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들4 : 구원의 별

책들 Bücher 2024. 6. 10. 21:1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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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Rosenzweig, Der Mensch und sein Werk  Gesammelte Schriften 2 : Der Stern der Erlösung(Haag Martinus Nijhoff 1976)

서문
죽음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모든 인식이 비롯된다. 지상의 불안을 떨쳐 내는 일에, 죽음과 음부에게서 독침을 떼어내는 일에 철학은 물러서 있다. 모든 유한자(Sterbliche)는 이러한 죽음의 불안을 안고 살며, 모든 새로운 탄생은 새로운 이유로, 즉 유한자를 늘린다는 점에서 불안을 증식시킨다. 지상의 모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쏟아내고 이런 것들은 죽음으로 떨어져 가거나 어둠으로 가는 날을 공포와 전율에 사로잡혀 기다린다. 그러나 철학은 이러한 지상의 불안을 부정한다. 그는 매 순간 발 앞에 열려져 있는 무덤으로부터 비켜 선다. 그는 육체가 지하로 떨어져 가도록 놔두지만 자유로운 영혼은 그로부터 비상한다…가차없이 맹목적인 죽음의 찢어질듯한 포성 앞에서 인간은 벌레처럼 벗겨진 지상의 습곡에서 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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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학정치단편과 1940년도의 역사철학테제가 상이한 시대적 단층을 이루고 있는 것과 아울러 이 사유의 퇴적물들은 희미하게나마 연속적이면서 극심한 단절을 보이고 있다. 이 길지 않은 두 단편들에서 훨씬 더 분량이 적은 첫번째 것은 두번째에 비해 오히려 의미이해가 더 쉽지 않은 아포리아로 신비적 색채도 풍긴다. 1921년도 라는, 변증법적 신학들이 신학과 법학에서 노도처럼 일어나는 시기에 분명 벤야민도 빠져들고 만 사유의 자취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불분명한 계시적 풍모도 지닌 신학정치단편을 19년 후의 테제와 연관시켜 보려는 시도는 마치 다리를 걸쳐 놓을 저편 뚝방의 지대가 허물어져서 당장 교량건설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이어 보려는 시도는 또 다른 관점, 그러면서도 철학자로 온당히 규정되어야 할 벤야민을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면서 그의 문제의식이 현재적인 것으로 여전히 유효한지 음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야콥 타우베스는 벤야민의 신학정치단편에서 전도서 기자의 세상사에 대한 덧없음의 한숨을 발견한다. 지혜가 있으나 없으나 부자이거나 말거나 모두 죽음으로 무화시키는 솔로몬의 탄식이 벤야민에게서도 이어지고 있다고 보면서 타우베스는 벤야민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메시아주의자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 메시아는 역사철학테제에서 그런 신앙고백의 대상으로 읽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메시아는 과거인들, 특히 억압받는 이들의 전통을 비로서 새롭게 밝혀주는 미래인들의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콘텍스트를 통해 새롭게 해석되는 성서처럼 메시아는 콘텍스트를 통해 새롭게 나타난다.

역사 인식의 주체가 투쟁하는, 억압받는 계급이라는 테제12에서 인식(Erkenntnis)의 의미 : 이들이 가장 많이 위험에 노출된 상황에서 과거의 이미지가 현재와 병기하여 성좌구조처럼 나타나는 것을 포착하는 것. 이 이미지의 포착은 서사와 같은 연속적 시간상이라는 설명의 틀로 이루어질 수 없음.

