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민승남 역(민음사, 2008, 1판 18쇄)
유진 오닐은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통속극으로 25년간 전미를 돌며 돈을 갈고리로 쓸어 담는데 주력했던 주연배우 제임스 오닐의 삼남이었다. 아일랜드 출신으로서 불우한 어린시절을 겪으면서도 셰익스피어 전문배우의 꿈을 가졌었지만, <몬테그리스토 백작>의 장기간 흥행으로 돈방석에 앉으면서 오로지 돈만 생기면 땅만 살 궁리를 하고 정작 가족에게는 인색했던 아버지를 경멸했던 유진 오닐은 찰리 채플린과 결혼한 딸과 의절했다. 채플린을 통속 배우 쯤으로 본 것일까?
자전적 이야기에 허구를 이음새 없는 옷처럼 잘 기우는 교묘한 작품들과 달리, 이 소설이 당기는 흡입력은 처참한 진실, 가장 내밀한 가족사의 속내를 비수같은 말들로 속속들이 파헤친다는 점이다. 말보다 잔혹한 도구가 있을까? 폭력은 말의 연장이다. 공포도 말의 연장이다. 단 하루 동안 한 가족에 일어난 일의 단면 만을 들춰내는 것으로도 겹겹히 굴곡을 이뤄 소용돌이치는 가족사의 전모가 드러난다. 이런 전개에서 희곡은 가장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속도감을 갖춘 형식이다. 쏟아지는 대사의 곡사포를 영화가 따라갈 수 있을까?
역자는 이 자전적 희곡이 아픔의 가족사를 보편적 진실로 승화시킨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분열된 가족상은 현대극의 빼놓을 수 없는 단골메뉴다. 막장 드라마에 사람들은 얼마나 열광하는가? 막장 드라마도 가족간의 피할 수 없는 연민과 동정을 유발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자전적 작품이 막장과 다른 것은, 이들 가족이 서로를 너무도 사랑하면서도 분열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한때 성모의 계시를 받고 수녀를 꿈꾸던 메리는 잘 생긴 늠름한 배우 티론에 흠뻑 빠져 결혼을 했고, 쉰살이 넘어서도 그에게서 받은 드레스를 보며 황홀해 하지만, 남편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부족해 자꾸 과거로 거슬로 올라간다. 티론 역시 요조 숙녀였던 메리를 사랑했지만 집 보다는 바에서 친구들과 노닥거리고 든든한 자산인 부동산에 여유 돈을 투자할 생각에 골몰하면서도 폐병에 걸린 자식은 값싼 요양원에 보낼 궁리를 한다. 가족의 기대를 받던 맏아들 제이미는 병을 앓고 있는 동생 에드먼드를 보호해 주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실패로 인해 동생을 질투한다. 에드먼드는 독립을 꿈꾸며 대학을 자퇴하고 선원생활을 하는 등 방랑하지만 폐병을 안고 귀가한다. 1910년 대에 대단한 부자는 아니더라도 여름 별장에 하인과 운전수를 둘 수 있을 정도의 집안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가족간의 가벼운 불화 정도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알콜 중독 보다 무서운 중독이 가족에게서 발생한다는 것은 크나큰 충격과 아픔일 수 밖에 없다.
그 아픔의 각인이 이런 작품을 낳게 했다면, 고통은 정말 창작의 밑거름이다. 그 동기에서나 과정에서도 잔혹한 진실이다.
"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이 극의 원고를 당신에게"
(칼로타에게 바치는 헌정사 중에서)
출근 시간 전. 아침 7시인줄 알고 일어나 허겁지겁 밥을 먹다가 알았다. 6시 였다. 그래서 잠깐의 시간이 나서 어제 마져 읽은 한트케의 책에 대해 짧은 서평, 아니 단상을 남겨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자에 따르면 한트케는 자신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라고 했다. 이 소설에서 한트케는 고전주의 작가처럼 마치 신이나 점쟁이라도 된듯이 작중인물의 영혼을 관통해 가며 서술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대상화시킨다. 단,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만은 예외다. 이 부분은 아마도 작가가 어머니와 오랜 세월 나눌 수 밖에 없었던 대화에 기반한 것으로서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뒤에 실린 <아이 이야기>의 경우는 철저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아이를 바라다 보는 시선과 느낌이 보인다. 도대체 아이가 다섯살이 될 때까지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를 바라볼 수 있는 세심함이 남자에게 가능할까?
