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주의 운동 선언 (생태론과 정치 - 1975년)파라노이드
생태주의 운동(에콜로지스트) 선언
번역: 유인환
1. 생태학적 리얼리즘
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생명력을 잃었다. 이와 형제처럼 닮은 성장을 추구하는 사회주의도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의 왜곡된 과거의 모습을 눈앞에 보여주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분석의 도구로서는 변함없이 유일무이한 것이지만, 그 예언적 가치는 상실되었다. 노동자 계급에 채워진 족쇄를 끊어버리고 그들에게 보편적 자유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생산력의 발전은 이제 근로자로부터 마지막으로 남은 주권의 하나까지 박탈하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의 분열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며, 생산자가 지닌 권력의 물질적/실존적 기초를 파괴해 버렸다. 만인에게 풍부함과 만족감을 보증해야 할 경제성장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성공하기에 앞서 욕구를 증대시켰고, 단지 경제적 문제 만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일련의 문제에 있어서 막다른 골목에 봉착해 있다. 그리고 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단지 그것이 자본주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성장에 전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 하나 하나에 대해 온갖 종류의 미봉책을 생각해 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위기의 색다른 점은, 그러한 위기 극복을 위한 부분적이고 연속적인 해결책을 낼 때마다 위기는 뒤로 미뤄질 뿐 한층 심화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현재의 위기가 고전적인 과잉축적의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마르크스주의자가 예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양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운위되어 온 ‘사회주의’도 이 새로운 양상에 대해서는 해답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 즉 경제과정 자체에 대한 개인과 개인간의 위기, 노동의 위기, 자연/자신의 육체/이성(異性)/사회/아동/역사와의 관계의 위기, 도시생활/주택문제/의료/학교 및 과학의 위기 등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현재의 우리의 생활양식에는 미래가 없다. 우리가 지금부터 낳는 자식들이 장년에 도달할 때에는 알루미늄도 석유도 이미 바닥나 버릴 것이고, 현재의 원자력 계획이 실현된다면 매장된 우라늄도 모두 고갈돼 버릴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세계가 종말을 고하려 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만일 우리가 종래 해 오던 대로 생활을 계속한다면, 바다도 강도 황폐해지고, 토지는 자연의 비옥함을 잃을 것이며, 도시의 공기는 숨쉬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화학적인 조건의 조성과 유전학적 프로그램화에 의해 생물학기술자가 특별히 만들어 낸 인간, 즉 새로운 생태계에 기초한 실험용 우리 속의 생활에 적응할 새로운 인류의 선택된 표본만이 이 세계에 살아남을 수 있는 특권을 향유하게 될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산업화 사회는 수천만 년에 걸쳐 이루어진 자연의 축적물을 지난 150년동안 가속적으로 약탈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해 왔다. 게다가 최근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자들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자와 마르크스주의자를 가릴 것 없이 매우 장기적인 미래의 문제들, 즉 지구라는 행성의 문제, 생물권의 문제, 문명의 문제들을 ‘퇴행적’ 내지는 ‘반동적’인 문제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죽을 것임에 틀림없다.” 경제학자의 시간적 지평은 다가오는 10년 내지 20년을 넘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케인즈는 경구로서 이렇게 말했다. “‘과학’이 새로운 길을 발견해 낼 것이며 기술자는 오늘날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새로운 방법을 발견할 것이라고 우리는 보증 받아왔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에 의해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모든 생산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 행성의 유한한 자원의 차용과, 복잡한 균형으로 이루어지는 취약한 생태계 내부의 교환에 의존하고 있다는 발견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자연을 신화화하자는 것은 아니며 또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인간의 활동은 자연 속에서 그 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 한계를 무시하면 당장 자연의 보복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면한 자연의 보복은 새로운 질병, 새로운 불만, 적응하지 못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이들, 평균수명의 저하, 물질적 생산성과 경제적 수익성의 저하, 소비수준이 증가하는데도 떨어지기만 하는 생활의 질 등과 같이 은밀하면서도 아직 잘 이해되지 않는 형태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경제학자의 답변은 지금까지의 경우, 이 현상은 본질적으로 자연과의 긴밀한 관계들 - 경제활동의 제 1조건은 이 조건들 속에서 추가되는 것이지만 - 이 처한 위기의 징후로서 파악하는 사람들을 유토피아주의자 또는 무책임한 자로서 가차 없이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가장 선진적인 경제정책이라는 것조차도 물질적 소비의 제로성장을 고려하는 데 그쳤다. 단지 한 사람의 양식 있는 경제학자, 니콜라스 조제스코-로겐(Nicholas Georgesco-Roegen)만이 유한한 자원의 소비가 일정한 수준으로 억제된 경우에도 결국 자원을 완전히 탕진하는 것이 불가피하며, 따라서 문제는 소비의 증가 추세를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덜 소비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래의 후손을 위해 자연의 축적물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이것 이외의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생태학적 리얼리즘이다. 보통 이에 대해서, 성장의 정지와 마이너스 성장은 불평등을 유지 내지 심화시키며, 가장 가난한 자들의 물질적 조건을 악화시킨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성장이 불평등을 소멸시킨다는 것은 무슨 근거에서 나온 말일까? 통계수치는 그 반대를 가리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통계는 자본주의 국가들에만 적용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 한층 나은 ‘사회정의’가 이룩될 것이라고 강조하는 반론이 성립될 수 있을까? 그러나 사회주의의 경우에 있어서도 도대체 왜 끊임없이 보다 많이 생산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하여 생활조건과 생활수준의 개선을 꾀할 수 없단 말인가? 사용 가능한 자원을 보다 잘 이용하고, 획일적인 대량생산 방식을 지양하며, 낭비를 그치게 하는 등의 수단을 사용하여 생활조건과 생활수준의 개선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모든 사람이 손에 넣을 수 없을 정도로 값비싼 물건과, 많은 사람이 사용하게 되면 이전보다는 해악이 더 클 정도로 자리를 차지하는 물건2 혹은 오염을 초래하는 물건들이 사회적으로 생산되지 않도록 유의할 수는 없단 말인가?
좌파이면서도 성장을 수반치 않는 공정함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이런 각도에서 접근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자본주의 문명, 부르주아적 생활양식과 부르주아적 소비모델을 상이한 수단으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증명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지적인 부르주아 쪽이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영향을 고려하여 이러한 자본주의적/부르주아적인 것에 정면으로 등을 돌린다.) 오늘날 마이너스 성장에 의한 충족과 현재의 생활양식의 전복을 주창하는 것만이 몽상은 아니다. 사회적 생산의 성장이 바야흐로 보다 나은 충족 상태를 이룩하도록 할 것이며, 그것이 물질적으로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야말로 백일몽인 것이다.
