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어의 귀환처 : 『깊은 강』

책들 Bücher 2010. 8. 18. 18:0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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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의 강줄기에서 태어난 연어들은 바다를 누비다가 다시 자신이 태어난 강줄기로 되돌아 와 산란하고 죽는다. 이 연어의 강줄기처럼, 인도의 갠지스 강은 인도 순례자들이 최후를 맞이하는 곳이다.  이 소설은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에 도달하기 위해 숨을 헐떡이며 사력을 다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외국 관광객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인간이라는 극히 나약하면서도 악랄한 연체 동물에게 갠지스강은 모든 것을 정화시켜 주는 장소로, 화장터에서 한 줌 가루가 되어 강에 뿌려지기도 하고, 화장을 할 비용이 없어 그냥 버려진 시체들도 둥둥 떠다니는 강이다. 이런 강에서 사람들은 세속의 죄를 씻고 감격의 기도를 한다. 

미쓰코에 의해 소개되는 인물이지만 실지로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라 할 만한 오쓰는 엔도 슈샤코의 종교관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카톨릭에서 시작해 세계종교를 포괄하는 종교관은 일본 특유의 것이라가 보다는, 동아시아의 범신론에 가깝다. 동학도 유불선을 통합한 종교가 아닌가? 분석하고 가르고 구분짓는 서양의 종교에 대해 아우르고 포용하고 해체하는 종교야말로 엔도 슈샤코의 종교관이며, 이는 서양의 잣대에서 이단일 수 밖에 없다. 오쓰가 끊임없이 수도회 교단으로부터 이단의 혐의를 받듯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인도는 다중적이다. 분열증을 보이는 인간처럼, 저마다의 성장배경과 시대,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인도에 대해서 보이는 반응은 서로 다르다. 기구치, 누마다, 미쓰코는 점차로 갠지스 강의 마력에 빠져들디만, 젊은 산조 부부는 계속해서 인도를 천대하고 관찰만 한다. 7억의 인구가 계급과 종교로 갈가리 갈라져 반목하는, 변함없는 아수라장같은 곳에서 종교는 진정한 아편이 아닐까? 종교에 침윤된 국가의 변함없는 모습 속에서 비참과 괴로움은 갠지스 강처럼 유유히 계속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   

"대립이나 증오는 나라와 나라뿐만 아니라, 상이한 종교간에도 이어진다. 종교의 차이가 어제, 여성 수상의 죽음을 낳았다. 사람은 사랑보다는 증오에 의해 맺어진다. 인간의 연대는 사랑이 아니라 공통의 적을 만듦으로써 가능해진다. 어느 나라건 어느 정교건 오랫동안 그렇게 지속되어 왔다. 그 속에서 오쓰 같은 피에로가 양파[예수]의 원숭이 흉내를 내고, 결국은 쫓겨난다."(p.293)

마키아벨리가 주창한 비열한 음모와 처단으로 결판이 나는 세상에서 예수의 흉내를 내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화장터로 옮겨주는 이들의 행위가 또 하나의 허무함을 더할지 모른다. 그러나 비인간적인 냉대와 무관심이 팽배한 곳에서 인간이 인간 이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례가 없다면 그건 허무함 정도가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배신일 것이다.

엔도 슈샤코, 『깊은 강』유숙자 역(민음사, 2009, 1판 4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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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숙명

책들 Bücher 2010. 7. 26. 11:1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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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량은 작물의 노쇠과정에서 형성되므로 이 시기에는 그 작물이 가진 최고생산능력의 일부밖에 발휘될 수 없다. 말할 것도 없이 농업의 특징은 생물의 증식과정을 이용하는 것이다. 식물개체가 영양생장을 계속하는 한, 개체수의 증가는 없다. 자손을 남기기 위한 생식생장에 의해 개체수가 늘어난다. 생식생장은 어미개체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는 무한의 반복을 작물생산에서 이용하는 것이다. 화학비료는 개체의 영양생장량을 증가시키는 데 효과가 있지만, 개체의 죽음을 방지할 수는 없다. 어미개체의 죽음이 없도록 하는 것은 자손의 개체수가 증가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며, 목적인 수확을 얻을 수 없는 모순이 있다. 이것이 생물생산의 특질이고 ㅣ 숙명이다."

쓰노 유킨도, 『소농 : 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성삼경 옮김(녹색평론사, 2004, 2쇄), 24~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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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콘래드, 『어둠의 속』(1899)

책들 Bücher 2010. 7. 24. 20:2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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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제대로 집중해서 못봐서 그런건지, 번역이 시원찮은 것인지, 보고 난 후 느낌이 아리까리하다. 혹은 원작으로 코폴라에게 영향을 끼쳐 80년 후 개봉된  『지옥의 묵시록』의 영상이 더 강하게 기억에 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콩고의 원시림은 캄보디아의 밀림으로 대체되었지만, 커츠라는 신비의 베일에 싸인  이름은 동일하다.  

