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일섭과 하버마스의 서신 : 『의사소통행위이론2 :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 중 VI장 <제 2 중간고찰 : 체계와 생활세계>
*웹진 http://www.themir.net/ 에 발표됨.
**주텍스트 : 위르겐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 2, 장춘익 역(나남, 2006).
***원문 대조본 : Jürgen Habermas,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band 2 Zur Kritik der funktionalistischen Vernunft (Suhrkamp, 1982).
독서에 관해 (2013.09.18.수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아주 오래전에 읽은 톨스토이의 자서전에서 그는 독서란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접신을 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플라톤과 공자, 칸트와 대화할 수 있을까? 이들은 사라졌지만 이들의 작품은 밑밥에 감싸인 미끼로 우리에게 던져져 있다. 이를 두고 현대의 견유주의 철학자 슬로터다이예크는 문자계몽의 사육방식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많은 책을 섭렵하고 깊은 지식을 얻는 것이 흔히 독서의 목적이겠지만, 우리가 온전히 책을 수용만하는 리더기가 아닌 이상 결국 우린 저자와 싸울 수 밖에 없다. 물론 처음부터 독서는 이런 투쟁은 아니다. 아직까지 우린 어떤 사육, 어떤 배양의 필요성을 감내하는 겸허함이 요구된다. 독서는 삶의 한가지 수단일 뿐이다.’(2009.6.19)
하버마스와의 서신이 이런 독서의 목적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의 예전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세 번째 편지를 시작했다. 이 장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VI.제 2 중간고찰 : 체계와 생활세계
예비고찰
뒤르켐의 분업이론에 의거해서 본 사회통합과 체계통합
1.생활세계의 개념과 이해사회학의 해석학적 이상주의
1)의사소통행위의 지평과 배경으로서의 생활세계
2)의사소통행위이론에 비추어 본 사회현상학적 생활세계 개념
3)형식화용론적 생활세계 개념으로부터 서사적 생활세계 개념을 거쳐 사회학적 생활세계 개념으 로
4)생활세계의 재생산에서 이해지향적 행위가 하는 기능.
생활세계 합리화의 여러 차원
5)생활세계를 사회와 동일시하는 이해사회학의 한계
2.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
1)사회문화적 생활세계로서의 부족사회
2)자기조절체계로서의 부족사회
3)체계분화의 네 가지 메카니즘
4)체계통합 메커니즘이 생활세계에 제도적으로 정착되는 방식
5)생활세계의 합리화 대 생활세계의 기술화.
탈언어화된 의사소통매체를 통한 일상언어매체의 부담 경감
6)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 그리고 물화명제의 재구성
(1)상호이해 형식의 개념
(2)상호이해 형식의 체계적 분류
6장의 예비고찰에서 당신은 비판이론가들의 도구적 이성 비판이 처한 이론적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미드의 행위이론을 길잡이로 삼아, 목적활동에서 의사소통행위로의 전환을 추적하였지만, 여전히 해명되지 않는 문제가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행위이론과 체계이론을 어떻게 서로 연관시키고 통합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이에 대한 예비적 답변을 위해 당신은 베버의 합리성 명제를 맑스주의의 방식으로 수용하여, 이로부터 비롯된 물화의 문제를 다루려고 하며, 여기서 뒤르켐의 분업이론이 적절한 출발점으로 제공된다.[187] 뒤르켐의 분업이론이 이 맥락에서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부탁한다.
노동분업과 아노미(2013년 9월 25일 수 : 하버마스가 구일섭에게)
독서를 통해 계급혁명을 꿈꾸는 것은 낭만적이지만 수용된 지식을 바탕으로 독창적 사유를 전개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당신도 나의 이 책을 제대로 파악해 다른 곳에서 활용할 수 있는 벽돌로 삼아주길 바란다.
