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일섭과 하버마스의 서신 2 : 『의사소통행위이론2 :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 중 V장 <미드와 뒤르켐에서의 패러다임 전환>
*이 글은 가상의 서신이며 텍스트 소개를 주목적으로 합니다. 인용된 텍스트의 쪽수는 문장 끝의 [ ] 안에 수자로 표기하며, 직접 인용한 텍스트의 문장은 ‘ ’사이로 넣습니다. 또한 『의사소통행위이론 1권』은 [1권, ] 으로 표기하며, 다른 인용문헌도 [ ] 로 표기합니다. **주텍스트 : 위르겐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 2, 장춘익 역(나남, 2006). ***원문 대조본 : Jürgen Habermas,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band 2 Zur Kritik der funktionalistischen Vernunft (Suhrkamp, 1982).
루카치 (2013.08.17.月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편지가 많이 늦었다. 1차 서신을 마친 후,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중 1967년 저자 서론을 지난 6월에 읽었다. 자신의 40여 년 전의 논문집을 유토피아적 관념론이라고 스스로 비판하는 루카치에 대해, 당신은 물화 개념을 통해 재차 비판을 가했다. 루카치와 아도르노는 미학을 포함한 사회철학적 주제의식의 공통성과 서술 방식의 복잡성에서 유사하기도 하지만, 아도르노는 루카치를 의식철학의 유산을 극복하지 못한 실패한 이론가로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 비판을 당신은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루카치는 당신들처럼 단지 이론의 전당에서 현실을 관찰하며 관조만 했던 인물이 아니다. 그는 국내적이며 국제적인 혁명의 과정에 깊이 개입하면서도 이론과 현실 해석을 통합하려고 했던, 비록 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을 지라도, 실천을 사유로 매개하려고 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성명이나 발표하고 각종 상을 수상하며 한가한 노년을 보내는 당신과는 첨예하게 다른 역사적 조건에서 분투했던 인물이다. 미국으로 망명해 천박한 대중문화에 아연실색하며 비판에 급급해 있던 비판이론가들과도. 당신이 루카치에게 가한 비판이 과연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 언제 기회가 되면 좀 더 면밀히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여기서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역사와 계급의식』에 관한 루카치 자신의 1967년 자아비판이 아도르노에겐 읽히지 않았을지라도, 분명 당신은 접했을 것인데, 이를 알면서도 재차 비판을 가하는 것은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하버마스가 참고한 루카치 전집 2권 『역사와 계급의식』의 출판 연도는 1968년임).
지난 4월 9일 편지의 말미에서 당신은 사회합리화의 문제를 의사소통행위의 개념과 조절매체를 통한 체계형성의 개념으로 전개하기에 앞서, 이 기본개념들을 미드와 뒤르켐의 이론에서 재구성해 보자고 했다. 이들에게서 이론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하는 이유와 앞으로의 논의 방향에 대해 설명해 달라.
이론의 유통기한(2013년 08월 17일 : 하버마스가 구일섭에게)
오랜만에 반가운 편지를 기대했는데 초반부터 너무 거칠게 나온다. 이렇게 해서 앞으로 서신교환이 유지될 수 있겠나? 최소한 루카치에 대한 나의 비판을 충분히 음미하려면 그의 주저를 모두 읽는 것이 정당하나 권하지는 않는다. 사실 나도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집필하면서 직접 참조한 루카치의 저서는 『역사와 계급의식』 달랑 한 권이다. 이론적 유통기한이 소실된 그런 고전을 읽기 보다는 차라리 루만을 빨리 읽어라.
