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의 이면 : 벌거벗은 생명

문학 Literatur 2009. 12. 29. 13:3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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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생활의 참다운 특징이 잔인성이나 불안정성이 아니라 단순히 그 헐벗음, 불결함, 그리고 무관심이란 사실이 그를 놀라게 했다.

『1984년』, 79.

순결과 정치적 교조와는 직접적이고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강력한 본능의 힘을 축적하여 그걸 추진력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당이 그 당원에게 요구하는 공포와 증오, 광적 맹신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상동,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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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슬로건

문학 Literatur 2009. 12. 22. 18:0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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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1984년』(문예, 1999), 42.

낡은 시대적 유물로 인식되었던 이 고전은 MB정권이라는 현실에 대해 매우 시사적이다. 따라서 정권을 잡은 자들은 강줄기는 물론 방송도 지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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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문제에 대한 한가지 방안

주장 Behauptung 2009. 12. 21. 17:3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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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제기되는 번역에 대한 볼멘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린다. 오역을 정당화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옮겨주는 자의 수고없이 원문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다만 그 부실을 최소화하려는 열의와 결백을 바랄 뿐이다. 

어제부터 김병익이 번역한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보고 있는데 억지스러운 한자어 번역이 눈에 띈다. Big Brother를 대형(大兄)으로, INGSOC(Englnad Socialism)을 영사(영국 사회주의)로 옮기는 번역엔 창의성은 없지만 사기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제대로 된 한국말을 창안할 수 없다면 이런 불편한 번역이 오히려 안전한 것이다. 더욱 안전을 기하려고 한다면, 대역문고처럼 역문과 원문을 일일히 대조한 책을 출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어느 정도 해당언어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바로 일일히 대조할 수 있도록 한다면, 제멋대로 의역하거나 적당히 무지를 감추는 행태는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이라는 사실에 기반해 번역이라는 상상이 활개를 치면서도 비약하지 않는 적정선을 지키는 것, 그것은 원문대조 방식의 출판에서 기대할 수 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전자북이 보편화된다면 더욱 손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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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실천이성비판』 서문에서, 도덕법칙의 연역이 불필요한 외적 조건은, 이성의 실천적 사용이 이성의 이론적 사용과는 달리 당장의 행위를 위해 요구되는 조건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A7)(주1)
. 여기서 이론이성과 구분되는 실천이성의 극명한 차이는 행위에서 드러나는 데, 이것은 이론이성에서는 문제이었던 것이 실천이성에서는 확정된다는 것이다(A7). 즉, 칸트는 가상적인 그의 논적들에게 이론이성으로 신의 존재, 자유,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식의 반어적 어법으로 자문하는데, 이러한 이념들은 도덕적 사용에서 정초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확정적 응답이다(A7).

칸트에게서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이 각각 대상으로 삼는 자연세계와 도덕세계는 구분되면서도 양립가능하다고 할 때, 이 ‘양립’의 구체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판단력비판』에서 동일한 상태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초월적 의미의 취미판단 논의와도 상관있지만 다른 맥락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자유에 의한 근본원인의 규정은 오직 도덕세계에서만 가능하지만, 이 도덕의 세계 내에서와 자연의 세계 내에서 공통적으로 추론의 인과계열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양립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최고 존재를 가정하는 권리는 만물의 체계적 연관을 위해 인과성에서 유추한다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밝혔듯이(B728), 범주는 두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논리적 도구상자다. 이러한 추론의 인과성은 칸트의 도덕철학에서도 볼 수 있으며, 그 형식화의 절정은 『도덕형이상학』에서 이루어진다.  

『실천이성비판』의 분석학 1장의 1절 “순수실천 이성원칙들의 연역” 절에서 칸트는 순수이성이 경험으로부터 독립해 의지를 규정하는 실천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것도[경험으로부터 독립한 순수이성의 의지 규정], 우리에게 있어서 순수 이성이 실천적임을 입증하는 사실에 의거해서, 즉 의지를 행위로 규정하는 윤리성의 원칙 안에 있는 자율에 의거해서 말이다.-또 분석학이 동시에 제시하는 바는, 이 사실은 의지의 자유와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아니 의지의 자유와 한가지이며, 그럼으로써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감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는, 다른 작용하는 원인들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인과법칙에 종속함을 인식하되, 그럼에도 실천적인 일에 있어서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곧 존재자 그 자체로서는, 사물들의 예지적 질서에서 규정되는 그의 현존재를 의식하고, 그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특수한 직관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인과성을 감성세계에서 규정할 수 있는 역학적 법칙들에 의거해 그러하다는 것이다.”(A72, 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주2)  

여기서 순수 예지계의 근본법칙인 순수한 실천이성의 자율은 비록 경험적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만(그렇지 않다면 타율이 되므로), ‘감성세계의 법칙을 깨뜨림 없이, 실존해야 할 도덕법칙’으로 칸트는 규정한다(A74-75). 이 절에서 나아가 칸트는, 실천이성 최상의 원칙의 연역에 관해, 그 객관적 실재성과 관련해서는 그 확실성을 포기하지만, 능력의 연역 원리로 쓰인다고 말하면서, 도덕법칙이 사실상 ‘자유에 의한 인과법칙’임을 천명하며, 이 법칙에 의해 초감성적 자연이 가능함을 말한다(A82-83)(주3). 

