됨. 이것이 바로 불행한 의식의 타자 의존적 구조를 보여주는 대목].

상동 190

Die Handlung, indem sie Befolgung eines fremden Beschlusses ist, hört nach der Seite des Tuns oder des Willens auf, die eigene zu sein; es bleibt aber noch ihre gegenständliche Seite dem unwesentlichen Be-ㅣwusstsein, nämlich die Frucht seiner Arbeit und der Genuss. Diescn stösst es also ebenso von sich ab und leistet wie auf seinen Willen so auf seine in der Arbeit und dem Genusse erhaltene Wirklichkeit Verzicht; auf sie, teils als auf die erreichte Wahrheit seiner selbstbewussten Selbstständigkeit, — indem es etwas ganz fremdes ihm Sinnloses vorstellend und sprechend sich bewegt, - teils auf sie als äusserliches Eigentum, -indem es von dem Besitze, den es durch die Arbeit erworben, etwas ablässt; teils auf den gehabten Genuss, indem es ihn im Fasten und Kasteien auch wieder ganz sich versagt.

행위는, 그것이 타인의 결정을 따름이기에, 의지 또는 행위의 측면에서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것이기를 멈춘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의 대상적 측면―즉, 노동의 열매와 향유―는 불완전한 의식에게 남아 있다. 따라서 의식은 이 역시 자기로부터 밀쳐내고, 자기의 의지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노동과 향유 속에서 획득된 자기 현실성에 대해서도 포기한다.즉, 한편으로 그것을 자기의 자각된 자립성의 도달된 진리로서 포기하는데, 이는 자기에게 전적으로 낯설고 무의미한 것을 표상하고 발설하면서 자신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론 그것을 외적 소유로서 포기하는데, 이는 노동을 통해 획득한 소유의 일부를 내어주는 방식이다. 또다른 한편으론 그것을 이미 경험된 향유로서 포기하는데, 이는 단식(Fasten)과 고행(Kasteien)으로써 그것을 다시금 완전히 자신에게서 금하는 것이다[이 구절은 불행한 의식이 단순히 자기 의지를 매개자(사제)에게 내맡는 것에 더해, 자기 행위의 결과물, 즉 노동의 열매와 향유(Genuss)마저도 포기하는 모습을 설명

이 대목은 불행한 의식이 자기 의지뿐 아니라 자기 현실성(Selbstwirklichkeit) 자체를 부정하는 과정을 보여줌
현실성은 세 가지 형태로 포기됨
정신적 차원 : 자기 자립성을 부인하며, 무의미한 언어적·상징적 행위로 대체.
소유물 차원 : 노동의 소산을 타인에게 나눠줌(자발적 빈곤).
육체적 차원 : 감각적 쾌락을 금욕으로 억제(단식과 고행).
결국 불행한 의식은 자기 전체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면서, 불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기의식을 성립시키려 함].

상동 190-191

Durch diese Momente des Aufgebens des eigenen Entschlusses, dann des Eigentumes und Genusses und endlich durch das positive Moment des Treibens eines unverstandenen Geschäftes nimmt es sich in Wahr-De heit und vollständig das Bewusstsein der inneren und äusseren Freiheit, der Wirklichkeit als seines Fürsich-seins; es hat die Gewissheit, in Wahrheit seines Ichs sich entäussert und sein unmittelbares Selbstbewusstsein zu einem 'Dinge' , zu einem gegenständlichen Sein
gemacht zu haben.

자신의 결단을 포기하고, 이어 소유와 향유를 포기하며, 마지막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에 몰두하는 긍정적 계기를 통하여, 의식은 참으로 그리고 완전히 내적·외적 자유의 의식, 즉 자기-존재(Fürsichsein)로서의 현실성을 상실한다. 그것은 자기의 ‘나’를 실제로 소외(entäußert)시켰으며, 자기의 직접적인 자기의식을 하나의 사물(Ding), 곧 대상적 존재로 만들어버렸다는 확신을 갖는다[이 부분은 앞에서 설명된 세 가지 포기(결단, 소유, 향유)를 종합하는 대목
이 대목은 불행한 의식이 자기 전체를 철저히 부정한 결과, “나는 자유로운 주체다”라는 의식마저 상실하게 됨을 말함. 그 결과, 의식은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주체로 경험하지 않고, 마치 사물(Ding)처럼 대상화된 존재로 느낌. 핵심은 자기소외(Entäußerung)로서 의식은 자기의 내적 본질(결단)과 외적 현실(소유·향유)을 내던져, 자기 자신을 외부적 대상처럼 만들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
👉 지금까지의 불행한 의식 전개 : ① 내적 결단의 포기 → ② 소유의 포기 → ③ 향유의 포기 → ④ 자기 전체의 대상화(사물화)].

