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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망해도 3대가 간다는 속담은 부자의 한계를 노정한다. 삼성의 가문은 얼마나 갈까? 이 소설은 19세기 초반에 군수물자의 납품으로 크게 성공을 거둬 가문을 일으킨 요한 부덴브로크 가의 4대기를 서술한 작품으로 192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다. 『타락』, 『행복에의 의지』, 『키작은 프레드만 씨』와 같은 단편으로 이미 등단을 한 토마스 만이 25살의 나이에 발표한 이 소설은, 새파란 청년이 썼다고 보기 힘들 정도의 노련함이 보인다. 아무래도 뤼벡의 부유한 상인 가문이라는 그의 출신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은 한창 사업의 발흥기를 구가하던 1대의 부덴브로크 가  사람들이 새로 구입한 멩가의 대저택에서 잔치를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시작부터 어떤 균열이 일어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북부의 뤼벡이라는 소도시에서 선두를 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맏딸 안토니와 사기꾼 그륀리히의 정략 결혼을 시작으로 가문은 점차 몰락의 길을 가다가 3대의 토마스에 이르러 다시 가문의 사업이 반짝 일어나지만,  결국은 급격히 몰락한다. 쉰 살도 안된 시의원 토마스 브덴브로크는 병약한 아들의 미래와 자신의 불안한 건강을 이유로 극단의 유언을 남긴다. 

시골 도시의 조그만 가족 기업의 소소한 연대기로 볼 수도 있으나, 신분의 질서를 벗어나 공적으로 이룩한 브르조아 질서의 흥망성쇠를 몰락의 관점에서 전개시켜 나가는 소설이다. 인생이 결국 몰락을 향해 가고, 대대 손손 이어지는 가문에도 종점이 있기 마련이라는 어두운 미래에 대해 유교적 세계관은 제례의 양식을 답습해 오고 있다. 조상의 정신은 후대에 연속된다는 믿음. 종교적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믿음에 토마스 만은 회의적이다. 이 소설에서 공적으로 이룩된 브르조아 질서에 다시 신분의 양식인 가문을 심는 것에 대해 토마스 만은 비판적인 관점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는 것은, 3대 이상 지속하기 힘든 자연의 한계이다. 북조선은 3대까지 갈 수 있을까? 3대를 준비하는 삼성은 어떻게 될까? 남성중심의 계보만을 적통으로 보는 가문중심주의의 시대착오성을 감지한 토마스 만의 선견이 돋보인다.

만약 이 소설의 속편이 가능하다면, 부덴부르크 영사의 맏딸 토니가 그 중심에 설 것이다. 왜냐하면 토니는, 말괄량이 소녀에서 자의식을 갖춘 자아로 성장했으며, 자신의 결혼에서 비롯된 가문의 실추 속에서도 가문의 영예를 고수했던 강인한 생명력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토니가 자신이 원했던 대로, 부덴브로크 가 보다 상당히 낮은 계급에 속하지만 전도유망한 교육과정을 밟고 있던 모르텐과 결혼했다면 이야기는 다르게 흘렀을지 모른다. 혹시 토마스 만은 토니 부덴브로크를 염두하고 3년 후 『토니오 크뢰거』를 내놓은 것이 아닐까?


텍스트 :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Buddenbrooks : Verfall einer Familie, 홍성광 역(민음사, 2008, 1판 17쇄).

주요등장 인물 : 요한 부덴브로크 1세, 장 부덴브로크 영사(2세), 토니 부덴브로크, 토마스 브덴브로크 시의원(3세), 하노 부덴브로크(4세), 크리스찬 부덴브로크, 게르다 아놀트선

그외 등장 인물 : 엘리자베트 영사 부인, 크뢰거 가 사람들(엘리자베트 영사 부인의 시댁), 벤딘스 그륀리히, 모르텐 슈바르츠코프, 알로이스 페르마네더, 세세미 바이히브로크, 클로틸데(부덴브로크 가의 빈곤한 방계 친척),클라라(요한 2세의 막내딸), 마르쿠스(요한 상사의 동업자이자 전문 경영인), 카이 묄른 백작(하노의 단짝 친구), 고트홀트 부덴브로크(요한 브덴브로크 1세의 첫째 아들), 고트홀트의 세 딸들, 안토아네트 노부인(1세의 둘째 부인), 에리카 그륀리히, 티부르치우스 목사, 바인센크(에리카의 남편), 프링스 하임 목사, 그라보 박사, 랑할스 박사, 레안드리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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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갈 일