뒤르켐이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사회적 노동분업이란 명칭은 스미스에서 맑스, 스펜서에 이르기까지, 체계 분화과정이 사회적 노동의 체계, 곧 직업계층과 사회경제적 계급분화에서 탐구되었던 상황에서 설명된다[187]. 이 노동분업의 차원에서 뒤르켐은 환절적으로 분화된 기계적 연대의 사회와 기능적으로 분화된 유기적 연대의 사회 사이에 유형학적 구별을 도입하는데, 이런 설명에는 다분히 생물학적인 용어가 보인다. 이런 점은 뒤르켐이 스펜서와 마찬가지로 노동분업을 사회문화적 현상이 아닌 물질의 본질적 속성에서 찾아야 하는 일반 생물학의 현상으로 보는 점에서도 드러난다[188-189]. 저 유형학적 구별은 규범과 무관한 사회성을 다루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뒤르켐은 한 사회를 구성하는 생활연관이 원시사회에는 집단의식, 근대사회에는 노동분업이라는 견해를 취한다. 그래서 사회적 연대의 형식 변화는 사회통합에 있어 기본 토대의 변화를 함축한다. ‘원시사회가 규범적 기본 동의를 통해 통합된 반면, 발달된 사회에서 통합은 기능적으로 특수화된 행위영역들의 체계적 연관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189, 강조는 하버마스]
뒤르켐에 따르면 스펜서는 후자의 구상을 극단적으로 추구한다. 스펜서에게 사회적 삶은 시장을 통한 교환관계의 메카니즘을 본질로 한다. 시장을 통한 자기중심적 효용계산에 맞춘 교환관계(기능연관)가 도덕규칙을 통한 행위조정을 대체한다는 점에서 시장은 사회통합의 산출을 위한 자발적 메카니즘이라는 것이다[190]. 그러나 뒤르켐은 스펜서가 제기한 교환관계를 통한 조절작용을 반박한다. 그가 보기에 이해관심이 조절작용을 하기에는 개인간 갈등과 전쟁상태에 제동을 걸지 못하는 등 지속성이 가장 떨어지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도 도덕규칙이 사회통합의 힘으로 발휘되어야 조절작용이 가능하다. 유기적 형식의 사회적 연대 역시 규범을 통해서야 가능한 것은, 집합의식의 구조가 달라졌더라도 이익중심의 행위 조정 장치인 시장이 집합의식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협업에도 독자적인 도덕성이 있다는 것이다[190-192].
하지만 전통적인 연대의 형식을 파괴하는 근대 세계의 시장경체체계가 초래하는 아노미 상태에 대해 뒤르켐은 노동분업에서 자연스럽게 그에 맞는 규범이 나올 것으로 보는 정도에 그친다[192]. 이런 논리는 흡사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업자에게 환경 복원의 규칙을 제정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노동분업에게 보편 규범을 요청하는 뒤르켐의 문제제기로부터 하나의 중요한 관점이 도출된다. 그것은 규범적인 사회통합과 비규범적 체계분화의 구분이다. ‘행위체계의 통합은 전자의 경우 규범적으로 확보된, 혹은 의사소통을 통해 이룩된 합의를 통해서 산출된다. 후자의 경우 그것은 행위자들의 의식을 넘어서 미치는 개별 결정들의 비규범적 조절을 통해서 산출된다.’[193]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나는 사회를 동시에 생활세계와 체계로 파악하자는 제안을 한다. 생활세계의 합리화(사회통합의 형식)와 사회체계의 복잡성 증대(체계분화)의 사이를 분리하고 그 연관성을 가시화하는 사회진화이론에서 이 제안의 적합성이 입증되며, 이는 물화의 문제를 의사소통이론 식으로 끌고 가는 준거가 된다[193-195].
