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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2.10 2
  2. 2021.02.09 장춘익과 양운덕1 2
  3. 2021.02.06 지금이라는 것
  4. 2021.02.06 핑카드 정신현상학 영문대조 번역10
  5. 2021.02.05 핑카드 정신형상학 영문대조 번역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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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 Beschreibung 2021. 2. 10. 00:5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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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때까지 나는 양선생님에 관해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였고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이 수업에는 30명 정도가 들어왔고 이 중에는 다른 과 학생들도 꽤 있었는데, 아무래도 당시로서는 사회철학이 운동권 학생들의 관심과목이었던 사정도 있었다. 비록 3시간 통강으로 묶여진 첫 수업 후 빠져나간 학생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학생들이 양선생님의 엄청난 학식과 명료한 강의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이 수업에서도 평가를 위해 중간, 기말고사 시험 따위는 없었고 여러가지 텍스트를 놓고 공동과제물 1건과 개인과제물 2건을 제출하는 것이 전부였다. 대학원 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냈다는 두 분의 성향은 이런 점에서 일치하는 면모도 있었던 것이다. 

 

이후 몇 년이 지나는 사이에 나는 장선생님의 수업으로 역사철학과 주제중심철학을 듣고 학부 졸업논문 지도를 장선생님한테 받았다. 이때 나의 졸업논문 내용의 절반에 해당하는 분량의 근거 텍스트는 당시 장선생님의 철학과 대학원 수업에서 다뤄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이었다. 학부생인 내가 직접 대학원 수업을 들은 것은 아니고 이 수업을 듣는 대학원 형들로부터 관련 정보를 듣게 된 터였다. 이때 대학원에서는 한창 하버마스의 텍스트가 다뤄지고 있었고, 이에 관한 논문들이 생산되고 있는 시기였다. <계몽의 변증법>은 하버마스가 <의사소통행위론>이라는 저서에서 자신의 이론적 단초로 삼기 위해 비판적으로 다룬 텍스트다. 당시 양운덕 선생을 통해 이성 비판적인 프랑스 현대 철학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계몽의 변증법>을 읽으면서 이미 총체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 비판이론 1세대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에 충격을 받은 동시에 우군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의 졸업논문의 주요 구도는 이 비판이론 1시대의 아포리한 저작물을 푸코의 저작과 접목시키려는 시도였다. 

 

나는 논문을 준비하면서, <계몽의 변증법>을 온전히 원서로 읽겠다는 헛된 야망을 품고 논문 준비를 위해 장선생님의 연구실을 수 차례 찾아가야 했다. 갈 때 마다 나의 계획은 변경되었다. 글 자체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원문에 달려드는 것은 정말 암호문 해독과 다름 없었다. 원서로 읽으려던 계획은 결국 번역본으로 대체되었고, 나의 계획변경에 장선생님은 걱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결국 어떻게 논문은 작성해서 제출했고 이 논문에 관한 장선생님의 평가는 논문 자체의 설득력 없는 연결구조와 한정된 근거문헌에도 불구하고, 서문과 논문의 구도에는 긍정적 이었다. 

 

학부 졸업 시점을 전후로 나는 이 논문을 들고 양운덕 선생의 세미나 팀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다른 학교의 철학과 대학원에 가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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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익과 양운덕1

서술 Beschreibung 2021. 2. 9. 05:0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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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이렇게 쓰는 것이 건방져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최소한 한국의 현대철학사의 비하인드 스토리 정도에 이 글이 조금은 기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제목을 쓰고자 한다.