2. 정치경제학과 생태학- 마르크스와 일리치
특수한 학문 분야로서의 정치경제학은 가족에게도, 그리고 개인들 간의 협력양식과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을 전원 일치로 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공동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정치경제학은 협력과 상호작용이 중단되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요컨대 정치경제학은 ‘사회적 생산’과 더불어 서만 시작되는 것이다. 사회적 생산은 노동의 ‘사회적’분업에 근거하며, 개인들의 의지나 의식의 ‘외적인’ 메커니즘, 즉 시장 메커니즘 혹은 국가계획이라는 메커니즘(혹은 양자가 결합한 것)에 의해 조정된다.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 즉 경제학의 추론 소재가 되는 추상적 개인은 그가 생산하는 물건을 소비하지 않으며, 소비하는 물건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그는 질과 유용성과 즐거움, 미와 행복, 자유와 도덕의 문제를 스스로 제기하는 일이 결코 없으며, 단지 교환가치와 유량(流量,flow)3 과 양적 규모와 전체로서의 균형 등의 문제만을 제기한다. 따라서 경제학자는 개인들이 생각하고, 느끼며, 원하는 것에는 구애받지 않는다. 다만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유한한 자원을 가진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들의 활동이 낳은, 그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물질적 과정일 뿐이다.
정치경제학으로부터 도덕을 이끌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이해한 최초의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머리 속에 그렸던 양자택일을 매우 도식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즉, “개인들의 재편성에 성공하여 경제과정을 그들의 공동 의지에 종속시키기 위해, 연합한 생산자의 자발적 협력으로써 노동의 사회적 분업을 대체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들이 분산하여 분열된 채로 머물러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경제과정은 개인들의 목적을 파괴시키기 때문에, 언젠가는 강력한 국가가 외적인 국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개인에게 억지로 협력을 강요하게 될 것이다. 이 협력은 개인들이 고유하게 지녔던 공동의 목적을 실현키 위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의 양자택일이다.
경제활동에 대한 생태학자의 입장은 개인적 혹은 공동체적 활동에 대한 경제학자의 입장과 마찬가지이다. 특수한 학문 분야로서의 생태학은, 주변의 환경에 영속적 혹은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생산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공동체와 민중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천연자원은 무한한 것처럼 보이고, 인간 활동에 미치는 충격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자연을 중요하게 여기려는 배려는 건강하게 살려는 배려와 마찬가지로 민중의 문화 속에 불가분한 요소로 되고 있다. 독립된 학문 분야로서의 생태학이 비로소 출현하는 것은 경제활동이 주위의 환경을 파괴하거나 영속적으로 교란시켜 경제활동 자체의 수행이 위태롭게 되던가 혹은 경제활동의 조건을 현저하게 변화시키는 경우이다. 생태학은 경제활동의 목적에 상반되는 효과와 경제활동의 단순한 지속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효과가 일어나지 않도록, 경제활동이 충족시켜야 할 조건들과 경제활동이 지켜야 할 외적인 한계를 다루는 것이다. 경제학은 개인적 활동이 바람직하지 않은 집단적 결과를 빚을 때 나타나는 외부적 제약을 대상으로 한다.
마찬가지로, 생태학은 경제활동이 주변환경 속에서 예측을 뒤엎는 나쁜 변화를 초래한 때 나타나게 되는 외부적 제약을 대상으로 한다. 경제학이 상호성과 자발적 협력의 영역을 넘는 곳에서 성립하는 것처럼, 생태학은 경제활동과 경제예측의 영역을 넘는 곳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생태학이 경제학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그보다 나은 합리성을 지닌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생태학은 경제학과는 다른 합리성을 지닌다. 즉, 우리가 생태학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경제활동의 유효성의 한계와 경제활동의 경제 외적인 조건들이다. 특히 생태학을 통해 우리는 ‘상대적’인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한 경제적 노력이, 어느 한계를 넘으면, ‘절대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희소성을 낳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생산성은 마이너스로 전화하고, 생산은 무엇을 만들어 내기보다 오히려 파괴로 치닫게 된다. 이러한 역전이 나타나는 것은, 경제활동이 자연의 기본적인 순환의 균형을 교란시키고,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파괴할 때이다.
지금까지 이런 종류의 상황에 대해 경제체제는 항상 생산력의 증대로써 대응해 왔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경제체제는 생산의 증대의 결과로 생긴 희소성에, 생산을 한결 증가시킴으로써 대응코자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체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 점은 나중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이러한 대응에 의해 체제가 필연적으로 희소상태를 심각하게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주행을 쉽게 하는 조치는 어느 한계를 넘을 때 교통체증을 심화시키며, 약의 소비 증가는 특정 질환의 발병률을 낮출지 몰라도 다른 질환을 유발시킴으로써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발병률을 증가시키고 있다. 또한 에너지 소비의 증대는 오염을 낳으며, 그 결과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는 한 이를 제거하기 위해 새로운 에너지의 소비-이 자체가 오염원인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 등을 현재의 체제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반생산성’을 이해하고 공격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합리성과 단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4 생태학의 역할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생태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희소성, 공해, 과밀(過密)과 막다른 골목에 이른 문명에 대한 해결이, 종종 그랬던 것처럼 성장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생산의 제한 내지 감소 속에서 구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생태학은 자연의 축적물을 개발, 이용하기보다 신중하게 절약하는 쪽이, 그리고 자연의 순환에 간섭하기보다는 그것을 유지해 나가는 편이 유리하며 또 ‘생산적’이기도 하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생태학에서 하나의 도덕을 도출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그것을 이해한 최초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머리 속에 그린 양자택일은 도식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재편성에 성공하여 천연자원을 절약하고, 생활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공동체와 개인들의 번영과 주권을 고양시킬 수 있는 한계를 제도화된 생산과 기술에 강요하던가 (이것은 공생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 아니면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한계가 생태학의 전문기사에 의해 중앙부에서 계산되고 계획화되며, 최적의 생활환경을 위해 프로그램화된 생산을 중앙집권적 제도와 하드 테크놀로지(hard technology)에 맡기던가 하는 것이다.
“공생의 세계인가 기술 파시즘인가”하는 선택에서 이미 우리는 절반 이상 후자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5 따라서 생태주의와는 달리 생태학은 독재적 기술 파시즘적인 해결책에 대한 거부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기술 파시즘의 거부는 자연의 균형을 다루는 과학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또 문명과 관계된 선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생태주의는 현대문명과 현대사회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무기로서 생태학을 이용한다. 그러나 생태학은 현존의 체제에 적용되고 있는 기술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도 이용될 수 있다.
3. 생태주의와 자주관리
자연계와 그것의 자율적인 조정에 의한 균형이 전문가와 제도에 의해 계획화된 체제보다 낫다는 것을 거의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숭배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사람의 손에 의한 체제가 어떤 점에서는 자연의 체계보다 유효할 수 있다. 따라서 후자를 선택하는 것은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논리적이다. 또한 그것은 ‘합리적 선택’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보건정책은 이 점에서 특히 현저한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도태는 중앙집권적이 아닌 자기조정(自己調整)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렇지만 자연도태는 의료/병원기구와 같이 점차 효율적으로 되어 가는 중앙으로부터의 간섭에 의해 그 순환이 단절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의료/병원기구의 개입은 그것이 없었으면 생후 수일 혹은 수개월 만에 죽어 버렸을 지도 모를 어린아이들을 살아남게 한다. 그리고 이들의 자식 대에 이르면 그 가운데 더욱 많은 부분에서 장해와 유전병이 보이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생기는 유전 형질의 가속적인 악화를 이유로, 유전학자들은 이미 정부에 대하여 우생학적(優生學的) 정책, 즉 생식과 성교의 자유에 대한 규제를 권고하고 있다. 자연의 자기조정 기능의 차단은 이처럼 행정에 의한 규제이 도입을 유발한다. 자연도태는 결국 사회적 도태로 대체되고 마는 것이다.
