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이렇게 쓰는 것이 건방져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최소한 한국의 현대철학사의 비하인드 스토리 정도에 이 글이 조금은 기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제목을 쓰고자 한다.
나는 어떻게 보면 운 좋게도, 학부 졸업 시점 부터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이 두분을 지도교수로 삼았다. 양운덕 선생은 대학에 정식으로 자리를 잡고 계시지 않았으나, 이 분이 이끄는 세미나팀에 나는 약 2년간 참여했었다. 물론 장춘익 선생은 나의 정식 지도교수였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직접적 계기는, 지난 금요일에 접한 장춘익 선생의 급작스러운 사망 소식 때문이다. 대학원을 수료하고 직장에 자리잡고서 나는 다시 논문작성을 위해 2009년 장선생님과 한번 만나고, 메일 교신 이후 나는 전혀 연락을 하지 않은 터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근래 독일에서 막막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 장선생님한테 메일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간혹 들었으나 결국 영영 하지 못하게 됐다. 이런 안타까움을 이런 글이 대신해 줄 수 있다면 잠시나마 위로가 되어 줄 수 있을까? 일단 시작해 본다. 여러가지 관련 기억들이 상이한 시공 속에 무차별적으로 산재해 있으므로 가능한 시간의 순으로 전개하려 한다.
장춘익 선생이 조교수로 학교에 부임했을 때 나는 군대에 있었지만, 이분의 명성이 너무도 자자해서 나는 무척 궁금해 했고 기대도 컸다. 특히 헤겔에 정통해 있다는 소문에 나는 상당히 솔깃했다. 학교에 복학하고 서양근세철학사라는 수업에서 장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수업은 강의식이 아니라 학생들이 텍스트를 분담해서 발표하는 세미나식이었다. 하지만 이 수업이 다소 기대와 달리 실망스럽게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이 수업에서 장선생님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기 보다는 학생들의 역량을 끌어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방식에 실망해서인지 나는 개인적인 면담을 위해 약속도 하지 않고 혼자 불쑥 선생님의 연구실로 찾아간 적이 있다.
하지만 거의 5분도 안되서 나는 연구실을 나서야 했는데, 방문의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으면 계속 연구실에 있기 힘들 정도의 긴장감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뭔가로 선생님은 상당히 분주해 있는 상태였고, 다정다감하게 무례한 학생의 개인상담을 받아줄 정도의 여유는 없어 보였다. 장선생님과의 일차 독대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고, 이 수업은 따로 시험없이 레포트 제출로 끝났는데, 레포트 주제는 근대 철학사에 관해 거의 자유로운 방식의 소논문을 써서 내는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레포트로 근대철학사를 나름 정리해볼 생각으로 R.샤하트의 <근대철학사>를 요약 정리해서 제출했다. 그야말로 수험생식의 과제물 작성이었다. 나의 레포트에 관해 레포트 말미에 장 선생님이 연필로 써놓은 한줄의 평가는, '요약하는데 수고로웠을 것이나 요약에만 너무 치우쳐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그 수업에 실망했던 것은 수업방식의 낯설음도 있었지만, 장선생님의 주전공이 서양근세철학사가 아니라 사회철학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다음 연도 학기에 나는 사회철학을 신청했다. 하지만 장선생님은 이 수업을 자신이 맡지 않고 다른 분을 불러 들였다. 양운덕 선생이었다.
서기 263년 중국 익주(쓰촨성 광위안)에서 있었던 삼국시대의 최후 전투는 현재 세계의 시위 진압작전을 연상시킨다. 유비가 두 형제의 복수를 위해 오의 손권을 치러 나섰다가 형주를 잃어버린 후 촉한의 삼협에서 제갈량이 북벌의 기점으로 세운 검문관은 촉의 공격 시발점이자 방어의 최후 요새였다. 갈라진 두 산 사이에 칼이 하늘 방향으로 꽂힌 듯한 형세에 놓인 검문관은 소수의 군사로도 방비를 하기에 최적인 마지노선이었다. 유비 사후 제갈량 주도의 남만 평정과 군비 축적으로 6차례에 걸쳐 실행된 북벌이 실패하고 제갈량 사후 종회가 이끄는 위나라의 군사 10만이 촉을 치기 위해 촉의 공격루트였던 잔도를 따라 내려와 협곡의 대평원에 도달했을 때 검문관을 사수하던 장군은 강유였다. 촉의 군사가 2만에 불과했지만 제갈량의 예측대로 협곡에 막힌 위의 군사들은 검문관을 뚫을 수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위의 장수 등연은 병사들이 700 리를 돌아 길을 뚫고 다리와 밧줄을 이용해 협곡으로 올라가도록 하는 우회술을 강행했고, 후방을 교란당한 촉은 결국 몰락했다. 자연지형을 이용한 천애의 요새라 할지라도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집요한 집념과 대규모 물리력 앞에 무너지는 결과를 보여준다.
어제 남양주의 한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 책이 많아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가 30분 정도 있다가 계단으로 내려왔는데, 이 엘리베이터가 고장나서 두 초등생이 1층에 갇혀 있었다. 문이 아이들 머리가 나올 수 있을 정도까지 열리지 않아서 도서관 관계자인 몇몇 어른들이 119를 부른 상태였는데, 이 사이에 한 어른이 보인 행태가 가관이다. 안에 갇혀서 공포에 질린 아이한테 너희들 뭘 잘못 눌러서 이렇게 문이 열리지 않게 된 거 아니냐는 추궁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119 소방대원 2명이 와서 힘으로 문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자 소방차의 유압기를 끌어오는 과정에서, 엘리베이트 문이 완전 망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또 다른 어른이 갇혀 있는 아이한테 너 여기서 15분만 더 기다릴 수 있겠냐고 묻는다(AS 기사가 오기 전까지). 주위에 지켜보는 사람이 있고 소방대원이 유압기를 이용해 머리가 간신히 나올 정도로 문을 열어주자 상황은 종료됐다. 성인이라도 엘리베이트 갇히면 불안해 지는데 어린 아이한테 대범함을 요구하는 이런 어른들한테는 사람보다 시설관리가 더 중한가 보다.
***원문 대조본 : Jürgen Habermas,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band 2 Zur Kritik der funktionalistischen Vernunft (Suhrkamp, 1982).
독서에 관해 (2013.09.18.수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아주 오래전에 읽은 톨스토이의 자서전에서 그는 독서란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접신을 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플라톤과 공자, 칸트와 대화할 수 있을까? 이들은 사라졌지만 이들의 작품은 밑밥에 감싸인 미끼로 우리에게 던져져 있다. 이를 두고 현대의 견유주의 철학자 슬로터다이예크는 문자계몽의 사육방식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많은 책을 섭렵하고 깊은 지식을 얻는 것이 흔히 독서의 목적이겠지만, 우리가 온전히 책을 수용만하는 리더기가 아닌 이상 결국 우린 저자와 싸울 수 밖에 없다. 물론 처음부터 독서는 이런 투쟁은 아니다. 아직까지 우린 어떤 사육, 어떤 배양의 필요성을 감내하는 겸허함이 요구된다. 독서는 삶의 한가지 수단일 뿐이다.’(2009.6.19)
하버마스와의 서신이 이런 독서의 목적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의 예전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세 번째 편지를 시작했다. 이 장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VI.제 2 중간고찰 : 체계와 생활세계
예비고찰
뒤르켐의 분업이론에 의거해서 본 사회통합과 체계통합
1.생활세계의 개념과 이해사회학의 해석학적 이상주의
1)의사소통행위의 지평과 배경으로서의 생활세계
2)의사소통행위이론에 비추어 본 사회현상학적 생활세계 개념
3)형식화용론적 생활세계 개념으로부터 서사적 생활세계 개념을 거쳐 사회학적 생활세계 개념으 로
4)생활세계의 재생산에서 이해지향적 행위가 하는 기능.