이 책의 페이지를 얼마 안 남겨둔 시점에서 내게 어떤 일이 있었다. 그 다음날 하루종일 책이 눈에 안들오다가 퇴근 전철길에서 겨우 책을 들었다. 많은 눈들이 우글거리는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부딪칠 수 있는 문제에 봉착하면서, 불안과 기대가 교차됐다. 이 책의 제목처럼, 소망은 아름답지만 모든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데 불행이 있다. 하지만 소망마져 없다면 그건 더 큰 불행이다. 욕망의 끊임없는 생산을 위한 전략적 서술은 『천 개의 고원』을 이룬다. 다종다양한 고원, 상이한 능력들, 이질적인 세포체들을 단일한 조직, 유일신적인 중심축(pivot)으로 재단하는 획일화의 욕구에 대항하는 기점이 준비된다. 이런 점에서, 김예슬의 행동은 존경스럽다.
이 소설은 스탕달(본명은 앙리 벨)이 59세의 나이로 파리의 한 거리에서 뇌졸증으로 쓰러지기 4년 전인 1838년, 52일간의 구술로 완성된 작품이다.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의 혁명군에 참가해 출세가도를 달리던 스탕달은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국외를 떠돈다. 이후 그는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으로 관직에 복귀해 이탈리아의 교황령 치비타 베키아 주재 영사로 근무하던 중 파리에 휴가차 왔다가 집필한 것이 이 소설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에 있었던 파르네제 가문의 실화를 바탕으로 시대에 맞춰 각색된 이 소설의 제목이 드러내듯, 이 소설의 중반부와 후반부의 주무대는 이탈리아 북부 오스트리아령의 파르마이지만, 왜 '수도원'이 들어가는지는, 이 소설의 급격한 결말에 가서야 알 수 있다. 파브리스가 클렐리아를 만나기 위해 설교소동을 벌이던 끝에 두 사람이 은밀한 밤, 크레센치 저택의 오렌지나무 온실에서 극적으로 만난 이후 벌어지는 3년간의 일들을 작가는 단호히 생략했는데, 이 부분만 다뤘어도 국역본으로 2권의 분량으로 된 이 소설은 3권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도덕을 모두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정략과 정열로 넘치는 이 소설의 통속성은 이 결말에 이르러서 극적인 반전을 이룬다. 시종일관 희극으로 치닫던 소설이 몇페이지를 남겨두고 급격히 비극으로 깍아 내려지는 급벼랑을 만난 듯한 형국이다. 이런 소설의 분위기는, 마치 한 시대를 뒤흔든 혁명의 시대에 가담해 역사의 전장을 밟고, 열정적인 로맨스를 벌였으며, 시대의 고난과 반전을 겪다가 객사한 스탕달의 인생과 흡사하다.
이 소설은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때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던 작중 화자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밀라노 공국 델 동고 가문의 일화를 듣는데서 시작하는데, 이 동기는 스탕달이 베키아 주재 영사로 이탈리아에 돌아와 16세기 파르네제 가문을 역사를 접한데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밤을 세워가며 이 이야기를 즐겨 들었던 화자는 이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 볼 것을 생각한다. 이것은 스탕달이 [파르네제 가문의 위대함의 기원]이란 기록물의 복사본을 모두 읽고 사본 여백에 이 이야기로 작은 소설을 만들어 볼 것이라고 적은데서 연유할 것이다. 소설의 시작은 작은 일화 정도의 실마리를 보이지만, 책의 분량이 말해 주듯 파브리스와 고모인 산세베리나 공작부인, 모스카 백작, 클렐리아, 궁중인사들을 중심으로 굵직한 모험들과 정략들이 이 소설에서 펼쳐진다. 다시 언급하지만, 연정을 위해 마키아벨리적인 권모술수와 활기로 넘치던 이 소설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흡사한 결말에 급작스럽게 당도한다. 삶의 활력이 치닫는 길은 결국 종교라는 종점에 이른다는 것인가? 소설에서 바로 그 종점은 '파르마의 수도원'인 것이다.
