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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 Bücher'에 해당되는 글 169건

  1. 2010.03.22 가족사의 파토스 : Long Day's Journey into Night(1941) 1
  2. 2010.03.12 『소망없는 불행』외
  3. 2010.02.23 『파르마의 수도원』 1
  4. 2010.02.11 제 49호 품목의 경매
  5. 2010.02.10 예전 서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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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민승남 역(민음사, 2008, 1판 18쇄)


유진 오닐은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통속극으로 25년간 전미를 돌며 돈을 갈고리로 쓸어 담는데 주력했던 주연배우 제임스 오닐의 삼남이었다.  아일랜드 출신으로서 불우한 어린시절을 겪으면서도 셰익스피어 전문배우의 꿈을 가졌었지만, <몬테그리스토 백작>의 장기간 흥행으로 돈방석에 앉으면서 오로지 돈만 생기면 땅만 살 궁리를 하고 정작 가족에게는 인색했던 아버지를 경멸했던 유진 오닐은 찰리 채플린과 결혼한 딸과 의절했다. 채플린을 통속 배우 쯤으로 본 것일까?    

자전적 이야기에 허구를 이음새 없는 옷처럼 잘 기우는 교묘한 작품들과 달리, 이 소설이 당기는 흡입력은 처참한 진실, 가장 내밀한 가족사의 속내를 비수같은 말들로 속속들이 파헤친다는 점이다. 말보다 잔혹한 도구가 있을까? 폭력은 말의 연장이다. 공포도 말의 연장이다. 단 하루 동안 한 가족에 일어난 일의 단면 만을 들춰내는 것으로도 겹겹히 굴곡을 이뤄 소용돌이치는 가족사의 전모가 드러난다. 이런 전개에서 희곡은 가장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속도감을 갖춘 형식이다. 쏟아지는 대사의 곡사포를 영화가 따라갈 수 있을까?   

역자는 이 자전적 희곡이 아픔의 가족사를 보편적 진실로 승화시킨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분열된 가족상은 현대극의 빼놓을 수 없는 단골메뉴다. 막장 드라마에 사람들은 얼마나 열광하는가? 막장 드라마도 가족간의 피할 수 없는 연민과 동정을 유발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자전적 작품이 막장과 다른 것은, 이들 가족이 서로를 너무도 사랑하면서도 분열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한때 성모의 계시를 받고 수녀를 꿈꾸던 메리는 잘 생긴 늠름한 배우 티론에 흠뻑 빠져 결혼을 했고, 쉰살이 넘어서도 그에게서 받은 드레스를 보며 황홀해 하지만, 남편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부족해 자꾸 과거로 거슬로 올라간다. 티론 역시 요조 숙녀였던 메리를 사랑했지만 집 보다는 바에서 친구들과 노닥거리고 든든한 자산인 부동산에 여유 돈을 투자할 생각에 골몰하면서도 폐병에 걸린 자식은 값싼 요양원에 보낼 궁리를 한다. 가족의 기대를 받던 맏아들 제이미는 병을 앓고 있는 동생 에드먼드를 보호해 주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실패로 인해 동생을 질투한다. 에드먼드는 독립을 꿈꾸며 대학을 자퇴하고 선원생활을 하는 등 방랑하지만 폐병을 안고 귀가한다. 1910년 대에 대단한 부자는 아니더라도 여름 별장에 하인과 운전수를 둘 수 있을 정도의 집안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가족간의 가벼운 불화 정도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알콜 중독 보다 무서운 중독이 가족에게서 발생한다는 것은 크나큰 충격과 아픔일 수 밖에 없다.

그 아픔의 각인이 이런 작품을 낳게 했다면, 고통은 정말 창작의 밑거름이다. 그 동기에서나 과정에서도 잔혹한 진실이다.   

                 "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이 극의 원고를 당신에게"
                                                                        (칼로타에게 바치는 헌정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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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없는 불행』외

책들 Bücher 2010. 3. 12. 06:5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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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시간 전. 아침 7시인줄 알고 일어나 허겁지겁 밥을 먹다가 알았다. 6시 였다. 그래서 잠깐의 시간이 나서 어제 마져 읽은 한트케의 책에 대해 짧은 서평, 아니 단상을 남겨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자에 따르면 한트케는 자신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라고 했다. 이 소설에서 한트케는 고전주의 작가처럼 마치 신이나 점쟁이라도 된듯이 작중인물의 영혼을 관통해 가며 서술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대상화시킨다. 단,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만은 예외다. 이 부분은 아마도 작가가 어머니와 오랜 세월 나눌 수 밖에 없었던 대화에 기반한 것으로서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뒤에 실린 <아이 이야기>의 경우는 철저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아이를 바라다 보는 시선과 느낌이 보인다. 도대체 아이가 다섯살이 될 때까지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를 바라볼 수 있는 세심함이 남자에게 가능할까?  