생활세계 합리화의 여러 차원
5)생활세계를 사회와 동일시하는 이해사회학의 한계
2.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
1)사회문화적 생활세계로서의 부족사회
2)자기조절체계로서의 부족사회
3)체계분화의 네 가지 메카니즘
4)체계통합 메커니즘이 생활세계에 제도적으로 정착되는 방식
5)생활세계의 합리화 대 생활세계의 기술화.
탈언어화된 의사소통매체를 통한 일상언어매체의 부담 경감
6)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 그리고 물화명제의 재구성
(1)상호이해 형식의 개념
(2)상호이해 형식의 체계적 분류
6장의 예비고찰에서 당신은 비판이론가들의 도구적 이성 비판이 처한 이론적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미드의 행위이론을 길잡이로 삼아, 목적활동에서 의사소통행위로의 전환을 추적하였지만, 여전히 해명되지 않는 문제가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행위이론과 체계이론을 어떻게 서로 연관시키고 통합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이에 대한 예비적 답변을 위해 당신은 베버의 합리성 명제를 맑스주의의 방식으로 수용하여, 이로부터 비롯된 물화의 문제를 다루려고 하며, 여기서 뒤르켐의 분업이론이 적절한 출발점으로 제공된다.[187] 뒤르켐의 분업이론이 이 맥락에서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부탁한다.
노동분업과 아노미(2013년 9월 25일 수 : 하버마스가 구일섭에게)
독서를 통해 계급혁명을 꿈꾸는 것은 낭만적이지만 수용된 지식을 바탕으로 독창적 사유를 전개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당신도 나의 이 책을 제대로 파악해 다른 곳에서 활용할 수 있는 벽돌로 삼아주길 바란다.
뒤르켐이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사회적 노동분업이란 명칭은 스미스에서 맑스, 스펜서에 이르기까지, 체계 분화과정이 사회적 노동의 체계, 곧 직업계층과 사회경제적 계급분화에서 탐구되었던 상황에서 설명된다[187]. 이 노동분업의 차원에서 뒤르켐은 환절적으로 분화된 기계적 연대의 사회와 기능적으로 분화된 유기적 연대의 사회 사이에 유형학적 구별을 도입하는데, 이런 설명에는 다분히 생물학적인 용어가 보인다. 이런 점은 뒤르켐이 스펜서와 마찬가지로 노동분업을 사회문화적 현상이 아닌 물질의 본질적 속성에서 찾아야 하는 일반 생물학의 현상으로 보는 점에서도 드러난다[188-189]. 저 유형학적 구별은 규범과 무관한 사회성을 다루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뒤르켐은 한 사회를 구성하는 생활연관이 원시사회에는 집단의식, 근대사회에는 노동분업이라는 견해를 취한다. 그래서 사회적 연대의 형식 변화는 사회통합에 있어 기본 토대의 변화를 함축한다. ‘원시사회가 규범적 기본 동의를 통해 통합된 반면, 발달된 사회에서 통합은 기능적으로 특수화된 행위영역들의 체계적 연관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189, 강조는 하버마스]
뒤르켐에 따르면 스펜서는 후자의 구상을 극단적으로 추구한다. 스펜서에게 사회적 삶은 시장을 통한 교환관계의 메카니즘을 본질로 한다. 시장을 통한 자기중심적 효용계산에 맞춘 교환관계(기능연관)가 도덕규칙을 통한 행위조정을 대체한다는 점에서 시장은 사회통합의 산출을 위한 자발적 메카니즘이라는 것이다[190]. 그러나 뒤르켐은 스펜서가 제기한 교환관계를 통한 조절작용을 반박한다. 그가 보기에 이해관심이 조절작용을 하기에는 개인간 갈등과 전쟁상태에 제동을 걸지 못하는 등 지속성이 가장 떨어지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도 도덕규칙이 사회통합의 힘으로 발휘되어야 조절작용이 가능하다. 유기적 형식의 사회적 연대 역시 규범을 통해서야 가능한 것은, 집합의식의 구조가 달라졌더라도 이익중심의 행위 조정 장치인 시장이 집합의식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협업에도 독자적인 도덕성이 있다는 것이다[190-192].
하지만 전통적인 연대의 형식을 파괴하는 근대 세계의 시장경체체계가 초래하는 아노미 상태에 대해 뒤르켐은 노동분업에서 자연스럽게 그에 맞는 규범이 나올 것으로 보는 정도에 그친다[192]. 이런 논리는 흡사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업자에게 환경 복원의 규칙을 제정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노동분업에게 보편 규범을 요청하는 뒤르켐의 문제제기로부터 하나의 중요한 관점이 도출된다. 그것은 규범적인 사회통합과 비규범적 체계분화의 구분이다. ‘행위체계의 통합은 전자의 경우 규범적으로 확보된, 혹은 의사소통을 통해 이룩된 합의를 통해서 산출된다. 후자의 경우 그것은 행위자들의 의식을 넘어서 미치는 개별 결정들의 비규범적 조절을 통해서 산출된다.’[193]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나는 사회를 동시에 생활세계와 체계로 파악하자는 제안을 한다. 생활세계의 합리화(사회통합의 형식)와 사회체계의 복잡성 증대(체계분화)의 사이를 분리하고 그 연관성을 가시화하는 사회진화이론에서 이 제안의 적합성이 입증되며, 이는 물화의 문제를 의사소통이론 식으로 끌고 가는 준거가 된다[193-195].
생활세계와 의사소통행위(2013년 9월 26일 목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이런 이론 전략은 어떤 주제에 대한 상대방의 한계를 통해 자신의 논증을 앞세우려는 일종의 반증적 수법 같은데, 이번 서신에서 나는 텍스트에 대한 저공비행을 통해 이해의 바탕을 충실히 한 상태에서 논점을 발굴하고자 하므로, 당신의 논의를 일단 쫓아가고자 한다. 당신의 이번 서신은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당신의 유명한 개념 설정이 어떤 이론적 배경에서 나왔는지 보여준다. 생활세계는 멀리 원시시대부터 있어 왔고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삶의 바탕이다. 하지만 사회합리화의 과정(좁게는 물화의 과정), 특히 근대의 경제체제는 그러한 전통적 생활세계를 압박하는 환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음의 논의에서 당신은 생활세계의 개념을 해명하는 작업을 하면서 다시 의사소통이론적 고찰을 재진입시킨다. 왜냐하면 사회 전체의 구조변동에 제약된 생활세계는 의사소통행위자가 취하는 행위 반경의 지평이기 때문이다[196]. 6장 1절에서 당신은 이해지향적 행위 주체들의 공통적 상황정의를 위한 세 가지 세계에 관해 생활세계의 개념이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 알아보기 위해 현상학적 생활세계 분석과 이해사회학의 통상적 생활세계 개념을 끌어들인다. 결론적으로 당신은 이런 작업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사회를 동시에 체계와 생활세계로 파악하자는 제안을 다시 한다[197]. 그럼 6장 1절의 내용을 살펴 보자.