사회적 도태는 어느 면에서는 자연도태보다 유효할 수 있다. 우생학은 장해가 있거나 생육력(生育力)이 없는 개인의 수태를 막지만, 자연도태는 수태 후에 혹은 종종 탄생 후에야 비로소 그와 같은 개인을 탈락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바로 자연도태가 어떠한 계획적인 개입 없이도 자연스럽게 수행된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우생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행정 기준을 존중토록 강제하는 기술관료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 자연의 자기조정 기능을 대체하는 것은 단지 규제력을 지닌 ‘권력’일 뿐이다.
이 예는 적어도 공상적인 것이 아니며, ‘생태주의’(생태학이 아니라)의 원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원리란 즉 “개인을 제도에 그리고 인간을 다른 인간의 권력에 더욱 종속시키는 대가를 치르면서 자연을 교정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맡겨두는 쪽이 낫다.”는 것이다. 생태주의자가 현 체제의 기술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자연을 보독하기 때문이 아니라(자연은 신성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권력장치를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생태주의자의 선택이 자본주의적 합리성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6 그것은 또한 독재적 사회주의와도 양립할 수 없다. 모든 경제의 중앙계획화가 실현되지 못한 상태에서도 오늘날까지 수립된 모든 사회주의는 독재적이다. 반대로 생태주의자의 선택은 자유주의적 내지는 자주관리 사회주의의 선택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생태주의자의 선택은 다른 보다 근본적인 수준, 즉 경제 외적인 물질적 전체의 수준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제는 특히 기술의 차원에 속한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 이유는 기술이 생산자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개인의 집단과 국가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환경에 대한 관계를 반영하며 규정하기 때문이다. 실로 기술은 권력관계, 생산을 위한 사회관계, 그리고 일의 위계적 분할의 원형이다.7
"사회의 선택은 언제나 우리에게 기술의 선택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강요되어 왔다.“ 또한 지금까지의 기술의 선택이 가능한 유일한 선택이었던 예는 거의 없으며, 반드시 가장 유효한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그 논리에 적합하고, 그것의 지배와 양립하는 기술만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도달해야 할 목표에서 볼 때보다 합리적인 기술조차 현행의 사회관계를 강화시키지 않을 경우에는 배제시켜 버린다.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와 교환관계는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전해 준 기술 속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을 위한 투쟁 없이는 새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은 의미가 없다. 국가의 제도와 구조는 상당한 정도까지 기술의 성격과 비중에 의해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원자력은 자본주의적이든 사회주의적이든 간에 중앙집권사회, 계급사회, 그리고 경찰사회를 전제로 하며 또 그러한 사회를 강요한다. “도구의 전환은 사회 변혁을 이루기 위한 기본적 조건의 하나이다.” 예를 들면 자발적인 협력의 발전, 공동체와 개인들의 번영과 주권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지는 생산도구와 생산방법의 채용을 전제로 한다.
즉, 첫째로 각 지역과 지구 단위에서 사용 가능하며 관리 가능할 것. 둘째, 지역공동체의 경제적 자립을 한층 확립시킬 것. 셋째, 생활환경을 파괴하지 않을 것. 넷째, 연합한 생산자와 연합한 소비자가 생산 및 생산물에 대해 휘두르는 권력에 맞설 수 있을 것. 물론 이 의견에 대해서는, 사회를 변혁하지 않은 채 도구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국가권력을 탈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반론이 나올지도 모른다. 이 반론은 사회변혁과 국가권력의 탈취가 기술의 변화에 ‘선행’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어야만 옳다. 왜냐하면 도구의 변화가 없다면 사회의 변혁은 형식적이며 공허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만일 낡은 것에 대체될 기술의 이론적/실천적 재정의와, 개인들 및 공동체가 그들의 생활에 대한 지배력을 개인적 및 집단적으로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 권력 탈취의 영속적인 탄력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자에 의한 국가권력의 탈취는 기본적으로 권력관계도, 남녀관계와, 우리의 자연에 대한 관계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라하여 기술 파시즘에 대한 면역이 있으란 법은 없다. 반대로 시민사회의 자립성을 동시에 발전시키지 않는 한 사회주의는 국가권력을 더욱 증대시켜 완성시킬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용이하게 기술 파시즘으로 기울 우려가 있다. 생태주의자의 요청이 그 특수성에 있어 반자본주의 투쟁의 불가결한 측면이라는 것은 실로 이 때문이다. 오직 사회주의적/자주관리적 좌파만이 이 요청을 정치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좌파는 실천적인 면에서도 강령의 면에서도 아직 그 단계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생태주의자의 운동은 그 특수성과 자립성을 강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생태주의자의 요청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자본주의와 똑같은 도구를 사용한다면 사회주의라 해도 자본주의보다 가치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지배가, 지배의 기술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야기할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면, 원자력을 갖지 않은 자본주의가 원자력을 가진 사회주의보다 불충분하지만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의 쪽이 미래에 대한 구속력이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생태학과 자본주의의 위기
무릇 생산이란 것은 동시에 파괴이기도 하다. 생산이 천연자원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약탈을 하지 않는 동안 이 사실은 숨겨진 채로 있다. 그 동안에는 이 자원이 무진장하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천연자원은 스스로를 갱신한다. 풀은 베어도 다시 자라난다. 잡초도 마찬가지다. 파괴의 효과가 완전히 생산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파괴는 바로 생산의 조건이다. 이것은 끝없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필요 불가결하기도 하다. 자연은 인간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자연이 인간을 위해 꾸며진 정원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완전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생태계의 어느 종의 균형을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 농업은 그 한 예이다. 사실 농업은 식물계의 종 사이의 균형뿐만 아니라 식물계와 동물계의 종 사이의 균형도 이동시킨다. 농업에는 특히 기생충과의 투쟁과 기생성 진균류가 일으키는 병과의 투쟁이 수반되며, 이 싸움은 생물학적 수단에 의해 성공리에 치러질 수 있다. 이것은 ‘유해’하다고 여겨지는 식물종의 성장을 막기 위해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식물종의 성장을 조장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하여 농업 또한 지구의 표면을 새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신성불가침한 것은 아니다. 자연을 ‘정복’하거나 ‘길들이려는’ 프로메테우스적 계획이 반드시 생태학과 관련된 배려와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 재배(culture)란 말은(경작과 문화라는 이중의 의미에서) ‘자연’을 침해하고 환경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생태학이 제기하고 있는 근본문제는 단지 다음과 같은 것을 아는 데 있다.
첫째, 인간의 활동이 자연을 손상시킴으로써 빚어지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재생 불가능한 자원이 소중히 보전되는가?
둘째, 재생가능한 자원이 생산을 통해 지나치게 낭비됨으로써, 생산의 파괴적 효과가 그 생산적 효과를 능가하는가?
