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오르는 소비 욕망

책들 Bücher 2009. 8. 16. 07:2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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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 도스또예프스키,『노름꾼』, 이재필 옮김



                             (국지성 호우를 뚫고 나오며 2004/08/05 17:06)

오랜만에 다른 작품으로 읽어보는 도스또예프스키는  역시 정신없이 말을 쏟아붇는 열정의 반복이다. 같은 사람이 연출한 영화들 사이에도 어떤 공통된 분위기가 있는 것처럼 소설도 그런 느낌이 든다. 거진 10년만에 보는데도 그렇다. 고2  겨울방학에 읽은 까라마조프의 기억이 너무도 강렬했지만 대학에 들어가 읽은 『죄와 벌』, 『악령』에 대해선 별 기억이 없다. 전자에선 고리 대부업으로 살인적으로 기생하는 노파 살인의 정당화 대목이, 후자에선  주인공의 간질발작만이 기억난다. 그래도 내가 읽은 이 작품들에서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분위기를 짚어 본다면 그것은 병적이라고 할만한 열정과 의욕, 자괴감, 그리고 러시아 민족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다.

분명 도스또예프스키는 러시아 민족 특유의 낙후성과 허술함,게으름을 비난하지만 그 비난의 근저에는 가히 폭발할 정도의 자긍심이 잠재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프랑스인과 독일인, 그리고 영국인은 하나의 민족을 대표하는 주자로 도스또예프스키에게 난도질당한다. 프랑스인은 빈틈없는 매너와 형식미로 러시아 여인네를 홀리는 우상으로 과시되지만 이런 우아함은 혁명의 유산으로 넘겨받은 빈껍데기일 뿐이다. 독일인은 후손을 위해 부의 축재만을 일삼을 뿐인 지루하고 단조로운 족속이다. 그나마 영국인은 침착하고 성실하긴 하지만 그렇게 먹통만은 아니다. 폴란드인은 하이에나적 근성으로 노름판의 푼돈이나 집어넣으려 서성대는 민족이다. 그렇다면 러시아 민족은? 러시아 민족만이 소유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적 문화를 그야말로 거침없이 즐길 수 있는 근성을 가졌다. 그 문화란 룰렛이다.

귀족의 신분으로서 외국을 오가며 방탕한 청춘을 보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작품이 눈요기나 헛소리에 그치지 않고 가치있는 기록으로 남을 만한 근거는 너무도 급작스러운 국면전환 때 일어나는 감정과 사고의 파고를 다분히 관조에 머물지 열광적으로 재현하는 작법에 있다. 늙으막에 대령으로 진급한 후 바로 예편한 장군과 장군 재산을 저당잡은 프랑스인, 장군의 상속여부을 보고 결혼을 하려는 블랑슈,,이들이 유산상속을 기대하며 병상에서 죽기만 고대했던 장군의 할머니가 건장하고 위풍당당하게 러시아로부터 이들이 있는 독일의 롤레텐부르크에 와서 도박판에 많은 재산을 걸어 이들을 갈팡지팡하게 만드는 사건, 주인공 알렉세이가 온몸을 던져 사랑했지만 콧방뀌만 뀌던 장군의 양녀 뽈리나가 집안의 혼란스러운 상항에서 알렉세이에게 마음을 열려고 하지만 그녀를 도와준답시고 도박판으로 직행한 채 그녀의 존재자체도 잊어버리고 도박에 함몰해 가는 주인공,,뭔가 다들 전염병이라고 할 만한 격정적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 거릴 때 영국인 미스터 에이슬리만이 냉정을 유지한 채 이 휘청대는 함선을 조정한다.

구경하러 모여드는 인파의 벽이 겹겹히 쌓여가고 계산은 잊어 버린채 무모하게 배팅을 하며 우연을 자신의 편으로 당겨가는 행운아에게 찬사가 쏟아지지만 판이 없이는 존재가치가 없는 돈은 그의 돈이 아니다. 짜릿한 전율로 위에서 아래로 몸을 찍는 승전의 환희를 잠시 그에게 안겨줬다가 썰물처럼 무참히 쓸려 가는 것이다.        

