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1972)

영화 Film 2011. 5. 1. 16:0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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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우주개척 시대, 미지의 혹성 솔라리스의 우주 정거장에서 의식의 물질화가 일어난다. 의식의 산물이 단지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현현되는 것.  이런 소재는 소더버그의 리메이크와 스필버그의 <A.I.>에도 변주되지만, 타르코프스키 특유의 영상화법 속에서 원초적이고 신비스럽게 표출된다. 단지 SF 영화라고만 할 수 없는 종교적 깊이도 느껴진다. 태초에 신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듯이, 의식의 파장이 바다에 그 산물을 형태화시켜 내어 놓는다. 구약의 지구에 갇혀 있던 신이 우주로 확장된다면, 신, 영혼, 영원에 대한 새로운 접근도 가능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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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브래너의 『헨리5세』(1989)

영화 Film 2011. 2. 14. 13:3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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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은 못보고 중간에는 졸면서 봤다. 케네스 브래너가 주연, 각색, 감독을 한 영화. 대사를 핵심으로 하는 연극적 특색을 최대한 살리면서 역사 해설가같은 나래이터가 등장하는 형식의 작품이다. 프랑스인이 이 영화를 본다면, 아무리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충실했다 해도, 기분 나빠할 수 있는 우국주의적 장면이 있다. 마치 임진년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민의 경우처럼. 그런데 사실 근세시대엔 영국과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대부분의 왕실들은 타국의 귀족과 왕족의 복잡한 관계망으로 얽혀 있어 사정이 동북아의 고립국들과 다르다. 특히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밝힌 바,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가장 끈질기고 더 극심하게 외세 제후들의 이해관계에 시달려야 했다. 왕조들의 싸움에 백성은 속수무책 동원되고, 어린 시절 도둑패 틈에  끼어 망나니 짓을 했던 헨리 5세(1387/1413~1422)는 당위와 명분을 위해 이 과거의 친구들과 결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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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린치의 『엘리펀트 맨』(1980)

영화 Film 2011. 1. 31. 11:5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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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의사로 나오는 안소니 홉킨스를 볼 때 꽤 오래된 영화인줄 알았는데, 30년 정도 밖에 안된 영화다.(그래도 오래된 영화다..) 퀄트적이면서도 인권 영화적인 면이 있다. 영화 전반, 특히 마지막 장면은 이청준 식의 어머니에 대한 어떤 원형적 그리움을 형상화했다. 메릭이 런던 병원에서 영구 보호를 받게 됐음을 트레비스로부터 전해 듣고,  선물 받은 향수로 치장을 하며 사교계에 나갈 준비를 하는 양 폼을 내는 장면에서 감독은 의도적으로 존 메릭을 희화화시킨다. 그런 치장이 이런 '괴물'에게 가당치 않다는 듯이. 그러나 이런 시각은, 기괴함을 쫓는 군중에 몰려  런던 역사의 화장실에서 메릭이 자신은 코끼리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외치는 권리선언으로 전복된다. 그에게도 향수를 뿌리고 공연장을 갈 권리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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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아버지 격인 '플라톤'과 발음이 비슷한 이 영화는 세 번 정도는 봤을 거다. 십대에 처음 봤을 거고, 군대에서도 한번 보고, 공중파에서도 한번 본듯 하다. 4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현충일날 EBS에서 본 이 영화는 또 색다른 면이 있다. 기존에 주의깊게 보지 않았던 장면을 좀더 세밀하게 봤다고 할까. 정작 네이팜이 터지는 마지막의 대공세 장면을 보면서는 졸았다. 

여전히 인상적이면서도 예전에 비해 진한 감동-반복적인 감정인지도 모르나-을 주는 장면은 소대가 숲속에서 베트콩에게 당하고 인근 마을을 수색하러 들어가 벌어진 사건을 다룬 부분이다. 노근리 사건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을 살육하는 '신대륙 개척' 백인의 폭력과 오만이 재연된다. 침략군의 일원인 반즈 분대장이 사건을 일으키고 역시 침략군의 일원인 일리어스 분대장이 사건을 수습하는 것이, 백인이 베트남 촌락의 주민에게 병주고 약주는 설정으로도 보이지만, 책임자인 소대장이 묵과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사태를 거칠게 중단시키는 일리어스의 행동은 테일러에게도 전염된다. 어린 소녀들을 끌고가 강간하려는 동료 병사들을 제지한 것이다. 

살아 가면서 이건 아니다 싶은데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신중함과 비굴함의 사이에서 결단을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판단력보다는 행동력이 습성화되어야 한다. 뒤늦게 4대강과 세종시 수정을 외치는 한나라 초선의 행태는 적절한 판단과 행동의 시점을  놓친 뒷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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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도 히치콕의 『싸이코』(1960)

영화 Film 2010. 4. 26. 22:5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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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코"란 말은 "싸이코패스"라는 무시무시한 말과는 달리, 웬지 남의 경청여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떠들어대거나 우스운 행동과 도착적 행위를 남발하는 사람한테 붙는 애칭같은 느낌도 있는 말이다. 그러나 영화의 종반부 클라이막스(좌측의 포스트에 이어지는 장면)는 이런 의미의 싸이코란 말을 완전히 뒤집는다.
들뢰즈가 이 영화의 주제에 관해 평했다면 뭐라 했을까?  정신분열이라는 병리현상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영화에 대해 아마 프로이트의 남근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화라고 평하지 않았을까. 아버지에게 주늑든 아들은 끊임없이 엄마와 내밀한 관계를 가지려 한다.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서양 문화의 본질이면서도 가장 극적인 사기라고 들뢰즈는 주장할 것이다. 그것이 극적인 것은, 얼키고 섞인 복잡다단한 병리현상을 한판 뒤집고 통쾌하게 설명하는 이론으로 군림했다는 것이다. 오래된 영화답지 않게 긴장감있게 전개되는 탄탄한 구성을 보여주지만, 프로이트의 음흉한 시선으로도 고전미를 발산하는 영화다.  지난 토요일(4/24), EBS 세계의 명화에서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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