미드의 이상적 의사소통공동체에 맞춘 행위이론은, 헤겔의 영향권 아래서 부정의 변증법의 방식으로 풍뎅이처럼 맴돌기만 하는 아도르노의 화해와 자유의 이념을,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념을 통해 전개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저 이상적 공동체는 온전한 상호주관성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데, 이를 통해 개인들 사이의 비강압적 상호이해가 가능하며, 비강압적 자기 이해를 도모하는 개인 정체성이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한계 또한 분명한데, 내부적인 생활세계의 상징적 재생산이라면 몰라도 ‘전체 사회의 재생산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조건으로부터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다.’[16]
V장은, 규범에 의해 규제되고 언어의 의해 매개되는 상호작용을, 미드가 몸짓처럼 본능적인 상호작용에서 출발하여 신호언어적 상호작용과 상징에 의해 매개되는 상호작용이라는 개념 틀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런데 상징에 의해 매개되는 상호작용이 규범에 따라 수행되는 상호작용으로 이행할 때 빈틈이 생기는데, 이 빈틈을 뒤르켐의 사회연대이론이 보충한다. 이것은 사회적 연대가 신성한 것, 곧 의례를 기반으로 보호 및 관리된다는 가정이다. 여기서 의례로 확보된 규범적 기본 동의가 언어화된다면, 분화된 상징적 구조를 갖는 합리화된 생활세계의 개념을 얻을 수 있다[16]. V장의 세부 목차는 다음과 같다.
V.미드와 뒤르켐에서의 패러다임 전환 : 목적활동에서 의사소통행위로
예비고찰
1.의사소통이론을 통한 사회과학의 정초
1)미드의 의사소통이론의 문제설정
2)인간 이전의 몸짓언어로부터 상징을 통해 매개되는 상호작용으로의 이행 : 타자태도 취하기
3)부연고찰 : 미드의 의미이론을 규칙준수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가지고 정교화하기
4)상징에 의해 매개되는 상호작용으로부터 규범에 따라 수행되는 상호작용(역할행위)으로의 이행
5)사회세계와 주관세계의 상보적 구성
(1)명제와 사물지각
(2)규범과 역할행위
(3)정체성과 욕구성향
2.신성한 것의 권위와 의사소통행위의 규범적 배경
1)도덕의 신성숭배적 뿌리에 관한 뒤르켐의 고찰
2)뒤르켐 이론의 약점
3)부연고찰 : 의사소통행위의 세 가지 뿌리
(1)명제적 요소
(2)표출적 요소
(3)발화수반적 요소
(4)이해지향적 행위의 성찰적 형태와 성찰적 자기관계
3.신성한 것의 언어화가 갖는 합리적 구조
1)법 발달과 사회통합 형식의 변화
(1)계약의 비계약적 토대
(2)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
2)완전히 통합된 사회라는 가상적인 극단의 경우를 예로 하여 살펴본 사회통합형식 변화의 논리
이 책이 단지 새로운 사회이론의 구축만이 아니라 사회의 토대에 관한 전통적 사회학의 주요 이론에 대한 학습도 염두해 두었음을 당신이 서문에서 밝혔듯이[1권, 23], V장은 미드와 뒤르켐의 사회이론이 심층적으로 원용되고 있다. 이 원용의 결론은 첫째, 미드의 의사소통 이론이 갖고 있는 이상주의는 사회의 물적 존립기반(경제, 전쟁수행, 정치권력투쟁 등)을 소홀히 다루었던 반면 둘째, 뒤르켐의 분업이론은 사회체계의 재생산 압박 하에 있는 사회체계의 구조적 분화와 사회적 연대의 형식을 연관시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184]. 여기서 기능주의의 접근법으로 인지되는 체계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체계이론의 선구자인 파슨스와 체계이론의 계승자인 루만에 대한 원용과 비판(VI, VII장)이 예고되고 있다. 특히 루만은 하버마스가 취하는 이런 방식의 이론 재구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루만은 기존의 사회학이 사회의 자기 지시성을 보지 않고 주객의 분리와 이론 자신의 역사적 고정을 통해 대상에 대한 순환관계를 해소해 버렸으며, 이러한 방향에서 사회학의 고전들이 시대를 초월한 텍스트가 되어 버리고, ‘거의 모든 방향의 이론적 노력들이 오늘날 회고와 재구성의 대상’이 되어 버린 현실을 비판한다[루만, 『사회의 사회 1』(새물결, 2012), 33~35]. 이를 통해 루만이 새로운 사회이론으로 모색하는 것은 구성주의적 사회개념으로의 이행인데, 이것은 인간학적, 지역적 사실로부터 사회 개념의 정의를 도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반면, 하버마스가 말하는 이해지향적 의사소통의 규범이나 인권 등은 사회적 성취물이지 규제적 이념이나 커뮤니케이션 개념의 구성요소가 아니라는 것, 곧 루만은 이런 규범으로부터 사회 개념의 정의를 이끌어 내지 않겠다고 말한다[루만, 상동, 53]. 향후 하버마스와 루만의 주저에 관한 교차 독서를 통해 상호 간극과 논쟁 지점을 세밀하게 발굴하도록 하겠다.