생활세계와 의사소통행위(2013년 9월 26일 목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이런 이론 전략은 어떤 주제에 대한 상대방의 한계를 통해 자신의 논증을 앞세우려는 일종의 반증적 수법 같은데, 이번 서신에서 나는 텍스트에 대한 저공비행을 통해 이해의 바탕을 충실히 한 상태에서 논점을 발굴하고자 하므로, 당신의 논의를 일단 쫓아가고자 한다. 당신의 이번 서신은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당신의 유명한 개념 설정이 어떤 이론적 배경에서 나왔는지 보여준다. 생활세계는 멀리 원시시대부터 있어 왔고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삶의 바탕이다. 하지만 사회합리화의 과정(좁게는 물화의 과정), 특히 근대의 경제체제는 그러한 전통적 생활세계를 압박하는 환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음의 논의에서 당신은 생활세계의 개념을 해명하는 작업을 하면서 다시 의사소통이론적 고찰을 재진입시킨다. 왜냐하면 사회 전체의 구조변동에 제약된 생활세계는 의사소통행위자가 취하는 행위 반경의 지평이기 때문이다[196]. 6장 1절에서 당신은 이해지향적 행위 주체들의 공통적 상황정의를 위한 세 가지 세계에 관해 생활세계의 개념이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 알아보기 위해 현상학적 생활세계 분석과 이해사회학의 통상적 생활세계 개념을 끌어들인다. 결론적으로 당신은 이런 작업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사회를 동시에 체계와 생활세계로 파악하자는 제안을 다시 한다[197]. 그럼 6장 1절의 내용을 살펴 보자.
당신은 의사소통행위의 지평과 배경으로서의 생활세계를 논하면서 한 주체가 관계 맺는 세 가지 세계의 양상으로—서론에서 밝힌 바 있는—진리성에 연관된 객관세계, 규범성에 연관된 사회세계, 진실성에 연관된 주관세계를 들고, 주체의 이해지향적 행위가 이러한 세계관계에 동시에 편입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용 노동자들의 오전 새참 중 고참 노동자의 심부름으로 신참이 맥주를 사오는 일에 관한 사례로 설명을 한다[197-199].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언어적 상호이해의 배경에는 중첩되고 공통된 상황정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200]. 가령, 신참의 경우 오전 중 새참으로 맥주를 마시는 건설현장의 풍속에 생소할 경우, 그는 공통된 상황정의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참에게는 생소한 상황을 소통과정을 통해 재정의할 필요성이 생긴다. 한편, 이 사례에서의 주제는 새참, 목표는 맥주 조달, 계획은 이 목표를 위해 신참을 보내는 일인데, 이 사례에서 보이는 생활세계의 단면은 상황과 주제의 변동(가령 건축주가 마침 맥주 한 박스를 들고 나타나거나, 행정기관의 불법 외국인 단속 요원이 들이닥치면)에 따라 이동한다[201-202]. 만약 이 경우 신참이 불법 외국인 노동자인데 다행히 단속 요원의 검열을 피했다면 이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주제가 등장한 다. 이렇듯 상황지평의 장력 안에 있는 ‘생활세계의 제한된 단면들만이 이해지향적 행위에서 주제화되고 지식의 범주 아래 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당신은 의식철학에 묶인 후설의 생활세계를 문화적으로 ‘전승되고 언어적으로 조직된 해석 유형들을 비축한’ 생활세계로 대체하고자 한다[203-204]. 후설의 현상학적 생활세계 개념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이에 대한 비판을 통해 당신이 성취하고자 논점은 무엇인가?
뒷감당 혹은 대가(2013년 10월 2일 : 하버마스가 구일섭에게)
나의 책에 대한 편지만 오고 가니 지루하다. 요즘 한국의 정치판에서는 막장 드라마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박근혜 정부가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흥미롭게 시청중이다. 국정원이 개입한 부정선거로 귀착된 정권의 정당성 기반의 균열, 위기의 국정원이 궁여지책으로 연출한 공안정국, 정권에 불편한 검찰총수를 찍어낸 정권과 보수 언론의 유착, 위장 복지의 본색 노출. 실속은 없고 의전만 강조하는 세습정권의 정치쇼라는 점에서 북조선과 박근혜 정권은 닮았다.