당신은 의사소통행위의 지평과 배경으로서의 생활세계를 논하면서 한 주체가 관계 맺는 세 가지 세계의 양상으로—서론에서 밝힌 바 있는—진리성에 연관된 객관세계, 규범성에 연관된 사회세계, 진실성에 연관된 주관세계를 들고, 주체의 이해지향적 행위가 이러한 세계관계에 동시에 편입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용 노동자들의 오전 새참 중 고참 노동자의 심부름으로 신참이 맥주를 사오는 일에 관한 사례로 설명을 한다[197-199].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언어적 상호이해의 배경에는 중첩되고 공통된 상황정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200]. 가령, 신참의 경우 오전 중 새참으로 맥주를 마시는 건설현장의 풍속에 생소할 경우, 그는 공통된 상황정의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참에게는 생소한 상황을 소통과정을 통해 재정의할 필요성이 생긴다. 한편, 이 사례에서의 주제는 새참, 목표는 맥주 조달, 계획은 이 목표를 위해 신참을 보내는 일인데, 이 사례에서 보이는 생활세계의 단면은 상황과 주제의 변동(가령 건축주가 마침 맥주 한 박스를 들고 나타나거나, 행정기관의 불법 외국인 단속 요원이 들이닥치면)에 따라 이동한다[201-202]. 만약 이 경우 신참이 불법 외국인 노동자인데 다행히 단속 요원의 검열을 피했다면 이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주제가 등장한 다. 이렇듯 상황지평의 장력 안에 있는 ‘생활세계의 제한된 단면들만이 이해지향적 행위에서 주제화되고 지식의 범주 아래 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당신은 의식철학에 묶인 후설의 생활세계를 문화적으로 ‘전승되고 언어적으로 조직된 해석 유형들을 비축한’ 생활세계로 대체하고자 한다[203-204]. 후설의 현상학적 생활세계 개념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이에 대한 비판을 통해 당신이 성취하고자 논점은 무엇인가?
뒷감당 혹은 대가(2013년 10월 2일 : 하버마스가 구일섭에게)
나의 책에 대한 편지만 오고 가니 지루하다. 요즘 한국의 정치판에서는 막장 드라마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박근혜 정부가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흥미롭게 시청중이다. 국정원이 개입한 부정선거로 귀착된 정권의 정당성 기반의 균열, 위기의 국정원이 궁여지책으로 연출한 공안정국, 정권에 불편한 검찰총수를 찍어낸 정권과 보수 언론의 유착, 위장 복지의 본색 노출. 실속은 없고 의전만 강조하는 세습정권의 정치쇼라는 점에서 북조선과 박근혜 정권은 닮았다.
후설은 인식론적 기본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후설에 따르면 주관성은 생활세계를 가능한 일상경험의 초월론적 틀로 구성하는 적극적 작용을 한다. 슈츠와 루크만은 이런 주관성 모델에 행위이론적 방향전환을 가져온다. 심리학과 사회학에서 사용되는 고독한 행위자의 모델, 다시 말해 어떤 상황에서 자극을 통해 유발되거나 혹은 계획에 따라 행위하는 고독한 행위자의 모델이 생활세계와 행위상황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과 연결되면서 깊이와 날카로움을 더하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다시금 현상학으로부터 배운 바 있는 체계이론과의 접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또 체계이론이 얼마나 발걸음 가볍게 의식철학을 계승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행위 주체의 상황을 인성체계의 환경으로 해석하면, 현상학적 생활세계 분석의 성과는 전혀 무리없이 루만 식의 체계이론으로 흡수될 수 있다. 이것은 심지어 후설이 데카르트 식의 성찰을 하면서 좌절했던 문제를 다루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마저 갖는다. 생활세계의 상호주관성을 단자론적으로 산출하는 문제 말이다. 주체-객체 관계를 체계와 환경 사이의 관계로 대체하면 이 문제는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발상에 따르면 인성체계들은 서로에 대해 환경이 된다. 다른 수준에서 인성체계와 사회체계가 서로에 대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여기서 상호주관성의 문제, 그러니까 상이한 주체들이 어떻게 동일한 생활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가의 물음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상호침투의 문제, 그러니까 특정한 종류의 체계들이 어떻게 서로에 대해 제한적으로 우연적이며, 서로에게 맞추어진 환경이 될 수 있는가의 물음이 등장한다. 문제를 이렇게 달리 파악하면서 치르는 대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것이다[211-212].
하지만 나는, 상호주관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후설의 생활세계 개념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그대로 계승한 슈츠와 루크에게서 현상학이 기술하는 구성된 생활세계가 잘 설명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생활세계 개념을 의사소통행위에 대한 상보 개념으로 도입하는 것이다[212-213]. 그들은 후설을 이어받아 생활세계 개념을 마치 칸트 인식론의 시간과 공간처럼 문제없이 사회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강조하지만[214-217], 세계 개념의 철저한 분화가 이루어지는 근대적 세계 이해에 이르러서, 이렇듯 자명하게 여겨졌던 생활세계 개념은 상황정의와 의사소통행위의 테스트를 거쳐 문화적 지식으로 변모된다. 이렇게 되면 상호이해를 통한 해석성취의 정도에 따라, 과거 생활세계가 가졌던 예단적 강제력은 약화된다. 이에 반해 세계 개념의 분화를 허용하지 않는 과거의 중심화된 세계상은 불협화음을 내는 경험으로부터 면제되는데, 여기서는 문화, 사회, 인성이 총체적으로 통합되어 있어 전통적인 해석 외에 다른 해석이 도입될 수 없기 때문이다[218-219].
한편, 이제 일상으로서의 생활세계 개념이 필요한데, 현상학의 초월론적 생활세계 개념이 상황의 주제화를 못해 이론적으로 사용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개인의 서사화와 같은 일상으로서의 생활세계 개념은 구성원들의 상호이해 뿐만 아니라 개인적, 사회적 정체성 형성에도 기여한다[221-222]. 하지만 이해사회학이 하는 바처럼 문화주의적으로 축소된 생활세계 개념은 생활세계의 구조적 복잡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서사화된 서술은 생활세계 자체의 재생산을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 이론적 서술이 필요해 지는데, 문화 및 사회, 인격에 관한 의사소통적 재생산과정은 생활세계의 물질적 기초의 보존 문제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즉 상징적 재생산과 물질적 재생산이 구분된다[222-226]. 이때 상징적 재생산은 물질적 재생산의 압박을 신성한 것의 권위 뒤에 숨기지 않음으로써 보편적 토의라는 이상화된 생활세계를 투사할 수 있다. ‘합리화된 생활세계는 결코 갈등 없는 형태로 재생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갈등은 그것들의 고유한 이름 아래 등장할 것이며, 더 이상 토의를 통한 검토를 견뎌내지 못하는 신념들에 의해 은폐되지 않을 것이다.’[234]
대화 : 합리화 과정의 장애와 체계 복잡성의 증대(2013년 10월 12일)
구일섭 : 다음으로 당신은 미드와 뒤르켐이 생활세계의 합리화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는 역사적 근거들을 세 가지 관점에서 체계화하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몇 가지 비판 지점을 제시하겠다. 두 번째 관점에서 당신은 형식과 내용의 구별이 문화, 사회, 인성의 분화에 상응하는 점을 보이면서 이중 사회의 차원에서 일반 원칙들이 원시사회와는 달리, 특수맥락으로부터 분리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근대 사회에서 관철되는 법질서와 도덕원칙들은 갈수록 구체적 생활양식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235] 이 서술은 추상적 규범과 구체적 생활양식의 괴리를 보여주는데, 이런 현상이 오히려 아노미를 더욱 촉진시키지 않는가?
