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본국 수도의 도련님 이야기

문학 Literatur 2010. 11. 15. 12:1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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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1909)를 읽었다. 이야기의 템포가 매우 더디고 3인칭 소설이지만 1인칭이라고 할 만큼 주인공 다이스케의 심리묘사가 상세해서 지루한 감이 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한창 일본의 군국주의가 발흥하던 때에, 무사 출신의 성공한 사업가인 아버지가  에도에 마련해준 집에서 하인까지 거느리고 빈둥대는 30대의 인텔리 주인공에게 제국주의 시대에 대한 어떠한 반영은 없고 오직 자신의 느낌만이 전부다. 당시 아사히 신문의 전속작가로서 이 작품을 신문에 연재했던 나쓰메 소세키를 극찬하는 가라타니 고진은 결국  아시아 식민제국주의의 본국이라는 시대배경을 가로치고 여기서 일어나는 개인주의를 극찬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에 대한 언급이 한 번 나오는데, 조선 총독부에 가 있는 친구가 고려자기를 보내줬다는 정도다. 물론 제국주의문명의 생산과 팽창에 대한 암울한 전망과 일본경제의 불안정에 대한 서술도 있다. 작가는 단지 개인의 낭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부정시되는 사건을 통해 사회와 개인의 극명한 대립을 제시하는 것으로 나간다. 사회와 개인의 대결구도를 소세키가 드러냈다는 점이 고진에게 선구적인 것이다. 곧 전개되는 삼각관계의 붕괴는 제국에 봉사하는 주인공 집안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였지만-소설 후반에서 히라오카는 신문사 근처 술집에서 다이스케에게 일본제당주식회사와 같은 스캔들이 다이스케 집안의 기업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은근히 경고했다- 결말은 밋밋하게 나고 만다. 그러나 자연의 감정에 따르고자 했던 주인공은 소세키의 이후 작품(『문』)에서 내면의 복수를 당해야 했다. 

후반부의 급격한 전개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벼랑끝 질주처럼  속도감이 있지만 주인공들을 단칼에 파멸시키는 무자비함은 없다.

텍스트 : 나쓰메 소세키, 『그 후』윤상인 역(민음사, 2008, 1판 17쇄).

*다음 구절은 도시인의 변덕스러운 심미주의에 대한 다이스케의 주장이다. 자연에 따르겠다는 다이스케에게 작품을 갈아 타서 작가가 복수하는 후기작 『문』(1910)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그는 육체와 정신에 있어서의 미(美)의 유형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미에 접할 기회를 얻는 것을 도시인의 특권으로 여겼다. 모든 종류의 미에 접해서 그때마다 갑에서 을로 마음이 바뀌고, 을에서 병으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감수성이 부족해서 감상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그것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리라고 믿었다. 그 진리로부터 출발해 도시에서 생활하는 모든 남녀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에 있어서 전부 어떤 계기로 인해 예측하기 힘든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부연하자면, 이미 결혼한 한 쌍의 부부는 양쪽 다 세간에서 부정이라 일컫는 관념에 사로잡혀서 결혼이라는 과거로 인해 빚어진 불행과 항상 마주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다이스케는 감수성이 가장 발달했고, 가장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는 도시인의 대표자로서 게이샤를 선택했다. 그들 중에는 평생 정부를 몇 명 바꾸는지 알 수 없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일반적인 도시인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게이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이스케는 요즘 같은 세상에 변함없는 사랑을 입에 담는 사람을 제일가는 위선가로 간주했다."(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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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한국문학의 불안한 심로

문학 Literatur 2010. 11. 4. 15:5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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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에서 선정한 20세기 한국 중단편 소설집을 읽고 있다(20세기 한국소설 시리즈 21). 주중에 술먹고 보거나 졸음을 참으며 읽으면서 집중력은 다소 떨어진 독서였지만, 간단한 느낌을 차례로 정리해 본다.

포인트(최상규,1956) : 갓 결혼한 백수 남편에게 입대영장이 온 후 겪는 심정의 변화를 보여주는 단편인데, 왜 제목이 포인트인지 모르겠다. 소수점에 점 하나를 찍어 더 작은 단위로 내려 가듯이, 점점 위축되어 가는 주인공의 심리를 암시하는 것일까.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보이는데,  마치 조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는데서 오는 박탈감 비슷한 심정이 보인다. 작가로 입신하기 위해 부인은 백화점에 보내고, 군대까지 요리 저리 피해보려다 결국 덜미가 잡힌 막가는 청춘의 모습 속에 징집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것인가? 이 점만으로도 그 시대에 작은 충격을 줄 만한 소재로 보인다.