위의 두 가지 점에서 볼 때, 현재의 경제 위기에는 생태학적 요인이 결정적이며, 또 그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이 드러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생태학적 요인들을 위기의 첫 번째 원인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과잉축적이라는 자본주의적 위기이며, 이 위기가 생태학적인(또한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사회적인) 위기에 의해 심각해지고 있다. 보다 분명히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이 동일한 위기의 상이한 차원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1) 과잉축적의 위기
자본주의의 발전은 진전된 단계에 이르면, 주로 노동자를 기계로 대치하고 산 노동을 죽은 노동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그 기초를 삼게 된다. 사실 기계란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축적되고 죽어서 움직이지 않는 노동이며, 게다가 노동자가 없이도 작동할 수 있는, 말하자면 포장된 노동과 다름없다. 기계는 제작하는 데 비용이 비싸게 들기 때문에 그에 상당한 이익을 투자액으로부터 거두어야만 한다. 이것은 자본가가 기계를 설비하는 데 든 비용을 넘어서는 이익을 기계로부터 뽑아내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가 그 곁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매개로하여’ 이익을 낳는 데 기여하는 한, 기계는 하나의 자본이다. 자본의 논리는 성장을 위해 주력하는 데 있다. 성장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사멸하느냐가 자본의 법칙이다. 사실 위기의 기간이 길어져서 같은 업종의 모든 회사가 시장을 분할하고 동일한 가격을 붙이는 데 합의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들 회사들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경쟁한다. 즉, 한층 유효한 기계를 설비하여 어느 회사도 가능한 한 빨리 기계로부터 수익을 얻고자 한다. 그리하여 같은 양의 생산을 하는 데 보다 적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기계를 설비하려고 한다. 이것이 ‘생산성의 향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선진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더욱 완성도가 높고 가격도 비싼 기계가, 보다 숙련도가 낮으며 적은 수의 노동자의 도움을 얻어 생산을 하게 된다. 생산 가운데 직접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감소하는 한편, 자본의 비중(즉 기계로부터 이익을 끌어내고, 기계를 갱신하기 위해 거두어야 할 이익의 비중)은 증대한다.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를 빈다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有機的 構成)’이 고도화하는 것이다. 혹은 생산이 더욱 ‘자본주의적’으로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같은 생산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점점 많은 양의 자본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 은행으로부터 대출해 낸 자금을 적절한 이율로 갚음과 동시에 기계를 바꾸고 갱신하기 위해서는 생산을 통해 더욱 많은 액수의 이윤을 올려야 한다.
이윤율이 언젠가는 저하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은 마르크스였다. 같은 양의 상품을 생산하는 데 보다 많은 자본이 필요하면 필요한 만큼, 이 생산으로부터 얻어지는 이익은 사용한 자본의 총액에 비해 적어지는 경향이 있다. 자본의 총액이 ‘무한히’ 증가할 수는 없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윤율이 저하하는 순간부터 체제 전체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즉 기계가 더 이상 수익을 올리지 않게 되고, 따라서 이전과 같은 속도로 갱신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처음에 기계의 생산이 감소되면, 생산의 저하는 물위에 뜬 기름처럼 서서히 확산되어 간다.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를 빈다면 ‘과잉축적’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생산에서 차지하는 자본의 비율이 지나치게 많아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지나치게 고도화되어) 자본이 더 이상 정상적인 보조로 재생산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충분한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자본의 가치는 제로로 떨어지며, 마침내 이 자본은 파괴된다. 예를 들면 기계를 더 이상 충분히 이용하는 것도, 따라서 기계로부터 수익을 올리는 것도 불가능한 공장은 폐쇄된다. 이것이 공황(恐慌, panic)이다.
공황을 피하기 위하여 자본주의의 관리인들은 이윤율이 떨어지는 경향을 막고자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들 앞에는 이 목적을 위한 두 가지 수단이 있었다. 즉 판매하는 상품의 양을 증대시키는 것과, 상품을 더욱 정교하게 만듦으로써 상품의 양이 아니라 가격(교환가치)을 올리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수단이 서로 상충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제품을 오래 쓰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빈번히 물건을 다시 사게 하여 매상을 올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이들 제품을 보다 정교하고 비싸게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치성’ 소비의 정체이다. 이 소비는 ‘자본주의’의 성장을 보증하는 것일 뿐이며, 충족의 성장과 사람들이 어느 특정한 순간에 이용할 수 있는 참으로 유용한 것(‘사용가치’)의 증가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같은 수준의 욕구의 충족을 보증하는 데는 더욱 많은 양의 제품이 필요하게 된다. 더욱 많은 양의 에너지와 노동과 원료 및 자본이 ‘소비’되지만, 사람들의 생활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생산은 점점 파괴적이고 소비적으로 되어간다. 제품의 파괴는 애초에 제품 자체가 구상될 때부터 포함되어 있던 것이며, 제품의 감모(減耗)는 계획된 것이다.
예컨대 우리들이 오늘날 맞이하고 있는 알루미늄에 의한 양철의 대체 - 알루미늄은 제조하는 데에 양철에 비해 15배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 는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철도 수송이 자동차 수송으로 바뀐 것(후자는 전자에 비해 에너지를 6,7배 더 필요로 하며 게다가 소모가 훨씬 빠르다.), 나사와 볼트로 죄어지는 물건이 사라지고 대신 용접되었거나 끼워 넣는 물건-수리가 불가능한 물건이 등장한 것, 가스 레인지와 전기 냉장고의 사용 연한이 대개 6,7년으로 저하된 것, 천연섬유와 피혁이 오래가지 않는 합성물질로 바뀐 것, 닳아서 못쓰게 되지 않지만 미리 돈이 드는 유리병을 대신하여 같은 정도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쓰고 버리는 포장이 일반화된 사실, 쓰고 버리는 식기류와 종이 제품이 도입된 것, 여름철 냉방을 위해서 겨울철 난방과 같은 에너지가 드는 알루미늄과 유리로 된 고층건물이 건축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식의 성장은 전방에로의 후퇴라고 할 만한 것으로서 항구적인 해결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성장은 자본의 가속도적인 순환과 제품의 가속도적인 감모를 통하여 이윤율의 저하와 시장의 포화상태를 피해보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나중에 언급되겠지만, 오히려 이 목적과 반대되는 효과(경제학자가 ‘과밀성’ 또는 ‘비효율성’이라고 부르는)가 생겨났고, 새로운 ‘상대적 희소성’, 새로운 불만과 새로운 형태의 빈곤이 초래되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어떻든 간에 경제위기에 다다르게 마련인 이러한 전방에로의 후퇴가 석유 위기에 부딪쳐 종식된 사실이다. 석유 위기는 경제불황을 ‘야기시킨’ 것이 아니라, 몇 해 전부터 잠재해 있던 불황을 표면에 드러나게 하고 촉발시킨 것이다. 특히 석유 위기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절대적인 희소성’을 초래해 왔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실감시켜 주었다. 즉 성장에 대한 ‘경제적’ 장애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지만 자본주의의 발전은 결과적으로 ‘물리적’ 장해를 만들어 내고 만 것이다.
(2) 재생산의 위기
자본주의 체제에서 절대적 희소성은 보통 물자의 결핍에 앞서 가격의 폭발적 상승이란 형태로 나타난다. 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교의에 따르면 희소성의 결과 빚어진 가격의 상승은 희소한 재화의 생산 증가를 불러일으킨다. 물론 이 재화의 생산이 보다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추론은 희소한 재화가 ‘생산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 희소성이 현저하게 커진 재화는 주로 ‘생산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이 재화들이 보다 다량으로 이용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인간의 활동과는 관계가 없었다. 이 재화는 그야말로 거의 없기 때문에 희소한 것이었다.