책들 Bücher 2010. 5. 7. 16:1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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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는 토마스 만의 『브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읽고 있다. 요한 브덴브로크 영사의 19살 맏딸 안토니는 부덴브로크 상사의 함부르크 거래선인 그륀리히의 끈질긴 청혼에 곤혹스러워 하며 트라베뮌데의 해변가에 있는 수로 안내인 슈바르츠코프의 집에 휴양을 간다. 여기서 안토니는 방학차 집에 들른 슈바르츠코프의 아들 모르텐과 자주 산책을 다니면서 서로 좋은 감정을 갖게 된다. 귀족 가문의 파티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토니와 모르텐의 만남으로 갑자기 계급 갈등의 양상으로 나아간다. 괴팅엔에서 의학을 공부하며 박사과정을 준비하는 모르텐은 평등한 기회와 공적을 중시하는 브르조아 계급의 양심을 안토니에게 토로하는데, 이들의 대화장면은 토마스 만의 유명한 중편 소설 『토니오 크뢰거』에서 토니오가 애인인 듯한 화가에게 예술가의 사회적 양심을 토로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상대를 공격하는듯한 주장에는 은근한 구애도 담겨 있다.

무심하게 바라보던 바다를 관심있게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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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안착

책들 Bücher 2010. 5. 2. 15:1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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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셋 모옴의 『인간의 굴레에서』를 다 읽었다. 증권투자로 돈을 날려 의학공부를 접은 채 노숙하며 전전하던 필립은 애설니의 도움으로 어렵게 의류 상회에 취직한다. 이후 블랙스터블에 있던 백부의 죽음으로 유산을 상속받아 7년간의 의학공부를 마치고 면허를 딴 뒤, 선의(船醫)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닐 꿈을 꾸던 필립은 애설니의 장녀 샐리와 뜻밖의 운명에 놓이게 된다. 애설니 가족과 필립이 켄트지방에서 홉을 따는 이야기가 나오는 소설의 후반부는 귀농을 그리는 아름다운 한 편의 전원소설이다. 몇 개의 문장이 이 소설의 전반적 주제를 암시해 줄 것이다. 그것은 원래 의미가 없는 삶에 의미의 굴레를 씌워 집착하지 말고 양탄자를 짜듯 무의미한 세계에 자신의 실날로 즐겁게 자신만의 무늬를 짜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예술가의 구도적 집념과 일상인의 현실인식이 격렬히 충돌하는 모습이 아주 심각하지 않게는 보여지지만, 작가는 현실의 건전한 상식에 대한 긍정으로 끝맺음한다.   

"크론쇼가 언젠가, 공상의 힘으로 시공의 두 영역을 영유하는 사람에게는 삶의 사실들이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굴레에서』2, 496면.

"행복에 굴복하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일지 몰랐지만 그것은 수많은 승리 보다 더 나은 패배였다."

상동, 50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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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를 읽고

책들 Bücher 2010. 4. 12. 17:1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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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 어제, 이 책을 다 읽고 허망한 기분에 빠졌다. 작가의 사기에 놀아났다는 느낌도 들고, 광적인 천재의 결말에 허무함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년 10월 이후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준 소설임에 틀림없다. 고독하고  괴팍스러운 천재의 기행을 다루는 소설에는 언제나 신비감이 감돌기 마련이다. 이것도 하나의 장르라고 할 수 있다.

1차 대전 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모옴 자신도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이 소설을 구상했고, 이 소설의 주인공을 창조하기 위해 후기 인상파 화가였던 폴 고갱의 삶을 타히티까지 쫓아가서 조사했다. 스트릭랜드는 고갱이 아니다. 고갱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허구의 인물일 뿐이며, 그의 모든 그림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앞두고 남태평양의 섬 깊은 산속에서 눈이 먼채 그린 벽화는 완벽한 진리, 미를 향한 허구의 작품이며, 마치 진리의 부재를 상징하듯이, 작품 속에서 이 벽화는 불타버린다. 완성 뒤에 바로 사라짐이다. 