 

나는 어떻게 보면 운 좋게도, 학부 졸업 시점 부터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이 두분을 지도교수로 삼았다. 양운덕 선생은 대학에 정식으로 자리를 잡고 계시지 않았으나, 이 분이 이끄는 세미나팀에 나는 약 2년간 참여했었다. 물론 장춘익 선생은 나의 정식 지도교수였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직접적 계기는, 지난 금요일에 접한 장춘익 선생의 급작스러운 사망 소식 때문이다. 대학원을 수료하고 직장에 자리잡고서 나는 다시 논문작성을 위해 2009년 장선생님과 한번 만나고, 메일 교신 이후 나는 전혀 연락을 하지 않은 터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근래 독일에서 막막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 장선생님한테 메일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간혹 들었으나 결국 영영 하지 못하게 됐다. 이런 안타까움을 이런 글이 대신해 줄 수 있다면 잠시나마 위로가 되어 줄 수 있을까? 일단 시작해 본다. 여러가지 관련 기억들이 상이한 시공 속에 무차별적으로 산재해 있으므로 가능한 시간의 순으로 전개하려 한다. 

 

장춘익 선생이 조교수로 학교에 부임했을 때 나는 군대에 있었지만, 이분의 명성이 너무도 자자해서 나는 무척 궁금해 했고 기대도 컸다. 특히 헤겔에 정통해 있다는 소문에 나는 상당히 솔깃했다. 학교에 복학하고 서양근세철학사라는 수업에서 장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수업은 강의식이 아니라 학생들이 텍스트를 분담해서 발표하는 세미나식이었다. 하지만 이 수업이 다소 기대와 달리 실망스럽게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이 수업에서 장선생님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기 보다는 학생들의 역량을 끌어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방식에 실망해서인지 나는 개인적인 면담을 위해 약속도 하지 않고 혼자 불쑥 선생님의 연구실로 찾아간 적이 있다.

 

하지만 거의 5분도 안되서 나는 연구실을 나서야 했는데, 방문의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으면 계속 연구실에 있기 힘들 정도의  긴장감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뭔가로 선생님은 상당히 분주해 있는 상태였고, 다정다감하게 무례한 학생의 개인상담을 받아줄 정도의 여유는 없어 보였다. 장선생님과의 일차 독대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고, 이 수업은 따로 시험없이 레포트 제출로 끝났는데, 레포트 주제는 근대 철학사에 관해 거의 자유로운 방식의 소논문을 써서 내는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레포트로 근대철학사를 나름 정리해볼 생각으로 R.샤하트의 <근대철학사>를 요약 정리해서 제출했다. 그야말로 수험생식의 과제물 작성이었다. 나의 레포트에 관해 레포트 말미에 장 선생님이 연필로 써놓은 한줄의 평가는, '요약하는데 수고로웠을 것이나 요약에만 너무 치우쳐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그 수업에 실망했던 것은 수업방식의 낯설음도 있었지만,  장선생님의 주전공이 서양근세철학사가 아니라 사회철학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다음 연도 학기에  나는 사회철학을 신청했다. 하지만 장선생님은 이 수업을 자신이 맡지 않고 다른 분을 불러 들였다. 양운덕 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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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는 것

단상 Vorstelltung 2021. 2. 6. 06:0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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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에는 많은 계기들이 있다. 지금의 내가 어제의 나와 다르다는 것은 그 사이에 많은 사건들이 있어 왔다는 것이다. 즉 그 사이에는 많은 일들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인생이라고 할 것이다. 그 사이에는 성취도 있었고 좌절도 있었고 기쁨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다. 이렇게 보면 사람 하나 하나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것이고, 더러는 그것이 모여서 나눌 수 있는 하나의 큰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로 그 사람과 함께 떠나기도 한다. 글과 같은 확산매체가 없었을 때는 구두로 전해들은 바가 없으면 '나'만의 이야기로 잊혀질 수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전자화된 확산매체의 세상에서는 사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서 선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왜곡과 과장 때문에 더욱 이런 선별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은 여전히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느낌상으로 보면, 지금이 여전히 어느 때와 비슷한 지금 같고 여기도 어느 곳과 다를 바 없는 여기라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분명히 이 순간의 지금과 여기에 있는 것은 다른 순간의 그것들과는 분명 다르고, 그 사이엔 과정이 있는데도 말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전선을 결선하는 기술자에게 어느 초보자가 묻는다. 이 초보자는 기술자가 하는 작업을 보고 결선의 원리를 간단히 파악할 수 방식이 바로 색깔에 있다고 보고 같은 색깔의 피복으로 된 전선끼리 묶어 주면 되는 것인지 묻는다. 물론 이런 물음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기술자는 이런 식의 이해를 묻는 물음에 답변을 거부한다. 그의 거부엔, 이런 기술은 단지 말로 전해줘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경험이란 단지 시간이 흐른다고 생기는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런 식의 경험은 경험의 내용이 빈약한 경험일 것이다. 이에 대한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시간여행을 위해 장기간의 저온수면에 들어간 우주인을 들 수 있다. 

