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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Film'에 해당되는 글 35건

  1. 2013.08.05 설국열차
  2. 2013.06.19 밧줄 없이 올라가라
  3. 2013.01.21 주말나기
  4. 2012.12.16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5. 2012.12.10 안티 크리스트

설국열차

영화 Film 2013. 8. 5. 17:4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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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마포의 버스정류장에서 이 영화의 광고물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작품이란 걸 느끼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는 바램이 들었는데, 엇갈린 비평을 무서운 흥행속도가 잠재워 버리듯이, 오랜만에 영화라는 매체에 압도당했다. 그것은 세계(좁게는 정치적 세계)의 축소판이자 노아의 방주의 변주라고 할 수 있는 '기차간 계급 충돌'이라는 소재의 참신성에서 비롯된다. 스토리상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길리엄의 정체이며 남궁민수의 존재감은 오히려 요나 보다 떨어진다. 길리엄은 폐쇄 체계의 유지를 위해 커티스를 '사주'하지만 제일 앞칸 까지 갈 필요가 있냐고 그를 말린다. 그러나 커티스의 전복적인 의지는 그야말로 열차를 전복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감독이 누누히 강조하듯이 원작의 위대성을 스크린에서 확대 재생산하는 기술로도 놀랍다. 개체수를 조절하며 도마에 오르는 스시처럼 그 수가 조절당하는 인류라는 주제는 새로울게 없지만 이런 주제의식에 천만관객이 몰입한다는 것은 권좌의 정파에게 위협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열차에서 분출되는 계급의식은 열차의 추동력이자 전복의 동인이므로. 감독은 연쇄 살인마와 강변 괴물에 이어 이젠 계급의식으로 사회를 동요시키는 고전적인 시도를 보여준 것이며, 계급의식의 영화적 상품화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나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처럼 이젠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 

 

 

체계와 환경의 이분법에 따라 이 영화를 본다면, 엄밀히 말해 설국열차가 폐쇄 체계라고 할 수는 없다. 엔진칸으로 유입되는 공기와 눈발로 물을 만들거나 산악 단층에서 내려 쌓인 빙하가 철로를 가로 막는 등 체계는 환경의 도움 내지 간섭을 받는다. 따라서 열차는 부분적으로는 개방체계로서,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잔혹한 점검도 이루어 지고 있다. 그러나 환경과의 제한된 접촉 보다는 체계 단독-주도적으로 자기유지를 해야한다는 점에서 열차는 개방 체계 보다는 폐쇄 체계에 가깝다. 또한 계급간 충돌도 체계 내적이다. 체계 밖으로 나가려는 것, 곧 열차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는 규칙위반이다. 왜냐하면 체계가 스스로를 안정화시키는 조절을 계급간 충돌을 비롯한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해 하는 것은 체계 밖은 아직은 죽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아쉬운 점은 손쉽게 체계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결말을 짓는 점이다.   

 

 

*영화중 주요 인물 소개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 열차 꼬리칸 반란의 행동파 지도자
길리엄(존 허트) : 열차 꼬리칸 반란의 정신적 지도자
남궁민수(송강호): 커티스 일행이 앞칸까지 전진할 수 있도록, 100칸의 열차 문을 크롬(일종의 인공마

약)과의 교환 조건으로 열어주는 설국열차의 보안 설계자
요나(고아성) : 남궁민수의 딸로 닫힌 열차문 밖을 볼 수 있는 투시력을 지님
윌포드(에드 헤리스) : 설국열차의 창시자이자 열차내 권력서열의 최상점
메이슨(틸다 스윈튼) : 설국열차의 총리로 윌포드의 지시를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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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줄 없이 올라가라

영화 Film 2013. 6. 19. 07:4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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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화요일, 작년 여름에 극장에 갔다가 못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베트맨 최종 시리즈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를 봤다. 놀란의 <베트맨 비긴즈>(2005)부터 최종 삼부작을 보는데 근 7 년은 걸린 셈이다. 리암 니슨이 브루스 웨인의 스승으로 나오는 첫 편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이걸 보고 뭐 이런 심오한 베트맨 영화가 다 있나 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단순 오락물이 아니라 베트맨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폭로하는 주제의식이 줄곧 관철된다. 현란한 볼거리-비행 납치, 풋볼장과 거대 교각의 붕괴 외-는 마지막 편이 가장 풍부하게 제공하지만 사회적 고발의식은 두번째 편 <다크 나이트>(2008)에서 집중된다. <라이즈>편은 고담시의 증권가에 대한 풍자와 삼부작을 정합적으로 종결시키려는 구성 의도가 돋보인다. 언제 하루 날 잡아 삼부작 전체를  다시 한번 봤으면 좋겠다. <메멘토>(2000)를 각본, 연출한 젊은 감독의 저력이, 전세계에 개봉을 해야만 수지를 맞출 수 있는 거대 자본과 만나 이런 이런 영화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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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나기

