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바쁜 일들이 몰아치는 가운데 <신곡> 지옥편을 읽고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펼쳤다. 후자는 왜 이제야 이 책을 읽었을까 싶을 정도로 빠져들게 한다. 자신의 정적과 역사적 인물들, 위대한 철학자들을 지옥에 배치시키는 단테는 세계상에 대한 총체적 비평을 중세 말기라는 시대적 정황 속에서 서사시의 형식으로 하는 반면, 디킨스는 프랑스 혁명기의 구체적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알리기에리 가문의 숙명을 받은 단테는 마치 현대의 마피아 조직과 다를 바 없이 잔혹한 복수극을 펼치는 피렌체 귀족들의 정쟁으로부터 눈을 돌려 천상으로 가고자 했는지 모른다. 몇 해 전에 <신곡>을 읽다가 지루해서 중간에 그만둔 적이 있는데,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나기 전, 카잔차키스가 암송까지 할 정도로 애독한 <신곡>이라 기대를 했지만, 아무래도 번역본 상으로 이 작품의 진미를 맛보기는 어려울듯 하다. <신곡>은 라틴어가 아닌 순수한 이탈리아어로 저술된 최초의 작품으로, 단테가 라틴어에 대해 지방어(이탈리아어)의 우수성을 논한 <속어론>의 응용판인 셈이다. 혹시 세종은 자신보다 200 여년 앞선 단테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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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 Bücher'에 해당되는 글 169건
- 2015.11.23 단테와 디킨스
- 2015.10.20 외계 존재의 생물학적 탈피
- 2015.10.13 바다에서 우주로
- 2015.10.05 고래학
- 2015.09.04 그리스인 조르바 中
예전에 예지의 외계 존재에 관해 과학적 개연성이 없는 상상을 하다가 스스로 놀란 적이 있었다. 이에 반해 아서 C. 클라크의 외계존재에 관한 상상은 보다 단계적이다. 과학은 상상에 이르거나 혹은 이것과는 다른 방향의 출로는 여는 사다리이므로.
"처음 지구를 찾아왔던 탐험가들은 이미 오래 전에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의 한계에 도달했다. 육체보다 더 나은 기계들이 만들어지자 그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뇌가, 그 다음에는 생각만, 금속과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반짝이는 새 그릇에 옮겨졌다. 그들은 이 새로운 몸을 입고 별들 사이를 방랑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우주선을 만들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바로 우주선이었다. 그러나 기계 생물의 시대도 금방 과거사가 되었다. 그들은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우주의 구조 그 자체 속에 지식을 저장하고, 얼어붙은 빛의 격자 속에 자신들의 생각을 영원히 보관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들은 복사선으로 존재하는 생물이 되었다. 마침내 물질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곧 스스로를 순수한 에너지로 변화시켰다...이제 그들은 은하계의 주인이었고 시간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들은 마음대로 별들 사이를 떠돌다가 공간의 틈새를 통해 희미한 안개처럼 가라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과 같은 능력을 지녔는데도 그들은 이미 사라버져 버린 따스한 진흙 바다에서 자신들이 처음 생겨났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김승욱 역 (황금가지, 2014년 1판 6쇄), 5부 토성의 위성들 中 실험, 270면.
지난 주말 멜빌의 <모비 딕> 결말부를 빠르게 봤다. 에이헤브 선장이 지휘하는 피쿼드 호는 나침반도 돌려버릴 정도의 폭풍을 뚫고 적도의 고래어장에 들어가, 1차에서 3차에 걸치는 추격 끝에 백경과의 사투가 결정난다. 그래서 재판도 3심제인가. 모험소설에 관심이 이어지고 전부터 보려고도 해서 아서 C. 클라크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옮겨 갔다. 레이다에 정통한 과학자이면서 우주적 서사를 펼치는 작가의 친절한 설명은 동명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지침서 역할을 한다. 알고 보니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큐브릭의 영화는 원래 두 사람의 만남에서 기획된 것이고, 시나리오 작업 이전에 자유로운 상상에 맡긴 소설을 먼저 진행해 보자는 큐브릭의 제안을 클라크가 수락해서 이 소설이 탄생한다. 원작 소설의 기본 골격에 맞춰 영화는 만들어 졌지만 영화작업의 결과물에 소설이 영향을 받았다고 클라크는 회고한다. 달 착륙선이 TV에 중계되기 전에 나온 이 소설의 영향은 요즘 나오는 SF 영화에서도 역력히 보인다. 우주 정거장이 원심력으로 인위적인 중력을 만드는 설정, 토성까지 오랜 세월이 걸리는 유인 우주선의 보급물자를 아끼기 위해 도입된 승무원 동면, 대화로 기계의 대답과 인간의 대답을 구분할 수 없다면 기계 또한 사고할 수 있다는 판정을 내린 튜링 테스트의 개념에서 나온 것으로, 인간 두뇌 활동의 세부사항을 궁극적으로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속도와 신뢰성으로 이를 재현할 수 있는 HAL(Heuristically programmed ALgorithmic computer)의 개발. 