끝으로 이 소설의 에필로그는 To the Happy Few("소수의 행복한 사람들에게 바친다")라는 치사로 끝나다. 여기서 소수의 행복한 사람이란 파브리스나 산세베리나 공작부인, 나아가 모스카 백작처럼 사랑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열정가들을 가리킨다. 사랑을 위해서란 말은 극히 감정적이지만, 이런 열정 자체는 희귀하다. 그러나 이런 희귀한 한 사람의 열정이 열사람, 아니 그 이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이런 정열의 위대함과 공허함이 있는지 모른다.
The Crying of Lot 49, 토마스 핀천, 김성곤 역(민음사, 2009). 음모론과 정보이론이 결합된 고전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이미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혹은 『푸코의 추』, 그리고 영화 매트릭스에 익숙해 있으며,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에 진력이 나버린 21세기 초반엔 진부한 감이 있다. 이 소설이 출간된 1966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1960년대 미국 서부 연안에서 자아분열의 이상을 감지한 시대적 촉수는 비공식 우편제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핀천은 인터넷 시대를 예감했을까? 공식 우편망을 마비시키려는 트리스테로라는 비밀조직은 오늘날엔 해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별 감흥없이 빠른 속도로 무미건조하게 읽어나가기 좋은 소설같다. 이 소설의 주제와 분위기에 어울리는 철학작품을 꼽는다면 가따리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일 것이다.
『제 49호 품목의 경매』를 반납하고 스탕달의 『파르마의 수도원』2권을 빌려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이 '수도원'의 주인공들이 나르시즘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다. 18세기형 인간의 특징인지도 모르지만, 월리엄 포크너나 토마스 핀천의 작품에서 이런 나르시즘은 붕괴된다(이런 점은 다자이 오사무도 마찬가지다). 철학도 하나의 거대체계로서 헤겔에 이르러 종점을 찍듯이, 근대인의 열정과 자아도취도 이제 빛바랜 시대의 유산으로 남는다.
마지막으로 역자 해설에서 숫자 49와 관련된 설명이 나온다. 49는 제자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오순절 전날이나 죽은 자가 현세와 영원히 작별한다는 사십구제 처럼, 어떤 완전함, 결단을 기다리는 유예상태라는 의미다. 이런 점에서 또한 이 소설은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이버 블로그를 접으면서, 여기로 옮기지 못한 글이 많다. 모두 옮길 생각은 없고, 차근 차근 생각나는데로 옮긴다.
휴머니즘의 다른 얼굴 :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사하는 커다란 폭력?
2006년 1월 14일~1월 28일
페터 슬로터다이크 Peter Sloterdijk, 인간 농장을 위한 규칙Regeln für den
Menschenpark (대중의 경멸 Verachtung der Massen, 복음의 개선에 관하여 Über die Verbesserung der guten Nachricht), 이진우·박미애 옮김(2004, 한길사)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너 위대한 천체여! 네가 비추어줄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너의 행복이겠느냐!”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부 ‘짜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중에서
휴머니즘과 이념형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인본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15~16세기 발흥한 문예사조라는 좁은 의미에서 벗어나서 휴머니즘을 볼 때, 근대 역사는 물론 현대의 일상적 어휘 속에 산재한 휴머니즘을 베버식의 이념형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왜냐하면 이념형(Ideal Type)은 결과로서 주어진 특정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 개념인데, 이 개념에 휴머니즘을 적용하기에는 이 주의가 지시하는 바가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청교도 정신이 경제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기술한 경험주의적 문화과학의 첫 결실인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전제된 이념형이 금욕주의였던 것처럼, 하나의 이념형은 단지 경제 질서라는 하부구조 위에 놓인 정신적 구조물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배태된 구체적 사회를 이해해 들어가기 위한 방법론적 실마리, 방법론적 도구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휴머니즘은 어떠한가? 기독교를 필두로 한 금욕주의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민주주의, 동학, 유교,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양의 탈로 장식된 자본주의마저도 인본주의적 성격, 인간주의적 면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모든 주의들이 최소한 휴머니즘의 변종(變種)이라도 될 소지가 있다.