후설은 인식론적 기본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후설에 따르면 주관성은 생활세계를 가능한 일상경험의 초월론적 틀로 구성하는 적극적 작용을 한다. 슈츠와 루크만은 이런 주관성 모델에 행위이론적 방향전환을 가져온다. 심리학과 사회학에서 사용되는 고독한 행위자의 모델, 다시 말해 어떤 상황에서 자극을 통해 유발되거나 혹은 계획에 따라 행위하는 고독한 행위자의 모델이 생활세계와 행위상황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과 연결되면서 깊이와 날카로움을 더하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다시금 현상학으로부터 배운 바 있는 체계이론과의 접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또 체계이론이 얼마나 발걸음 가볍게 의식철학을 계승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행위 주체의 상황을 인성체계의 환경으로 해석하면, 현상학적 생활세계 분석의 성과는 전혀 무리없이 루만 식의 체계이론으로 흡수될 수 있다. 이것은 심지어 후설이 데카르트 식의 성찰을 하면서 좌절했던 문제를 다루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마저 갖는다. 생활세계의 상호주관성을 단자론적으로 산출하는 문제 말이다. 주체-객체 관계를 체계와 환경 사이의 관계로 대체하면 이 문제는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발상에 따르면 인성체계들은 서로에 대해 환경이 된다. 다른 수준에서 인성체계와 사회체계가 서로에 대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여기서 상호주관성의 문제, 그러니까 상이한 주체들이 어떻게 동일한 생활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가의 물음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상호침투의 문제, 그러니까 특정한 종류의 체계들이 어떻게 서로에 대해 제한적으로 우연적이며, 서로에게 맞추어진 환경이 될 수 있는가의 물음이 등장한다. 문제를 이렇게 달리 파악하면서 치르는 대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것이다[211-212].
하지만 나는, 상호주관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후설의 생활세계 개념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그대로 계승한 슈츠와 루크에게서 현상학이 기술하는 구성된 생활세계가 잘 설명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생활세계 개념을 의사소통행위에 대한 상보 개념으로 도입하는 것이다[212-213]. 그들은 후설을 이어받아 생활세계 개념을 마치 칸트 인식론의 시간과 공간처럼 문제없이 사회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강조하지만[214-217], 세계 개념의 철저한 분화가 이루어지는 근대적 세계 이해에 이르러서, 이렇듯 자명하게 여겨졌던 생활세계 개념은 상황정의와 의사소통행위의 테스트를 거쳐 문화적 지식으로 변모된다. 이렇게 되면 상호이해를 통한 해석성취의 정도에 따라, 과거 생활세계가 가졌던 예단적 강제력은 약화된다. 이에 반해 세계 개념의 분화를 허용하지 않는 과거의 중심화된 세계상은 불협화음을 내는 경험으로부터 면제되는데, 여기서는 문화, 사회, 인성이 총체적으로 통합되어 있어 전통적인 해석 외에 다른 해석이 도입될 수 없기 때문이다[218-219].
한편, 이제 일상으로서의 생활세계 개념이 필요한데, 현상학의 초월론적 생활세계 개념이 상황의 주제화를 못해 이론적으로 사용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개인의 서사화와 같은 일상으로서의 생활세계 개념은 구성원들의 상호이해 뿐만 아니라 개인적, 사회적 정체성 형성에도 기여한다[221-222]. 하지만 이해사회학이 하는 바처럼 문화주의적으로 축소된 생활세계 개념은 생활세계의 구조적 복잡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서사화된 서술은 생활세계 자체의 재생산을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 이론적 서술이 필요해 지는데, 문화 및 사회, 인격에 관한 의사소통적 재생산과정은 생활세계의 물질적 기초의 보존 문제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즉 상징적 재생산과 물질적 재생산이 구분된다[222-226]. 이때 상징적 재생산은 물질적 재생산의 압박을 신성한 것의 권위 뒤에 숨기지 않음으로써 보편적 토의라는 이상화된 생활세계를 투사할 수 있다. ‘합리화된 생활세계는 결코 갈등 없는 형태로 재생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갈등은 그것들의 고유한 이름 아래 등장할 것이며, 더 이상 토의를 통한 검토를 견뎌내지 못하는 신념들에 의해 은폐되지 않을 것이다.’[234]
대화 : 합리화 과정의 장애와 체계 복잡성의 증대(2013년 10월 12일)
구일섭 : 다음으로 당신은 미드와 뒤르켐이 생활세계의 합리화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는 역사적 근거들을 세 가지 관점에서 체계화하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몇 가지 비판 지점을 제시하겠다. 두 번째 관점에서 당신은 형식과 내용의 구별이 문화, 사회, 인성의 분화에 상응하는 점을 보이면서 이중 사회의 차원에서 일반 원칙들이 원시사회와는 달리, 특수맥락으로부터 분리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근대 사회에서 관철되는 법질서와 도덕원칙들은 갈수록 구체적 생활양식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235] 이 서술은 추상적 규범과 구체적 생활양식의 괴리를 보여주는데, 이런 현상이 오히려 아노미를 더욱 촉진시키지 않는가?