하버마스 : 생활세계의 점증하는 합리화가 결코 장애 없는 재생산 과정을 보증하지 못하지만, 아노미가 생활세계의 합리화 자체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은 왜곡이다.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시작하는 반(反)계몽운동은—그 사이 널리 가지를 뻗치게 된—근대성에 대한 비판의 기초를 제공한다. 이것의 공통분모는 의미상실, 아노미, 그리고 소외가, 즉 부르주아 사회의—일반적으로 탈전통적 사회의—병리현상들이 생활세계의 합리화 자체로부터 비롯된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과거지향적 비판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이에 반해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의 비판은 생산관계에서 시작한다. 생활세계의 합리화는 받아들이지만, 합리화된 생활세계의 왜곡은 물질적 재생산의 조건으로부터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생활세계의 상징적 재생산의 장애에 대한 이러한 유물론적 접근은 ”생활세계“ 보다는 좀더 넓은 기본 개념의 토대 위에서 움직이는 이론을 요구한다. 이것은 생활세계를 사회 전체와 동일시하지도 않고 체계의 연관들로 환원하지도 않는 이론전략을 택해야만 한다.”[237-238]
구일섭 : 당신은 세계상의 합리화 과정에서 일어난 폐해로부터 사회적 합리성을 구분하고자 한다. 베버에게는 의미상실, 뒤르켐에게는 아노미로 진단되는 합리화 과정의 장애로부터 합리성을 지켜내려는 것인데, 그 방식이 바로 체계와 생활세계의 구분이며, 이로부터 물질적 재생산에 연관된 체계의 압박이 생활세계를 구속하는 양상에 대한 맑스주의적 비판의 계승이다(이런 방식 때문에 당신의 이론에 네오 맑스주의라는 별칭이 부여된다). 이런 의미에서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개념설정은 당신이 반계몽주의의 잔당으로 지칭하는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들의 합리성 비판을 방어하기 위한 장치로 나는 본다. 생활세계의 합리화엔 아무 잘못이 없으니 돌을 던지려면 체계에 던지라는 전략이 아닌가? 더군다나 모든 현상을 체계와 환경의 이분화로 몰아가는 체계이론을 위한 주도적 비판도 이 책에 마련되어 있다.
하버마스 : 사회화와 사회통합은 체계가 아닌 의사소통행위에 의해 가능하지만, 생활세계로 한정된 사회연구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행위자들의 책임능력만으로 행위상황이 완전히 통제된다는 것은 허구적이다[238-239]. 하지만 의사소통적 합의에는 한계와 오류가능성이 있어도 강제가 있을 수 없다(비판 가능한 타당성 주장에 대한 강요되지 않은 인정). 사회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분화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사회 진화론적으로 유효한 것이다[243]. 갈 길이 멀다. 이제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를 다루는 6장 2절로 넘어가자.
2013년 10월 13일 하버마스 : 독일맥주만 좋은 줄 알았는데, 칭따오 맥주 맛도 좋았다. 양꼬치랑 같이 먹으면 더 좋겠다. 탈언어화된 의사소통매체를 통해 조직들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체계분화의 수준에 이른 근대사회에서 체계 메카니즘은 규범을 넘어 자립화된 목적합리적 경제행위와 행정행위라는 하부체계를 조절하면서, 동시에 생활세계는 사회존립의 하부체계로 남는다.[245] 하지만 체계 메카니즘이 닻(제도화)을 내려야 할 생활세계에서 규범적 태도와 사회적 소속감은 주변화된다. 더군다나 루만에 따르면 생활세계는 행위상황에 연결되지 않은 채 배경만을 이룬다[246]. 향후 서술은 체계 복잡성의 증대와 생활세계 합리화 사이의 연관성을 분석한다. 이 분석의 마지막에 생활세계의 도구화 드러난다. ‘생활세계의 합리화는 체계복잡성의 증가를 가능하게 하는데, 체계복잡성이 과도하게 증가하면서, 고삐 풀린 체계명령은 생활세계를 도구화하고 생활세계의 수용능력을 폭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247] 이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우린 다시 원시 부족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시사회는 세계관에 바탕한 언어와 생활세계의 규범에 따른 상호작용이 사회의 기반구조를 이룬 곳이다.[248] 집합적으로 공유된 동질의 생활세계에 가까운 원시사회는 가족적 사회구조로서의 친족체계와 유사한데, 이 친족 관계의 체계에서 제도적 효과(메타규범적 효과)가 일어난다.[250] 예를 들어 친족관계와 비친족관계의 구별을 위해서 혼인(여성교환)과 분쟁의 통제(친족관계 계산)가 적절히 일어난다. 고려의 왕건이 강성한 토호 귀족들과 사돈 관계를 맺은 것도 비슷한 사례다. 가족관계를 맺음으로써 이질적 집단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그래서 탈렌시 족은 “우리는 우리가 싸우는 사람들과 결혼한다”고 말한다.[251]
“친족체계의 규범은 그것의 구속력을 종교적 토대로부터 끌어낸다. 그래서 부족구성원들은 항상 하나의 제식(祭式)공동체를 이룬다. 부족사회에서 사회적 규범의 효력은 국가의 강제적 제재에 의지하지 않은 채 유지되어야 한다. 사회적 통제는 제식으로 정착된 종교적 정초를 필요로 한다. 친족체계의 중심적 규범을 위반하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여겨지도록 말이다. 외적인 강제적 제재가 없기는 하지만 그대신 신화적 세계관이 대화에 내재하는 부정과 혁신의 잠재력을 최소한 신성한 것의 영역에서는 억제하고 있다.”[252-253]
범주적 구별이 없는 신화적 세계상은 타당성 주장의 비판적 잠재력을 구속시키지만, 부족사회의 구조에는 분화의 여지가 있다. 생활세계의 물질적 기초의 유지를 위한 단순행위의 기능적 분업화와 작업성과의 교환, 권한 위임이 그렇다.(다양한 활동의 합목적적 조정)[253-254] 하지만 이렇듯 부족사회에서 과제에 의해 유발된 분업으로 보이는 것이 체계의 관점에서는 사회 복잡성의 증대로 나타난다.[255] 예를 들어 오늘날 스마트 폰의 등장으로 많은 편의가 생겼지만 스마트 폰으로 업무를 연장해야 한다거나 위치추적이 용이해 진다는 점 등 복잡한 일도 생기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규범의 발달단계와 탈언어적 조절매체의 등장(2013년 10월 15일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가을비가 추위를 쏟아 붓고 있다. 계속해서 당신은 부족사회를 자기조절체계라는 관점에서 다루면서, 앞서 말한 족외혼(여성교환)이라는 규칙의 도입을 통한 소규모 가족결합체의 복잡성 증가가 신분의 수직적 계층화와 권능에 의한 작업의 조직화로 이어지며, 여성교환이 상징적 재물교환으로 대체되고[255-257], 강력한 국가적 기구의 조직화가 초래한 복잡성의 전개 이후[268-269], 시장경제와 행정의 하부체계들이 마련되는 근대사회에서 본격적인 조절매체가 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262]. 자본주의라는 체계 분화의 수준에서 등장하는 탈규범화된 조절매체, 즉 화폐가 교환매체의 역할을 하면서 임금노동의 제도화와 조세국가의 제도화로 드러나는 ‘화폐의 구조형성적 효과’가 국가기구의 경제 의존성(화폐에 동화되는 권력)으로 나타난다고 결론짓는다[271]. 여기까지가 사회적 진화를 체계 복잡성의 증가라는 관점에서 다룬 것이라면, 다음 논의로 당신은 체계 분화가 제도화되는 것을 내부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해 생활 세계 내부로 진입한다[272]. 왜냐하면 체계 분화의 메카니즘은 생활세계에서 제도화되기 때문인데(체계 통합 메카니즘), 이 제도화(사회통합)의 형식을 연구하기에 최적의 대상이 바로 도덕과 법이다.
