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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 Beschreibung'에 해당되는 글 30건

  1. 2009.01.30 러시아혁명의 근간 : 농민
  2. 2008.10.25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3. 2008.09.25 9월의 강원도
  4. 2008.02.20 고종의 밀서 : 순진한 바램
  5. 2007.05.09 소격서 논란에서 드러난 힘의 충돌

러시아혁명의 근간 : 농민

서술 Beschreibung 2009. 1. 30. 10:5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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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그나드 데사이는 러시아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지반을 농민층의 지지에 돌린다. 혁명의 성격도 명분상 프로레타리아 혁명이지만 실질은 농민혁명이다. 볼세비키가 노동자에 비해 압도적 다수였던 농민층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권력을 계속 장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볼세비키가 우발적으로 권력을 장악해 이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중앙집권적 독재 권력을 결코 놓지 않은 점도 성공의 요인이지만, 지속적으로 농민을 배려하지 않았다면 패배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왜 농민층이 중요했는가? 이들이 식량을 도시에 원활히 공급해 주지 않았다면 내전기간은 물론이고 평시에도 볼세비키가 계속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집산화 정책으로 농민은 무력화됐지만,  미화됐던 러시아 혁명의 이면을 보여주는 서술이다. 1차 대전기에 독일의 전시 사회주의 실험에 레닌이 경도되어 이를 러시아에 그대로 이식시키려고 하면서도, 자본주의의 효율성을 소비에트 체제에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북유럽에 비해 후진적인 러시아의 경제체제를 정치적으로 개혁시키려고 레닌이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다.

참조 :  <마르크스의 복수 : 자본주의의 부활과 국가사회주의의 죽음>, 7~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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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서술 Beschreibung 2008. 10. 25. 20:3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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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와 모방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비극이란 위대한 인물의 행위와 삶,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 형식이고, 희극은 우스꽝스러운 인물의 행위를 모방한 형식이다(우스꽝스럽다는 것은 혐오와 재미를 유발하지만 고통은 주지 않는 것이다). 그의 시학은 의도와는 달리 비극만 다루고 있는데, 비극의 구성요소는 그 중요성에 따라 플롯, 성격, 사상, 조사, 노래, 장경(spectacle)으로 이루어진다. 플롯은 사건의 결합으로서 이야기의 구조, 밑바탕을 말하는데 사건의 급격한 전환과 새로운 국면의 대두가 플롯의 매혹적인 부분이다. 성격은 인물의 성질로서 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내적 규정이다. 재미있는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상을 성격 다음으로 배치한 점이다. 사상이란 상황에 따라 내놓을 수 있는 말로써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 조사는 이런 사상을 매끄럽게 표현하기 위한 수사적 기교이며 장경은 무대장치를 의미하나, 고대 그리스에서 무대장치란 배우의 분장과 의상, 가면 등 소품에 한정된다. 

시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비극이라는 드라마에 대한 얘기로 흐르는지 의아할 수 있으나, 고대 그리스에서 시인이란 단지 글만을 짓는 작가가 아니라 현대적으로 말하면 작가주의적 무대 연출가에 해당한다. 공연시간에도 당시와 현대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극의 경우는 하루 단위(12시간~24시간)의 크기를 갖는다(주1). 영화처럼 두세 시간에 내에 이야기를 압축,집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TV의 연속극처럼 장기간의 크기(megethos)를 갖는다. 밤새 지속되는 공연을 1년에 한두차례 보면서 삶의 애환을 정화시키는 방식은 거칠게 보면 몇주에 걸쳐 드라마를 토막내서 시청하는 현대의 시청자와 별반 다름이 없겠지만, 방식과 효과의 면에서는 물론 상이할 것이다. 인터넷의 발전은 TV 드라마 보기를 장시간의 크기로 연속적으로 시청할 수 있게 한 점에서 고대와 같이 연속적 관람에 가까워 졌지만 무대에서 이렇게 공연을 하는 경우는 바이로이트 축제처럼 매우 한정될 것이다. 일상의 삶을 제쳐놓고 하루종일 동일한 공연을 본다는 것은 현대인의 생활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시학에서 눈여겨 볼 것은 모방에 대한 관점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플라톤은 <국가> 10장에서 시인이나 화가를 이데아를 본뜬 제작물의 모방자라 보면서, 이런 모방 행위를 진실과는 세 단계 멀어진 수상한 기교로 처리한다. 바로 이런 모방에 대한 관점에서도 고대 그리스 철학의 두 산맥은 현격히 갈라진다.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에서 장년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끝을 지상으로, 노년의 플라톤은 손끝을 하늘로 향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두 철학자의 지향점을 대비시킨다. 수많은 개별성으로 손을 뻗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학은 좋은 본보기이다. 그가 무질서해 보이는 세계를 파고 들어가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플라톤은 피조물에 대한 단 하나의 이데아, 원본을 설정하고 이 원본의 피조물인 세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자연(physis)에 대한 문제 보다는 논리(logos)와 규범(nomos)의 문제에 천착한 플라톤으로서는 피조물의 세계는 불완전한 소멸의 대상이며, 불완전한 피조물의 세계를 모방한 예술은 하찮은 양식이다.