흑색 그리스도(송상옥,1965) : 분위기는 포인트와 비슷하다. 제목은 종교적 주제를 암시하는데, 이야기 흐름과 큰 관련성은 없어 보인다. 마치 술취한 사람이 똑같은 말을 반복하듯, 특정구절을 이따금식 반복해 보이는게 당시로선 새로운 형식의 추구로 보였을지 모를 일이다.

겨울밤(이병주,1974) : 소설이라기 보다는 에세이에 가까운 작품이다.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하다. 오히려 이후 작가가 발표할 기록문학의 예고편 같은 다짐과 포부를 보이는 작가의 말같다. 그의 처녀작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노정필의 비판, 그러니까 이 작품은 작가의 말대로 기록문학이 아니라, 서정문학이라는 평가에 몰려 작가는 보다 충실한 기록문학을 준비한게 아닐까 생각한다. 역시 작품의 제목과 작품의 내용이 엇갈린다.  

병신과 머저리(이청준, 1966) : 한국전쟁과 같은 역사의 대사건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사실과 상상의 엇갈림, 리얼리즘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봉합시키는 작가가 또 있을까. 동족상잔의 참란이라는 상흔을 안고 있는 '병신'인 전전 세대와 근원을 모를 병폐를 안고 있는 '머저리'인 전후세대의 대립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서 극명해 진다. 상흔을 잊고 현실에서 싸워나가기 위해 과거를 조작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의 참상이 너무도 깊기 때문인 반면, 전란을 소용돌이를 비켜간 세대에겐 망각과 흔들림이 거추장스러운 위선으로 비춰진 것일까. 이러한 작가의 문제의식은 약간의 변조를 거쳐 <자서전들 쓰십시다>에 이어진다.

자서전들 쓰십시다(이청준,1976) :   이른바 성공한 인간들 열댓명의 자서전을 대필해온 작품 속 작가는 자서전이란 대필 청부업자에게 의뢰를 하더라도, 그 주제는 자신을 의견을 주장하는 과거시제의 미래투영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만인에게 드러내 보이는 고백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자서전은 자신의 과오도 미덕으로 추앙하는 위장을 드러내는데, 그래서 짓밟히는 사람들은 두번 짓밟힐 수 있는 것이다. 그 성공에 짓눌린 무수한 타인들은 기록 속에서도 짓밟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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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1955)

문학 Literatur 2010. 10. 13. 09:1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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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혁명 후기를 배경으로 하는  낯설고 복잡한 형식의 이 작품에서 뻬드로는 베드로, 빠라모는 들판을 뜻하는 뻬드로 빠라모는 멕시코 서남부 할리스꼬(Jalisco) 부근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꼬말라의 토호 지주 돈 뻬드로 빠트론를 가리킨다. 중남미문학에 워낙 생소하다 보니 무척 읽기에 까다롭다. 1910년부터 시작된 멕시코 혁명(1910~1917)의 연장선에 있던 피비린내나는 '끄리스떼라 반란'(1926~1928)을 지켜보면서 부친과 친지를 잃은 작가의 피맺힌 각인이 마치 몽환적인 형식과 시적 문체로 형상화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비평가들에게 후대로 평가를 유보할 정도의 충격을 준 이 작품은 형식도 형식이지만, 화자가 마구 뒤바뀌고 대화 도중에 다른 화자의 대화가 도입되는 등, 분석을 해가며 읽지 않으면 종잡기 어렵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비평가들의 눈에 들만한 작품이다. 변방의 오랜 식민지가 강탈되고 유린되는 상황에서 유령들이 주도적으로 출몰하는 이 작품은 시대의 짓눌려진 굴절이다. 이 책의 시대상과 분위기가 요르단 욥코브의 『발칸의 전설』을 연상시킨다.

텍스트 : 정창 역 『뻬드로 빠라모Pedro Paramo(민음사, 2010, 1판 17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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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들의 영도를 받으며 존즈의 메이너 농장을 접수한 동물들은 동물농장을 세운다. 그러나 혁명은 화석화되고 동물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생긴다. 소비에트에 대한 풍자이면서도 우화로서의 알레고리인 이 소설의 대미는, 적의 주요 기능으로 규정했던 직립보행을 돼지들이 낑낑대며 흉내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어울려 춤추며, 예전에 인근의 적대자였던 폭스우드 농장의 주인 필킹턴이 동물농장의 돼지들에게 초대되어 행하는 다음의 연설이다.