“도덕과 법은 표면화된 갈등들을 완화시켜 이해지향적 행위의 기초가 붕괴되지 않게, 그리하여 생활세계의 사회통합이 붕괴하지 않게 하는 과제에 전문화되어 있다. 도덕과 법은 규범에 따라 조절되는 일상의 의사소통 영역에서 상호이해의 메카니즘이 말을 듣지 않을 때, 그러니까 통상의 경우 기대되는 행위조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폭력적 대결이라는 대안이 목전에 놓이게 될 때,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차상 수준의 합의를 확보해 준다.”[274]
그래서 당신은 도덕과 법이라는 ‘이차 행위 규범’의 바로미터를 가지고 다시 고대세계로 거슬러 올라가 규범의 발달단계를 논하며 도덕과 법의 분리과정이 생활세계의 구조적 분화 과정의 일부임을 말한다[274-275]. 법이 법 자체로서 자립화하는 것을 당신은 시대사적으로 대비되는 처벌 수용에서 보여주는데, 부족사회에서 처벌은 속죄와 보상의 의미인 반면 국가로 조직된 사회에서 처벌은 침해된 규범의 치유라는 것이다[278-279]. 이것은 개인 간의 권리 침해와 보상이라는 민법의 차원으로부터 범죄 구성 요건에 따라 처벌을 규정하는 형법의 분리를 의미하고, 전자의 경우 화폐라는 탈언어화된 매체에 의한 근대적 행위조정의 상황에서, 과거 규범에 의존했던 상호작용이 사법 주체들 사이의 성공지향적 거래로 바뀌고(목적합리적으로 투입되는 법의 조직 수단화), 후자의 경우 정치적 지배의 결정화를 이루는 법 질서의 정당성을 동반한다[279-280].
근대사회를 특징짓는 법과 도덕의 양상은 가치일반화와 가치 추상화에 의한 행위 규정이다. 위계화된 부족사회에서는 상호작용의 동기가 되는 것이 신망과 영향력과 같은 전통적인 권위에 예속된 구체적 가치관인 반면, 이 권위가 국가의 법적 권위로 교체되고, 규범의 보다 높은 수준의 가치 일반화를 통해 칸트적 의미의 법치 사회가 등장한다고 당신은 본다. 도덕과 합법성의 분리를 통해 사적인 행위에는 ‘일반적 원칙의 자율적 적용이, 직업영역에서는 실정법에 대한 복종이 요구’되며, 최종적으로 ‘추상적 법에 대한 복종이 행위자가 충족시켜야 할 유일한 규범적 조건이 되는 단계’로까지 가치 일반화가 진행된다는 것이다[282-283]. 파슨스로부터 넘겨 받은 ‘가치일반화’의 개념을 당신은 탈언어화된 의사소통매체를 통한 일상언어매체의 부담 경감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것인데, 특수한 가치관에 예속된 언어적 행위조정이 탈언어적 부담 경감 메카니즘에 의해 대체되어, 증가하는 행위조정이 규범 외적으로 조정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신망과 영향력은 의사소통과 연관된 고전적 매체형식이다.[284] 이렇듯 조절매체를 통해 분화된 사회의 하부체계들은 자립화됨으로써 의사소통의 비용 절감과 결정의 조건화, 생활세계의 기술화를 가져오지만[287-288], 탈언어화된 의사소통매체(화폐와 권력)는 상호작용의 망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여기에 비판 가능한 타장성 주장을 위한 책임능력을 지닌 참여자는 필요없게 된다.[289] 왜냐하면 이러한 상호작용의 망에서는 언어적 합의형성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까다로운 자격 심사 없이 신청 후 4분 내로 입금을 해주겠다는 지하철의 흔한 대출광고는 이에 대한 극단적인 사례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를 맑스의 토대와 상부구조의 분리에 대한 변주로 삼는 한편, 맑스주의를 물질적 재생산이라는 체계 유지의 관점에서 계승한 체계 기능주의에는 베버가 제기한 분석수단이 결여되었다고 비판하는데, 그 수단이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척도이다[290-291]. 이것이 결여된다면 사회합리화의 과정을 서술하는 당신의 중요한 명제인 생활세계의 식민화(합리화된 생활세계에 침투하는 체계 메카니즘)라는 개념 구도가 깨지기 때문이다. 고도 문화의 사회로부터 생활세계에 내재되어 있는 타당성 주장의 분화(의사소통적 상호이해의 잠재력)는 당신에게 고도 문화의 사회에서는 신화적 세계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깨는 잠재성으로 남아 있으며, 근대사회에서 이것의 제한없는 분화가 정당성, 진리성, 진실성의 영역 분화를 낳고 종국에는 규범적 맥락에서 벗어난 체계의 목적활동으로부터 유린당하는 설정으로 되어 있음에도 말이다. 당신의 개념 설정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정리하려는 욕구는 다음의 문장에서도 역력하다.
“타당성 주장들의 덩어리가 의사소통행위의 수준에서 해체된다. 참여자들은 이해지향적 태도와 성공지향적 태도 일반만이 아니라 화용론적 태도들 각각을 구별한다. 관습적 법제도를 갖췄으며 국가로 조직된 공동체는 법에 대한 복종에, 즉 정당한 질서에 대한 규범준수적 태도에 의지해야 한다. 국민들은 일상행위에서도 이러한 태도를 외적 자연에 대한 객관화하는 태도와 자신들의 고유한 내적 자연에 대한 표출적 태도로부터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304]
이렇게 분화된 의사소통적 상호이해 형식은 너무나도 투명해서 체계 명령의 침투는 너무도 분명히 드러난다고 당신은 단정한다.
“도식적으로 제시된 경향들이 근대사회가 전개됨에 따라 실제로 관철되면, 사회통합의 형식 자체에까지 개입하는 체계명령의 구조적 강압은 더 이상 신성한 행위영역과 세속적 행위영역 사이의 합리성 격차 뒤에 숨을 수 없다. 근대적 상호이해 형식은 의사소통에 대한 은밀한 제한을 통해 구조적 강압에 어떤 은신처를 허용하기에는 너무 투명하다.”[307]
어떻게 보면 고삐풀린 체계의 억압을 당신은 비판적 이성의 잠재력으로부터 면역된 신화적 세계상의 위상과 유사한 지점에 배치시킨다. 왜냐하면 이성의 비판적 잠재력이 이 둘로부터 모두 억제를 당하기 때문이다.