물론 서구의 역사 속에서 인간주의라는 표어가 두드러지게 부각된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시민 보다 높아지려는 사람들의 목을 치는 단두대 처형이 만연하기 전, 천부인권을 근거로 자유·평등·박애를 외친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와 같이− 특정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으로서의 인간주의는 너무도 포괄적이어서, 소박하게 좋은 뜻으로 사용해 쉽게 주어에 연결할 수 있는 보편화된 술어에 가깝다. 마치 골고루(전 역사를 통틀어) 퍼져 있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제 1부인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 하이데거의 휴머니즘 서한에 대한 답신’은 원래 슬로터다이크가 1997년 여름 바젤-엘마에서 연속적으로 행한 강연문인데, 이 강연의 후폭풍이 2년 후 독일의 공론영역을 뒤흔들 정도로 논란을 일으킨 글이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을 통해 전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하버마스까지 이 논쟁에 가세해 대결할 정도로 ‘악명’을 높이고 현재 독일 학계에서 각광받는 '철학자'로 자리잡은 슬로터다이크는 이 휴머니즘이란 오랜 표어를 놓고 전면전을 펼친다. 그에게 이렇게도 낡고 공허한 인간주의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싸울 만한 주제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런 공격은 피아가 불분명한 전선의 연막 속에서 무작위적으로 행하는 발포가 아닐까?
사람은 여전히 그 어떤 원숭이 보다도 더 철저한 원숭이-니체
이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리고 인간혐오주의로 보이는 듯한 니체의 저 표현(소제목)처럼 슬로터다이크는 인류의 역사를 인간 길들이기의 사회사로 볼 것을 제시한다. 그의 이런 제시는 니체의 모호한 서사시에 나온 한 구절을 니체 철학의 전체흐름에서 해석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 슬로터다이크 자신의 문제 의식을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서구의 역사에서 인간을 가축보다 더 정교하게 훈육시키는 가장 탁월한 수단은 바로 철학의 고전적 텍스트를 ‘읽는 행위’들이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인간은 길들여지는, 단순히 강제적일 뿐만 아니라 열렬히, 자발적으로 길들여지는 존재가 되었는가? 휴머니즘의 핵심, 즉 옹호되어야 할 인간성 자체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인가?
슬로터다이크는 인간성을 괄호친 채, 그것이 요구되어지는 요인을 찾기 위해 고대 로마의 원형 투기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세차게 내려치는 상대의 창검을 방패로 막으며 숨을 벌떡인 채 반격을 노리는 격투로 매순간 자신의 운명을 걸어야 하는 두 노예에게 열광하는 군중의 함성 속에서 비인간화의 진행을 목도하는 반성이 일어난다. 즉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선결규정으로 인간성의 요건이 충분해지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 상황으로 인간을 몰아넣는 사태 속에서 반사적으로 인간화의 요구가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성은 비인간성의 전도된 거울인 셈이다. 야만으로 들끊는 사람들의 몸부림과 절규를 물리치고 그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그들의 야만성에 저항하는 적절한 방법이 바로 읽기 행위라는 것이다. 읽는 행위를 통해 생성된 자기 의식은 투기장의 열기를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이른바 교양의 탄생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철학을 이러한 휴머니즘을 목표로 문자적 계몽을 해온 유서깊은 미디어의 하나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그의 제안은 서양 철학 전반을 실패한 이성의 기획으로 간주한 니체의 주장과 일치한다. 이들에 따르면 문자적 계몽은 기껏해야 왜소한 덕의 계발에 다름 아니었다. 이것은 차안의 인간으로부터 인간 밖의 피안으로 나가려는 초월적 관렴론이나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의 최하부단위로 인간을 규정해 놓는 원시적 유물론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에 반해 인간이 인간으로부터의 연속성 상에서 내재적으로 자신을 극복해 전혀 다른 개체로 될 가능성, 이른바 니체의 위버맨쉬Übermensch(초인이란 번역은 부적절해서 그대로 음역한다)에 근접할 창조성은 왜소한 덕의 장막을 뛰어 넘는 것이기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탄식한 것이다.