 

지금, 여기의 내가 다른 나인 것은 나는 또 다른 나를 위해 경험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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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카드 정신현상학 영문대조 번역10

헤겔 Hegel 2021. 2. 6. 05:0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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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Wir sehen also in diesem Aufzeigen nur eine Bewegung und folgenden Verlauf derselben: 1) Ich zeige das Itzt auf, es ist als das Wahre behauptet; ich zeige es aber als Gewesenes, oder als ein Aufgehobenes, hebe die erste Wahrheit auf, und 2) Itzt behaupte Ich als die zweite Wahrheit, daß es gewesen, aufgehoben ist.

107. In this act of pointing out, we therefore see only a movement and the movement’s following course. 1) I point out the “now,” and it is asserted to be the truth; However, I point to it as something that has been and thus sublate the first truth, and 2) I assert the “now” as the second truth, that it has been, that it is sublated. 

이러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는 하나의 운동과 이것의 경과 만을 본다. 1)나는 지금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진리로 주장된다. 그러데 나는 이것을 있었던 것 또는 지양된 것, 처음의 진리가 지양된 것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첫번째 진리를 지양한다. 그리고 2)나는 지금을 두번째 진리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있었던 것, 지양된 것이다. 

 

3) Aber das Gewesene ist nicht; Ich hebe das Gewesenoder Aufgehobensein, die zweite Wahrheit auf, negiere damit die Negation des Itzt, und kehre so zur ersten Behauptung zurück: daß Itzt ist.

3) However, what has been is not; I sublate that second truth, its “havingbeen,” that is, its having-been-sublated, and, in doing that, I negate the negation of the “now” and so turn back to the first assertion, namely, that now is.

3)그러나 있었던 것이란 있지 않다. 나는 있었던 것이나 지양된 것, 두번째 진리를 지양하므로 지금의 부정을 부정한다. 그래서 처음의 주장으로 되돌아 오는데, 그것은 지금은 있다는 것이다.

 

Das Itzt und das Aufzeigen des Itzt ist also so beschaffen, daß weder das Itzt noch das Aufzeigen des Itzt ein unmittelbares Einfaches ist, sondern eine Bewegung, welche verschiedene Momente an ihr hat; es wird Dieses gesetzt, es wird aber vielmehr ein Anderes gesetzt, oder das Diese wird aufgehoben: und dieses Anderssein oder Aufheben des ersten wird selbst wieder aufgehoben, und so zu dem ersten zurückgekehrt.

The “now” and the pointing out of the “now” are therefore composed in such a way that neither the “now” nor the pointing out of the “now” are what is immediately simple. Rather, they are a movement which has various moments in it; this is posited, but to a greater degree it is an other which is posited, that is, the “this” is sublated, and this otherness, that is, the sublation of the first, is itself once again sublated and in that way returns back to the first.

지금과 지금의 제시는 따라서 지금도 지금의 제시도 직접적인 단순자가 아니라 상이한 계기들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하나의 운동이라는 것으로 구성된다.  이런 점은 이것에도 해당되지만 다른 것에도 해당된다. 또는 이것은 지양된다. 그리고 이 다른 것 또는 첫번째의 지양은 그 자체가 다시 지양되서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간다.  