영화 Film 2013. 1. 21. 18:1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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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여행을 떠나 혼자 보낼 시간이 많아졌다. 지난 주말에는 원주를 다녀 왔고, 국내 영화 4편을 봤다. 의외로 책은 안읽혀진다.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기대 이상의 재미와 작품성이 짙었고, <돈의 맛>은 다소 교훈적인 영화로 보이며, <건축학 개론>은 90년대 학번의 로맨스를 청순하면서도 신선한 방식으로 보여줬고, <구국의 강철대오>는 생각보다 재미는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소재가 독특했다. 이렇게 볼거리 풍성한 국내 영화 덕분에 그나마  쓸쓸함이 덜한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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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Film 2012. 12. 16. 16:3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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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의 이 영화(2008)는 몇 년 전부터 사전 정보 없이 제목 만으로 끌린 영화로 정치적 메타포가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 지독한 범죄 스릴러 속에서 그런 의미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공상적이라고 할만한 악한이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관련된 혹은 관련없는 많은 인물들이 죽어 나가고, 를르윈의 부인은 암으로 죽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직후 예감했던 살인마 안톤을 만나게 된다. 를르윈과 그의 부인을 도와주려 했던, 대를 이어 공무를 수행하는 늙은 보안관 에드는 무기력한 치안의 현실을 보여준다.  인터넷에서 이 영화를 분석한 글을 보니 모든 장면과 대사들이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일관된 유기적 구조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의 포스터가 보여주듯,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전지한 눈이 두 개의 태양처럼 돈가방을 들고 도주하고 있는 를르윈 모스를 가련히 응시하고 있으며, 은퇴를 앞둔 경험많은 보안관은 이런 운명을 알고 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 영화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음악의 도움 없이 단단한 스토리라인 위에 영상을 펼쳐나가는 기법이다. 유일하게 음악이라고 할 만한게 나오는 장면은, 안톤에게 총격을 당한 후 멕시코로 넘어가 길바닥에서 잠든 를르윈을 깨우는 멕시코 전통 거리악단의 연주 뿐이다. 대사와 결합된 영상의 진중한 힘이 느껴지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정치적 메타포를 끌어낸다면, 젊은이는 욕망으로 움직이는 반면 노인은 이런 욕망을 헛된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그러나 욕망이 없으면 사회는 죽은듯한 정적만 있을 뿐이다. 이 욕망은 단지 돈에 대한 욕망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를르윈이 돈가방을 트레일러에 가져온 후, 운전대에서 죽어가는 멕시코 마약상이 물을 달라는 간청을 기억하며 수통에 가득 물을 채우고 다시 총격지점으로 간 이유는 단지 동정이 아니라 인식의 욕망이었다(물론 를르윈이 다시 가지 않았더라도 돈가방에 들어있는 수신기 때문에 안톤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다). 청춘은 욕망의 놀이터에서 자신을 회전시키고 이런 회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래서 그 덕분에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노인을 위한 나라가 미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코네티컷주의 초등학교 부속 유치원에서 일어난 총격사건에 노출된 미국에서 총자루에 의지한 올드 보이는  극심한 자기 모순에 빠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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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크리스트

영화 Film 2012. 12. 10. 12:0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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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물 보다는 김기덕의 <섬>을 연상시키는 스릴러물에 가까운 라스 폰 트리에의 또다른 실험작(2009)이다. 트리에의 형식 실험은 <어둠속의 댄서>(2000), 도그빌(2003)에서 단단한 구조의 빛을 발하지만, 이 영화는 상당히 복잡스러운 구조와 메타포를 담고 있다. 사탄의 정원으로 명명된 자연의 폭력성을 고발하면서 이 자연에 여성을 동화시키는 전략이 영화의 후반부에 드러난다.  에필로그에 나오는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헌정사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보이는 '크리스트'적인 자연관에 대한 안티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자연과 동화된 여성은 질서와 구원의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이 영화에서는 자연과 동화된 여성은 혼돈과 폭력으로 그려진다. 심령의 영상과 꿈속 이미지 같은 장면의 연출들은 타르코프스키의 장면들을 연상시키면서도 사이버게임과 유사한 가상현실감을 준다. 어떤 심오함을 내포한듯 하면서도 장난기로 채색된 영화같은 인상도 든다. 마치 각 챕터를 안내하는 거친 필체의 표제 스크립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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