“모든 것이 작아지고 말았구나! 곳곳에 한층 더 낮아진 문들뿐이구나. 나와같은 사람도 아직은 그 문으로 들어갈 수가 있겠다. 그러나 그러려면 허리를 굽혀야 하리라. 오, 나 언제쯤, 더 이상 허리를 굽힐 필요가 없는, 저 왜소한 인간 앞에서 더 이상 허리를 굽힐 필요가 없는 내 고향으로 돌아가는가!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3부 ‘왜소하게 만드는 덕에 관하여’ 중)
왜소한 덕의 계발과 연루된 서양 철학의 흐름에서 슬로터다이크가 이 책에서 크게 비중을 두는 철학의 거장들은 플라톤,홉스,스피노자,헤겔·맑스,니체,하이데거이다. 이 책의 제 2부 ‘대중의 경멸 : 현대 사회의 문화투쟁에 관한 시론’에서 슬러터다이크는 홉스를 필두로 이 근대 철학의 대가들을 다소 거칠게 훑고 지나가는데, 여기서 그가 주도적으로 바탕에 깔고 있는 관점은 대중의 퇴행성을 주장한 엘리아스 카네티의 대중개인주의다. 대중을 ‘새까말 정도로 빽빽한 사람들’의 운집이라며 ‘경멸’하는 카네티에게 대중은 미디어의 부산물일 뿐이며, 오직 미디어를 통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피동적 객체에 불과하다. 언뜻 보면 개개인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이질적 구성으로 보이는 고독한 군중은 미디어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어서, 마지막까지도 그 개개인에게서 주도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개인적인 특성이 아니라, 미디어가 만들어 놓은 ‘공동의 특성’이다(p97-98). 이렇듯 카네티의 대중관을 통해 볼 때 스피노자와 니체를 제외한 저 거장들의 정치철학은 대중에게 아부하는 이론으로 격하되며, 그 중에서 하이데거는 다소 독특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근대 철학의 대가들을 다루기 전에, 저자는 제 1부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에서 인간 사육정치의 고전적 모델이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발원하며 그 극점은 하이데거의 저작에서 우뚝 서 있음을 보여주는 논의를 펼친다. 이것을 먼저 검토한 후에 근대 철학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살펴 본다.
인간 사육 정치의 극점과 발원지, 그리고 그 사이의 간주곡
2차 대전이 끝나고 한 발신자(장 보프레)가 전란의 참혹함이 묻어나는 필체로 휴머니즘의 복원이 가능한지 묻는 서한에 하이데거는 퉁명스럽게 응답한다. 그에 따르면 애시 당초 휴머니즘이란 사유의 운동으로 만든 개념이 아니라 단지 성급하게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 본질에 관한 물음을 회피하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와같이 하이데거가 휴머니즘 따위로 인간 존재에 관해 물음을 던지는 방식 자체를 거부하고 그의 고유한 존재론으로 인간과 동물, 인간 자체와 이성적 동물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를 부과해 그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두는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오히려 휴머니즘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극단화시킨다고 슬로터다이크는 해석한다. 그 기능이란 말을 통한 친교 행위인데, 교육을 통해서 가능했던 이 기능이 하이데거에 이르러 하나의 존재론적 각성이란 의식(儀式)으로 되살아 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침묵이 말을 대신해서 존재의 부름을 기다린다.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말을 걸도록 우리가 정좌한 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길들이기의 진일보한 형태이다. 다만 이런 길들이기는 어떠한 종파도 구성하지 않고 내면에만 침잠하므로 인도주의로 치장한 채 인간중심적 폭력으로 치닫을 수 있는 휴머니즘의 변종(저자는 이런 변종으로 볼세비즘,파시즘,아메리카니즘을 든다)과는 대립되는 ‘존재론적 순종’행위다.