공업화가 가장 진전된 곳에서의 공간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공기도, 물도, 토지의자연적인 비옥함도, 살림도, 물고기도, 그리고 수많은 원재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가격의 폭발적 상승은 경제위기를 심각하게 했거나 그 도래를 촉진시켰다. 왜냐하면 가격의 등귀는 다음의 두 가지 방법으로 이윤율의 저하에 공헌했기 때문이다.
첫째, 희소하게 된 공간과 공기와 물은 아무리 가격이 오른다 해도 더 많이 생산할 수 없다. 단지 가능한 방법은, 다른 사람이 이미 사용한 공간과 공기와 물을 다시 한 번 (혹은 n+1번) 쓰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공간의 경우라면 보다 깊이 또는 보다 높이 건설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점점 비싼 돈을 지불하여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산 다음 그곳에 공장과 주택지와 도로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필요성은 일본에서뿐 아니라 라인 강변 지역에서도 생기고 있다. 독일의 화학공업은 공기와 물을 다시 이용하는 데 드는 투자가 너무 커서 설비의 확충을 단념했을 정도이다.
이와 같이 재이용의 필요성에는 명확한 경제적 의미가 있다. 즉, 지금까지 풍부하여 무상으로 얻을 수 있던 것을 지금부터는 재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공기와 물은 중요한 생산수단으로서 취급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공기와 물이 지니는 본래의 성질을 되찾기 위해서는 오염제거 설비에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요성의 결과 자본의 유기적 구성(즉 일정량의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드는 자본의 비중)이 한층 고도화 된다. 화학공업 트러스트가 재이용했거나 오염을 제거하고 사용한 후의 공기와 물을 팔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물리적 한계’에 부딪쳤다. 그러나 단지 이것만은 아니다.
둘째, 가장 접근이 쉽고 따라서 가장 돈을 적게 들이고 채굴할 수 있는 광맥의 고갈은, 이윤을 올리려는 자본의 능력에 또 하나의 물리적 한계가 될 것이다. 실제로, 원재료로 쓸 새로운 광맥은 과거보다도 훨씬 무거운 투자부담을 지지 않는 한 발견도 채굴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자금 조달 때문에 기초물자의 가격이 상승될 것이 예상된다. 게다가 기초물자의 가격 인상은 위에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이미 쇠퇴의 경향을 보이고 있는 가공산업의 이윤을 떨어뜨린다. 내일의 광맥 탐사와 채굴에는 오늘보다 더욱 많은 투자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원재료의 급속한 가격 인상에 대비하여 가공산업은 지금부터 에너지 절약적이고, 기초물자를 더욱 절약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도 또한 투자가 필요하다.
현대의 위기가 지닌 전대미문의, 그리고 일견 역설적인 특징이 이상과 같이 설명되었다. 과잉축적과 이윤율의 저하, 경기후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높은 수준의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가격은 계속 상승하고 있다. 전통적인 경제학적 추론으로는 이 역설을 설명할 수 없다. 아마도 이 역설은 물리적 요인을 고려할 때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건 아래서 자본이 자금 조달의 곤란에 봉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리하여 자본은 자체의 수단으로는 재생산을 보증할 수 없게 된다. 산업자본주의(즉 일반적으로 물질적 생산기구의) 재생산은 이제 와서는 소비로부터 미리 떼어 낸 자금의 이동에 의해서만, 결국 산업에 대한 국가의 보조금에 의해서만 보증될 수 있다. 이것은 생산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비의 절감이라는 희생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제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과거보다도 훨씬 큰 대가를 치러야 하며, 어떤 부분에서는 그것이 수익을 능가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산업은 그 자체의 필요에 의해 과거보다 많이 소비하게 마련이다” 산업은 최종 소비자에게 과거보다 적은 제품을 넘겨준다. 산업의 효율은 저하되고 물리적 비용은 증가되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 와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맥락을 되새겨 보자. 첫 번째 단계에서는 과잉축적을 피하기 위하여 생산은 점차로 낭비적으로 즉 파괴적으로 되었다. 결국 생산은 가속도적으로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파괴하고, 또한 원칙적으로는 재생가능한 자원(공기, 물, 삼림, 토양 등)을 희소하게 만들 정도로 과잉소비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산업이 약탈되어 버린 자원의 희소화에 직면하여, 생산의 증대에 의해 야기된 희소성을 생산의 증대로써 대응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산업이 발전시킨 생산은 최종 소비자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산업 자체에 의해 소비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최종소비자의 관점에서 보면 주민에게 같은 수준의 소비를 보증하기 위해서는, 마치 산업이 보다 많은 물자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모든 일이 진행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생산과 소비 사이의 균형은 물로 붕괴되었으며, 그 속에서 소비는 희생되었다. 소유관계의 변화(국유화에 의한)도 이러한 생산성의 저하를 보상하는 데는 무력하다. 기껏해야 그것은 어느 한정된 기간 동안 소비로부터 투자로의 자금이동의 효율을 높일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소유관계의 변화는 물질적 소비의 성장을 지속적으로 다시금 궤도에 올려놓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장에 대한 장해가 물리적인 것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는 과잉축적이라는 고전적 위기가 궁극적으로 천연자원의 희소화에 따른 재생산의 위기를 유발시킨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위기의 해결은 더 이상 경제성장 속에서 찾아질 수 없으며, 오로지 자본주의 논리의 전도(顚倒)에 의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 자본주의 논리 속에는 최대한을 지향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최대의 욕구를 만들어 내고, 원료와 에너지를 최대한 유통시켜 최대이윤을 이룩하면서 최대한의 상품재와 서비스에 의해 그 욕구를 만족시키려 한다. 그렇지만 ‘보다 많이’와 ‘보다 나은’ 사이의 유대는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보다 나은’은 ‘보다 적게’일 수도 있다. 즉 최소의 욕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가능한 한 ‘최소’의 원료, 에너지 및 노동의 소비로 충족시키고, 나아가 가능한 한 ‘최소’의 공해를 일으키는 데 그칠 수 있는 것이다.
빈곤을 그 근원에서부터 없애 버리면, 궁핍화도, 불공평의 확대도, 생활의 질의 악화도 일으키지 않고 이것을 이룰 수 있다. 빈곤의 근원은 생산의 불충분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생산된 재화의 성격과 생산이 만드는 소비의 형태에 있으며, 또한 생산에 탄력을 주는데 기여하는 불평등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가능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5. 부가 빈곤을 낳는 시대
보다 윤택한 생활은 단지 생산량의 감소와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감소를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의 논리를 없앤다면, 수리하기 쉽고 에너지를 절약하면서도 일생 동안 쓸 수 있는 의류, 가정용품 및 가전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며, 어느 누구라도 이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시에 자유로운 시간과, 주빈이 어느 특정 순간에 이용할 수 있는 실용품의 양도 증가할 것이다. 조사결과를 보면 일반 대중이 ‘보다 잘 사는’ 것과 ‘보다 적게 생산하는’것 사이의 상관관계를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인의 53%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위해 필요하다면 소비와 성장에 제동을 거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68%는 한 철 입으면 떨어져버리는 의류보다도 훨씬 고전적이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선택할 것이다.
