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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09 제 2 유추에서 인과법칙
  2. 2009.12.07 지능의 평등
  3. 2009.12.06 맹자
  4. 2009.12.03 자코토 : 열등과 우등의 구분을 본질로 하는 교육신화의 붕괴
  5. 2009.11.26 정권과 생활세계

제 2 유추에서 인과법칙

칸트 Kant 2009. 12. 9. 15:2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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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분석론>은 우리의 모든 선천적 인식이란 순수한 오성자신의 능력, 곧 개념을 이용한 인식으로 이루어짐을 증명하려는 논의이며, 여기서 제시되는 오성의 4가지 원칙은 모든 자연법칙이 예외없이 종속하는 것이다(B198). 이때 원칙이란 종합적 판단의 최상원칙을 말하는데, 이들 원칙은 12범주를 4가지 판단형식으로 묶은 것으로 분량, 성질, 관계, 양상을 지시한다. 이중 분량과 성질에 관한 논의는 각각 ‘직관의 공리’와 ‘지각의 예료’에서 다뤄지며, 관계에 관한 논의는 ‘경험의 유추’에서, 양상에 관한 논의는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에서 다뤄진다. 여기서 유추란 힘의 표출로부터 비롯되는 역학적 관계를 다루는 것을 의미하며(주1)
, 이중 제 2의 유추에서 다뤄지는 인과율에 관한 논의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면서도(주2), 많은 주석가들로부터 다양한 해석을 촉발시키는 논란의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는 제 2 유추의 다양한 해석에 관한 부분은 생략하고(주3), 원전에 기반해 제 2유추에서 논의되는 인과율의 의미에 관해 다루는 것으로 제한한다.

제 2 유추에서 칸트가 제시한 인과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초판의 ‘산출의 원칙’ : "발생하는(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것은, 그것이 규칙에 따라 후속하는 것을 전제한다."(A189)

재판의 ‘인과의 법칙에 따른 시간적 후속의 법칙' : "모든 변화는 원인과 결과의 결합법칙에 따라 발생한다."(B232)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있는 초판과 재판의 원칙을 간단히 결합시킨다면, 발생하는 모든 것은 시간적 후속에 의한 인과의 법칙에 따른다고 제시할 수 있다. 여기서 시간적 후속이란 시간의 경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가 동일한 시간에 존재할 수 있는 사건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의 경과가 아니라 시간의 순서, 곧 역학적 선후로 이해해야 한다(B248-249). 왜냐하면, 칸트가 예를 드는 바처럼, 실내의 온기가 따뜻해지는 것이 난로 때문이라고 해도, 원인으로 간주되는 난로의 등장과 결과로서 간주되는 실내의 온기상승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원인을 일으킨 실체로서의 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원인과 결과의 선후관계, 즉 그 필연적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간순서의 규정, 곧 필연적 관계의 규정은 지각의 대상인 사건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지각하는 주관에 있는 것인가? 칸트에 따르면 시간의 순서가 사건에 있냐는 물음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건 자체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감을 거쳐 수용된 현상으로서의 사건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관에 있는 것인가?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시간의 후속에 대한 결정은 현상들의 개별 위치를 연속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오성의 선천적 조건에 기인한다(B210). 이러한 선천적 조건에 의해 비로서 타당한 경험적 판단이 가능하며, 여기서 타당성이라는 진리검증은 바로 인과관계의 규명에서 완료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성의 중차대한 능력은 바로 대상 일반의 표상을 가능케 하는 것이고, 이러한 표상은 바로 시간순서의 부여에 의한 인과관계의 규정으로 가능한 것이다.

 “모든 경험을 위해 또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 오성은 필요한 것이다. 오성이 기여하는 첫째의 일은 그것이 대상의 표상을 판명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대상 일반이라는 표상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여를 하는 것은, 오성이 현상에 또 그것의 현존에다 시간 순서를 줌에 의해서다. 왜냐하면 오성은 선행현상에 관계해서, 결과로서의 각 현상에 선천적으로 규정된 시간상의 위치를 승인하기 때문이다. 위치 없이는 현상은, 그것의 모든 부분들의 위치를 선천적으로 규정하는 시간 자신과 합치하지 않을 것이다.”(B244-245)(주4)

