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익과 양운덕1

서술 Beschreibung 2021. 2. 9. 05:0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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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이렇게 쓰는 것이 건방져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최소한 한국의 현대철학사의 비하인드 스토리 정도에 이 글이 조금은 기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제목을 쓰고자 한다.

 

나는 어떻게 보면 운 좋게도, 학부 졸업 시점 부터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이 두분을 지도교수로 삼았다. 양운덕 선생은 대학에 정식으로 자리를 잡고 계시지 않았으나, 이 분이 이끄는 세미나팀에 나는 약 2년간 참여했었다. 물론 장춘익 선생은 나의 정식 지도교수였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직접적 계기는, 지난 금요일에 접한 장춘익 선생의 급작스러운 사망 소식 때문이다. 대학원을 수료하고 직장에 자리잡고서 나는 다시 논문작성을 위해 2009년 장선생님과 한번 만나고, 메일 교신 이후 나는 전혀 연락을 하지 않은 터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근래 독일에서 막막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 장선생님한테 메일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간혹 들었으나 결국 영영 하지 못하게 됐다. 이런 안타까움을 이런 글이 대신해 줄 수 있다면 잠시나마 위로가 되어 줄 수 있을까? 일단 시작해 본다. 여러가지 관련 기억들이 상이한 시공 속에 무차별적으로 산재해 있으므로 가능한 시간의 순으로 전개하려 한다. 

 

장춘익 선생이 조교수로 학교에 부임했을 때 나는 군대에 있었지만, 이분의 명성이 너무도 자자해서 나는 무척 궁금해 했고 기대도 컸다. 특히 헤겔에 정통해 있다는 소문에 나는 상당히 솔깃했다. 학교에 복학하고 서양근세철학사라는 수업에서 장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수업은 강의식이 아니라 학생들이 텍스트를 분담해서 발표하는 세미나식이었다. 하지만 이 수업이 다소 기대와 달리 실망스럽게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이 수업에서 장선생님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기 보다는 학생들의 역량을 끌어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방식에 실망해서인지 나는 개인적인 면담을 위해 약속도 하지 않고 혼자 불쑥 선생님의 연구실로 찾아간 적이 있다.

 

하지만 거의 5분도 안되서 나는 연구실을 나서야 했는데, 방문의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으면 계속 연구실에 있기 힘들 정도의  긴장감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뭔가로 선생님은 상당히 분주해 있는 상태였고, 다정다감하게 무례한 학생의 개인상담을 받아줄 정도의 여유는 없어 보였다. 장선생님과의 일차 독대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고, 이 수업은 따로 시험없이 레포트 제출로 끝났는데, 레포트 주제는 근대 철학사에 관해 거의 자유로운 방식의 소논문을 써서 내는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레포트로 근대철학사를 나름 정리해볼 생각으로 R.샤하트의 <근대철학사>를 요약 정리해서 제출했다. 그야말로 수험생식의 과제물 작성이었다. 나의 레포트에 관해 레포트 말미에 장 선생님이 연필로 써놓은 한줄의 평가는, '요약하는데 수고로웠을 것이나 요약에만 너무 치우쳐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그 수업에 실망했던 것은 수업방식의 낯설음도 있었지만,  장선생님의 주전공이 서양근세철학사가 아니라 사회철학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다음 연도 학기에  나는 사회철학을 신청했다. 하지만 장선생님은 이 수업을 자신이 맡지 않고 다른 분을 불러 들였다. 양운덕 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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