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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Literatur'에 해당되는 글 101건

  1. 2011.01.16 음악의 전염성 : 크로이체르 소나타
  2. 2011.01.14 러시아 문학
  3. 2011.01.10 시와 소설
  4. 2011.01.07 폭풍 속의 평화
  5. 2010.12.27 닥터 지바고 : 혁명의 주변세계와 예술가

음악의 전염성 : 크로이체르 소나타

문학 Literatur 2011. 1. 16. 15:4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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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집의 수도관까지 얼려버린 냉혹한 한파의 주말 동안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다 읽었다. 교훈적 소설가답게, 이 책은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굴복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 주고 있다.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은 <가정의 행복>에서 정신에 복속되는 것으로 화합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세 작품에서 타협불가능한 파국으로 몰리고 만다. 뒤의 세 편은 모두 톨스토이 만년의 작품이라고 하니, 결국 육체적 욕망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해갈되지 않는 것이며, 그 완벽한 해소는 오직 죽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적 사랑관을 톨스토이가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마직막 작품인 <신부 세르게이>는 성욕 뿐만 아니라 명예욕과도 일전을 벌이고, 결국 방랑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다. 한 때 스테판 카사츠키라는 촉망받던 장교였다가 수도사가 된 후 명성을 날린 세르게이는 보잘것 없는 평범한 인생이지만 마음착한 파센카를 만나면서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일상의 소박한 삶에 충실한 농군과 같은 삶이 가치있다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도덕가로서 욕망을 바라보는 톨스토이의 몇 몇 구절.

"평생을 한 여자 또는 한 남자만 사랑한다는 것은 양초 하나가 평생 탄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크로이체르 소나타>, 포즈드니세프의 말, 183.

"아편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 또는 흡연자가 이미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듯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여자들과 관계를 맺은 사람은 정상인이 아니라 영원히 타락한 인간, 바로 호색한이 되는 겁니다."
상동, 193.

"그[예브게니]는 그녀[스테파니다]를 만질 수만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그녀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가까이에서 어둠 속에서라도 그녀와 마주치기만을 바랐다. 단지 사람들과 그녀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스스로를 억제하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한 수치심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는 조건들, 가령 어둠 속이나 동물적인 욕정이 수치심을 압도해 버릴 수 있는 만남의 조건들을 자신이 찾고 있음을 또한 알고 있었다."
<악마>, 368.

매우 아름다운 베토벤의 소나타 9번 Kreutzer를 잔혹스러운 결말을 향한 치정의 동력으로 삼는 것은 아무래도 가혹한 도덕심이다. 참고로 Kreutzer은 이 곡의 헌정을 받은 인물로 곡의 내용과 상관없지만, Kreuz는 독일어로 십자가, 교차점을 뜻한다. 평행하다가 어긋나듯 만나는 두 악기의 곡예가 포즈드니셰프에게는 간통으로 보였던 것이다. 

*소나타 9번은 다음 링크 참조 : http://blog.daum.net/okbon/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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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

문학 Literatur 2011. 1. 14. 09:5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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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도서관에 『닥터 지바고』를 반납하고 어떤 소설책을 볼까 서가를 두리번 거리다 러시아 소설에 눈이 갔다. 도스트예프스키의 주요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20여년 전에 읽었지만, 전집으로 나온 책들을 보자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단 건너 뛴 후 고른 책이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아직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와 같은 대작을 읽지 않았지만, 마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견줄만한 대작들을 당장 접하기엔 웬지 부담감이 들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 나온 작가 연보를 보다가, 톨스토이가 투르게네프와 체홉, 도스트예프스키, 고리끼가 동시대인들일 뿐만 아니라, 특히 투르게네프와 체홉, 고리끼와는 직접 만남을 가질 정도로 친교가 있었지만, 도스트예프스키에 대해선 그의 『죄와 벌』때문에 다소 적대적인 관계였다는 걸 알게 됐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인생의 특정 시기에 형성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이다. 현재 초기작인 <가정의 행복>을 읽고 있는데, 중년 남성과 나이어린 신부 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질곡이 나이어린 신부의 관점에서 그려지고 있다. 부모님을 차례로 여의고 시골영지에서 보모와 동생, 하인들과 함께 사는 '나'는 아버지의  절친한 젊은 친구였던 세르게이 미하일리치를 후견인으로 맞아 들인다. 그가 집을 자주 방문함에 따라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을 틔우게 되고, 결국 결혼까지 하지만, '나'의 요청에 따라 시골 생활의 안정과 고요를 벗어나 도시로 이사를 해 사교계를 드나들면서 '나'는 남편과 감정의 골이 깊이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시골에서 오랫동안 교제한 남자라고는 미하일리치 밖에 없었던 '내'가  사교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맘껏 고무된 것을 보면서 남편은 절망한다.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하면서 사교계를 주의하라고 한 남편의 경고는 기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사랑관의 변화를 『그 후』에서 『문』에 걸쳐 보여주듯이, 서로 다른 사랑의 감정을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보여준다.