같은 장의 제 2절 ‘실천적 사용에서 순수이성의 권한’에서 칸트는 감성세계 너머에 인과성의 법칙을 세우는 일이 어떻게 도덕의 원리에서 가능한지 묻는다(A95). 이 물음은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과 관련해서만 연역할 수 있었던 인과성과 같은 개념의 실재성이 도덕적 사용의 대상인 예지체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칸트는 그러한 사용이 전혀 무리가 아니라고 말한다(A95). 왜냐하면 인과성의 개념은 대상과 대상을 규정하는 실체성의 범주가 아니라 대상과 대상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관계성의 범주이므로 이미 감관의 대상에 적용되기 이전에(논리적 선행), 오성에 그 자리가 마련된 것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A95). 달리 말해 인과성의 개념은 경험적 대상에 적용되는 것이나, 경험적 대상이 없더라도 가능한 오성의 순수한 선험적 능력이다. 그런데 왜 능력인가? 

이론적 인식에서 오성은 대상과 관련을 맺고 있는 한편, 순전한 실천적 사용과 관련해서 오성은 또한 욕구능력과도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욕구능력을 칸트는 의지라고 지칭하며, 이 의지의 개념에는 자연법칙에 의해서는 규정될 수 없는 원인성의 개념이, 자유의 개념과 함께 함유되어 있다고 말한다(A97). 이 원인성은 그 객관적 실재성을 경험적 직관에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사용에서 정당화된다. 즉 원인이라는 개념은 『순수이성비판』상 범주의 선험적 연역에서 대상 일반과 관련하여 제시되기도 하지만, 이 개념은 원래 순수 오성에서 생겨난 것으로 ‘근원상 일체의 감성적 조건들로부터 독립적’이므로 ‘순수예지 존재자로서의 사물들에’(auf Dinge als reine Verstandeswesen) 적용된다(A97). 칸트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자의 개념을 ‘예지원인’(causa noumenon)이라고 하는데(A97), 이 개념은 이 개념의 실재성을 규정하는 도덕법칙과 관련해서만, 즉 실천적으로만 사용할 권한을 갖고 있다고 칸트는 말한다(A98). 여기서 객관적 실재성이란 비록 이 개념에 맞는 직관은 없더라도 우리 마음의 준칙에서 드러나는 바처럼, 현실적 적용을 할 수 있음을 말하며, 바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 개념이 예지체(Noumenen)(주4)와 관련해서 충분한 권리(Berechtigung)를 보유하는 점이 도출된다(A99). 즉 순수 오성의 개념(인과성 외에 다른 오성의 범주들도 포함해서)이 실천적인 것과 관련해 그 객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권한(Befugnis)으로 정당화된다. 칸트가 이 절의 마지막에 드는 바처럼, 신의 존재를 유추(Analogie)에 의해 이끌어내어 가정하는 권한은 오직 도덕적 사용과 관련해서 의미가 있지, 그 이상으로 신의 존재를 인식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성의 월권이다.


각주

1)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텍스트는 백종현의 번역본(아카넷, 2002)에 의존했으며, 부분적으로 Weischedel판 Kant Werke Band 6 을 참고했다.

2)칸트, 백종현 역『실천이성비판』(아카넷, 2002), p.108-109.

3)자유에 의한 도덕 법칙의 인과성은 칸트의 법철학에서 더욱 분명히 제시된다. 도덕법칙의 직접적 적용을 받지 않더라도 법개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의 외적 사실 행위의 관계에서, 의지와 사실행위 간에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행위자의 내적 마음의 동기와 상관없이 법개념의 외적 사실 행위의 관계는 무력해 진다. 칸트는 한 발 더 나아가, 법의 대상인 권리관계의 규명에 있어 수학적 엄밀성까지 지향하는데, 이는 불분명한 권리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피하기 위함이다(이충진, 『이성과 권리』2.법칙과 권리(철학과 현실사, 2000), p.60-61, 72참조).

4)Noumenen은 기존에는 가상체로 옮겨 왔다고 하나, ‘예지[오성]적으로 생각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백종현은 Noumenen을 예지체로 옮겼다.(칸트, 백종현 역, 『실천이성비판』, p.42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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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증거

책들 Bücher 2009. 12. 18. 09:0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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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중) : 타인의 증거』, 용경식 역(까치, 2009). 

5~6년 전에 이 시리즈의 상편과 하편만 보았었는데, 지난 주말 우연히 마을 도서관에서 중편을 발견해 읽었다. 그때 서점에서 중편은 절판되었다시피 자취를 감췄는데, 중편의 판쇄를 보니  10번 찍혔다. 상편에 비해 분위기가 무겁지만 하편에 비하면 가벼운 편이고, 담담하면서도 자극적인 표현과 잔혹스러움이 부곽된다. 하편은 이 시리즈와 무관하나 상편과 중편은 연결된 스토리로 봐도 좋겠지만, 별개로 보더라도 큰 무리는 없을듯 하다. 

전란의 참상이 사회적 기형을 초래하는 것을 루카스, 야스민, 마티아스, 클라라라는 독특한 캐릭터로 제시된다. 이국의 누나집으로 간 빅토르의 편지는 또다른 비극적 소품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루카스는 사라지고 그의 유품은 그의 형제 클라우스에게 남겨진다. 형제의 유품, 특히 방대한 노트를 호텔에서 밤새 읽은 클라우스는 40여년간의 세월의 간격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한다. 빅토르는 살인죄로 사형판결이 처해지자, 왜 사회는 자신과 같은 범죄자가 책을 내어 사회에 기여하도록 기회를 주기 보다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죽은 자로 남겨지게 하는가라고 묻는다. 죽은 자가 세월이 지나도 남기는 것은 뼈와 글이다. 그런데 글이라는 증거는 타인의 존재가 자체가 의심된다고 해도-호적부상 신원확인이 안된다 해도-  거짓말처럼 유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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