인과법칙을 주관적 심리의 연상물로 축소시킨 흄의 회의론에 대해 칸트의 인과론은 타당한 반격인가? 인과를 규정하는 오성의 능력도 주관에 있음으로 해서, 역시 주관적 심리로 격하될 위험은 없는가? 그러나 칸트의 주관은 직관의 선천적 형식인 내감, 아직은 순수하지 않은 종합 일반인 구상력, 선험적 통각이라는 삼중의 과정을 거쳐 선험적 종합판단을 수행하는(B197) 논리적 기관이지 심리적 구성물이 아니다. 즉 인과율은 오성이 대상에 부여하는 선험적 능력이다.(주5)


각주
1)유추의 의미에 관해서는 박정하, “칸트의 인과 이론에 대한 연구 : 『순수이성비판』의 ‘제2유추의 원칙’을 중심으로”(서울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p.27-28참조. 참고로 이 논문은 제 2 유추의 해석과 관련해 칸트의 인과론이 개별인과법칙을 문제삼지 않고 보편인과법칙만을 문제삼고 있다는 관점에서 칸트의 인과이론을 세밀히 다루고 있다.

2)칸트에게서 합리론의 독단이라는 선잠을 깨워『순수이성비판』의 작업에 매진케 한 근본적 동인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인과론을 부정한 흄의 『인간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1739)이었다. 이러한 인과론의 부정은 비단 합리론의 위기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과학의 존립 자체를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방어가 필요했으며, 이런 점에서 인과론을 제시하는 제 2 유추론의 위상이 드러난다.

3)제 2 유추론의 해석에 관한 선행연구는 박채옥,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인과성과 자유”(전북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3장에서 다뤄진다. 이 논문에 따르면 제 2 유추의 해석에 관한 논쟁은 벡크, 유잉, 클레베, 브로드, 타카르트, 버드, 스트로슨에서부터, 셀라스, 퍼트남에 이르기까지 폭넓다.

4)칸트, 최재희 역 『순수이성비판』(박영사, 1997), p203-204.

5)능력이라는 말은 오성의 타당한 작용과 아울러 오성의 정당한 권리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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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의 평등

문학 Literatur 2009. 12. 7. 08:5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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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지능이 명사도 만드고 수학 기호도 만든다. 동일한 지능이 기호도 만들고 추론도 한다. 두 종류의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조합하기 위해 의지가 지능에 전달하는 에너지가 더 크냐 작으냐에 따라서 지능의 발현들에 불평등이 있다. 그러나 지적 능력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본성상의 평등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앎의 나라로 가는 모든 여행길을 연다.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더 잘 배우거나 못배우거나, 더 빨리 배우거나 더 늦게 배우거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모든 유식한 스승처럼 소크라테스는 지도하기 위해 질문한다. 하지만 인간을 해방하고자 하는 자는 인간의 방식으로 상대에게 질문해ㅣ야지 식자의 방식으로 질문해서는 안 되며, 지도받기 위해서 질문을 해야지, 지도하기 위해서 질문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학생보다 실제로 많이 알지 못하는 자, 결코 학생보다 앞서 여행을 하지 않은 자, 즉 무지한 스승만이 인간을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

『무지한 스승』, 61, 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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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단상 Vorstelltung 2009. 12. 6. 19:3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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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저물기 전, 산책 겸 운동으로 강변을 나섰다가 마을 도서관 쪽으로 갔다. 월문천에 얼음이 반쯤 얼었는데 남자 아이들이 얼음이 푹푹 꺼지는데도 한 여름처럼 놀고 있다.  도서관의 개가 열람실에 올라가 맹자의 공손추 하편을 읽었다. 창가에 놓인 소파처럼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읽는 게 마치 어릴 때 다녔던 만화가게같다. 만화가게같은 도서관, 이게 요즘 지역 도서관의 콘셉같다.

공손추는 맹자의 제자다. 이 대화편은 공손추와 맹자의 대담이 중심이 아닌데도 공손추라는 편명을 갖추고 있다.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과 같은 맥락일까? 기억에 남는 문장을 몇개 옮겨 본다. 먼저 누구를 연상키는 이런 구절은 어느 시대에나 들어 맞을 것이다.

且古之君子 過則改之 今之君子 過則順之
또한 옛날의 군자는 과실이 있으면 이를 고치나 오늘의 군자는 과실이 있으면 이를 밀어붙인다. 