상동 191

Die Verzichtleistung auf sich konnte es allein durch diese wirkliche Aufopferung bewähren, denn nur in ihr verschwindet der 'Betrug', welcher in dem inneren Anerkennen des Dankens durch Herz, Gesinnung und Mund liegt, einem Anerkennen, welches zwar alle Macht des Fürsichseins abwälzt und sie einem Geben von oben zuschreibt, aber in diesem Abwälzen selbst sich die äussere Eigenheit in dem Besitze, den es nicht aufgiebt, die innere aber in dem Bewusstsein des Entschlusses, den es selbst gefasst,ㅣund in dem Bewusstsein seines durch es bestimmten Inhalts, den es nicht gegen einen fremden es sinnlos erfüllenden umgetauscht hat, behält.

자기에 대한 포기(Verzicht)를 참되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러한 실제적 희생을 통해서만이다. 왜냐하면 단지 그 속에서만 “기만(Betrug)”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기만은, 마음·태도·입술을 통한 내적인 감사의 승인 속에 깃들어 있다. 그런 승인은 비록 자기-존재(Fürsichsein)의 모든 힘을 떨쳐버리고 그것을 위로부터의 은총에 귀속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떨쳐버림 안에서조차 여전히 자기의 외적 개별성은 포기하지 않은 소유 속에 남아 있고, 내적 개별성은 자신이 스스로 내린 결단의 의식 속에, 그리고 자기 자신이 정한 내용의 의식 속에 보존되어 있다. 그 내용은 타인에 의해 무의미하게 채워진 것으로 바뀌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이 문단은 불행한 의식이 왜 단순한 “입술의 감사”나 “마음속 동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반드시 실제적인 자기 희생(Verzicht, Aufopferung)을 통해서만 자기 부정을 완성할 수 있는지 보여줌
헤겔이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단순한 “감사”나 “내적 인정”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방식이라는 점
외적 자기성(Eigenheit): 소유물(재산)을 버리지 않음.
내적 자기성: 스스로 결단했다는 의식, 자기 의지로 정한 내용에 머무름.
따라서 진정한 자기 포기(Verzicht)는 단순한 감사·내적 인정이 아니라, 실제적 희생을 통해서만 증명됨.
상술하면,  외적 자아(Eigenheit)는 여전히 소유(재산, 물질적 소유물)를 지니고 있고, 이를 포기하지 않음. 내적 자아는 스스로 결정했다는 결단의 의식과, 자기 스스로 정한 내용의 의식을 여전히 유지함. 즉, “나는 내 힘을 버렸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내가 버리기로 결정했다’는 주체성을 놓지 않고 있는 것임. 따라서 입술의 감사나 내적 동의만으로는 여전히 자기 보존의 기만이 작동. 그래서 불행한 의식은 진짜 자기 포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은밀히 지키면서 포기했다고 가장하는 것. 이 때문에 헤겔은 그것을 Betrug (기만, 자기기만)이라고 부른 것임.
이 기만을 넘어서는 길은 실제적 희생(Aufopferung)뿐임. 즉, 결정권(의지), 소유, 향유(즐김) 모두를 포기함으로써만 자기 자신을 “대상화된 것”으로 만들 수 있음. 그래서 불행한 의식은 수도승적 금욕, 금식, 재산 포기 같은 구체적 실천에 이르게 됨].

상동 191-192



https://youtu.be/9076Gwdhx7U?si=skowmsGkVm4tStRd

정신현상학 강독24 : 불행한 의식 감상(신학적 변증) 20250916175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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