하버마스 : 생활세계의 점증하는 합리화가 결코 장애 없는 재생산 과정을 보증하지 못하지만, 아노미가 생활세계의 합리화 자체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은 왜곡이다.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시작하는 반(反)계몽운동은—그 사이 널리 가지를 뻗치게 된—근대성에 대한 비판의 기초를 제공한다. 이것의 공통분모는 의미상실, 아노미, 그리고 소외가, 즉 부르주아 사회의—일반적으로 탈전통적 사회의—병리현상들이 생활세계의 합리화 자체로부터 비롯된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과거지향적 비판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이에 반해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의 비판은 생산관계에서 시작한다. 생활세계의 합리화는 받아들이지만, 합리화된 생활세계의 왜곡은 물질적 재생산의 조건으로부터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생활세계의 상징적 재생산의 장애에 대한 이러한 유물론적 접근은 ”생활세계“ 보다는 좀더 넓은 기본 개념의 토대 위에서 움직이는 이론을 요구한다. 이것은 생활세계를 사회 전체와 동일시하지도 않고 체계의 연관들로 환원하지도 않는 이론전략을 택해야만 한다.”[237-238]
구일섭 : 당신은 세계상의 합리화 과정에서 일어난 폐해로부터 사회적 합리성을 구분하고자 한다. 베버에게는 의미상실, 뒤르켐에게는 아노미로 진단되는 합리화 과정의 장애로부터 합리성을 지켜내려는 것인데, 그 방식이 바로 체계와 생활세계의 구분이며, 이로부터 물질적 재생산에 연관된 체계의 압박이 생활세계를 구속하는 양상에 대한 맑스주의적 비판의 계승이다(이런 방식 때문에 당신의 이론에 네오 맑스주의라는 별칭이 부여된다). 이런 의미에서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개념설정은 당신이 반계몽주의의 잔당으로 지칭하는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들의 합리성 비판을 방어하기 위한 장치로 나는 본다. 생활세계의 합리화엔 아무 잘못이 없으니 돌을 던지려면 체계에 던지라는 전략이 아닌가? 더군다나 모든 현상을 체계와 환경의 이분화로 몰아가는 체계이론을 위한 주도적 비판도 이 책에 마련되어 있다.
하버마스 : 사회화와 사회통합은 체계가 아닌 의사소통행위에 의해 가능하지만, 생활세계로 한정된 사회연구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행위자들의 책임능력만으로 행위상황이 완전히 통제된다는 것은 허구적이다[238-239]. 하지만 의사소통적 합의에는 한계와 오류가능성이 있어도 강제가 있을 수 없다(비판 가능한 타당성 주장에 대한 강요되지 않은 인정). 사회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분화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사회 진화론적으로 유효한 것이다[243]. 갈 길이 멀다. 이제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를 다루는 6장 2절로 넘어가자.