신학정치 단편의 첫 문장에 관한 의미 해석 : "메시아 자신이 비로서 모든 역사적인 사건을 종결시킨다"에서 벤야민이 염두하는 메시아는 당시의 그와 마찬가지로 억압받는 계급으로도 볼 수 있음. 왜냐하면 가장 첨예한 투쟁조건에서 살아가는 계급으로부터 그 사건의 의미가 밝혀지기 때문이며, 이는 인식의 고통이면서 메시아가 들어오는 문이기도 함(현재 세대는 과거 세대에게 마치 메시아적인 힘이 있는 존재로 기다려지고 있던 사람들. 하지만 미약한 힘)

세속적인 것의 추구가 메시아적인 왕국의 도래를 촉진한다는 것은 행복이 어느 누구에게는 몰락을 촉진하기 때문. 즉 [타자가 누리는] 행복의 무거운 하중으로 짓눌리는 존재자들이 있다는 것. "이 세속적인 것을 메시아적인 것과 관련시키는 것이 역사철학의 과제"에서 역사철학은 그 자신의 역사철학테제 암시. 따라서 신학정치단편은 신학이 아닌 정치, 사회철학적 주제의식을 드러내는데(신정정치의 거부) 이는 타우베스의 해석과 상이.

"개별인간의 내적인, 마음에 있는 직접적인 메시아적인 것의 강렬함은 고통이라는 의미에서 불행을 통과해 가기 마련이다"에서 메시아적인 것의 강렬함은 고통이며, 이 고통의 하중, 즉 불행은 억압받는 계급에게 집중. 이 고통은 인식이기도 함. 아는 것이 향유되는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아담의 원죄의식처럼 앎이 강요되는 사회현상.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 내재된 지식이 작업하달 단말기로서의 기능으로 심화발전. 쿠팡의 로켓배송 단말기

따라서 벤야민의 기획은 '자본 : 정치경제학 비판'의 또 다른 전개방식. 즉 맑스의 미완의 과제, 필요에 따른 분배가 보장되는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으로서의 공산사회를 향한 지향점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방법은 사회문화사적 전면관찰(파사주 프로젝트)을 통한 자본 비판. 여기서 자본은 맑스주의 식으로 이해된 일면적 자본 만이 아닌, 상징자본도 포함. 이는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에 연결.

다음의 과제 : 파사주 프로젝트라는 소비의 사회 해체 구상으로 이 억압적인 질서로부터의 출구가 가능한가?

https://youtu.be/qOV_1XobtzQ?si=9a_SFN2x1TImTqQ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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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받는 민족에게는 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하나의 정당한 명분으로 일어난다. 달리 보면, 이런 억압이 사실상 없더라도 하나의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억압의 가설이 필요하기도 하다. 분명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런 명분론을 벗어난 야만성을 표출하는데, 그 장본인이자 책임자는 이스라엘 정권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명분론을 이 책임 당사자인 이스라엘 정권도 잘 이용한다는 점이고, 사실상 2023년 가을에 있었던 하마스의 도발은 그런 모의에 기폭제이자 확전으로 작용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전쟁명분은 말할 것도 없다.

건국한지 80년이 되어가는 한 국가의 실효적 영토 지배를 부정하는 것은, 더군다나 미국을 선두로 서방의 든든한 지원 하에 있는 국가에 대해서 그러기에는 현실성이 없다. 아무리 폭력적인 방식으로 국가나 정부, 정권의 기초가 놓여져 있다고 해도, 일단 세워진 질서를 인정하고 보는 것은 법적 관점에서의 오랜 관성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력적 방식 없이 국가가 세워진 경우는 희소했으며, 이런 이유로 폭력을 최소화하기 위한 협정과 조약과 같은 법적 제도가 발전되어온 측면도 있다. 물론 이런 법적 포장들은 언제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침탈행위로 찢어 질 수 있는 잠정적인 것에 불과할지라도.

발터 벤야민은 야만의 흔적, 승리자의 흔적이 없는 문화재란 없다라고 말하지만, 문화의 원천 소재인 삶의 지반이 파괴되고 있는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야만성은 삶의 현장 자체다. 고통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에게 그 아픔의 해소와 치유의 호소가 절실할 뿐, 외부자들에게는 알려진다고 해도 망각되기 쉬운 것은 냉정하고 슬픈 현실이기도 하지만, 무력한 개인들로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각자도생의 원칙에 충실할 수 밖에 없는 점도 있다. 오히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이야말로 극단적인 과대망상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각자도생이란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개개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제하도록 힘쓴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의 도움에 전적으로 기대서는 안된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즉 도움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가변적일 수 있고 우연적인 외부의 손길에 마냥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립적인 삶이란 불가능할  것이고 타인의 선의에 의해서만 삶이 지탱되는 것은 주체성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팔레스타인과 같은 경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하지 않다. 자립의 기반이 붕괴된 곳에서 각자도생이란 말처럼 매정하고 냉혹한 말도 드물 것이다.  