이렇듯 플라톤에 의해 추궁되어 추방될 예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건져 냈다. 앞서 말한 바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단지 운문으로서의 시가 아니라 비극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종합예술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보다 한결 세련된 논의를 비로서 펼친 것이다.

모방과 유희

계속해서 시학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비교해 보자. 시인은 모방자라고 본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입장을 수용한다.  그런데 시인이 행하는 모방은 과연 특정한 행위를 그대로 모사한 것일까? 플라톤은 모방을 그 개별적인 원리는 물론 사용방법도 모른 채 겉만 그럴듯하게 묘사하는 장식으로 본다(601b, 601d). 따라서 모방은 진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모방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유희'에 불과하다(602b). 플라톤 자신이 쓰고 있는 이 '유희'(form of play)라는 말에는 모방을 장차 그와는 전혀 다르게 이해하게 만든 단초가 숨어 있다. 도대체가 회화는 정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며, 사진은 피사체의 영혼까지 담는 것인가? 사람들은 고흐의 그림을 보고 실물을 묘사했다고 말하기 보다는 가상의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할 것이다.  모방은 플라톤이 은연중에 감지하고 있듯이 인간의 행위나 사물의 외관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플라톤은 동일성의 철학에 따라 모방을 가짜인 모사품, 진리가 없이는 있을 수 없을 뿐더러 진리보다 세 단계 떨어진 기술로 처리하지만, 여기서는 아퀴나스의 유출설처럼 진리에 세가지로 농도 차이가 나는 단계가 보인다.  이런 농도의 차이는 진리라는 동일성이 낳은 산물이다. 즉 복제품은 원본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지만 원본을 원본이게끔 하는 질적 충만감에서는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토마스 만의 단편 <베니스에서 죽음>을 영화화한 루치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 죽음>을 보고, 이 영화가 원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모사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과연 이 단편에 종속된 재현에 불과할 따름인가? 원작을 바탕으로 한 대부분의 영화가 원작에 못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장르가 다른 예술형식 사이의 소통을 두고 진위 논란을 부치는 것은 감정가를 매기기 위해 진위를 따지는 진품명품식의 고루한 발상이다. 이것은 시를 모방으로만 보는 관점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 귀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의 진정한 기능은 단지 원본의 형상과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는 모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시는 은유로 넘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재빨리 간파할 수 있는 천재의 표징"으로 본다(1459a5). 여기서는 은유가 다만 비극을 탁월하게 만드는 수단으로서 잔기술에 해당하는 시어체와 복합어, 방언의 적절한 사용과 비교하여 우월하다고 평가되고, <시학>의 다른 부분에서 은유에 대한 별다른 의미부여는 없지만, 진리를 동일성의 일관성으로 파악하려는 이성중심의 전통 철학에 대해 진리를 은유의 양식으로 해소시키려는 감성중심의 해체 철학의 도발적 교전이 조심스럽게 <시학>에서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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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비극과 서사시의 길이에 관해 청수(lastmarx)님과 짧은 대화가 있었다.

청수 : 서사시의 배경이 몇 주 혹은 몇 년에 걸친 이야기라는 것이지 공연이 며칠간 진행된다는 건 이상하군요. 서사시를 공연했다는 것도 그렇고요. 판소리처럼 몇시간 동안 암송하지 않았을까요.   
  
갈대아 :   글쎄요, 저는 사건의 경과시간을 공연시간으로 이해했습니다. 48페이지 주14번을 보면 "그리스 극은 보통 동틀 녘에 시작하며 또 실제로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모든 작품에서 드라마 내의 사건을 위하여 12시간이며 충분하다'는 역자의 설명을 볼 때 공연시간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 좀더 알아봐야 겠군요. 그리고 이 글은 좀더 쓴 후에 카페에 올릴 예정입니다.   
 
청수 : 비극의 경우 하루에 마친다는 거죠. 서사시가 며칠 동안 공연한다는 이야기는 없지 않나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의 경우 사건의 경과 기간이 무려 16년이나 되지요.   
 
