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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아버지 격인 '플라톤'과 발음이 비슷한 이 영화는 세 번 정도는 봤을 거다. 십대에 처음 봤을 거고, 군대에서도 한번 보고, 공중파에서도 한번 본듯 하다. 4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현충일날 EBS에서 본 이 영화는 또 색다른 면이 있다. 기존에 주의깊게 보지 않았던 장면을 좀더 세밀하게 봤다고 할까. 정작 네이팜이 터지는 마지막의 대공세 장면을 보면서는 졸았다. 

여전히 인상적이면서도 예전에 비해 진한 감동-반복적인 감정인지도 모르나-을 주는 장면은 소대가 숲속에서 베트콩에게 당하고 인근 마을을 수색하러 들어가 벌어진 사건을 다룬 부분이다. 노근리 사건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을 살육하는 '신대륙 개척' 백인의 폭력과 오만이 재연된다. 침략군의 일원인 반즈 분대장이 사건을 일으키고 역시 침략군의 일원인 일리어스 분대장이 사건을 수습하는 것이, 백인이 베트남 촌락의 주민에게 병주고 약주는 설정으로도 보이지만, 책임자인 소대장이 묵과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사태를 거칠게 중단시키는 일리어스의 행동은 테일러에게도 전염된다. 어린 소녀들을 끌고가 강간하려는 동료 병사들을 제지한 것이다. 

살아 가면서 이건 아니다 싶은데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신중함과 비굴함의 사이에서 결단을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판단력보다는 행동력이 습성화되어야 한다. 뒤늦게 4대강과 세종시 수정을 외치는 한나라 초선의 행태는 적절한 판단과 행동의 시점을  놓친 뒷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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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 타고 집에 온 날

여행 Reise 2010. 6. 5. 22:1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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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의 가족 동반 담합대회가 있어 가족과 함께 양화지구 강변 유원지에 전철을 타고 갔다가 올 때는 원효대교까지 걸어가 유람선을 탔다. 생각보다 운치가 있었다. 여의도에서 잠실까지 1시간이나 걸리는 뱃길이지만 길다는 느낌이 안들었다. 잠실대교의 수중보만 없었다면 남양주까지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오세훈의 한강 르네상스는 쌍스럽지만 이 정도의 뱃길은 과히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 강 양안으로 밀리는 차량 정체를 무색케 하며  유유히 흘러가는 유람선은 대체 교통 수단처럼도 보인다. 테오 앙겔플로스의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 중 한 장면이 떠올랐다. 레닌의 거대한 석상을 실은 배가 강을 질주해 가고 강 저편의 사람들이 배웅을 하는 장면. 그러고 보면 전통적으로 강은 참으로 여러모로 인간에게 편의를 안겨주는 자연물이다. 흐르는 강물은 잠시 이용할 수는 있되 강줄기를 비틀고 찢고 파헤치는 짓거리는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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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 뒤로 어제는 마치 가을같이 청명한 날씨였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현재의 긴박한 남북관계에 대해 “북한은 무력충돌로 잃을 것이 별로 없지만, 우리는 총 한 방만 쏴도 신용등급 하락과 (외국인) 투자 철수 등의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는 구조"(한겨레)라고 했는데, 이런 신중한 경고를 보수언론과 집권세력은 어떻게 뛰어 넘을까. 아마도 조갑제처럼 더 강한 애국을 부르짖지 않을까.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날부터 매일 저녁 서울 명동과 청계광장 일대에서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촛불집회를 열기로 했으며, 29일 오후 3시에는 청계광장에서 ‘천안함 사건 진상 규명과 한반도 평화 실현을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한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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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주의 비판

헤겔 Hegel 2010. 5. 24. 13:3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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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식의 새로운 형태를 규정하는 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유하는' 의식 일반이며, 그의 대상이 내면적인 본체와 외형을 띠고 있는 주체와의 직접적인 통일체라는 데 있다. 동일한 의식이 스스로 자기에게 반발한다는 것이 본원적으로 사유 그 자체의 요소를 이루고 있지만, 이 요소는 우선 애초에는 보편적인 세계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을 뿐 아직 다양한 존재가 운동을 전개하는 대상 세계로서 존재하고 있지는 않다...복잡다단한 삶의 한복판에서는 개별 행동에 따르는 온갖 분규도 발생한다는 것이 욕망이나 노동으로 인해 빚어지는 대상적인 국면이다. 그런데 이렇게 벌어지는 다양한 행위가 마침내 사유의 순수한 운동 속에 드러나는 단순한 구별로 집약된다. 이제는 더 이상 특정한 사물, 특정한 생활에 매여 있는 의식,감정,욕망 등으로 나타나는 온갖 구별 ㅣ 이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구별, 또는 목적을 자기의 의식이 정립하였는가 아니면 타자의 의식이 정립하였는가라는 식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내 의식 자체에서 그때마다 솟구쳐나오는 사유 속에서의 구별만이 의미있는 것이 된다...그 어떤 자질구레한 일상적 조건에도 구속되지 않고 세상사에 휘말려서 음양으로 닥쳐오는 여하한 작용에도 꿈쩍하지 않은 채 단순한 사상의 세계 속에 칩거해 있는 것이 스토아주의이다. 아집이라는 것도 이것이 제 마음에 드는 사소한 일에 매여서 예속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에서 일종의 자유이기도 하다."

『정신현상학』, 4장 자기확신의 진리 2절 자기의식의 자유 : 스토아주의, 회의주의, 불행한 의식 중 23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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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 나올줄 알았다. 60년 이상 휴전 중이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생산된 총알의 사용 시점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군수업자들의 눈들이 다시 한반도에 집중하는가? 전쟁책동을 서슴치 않는 이런 언론이 한국의 이른바 주류다.   

"오산·수원의 지휘관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육·해·공 합동으로 3일 내에 북한 장사정포의 최소 70%를 파괴하는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만약 북한이 도발해도 국민이 3일 만 참아주면 북한의 핵심 목표를 폭격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말했다...최종적으로는 국가가 ‘제한적 무력응징’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압박으로도 북한에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하더라도 국가가 무력응징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게 되어야 한다. 행여 사회 일각에 스며들어 있는 패배주의 때문에 못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전쟁을 결심할 수 있어야 전쟁을 피할 수 있다."[2010.05.23,20:02분 중앙일보 사설칼럼, 작성자 : 김진]

군비상승의 억제력으로 전쟁을 막는다는 논리를 넘어서 군사위협으로 북한을 궁지에 몰겠다는 논리다. 원인규명이 석연치 않은 천안함 사건을 놓고 내일 있을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전에 군사적 응징을 주문하는 이런 주장은 단지 지방선거만을 겨냥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단지 선거 때문에 수도권 1,000만 명의 목숨을 생사의 기로에 내놓을 수 있는가? 행여나 미국의 물리력을 믿고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리고 국민들이 '잘 참아준다'고 해도 쉽게 끝날 수 있을까? 두 세계 강국 앞에 전장을 제공하는 역할 외에 한반도의 실익은 무엇이겠는가?  한반도가 무슨 워털루 정도의 들판인가? 인민이 방향없는 총탄에 갈가리 찢어 죽더라도, 전쟁을 외치는 자들은 전쟁의 참화 밖에서 괴뢰정권의 창출만 모색하는 비탄의 역사를 또 반복하겠다는 건가? 또다시 한반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전쟁책동을 중단하라!    

전문 참조 : http://news.joins.com/article/806/4190806.html?ctg=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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