2013년 10월 13일 하버마스 : 독일맥주만 좋은 줄 알았는데, 칭따오 맥주 맛도 좋았다. 양꼬치랑 같이 먹으면 더 좋겠다. 탈언어화된 의사소통매체를 통해 조직들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체계분화의 수준에 이른 근대사회에서 체계 메카니즘은 규범을 넘어 자립화된 목적합리적 경제행위와 행정행위라는 하부체계를 조절하면서, 동시에 생활세계는 사회존립의 하부체계로 남는다.[245] 하지만 체계 메카니즘이 닻(제도화)을 내려야 할 생활세계에서 규범적 태도와 사회적 소속감은 주변화된다. 더군다나 루만에 따르면 생활세계는 행위상황에 연결되지 않은 채 배경만을 이룬다[246]. 향후 서술은 체계 복잡성의 증대와 생활세계 합리화 사이의 연관성을 분석한다. 이 분석의 마지막에 생활세계의 도구화 드러난다. ‘생활세계의 합리화는 체계복잡성의 증가를 가능하게 하는데, 체계복잡성이 과도하게 증가하면서, 고삐 풀린 체계명령은 생활세계를 도구화하고 생활세계의 수용능력을 폭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247] 이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우린 다시 원시 부족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시사회는 세계관에 바탕한 언어와 생활세계의 규범에 따른 상호작용이 사회의 기반구조를 이룬 곳이다.[248] 집합적으로 공유된 동질의 생활세계에 가까운 원시사회는 가족적 사회구조로서의 친족체계와 유사한데, 이 친족 관계의 체계에서 제도적 효과(메타규범적 효과)가 일어난다.[250] 예를 들어 친족관계와 비친족관계의 구별을 위해서 혼인(여성교환)과 분쟁의 통제(친족관계 계산)가 적절히 일어난다. 고려의 왕건이 강성한 토호 귀족들과 사돈 관계를 맺은 것도 비슷한 사례다. 가족관계를 맺음으로써 이질적 집단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그래서 탈렌시 족은 “우리는 우리가 싸우는 사람들과 결혼한다”고 말한다.[251]
“친족체계의 규범은 그것의 구속력을 종교적 토대로부터 끌어낸다. 그래서 부족구성원들은 항상 하나의 제식(祭式)공동체를 이룬다. 부족사회에서 사회적 규범의 효력은 국가의 강제적 제재에 의지하지 않은 채 유지되어야 한다. 사회적 통제는 제식으로 정착된 종교적 정초를 필요로 한다. 친족체계의 중심적 규범을 위반하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여겨지도록 말이다. 외적인 강제적 제재가 없기는 하지만 그대신 신화적 세계관이 대화에 내재하는 부정과 혁신의 잠재력을 최소한 신성한 것의 영역에서는 억제하고 있다.”[252-253]
범주적 구별이 없는 신화적 세계상은 타당성 주장의 비판적 잠재력을 구속시키지만, 부족사회의 구조에는 분화의 여지가 있다. 생활세계의 물질적 기초의 유지를 위한 단순행위의 기능적 분업화와 작업성과의 교환, 권한 위임이 그렇다.(다양한 활동의 합목적적 조정)[253-254] 하지만 이렇듯 부족사회에서 과제에 의해 유발된 분업으로 보이는 것이 체계의 관점에서는 사회 복잡성의 증대로 나타난다.[255] 예를 들어 오늘날 스마트 폰의 등장으로 많은 편의가 생겼지만 스마트 폰으로 업무를 연장해야 한다거나 위치추적이 용이해 진다는 점 등 복잡한 일도 생기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규범의 발달단계와 탈언어적 조절매체의 등장(2013년 10월 15일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가을비가 추위를 쏟아 붓고 있다. 계속해서 당신은 부족사회를 자기조절체계라는 관점에서 다루면서, 앞서 말한 족외혼(여성교환)이라는 규칙의 도입을 통한 소규모 가족결합체의 복잡성 증가가 신분의 수직적 계층화와 권능에 의한 작업의 조직화로 이어지며, 여성교환이 상징적 재물교환으로 대체되고[255-257], 강력한 국가적 기구의 조직화가 초래한 복잡성의 전개 이후[268-269], 시장경제와 행정의 하부체계들이 마련되는 근대사회에서 본격적인 조절매체가 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262]. 자본주의라는 체계 분화의 수준에서 등장하는 탈규범화된 조절매체, 즉 화폐가 교환매체의 역할을 하면서 임금노동의 제도화와 조세국가의 제도화로 드러나는 ‘화폐의 구조형성적 효과’가 국가기구의 경제 의존성(화폐에 동화되는 권력)으로 나타난다고 결론짓는다[271]. 여기까지가 사회적 진화를 체계 복잡성의 증가라는 관점에서 다룬 것이라면, 다음 논의로 당신은 체계 분화가 제도화되는 것을 내부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해 생활 세계 내부로 진입한다[272]. 왜냐하면 체계 분화의 메카니즘은 생활세계에서 제도화되기 때문인데(체계 통합 메카니즘), 이 제도화(사회통합)의 형식을 연구하기에 최적의 대상이 바로 도덕과 법이다.