체계에 의해 유발된 생활세계의 병리현상을 새롭게 정식화하기 위해 다음 장은 파슨스의 저작이 다뤄진다.
번역에 관한 몇 가지 첨언
*나의 서투른 독일어 실력에 아주 좋은 학습효과를 주는 번역임에 틀림 없지만, 일단 참고삼아 이런 자리에서 의견을 남겨두는 것이 비록 사소할지라도 유익하다고 판단된다. 단, 내가 참조한 원문의 출판연도와 다른 역서의 원저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249쪽 : 맨 아래줄 “ 집합적으로 공유된 동질적 생활세계는...”에서 Entwurf 가 번역 되지 않은 채 누락.
268쪽 : 중간 하단 “점점 첨예하게 드러나는 고급문화와 민중문화 사이의 양분화 경향...”에서 Volk는 대중으로 번역하는 것이 문장의 의미와 요즘 어감에 더 적절하다고 생각.
273쪽 : 첫줄 “...필요로 하는 전체 질서의 형태...”에서 ‘전체 질서’를 수식하는 politischen 생략됨.
279쪽 : 중간 “이 단계의 도덕의식에서..”에서 Urteils이 의식으로 번역됨. 행위주체의 의도에서 행위결과를 평가하는 것이므로 도덕판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좀더 감각적이라고 봄.
300쪽 : 첫 번째 새 문단에서 Praxis가 누락된 채 “단계를 정하고자 한다”로 번역됨.
구일섭과 하버마스의 서신 2 : 『의사소통행위이론2 :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 중 V장 <미드와 뒤르켐에서의 패러다임 전환>
*이 글은 가상의 서신이며 텍스트 소개를 주목적으로 합니다. 인용된 텍스트의 쪽수는 문장 끝의 [ ] 안에 수자로 표기하며, 직접 인용한 텍스트의 문장은 ‘ ’사이로 넣습니다. 또한 『의사소통행위이론 1권』은 [1권, ] 으로 표기하며, 다른 인용문헌도 [ ] 로 표기합니다. **주텍스트 : 위르겐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 2, 장춘익 역(나남, 2006). ***원문 대조본 : Jürgen Habermas,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band 2 Zur Kritik der funktionalistischen Vernunft (Suhrkamp, 1982).
루카치 (2013.08.17.月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편지가 많이 늦었다. 1차 서신을 마친 후,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중 1967년 저자 서론을 지난 6월에 읽었다. 자신의 40여 년 전의 논문집을 유토피아적 관념론이라고 스스로 비판하는 루카치에 대해, 당신은 물화 개념을 통해 재차 비판을 가했다. 루카치와 아도르노는 미학을 포함한 사회철학적 주제의식의 공통성과 서술 방식의 복잡성에서 유사하기도 하지만, 아도르노는 루카치를 의식철학의 유산을 극복하지 못한 실패한 이론가로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 비판을 당신은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루카치는 당신들처럼 단지 이론의 전당에서 현실을 관찰하며 관조만 했던 인물이 아니다. 그는 국내적이며 국제적인 혁명의 과정에 깊이 개입하면서도 이론과 현실 해석을 통합하려고 했던, 비록 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을 지라도, 실천을 사유로 매개하려고 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성명이나 발표하고 각종 상을 수상하며 한가한 노년을 보내는 당신과는 첨예하게 다른 역사적 조건에서 분투했던 인물이다. 미국으로 망명해 천박한 대중문화에 아연실색하며 비판에 급급해 있던 비판이론가들과도. 당신이 루카치에게 가한 비판이 과연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 언제 기회가 되면 좀 더 면밀히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여기서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역사와 계급의식』에 관한 루카치 자신의 1967년 자아비판이 아도르노에겐 읽히지 않았을지라도, 분명 당신은 접했을 것인데, 이를 알면서도 재차 비판을 가하는 것은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하버마스가 참고한 루카치 전집 2권 『역사와 계급의식』의 출판 연도는 1968년임).
지난 4월 9일 편지의 말미에서 당신은 사회합리화의 문제를 의사소통행위의 개념과 조절매체를 통한 체계형성의 개념으로 전개하기에 앞서, 이 기본개념들을 미드와 뒤르켐의 이론에서 재구성해 보자고 했다. 이들에게서 이론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하는 이유와 앞으로의 논의 방향에 대해 설명해 달라.
이론의 유통기한(2013년 08월 17일 : 하버마스가 구일섭에게)
오랜만에 반가운 편지를 기대했는데 초반부터 너무 거칠게 나온다. 이렇게 해서 앞으로 서신교환이 유지될 수 있겠나? 최소한 루카치에 대한 나의 비판을 충분히 음미하려면 그의 주저를 모두 읽는 것이 정당하나 권하지는 않는다. 사실 나도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집필하면서 직접 참조한 루카치의 저서는 『역사와 계급의식』 달랑 한 권이다. 이론적 유통기한이 소실된 그런 고전을 읽기 보다는 차라리 루만을 빨리 읽어라.
미드의 이상적 의사소통공동체에 맞춘 행위이론은, 헤겔의 영향권 아래서 부정의 변증법의 방식으로 풍뎅이처럼 맴돌기만 하는 아도르노의 화해와 자유의 이념을,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념을 통해 전개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저 이상적 공동체는 온전한 상호주관성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데, 이를 통해 개인들 사이의 비강압적 상호이해가 가능하며, 비강압적 자기 이해를 도모하는 개인 정체성이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한계 또한 분명한데, 내부적인 생활세계의 상징적 재생산이라면 몰라도 ‘전체 사회의 재생산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조건으로부터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다.’[16]
V장은, 규범에 의해 규제되고 언어의 의해 매개되는 상호작용을, 미드가 몸짓처럼 본능적인 상호작용에서 출발하여 신호언어적 상호작용과 상징에 의해 매개되는 상호작용이라는 개념 틀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런데 상징에 의해 매개되는 상호작용이 규범에 따라 수행되는 상호작용으로 이행할 때 빈틈이 생기는데, 이 빈틈을 뒤르켐의 사회연대이론이 보충한다. 이것은 사회적 연대가 신성한 것, 곧 의례를 기반으로 보호 및 관리된다는 가정이다. 여기서 의례로 확보된 규범적 기본 동의가 언어화된다면, 분화된 상징적 구조를 갖는 합리화된 생활세계의 개념을 얻을 수 있다[16]. V장의 세부 목차는 다음과 같다.