(2004.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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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비주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서양 철학사에서 '경멸'이라는 단어를 사회적 주제로 부곽시킨다. 경멸이란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갖는 불쾌한 감정이다. 경멸의 대상인 후자의 인간이 불쾌를 유발할 수도 있지만, 경멸을 느끼는 전자의 인간이 불쾌를 생산할 수도 있다. 경멸이 발생하는 원인을 이 양자의 어떤 지점에서 명확히 갈라 규명하려는 것은 심리학적 탐구를 포함한 경험과학이 떠맡을 문제지만, 2,000년 전에도 있었던 이런 감정이 새삼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래서 고대 철학사에서부터 경멸은 한 무리의 사유 집단이 걷잡을 수 없는 수효의 군중을 교양화시키기 위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경멸을 비로서 사회적 주제로 파악한 철학자는 니체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지상의 인민에게 쏟아내는 비극적 서사시는 인민에 대한 경멸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슬로터디예크가 말하듯, 경멸을 가린채 대중에게 아부하는 헤겔이나 마르크스에 비해 니체야 말로 솔직한 철학자인 셈이다. 그러나 이게 다인가? 경멸의 베일 너머에는 또한 질투심이 도사리고 있다. 집시여인인 에스메랄드를 사랑하는 노틀담의 꼽추 콰지모도를 경멸하는 부주교 클로드에게도 질투심이 유발된다. 질투심은 한편으로 증오로 치닫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차이가 있는 두 인간을 동화시키도록 촉구할 뿐만 아니라, 질투를 유발하는 인간을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욕망의 샘이다. 이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와 토니오 크뢰거는 유사한 점이 있다. 즉 이들의 질투심에는 어떤 동경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동경의 대상은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운명애이며 토니오 크뢰거에게는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일상의 부르조아적 시민의 생활세계이다.

토니오가 동경의 대상으로 삼은 북구의 사람들에 비해, 자신과 같은 예술가들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는 대중을 경멸하면서도 대중 속에서 예술의 의미를 찾는 시민 예술가로 자신을 정립시키려 한다. 시민 계급이란 자신의 지위를 주어 받은 것이 아니라 투쟁하고 쟁취한, 생성해 만들어낸 사회적 창작물이다.  토니오가 고난을 모르고 양심이 없는 지중해 연안 사람을 혐오하고 거센 바닷바람에 단련된 북구 사람을 동경하는 이면에는, 그의 고향에 대한 애증 섞인 정서도 있겠지만, 이러한 사회성의 배경도 있다. 자신과 같은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시민사회에서 변화의 움직임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는 촉수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변화를 일으키는 작용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가가 일상의 사회를 벗어나 자신만의 천상으로 비상하는 것은, 마치 신, 자유, 불멸성과 같은 칸트의 선험적 이념이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유의 비행을 감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쩌면 칸트처럼 소박하게도, 토니오는 이 거친 물결이 흐르는 강의 양안에서 굳건한 다리를 세우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술가에게 다리라는 건축물이 가능한 것인가?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소명, 아니 저주를 부여받은 예술가에게 견고한 다리는 모순된 건축물이다. 이런 건축은 예술가가 개입할 수는 있으나 전담할 수는 없는 문제다. 왜냐하면 현실에 강하게 밀착되어 자기 소리를 분명히 내는 시끄러운 무리배들이 예술가들에게 떠밀릴 일은 없기 때문이다.  

28살의 나이에 발표한 이 자전적 단편에서 토마스 만의 유년과 청년 시절의 소외된 의식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 그리고 책임있는 예술인의 상에 대한 의지와 더불어, 젊은 작가의 특권인 방랑의 유희를 읽을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마치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연상시킨다. 오직 방향없고 배설적인 경멸로 가득찬 『호밀밭의 파수꾼』에 비해 이 작품에서는 어떤 숭고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조짐이 드러난다. 인생의 특정한 시절,  한때의 비상함으로 추억되는 빛바랜 <젊은날의 초상>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바다의 물결 소리가 내게까지 올라옵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는 한 세계가 들여다 보입니다. 그 세계는 나한테서 질서와 형상을 부여받고 싶어서 안달입니다."(107-108)