여기서 V장의 논의에 대한 전반적 소개는 앞서 제시한 논의방향과 결론, 세부 목차로 대신하고 논점이 될 만한 사안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겠다. 주요 세부 내용에 대한 소개와 비평은 또 다른 형식의 서평에 기약 없이 넘긴다.
당신은 미드가 신호언어를 넘어 행위조정의 사회화에만 주목하며,[49] 상호이해 수단의 분리과정[51], 곧 상호이해의 메카니즘으로서의 언어에 주목하지 않은 점을 비판하면서,[54] 합리적이며 설득적 동의를 구할 수 없는, 책임능력이 없는 행위자로부터의 강제적 동의 탈취를 유추할 수 있는 관점을 내비치고 있다. 해당 문장은 다음과 같다.
‘참여자들이 화행을 하면서 자신들이 발언한 것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한, 그들은 합리적 동기에 따른 동의를 이루고 이를 토대로 그들의 계획 내지 행위를 조정할 수 있다는 기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단순한 명령이나 후환을 가지고 위협하는 경우처럼, 강제력이나 혹은 보상의 제시를 통해 다른 사람의 경험적 동기에 영향을 미칠 필요가 없다. 기본 양상들의 분화와 함께 상호이해의 언어적 매체는 책임능력이 있는 행위자들의 의지를 구속하는 힘을 획득한다. 자아는 타자에게, 양자가 그들의 행위를 타당성 주장에 맞출 수 있게 되면, 이러한 발화수반적 힘을 행사할 수 있다.’[53~54]
이 문장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개념은 ‘책임능력’이다. 책임능력의 유무에 관한 판단이 자의적이라면, 책임능력을 규정짓는 사람의 자의에 따라 책임능력이 없는 것으로 규정된 상대—말로 설득될 수 없는—를 명령이나 위협으로 제압할 가능성이 남게 된다. 이와 유사한 당신의 개념구사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있다. 1998년 유고슬라비아는 코소보 인민 해방군 축출을 명분으로 알바니아계 주민에게 계속적으로 포격을 가해 20만에 이르는 난민을 발생시켰다. 분쟁이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않자 나토의 코소보 공습이 강행됐는데, 이때 독일이 나토의 공습에 참여한 것에 관해 하버마스가 공공적 합의에 기반해 지지한 것을 두고 가라타니 고진은 그러한 공공적 합의가 UN의 결의를 거치지 않고 유럽 내에서만 이루어진 점에서 제한된 합의에 불과하며, 이를 공공적 합의라고 하는 것은 초국가로서의 유럽에 한정된 지역적 합의를 보편성으로 위장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한다.[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6), 183 각주] 나토의 코소보 공습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이를 공공적 합의에 기반한 것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문제다. 당신에게 흔히 제기되는 유럽 중심주의적 인식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당신 스스로가 자신의 이론적 배경과 지향이 서유럽에 한정되어 있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문제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본다. 당신이 무수한 논쟁 지점의 생산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차이의 효과, 비판대상과의 구별을 통한 구별된 이론과 구별짓는 이론의 생산인데, 여기에 당신은 정당성의 힘을 불어넣으려고 한다. 구별짓는 것은 구별당하는 것보다 능동적이지만, 이로부터 차이만 발생할 뿐 정당성은 도출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규범의 종교성(2013년 8월 20일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도덕의 신성숭배에 관한 뒤르켐의 고찰에 대한 평가 이후 당신은 의사소통의 세 가지 기원을 논하는데 그 하나는 명제적 요소로서의 외부자연에 대한 인지적 관계, 두 번째는 표출적 요소로서의 내부자연에 대한 표출적 관계, 세 번째는 발화수반적 요소로서의 종교적 상징사용이다. 세 번째에 대한 서술 중 다음의 문장을 검토해 보자.