“도덕과 법은 표면화된 갈등들을 완화시켜 이해지향적 행위의 기초가 붕괴되지 않게, 그리하여 생활세계의 사회통합이 붕괴하지 않게 하는 과제에 전문화되어 있다. 도덕과 법은 규범에 따라 조절되는 일상의 의사소통 영역에서 상호이해의 메카니즘이 말을 듣지 않을 때, 그러니까 통상의 경우 기대되는 행위조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폭력적 대결이라는 대안이 목전에 놓이게 될 때,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차상 수준의 합의를 확보해 준다.”[274]
그래서 당신은 도덕과 법이라는 ‘이차 행위 규범’의 바로미터를 가지고 다시 고대세계로 거슬러 올라가 규범의 발달단계를 논하며 도덕과 법의 분리과정이 생활세계의 구조적 분화 과정의 일부임을 말한다[274-275]. 법이 법 자체로서 자립화하는 것을 당신은 시대사적으로 대비되는 처벌 수용에서 보여주는데, 부족사회에서 처벌은 속죄와 보상의 의미인 반면 국가로 조직된 사회에서 처벌은 침해된 규범의 치유라는 것이다[278-279]. 이것은 개인 간의 권리 침해와 보상이라는 민법의 차원으로부터 범죄 구성 요건에 따라 처벌을 규정하는 형법의 분리를 의미하고, 전자의 경우 화폐라는 탈언어화된 매체에 의한 근대적 행위조정의 상황에서, 과거 규범에 의존했던 상호작용이 사법 주체들 사이의 성공지향적 거래로 바뀌고(목적합리적으로 투입되는 법의 조직 수단화), 후자의 경우 정치적 지배의 결정화를 이루는 법 질서의 정당성을 동반한다[279-280].
근대사회를 특징짓는 법과 도덕의 양상은 가치일반화와 가치 추상화에 의한 행위 규정이다. 위계화된 부족사회에서는 상호작용의 동기가 되는 것이 신망과 영향력과 같은 전통적인 권위에 예속된 구체적 가치관인 반면, 이 권위가 국가의 법적 권위로 교체되고, 규범의 보다 높은 수준의 가치 일반화를 통해 칸트적 의미의 법치 사회가 등장한다고 당신은 본다. 도덕과 합법성의 분리를 통해 사적인 행위에는 ‘일반적 원칙의 자율적 적용이, 직업영역에서는 실정법에 대한 복종이 요구’되며, 최종적으로 ‘추상적 법에 대한 복종이 행위자가 충족시켜야 할 유일한 규범적 조건이 되는 단계’로까지 가치 일반화가 진행된다는 것이다[282-283]. 파슨스로부터 넘겨 받은 ‘가치일반화’의 개념을 당신은 탈언어화된 의사소통매체를 통한 일상언어매체의 부담 경감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것인데, 특수한 가치관에 예속된 언어적 행위조정이 탈언어적 부담 경감 메카니즘에 의해 대체되어, 증가하는 행위조정이 규범 외적으로 조정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신망과 영향력은 의사소통과 연관된 고전적 매체형식이다.[284] 이렇듯 조절매체를 통해 분화된 사회의 하부체계들은 자립화됨으로써 의사소통의 비용 절감과 결정의 조건화, 생활세계의 기술화를 가져오지만[287-288], 탈언어화된 의사소통매체(화폐와 권력)는 상호작용의 망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여기에 비판 가능한 타장성 주장을 위한 책임능력을 지닌 참여자는 필요없게 된다.[289] 왜냐하면 이러한 상호작용의 망에서는 언어적 합의형성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까다로운 자격 심사 없이 신청 후 4분 내로 입금을 해주겠다는 지하철의 흔한 대출광고는 이에 대한 극단적인 사례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를 맑스의 토대와 상부구조의 분리에 대한 변주로 삼는 한편, 맑스주의를 물질적 재생산이라는 체계 유지의 관점에서 계승한 체계 기능주의에는 베버가 제기한 분석수단이 결여되었다고 비판하는데, 그 수단이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척도이다[290-291]. 이것이 결여된다면 사회합리화의 과정을 서술하는 당신의 중요한 명제인 생활세계의 식민화(합리화된 생활세계에 침투하는 체계 메카니즘)라는 개념 구도가 깨지기 때문이다. 고도 문화의 사회로부터 생활세계에 내재되어 있는 타당성 주장의 분화(의사소통적 상호이해의 잠재력)는 당신에게 고도 문화의 사회에서는 신화적 세계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깨는 잠재성으로 남아 있으며, 근대사회에서 이것의 제한없는 분화가 정당성, 진리성, 진실성의 영역 분화를 낳고 종국에는 규범적 맥락에서 벗어난 체계의 목적활동으로부터 유린당하는 설정으로 되어 있음에도 말이다. 당신의 개념 설정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정리하려는 욕구는 다음의 문장에서도 역력하다.
