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이청준의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라는 에세이류의 단편소설집을 천천히 읽다가 이제 짧은 두 꼭지를 달랑 남겨 두고 있다. 앞부분과 중반 이후까지 읽으면서, 망향살이의 설움에 복박치는 노작가의 푸념처럼 읽히어 그만 읽을까 하다가 마져 잡고 있었는데, 마치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처럼 뒤로 갈수록 다시 일으켜 살아나는 숭고미처럼 노작가의 설움은 이 시대의 현재를 반추한다. 자신의 예전 단편의 모티브를 제공한 선교책자의 실화는 더더욱 현재감을 더한다. 한국전의 동란기에 다리밑에서 자신의 옷을 벗어 입혀주고 숨을 거둔 어미의 가슴팍에서 튀어나와 울음을 그치지 않던 여아가 미국 선교사에게 발견되어 양육되고, 결국 10살의 나이에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린 일화에 대해서, 이청준은 단지 개인에게 덮친 불운을 불분명한 운명에 돌리지 않고, 이런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을 지목한다. 이 지목이 구체적이지 않아 모호하지만, 다시 전쟁을 외치는 이들을 우리가 두 눈 똑바로 뜨고 볼 수 있는 현재, 우린 똑같은 불행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전쟁이 인류 생존의 필요악으로 있어 왔고, 앞으로도 없다고 할 수 없는 이상, 평화만을 외치는 일이 오히려 허구적이라 해도, 인간의 생활세계가 무슨 봄철 밭갈이 처럼 마구 파헤쳐지고 뭉개지고 나서 터가 잡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연평의 황금어장에 북조선 배가 나올 수 없게 일방적인 북방한계선이 그어진 현재의 수역은 준비된 화약고에 다름 아니었다. 자연그대로 흘러가는 강을 파헤치고 비틀어 생명의 강을 만든다고 하듯이, 평화기반 조성으로 남북 공동 공영의 길로 갈 수 있는 방안을 팽개치고 무력으로 조저서 깔아 뭉개야 하겠다는 것이 이명박 정권의 이념이다. 악마를 뽑은 국민은 결국 대가를 치루는 거라고 한다면, 지금까지만 만으로도 족하다. 이 뒷수습만으로도 앞으로도 헤아리기 힘든 시간이 걸리겠지만, 또다시 강행되는 연평의 포사격훈련을 보면서 저세상으로 가신 우리 노작가께서도 이제 생전에 못다한 힘을 발휘해 오늘 내리는 눈처럼 많은 천상의 군대를 밤새 내려보내 전쟁을 외치는 저 악마들을 거둬가시기를. 
반응형
반응형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 단편은, 일제시대 강진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독립운동가와 함께 연해주로 떠난 8살 장남이 일본 첩자 혐의로 몰려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당하고 난 뒤, 70여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2002년 서울 월드컵에 다녀간 얘기를 소재로 한다. 혁명의 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국가는 물론 모국어도 팽개쳐 버린 이 장남은 고국에 와서도 또다시 고국을 잊어야 한다는 역설에 부딪쳤다. 2002년 온 나라를 뒤덮은 붉은 물결에 동요된 어떤 흥분감이 혁명을 외치던 지난 세월 소련의 인민대열에서 자신의 국적을 숨기고 혁명에 동요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일깨운다. 언뜻 이해하기 힘든  심정이지만, 소련의 몰락 이후 더해진 어떤 당혹감이 월드컵의 붉은 물결을 만나면서 이 노인에게 '대한민국'이란 외침을 허위로 보이게 한 것인지 모른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군중의식 외에 악마들의 외침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너도 나도 빨간 셔츠를 입고 동요하던 사람들에게 한때의 즐거운 일탈감 내지 동질감이라는 추억 외에 다른게 있을리 없다. 굴절당한 삶을 지속해야 했던 노인에게만 그 심층이 보여졌을 뿐이다.
 
<천년의 돛배>(2006)
단편 소설집의 첫번째 작품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과 신화적 상상, 그리고 사실성이 결합된 원형질적인 작품이다. 상상의 허위를 벗기기 보다는 상상을 지켜주는 사람들의 공감을 보여준다. 눈 길 위에서 멀어져 간 자식의 발자국을 보며 닿을 수 없어도 마음이 가는 것처럼, 천년의 바위는 끊임없는 모녀 간의 그리움을 상징하며, 이 그리움에 사람들은 공감의 돛대를 꽂은 것이다. 그런데 이 돛배는 과연 실제하는 것일가?  

<지하실>,<이상한 선물>, <태평양 항로의 문주란 설화>
여기까지 실린 이 책의 단편들에서  이청준은 고향, 고국이라는 인간 원형의 귀향처를 그리워하면서도 갈 수 없는 심정을 반복하고 있다. 그 자신도 쫏기듯이 고향을 떠나야 했고, 우즈베키스탄이나 멕시코에 있는 이민 3세대의 조부도 쫏기듯이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로 떠밀려야 했다. 그리움과 회한의 정서는 노년의 작가에게 드리운 그림자다. 고향, 고국을 그리워 하지만, 더이상 그곳에 갈 수 없는 이율배반의 심정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남도의 백성 수만이 일본군에 납치되어 세계 곳곳으로 팔려나갔다는 역사적 사실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을 지켜준 고국, 자신을 지켜준 고향이 없다는 데서 고국, 고향은 버려야할, 잊어야 할 장소다. 단편의 형식을 빌린, 그리고 세상과의 작별을 얼마 안남겼었던 노작가의 회한의 정서가 삶을 덧없게 채색한다.    