-75%는 쓰고 버리는 포장과 그 밖의 대형 병을 쓸데없는 소비라고 생각하고 있다.
-78%는 서로 얼굴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더할 수 없는 기회로서 TV방송이 없는 날을 일주일에 하루 두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8
발전된 산업국가에서의 빈곤은 이제 생산의 불충분이 아니라 생산방식과 제품의 성격에 기인한다. 이들 나라의 빈곤을 근절시키는 데 필요한 전제는 더 이상 보다 많은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전혀 다른 물건을 생산하고, 다른 방법으로 생산하는 일이다.
발전된 산업국에서 빈곤이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두고 이른바 가난한 나라에서의 빈곤의 ‘존재’와 동일한 원인 탓으로 할 수는 없다. 후자의 경우 빈곤은 경우에 따라서는 물질적 결핍의 탓이며(어떤 조건 아래에서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해 부유한 나라에서 끈질기게 존재하는 빈곤은 증대하는 부와 동시에 증대하는 결핍을 생산하는 사회제도의 탓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소비의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빈곤이 생산되고 그리고 재생산된다. 이 재생산의 메커니즘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빈곤의 세 가지 이유를 구별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 서론적 고찰
물질자원은 그것이 공평하게 분배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희소성이 똑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마샬 살랭즈9 는 빈곤과 공평함이 상호 배제적임을 훌륭하게 증명한다. 즉 자원이 평등하게 입수될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분배되고 있을 경우에, 자원의 희소성은 검소와 궁핍과 생리적 영양실조의 원인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빈곤’의 원인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빈곤이란 그 정의상 다른 사람들, 즉 “부자가 손에 넣을 수 있는 혜택의 박탈상태”를 의미한다. 부자가 없을 때 가난한 사람이 ‘부자’라면 어느 누구도 부자가 아니다. 모두가 ‘가난한 사람’일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빈곤이란, 생산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불충분한 궁핍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다.”10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빈곤의 세가지 원인을 구별할 수 있다.
(2) 매점
이것은 빈곤의 가장 일반적인 이유이다. 돈을 가진 사람은 모든 사람이 충분한 양만큼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자신의 독점적인 이익을 위하여 매점한다. 이 점에서는 토지와 수원(水源)의 매점이 전형적인 예이다. 이 매점은 모든 사람에 대한 충분한 자원의 분배와 ‘대립’한다. 매점은 결핍에-이것은 다름 아닌 매점의 결과이다-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 계급이나 신분이 다른 계급이나 신분을 지배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다.
(3) 출입권의 전용화
이것은 천연자원에 대한 접근이 어떤 특권적 소수자에게만 보유되어 있는 독점적 상태를 이른다. 이 경우에 천연자원은 희소성 때문이든 그 자체의 성격 때문이든 간에,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분배되고 이용될 수 없게 된다.
한 가지 전형적인 예로서 만일 군중들이 ‘쇄도’한다면 모든 매력을 잃어버리고 말 경치가 빼어난 곳에 대한 출입권의 설정을 들 수 있다. 혹은 맑은 공기, 햇살, 조용함 등 출입의 제한에 의하지 않고서는 특정 장소에서 보호할 수 없는 천연자원에 대한 출입권의 설정도 마찬가지이다.
출입권의 설정은 매우 빈번히 출입권의 산업화에 의해 이루어진다.11 해수욕장을 이용하려면 호텔의 방을 빌리고 그곳에서 식사를 하든가 별장을 사지 않으면 안 된다. 햇살과 조용함을 얻고자 할 때, 이것 자체는 무상이지만 이 자원의 희소성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드는 주거지를 임대하든지 사야만 한다.
이 경우에 출입권의 전용화(專用化)가 희소성을 ‘만들어 낸다’고 독자는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희소성이 전용화에 선행한다. 전용은 공정한 분배와 ‘대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정하게 분배하면 소멸되어 버리는 것, 따라서 공정한 분배가 불가능한 것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보호에 대한 보증은 소수자의 독점적 이익이 될 뿐이며, 자연 자체가 소수자의 부(富)가 되고 그들의 권력을 표현한다.
햇살과 조용함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풍부한 자원을 ‘인공적’으로 희소하게 함으로써 부자를, 그리고 따라서 가난한 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이다. 빈곤을 재생산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이러한 인공적 희소화 속에 숨어있다.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고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에 그때까지 풍부하게 존재했던 자원을 파괴함으로써, 또 잔존하는 자원에 대한 출입권을 설정하거나 그러한 출입권을 산업화함으로써, 파괴적 생산은 새로운 형태의 특권과 빈곤을 낳고 빈곤의 근절을 방해하고 있다.
(4) 특권적 소비
사용가치가 없어 보이면서도 희소성과 가격 때문에 그것의 소비자를 특권자로 만드는 재화와 서비스가 있다. 이 소비를 특권적 소비라고 부르기로 한다. 특권적 소비는 매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러한 경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콩코드의 이용이 매점의 의미를 포함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비행기는 원칙적으로 모든 이들의 유익한 목적을 위해 쓰일 수도 있었던 매우 장시간의 노동을 매점하고 있고, 또한 다량의 연료를 매점하여 석유의 희소화를 가속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콩코드12 는 그것이 담고 있는 사회적 자원의 매점이라는 의미와는 별개로 빈곤의 한 원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비행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욕망과 권력의 불평등한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와 워싱턴 사이의 여행에서 4시간의 득을 보기 위해서 음속의 두 배의 속도로 비행하고자 하는 욕망은 예외적인 것에 대한 욕망으로서, 무엇보다도 이러한 편의를 얻는 부류의 사람들이 예외적으로 중요하며 권력 있는 사람으로서 지칭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단지 쾌적함과 이 비행기가 가져다주는 이점 때문에만 콩코드를 타지는 않는다. 음속 이하의 비행기가 실제로 훨씬 쾌적하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권력자와 특권층에게만 약속되어 있는 이러한 희소재를 향유할 수 있는 자신의 특권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특권적 소비는 빈곤을 재생산하는 제 2의 원동력이다. 어떤 실용품이 널리 보급되어 있을지라도, 처음에는 귀하고 단지 새롭다는 이유 때문에 값이 비싼 신제품을 팔게 된다면-신제품이 구제품보다 훌륭한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부자는 부자로서 구별될 것이고 가난한 자는 가난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반 일리치가 ‘빈곤의 극대화’라고 일컫는 것이다. 결국 산업국가에서의 빈곤의 근절은 생산의 증대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빈곤을 없애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준에 맞추어 생산의 방향을 변형시킬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첫째, 사회적으로 생산된 재화는 만인이 손에 넣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그러한 재화를 생산할 때 자연에 풍부히 존재하는 자원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셋째, 또한 이 재화는 널리 보급될지라도 과밀성을 빚어 사용가치가 손실되지 않도록 구상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위의 기준에 맞는 생산의 방향은 ‘문화혁명’을 전제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빈곤이 소멸하는 것은 오직 그 주요한 원천인 권력과 권리의 불평등성이 소멸된 경우일 때에 한하기 때문이다. 사실 소비에 의한 차별과 분화는 많은 경우 이미 사회적 위계질서를 확인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극단적인 경우에, 소비에 의한 분화의 유일무이한 목적은 바람직한 것을 하나도 매점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어 버리는 일ㄹ이다. 이를테면 보석과 최신 유행품의 소비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이러한 특권적 소비는 더 이상 즐거움도, 영향력도, 쾌적함도 주지 않는다. 오직 그것은 만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물건을 손에 넣는 ‘권력’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 물건들의 유일한 기능은 다만 사회적 불평등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소비의 평등은 사회적 평등을 위한 무기라기보다 그 결과로서만 존재한다. 계층구조의 타파만이 소비 평등의 조건이다. 만일 권력과 직능의 계층구조가 잔존한다면 곧 물질적/상징적 불평등이 다시 확립되고 말 것이다.13 만일 권력과 직능의 계층구조가 소멸한다면 물질적 불평등은 그 사회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6. 평등과 차등
물질적 평등이 더 이상 계급적 분화를 표현하지 않을 때 그것은 이미 인간의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특권과 권력을 수반하지 않을 때, 물질적 부는 다른 사람에게 모욕적이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을 빈곤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물질적 빈곤도 그것이 사회의 하층계급으로 내쫓기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은 것으로도 만족한다는 선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굴욕적이지 않다. 서구의 ‘좌파’가 이러한 진리에 대해 품는 저항감은, 그들의 문화적 세계와 그들이 입각해 있는 가치가 얼마나 상품관계에 의해 획일화되고 말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에게 불평등은 ‘차등’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인간이 ‘보다 많이’ 갖는가, 혹은 ‘보다 적게’ 갖는가에 따라서 계급적으로 분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가치와 생활양식과 개인적 목표의 획일화만으로 상품관계와 임금노동을 인간활동의 모든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켜 버린 것이다. 평등 혹은 ‘사회정의’의 이름 아래 참다운 경쟁과 선망과 권리 요구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오직 동질적인 사회적 우주에서 뿐이다. 그곳에서는 차등이 순수하게 양적 차원의 것으로 되고 따라서 측정이 가능할 것이다. ‘보다 많이’ 혹은 ‘보다 적게’라는 범주는 주로 평등한 개인들 사이에서 불평등이 다만 경제적 차등으로서 간주되는 사회/문화적 우주를 전제로 한다.