이 책의 페이지를 얼마 안 남겨둔 시점에서 내게 어떤 일이 있었다. 그 다음날 하루종일 책이 눈에 안들오다가 퇴근 전철길에서 겨우 책을 들었다. 많은 눈들이 우글거리는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부딪칠 수 있는 문제에 봉착하면서, 불안과 기대가 교차됐다. 이 책의 제목처럼, 소망은 아름답지만 모든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데 불행이 있다. 하지만 소망마져 없다면 그건 더 큰 불행이다. 욕망의 끊임없는 생산을 위한 전략적 서술은 『천 개의 고원』을 이룬다. 다종다양한 고원, 상이한 능력들, 이질적인 세포체들을 단일한 조직, 유일신적인 중심축(pivot)으로 재단하는 획일화의 욕구에 대항하는 기점이 준비된다. 이런 점에서, 김예슬의 행동은 존경스럽다.      

페터 한트케, 『소망없는 불행 Wunschloses UnglückKindergeschichte  윤용호 역(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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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의 수도원』

책들 Bücher 2010. 2. 23. 09:0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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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스탕달(본명은 앙리 벨)이 59세의 나이로 파리의 한 거리에서 뇌졸증으로 쓰러지기 4년 전인 1838년, 52일간의 구술로 완성된 작품이다.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의 혁명군에 참가해 출세가도를 달리던 스탕달은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국외를 떠돈다. 이후 그는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으로 관직에 복귀해 이탈리아의 교황령 치비타 베키아 주재 영사로 근무하던 중 파리에 휴가차 왔다가 집필한 것이 이 소설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에 있었던 파르네제 가문의 실화를 바탕으로 시대에 맞춰 각색된 이 소설의 제목이 드러내듯, 이 소설의 중반부와 후반부의 주무대는 이탈리아 북부 오스트리아령의 파르마이지만, 왜 '수도원'이 들어가는지는, 이 소설의 급격한 결말에 가서야 알 수 있다.  파브리스가 클렐리아를 만나기 위해 설교소동을 벌이던 끝에 두 사람이 은밀한 밤, 크레센치 저택의 오렌지나무 온실에서 극적으로 만난 이후 벌어지는 3년간의 일들을 작가는 단호히 생략했는데, 이 부분만 다뤘어도 국역본으로 2권의 분량으로 된 이 소설은 3권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도덕을 모두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정략과 정열로 넘치는 이 소설의 통속성은 이 결말에 이르러서 극적인 반전을 이룬다. 시종일관 희극으로 치닫던 소설이 몇페이지를 남겨두고 급격히 비극으로 깍아 내려지는 급벼랑을 만난 듯한 형국이다. 이런 소설의 분위기는, 마치 한 시대를 뒤흔든 혁명의 시대에 가담해 역사의 전장을 밟고, 열정적인 로맨스를 벌였으며, 시대의 고난과 반전을 겪다가 객사한 스탕달의 인생과 흡사하다.

이 소설은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때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던 작중 화자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밀라노 공국 델 동고 가문의 일화를 듣는데서 시작하는데, 이 동기는 스탕달이 베키아 주재 영사로 이탈리아에 돌아와 16세기 파르네제 가문을 역사를 접한데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밤을 세워가며 이 이야기를 즐겨 들었던 화자는 이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 볼 것을 생각한다. 이것은 스탕달이 [파르네제 가문의 위대함의 기원]이란 기록물의 복사본을 모두 읽고 사본 여백에 이 이야기로 작은 소설을 만들어 볼 것이라고 적은데서 연유할 것이다. 소설의 시작은  작은 일화 정도의 실마리를 보이지만, 책의 분량이 말해 주듯 파브리스와 고모인 산세베리나 공작부인, 모스카 백작, 클렐리아,  궁중인사들을 중심으로 굵직한 모험들과 정략들이 이 소설에서 펼쳐진다. 다시 언급하지만, 연정을 위해 마키아벨리적인 권모술수와  활기로 넘치던 이 소설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흡사한 결말에 급작스럽게 당도한다. 삶의 활력이 치닫는 길은 결국 종교라는 종점에 이른다는 것인가? 소설에서 바로 그 종점은 '파르마의 수도원'인 것이다.   

끝으로 이 소설의 에필로그는 To the Happy Few("소수의 행복한 사람들에게 바친다")라는 치사로 끝나다. 여기서 소수의 행복한 사람이란 파브리스나 산세베리나 공작부인, 나아가 모스카 백작처럼 사랑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열정가들을 가리킨다. 사랑을 위해서란 말은 극히 감정적이지만, 이런 열정 자체는 희귀하다. 그러나 이런 희귀한 한 사람의 열정이 열사람, 아니 그 이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이런 정열의 위대함과 공허함이 있는지 모른다.