존재에 순응하는 인간이 있는 장소로 하이데거가 비유하는 개념은 빈터(Lichtung)이다. 존재의 목자와 이웃이라는 상징으로 그려진 인간이 빈터에서 존재의 집을 짓는 것은 단지 언어의 집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슬로터다이크는 이 정주의 방식, 인간을 포함해 가축을 집에 묶는 것을 훈육과 사육의 문제로 본다(p.63). 환경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동물로 존재하는데 실패한 인간은 집에 안착함으로써 창밖의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게 된다. 명상이 동반되는 산책 역시 정주의 방식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이론의 본질은 창 밖을 내다보는 명랑한 시선......산보도...등 뒤에 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의 전형적 운동”(p.65). 건실한 가정의 미래를 위해 방치된 대지로 보이는 빈터에서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거기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결정과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니체가 폭로한 이 위험은 인간을 다루기 쉬운 가축의 성향으로 사육· 선택하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는 단지 읽기를 통해 교육시키는 권력이 문제가 아니라 선택을 내리는 배후 권력의 움직임이 큰 문제가 된다(p.70). 바로 휴머니즘이란 표어를 걸고 문자 계몽에 자발적으로 나서는 인간들의 선택자적 역할이 다른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슬로터다이크의 진단이다. 즉 미디어로 표명되기도 하는, 인간을 길들이는 추진력과 야수화 경향 사이의 투쟁, 대사육자들과 소사육자들간의 거인투쟁에서 거둔 문명화의 승전이 장기적으로 인류의 유전적 형질 변환으로까지 치닫을 수 있다는 것이다(p.73).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인간 사육의 고전적 모델이 플라톤의 대화편인 ‘정치가’(Politicus)와 ‘국가’(Politeia)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드물어서 귀한 사색 전문가인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사육자적 능력은, 좋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자발적이고 조종 가능한 인간 특성을 세밀하게 조율해 효과적으로 배합하는 기술이다(p.78). 이로서 플라톤이 말한 좋은 국가가 성립된다. 포퍼도 열린 사회의 적을 산출한 ‘전범’으로 플라톤을 끄집어 냈지만, 슬로터다이크는 집단적인 선택과 배제로 자신을 보호하는 집단의 자발성을 포퍼가 간과했다고 본다. 근대의 현실적 광장과 현대의 전자적 네트 속에서 자신의 동원능력을 경험하는 카네티 식의 대중을 포퍼가 몰랐다는 것이다.
근대 세계를 인정투쟁, 곧 타자에 대한 자기 승인을 위한 보편화된 투쟁의 무대로 본 헤겔의 해석에 저자는 거부된 인정이란 의미의 ‘경멸’을 보편화된 형식의 하나로 슬그머니 집어 넣는다. 왜냐하면 대중들 사이에 경멸을 배제한다면 대중들 사이에 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p.110). 인정 자체가 현실적으로 희소한 자원이기 때문에 인정의 거부도 불가피한 사회 형식일 수 밖에 없으며,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인정에 대한 욕망만을 부추기는 평등주의는 아부 이론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한편, 국가가 독점한 폭력의 위협에 인간이 공통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조건에서 홉스는 인간 평등에 대한 근거를 찾는다(p.116). 그의 주저인 ‘리바이던’ 도입부에서 인간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는 홉스에게 인간은 위협의 공포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심리학적 동질성의 기반 위에 있다. 슬로터다이크는 평등주의를 위한 이러한 토대를 ‘저급한 인간 본성’이라고 깎아 내린다. 그러나 당대 귀족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절대 왕권의 성립을 위한 이론적 전개를 위해 홉스가 ‘리비이던’ 도입부에서 방법론적으로 고안한 기계론적 인간관을 평등주의의 근대적 근거로 폄하하는 슬로터다이크의 인용은 다소 자신의 논지를 위해 선취 해석한 면이 있다. 이런 해석은 죽음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고 외친 프랑스의 거지 시인 비용을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박하다.