‘뒤르켐에 따르면 사회집단은 그들의 사회에 대한 이상화된 상을 설정하지 않고는 집합적 정체성과 결속상태를 안정화할 수 없다. “이상적 사회는 현실 사회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 사회의 일부이다. 이상적 사회와 현실사회는 서로 밀어내는 양극처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한쪽에 속하지 않고는 다른 쪽에도 속할 수 없다.”[Durkheim(1981), 565] 뒤르켐이 신성한 것의 의미를 단서로 해명하는 규범적 합의는 집단구성원들에게는 이상화된, 시공간적 변화를 초월하는 동의의 형식으로 있다. 이것은 모든 타당성 개념에 대한 모델을, 특히 진리의 이념에 대한 모델을 제공한다.[122, 강조는 하버마스]
이 문장에서는 종교적 이상을 보편적 규범으로 전도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신성한 것의 권위가 집합체의 연대를 가능케 했던 것은 도덕이 신성숭배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뒤르켐이 도덕과 신성숭배의 구조적 유사성과 연관성에 주목하여 베버와 마찬가지로 이로부터 세속화된 도덕의 존립기반을 고심하려는 추론에서[90] 하버마스는 고무된다. 그래서 상호작용의 특수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례행위가 의사소통적 방식의 공감형성에 기여하는 점이 부각된다[94~95]. 또한 의례행위에서 발전된 종교적 세계상은 의사소통행위에 연결된다. 이 소통구조에서 상호이해의 과정을 통해 세계상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101]. 하버마스의 이론에서 보이는 보편화의 욕구는 부분적으로는 이와 같이 규범을 종교로부터 세속화된 것으로 보려는 관점에서 유도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종교적 호소와 말의 공통성 : 구속력(2013년 8월 20일 : 하버마스가 구일섭에게)
원론적으로 답하겠다. ‘처음에는 의례를 통해 충족되던 사회통합 및 표출적 기능들이 의사소통행위로 넘어가고, 이때 신성한 것의 권위는 단계적으로 그때그때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합의와 권위에 의해 대체된다. 이것은 의사소통행위가 신성성에 의해 보호되는 규범적 맥락들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신성성 영역의 탈주술화와 탈권세화는 의례를 통해 확보되는 기본적인 규범적 동의가 언어화되는 길을 거쳐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의사소통행위에 들어 있는 합리성의 잠재력이 해방된다. 신성한 것이 발하는 매료와 공포의 아우라, 성스러운 것이 갖는 마력은 비판 가능한 타당성 주장들의 구속력으로 고양되고 동시에 일상화된다.'[132] 결국은 근대사회의 토의적 의사형성의 장치가 종교적 합의를 대체한다는 뒤르켐의 관점에[139] 주목하기를 바란다. 비록 근대적 사적 계약의 구속력이 정치적 의사형성을 통해 정당화된 법체계에 기초한 합법성에서 나올지라도, 뒤르켐이 종교적 형식의 다짐을 하는 조건에서 말의 구속력을 찾는 바처럼, ’구속력 있는 합의를 산출하는 것은 시민들의 의사소통공동체가 이루어내는 상호이해, 그들의 말 자체이다.‘[140]
개인화에 따른 자율성이 개인의 노력을 통해 협동하는 유기적 연대를 특징짓는 부분에 관해 뒤르켐의 설명은 취약하나, 그는 사회가 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 이행함에 따라 보편주의적 도덕으로 나가는 경향성을 본다[144]. 뒤르켐은 ‘집합의식이 점점 더 개인숭배로 축소된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환절적(segmentär) 사회에 비해 조직된 사회의 도덕을 특징짓는 것은 좀더 인간적인, 따라서 좀더 합리적인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도덕은 우리를 분명 우리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에 구속시켜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지 못할 만큼 속박할 필요까지는 없다.’[Durkeim(1977), 330]고 말한다.[144~145] 뒤르켐에게서 보이는 역사철학적 함정과 사회과학적 기술의 혼재, 선언적으로 그칠 뿐 그 충족조건이 그에게서 분명하게 의식되지 않는 합리화의 발달과정은 그의 도덕주의를 그의 실증주의에 대한 하나의 역설로 만들어 버렸으나, 루만이 뒤르켐에게 제기한 도덕주의라는 비난은 부당하다. ‘이런 비난은 “규범에서 자유로운 사회성”이라는 분석적 차원을 겨냥함으로써 뒤르켐의 문제설정을 무력화시키는 연구전략의 전제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145~146] 사회통합 형식의 변화에 관한 뒤르켐의 기술은 합리화 과정에 대한 지표로서 정당하다[146].