유럽, 특히 독일에는 아프리카와 근동에서 이주해온 수많은 외국인들이 있으며, 그들 중에는 시리아인들이나 우크라이나인들처럼 전쟁 때문에 피난해온 이들도 상당수다. 동양인 중에는 베트남인들의 독일 정착이 두드러지는데, 70년대 베트남 전쟁의 결과로 월남민들이 대거 이주한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인구의 정체 속에서 산업인력의 결손을 주로 EU 권역의 밖에서 온 이주민들이 채워나가면서 유럽공동체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율배반이다. 인도적 관점에서 이주민을 받아들여 이들의 정착을 돕고, 이후 이들이 유럽에서 세수를 감당하고 지역사회에 동화되어 자립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이것은 국가의 필요와 공동체의 기대에도 부응하는 일이다. 하지만 인도적 수용을 초과하는 이주민들의 유입은 경계할 일로 인식되며 이것은 외국인 혐오를 부추기는 극우정당에 대한 지지율로 나타난다. 여기에 팔레스타인 문제는 또 하나의 부담으로 작용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이스라엘의 이익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UN 결의안이 촉구하는 바처럼 팔레스타인이 국가로 인정되어 안정적으로 팔레스타인 국가가 수립된다면 당장 난민의 문제로 유럽에 부가될 부담을 사전 차단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80년간 지속되어온 근동의 불안을 원천적으로 안정화시킬 수 있는 조치이기도 하다. 사실상 중동의 불안한 정세의 근본 발단은 이스라엘의 영토국가 성립에 있으며, 이로부터 비롯된 문제들이 근동의 다양한 정세와 맞물려 오늘날과 같은 파국과 난민을 양산하는 결과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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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들3 : 발터 벤야민

책들 Bücher 2024. 5. 14. 04:5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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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band 1,2 & 1,3 Abhandlungen (Suhrkamp Verlag 1974)
역서 : 발터 벤야민 선집5, 최성만(도서출판 길, 2009)

테제 1, 2
역사는 과거를 고찰한다는 점에서, 행복의 근거를 기억 속에서 만들어 내는 것(소생의 작업). 이 작업은 구원의 관념과 공명. 이 관념은 과거 세대와 현재 세대의 은밀한 약속. 현재 세대는 과거 세대에 의해 기다려지고 있던 사람들. 즉 메시아적인 힘이 있는 존재로. Dann ist uns wie jedem Geschlecht, das vor uns war, eine schwache messianische Kraft mitgegeben. S694

테제6
과거에 대한 역사적 표현의 의미는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잡는 것(역사유물론의 과제) Erinnerung bemächtigen, wie sie im Augenblick einer Gefahr aufblitzt. S695
권력민감적 촉수?
이 위험은 전통의 존속 뿐만 아니라 이 전통의 수용자에게도 일어나는 것으로서, 지배계급의 도구(Werkzeug)로 넘어갈 위험.

테제7
이후 역사의 진행에 대한 모든 지식없이 어떤 시대에 대한 추체험이자 감정이입의 방법은 문화재를 통해 가능한데, 이 문화재는 승리자의 전리품. 따라서 승리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 이는 승리자에게, 또한 승리자인 그들의 후예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 Die jeweils Herrschenden sind aber die Erben aller, die je gesiegt haben.  S696

테제8
벤야민의 투쟁전략 : 예외상태가 상례인 피억압자의 전통적 삶의 상태에서 과제는 진정한 예외상태를 도래시키는 것(die Herbeiführung des wirklichen Ausnahmeszustandes). 당시의 벤야민이 체험한 일들(파시즘)이 진보된 시대에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진보주의는 유명무실함

테제12
Das Subject historischer Erkenntnis ist die kämpfenden, unterdrückte Klasse selbst. S700


테제 14
역사는 구성의 대상. 구성의 장소는 Jetzzeit로 충만된 시간. 프랑스혁명은 고대 로마의 인용. 유행은 현재적인 것을 알아채는 감각. Die Mode hat die Witterung für das Aktuelle, wo immer es sich im Dickicht des Einst bewegt. Sie ist der Tigersprung ins Vergangene. S701

테제 15, 16
역사유물론의 과제 : 역사의 연속체를 폭파하기, 과거의 유일무이한 경험을 현재 속으로 진입시키기.