V.미드와 뒤르켐에서의 패러다임 전환 : 목적활동에서 의사소통행위로
예비고찰
1.의사소통이론을 통한 사회과학의 정초
1)미드의 의사소통이론의 문제설정
2)인간 이전의 몸짓언어로부터 상징을 통해 매개되는 상호작용으로의 이행 : 타자태도 취하기
3)부연고찰 : 미드의 의미이론을 규칙준수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가지고 정교화하기
4)상징에 의해 매개되는 상호작용으로부터 규범에 따라 수행되는 상호작용(역할행위)으로의 이행
5)사회세계와 주관세계의 상보적 구성
(1)명제와 사물지각
(2)규범과 역할행위
(3)정체성과 욕구성향
2.신성한 것의 권위와 의사소통행위의 규범적 배경
1)도덕의 신성숭배적 뿌리에 관한 뒤르켐의 고찰
2)뒤르켐 이론의 약점
3)부연고찰 : 의사소통행위의 세 가지 뿌리
(1)명제적 요소
(2)표출적 요소
(3)발화수반적 요소
(4)이해지향적 행위의 성찰적 형태와 성찰적 자기관계
3.신성한 것의 언어화가 갖는 합리적 구조
1)법 발달과 사회통합 형식의 변화
(1)계약의 비계약적 토대
(2)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
2)완전히 통합된 사회라는 가상적인 극단의 경우를 예로 하여 살펴본 사회통합형식 변화의 논리
이 책이 단지 새로운 사회이론의 구축만이 아니라 사회의 토대에 관한 전통적 사회학의 주요 이론에 대한 학습도 염두해 두었음을 당신이 서문에서 밝혔듯이[1권, 23], V장은 미드와 뒤르켐의 사회이론이 심층적으로 원용되고 있다. 이 원용의 결론은 첫째, 미드의 의사소통 이론이 갖고 있는 이상주의는 사회의 물적 존립기반(경제, 전쟁수행, 정치권력투쟁 등)을 소홀히 다루었던 반면 둘째, 뒤르켐의 분업이론은 사회체계의 재생산 압박 하에 있는 사회체계의 구조적 분화와 사회적 연대의 형식을 연관시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184]. 여기서 기능주의의 접근법으로 인지되는 체계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체계이론의 선구자인 파슨스와 체계이론의 계승자인 루만에 대한 원용과 비판(VI, VII장)이 예고되고 있다. 특히 루만은 하버마스가 취하는 이런 방식의 이론 재구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루만은 기존의 사회학이 사회의 자기 지시성을 보지 않고 주객의 분리와 이론 자신의 역사적 고정을 통해 대상에 대한 순환관계를 해소해 버렸으며, 이러한 방향에서 사회학의 고전들이 시대를 초월한 텍스트가 되어 버리고, ‘거의 모든 방향의 이론적 노력들이 오늘날 회고와 재구성의 대상’이 되어 버린 현실을 비판한다[루만, 『사회의 사회 1』(새물결, 2012), 33~35]. 이를 통해 루만이 새로운 사회이론으로 모색하는 것은 구성주의적 사회개념으로의 이행인데, 이것은 인간학적, 지역적 사실로부터 사회 개념의 정의를 도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반면, 하버마스가 말하는 이해지향적 의사소통의 규범이나 인권 등은 사회적 성취물이지 규제적 이념이나 커뮤니케이션 개념의 구성요소가 아니라는 것, 곧 루만은 이런 규범으로부터 사회 개념의 정의를 이끌어 내지 않겠다고 말한다[루만, 상동, 53]. 향후 하버마스와 루만의 주저에 관한 교차 독서를 통해 상호 간극과 논쟁 지점을 세밀하게 발굴하도록 하겠다.
여기서 V장의 논의에 대한 전반적 소개는 앞서 제시한 논의방향과 결론, 세부 목차로 대신하고 논점이 될 만한 사안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겠다. 주요 세부 내용에 대한 소개와 비평은 또 다른 형식의 서평에 기약 없이 넘긴다.
당신은 미드가 신호언어를 넘어 행위조정의 사회화에만 주목하며,[49] 상호이해 수단의 분리과정[51], 곧 상호이해의 메카니즘으로서의 언어에 주목하지 않은 점을 비판하면서,[54] 합리적이며 설득적 동의를 구할 수 없는, 책임능력이 없는 행위자로부터의 강제적 동의 탈취를 유추할 수 있는 관점을 내비치고 있다. 해당 문장은 다음과 같다.
‘참여자들이 화행을 하면서 자신들이 발언한 것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한, 그들은 합리적 동기에 따른 동의를 이루고 이를 토대로 그들의 계획 내지 행위를 조정할 수 있다는 기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단순한 명령이나 후환을 가지고 위협하는 경우처럼, 강제력이나 혹은 보상의 제시를 통해 다른 사람의 경험적 동기에 영향을 미칠 필요가 없다. 기본 양상들의 분화와 함께 상호이해의 언어적 매체는 책임능력이 있는 행위자들의 의지를 구속하는 힘을 획득한다. 자아는 타자에게, 양자가 그들의 행위를 타당성 주장에 맞출 수 있게 되면, 이러한 발화수반적 힘을 행사할 수 있다.’[53~54]
이 문장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개념은 ‘책임능력’이다. 책임능력의 유무에 관한 판단이 자의적이라면, 책임능력을 규정짓는 사람의 자의에 따라 책임능력이 없는 것으로 규정된 상대—말로 설득될 수 없는—를 명령이나 위협으로 제압할 가능성이 남게 된다. 이와 유사한 당신의 개념구사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있다. 1998년 유고슬라비아는 코소보 인민 해방군 축출을 명분으로 알바니아계 주민에게 계속적으로 포격을 가해 20만에 이르는 난민을 발생시켰다. 분쟁이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않자 나토의 코소보 공습이 강행됐는데, 이때 독일이 나토의 공습에 참여한 것에 관해 하버마스가 공공적 합의에 기반해 지지한 것을 두고 가라타니 고진은 그러한 공공적 합의가 UN의 결의를 거치지 않고 유럽 내에서만 이루어진 점에서 제한된 합의에 불과하며, 이를 공공적 합의라고 하는 것은 초국가로서의 유럽에 한정된 지역적 합의를 보편성으로 위장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한다.[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6), 183 각주] 나토의 코소보 공습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이를 공공적 합의에 기반한 것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문제다. 당신에게 흔히 제기되는 유럽 중심주의적 인식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당신 스스로가 자신의 이론적 배경과 지향이 서유럽에 한정되어 있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문제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본다. 당신이 무수한 논쟁 지점의 생산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차이의 효과, 비판대상과의 구별을 통한 구별된 이론과 구별짓는 이론의 생산인데, 여기에 당신은 정당성의 힘을 불어넣으려고 한다. 구별짓는 것은 구별당하는 것보다 능동적이지만, 이로부터 차이만 발생할 뿐 정당성은 도출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규범의 종교성(2013년 8월 20일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도덕의 신성숭배에 관한 뒤르켐의 고찰에 대한 평가 이후 당신은 의사소통의 세 가지 기원을 논하는데 그 하나는 명제적 요소로서의 외부자연에 대한 인지적 관계, 두 번째는 표출적 요소로서의 내부자연에 대한 표출적 관계, 세 번째는 발화수반적 요소로서의 종교적 상징사용이다. 세 번째에 대한 서술 중 다음의 문장을 검토해 보자.