맹자가 제나라에서 벼슬할 때 노나라에 있는 모친이 돌아가시자 노나라에서 장례를 치루고 돌아왔다. 이때 관 만드는 일을 감독했던 제자 충우가 관이 너무 화사해서 예에 벗어나지 않는냐고 맹자에게 물었다. 맹자는 이렇게 답한다.

君子不以天下儉其親
군자는 천하를 위하여 그 어버이에게 검소하게 하지 않는다.

장례를 정성껏 치루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는 것이다. 역시 유가의 적통다운 구절이다.

맹자가 학수고대했던 제나라 왕과의 알현을 마치고 나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음을 알고 제나라를 떠날 때, 바로 뜨지 않고 제나라 서남쪽에 있는 한 읍에 사흘간 머물렀다. 이를 두고 괜히 밍기적거린다는 비난에 대해 맹자는 사흘간 기다라는 동안 왕이 마음을 바꿔 자신의 발길을 돌릴 기회를 주기 위해서 머물렀다고 응답한다. 그럴듯한 답변이지만, 뭔가 미련이 남아 있는 느낌이다. 기다려주는 의례적 의식이라고 할까? 세상사가 칼로 자르듯 냉혹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런 식의 어중간한 기대심리는 마치 불벼락이 쏟아지는 소돔을 뒤돌아 본 롯의 아내, 즉 소금기둥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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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자는 그가 원하는ㅣ것을 배울 것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배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기술을 가지고 만들어낸 모든 생산물에는 똑같은 지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항상 다른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코토의 인쇄공에게는 정신이 박약한 아들이 한 명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데리고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체념했다. 자코토는 아이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그 뒤에 아이는 훌륭한 석판공이 되었다. 물론 히브리어는 그에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다. 재능을 더 타고났고, 더 지도받은 지능들이 영원히 알지 못할 것-그것은 히브리어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을 알게 된 것 말고는.
  상황은 명확했다. 그것은 인민을 지도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빈자들에게 알려야 할 혜택이었다. 빈자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것을 알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자코토는 그 일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ㅣ 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고, 가난하고 무지한 가장도 스스로 해방되기만 하면 설명해주는 어떤 스승의 도움 없이도 자기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이 보편적 가르침의 수단을 일러주었다. 무언가를 배우라, 그리고 그것을 이 ㅣ 원리,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과 연결하라.
  루뱅에서, 브뤼셀에서 그리고 헤이그에서 사람들은 감동했다...리우 데 자네이루까지 소문이 퍼졌다. 몇 년 동안 논쟁이 거세게 일었다. 앎의 공화국은 그 토대부터 흔들렸다.
  이 모든 것은 분별있는 사람이자 학자요, 덕망 있는 가장이었던 자가 네덜란드어를 알지 못해 미치광이가 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다."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양창렬 역(궁리, 2008), p.39-42.
원본 : Jacques Rancière,  Le Maître Ignorant . Cinq leçons sur l'émancipation intellectuelle, Librairie Arthème Fayard,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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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과 생활세계

주장 Behauptung 2009. 11. 26. 14:3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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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해 거의 무감각해져 있는데, 어제 저출산대책으로 초등학교 입학연령을 낮추자는 정부안을 보고 어떤 위협을 느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학교에 보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사회에 진출하는게 경제적으로 유용하다는 천박한 논리에, 마치 국민을 가축처럼 사육시키려는 노골적 의도가 드러난다. 닭은 2개월 내, 돼지는 6개월 내, 소는 2년 내에 도살처분 하듯이 국민도 한 살이라도 빨리 학교를 마쳐 빨리 돈벌이 전선에 투입하라는 것인가? 당장 그 시행방안과 유효성도 의문투성이지만 이런 생각으로 정책을 내놓는 그 무식함이 두렵다. 정부재원을 강바닥에 쏫아 붇고 모자라는 교육예산을 이런 방안으로 마련하자는 제안에는 웃음만 나온다. 아이들을 일년 빨리 사회에 몰아넣음으로써 교육비를 절감한다는 발상은 서머타임과 마찬가지다. 아감벤은 주권이란 벌거벗은 생명을 합법과 불법의 틀내에서 자유롭게 조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신체, 그것도 어린 아이의 신체가 생체통제권력의 대상이 된 시대이다. 

반생태적 4대강 사업을 절차를 무시하고 강행하고 정권 유지를 위해 방송을 사유화시키는, 가진건 물리력밖에 없는  이 무지막지한 정권에게 어떤 심판이 기다릴지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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