 

Aber dieses in sich reflektierte erste ist nicht ganz genau dasselbe, was es zuerst, nämlich ein Unmittelbares, war; sondern es ist eben ein in sich Reflektiertes, oder Einfaches, welches im Anderssein bleibt, was es ist; ein Itzt, welches absolut viele Itzt ist; und dies ist das wahrhafte Itzt; das Itzt als einfacher Tag, das viele Itzt in sich hat, Stunden; ein solches Itzt, eine Stunde, ist ebenso viele Minuten, und diese Itzt gleichfalls viele Itzt und so fort. – Das Aufzeigen ist also selbst die Bewegung, welche es ausspricht, was das Itzt in Wahrheit ist; nämlich ein Resultat, oder eine Vielheit von Itzt zusammengefaßt; und das Aufzeigen ist das Erfahren, daß Itzt Allgemeines ist.

However, as reflected into itself, this “first” is not wholly and precisely the same as what it was at the starting point, namely, an immediate. Rather, it is precisely something reflected into itself, that is, a “simple” which remains in otherness what it is, namely, a “now” which is absolutely many “now’s”, and this is the genuine “now,” that is, the “now” as the simple daytime that has many “now’s” within it (that is, hours). Such a “now,” an hour, is equally many minutes, and it is this “now” which is equally many “now’s”, etc. – Pointing out is thus itself the movement that declares what the “now” in truth is, namely, a result, that is, a plurality of “now’s” taken together; and pointing out is the experience of the “now” being a universal.

그러나 자신 안에서 반성된 이 첫번째 것은 처음에 있었던 것, 즉 직접적인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바로 자신 안에서 반성된 것 또는 타자존재에 남은 단순자이다. 하나의 지금은 절대적 다수의 지금이며, 이것은 참된 지금이다. 단지 낮으로서의 지금은 다수의 지금을, 시간들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하나의 지금, 이러한 하나의 시간은 다수의 분들이며 마찬가지로 다수의 지금이다. 등등. 따라서 제시되는 것은 운동 자체인데, 이것이 드러내는 것은 다음과 같다. 지금을 진리로 규정하는 것은 말하자면 지금의 하나의 결과이거나 지금의 다수성이다. 이러한 제시는 지금이 보편자라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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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카드 정신형상학 영문대조 번역9

헤겔 Hegel 2021. 2. 5. 04:4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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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Es wird das Itzt gezeigt; dieses Itzt. Itzt; es hat schon aufgehört zu sein, indem es gezeigt wird; das Itzt, das ist, ist ein anderes als das gezeigte, und wir sehen, daß das Itzt eben dieses ist, indem es ist, schon nicht mehr zu sein.

106. The now is pointed out, this now. Now: It has already ceased to be since it was pointed out; the now that is is an other than that pointed out to us, it is what has been.

106.그 지금이 가리키는 것은 이것의 지금이다. 지금이 가리켜 지고 있으므로 지금은 있기를 멈췄다.  있는 그대로의 지금은 가리켜진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이러한 것, 그것이 있기 때문에 더이상 있을 수 없는 것이다. 

 

Das Itzt, wie es uns gezeigt wird, ist es ein gewesenes; und dies ist seine Wahrheit; es hat nicht die Wahrheit des Seins. Es ist also doch dies wahr, daß es gewesen ist. Aber was gewesen ist, ist in der Tat kein Wesen; es ist nicht, und um das Sein war es zu tun.

This is its truth; it does not have the truth of being. It is nonetheless true that it has been. However, what has been is in fact no essence; it is not, and the issue at stake had to do with what is, with being. 

우리에게 가리켜지고 있는 지금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것의 진리이지만 있음으로서의 진리를 가진건 아니다. 그래도 그것이 있었던 것이라는 것은 참이다. 그러나 있었던 것은 실제로 본질이 아니다. 있음과 관련되었던 것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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