‘뒤르켐에 따르면 사회집단은 그들의 사회에 대한 이상화된 상을 설정하지 않고는 집합적 정체성과 결속상태를 안정화할 수 없다. “이상적 사회는 현실 사회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 사회의 일부이다. 이상적 사회와 현실사회는 서로 밀어내는 양극처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한쪽에 속하지 않고는 다른 쪽에도 속할 수 없다.”[Durkheim(1981), 565] 뒤르켐이 신성한 것의 의미를 단서로 해명하는 규범적 합의는 집단구성원들에게는 이상화된, 시공간적 변화를 초월하는 동의의 형식으로 있다. 이것은 모든 타당성 개념에 대한 모델을, 특히 진리의 이념에 대한 모델을 제공한다.[122, 강조는 하버마스]
이 문장에서는 종교적 이상을 보편적 규범으로 전도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신성한 것의 권위가 집합체의 연대를 가능케 했던 것은 도덕이 신성숭배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뒤르켐이 도덕과 신성숭배의 구조적 유사성과 연관성에 주목하여 베버와 마찬가지로 이로부터 세속화된 도덕의 존립기반을 고심하려는 추론에서[90] 하버마스는 고무된다. 그래서 상호작용의 특수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례행위가 의사소통적 방식의 공감형성에 기여하는 점이 부각된다[94~95]. 또한 의례행위에서 발전된 종교적 세계상은 의사소통행위에 연결된다. 이 소통구조에서 상호이해의 과정을 통해 세계상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101]. 하버마스의 이론에서 보이는 보편화의 욕구는 부분적으로는 이와 같이 규범을 종교로부터 세속화된 것으로 보려는 관점에서 유도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종교적 호소와 말의 공통성 : 구속력(2013년 8월 20일 : 하버마스가 구일섭에게)
원론적으로 답하겠다. ‘처음에는 의례를 통해 충족되던 사회통합 및 표출적 기능들이 의사소통행위로 넘어가고, 이때 신성한 것의 권위는 단계적으로 그때그때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합의와 권위에 의해 대체된다. 이것은 의사소통행위가 신성성에 의해 보호되는 규범적 맥락들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신성성 영역의 탈주술화와 탈권세화는 의례를 통해 확보되는 기본적인 규범적 동의가 언어화되는 길을 거쳐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의사소통행위에 들어 있는 합리성의 잠재력이 해방된다. 신성한 것이 발하는 매료와 공포의 아우라, 성스러운 것이 갖는 마력은 비판 가능한 타당성 주장들의 구속력으로 고양되고 동시에 일상화된다.'[132] 결국은 근대사회의 토의적 의사형성의 장치가 종교적 합의를 대체한다는 뒤르켐의 관점에[139] 주목하기를 바란다. 비록 근대적 사적 계약의 구속력이 정치적 의사형성을 통해 정당화된 법체계에 기초한 합법성에서 나올지라도, 뒤르켐이 종교적 형식의 다짐을 하는 조건에서 말의 구속력을 찾는 바처럼, ’구속력 있는 합의를 산출하는 것은 시민들의 의사소통공동체가 이루어내는 상호이해, 그들의 말 자체이다.‘[140]
개인화에 따른 자율성이 개인의 노력을 통해 협동하는 유기적 연대를 특징짓는 부분에 관해 뒤르켐의 설명은 취약하나, 그는 사회가 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 이행함에 따라 보편주의적 도덕으로 나가는 경향성을 본다[144]. 뒤르켐은 ‘집합의식이 점점 더 개인숭배로 축소된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환절적(segmentär) 사회에 비해 조직된 사회의 도덕을 특징짓는 것은 좀더 인간적인, 따라서 좀더 합리적인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도덕은 우리를 분명 우리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에 구속시켜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지 못할 만큼 속박할 필요까지는 없다.’[Durkeim(1977), 330]고 말한다.[144~145] 뒤르켐에게서 보이는 역사철학적 함정과 사회과학적 기술의 혼재, 선언적으로 그칠 뿐 그 충족조건이 그에게서 분명하게 의식되지 않는 합리화의 발달과정은 그의 도덕주의를 그의 실증주의에 대한 하나의 역설로 만들어 버렸으나, 루만이 뒤르켐에게 제기한 도덕주의라는 비난은 부당하다. ‘이런 비난은 “규범에서 자유로운 사회성”이라는 분석적 차원을 겨냥함으로써 뒤르켐의 문제설정을 무력화시키는 연구전략의 전제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145~146] 사회통합 형식의 변화에 관한 뒤르켐의 기술은 합리화 과정에 대한 지표로서 정당하다[146].
‘근대적 과학과 도덕이 무제한의 토론을 통하여 확보된 객관성과 공정성이라는 이상을 따른다면, 근대적 예술은 탈중심화되고 인식과 행위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아가 자기 자신과 갖는 무제한의 교류라는 주관주의의 이상을 통해 규정된다. 그런데 신성한 영역이 사회에서 본질적 부분을 차지했다고 할 때, 그 부분에 관한 한 과학도 예술도 종교의 상속자가 되지 못한다. 이 측면에서는 토의윤리로 전개되고, 의사소통적으로 유동화된 도덕만이 신성한 것의 권위를 대체할 수 있다. 이런 도덕 안에 규범적인 것의 원시적 핵이 용해되어 있고, 이런 도덕과 함께 규범적 타당성의 합리적 의미가 펼쳐진다…도덕에는 아직 신성한 원초의 힘들이 가졌던 관통력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154]
도덕의 한계(2013년 8월 20일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바로 위와 같은 당신의 서술이 토의윤리를 신성성의 유일한 상속자로 보려는 의도를 그대로 노출시킨다. 도덕에는 종교적 신비의 아우라가 감돌고 있으며, 이 원시적 힘에 여전히 당신이 즐겨 말하는 도덕적 정당성의 원천이 있다. 그리고 저 인용문에는 당신과 대결구도에 있는 정쟁 이론을 예술로 격하시키고 주변화시키려는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 물론 규범만을 가지고 하나의 온전한 사회이론을 전개시킬 수 없다는 한계를 당신은 잘 알고 있으며, 뒤르켐의 분업이론에 대한 검토로 시작하는 체계와 생활세계에 관한 VI장의 중간고찰에서 비로서 당신은 사회의 물적 토대에 관한 논의를 펼친다. 여기서부터 좀더 생산적이고 흥미로운 논쟁지점이 발굴될 것으로 기대된다.
약한 도덕(2013년 8월 21일 : 하버마스가 구일섭에게)
당신이 도덕에 관한 논쟁을 서둘러 회피하려는 전술에 나는 동의하지만, 도덕에 관한 해명, 더 나아가 이 해석의 보편성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일은 철학자의 몫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비교적 협의의, 약한 의미의 도덕 개념을 선호하는데, 약한 의미의 도덕은 근거에 기초해 결정할 수 있는 실질적 문제와 관련되며, 합의에 의해 해결을 모색할 수 있는 갈등상황에 관련된다. 여기서 더 나아간 문제에 대해선 도덕에게 기대서는 안되며, 사회이론에 맡겨야 한다. 하지만 사회이론이라 할지라도, 현존 생활양식에 대한 비판을 가할 수 있으나 대안적 생활양식의 미래 투사를 본업으로 삼는 것은 권한 밖의 일이다. 미래의 해방된 생활양식에 대한 조건을 제시하는 선까지 비판적 사회이론은 자기이해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며, 사회의 진보적 자기실현은 ‘정치적 투쟁과 사회운동, 그리고 개혁적 주변집단들의 선구자적 역할이 선행되어야만 가능하다.’[하버마스, 『새로운 불투명성』(문예, 1996), 258~27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