10대 시절부터 동양으로 나가던 배를 타다가 항해사, 선장의 지위까지 오름으로써 성공한 뱃사람으로 장성한 폴란드 출신의 콘래드는 생생한 선박 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19세기 말의  영국 문단에 서서히 이름을 드러냈다. 일찍 부모를 여윈 고독한 소년에게 바다의 냉정한 고요와 격로는 젊은 심장을 단련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콘래드가 만약 문학의 길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면 그는 아마도 선장생활로 인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에게 소설을 쓰고 싶은 욕구는 끊임없이 배를 타고 나가고 싶어하는 욕구의 대체물이다. 한편, 뱃사람의 경력으로 본다면, 허먼 멜빌은 조셉 콘래드에게 풋내기에 불과할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은 등장인물이 화자가 되어 소설을 이끌어가는 나레이션기법이다. 밤안개가 깔리며 세계의 끝까지 이어질듯한 템즈강에서 말로우가 동료들에게 상아를 쫏아 콩고에 갔던 얘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소설은 시종일관 전개된다. 소설의 시작과 중간에 필자의 개입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으나, 매우 이례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오디오북을 미리 예견한 것일까? 이 소설은 말로우라는 인물을 가상설정해서 말로우가 낭독하는 오디오북으로 듣는다면 더 와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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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사의 대표 선수들

책들 Bücher 2010. 7. 23. 23:0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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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 이우성, 『참농부 : 더불어 사는 농부의 꿈』(흙살림연구소, 2004년 1판 1쇄)

여기에 나오는 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음성의 최재명, 홍천의 연익흠, 아산의 정선섭, 당진의 정광영, 부안의 정경식, 괴산의 김용길, 보은의 이철희, 대구의 이영일, 울진의 강문필, 음성의 성기남, 김천의 김성순, 의성의 김영원, 해남의 박충길, 영동의 서순악.

관행농으로 피폐해진 농토를 생명의 땅으로 일군 이분들의 노고와 창의에 숙연한 느낌이 든다. 얼마전 읽은 가와구치의 자연농법과 다소 거리가 있지만, 한국 농토의 특성상 퇴비의 사용이 불가피해 보인다. 자신이 죽으면 소나무 아래에 묻어달라고 한 강문필 선생의 말처럼, 언젠가 수명을 마칠 우리의 몸을 미생물에게 돌려주는 것이 또다른 순환일 것이다. 서순악 선생의 인터뷰를 인용하고 글을 마친다. 더이상의 글은 쓸데없는 치장에 그칠듯 하다.   

"배추가 자랄 때면 배추흰나비가 날아와 알을 낳고 애벌레가 나와 잎을 뜯어먹습니다. 그때는 원수지간이지만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배추흰나비가 날아와 배추가 꽃을 피우게끔 수정을 시켜줍니다. 나비가 되어서는 한 몸이 되는 것이지요. 배추흰나비가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죽어 흙이 되고 물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니 나와 다른 사람은 한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순환체계가 나를 유기농업을 하게 했지요."(177면)    

참고로 이 책에는 이들의 농사비법도 소개되어 있다. 이들에게 유기농업의 비법이나 기술은 자연주의적인 신념과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잔기술을 앞세우기 보다는 비전과 신념을 먼저 제시하려는 점에서 애플과 참농부들은 뭔가 통한다. 삼성과 대형 할인점에 이런 비전과 신념이 있는가? 천박한 상술로 무장된 돈벌이로 정신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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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 가와구치 요시카즈, 최성현 역『신비한 밭에 서서(들녁 2004, 초판 2쇄)

유기농법이라는 말은 널리 회자되고 있으나 자연농법이란 말은 일반인에게 생소하다. 나도 몇 번 이에 관해 생산자에게 들어본 적은 있으나 별로 가능성 없는 농법으로 봤던것 같다. 후쿠오카 마사노부가 자연농법의 철학을 일구었다면, 가와구치 요시카즈는 실제 농사와 결합된 자연농법의 실제를 보여준다고 하는데, 이 책의 내용은 사실 무위의 자연관을 표방하는 문학에 가깝고, 오직 장별로 수록된 충분한 사진들이  자연농법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지은이는 가업으로 농사를 물려 받았는데, 한때 젊은 시절에는 미술에 심취했었다. 관행농으로 농사를 짓다가 농약과 제초제의 폐해를 실감하고 농약과 제초제는 물론, 비료나 퇴비도 주지 않고, 밭을 갈지 않는 이른바 무경운 농법을 하면서 농토를 낙원으로 변모시켰다. 가와구치의 농사철학은 생명의 터전인 지표면에 최소한의 인위작용만을 가하고, 온 생명이 살아 갈 수 있게 내버려두라는 주의이다. 예를 들어, 논농사를 짓더라도, 농토에 자라는 잡초를 모두 제거할 것이 아니라, 벼의 생장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김을 매주고, 맨 김은 그대로 덮어둔다. 잡초를 제거하려고 뿌리를 뽑는 식으로 땅을 파헤치는 것을 가와구치는 지표면에 손상을 일으켜 생명의 활동에 교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지구의 피부에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10년간 땅을 갈지 않고 잡초는 그대로 베어 쌓아 놓기만 해도, 그 안의 농토는 온갖 미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살아있는 땅으로 거듭 변화해 간다는 놀라움에 기반한다. 사진상으로 논농사를 짓는 농토를 보면, 초반에는 잡초밭과 논밭의 구별이 모호할 정도로 방치된 감이 있지만, 초여름에 접어 들면 벼는 주변 잡초의 생장력을 무시할 정도로 불쑥 불쑥 자란다. 벼의 밑에 깔린 잡초는 미생물과 풀벌레의 먹이가 된다.   
 
자연에서 인간의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도입된 신석기 시대의 농경이 인간만을 위한 농업이 아니라 다시 자연에 되돌려주는 방향으로 나가자는 주장은 퇴행 내지 반문명주의로 비춰질 수 있지만, 적어도 그의 농사현장 자체가 예술적 체험을 일으킬 정도로 감응을 준다는 것은, 뭔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이성중심주의의 인위적 자연관이 위기에 봉착한 상황에서 인간의 작위를 최소화시키는 무위의 자연관이 땅에 실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4대강의 무참한 국토살육 앞에서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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