*텍스트 : 스탕달,  『파르마의 수도원』 원윤수,임미경 역(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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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9호 품목의 경매

책들 Bücher 2010. 2. 11. 13:2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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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ying of Lot 49, 토마스 핀천, 김성곤 역(민음사, 2009). 음모론과 정보이론이 결합된 고전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이미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혹은 『푸코의 추』, 그리고 영화 매트릭스에 익숙해 있으며,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에 진력이 나버린  21세기 초반엔 진부한 감이 있다. 이 소설이 출간된 1966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1960년대 미국 서부 연안에서 자아분열의 이상을 감지한 시대적 촉수는 비공식 우편제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핀천은 인터넷 시대를 예감했을까? 공식 우편망을 마비시키려는 트리스테로라는 비밀조직은  오늘날엔 해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별 감흥없이 빠른 속도로 무미건조하게 읽어나가기 좋은 소설같다. 이 소설의 주제와 분위기에 어울리는  철학작품을 꼽는다면 가따리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일 것이다.
 
『제 49호 품목의 경매』를 반납하고 스탕달의 『파르마의 수도원』2권을 빌려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이 '수도원'의 주인공들이 나르시즘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다. 18세기형 인간의 특징인지도 모르지만, 월리엄 포크너나 토마스 핀천의 작품에서  이런 나르시즘은 붕괴된다(이런 점은 다자이 오사무도 마찬가지다). 철학도 하나의 거대체계로서 헤겔에 이르러 종점을 찍듯이, 근대인의 열정과 자아도취도 이제 빛바랜 시대의 유산으로 남는다.   

마지막으로 역자 해설에서 숫자 49와 관련된 설명이 나온다. 49는 제자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오순절 전날이나 죽은 자가 현세와 영원히 작별한다는 사십구제 처럼, 어떤 완전함, 결단을 기다리는 유예상태라는 의미다. 이런 점에서 또한 이 소설은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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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서평

책들 Bücher 2010. 2. 10. 12:3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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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그를 접으면서, 여기로 옮기지 못한 글이 많다. 모두 옮길 생각은 없고, 차근 차근 생각나는데로 옮긴다.  
 
휴머니즘의 다른 얼굴 :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사하는 커다란 폭력?

2006년 1월 14일~1월 28일
페터 슬로터다이크 Peter Sloterdijk, 인간 농장을 위한 규칙 Regeln für den
Menschenpark
(대중의 경멸 Verachtung der Massen, 복음의 개선에 관하여 Über die Verbesserung der guten Nachricht), 이진우·박미애 옮김(2004, 한길사)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너 위대한 천체여! 네가 비추어줄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너의 행복이겠느냐!”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부 ‘짜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중에서


휴머니즘과 이념형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인본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15~16세기 발흥한 문예사조라는 좁은 의미에서 벗어나서 휴머니즘을 볼 때, 근대 역사는 물론 현대의 일상적 어휘 속에 산재한 휴머니즘을 베버식의 이념형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왜냐하면 이념형(Ideal Type)은 결과로서 주어진 특정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 개념인데, 이 개념에 휴머니즘을 적용하기에는 이 주의가 지시하는 바가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청교도 정신이 경제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기술한 경험주의적 문화과학의 첫 결실인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전제된 이념형이 금욕주의였던 것처럼, 하나의 이념형은 단지 경제 질서라는 하부구조 위에 놓인 정신적 구조물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배태된 구체적 사회를 이해해 들어가기 위한 방법론적 실마리, 방법론적 도구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휴머니즘은 어떠한가? 기독교를 필두로 한 금욕주의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민주주의, 동학, 유교,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양의 탈로 장식된 자본주의마저도 인본주의적 성격, 인간주의적 면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모든 주의들이  최소한 휴머니즘의 변종(變種)이라도 될 소지가 있다.

   물론 서구의 역사 속에서 인간주의라는 표어가 두드러지게 부각된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시민 보다 높아지려는 사람들의 목을 치는 단두대 처형이 만연하기 전, 천부인권을 근거로 자유·평등·박애를 외친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와 같이− 특정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으로서의 인간주의는 너무도 포괄적이어서, 소박하게 좋은 뜻으로  사용해 쉽게 주어에 연결할 수 있는 보편화된 술어에 가깝다. 마치 골고루(전 역사를 통틀어) 퍼져 있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제 1부인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 하이데거의 휴머니즘 서한에 대한 답신’은 원래 슬로터다이크가 1997년 여름 바젤-엘마에서 연속적으로 행한 강연문인데, 이 강연의 후폭풍이 2년 후 독일의 공론영역을 뒤흔들 정도로 논란을 일으킨 글이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을 통해 전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하버마스까지 이 논쟁에 가세해 대결할 정도로 ‘악명’을 높이고 현재 독일 학계에서 각광받는 '철학자'로 자리잡은 슬로터다이크는 이 휴머니즘이란 오랜 표어를 놓고 전면전을 펼친다. 그에게 이렇게도 낡고 공허한 인간주의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싸울 만한 주제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런 공격은 피아가 불분명한 전선의 연막 속에서 무작위적으로 행하는 발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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