테제 17 : 가산적인 보편사 vs 구성주의적인 유물론적 역사서술.
역사적 유물론의 대상은 단자. 단자의 구조에서 혁명적 기회의 신호를 포착하기. 벤야민에게 단자란 무엇인가? 유행? 메시아적 시간의 파편들이 박혀 있는 지금시간? 자신의 시대가 과거의 특정한 시대와 함께 등장하는 성좌구조의 포착?(부기A) 매초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Pforte)?(부기B) 그 결과물이자 상징이 파사주 프로젝트?

테제 관련 노트
17a 메시아적 시간관은 맑스에게서 계급없는 사회라는 관념으로 세속화되었으나 신칸트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가 이를 영원한 이상으로 치켜 세우고 정작 매 순간의 혁명적 기회, 그때까지 닫혀 있던 과거의 특정한 방을 열고 들어갈 정치적 행동, 곧 메시아적 행동은 망각됨
계급없는 사회라는 구상은 역사의 최종 목표로 볼 수 없음. 그 구상에는 진정한 메시아적 얼굴이 부여되어야 함. 그것은 프로레타리아 계급 자신의 혁명적 정치의 관심 속에서 부여되는 것 Dem Begriff der klassenlosen Gesellschaft muss sein echtes messianisches Gesicht wiedergeben werden, und zwar im Interesse der revolutionären Politik des Proletariats selbst. S1232

Das dialektische Bild ist ein Kugelblitz, der über den ganzen Horizont des Vergangnen läuft. S1233

역사유물론의 파괴적 에너지는 역사에서 서사를 폭파…무명인에 대한 기억을 기리는 것은 유명인의 그것보다 어려움 p371

프로레타리아 계급에게서 역사적 연관이 순탄치 않음. 즉 새로운 진격의 의식에 어떠한 역사적 선례도 없음. 어떠한 기억도 일어나지 않음. p372
과거가 현재에, 현재가 과거에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상(Bild)이라는 것은 그 속에서 이미 흘러간 것이 지금과 만나 섬광처럼 성좌구조(Konstellation)를 이루는 무엇 p373
인식가능성에 있는 지금에 섬광같은 과거의 이미지는 하나의 기억의 이미지..그 이미지는 위험의 순간에 등장하는 자신의 과거 이미지들과 유사하며 비자의적으로(unwillkürlich) 나타남. 역사가의 권능은 역사의 주체가 그때그때 빠져든 위기에 대한 날카로운 의식에 달려 있음..이 주체는 결코 선험적 주체(Transzendentalsubjekt)가 아니며 가장 많이 위험에 노출된 상황에서 투쟁하는 억압받는 계급. p 374 비자의적  회상의 이미지 공간은 서사성(경과, 연속성)과 구별되어 무질서. p374-375

역사의 주체는 인류가 아니라 억압받는 자들. 연속체는 억압하는 자들의 연속체. 현재를 역사적 시간의 연속체로부터 폭파해내는 것이 역사가의 과제 p376

B3(5번째 테제)
과거는 인식가능한 순간에 인식되지 않으면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사라지는 섬광같은 이미지로서만 붙잡을 수  있는 것. 그 이미지가 진정한 이미지라면 그것은 그 이미지의 순간성 덕분. 그 순간성에 그 이미지의 유일한 기회가 놓임 p380