‘근대적 과학과 도덕이 무제한의 토론을 통하여 확보된 객관성과 공정성이라는 이상을 따른다면, 근대적 예술은 탈중심화되고 인식과 행위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아가 자기 자신과 갖는 무제한의 교류라는 주관주의의 이상을 통해 규정된다. 그런데 신성한 영역이 사회에서 본질적 부분을 차지했다고 할 때, 그 부분에 관한 한 과학도 예술도 종교의 상속자가 되지 못한다. 이 측면에서는 토의윤리로 전개되고, 의사소통적으로 유동화된 도덕만이 신성한 것의 권위를 대체할 수 있다. 이런 도덕 안에 규범적인 것의 원시적 핵이 용해되어 있고, 이런 도덕과 함께 규범적 타당성의 합리적 의미가 펼쳐진다…도덕에는 아직 신성한 원초의 힘들이 가졌던 관통력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154]
도덕의 한계(2013년 8월 20일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바로 위와 같은 당신의 서술이 토의윤리를 신성성의 유일한 상속자로 보려는 의도를 그대로 노출시킨다. 도덕에는 종교적 신비의 아우라가 감돌고 있으며, 이 원시적 힘에 여전히 당신이 즐겨 말하는 도덕적 정당성의 원천이 있다. 그리고 저 인용문에는 당신과 대결구도에 있는 정쟁 이론을 예술로 격하시키고 주변화시키려는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 물론 규범만을 가지고 하나의 온전한 사회이론을 전개시킬 수 없다는 한계를 당신은 잘 알고 있으며, 뒤르켐의 분업이론에 대한 검토로 시작하는 체계와 생활세계에 관한 VI장의 중간고찰에서 비로서 당신은 사회의 물적 토대에 관한 논의를 펼친다. 여기서부터 좀더 생산적이고 흥미로운 논쟁지점이 발굴될 것으로 기대된다.
약한 도덕(2013년 8월 21일 : 하버마스가 구일섭에게)
당신이 도덕에 관한 논쟁을 서둘러 회피하려는 전술에 나는 동의하지만, 도덕에 관한 해명, 더 나아가 이 해석의 보편성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일은 철학자의 몫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비교적 협의의, 약한 의미의 도덕 개념을 선호하는데, 약한 의미의 도덕은 근거에 기초해 결정할 수 있는 실질적 문제와 관련되며, 합의에 의해 해결을 모색할 수 있는 갈등상황에 관련된다. 여기서 더 나아간 문제에 대해선 도덕에게 기대서는 안되며, 사회이론에 맡겨야 한다. 하지만 사회이론이라 할지라도, 현존 생활양식에 대한 비판을 가할 수 있으나 대안적 생활양식의 미래 투사를 본업으로 삼는 것은 권한 밖의 일이다. 미래의 해방된 생활양식에 대한 조건을 제시하는 선까지 비판적 사회이론은 자기이해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며, 사회의 진보적 자기실현은 ‘정치적 투쟁과 사회운동, 그리고 개혁적 주변집단들의 선구자적 역할이 선행되어야만 가능하다.’[하버마스, 『새로운 불투명성』(문예, 1996), 258~27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