“타당성 주장들의 덩어리가 의사소통행위의 수준에서 해체된다. 참여자들은 이해지향적 태도와 성공지향적 태도 일반만이 아니라 화용론적 태도들 각각을 구별한다. 관습적 법제도를 갖췄으며 국가로 조직된 공동체는 법에 대한 복종에, 즉 정당한 질서에 대한 규범준수적 태도에 의지해야 한다. 국민들은 일상행위에서도 이러한 태도를 외적 자연에 대한 객관화하는 태도와 자신들의 고유한 내적 자연에 대한 표출적 태도로부터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304]
이렇게 분화된 의사소통적 상호이해 형식은 너무나도 투명해서 체계 명령의 침투는 너무도 분명히 드러난다고 당신은 단정한다.
“도식적으로 제시된 경향들이 근대사회가 전개됨에 따라 실제로 관철되면, 사회통합의 형식 자체에까지 개입하는 체계명령의 구조적 강압은 더 이상 신성한 행위영역과 세속적 행위영역 사이의 합리성 격차 뒤에 숨을 수 없다. 근대적 상호이해 형식은 의사소통에 대한 은밀한 제한을 통해 구조적 강압에 어떤 은신처를 허용하기에는 너무 투명하다.”[307]
어떻게 보면 고삐풀린 체계의 억압을 당신은 비판적 이성의 잠재력으로부터 면역된 신화적 세계상의 위상과 유사한 지점에 배치시킨다. 왜냐하면 이성의 비판적 잠재력이 이 둘로부터 모두 억제를 당하기 때문이다.
체계에 의해 유발된 생활세계의 병리현상을 새롭게 정식화하기 위해 다음 장은 파슨스의 저작이 다뤄진다.
번역에 관한 몇 가지 첨언
*나의 서투른 독일어 실력에 아주 좋은 학습효과를 주는 번역임에 틀림 없지만, 일단 참고삼아 이런 자리에서 의견을 남겨두는 것이 비록 사소할지라도 유익하다고 판단된다. 단, 내가 참조한 원문의 출판연도와 다른 역서의 원저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249쪽 : 맨 아래줄 “ 집합적으로 공유된 동질적 생활세계는...”에서 Entwurf 가 번역 되지 않은 채 누락.
268쪽 : 중간 하단 “점점 첨예하게 드러나는 고급문화와 민중문화 사이의 양분화 경향...”에서 Volk는 대중으로 번역하는 것이 문장의 의미와 요즘 어감에 더 적절하다고 생각.
273쪽 : 첫줄 “...필요로 하는 전체 질서의 형태...”에서 ‘전체 질서’를 수식하는 politischen 생략됨.
279쪽 : 중간 “이 단계의 도덕의식에서..”에서 Urteils이 의식으로 번역됨. 행위주체의 의도에서 행위결과를 평가하는 것이므로 도덕판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좀더 감각적이라고 봄.
300쪽 : 첫 번째 새 문단에서 Praxis가 누락된 채 “단계를 정하고자 한다”로 번역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