갈대아 : 역자 천병희는 길이의 문제에 관해 3가지 해석을 제기하는데, 두번째 해석이 바로 길이를 비극의 공연 또는 서사시 낭송에 필요한 시간이라고 합니다(47페이지 주 13참조). 또한 법정 변론에는 시간제한이 있으나 드라마 공연에는 시간제한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58페이지 주 4번) 길이에 대한 두번째 해석을 따른다면 장기간의 공연 시간이 있었던 셈이죠. 47-48페이지 본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서술합니다. "비극은 가능한 한 태양이 일 회전하는 동안이나 이를 과히 초과하지 않는 시간 안에 사건의 결말을 지으려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서사시는 시간적으로 제한이 없다. 이것이 양자의 차이점이다." 이 점에서 서사시가 며칠간 지속될 수 있다고 유추를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학자들의 견해는 길이를 공연 시간이 아닌 사건의 경과시간으로 본다고 하는군요. 47페이지 주석 13번을 보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는 모두 사건의 경과 기간이 수주일 이상씩이다" 라고 되있는데, 수주일 이상에는 16년도 포함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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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강원도

서술 Beschreibung 2008. 9. 25. 12:1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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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에 일주일 가량 있는 동안 한가한 시간에는 보름 정도 묵은 신문들을 쭉 흝어 봤다. 주소가 적힌 휘장에 싸여 조선시대 편지봉투만한 크기로 접혀진 강원도민일보는 매일 우편으로 배달되는데, 신문을 보다 보니 여러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원래 강릉에 속해 있던 동해는 1981년에야 독립해서 별도의 시로 승격됐다. 따라서 동해시 보다 유서깊은 곳은 묵호이다. 현재는 지역항이지만 원래는 외항선원들이 들락거렸다는 묵호항은 한창 탄광이 대량으로 채굴되던 시절에는 풍부한 어획량으로 부유한 동네였다. 지금은 영동의 다른 항구들과 마찬가지로 줄어든 어획량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인구나 경제규모에서 동해는 원주, 춘천, 강릉에 못미치는 동네인데, 현재 삼척에 LNG 저장소 설치와 LS전선 공장을 유치해서 지역경제를 살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재미있는 신규사업 하나가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대마사업이다. 백봉령으로 가는 곳에 위치한 동해시 삼화동은 예로부터 대마가 생산되던 곳인데, 대마의 마약성분으로 인해 그 생산은 엄격히 규제되어 있다. 그런데 대마는 단지 마약성분으로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의복, 약품, 항공소재 등 그 활용이 무궁무진해서 뿌리에서부터 줄기, 꽃까지 버릴게 없다고 한다. 지자체와 민간 사업자가 협력해 지역의 신규핵심사업으로 부상시키려고 하는데, 워낙 먹고 살게 부진하다 보니 이런 곳으로도 머리를 쓰나 보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마가 그렇게 널리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대마의 마약성으로 인해 애써 무시되어온 점도 있다. 동해시의 인구유입이 젊은 층보다는 노년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점에서 볼 때, 관광자원과 결합된 실버사업이 이 해안도시의 새로운 동력일 것이다.    

 호사가들이 정치현안보다는 정치인의 행보에 관심을 보이듯, 지방선거가 2년이나 남았는데도 이 신문은 차기 도지사 후보를 물망하는 기사를 명절 전에 실었다(현 도지사는 2선인데 3선은 제한되어있다). 지역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한 도민출신에게 큰 기대를  품는 것은 강원도만의 실정은 아닐 것이다. 태백시는 취약한 지역에 농어촌 특별전형의 기회를 부여하는 지위를 상실당하자 들고 일어섰다. 여전히 태백시는 동등한 입시 경쟁을 하기엔 역부족이라는 호소다. 춘천과 원주, 강릉의 일부 명문고를 제외한 지역의 학교들이 초토화되는 비평준화의 고장에서 서울을 바라보며 떡고물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절규는 한편으로는 비참하면서도 지역의 현실론으로 자리를 잡았다. 논란 속에 원주에서 강릉간 신규철로개설이 당정에서 수용되었지만, 막대한 비용이 초래되는 이 사업의 미래가 밝지는 않다. 철로가 개설된다면 기존에 비해 40분이 단축된다고 하는데, 이런 정도의 효율로 사업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지이고, 건설재원 확보도 순탄치는 않다고 한다. 이런 우울한 기사를 제치고 눈에 띄는 한 독자의 시가 있었다. 강릉의 한 목사가 올린 시인데, 필력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광경을 메밀꽃 축제에서 예를 들었다. 변변한 볼거리 없는 시골동네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오게 한 것은 이효석의 필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력 하나로만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가. 메밀꽃 축제를 기획한 사람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필력은 책장 속에만 숨쉴 뿐이다. 그런데 평창 출신인 이효석도 서울로 유학와서 작품활동을 해 동네를 일으킨 셈이다. 혼자 클 수 없는 강원도의 힘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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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밀서 : 순진한 바램

