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나와 가장 맞지 않을 뿐더러 학으로서 인정하고 싶지도 않게 혐오스러웠던 경영학 또는 마케팅 공부를 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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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나와 가장 맞지 않을 뿐더러 학으로서 인정하고 싶지도 않게 혐오스러웠던 경영학 또는 마케팅 공부를 해봐야 겠다.
지난 토요일날 옛날 집에 내버려 두었던 책을 휘경동 집으로 옮겼다. 근 400권이 되는 책인데, 바인더로 묶고 옮기면서 드는 생각은, 언제나 책을 옮길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무겁다는 것이다. 세월에 따라 흘러가버리는 실용적인 책들은 폐기하고 남는 것은 철학, 문학, 과학 류의 책들이다. 많지는 않지만 손대기엔 이젠 겁나는 그런 책들을 옮기며 드는 느낌은 떨어져 나갔던 분신들을 끌어앉는 기분이었다. 마치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말처럼, 잊었던 첫사랑을 다시 찾는 심정이랄까,,
저녁 늦게까지 가져온 책들은 계단에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10권짜리 루트리지 철학사전만 방으로 옮겼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루트리지의 파스칼 항목을 찾아 개요를 읽었다. 한때 얀센이즘에 심취했다가 탈퇴한 파스칼이 말년에 기독교와 화해하기 위해 지은 것이 '빵세'란다. 기독교 신앙을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이성의 차원에서 정당화하는 것이 쉰살의 파스칼에게 던져진 화두였다. 20대부터 과학과 수학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던 파스칼에게 기독교에 대한 접근에도 과학적 발상이 동원되었다. 이른바 확률적으로도 신에 대한 긍정이 부정보다 유력할 뿐만 아니라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근거를 줄기차게 제기하는 것이다. 비록 미완성의 편린으로 남은 작품이긴 하지만,,
한창 사전을 읽고 있는데 닭에게 전화가 왔다. 지방선거 연설회가 있는데 알바를 하자는 것이다. 별로 내키지 않고, 가만히 방에서 쉬고 싶었지만, 그런 유세를 가본 적이 없어 호기심반 집을 나섰다. 닭과 땅, 나, 그리고 백수 하나가 한나랑당의 광역 의원 후보 연설에 동원되었다. 역시 대부분의 청중은 우리처럼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우연찮게 동문 법학과 사람을 보게 됐다. 한 학기 동안 같이 철학 전공수업을 들었는데 같은 토론조에 있던 1년 후배였다. 그는 후보 연설회에 수화로 연단에 나서 있었다. 뻔한고 속보이는 말만 되풀이 하는 한나라당 후보 보다 그의 수화를 보면서 이런 자리에 있는 내가 한심해 보였다. 당연히 아는체 할 수도 없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말없이 손끝 하나 하나 마다 힘을 주어 동작을 하는 그의 수화와 돈으로 동원되어 구호를 외치는 청중들과는 왜 그리도 대조되는지,,썩은 잔치판의 한모금 생수였다.
*지금 고백하자면, 그때 동원되어 돈은 받지 않았다. 당원이었던 친구의 이모가 베풀어준 점심 한끼로 끝났다. 먹은건 먹은거다.
창세기편 중 에사오를 피해 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문 야곱의 이야기에서, 야곱은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7년간 라반에게서 종살이를 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간단히 처리된 7년이라는 수를 놓고 만은 7년이란 수의 막막함과 덧없음을 상술한다. 하루 하루가 지나 7일의 한주가 되고, 한주가 모여 한달이 되고, 계절이 바뀌어 1년이 되듯, 되돌아 보면 7년은 마치 하루의 7일인 한 주 처럼 흘러간다. 여기에 바로 만의 맹점이 있다. 창세기의 짧은 구절에 놓인 시간의 공백을 면밀히 채워 나가는 전형을 만은 탁월하게 보여준다.
조지 오웰의 당에 날리는 일침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어떤 점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납득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공적 사건에 충분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가장 악랄한 현실침해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이 정상적이다. 마치 한 알의 곡식이 소화되지 않고 새 몸뚱이를 거쳐 탈없이 그대로 나오듯.."(『1984년』, 164)
물론 베트남은 자주적이었지만 중국의 도움을 어느 정도 받아야 했다. 프랑스와의 전쟁과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중국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도움을 받되 의존하지 않는 경향은 모범이 될만하다. 적당히 연명하기 위해 국가를 존속시킨 남국 신라, 조선은 조용히 평화적으로 외세의 침탈을 불러온 국가였다. 일본 식민지를 끌어안았다가 드넓은 미국의 품에 안긴 대한민국의 국민이 베트남민을 깔보는 행태를 보이는건 이중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몇몇 대학의 진중권의 강좌 폐쇄에 대한 성토가 벌어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대학의 현주소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대학이 무슨 정부기관인가? 비록 국립대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담합하듯이 한 강사의 강좌를 폐쇄시키는 것은 학문의 자유를 본질로 하는 대학의 정체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상이다. 단지 강좌 폐쇄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 아니라, 마치 정부기관처럼 대학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게 놀랍다. 또 다른 한편으로 대학들은 역시 담합이라도 하듯이 비정규직 강사들을 내쫒고 있다. 하긴 한국 대학들이 내세우는 학문의 자유는 겉포장일 뿐이고, 자율화된 입시를 통해 우수 인재를 뽑겠다는 자유만이 팽배해 있다. 입시훈련으로 식민화된 학생들은 대학에서 재생산의 과정을 거칠 뿐이다.
과거와는 달리 운동의 구심점을 상실한 대학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로도 보인다. 운동의 구심점이 없이 개별화된 학생들은 등록금과 복지에는 집단적 관심을 보일지 몰라도 그 외의 문제는 외면하기 쉽다. 물가상승률에 비해 과도하게 치솟는 등록금은 물론 중요한 문제다. 그렇지만, 진중권과 대학강사의 사태가 보여주는 바처럼, 대학의 자의적인 행정처분이 학생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관철되는 것은, 대학의 관료적 행정이 개별화된 학생들을 더이상 동의를 거쳐야 하는 소통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현상이다.
대학의 고전적 이념을 들고 현사태를 비판하는 것은 너무 고고해 보이기도 하다. 대학도 시장의 한 부문으로서 이제 수익사업을 도모할 수 있는 기관으로 변태하려고 발버둥치는 시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교육도 일종의 교환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여기에 경제성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중세의 면죄부처럼 졸업장이나 관련 인증을 단기에 판매하고 유통시키는 형태로 사업을 전환해 자본의 이동의 촉진시키는 것도 대학의 선진화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