원리적 평등이라는 허구가 자본주의의 문화적 기초이다. 이것을 통해서만 모든 차등은 화폐로 보충할 수가 있으며 또한 모든 차등을 수입의 불평등으로 옮길 수 있게 된다. 부르주아 지배의 확립기에 문화적 소수자와 문화적 편향에 대해 행해진 광폭한 억압은 이것으로써만 설명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문화적 소수자와 문화적 편향은 그들의 가치의 특수성과 차등성을 고집함으로써, 상품의 지배에 필요한 사회/문화체제의 단일 차원성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또한 보통교육을 위한 학교제도의 탄생은 이것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학교가 획일성 바로 그 자체에 의해 가장 혜택 받는 자를 한층 우대하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이다. 나아가 국가에 의해서 특수한 직업윤리(혹은 ‘의무론’)의 파괴가 수행된 것도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종류의 직업을 영위하는 구성원이라면 그들의 기량을 팔거나 빌려주는 것을 거절하기 위해서 그러한 직업윤리를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활동에 고유한 의미와 내용은 억압되었으며, 화폐에 의한 ‘보상’ 즉 상품적 소비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로 대체되고 말았다. 이 보상의 총계가 사회활동, 즉 노동의 결정적인 목적으로 된다. 노동은 그 고유한 내용을 남김없이 빼앗겨버린 채 임의의 상품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연속으로 측정되고 근로자로부터 사들인 부역으로 환원되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의 활동은 일체의 자율적인 합목적성을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주요한 목적으로서 돈과 상품의 구매력을 할당받는 것은 이러한 노동의 소외상태를 보여준다.
이상의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부정되는 경향을 보이는 평등화를 항상 추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부류의 임금노동자도 바로 위의 부류의 소득수준에 도달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어느 소득수준을 넘으면 소득의 증가는 그 자체로서도 또한 그 결과 얻어질 여분의 소비를 위해서조차도 불필요한 것이 된다. 소득의 증가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사회적 가치를 내게도 용인해 주면 좋겠다는 욕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노동에 대하여 불평등한 보수를 지급하는 제도에 기초를 둔 이 사회에서 평등에 대한 요구는 소비에의 요구라든지, 사회적 불만, 또는 사회적 경쟁 등에 대해 끊임없이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감추어진 원동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득수준의 안정화가 달성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로 한정될 것이다. 첫째, 사회적으로 필요한 모든 노동이 평등한 사회적 승인(및 보수)을 향유할 때, 둘째,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무한히 다양한 자유활동 덕분에 개인적인 능력과 욕망과 취미의 무한한 다양성을 실현할 가능성이 만인에게 주어질 수 있을 때이다.
사회적 노동에 종사하는 시간의 단축과 자유로운 시간을 생산적 활동에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품관계와 경쟁관계의 쇠퇴를 위한 조건이다. 소비수준과 생활양식에서의 차등이 이미 보수의 다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이 자유시간에 추구하는 여러 가지 활동의 결과가 될 때 그러한 차등은 더 이상 불평등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7. 사회적 자주관리와 타율적 관리 - 시민사회와 국가
생산과 소비 사이의 단절, 노동생활과 ‘여가’ 사이의 단절은 자본주의적 분업의 이익을 위해 자율적 능력이 파괴된 결과 생겨난 것이다. 이 단절 때문에 상품관계의 영역을 영속시키고 또 끊임없이 확장시킬 수가 있게 되었다. 근로자는 자신의 임금노동의 목적과 성격을 선택할 모든 가능성을 빼앗겼으며, 자유로운 영역은 비노동의 영역으로 한정되어 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사회적 의미가 있는 창조적 및 생산적 활동이 근로자에게는 자유시간이라 해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자유는 기껏해야 소비와 오락에 대한 선택으로 제한되게 된다.
따라서 근로자의 자율적 능력의 파괴는 단순히 ‘노동의 과학적 편제’의 도입과 일의 세분화 및 비숙련화로부터 빚어진 것만은 아니다. 노동의 과학적 편제를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율적 능력의 파괴는 분업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이미 학교화(學校化, scolarisation)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학교에서 주입되는 것은 무엇이건 전문적인 권위자가 있으며 어떤 활동에도 전문가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아마추어’는 결코 ‘전문가’와 같은 가치를 지닐 수 없으며, ‘완전한 인간’과 여러 가지 일을 겸하여 하는 인간은 언제까지나 ‘고상한 취미생활자’나 ‘만물박사’에 불과하다고 배운다. 개인이 학교에 의해 사회화도는 의미는 그가 지닌 자율성과 다채로운 능력을 떨어뜨리고 학교에서 얻는 ‘자격’(졸업장)의 가치를 높이는 데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자격의 본질적 성격은 그것을 획득한 사람에게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를 가져다주는 것에 불과하다. 예컨대 여러분은 학교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노동시장’에서 팔리도록 노력함으로써 제 3자를 위하여 학교에서 얻은 자격을 행사하는 일뿐이다.