텍스트 :  토마스 만 단편선, 안삼환 외 역(민음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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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작가의 큰삼촌에 대한 작가 어머니의 구술에 바탕한 작품이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태어난 세대에게 이런 기억들은 한반도의 보편적 가족사라 할 정도로, 전쟁의 검은 그림자는 짙게 퍼져 있다. 혼란의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주변강국에 의한 짧은 해방기, 강대국 간의 힘의 균형으로 그어진 삼팔선, 한국전쟁이라는 시대를 겪은 세대와 이 세대의 품에서 자란 세대는 그야말로 혼란과 고통의 시간을 가족사에 각인해야 했다. 나의 기억으로 더듬어 보면, 소설상 이런 가족사를 형상화시킨 작품으로 최인훈의 '광장'과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가 떠오른다. 최인훈은 김일성 체제가 성립되어 가는 전쟁전 북한의 생활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있었으며, 이문열은 월북한 아버지에 대한 회한에 묻힌 필적을 남겼다. 특히 '광장'의 '이명준'은 '한씨연대기'의  '한영덕'을 연상시킨다. 그어진 삼팔선 양편에 성립한 광기어린 체제는 평범하게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 살려는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북은 강력한 수령 지도체제가 마을단위까지 확장된 집단 정치의 장으로 장악되었고, 남은 북에 대한 반공과 일제의 잔재로 뭉친 지배층과 인민의 갈등이 속출하는 사회적 혼란과 부패의 장이었다. 2차대전 후 약소국들이 겪는 혼란의 전형을 한반도가 보여준 것이고, 이런 혼란은 지금도 이라크와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에서 진행중이다.
 
미국과 소련(이제는 중국) 사이의 힘의 완충을 위해 한반도에 인위적으로 그어진 삼팔선으로 인해 갈등은 고조되었고 전쟁으로까지 치달었다. 강대국의 몇몇 정책 브레인에게서 나온 생각들이 '한민족'이라 불리는 인민의 가족사를 갈갈히 찢어 놓았다. 이러한 상실과 이산의 아픔을 눌러앉은 채 한쪽에서는 형식상 민주적 지배체제가 형성되었고, 다른 한쪽엔 기형적 지배체제가 지속하고 있다. 한쪽은 아예 공화국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왕정이라고 이해하는게 합당하다. 이 왕정이 일당지배체제를 버리는 정치실험을 하는 날이 온다면, 입헌 민주정이 될 것이다. 변화가 어떻게 되든, 통일에 대한 생각은 잊혀져 가는 가족사를 들출 때마다 되새겨지는 주제다.    
 
*MB정권에서 아무래도 한반도 대운하를 초반부터 강하게 밀어붙이려는 움직임이다. 팔당상수원을 없애고(땅값 오르겠다), 낙동강의 지하수로 서울의 상수원을 삼겠단다(대운하의 물은 물류선박의 운행으로 상수원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초등생도 웃을 대학교수의 계획이다). 그런 몰상식적인 토목공사를 그렇게도 하고 싶다면, 차라리 통일한국의 미래를 위해 북한에 인프라를 닦는 사업을 하는게 타당하다.
 
*소설에 대한 간략한 요약
 
한영덕은 일제시기 평양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주변머리가 없어 기술이 없이는 먹고 살기 힘들겠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평양의전과 교토의대를 나와 대학병원의 의사가 된다. 그러나 북한체제의 선동집회에 불참하는 등, 체제 선전에 비타협적 자세로 일관하자 당으로부터 불온분자로 몰려 전쟁중 군의관으로 전선에 나가는 명단에서 제외되 평양의 인민병원에서 전란의 상처를 입은 환자들을 돌본다. 전쟁초기부터 시작된 미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평양에서 어렵게 환자를 돌보던 한영덕은, 미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뒤바뀌자 평양을 벗어나자는 친구의 권유를 물리치고 꿋꿋히 환자를 보았지만, 후퇴를 결정한 당이 부적격 사상범으로 한영덕을 비롯한 불순분자들을 집단 처형시킨다. 기적적으로 처형장에서 살아남은 한영덕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북에게 유리해 지자,  대동강변에서 모친과 아내, 딸아이를 남겨두고 아들과 함께 월남한다. 남에서 동생을 만난 한영덕은 시간의사를 전전하며 어렵게 지내다 평양출신 치과의사의 소개로 무면허 의료사업을 하는 두 사업자를 만나 병원을 공동으로 운영하는데, 이들과의 만남으로 한영덕은 부당하게 간첩으로 몰려 처절한 고문까지 받는 불운한 시절을 보낸다. 소설은  남한에서 체제가 안겨준 고초를 겪고 난 후, 남한에서 새롭게 이룬 가정을 등지고 배회하다 말년의 안식을 위해 적산 가옥의 다락방에서 한 노인이 살림을 풀어 헤치는 것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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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들의 밤