<부처님은 어찌하시렵니까><조물주의 그림>
소설이 아니라 작가와 비교적 가까이 지낸 친우들에 대한 뒷얘기같은 이야기들이다. 이 책의 그림을 그린 동향지기 화가 김선두와 그의 형, 그리고 박상륭의 편지. 특히 임권택에 대해 다룬 <조물주의 그림>은 Y 감독의 미학적 의식이 얼마나 고전주의적인지 보여준다. 황혼녁 남해에 낚시배를 띄워 바다 한 가운데에서 두 사람이 바라본 일몰의 광경에서 부터 전란의 추격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여학생이 숨어있던 바위에서 나와서 바라본 검은 산의 모습들. 자연이 빚은 산하와 인간이 갈군 지경들에서 이미지를 찍어내는 일은 또다른 고역이자 강행군임을 작가는 얘기한다.  
반응형

시인의 이상

문학 Literatur 2010. 12. 1. 20:55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시의 <뉴 프런티어>란 시가 필요없는 곳이다...시 무용론(無用論)은 시인의 최고 혐오인 동시에 최고의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진지한 시인은 언제나 이 양극의 마찰 사이에 몸을 놓고 균형을 취하려고 애를 쓴다. 여기에 정치가에게 허용되지 않는 시인만의 모랄과 프라이드가 있다. 그가 사랑한 것은 <불가능>이다...말하자면 시인이란 선천적인 혁명가인 것이다."(1961.3.'시의 <뉴 프런티어>')

『김수영 전집2 : 산문』(민음사, 2008, 개정판 6쇄), 239면.

"도대체가 시인은 자기의 시를 규정하고 정리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그에게 눈곱재기만 한 플러스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시의 현 시점을 이탈하고 사는 사람이고 또 이탈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다. 어제의 시나 오늘의 시는 그에게는 문제가 안 된다. 그의 모든 관심은 내일의 시에 있다. 그런데 이 내일의 시는 미지(未知)다."(1964.9.'시인의 정신은 미지')

상동, 253면.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촌초(寸秒)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다.ㅣ...술을 마실 때도, 산보를 할 때도, 교섭을 할 때도 무엇을 속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속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그대를 속이고 있다. 그대가 영리한 사람인 경우에는 눈치를 챈다. 나를 신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리한 그대는 내가 속이는 순간만 알고 있고, 내가 속이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대는 내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한 그대를 구출하는 길은 그대가 시인이 되는 길밖에는 없다. 시인은 모든 면에서 백치가 될 수 있지만, 단 하나 시인을 발견하는 일에서만은 백치가 아니다. 시인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다.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밖의 모든 책임을 시인으로부터 경감하라!"(상동)

상동, 255-6면. 

"나쁜 시를 발견하기는 쉽지만 좋은 시를 발견하기란 참 어렵다. 그 시와 같이 살 수 있는 순간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시를 쓰기도 어렵지만 시의 독자가 되기는 더 어려운 것 같다. 진정한 시의 독자는 시인이 아니고서는 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피상적으로 시의 독자가 있느니 없는니 말할 수도 없고, 시의 독자가 없다고 비관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1964.10.'생활현실과 시')

상동, 268면.
반응형

김수영 산문집

문학 Literatur 2010. 11. 23. 10:54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김수영의 전집 2편인 산문집을 읽고 있는데, 시보다 재미있는 글같다. 생활인의 감각과 잡기 뿐만 아니라 문학판에 보폭이 넓던 김수영에게 비추인 동시대 문인들에 평가도 볼 만하다.  그 당시 이미 고인이 된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을  현대어 감각을 상실한 인간으로 몰아붙이는 산문의 말미에 그에 대한 치기어린 우정도 보인다. 이어령과의 지상논전은 요즘세대의 댓글논쟁에 못지 않다. 젊은이들이 종로 뒷골목에서 값싼 술을 마시며 문학과 세상을 논하지 않는 세태는 잘못된 것이라며 동네 술친구와 노닥거리는 그는 마치 친근한 40대 동네 아저씨의 풍모를 보이지만, 몹시 피로해 보인다. 시대의 폭정에 짓눌렸고 글쓰는 생활의 폭압에 시달리며 돈안되는 양계나 날림 번역의 유혹도 넘나드는 시인에게 시는 세파를 가르는 닻이었나.    
반응형

늦은 가을 볕 때문에

문학 Literatur 2010. 11. 20. 22:24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2008년판 김수영 시 전집을 마져 다 읽었다.  이 사람의 시가 이 사람 삶의 응축판이 될 수 있다면, 아무리 따스한 주말의 오후 햇살이라고 해도 이렇게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건지 의아한 점이 없지 않지만, 최소한 시인이 남긴 말자취만은, 비록 중간 졸기는 했지만 일단 쫏았다고 밖에 더 할 말이 없을 듯 싶다. 특히 '나가타 겐지로'에서 집중적으로 졸음이 쏟아져 여닐곱 번은 시집을 다시 뒤적였다. 

시를 쓴다는 일은 쉽지 않다. 김수영도 중간 중간에 시를 쓰는 생활의 핍박을 통로한다. 쓰기 어려운 시만큼 이해하기 힘들고, 쉽게 쓰여진 시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 후>의 막판에서 다이스케의 형은 부정을 일으킨 다이스케를 몰아붙이여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은 위험하다"고 했다.
 
웬지 그 시대, 군사정권의 발끈기에  그가 위험한 인물로 몰린건 아닌건지,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이 지금 불현듯 생소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