예술이 마치 어떤 악마가 내린 것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극적으로 몰고 간다면, 그는 과연 행복한 사람일까? 자신의 판단, 자율성이 마비된 채 끌려가듯, 인생을 송두리채 전환시키는 것은 경이롭지만, 너무도 위험해 보인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한가지에 매진하기 위해 뛰어드는 사람은 광적인 신도와 흡사하다. 예술의 또다른 광신.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신비롭고 즐거웠던 한주의 책을 오늘 반납할까 한다.

"성경의 한 구절이 입가에 떠올랐지만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속인들이 자기네의 영역을 침입하면 성직자들은 불경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헨리 숙부[어린 시절 부모를 여윈  모옴은 실제로 사제였던 숙부의 보호 아래 성장했다]는 윗스터블 관할 사제를 이십칠 년이나 지냈는데, 속인이 성경을 인용하면 악마도 언제나 제 좋을 대로 성경을 인용할 수 있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숙부는 일 실링에 영국산 굴을 열세 개나 살 수 있었던 시절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달과 6펜스』,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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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우리 동네로 이사온 선배와 만나서 『달과 6펜스』에 대해 얘기하다가 술을 진탕 마셨다. 다음 구절은 스트릭랜드가 깊은 병에 들었던 자신을 집으로 데려와 간호하도록 해준 더크 스트로브의 아내 블란치 때문에 생긴 문제와 관련해 하는 말이다.  

"난 사랑 같은 건 원치 않아. 그럴 시간이 없소. 그건 약점이지. 나도 남자니까 때론 여자가 필요해요. 하지만 욕구가 해소되면 곧 딴 일이 많아. 난 그 욕망을 이겨내지는 못하지만 그걸 좋아하진 않아요. 그게 내 정신을 구속하니까 말야. 나는 언젠ㅣ가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하오. 여자들이란 사랑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랑을 터무니없이 중요하게 생각한단 말야. 그래서 우리더러 그게 인생의 전부인 양 믿게 하고 싶어해요. 하지만 그건 하찮은 부분이야. 나도 관능은 알지. 그건 정상적이고 건강해요. 하지만 사랑은 병이야. 내게 여자들이란 쾌락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나는 여자들이 인생의 내조자니, 동반자니, 반려자니 하는 식으로 우기는 것을 보면 참을 수가 없소."

『달과 6펜스』, 202~203.

이 소설에는 중간 중간에 남성 중심적인 원시적 여성관과 아울러 철학적 훈계나 설교 분위기의 서술이 나타난다. 작품을 작가의 정신이 반영된 산물로 보는 전통적 작품론은, 『롤리타』나 『제 49호 품목의 경매』의 경우처럼 작품을 작가로부터 독립해 자율적으로 전개시키는 현대소설의 조류와 비교해 볼 때, 다소 보수적인 것이다. 동일률적인 철학과 달리 차이를 시초부터 설정하는 들뢰즈에게 작품은 리좀으로 이루어진 연결망이다. 고원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어서 『천 개의 고원』이 된다.  자신에서(an sich)부터 나와서(für sich)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anundfür sich)은 오디세이의 귀환, 자신 안에서의 여행, 내재성일 뿐이다. 반면에 다른 곳에서 나와서 다른 곳으로 가며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유목이며 외재성이다. 

"작품은 사람을 드러내는 법이다. 사람이란 사교적인 교제를 통해서는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외양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을 진짜로 알기 위해서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소한 행동이라든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스치는 순간적인 표정을 통해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때로는 가면을 너무 철저히 쓰고 다니다가 정말 그 가면과 같은 인격이 되어버리는 일도 있다. 하지만 책이나 그림은 진짜 모습을 꼼짝없이 드러내고 만다. 겉만 그럴싸한 것은 곧 속이 텅 비어 있음을 나타낼 뿐이다. 욋가지를 쇳조각처럼 칠한다 해도 쇳조각처럼 보일 리는 없다. 아무리 특이하게 꾸민다 해도 평범한 정신을 감출 수는 없다.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작품에서도 날카로운 관찰자는 영혼의 깊은 비밀을 읽어내고 만다."

『달과 6펜스』,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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