책들 Bücher 2007. 9. 7. 13:1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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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관한 악의적 해석 

텍스트 : 오시이 마모루, 『야수들의 밤』, 황상훈 옮김

1.배경과 줄거리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극단에 치닫던 냉전 구도를 뒤흔들며 당장이라도 관성화된 지배 질서를 전복시킬 듯한 낭만적 환상으로 불타올랐던 1969년이다. 베트공의 전투환경인 정글 자체를 초토화하기 위해 고엽제까지 살포하는 무자비한 물리력으로 월남을 공략하는 미국의 넘치는 야욕은 반전운동과 함께 전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중심점을 겨냥한 반미운동을 일으켰으며, 전세계 사회주의의 종주국으로 추앙받아온 소련 사회주의의 본질은 일당독재권력의 상징인 크렘린궁, 그리고 이들을 비호하는 비밀경찰과 붉은 군대일 뿐이라는 냉소가 터져 나왔고, 산업문명의 과도한 성장이 자연환경에 치명적 부하를 일으킴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불거져 나오자 자연적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태적 각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국 직전의 위기감이 감도는 이러한 상황을 일소해 버리려는 이상주의적 열정은 결과적으로 폐허만을 남겨두고 말았지만, 견고한 벽에 대치한 채 변혁에 대한 꿈으로 부풀었던 당시 투쟁의 거리는 잠시나마 해방구였다. 바로 여기서 소설은 시작된다.    


  반전공동투쟁의 밤, 고대 로마의 백인대 보병단과 유사한 사각 밀집 대형으로 전투대형을 형성해 가두투쟁에 나선 대열에 섞인 무당파 소속 고교생 레이는 진압경찰에 쫓기다가 대로변 이면의 구석진 골목길에서 밤의 어둠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괴이한 사건을 목격한다. 자신을 형사라고 소개하며 이 사건과 연루된 레이에게 접근해 사건의 위험성을 알려준 고토다와 레이, 레이가 소속된 학내 무당파계열 민주화투쟁 위원회 멤버들 간에 동맹관계가 형성된다. 형사와 과격 운동파 사이의 동맹관계라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동맹이 결성된 이유는 이 사건이 에스에르(Social Revolution)파에 소속된 고교생만을 겨냥한 연쇄살인이라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학내에선 레이와 같은 무당파 위원회 소속이면서도 학외에선 에스에르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친구 아오키에게도 살인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절박함에 있었다.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사야라는 이름의 소녀는 살해된 에스에르파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만을 골라 전학을 했는데, 사건이 끝나면 다른 에스에르파 학생이 다니는 학교로 전학하는 행보를 해왔고 이번에는 레이의 도립 K고교로 전학을 했으므로 아오키가 살해될 차례가 된 셈이었다. 일본도를 휘두르며 야수같은 눈빛으로 레이를 노려보는 이 사야라는 소녀를 둘러싸고 거대한 음모들간의 충돌이 일어난다. 이상의 스토리 라인 위에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가볍지만은 않게 눈여겨 볼만한 대목은 두 부분이다. 하나는 시체처리의 사회사라 할만한 담론이 펼쳐지는 고토다와 레이 일행의 싸구려 숯불 고기집 회식 장면이며, 다른 하나는 사야라는 정체불명의 고교생을 보호하며 또 다른 정체불명의 영장류를 찾아 전세계를 배회하는 유태계 일족의 노인과 고토다, 레이간의 대화 부분으로, 여기서 장구한 인류의 진화사에서 얽혀져 나온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다. 여기서는 두번째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다뤄본다. 