텍스트 : 레프 톨스토이, 이기주 역『크로이체르 소나타』(임프린트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8, 초판1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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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소설

문학 Literatur 2011. 1. 10. 17:2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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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해가 기울어져 가는 시간에 집을 나와 칼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하다 마을 도서관에 들렀다. 11월 경에 반 정도 읽다간 반납했던 김수영의 산문집을 들추니, 내가 맞춰 놓은 페이지에 그대로 책에 딸린 줄헝겊의 갈피가 꽂혀 있었다. 참 책들 안본다.

64년에 김수영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산문을 가리켜 유동적이고 시흥(詩興)적이라 인상과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 극히 어렵다고 했는데, <닥터 지바고>를 거의 다 보는 시점에서 매우 공감이 가는 말이다. 시와 소설은 얼마나 다른 것인가. 그런데 이 두가지를 다 했다니. 시인의 소설은 소설처럼 읽기 보다는 시처럼 읽어나가야 하는데, 소설의 속도감은 또한 얼마나 빠른가. 뒷부분에 실린 지바고의 대서사시는 시처럼 읽어야 겠다.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김수영의 소개글을 읽다 보니, <닥터 지바고>는 파스테르나크의 유일한 소설이 아니었다.  중간에 몇편의 중단편이 있었다.  읽은 책의 책날개에 이 책이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라고 쓰여 있던 문구를 유일한 소설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닥터 지바고>는 58년도에 소련에서 등재는 물론  출판이 금지되자 이탈리아에서 먼저 출판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소련에서 이 책의 해외출판을 저지하려 했던 점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대한 영국 정보부의 출판저지 시도와 흡사하다는 점이다. 파스테르나크는 혁명이 스탈린을 정점으로 권력화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히틀러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이 오히려 해방을 가져다 줬다는 관점을 <닥터 지바고>의 에필로그에 드러냈다. 정치범으로 몰려 유형을 받던 지바고의 옛친구들은 독일과의 전쟁 때문에 유형을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전쟁에 나가야 했지만, 유형보다는 오히려 전쟁이 이들에게 더 인간적이었다. 이런 시각은, 아무리 스탈린 사후라고 하지만, 그 후광을 입은 관료들에게 밉살받을 만한 위험한 시각이다. 조지 오웰도 소련의 눈치를 보는 영국의 외교정책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고 보면 이 두 작가는 영혼을 질식시키는 절대주의 체제에 저항한 점에서, 서로 다른 곳에서 거대괴물을 공격해 들어간 비판정신이다. 파스테르나크에게 그 괴물은 당대의 소비에뜨 권력이었고, 오웰에게는 미래의 전지적 권력이었다.    

<닥터 지바고>는 시대사의 대격변기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짓눌린 개인의 삶을 보여준 점에서 게오르규의 <25시>를 연상시키지만, 부르조아 계급출신으로 인텔리겐차이자 의사이며 시인인 지바고는 결코 요한 모리츠만큼 불행한 삶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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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속의 평화

문학 Literatur 2011. 1. 7. 13:2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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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부대로부터 군의관으로 강제 징집(유리로서는 2번째 강제 징집)당했다가 탈영한 유리는 유랴찐으로 돌아와 극적으로 라라와 해후한다. 이후  유랴찐의 병원과 보건소에 근무하면서 라라의 가족과 함께 잠시 산다. 그러나 맹목화된 도덕주의로 무장된 지역 소비에뜨의 권력이 강고화되어 감에 따라, 인텔리겐차로서 유리가 라라와 부정을 저지르는 것으로 간주되 이들에게 위협이 점차로 가중된다.  유리는 라라의 제안을 받아 들여 라라와 그녀의 딸과 함께 바리끼노로 피신한다. 바리끼노는, 유리가 그의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를 떠나와  잠시 정착했던 곳으로, 그의 부인인 또냐의 어머니, 즉 유리의 장모가 바리끼노 유지의 딸로 자랐던 곳이지만, 혁명 후 가택과 땅은 몰수되어 관리인에게 인도된 상태였다. 또다른 첩거 생활의 첫 날을 보낸 후, 유리는 그동안 마음속으로 습작했던 시를 종이 위에 써보고자 한다.

"잠을 깨자 유리 안드레예비치는 창문 가의 매혹적인 탁자를 아침 일찍부터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무엇인지 쓰고 싶은 욕망 때문에 두 손이 근질근질거렸다."

