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다니던 도봉구 지역에 이런 군사시설이 있었다는 것을 지난 주말에야 알게 됐다. 이름도 무슨 정원을 연상시켜서 이곳에 군사시설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의정부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은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에 있는 드넓은 평지를 관통해야 하는데 한국전쟁 후 여기에 대전차 방호 진지를 군인아파트로 위장해 직렬로 건설했었던 것이고, 지하의 벙커와 차단물은 남겨 둔채 아파트는 철거되고 공원으로 탈바꿈되었다. 왕조나 전쟁의 잔해가 공유지가 되어 시민의 품으로 넘어오는 것을 보면, 이것도 역사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이런 것도 민영화시키자고 할테지만 말이다.
어제 밤 제 2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양평 방향을 향해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북여주IC에서 빠져 나와야 할 것을 그 전의 대신IC에서 나오고 말았다. 밤길에 자신이 없으면 내비를 켜야 하는데 일요일 늦은 밤이라 휑하니 뚫린 고속도로에 방심을 한 것이다. 다시 고속도로를 진입하려다 단념하고 국도로 내리 북쪽의 양평 방향으로 달리는데 옆에 남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분명 이 강을 건너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익숙한 6번 국도에 연결될 때 까지 강을 건너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오늘 다녀온 길을 복기해 보니 내가 착각한 것이다. 북여주IC까지 가야 도강을 하게 되고, 이렇게 도강을 하면 다시 한번 도강을 해야 하는데, 대신IC에서 나온 바램에 강을 건널 필요가 없던 것이다.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도 착각을 일으킨 셈이고. 조명을 받아 괴기스럽게 비쳐지는 이포보의 형상이 평창의 불빛과 대조를 이뤘다. 사대강 사업으로 파헤쳐 지긴 했지만, 낮에 지나 간다면 아직 운치있는 강변길같다.
금요일에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충주와 제천 사이 월악산 자락의 농가에 갔다가 다음날 약속한 공연을 보기 위해 혜화동에 갔다. 초저녁 동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가까스로 7시 30분을 넘겨 도착한 충주 터미널에서 월악산 줄기로 가는 막차를 탈 수 있었다. 이 시골버스에 탄 승객 대부분은 고등학생인데 하루에 버스가 단 세 번 들어가는 중원의 오지에서 충주까지 통학을 할 수는 없는터라 이렇게 금요일에나 집에 갈 수 있는 사정이다. 충주호를 지나 어두워져가는 산악도로에서 옆에 앉은 고등학생은 하염없이 창밖의 비경을 바라본다. 카잔차스키는 <모레아 기행>에서 시골아이들을 예찬한다. 욕망을 마음껏 발산할 수 없는 자연의 경계에서 그들은 기다림을 통해 내적 충만감을 채워가며 이것은 예술적 완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버스를 내리고 20분간 비탈길을 올라 도착한 농가의 아이는 초등시절을 훌쩍 뛰어넘어 고등학생이 되어 있다. 이런 산골에만 있다가 역시 충주로 나가 기숙사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에게 충주는 거대한 도심이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술과 피곤에 곯아 떨어지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첫차를 타고 충주시내로 갔다. 반기문의 옛 거처를 조성중인 자유시장에서 친구와 칼국수를 먹고 좌석 매진으로 1시간을 기다리다 탄 버스에 타자마자 다시 잠들고 난 후 점심에 도착해 대학로에 갔다. 장애인미디어아트센터의 연극을 이번에는 가겠다는 약속과 피곤한 심신이 갈등을 일으켰지만 1시간 반 가량의 상행 버스가 달콤한 휴식을 줬다. "줄탁동시"라는 제목의 공연을 보면서 뇌병변장애인의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는 답답함은 있었지만 그들의 소망이 단지 구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점에서 행동을 촉구한다.
여행이라고 하기엔 부적당하지만, 짧은 순간이나마 그 인상을 남긴다. 인천은 아주 어릴 적 처음으로 해수욕장을 가본 곳이었고 그 이후론 한두차례 업무상의 일정 외엔 가본 일이 없었다. 서울과 지척이면서도 바닷가이자 거대도시인 인천에 대한 인상은 영화 '파이란'에서 보이는 퇴색한 도시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요즘 한국영화에서 인천은 온갖 부정이 난무하는 곳으로 즐겨 그려지지만, 송도를 비롯한 이 군사도시의 발전상은 아찔할 정도다. 그러나 일요일 오전 장수IC를 빠져나와 소래포구로 향하는 인천 시내로 들어서면서 아무리 콘크리트로 도로와 건물을 새롭게 닦고 올리더라도 지방소도시에서 느껴지는 한적함이 느껴진다. 이것은 소래포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잘 정비된 제방도로와 해운대나 와이키키 해변의 빌딩처럼 포구를 따라 줄지어 선 아파트에도 불구하고, 한강 하구 같은 포구는 여전히 바다다. 섬들의 도시가 남긴 흔적일까.
모처럼 연휴라 가족과 하루 여행을 다녀왔다.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 학교 다닐 때 구내식당에 걸린 이분의 대형그림을 별 감흥없이 스쳐 봤던 기억과 미술관이라곤 좀처럼 가는 일이 없는 처지에서 별 기대는 안했지만, 그림도 그림이지만 건물을 보려는 목적으로 동행한 분의 안목대로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독특한 건축물로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처음 가본 양구는 지역민이 플랭카드에 호소하는 말처럼 말그대로 육지속 섬이라고 할 정도로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분지형 지역이었다. 춘천에서 양구를 가기 위해 넘는 초입 산길의 배후령 터널은 길이가 5km 이상이나 넘으며 5백미터에서 2km 사이의 터널들을 계속 관통해야 한다. 이런 터널들이 생기기 전에는, 산자락을 깍은 옛길이 무척 험난해서 소양호로 이어지는 뱃길은 무시할 수 없는 교통수단이었다. 이 시절 춘천 102 보충대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을 양구의 자대로 보낼 때 60트럭 아니라 배편으로 했던 것은 안전을 위해서였다.
화가는 양구에서 나서 유학을 다녀와 서울 창신동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이후 전농동으로 이사를 했다. 전쟁통에 이산가족이 됐으나 창신동 처남집에서 가족과 극적으로 상봉한다. 일제강점과 한국전쟁통에 힘겹게 삶을 이어나가는 농촌 아낙들과 도심 행상의 일상을 작품으로 옮기는 서민적인 정서와 손수 아이에게 그림 동화책을 만들어 주는 자상함은 척박한 땅에서 인심을 잃지 않는 강원도민의 소박함을 반영한다.
연휴와 자라섬 째즈축제가 겹치면서 강원도로 가는 고속도로는 강촌까지 정체였고, 귀가길로 춘천시 외곽을 거쳐 가평에서 밀리는 46번 국도를 벗어나 경강로에서 설악으로 이어는 밤의 고개길은 험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