2.문명의 근간 : 폭력

 

서구문명의 토대를 성적 욕망의 압박과 이를 제지하려는 통제의 이원체제로 설명하는데 주력하는 프로이트의 문명관은 긴장과 갈등의 장이다. 갈등의 양상을 성적 욕망의 우세 위에 두었던 그의 초기 저작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성적 욕망은 강력히 등장하는 통제의 벽에 가두어 지지만 불안한 대립구도는 깨지지 않는다. 이런 대립 양상에 기름을 붓는 또 하나의 불안한 해석이 더해진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이 소설에서 인간의 본질을 살육으로 보는 이론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발견자로 알려진 레이몬드 다트의 ‘수렵가설’이다. 긴 팔로 밀림의 나무줄기를 헤쳐 가며 날아다니다시피 활공하는 유인원으로부터 쫓겨나 땅바닥에 두발로 서게 된 인류의 조상이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무기력한 팔을 연장해 무기를 만들어 자신의 잡식성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족간에 살육을 하기 시작함으로써 문명의 필요조건이 구비되었다는 것이 대략적인 수렵가설의 내용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첫장면에서 유인원이 흉기로 사용한 뼈다귀를 하늘로 집어 던지자 이것이 우주선으로 변하는 장면이 수렵가설을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다(이 영화는 68년에 나왔으며 다트의 수렵가설은 53년에 발표되었다). 큐브릭을 포함해 이러한 다트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중 하나인 로버트 아드레이의 『아프리카의 창세기 African Genesis』에서는 수렵에의 적응이 인간을 유인원으부터 이탈시켜 비로서 자연법칙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좀더 과격한 주장이 나온다(P214). 이러한 해석은 그야말로 다윈의 자연선택론과 함께 사회생물학자들이 즐겨 사용할 만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정당화된다면 사실상 온갖 종류의 범죄나 전쟁, 부당한 폭력을 용인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과연 이런 해석은 타당성이 있는가?


  사실상 인간이 자연법칙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은 여러 방향에서 분기되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살육의지에서 나왔다는 도구의 개량과 과학의 발전 또한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다. 사회 생태학자 머레이 북친은 대량살상과 자연파괴의 도구로 사용되어온 과학이 역으로 인간사회와 자연을 재구성하는 긍정적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보는데(M. Bookchin, The Ecology of Freedom : The Emergence and Dissolution of Hierarchy), 이러한 생각의 이면엔 헤겔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서구철학의 지적전통인 합리적 이성주의가 아직 건재해 있다. 바다의 요정인 사이렌의 노래를 듣다가 급류에 휩쓸려 물살에 빨려 죽어가는 부하들이 속출하지 않도록 전원에게 귀마개를 꽂을 것을 명령하면서도 자신의 귀는 그대로 유혹에 노출시킨 채  자신을 마스트에 동여 맨 오디세우스의 신화는 자연의 폭력을 지략(이성)으로 이겨내는 인간의 승리를 보여준다고 말한다(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공저 『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는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이성의 역할을 회의적으로 보지만 대안설정에 있어 이론구성의 역할자로서 합리적 이성주의의 전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는 못한다. 자연을 폭력의 근원으로 돌리는 이성주의가 지배의지의 폭력성에 다름없다는 주장은 이제는 더 이상 획기적으로 들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유효한 함축을 갖고 있다.


  돌려서 생각해 본다. 살육으로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시도는 사실의 추구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선험적 가정이 아닌가? 이것은 철두철미한 회의주의의 양식인 귀납의 방식이 아니라 전제된 가정을 보증하는 발견을 찾아내 기계적으로 가정에 발견사실들을 집어넣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유인원 내지 원시인, 원시적 생활을 답습하고 있는 원주민을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성적 욕망 내지 폭력의 이론틀에 이용해 먹는 프로이트와 다트 류의 음산한 시각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원시인을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프로이트, 레비 스트로스로부터 연원하는 원시인에 대한 주도적 시각은 원시사회가 결핍사회라는 것이다. 결핍의 내용은  문명사회를 야만사회와 구별짓는 것으로 이해되는 생산 잉여와 국가기구이다. 이 지점을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다르게 읽는다. 그것은 마치 원시인들이 생산 잉여를 내기위한 축적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권력이 생길 수 없으며, 권력 자체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생존 이상을 넘어서는 비균등 생산활동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한편 원시사회는 끊임없는 전쟁상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정치의 연장으로서의 전쟁이 아니었다. 즉 권력의 최종 결제수단으로서의 전쟁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시사회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정도로 과도한 힘이 집중된 권력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그중에서도 서구인에게로 전유된 사유체계를 붕괴시키기 위해서 클라스트르가 원시인에게 과도한 투사를 덧씌운 면이 있지만 폭력과 야만으로 점철되어 악용되어온  원시인을 다르게 보는 시각을 성공적으로 제시한 면에서도 충분히 수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장 프랑스와 스크립차크, 『오늘을 위한 프랑스 사상가들』).