이에 비해 스피노자는 대중에게 아부하지 않는 반저널리스트로 부상된다(p.120). 그는 다수의 평민(vulgus)이 지향할 수 밖에 없는 탐욕에 직면해서 자기 통제의 방안으로 이성을 대체할 수 있는 상상력을 제시한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다수에게 제시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로 보충함으로써, 하나의 상상을 다른 상상으로 대체함으로써, 대중이 조금 덜 비합리적이고 조금 덜 감정의 노예가 됨으로써 조금 덜 손상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의 탐구다(p.121). 과대 포장된 인간 교양을 축소시키고 대중에게 위선적이지 않은 다수 이론을 창안한 것으로 저자는 스피노자를 평가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헤겔과 맑스를 함께 묶어서, 히틀러의 수평주의를 비판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다룬다. 이들은 ‘가장 비참한 빈곤으로부터 솟구쳐 오를 수 있는 자기 구원적 계급 분노의 환영’(p.129)에 빠져 혁명을 ‘정언명법’으로까지 오판해, ‘인류학적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원한감정을 질투로 해석하며 맑스를 졸렬하게 비판하는 일부 영미 윤리학과 영미 경제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급한 해석이다.
다만 전통적 계급 이론의 망에서 걸러지지 않는 대중의 거대한 욕망이 오락산업을 비롯한 문화산업에서 대체 충족되고 있는 현실은, 청년 맑스의 급진적 실천 원칙이 사회에서 실현되기가 얼마나 불투명한지 보여준다.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인간이 굴욕당하고 압박당하며 경멸받는 존재가 되는 모든 관계를 전복”하라는 청년 맑스의 열정적 촉구에 슬로터다이크는 경멸로 가득찬 현실을 인정하라며 냉랭하게 응답하는 것이다.
마무리 : 휴머니즘의 지평은 어디까지?
이 리뷰는 제 2부 ‘대중의 경멸’까지만 다룬 것이며, 2부에 있는 대중과 파시즘의 친화성에 대한 논의와 저자가 자기 찬양의 현대적 효시로 평가하는 니체의 복음서와 관련해, 언어의 기능을 나르시즘으로 파악한 제 3부 ‘복음의 개선에 관하여:니체의 다섯 번째 복음서(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관한 논의는 생략한다.
슬로터디이크가 이상의 비판에 대한 대안으로 어떤 모델을 제안하려는지 명확하지 않다. 대안의 제시 자체도 이미 만연되어 있지만 실현되지 않는 계몽주의에 대한 저자의 냉소 때문에 거부될 것이다. 다분히 예술의 차원에서 차이의 다양화를 옹호하는 면에서 그의 철학이 아도르노나 벤야민과 흡사한 면이 있지만 문제제기 이상의 의의가 있는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가 문학과 수사학의 접목을 꾀하며 비유와 수사를 사용해 간결하고 극적으로 저술한 작품들이 실로 방대하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라는 논문에 대한 데리다의 해체비평 ‘벤야민의 이름’(국내에서 ‘법의 힘’으로 번역된 책에 수록)처럼 슬로터다이크 자신이 일으킨 논란이 앞으로 어떻게 수습될지 불투명하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의 저자들을 실체없는 유령들으로 격하시킨 데리다처럼, 슬로터다이크에게 휴머니즘이란 실체없는 유령의 아부에 불과할 뿐인가?
적어도 휴머니즘의 지평이 길들이기와 교육의 문제를 넘어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실의 주요 사안과 맞닥뜨리지 않는 한, 인간 사육의 대명제로서의 휴머니즘은 끝났다(p.39)는 것이, 철학을 이론과 실천이 아닌 비유와 수사로 얼룩진 한편의 드라마로 연출시킨 슬로터다이크의 실존적 문제 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