12(7번째 테제/테제A)
어떠한 사실도 그것이 원인이라는 이유로 이미 역사적 사실이 되지는 않음. 그것이 역사적 사실 정황이 되는 것은, 사후에, 수천 년의 세월이나 동떨어져 있을지 모를 사건들을 통해서. 자신의 시대가 과거의 특정한 시대와 함께 등장하는 성좌구조의 포착…메시아적 시간의 파편들이 박혀 있는 '지금시간'으로서의 현재의 개념 정립. 이 개념은 역사기술과 정치 사이에 연관을 만들어내는데, 그 연관은 기억과 구원 사이의 신학적 연관과 동일. 이러한 현재는 사람들이 변증법적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이미지들, 곧 인류의 구체적 착상 속에 표현됨 p382

우리는 일어난 일에 대해 항상 뒤늦게 알게 된다. 그래서 정치는 [미래가 아닌] 현재를 미리 예언하는 데 의존할 수 밖에 없다(튀르고 재인용) p383…[유대인의 신학적 관념의 정수를 볼 수 있는 역사관에게] 매초는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다. 그 문이 움직이는 돌쩌귀가 회상이다.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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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아르파이어, 역사의 천사  L'angelo Della Storia : 발터 벤야민의 죽음, 그 마지막 여정, 정병선 옮김(오월의 봄, 2017)

우선 소설의 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약간의 허구적 조연으로 동원되었지만 심야의 피레네 산맥에서 난파된 벤야민과 조우할 충분한 개연성 있는, 반프랑코 전선의 젊은 전사이자 실존인물인 라우레아노의  이야기는 다큐에 가깝다. 단지 우울하게만 전개될 수 있는 벤야민 만의 서사에 활기를 주는 장치로만 볼 수 없는 라우레아노의 역사적 행군은 또다른 벤야민의 역사철학과 만난다. 군사적 용어인 행군과 학문적 용어인 철학의 역사적 만남이 얼마나 생소했던지 이 극적인 만남은 오래 가지 못하지만 다 쓰러져가는 불빛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줄 만큼의 큰 힘을 이 유럽의 불온한 지성, 그렇지만 불멸에 가까운 영향력을 남기게 될 벤야민에게 보태준다. 마치 유럽을 탈출하려는 벤야민에게 손을 건네준 수 많은 이들, 아도르노나 숄렘, 호르크하이머, 바타이유, 아렌트 등등의 인물들과 달리 비록 그의 이름도 모르던 사회주의자 라우레아노에게 벤야민은 도움이 절실한 유대 망명객일 뿐이었다.

오래 전부터 나의 관심으로부터 방치되어 있던 이 소설책을 읽게 된 우선적 동기는 신학정치단편과 역사철학테제에 있다. 수박 겉핡기 식으로 십여 년 전 읽은 이 글들을 야콥 타우베스 덕에 다시 읽으면서다. 죽은 이들이 어쩌면 살아가는 이들을 자극하는 일이 독서의 보람인가? 벤야민은 말한다. 행복에의 추구는 반대동력으로 몰락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소설에서 과연 벤야민의 최후는 라우레아노에게 고난의 험행길에서 소생의 길을 열어 줬다. 죽은 이들의 지적 전통은 자양분처럼 삶을 이어나갈 자산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거대한 도서관은 부활을 염원하는 피라미드일 것이다.

시종일관 작가가 벤야민을 다루는 방식에는 장난기와 더불어 약간의 조롱도 있다. 마치 학창시절 학교를 아지트로 삼아 날라다니는 청춘이 제 앞가림은 못하지만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지적 역량과 예의를 갖춘 백면서생 급우를 놀리듯이. 역사라는 거대한 파도를 고도의 관측대에서 관찰하며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기는 하지만 정작 그런 관찰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합리화하면서 신체의 연약함과 우울증에 굴복할 수 밖에 없던 것일까? 작가의 놀림은 그런 아쉬움의 표현이 아닐까? 지식인이란 허울을 벗겨서 보면 이런 벤야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가 말한 세계정치의 과제는 아직도 완료되지 않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이율배반을 넘어서는 것이이말로 살아 남은 자들의 몫이다.

https://youtu.be/diEVtaleyIU?si=f8HxLon2uIsB1Zg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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