 

  인간기원에 대해서 어떤 가정을 세울것인가? 희소 자원과 인간의 폭력성으로 물든 디스토피아로? 넘치지는 않더라도 풍만한 유토피아로? 이것은 비단 인류학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지배질서가 몰아가는 이념의 문제이기도 하다. 

 

3.이외의 주제들


  이 책에서 오시이 마모루는 수렵가설을 불변의 진리 따위로 보려는 우매함을 범하진 않는다. 이것을 둘러싼 여러 반론을 충실히 전하면서도 그것이 지지받는 이유를 그는 말한다. 그것은 ‘살육하는 유인원’이란 신화가 지배 문화의 가치관을 어느 정도 지지하는 사상적 도구로 즐겨 이용되기 때문이다(P219-220). 이라크에선 침략전쟁이 일어나고 피시방에선 흐물거리는 이뮬레이터를 살육하는 게임이 판치는 세상에서 블러드 프로젝트라는 복합 엔터테이먼트의 기획하에 나온 이 책은 지배 가치관에 정신없이 휘둘리는 시장질서에 봉헌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 책은 값싼 유흥거리나 의미없는 잡설만 늘어놓는 현학으로 무장된 것으로  치부될 만한 것은 아니다. 재미와 교양을 갖추면서도 간헐적으로 보이는 오시이 마모루의 짧은 상념에는 어느 정도의 진실성이 있다. 특히 노인과의 대화 부분에는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한 사상적이고 사회사적인 주제들이 산재해 있다. 정신을 물질로 환원시켜 나가는 근대 지성사의 흐름이라든지, 육식의 논리적 근거를 쫓는 대목, 카톨릭의 야만적 살육행위, 이스라엘과 바티칸의 오래된 대치관계, 현대 금융자본의 계보 등은 오래되었지만 되새겨 볼만한 주제들이다.


2004.8.10. 프로메테우스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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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범위에 제한된 컴퓨터 설계

책들 Bücher 2007. 6. 21. 11:0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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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 컴퓨터 구조 원리, Miles J. Murdocca ; Vincent P. Heuring [공저], 김성천 ...[공]역(서울 : 피어슨 에듀케이션 코리아 , 2001)

이 책만큼 컴퓨터의 본질에 관해 명확하게 설명한 책을 발견하기 쉽지 않을 듯 하다. 언어에 관해 비슷한 방식의 책은 많이 들여다 봤어도, 컴퓨터의 근본원리를 저수준의 데이터형에서 차근차근 설명할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사례와 예제를 제시하는 이 책은 , 전공자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흥미로운 볼거리이다. 

흔히 컴퓨터의 설계와 구조(혹은 구성)란 말을 쓸 때, 설계는 소프트웨어적 설계를 의미하며 구조는 하드웨적 부품들의 결합을 의미한다. 설계가 중요한 것은, 아무리 능력이 증대된 컴퓨터라 하더라도 컴퓨터가 다룰 수 있는 수의 범위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제 세계에서 실수의 범위는 무한한 반면, 어떠한 고집적 반도체를 사용한다 해도 컴퓨터가 다룰 수 있는 수의 범위는 무한할 수 없다. 이건 정수나 자연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무한에 관한 문제는 이렇게 쉽게 얘기할 만한 주제가 아니다. 기회가 되면 이에 대해 글을 작성해 보겠다.)