보리스 빠스쩨르나끄, 박형규 역『닥터 지바고』하권(열린책들: 2006, 보급판 1쇄), 5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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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반까지 읽어온 이 책은 러시아 혁명기를 배경이라기 보다는, 혁명이라는 기관차가 휩쓸고 지나가는 삶의 지반, 궤도 주변에 모여 있는 삶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원어로는 빠스쩨르나끄)가 유일하게 남긴 장편소설이라고 알려진 것처럼, 시인인 저자 자신도 시작(詩作)을 마치 이 서사를 위한 유년기의 뎃생 정도로 묘사하는 대목도 있다. 전반적인 느낌은 도스트예프스키와 같은 광란의 저술이 아니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당대의 문학 시책을 존중하면서도 혁명이 할퀴고 지나가는 이면 구석구석을 담담히 전하는 저술이다. 어떻게 보면 작가는 가공의 인물을 통해 시대 상황을 기술하는 반(半)사실주의 내지 문학 다큐를 썼다고 볼 수도 있다. 유리 지바고는 마치 <카탈로니아 찬가>의 조지 오웰처럼 혁명의 두 전쟁(전장의 전란과 생활세계의 전쟁)을 겪어 나가며 시대를 기술하는데 그치지 않고 폭로하면서도, 파스테르나크의 문학과 철학의 세계관도 투사한다.  작가는 힘과 독창성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며, 역사는 죽음에 대항하기 위한 기억의 보존과 연장이라고 밝힌다. 장기간 지속된 폐렴으로 죽음을 얼마 안 남긴 또냐의 어머니께 유리는 의식이란 인간 내부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외부, 곧 인간의 활동을 겨냥하고 있다고 말한다. 의식이 인간의 죽음과 무관하게 지속되는 것은 의식이 어떤 매개를 통해 인간 사이에 공유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의식의 불멸을 얘기한 톨스토이의 영향이 보인다. 톨스토이는 문학 작품과 같은 매체가 바로 죽은 저자와 미래의 독자가 만날 수 있는 의식의 산물로 봤다. 그렇다면 기억의 연장물이나 기록물인 사진이나 동영상과 같은 저장 파일이 바로 의식의 산물인가? 영혼없는 사진은 그냥 사진이듯이, 재능과 노력이 결부되지 않은 저술이나 영상은 단지 기록물일 뿐, 작품은 아니다. 이런 기록물을 바로 작품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예술가의 직무이다. 마치 빔 벤더스가 <파리 텍사스>에서 두 가족의 필름 영상을 재투사하는 장면처럼. 그러나 이러한 예술가의 직무가 아직까지도 유효할까. 김수영이 문단추천제를 비판하면서 등단도 독창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예술가는 다른 삶을 살고 다른 형식의 작품을 내놓지 않는다면 더이상 예술가가 아니며, 사고 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기질의 소유자가 예술가라고도 하지만, 벤야민이 인쇄 문자에 대해서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이런 예술가의 기질은 오히려 광고판에 적합한 것이 아닐까? 등단 시인들을 흡수했던 국내의 모 기획사처럼, 연극판을 기웃거리는 영화 감독들처럼, 예술은 자본의 투하에 맞춰 자신의 몸을 내어줄 준비가 된 창부로 변한 세상이기도 하다. 인문학 교수들이 노년까지 정년을 확보하기 위해 등재지 논문지침에 맞춰 논문 편수를 맞춰 가듯이 예술도 무언가로 팔리기 위해 생산된 제품이 되었다.
 
에피소드와 같은 대목 하나. 유리 지바고가 서부 전선에 군의관으로 징집되었을 때, 야전병원으로 쓰인 외진 시골 별장에 한 난로공이 있었다. 유리는 처음 만난 이 사람에게 흥미를 느꼈는데, 그와 헤겔과 크로체에 관해 1시간 동안 얘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이 난로공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박사 출신이었는데, 정작 난로를 손보는데는 서툴렀다. 그 자신도 철학을 공부했던 저자가 철학에 대해 보이는 어떤 조소가 느껴진다. '유리 지바고'라는 인물 설정에서도, 그가 파스테르타크처럼 문학과 철학, 복음서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현실의 대처를 위해 의사라는 직업을  부여한 것에도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실보다는 의식이 앞섰던 독일과 달리, 현실을 무시하고 나아가는 의식의 실험이 러시아에서 실행되고 있다는 풍자로도 보인다. 결국 대화의 상대로서 흥미롭지만 정작 자신의 업무에서는 무능한 이 난로공 덕분에 유리는 제 스스로 실내 난로의 연통을 제대로 설치할 수 있는 기술을 획득했다. 이것도 실용지식에 대한 무지를 가장한 산파술인가.

텍스트 : 박형규 옮김,『닥터 지바고』상권(열린책들: 2007, 보급판 3쇄) 

*발터 벤야민, 조형준 역 ,『일방통행로Einbahnstraβe (새물결, 2007) 중 '공인회계사', p.58 : "인쇄된 책 속에서 자율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하나의 피난처를 발견했던 문자는 지금은 광고에 의해 인정사정없이 거리로 내쫓겨나 경제적 혼돈에 의한 잔혹한 타율성에 복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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