서술 Beschreibung 2008. 2. 20. 11:3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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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을 알리는 고종의 밀서가 발견됐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무력한 괴뢰 군주가 신에게 갈구하는 듯한 호소는 결국 다른 제국주의 국가가 조선을 점령해 달라는 애원으로 들린다. 참으로 부끄럽고 참혹한 문서다. 끝까지 조선을 지키려는 외교적 노력으로 봐야 한다는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싶겠지만, 어설프게 굴다가 무장해제를 당해 포로가 된 병사가 비밀리에 보냈다가 아무런 응답없이 후일 남겨진 지원요청서와 무엇이 다른가. 누가 다른 나라의 지배를 즐거워하며 받아들이는가.  파탄난 왕조를 끌어안고 싶어하는 한 개인의 궁핍하고 순진한 내면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을사녹약(1905) 원천무효 주장 전문 참고 :“ 짐(본인)은 대덕국(독일)의 호의와 지원을 항상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짐에게 파국이 닥쳐왔습니다. 이웃 강대국(일본)의 공격과 강압성이 날로 심해져 마침내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독립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짐은 폐하(빌헬름 2세)에게 고통을 호소하고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약자의 보호자로서 본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폐하의 우의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짐과 조선의 신민은 귀하의 성의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을 하늘에 두고 맹세합니다. 광무 10년(1906년) 1월 경운궁에서. 폐하의 좋은 형제.”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 보관소>
 
고종의 이런 바램은 결국 40년 후 미소 양대 강국의 전략적 절충의 일환으로서 실현될 수 있었다. 이것이 한반도의 또다른 불운의 계기가 될 줄은 이 뒤떨어진 왕조 일가는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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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3년, 이미 그 전에 성리학에 기반한 실행으로 조정에서 인정받아 단계를 뛰어넘어 승진을 하던 조광조는 태조 때 부터 내려오던 미신적 제의, 즉 왕실에서 초제나 기우제 등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관청인 소격서를 혁파할 것을 주장한다. 이런 제의는 도교적 이단으로서 성리학의 이념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조광조에게도 중종에게도 이 소격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이 문제는 중종과 조광조 간의 힘의 대결로 귀결되고 만다. 소격서 혁파 주장은 조선 초기부터 줄곧 제기된 주장이라 새로울 게 없는 일이지만 조광조는 이 소격서 폐지여부가 앞으로 자신이 행사할 정치적 영향력을 어떠한 타협이나 절충도 없이 관철하기 위한 포석으로 여겨 끈질지게 밀어 붙인다. 결국 조광조를 따르던 대간들이 사직을 불사하며 왕에게 압박을 가하고, 삼정승도 이들에 동조함에 따라 중종은 소격서를 폐지할 수 밖에 없었지만, 1년 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실각되고나자 중종은 소격소를 다시 부활시킨다.

중종은 조광조를 등용함으로써,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자신에게 부담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는 반정공신들을 제어할 수 있었지만, 소격서 논쟁으로 왕의 권위를 궁지에 몰아 세우며 밀어붙이는 조광조를 결코 곱게 볼 수는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소격서 따위는 별 문제거리가 아니며, 당시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이를 문제삼는 것은 꼰꼰한 유생의 불필요한 집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정략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발판이라면, 결코 경시할 수 없다. 사실 조광조가 성리학적 이념에 부합한 정치를 구현한다는 것도 공자에 의해 윤색된 먼 상고시대의 통치를 이상화해 신하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즉 소격서 논란에서 조광조의 내면을 압박한 것은 원리주의적 유생의 양심이라기 보다는 왕의 권위에 일격을 가하려는 모험주의적 정략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고속승진을 하다가 36살의 나이에 사약을 받은 젊은 정암은 정치가로서는 실패했지만 그 실패 때문에 조선 성리학의 계보(정몽주-길재-김굉필-조광조)를 잊는 성현으로 추대되어, 남명과 같은 사림들의 숭배를 받게 된 것이다. 즉 정치가로서의 그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로서의 그를 기리는 것이다.    

참고문헌 : 정두희, '조광조'(아카넷, 2000)

2007/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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