이 컴퓨터는 IBM 보다 한발 앞섰다. 철자순으로.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은 작가의 포경선 체험에 바탕한 19세 초반의 탐험 소설이다. 당시 유럽과 북미의 실내등에 들어가는 기름의 공급처는 전세계의 대양을 누비는 포경선단으로서, 포경선의 목적은 3~5년에 걸친 장기 항해를 통해 포획한 고래, 그 중에서도 향유고래에게서 짜낸 기름통을 가득 싣고 귀항하는 것이었다. 오랜 항해 기간 동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기항도 없이 물자는 소비되고 배밑 창고엔 정유된 기름통이 싸이며 기름을 짜낸 고래의 지육은 바다에 버려진다. 분명 근대 문명기 고래잡이의 실태를 관찰하기에 더 없이 유용한 자료이면서, 고래를 둘러싼 작가의 온갖 상념과 방대한 조사, 이와 연관된 지식이 총망라되는 소설이다. 대학을 다녀본 일이 없는 멜빌은 고래를 통해 세상의 거대한 지식을 엮어 내려 한다. 그에게 포경선의 용골은 삶의 수단이자 총체적인 앎의 전당이다.
조르바의 경력
"닥치는 대로 하죠. 발로도 하고 손으로도 하고 머리로도 하고...하지만 해본 일만 해가지고서야 어디 성이 차겠소."(18)
자유인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자유라는 거지!"(24)
짐승
"인간이란 짐승이에요...짐승이라도 엄청난 짐승...이 짐승을 사납게 대하면 당 ㅣ 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 갈 거요. 두목, 거리를 둬요! 놈들 간덩이를 키우지 말아요. 우리는 평등하다...하면 안돼요. 그러면 당신에게 달려들어 당신 권리까지 빼앗고 당신 빵을 훔치고 굶어 죽게 할 거요...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81-82)
미래의 부재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ㅣ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92-93)
성화(메토이소노)
"죽기까지 떠나지 않을 또 한 가지 노릇이 바로 이거죠./ 조르바는 냄비를 불 위에 얹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염병할 여자(이 또한 끝이 없는 전쟁이지만)뿐만이 아닙니다. 먹는 짓거리 또한 끝없는 전쟁이지요/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먹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깨달았다. 조르바는 두 개의 바위 사이에다 불을 피우고 음식을 장만했다. 먹고 마시면서 대화는 생기를 더해 갔다. 마침내 나는 먹는다는 것은 숭고한 의식이며, 고기, 빵, 포도주는 정신을 만드는 원료임을 깨달았다...그의 말대로 엔진에 연료를 채우고 삭이면 그의 몸이라는 기계는 다시 생기를 되찾고 속력이 붙어 다시 일을 시작했다."(99)
삶의 원료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내가 대꾸하지 않자 조르바가 계속했다./죽으면 말썽이 없지...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149)
반민족주의 성향의 괴짜 친구
"이미 여기 험한 산중, 내 오두막 앞에다 내 무덤을 만들어 놓았네. 비석을 세우고 큼지막한 글씨로 비문을 내 손으로 새겨 놓았네./그리스인을 증오하는 그리스인 여기 잠들다."(202)
산속 수도원 주교의 세번째 이론
"우리의 덧없는 삶 속에도 영원이 있다는 것이오. 우리로서는 혼자서 그걸 뚫어 볼 수 없다는 것이오. 우리는 나날의 걱정으로 길을 잃는답니다. 소수의 사람, 인간성의 꽃 같은 사람만이 이 땅 위의 덧없는 삶을 영위하면서도 영원을 살지요. 나머지는 길을 잃고 헤매니까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종교를 내려 주신 것이오. 이렇게 해서 오합지중도 영원을 살 수 있게 된 거지요."(295)
인생의 신비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315)
코스모폴리탄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갈 빵 덩어리에다 놓고 맹세합니다만)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326)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328)
소설의 시작과 끝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때 항구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우리 모두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문가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창틀을 거머쥐고 먼 산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울었습니다."(7, 443)
텍스트 : <그리스인 조르바> Vios ke politia tu Aleksi Zorba 이윤기 역(열린책들,2013 세계문학판 32쇄).
*널리 화자될 정도로 닥치고 찍고 읽혔다.
다음으로 읽기 시작한 소설은 허먼 멜빌의 <모비딕>이다. 사서의 도움을 받은 고래에 관한 묵시적 정보로 시작하는 서두가 예사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