"동물농장의 주인 여러분, 당신들에게 다스려야 할 하급 동물들이 있다면, 우리 인간들에겐 다스려야 할 하층 계급들이 있습니다."(p.21) 이렇게 말하면서 필킹턴은 동물농장이 이룩한 노동의 효율화-식량분배는 줄이면서 노동시간은 연장시킨 것-을 극찬한다.

'노동자는 자본가가 되려고 한다'는 베블렌의 지적처럼, 봉기로 탈취한 생산물의 단물을 독점한 지배세력이 된 돼지들은 더이상 혁명이 필요없다고 다른 동물들을 세뇌시킨다.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권력의 본질을 권력 자체의 목적성으로 제시한 것처럼, 지배자에게 필요한 건 권력을 지키는 일, 권력의 누수를 사전에 예리하게 차단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세계사는 권력을 지키려는 자와 이를 빼앗으려는 세력의 끊임없는 대결이 펼쳐지는 무대이다. 자연의 한계로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교체되어 가도 그들의 의상과 연기는 변함이 없다. 지배를 국가에 위임했다는 근대 계약설을 준용해, 지배를 어떤 몰인격체에게 위임함으로써 인간들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전복시킬 수 있을까? 이 우화의 앞부분에서 노장의 선동 돼지인 메이저의 선언은 이런 전복의 아이러니를 은연중 폭로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우리의 적이며 모든 동물은 우리의 동지입니다."(p.13) 메이저가 행한 이 연설의 이 마지막 대목은 다음과 같이 의역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인간의 적이거나 동지이다." 홉스 이래 인간은 인간에 대한 적이었으나 맑스 이래 노동하는 인간은 인간에게 동지이기도 했다. 동지와 적 사이에는 무관심한 이웃이 있을 것이다. 지배하려는 자는 이 중간을 가능한 배제하고 동지를 늘려가면서 적을 고립시키는 전술을 취해야 할 것이다. 동지가 적이 되고, 적이 동지가 되는 지배의 변증법에 무관심한 태도는 결국 지배의 용인이다.

마지막으로 역자가 친절하게도 풀어준 이 등장동물들의 일대일 대응관계 일부를 소개한다.
존즈 : 니콜라스 2세, 메이저 : 맑스,  나폴레옹 : 스탈린, 스노볼 : 트로츠키, 돼지들 : 볼세비키, 복서 : 프롤레타리아트,  스퀼러 : 프라우다, 개들 : 비밀경찰, 필링턴 : 영국, 프레드릭 : 독일....

다시 왕년의 대권에 침을 흘리는 러시아의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은 개떼 출신이다. 그도 나폴레옹을 꿈꾸는지 모른다.

텍스트 : 조지 오웰, 도정일 역 『동물농장』(민음사, 2009, 1판 68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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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입성

문학 Literatur 2010. 9. 13. 11:2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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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부터 읽기 시작한 세계문학 독서를 지난 주부터 중단했다. 거의 격주간으로 도서관에 가서 민음사판  세계문학코너에서 책을 골랐는데 더이상 소설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과학과 심리학, 철학 쪽에 구미가 당기는 책들이 있긴 했지만, 도서관에서 죽치고 앉아 읽으면 모를까, 대출해서 전철이나 집에서 읽기엔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지난주에 대출을 안해서 오랜만에 집에 있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작년 가을에 카프카의 소설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전철 독서용으로 다시 들었다. 지난 주말에는 집에서 거실 바닥을 구르며 홉스봄의 『자본의 시대』를 짚었다. 역시 이름값 하는 책이다. 그러다가 어제 오후 산책을 나갔다가 와부 도서관에 들렀다. 산책길의 전환점이 도서관인데,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말이 이 경우다.  문학 쪽 서가를 두리번 거리다, 구효서의 『오남리 이야기란 책을 발견했다. 작가가 보안법 위반으로 수감중인 동료 작가 김하기에게 보낸 서한집인데, 작가가 집필을 위해 칩거해 들어간 오남리에 관한 얘기들이 나온다. 같은 남양주라서 호기심도 들었지만, 예전에 나도 이곳으로 집을 알아보러 두어번 가본 적도 있어서 마음이 동했다. 서울 집을 나와 혼자서 경기도 산골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림을 하며 글을 써 나가는 생활을 작가는  친구의 수감생활과 비교하는데, 간수들이 간밤에 죄수들을 살피는게 오히려 부럽다고 말한다. 혼자 자다가 가위라도 눌리면 아무 도움없이 그냥 갈 수도 있지만, 감옥은 이런 점에서 좋지 않겠냐는 거다. 친구를 위안하기 위한 별스러운 발상이지만, 은근히 그런 생활을 즐기는 작가의 즐거운 불평같다.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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