그런데 갑자기 왜 수의 크기가 컴퓨터 설계에 중요하게 다뤄지느냐는 의문이 들 것이지만,  이건 간단하다. 컴퓨터가 다룰 수 있는 문자, 영상, 음성 등 모든 매체는 궁극적으로 전류의 흐름과 차단을 제어하는 저수준 언어의 표상인 0과 1이라는 이진수에 의해 산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컴퓨터가 다룰 수 있는 수의 범위가 증대되는 것은 그만큼 표현능력이 증대된다는 것이고, 이건 컴퓨터의 능력(메모리의 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얼마전 전자신문의 특집란에서 네트웍의 트래픽 저하 문제도 프로그램적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기사를 봤다. 프로그램으로 트래픽을 제어한다는 것은 프로그램 상에서 유한한 수의 범위, 정밀도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그 기사는 아래에 있다).

1991년 이라크를 상대로 한 미국의 이른바 '폭풍의 사막 작전'에서 패트리어트 미사일 방어체제는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을 방어하는데 실패했다고 한다. 패트리어트 방어 시스템이란게 결국 레이다와 미사일을 결합한 미사일 이동기지에 다름아니다. 패트리어트의 레이다 빔이 발사되어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이 방어망에 걸려들면, 패트리어트에서 요격 미사일을 발사해 스커드 미사일을 격추시키는 방법이다. 그런데 여기서 컴퓨터 설계의 문제가 발생했다. 시스템 상에서 스커드 미사일의 속도는 실수 범위에 들어가 있었지만, 패트리어트 시스템의 내부 시간의 클록은 정수범위라서 오버플로우*가 발생해 스커드 미사일을 잡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 관한 설명이 짧게 나와서 제대로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프로그래머가 예제 프로그램을 컴파일러로 돌려 볼때, 오버플로우가 발생하면 아주 웃긴 결과과 발생하는 것을 봤을 때, 어느 정도 납득이 갈만한 이야기다.

*오버플로우 : 실제 컴퓨터가 다룰 수 있는 수의 범위를 넘어선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유효한 산술의 결합법칙인 (a+b)-c=a+(b-c)과 같은 경우가 컴퓨터에선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 컴터가 다룰 수 있는 수의 범위가 -7~9라고 한다면, (8+1)-9=0 의 경우는 컴터가 다룰 수 있지만 8+(1-9)=0에서 오버플로우가 발생해 오류가 된다. (1-9)= -8이 되므로 한정된 수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 기사 "웹트래픽 정체 확 뚫린다"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 개념을 활용해 웹 트래픽의 정체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이 제시됐다. 미국 렌슬러 폴리테크닉 연구소의 크리스 카로더스 교수는 최근 미 국립과학재단(NSF) 수상논문에서 ‘리버스 컴퓨테이션(Reverse Computation)’을 적용, 웹을 지금보다 6배 이상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란 기존의 프로그램을 거꾸로 분석해 설계 아이디어와 노하우를 추출, 기술향상 등을 추구하는 프로그램 행위다. 카로더스 교수의 리버스 컴퓨테이션 역시 네트워크 시뮬레이션과 모델링을 역으로 적용하는 등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그대로 따랐다.
 그는 “말그대로 컴퓨테이션 과정을 거꾸로 적용해봤다”고 밝혔다. 코드를 데이터로 바꿔 본 것이다. 그는 이런 실험을 통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카로더스 교수는 리버스 컴퓨테이션이 인터넷 등 네트워크 트래픽 정체에 대해 현재의 접근방식과 다르다고 강조한다. 이 기술은 사물을 ‘느슨하게’ 해주며 모든 프로세서들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시뮬레이션해 소요되는 메모리의 크기를 미리 줄여준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웹트래픽 역시 6분의 1로 줄어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리버스 컴퓨테이션을 이용하면 정체를 빚어내는, 모든 가능한 상황을 살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체를 피해갈 수 있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고 밝혔다.
 카로더스 교수는 “리버스 기술을 사용하면 현재의 네트워크 설계 및 경험의 시뮬레이션을 기반으로 갖고 있는 추론 이상의 추론이 가능하다”고 이 기술의 강점을 강조했다. 그는 다만 이 기술을 사용해도 네트워크 정체가 심화되면 심화될수록 정체의 원인을 찾기가 어려워진다고 덧붙였다. <허의원기자 ewheo@etnews.co.kr> ○ 신문게재일자 : 2002/02/16

***2002년 초에 작성된 것을 일부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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