학교로서는 외국어는커녕 국어조차 말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지 않는다. 노래하는 것도, 손발을 쓰는 것도, 건강한 식사를 하는 방법도, 제도의 숲을 헤쳐 나가는 방법도, 환자와 갓난아이의 시중을 드는 방법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스스로 노래하기를 그치고 직업적인 가수가 그들을 위하여 노래하고 있는 음반을 수백 장이나 사며, 영양을 섭취하는 법을 모르고 건강을 해치는 식사를 한 결과 치료를 받기 위하여 의사와 제약산업에 돈을 지불한다. 또한 아이들을 기르는 방법을 몰라 ‘국가면허를 가진’ 보모의 서비스에 의존하며, 라디오와 수도꼭지를 수리하는 법, 관절을 비었을 때의 처리법, 그리고 약을 먹지 않고 감기를 치료하는 법과 샐러리를 재배하는 방법을 모른다. 이것들은 모두 스스로는 인정하려들지 않겠지만 학교의 사명이 근로자, 소비자, 고객 및 피통치자들을 공업이나 상업,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직업과 국가로 인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학교가 맡고 있는 제도적 기능은 인간을 해체하여 어린아이의 영역에 머물게 하려는 작용과, 문화를 박탈하는-방해하거나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작용을 연장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만일 교육적인 시민사회, 즉 살아있는 문화로 뒷받침되는 시민사회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회의 학교는 현재의 학교와 같은 작용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현재의 학교와 같은 모습을 띨 수도 없을 것이다. 학교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노동과 인간 상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거주공간, 노동 이외의 생활로부터 지식과 문화와 자율성 등이 송두리째 뿌리뽑히고 대신 전문화된 제도 속에 묻혀 버리는 속성을 학교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화된 제도 속에서 지식과 문화와 자율성 등이 제도화된 전문(專門)으로 되어버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실업, 즉 제 3자를 위해 일하지 않는 한 생산활동이 불가능하게 되는 상태는 타율적인 규제가 일반화된 사회제도에 있어서 가장 눈에 띄는 부조리인 것이다.
따라서 자율적 능력의 파괴는 노동에 있어서도 또한 ‘소비에 있어서도’ 근로자에 대한 지배를 자본(혹은 자본을 계승한 국가)에게 보증하려고 하는 하나의 과정-계획화된 것이든 아니든 간에-속에 포함되어 있다. 즉 노동자로 하여금 가정 안에서든 혹은 보다 큰 집단에서든 자신들이 소비하는 것과 원하는 것은 어느 하나도 생산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본(혹은 국가)은 노동자가 상품적 소비를 통하여(다시 말하면 제도적으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구매를 통하여)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강요하고 있다. 동시에 “자본(혹은 국가)은 이들 상품적 소비의 관리까지도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자율적 능력의 파괴와 그로부터 빚어지는 문화의 획일화는 국가에 의한 시민사회의 파괴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시민사회’라는 말은, 국가의 중재와 제도적 행위에 힘입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과 공동체의 내부에서 모든 개인이 상호 창출해 내는 그물눈과 같은 사회관계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14 이들의 사회관계는 어디까지나 상호성과 자발성에 뿌리박은 관계여야 하며 권리와 법적 의무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예를 들면 한 지역, 동네, 공동주택에도 존재할 수 있는 협력과 상호부조의 관계이며, 오래된 노동자 거리에 있는 단결과 연대이다.15 또한 그것은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민중 스스로가 만든 자발적 단체와 협동조합이며, 확장된 가족관계와 가족공동체이다. 나아가 그것은 지역과 마을의 ‘생활’을 현재 구성하고 있는 혹은 구성해 온 교환과 커뮤니케이션의 총체이기도 하다.
자주적으로 통제하며 제도적이지 않은 이러한 사회관계는 공업화에 수반된 노동의 사회적/지역적 분업에 의해 모두 해체되어 버렸다. 농촌으로부터 인구가 대량으로 유출된 결과 촌락 공동체는 소멸하고 교외는 팽창하게 되었으며, 원자화된 개인이 도시 주변의 주택 지역에서 우글거리고 있다. 이러한 주택지역의 물리적 현상 자체가 커뮤니케이션과 교환을 막는 하나의 장해이다. 즉 통근 거리가 길기 때문에 피로가 증대한다. 또한 교통수단의 혼잡과 주거지의 과밀화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단조로운 사람의 바다를 이루어 이름도 없는 인간집단이 되고, 각 개인은 다른 사람이 진보와 쾌적함을 추구하는 데 장애가 된다.
노동자에게 있어서 기계는 원료를 가공하는 데 쓰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통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 자체가 인고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노동은 그의 능력을 둔화시키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산하려는 능력을 위축시켜 버린다. 피로, 시간과 공간의 부족 및 인근(隣近)관계의 결여 때문에 상호부조는 사라져 버리고 상품화된 서비스가-경우에 따라서는 공공기관에 의한 서비스와 집단적/가정적 설비로 이어지기도 하지만-전에는 아주머니와 조부모 및 이웃이 했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쇠퇴는 언제나 국가의 제도적 활동의 강화와 발전을 불러일으킨다. 원자화된 개인들을 서로 돕고, 보호하며, 간호하는 능력과 아이들을 스스로 키우는 능력의 상실을 보충할 더욱 완벽한 사회보장을 국가에 요구한다. 제도적인 사회적 부담의 발전은 이번에는 모든 일의 전문직화, 전문 분화, 분업화를 촉진하고 그리하여 시민사회의 쇠퇴를 촉진한다. 시민사회가 국가에 의해 대체되는 것과 대응하여 정치적으로는 자주 통제가 타율적 규제에 의해 대체된다. 자연도태에 대해 앞에서 설명했던 것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타율적 규제는 대개 통제보다 유리하게 마련이다. 대단위의 생산의 집중화, 중앙에서의(주식회사에 의한 혹은 국가에 의한) 계획화, 일의 세분화와 그 결과로서 노동력의 군대와 같은 조직화 등은 적어도 어떤 점에서는 능률을 향상시킨다. 그러나 기술의 집중화는 불가피하게 지리적인 집중화와 전문화를 야기한다. 그 결과로 관할 구역을 지닌 공동체는 어느 것도-지역/마을/읍/지방 할 것 없이-이미 자신의 욕구에 따라서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이름도 모르는 이용자의 완전히 추상적인 욕구에 따라 생산하는 일이 벌어진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모르는 이용자의 완전히 추상적인 욕구에 따라 생산하는 일이 벌어진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생산하는 물건을 소비하지 않으며 또한 누구도 자신이 소비하는 물건을 생산하지 않는다. 전문화된 대조직에 의한 생산은 필연적으로 ‘시장’혹은 국가에 의해, 구체적으로 타율적 규제를 전문으로 하는 다른 대조직(은행/중개인/판매부문/행정기관)에 의해 타율적으로 규제되기 마련이다.
이리하여 능률향상은 다른 한편으로 관료의 증가를 수반하며 이것은 경비 증가, 일 처리의 지연과 경직, 권력의 집중, 그리고 모든 개인의 획일화의 원천이 된다(이어서 어느 한도를 넘으면 낭비와 에너지 손실과 능률저하의 원인이 된다.). 이리하여 국가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시민사회의 쇠퇴는 기본적 자유의 쇠퇴와 많든 적든 간에 군대화된 범국가적 사회의 확립을 고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종류의 사회를 ‘전체주의적’이라고 불러왔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국가가 시민사회를 전적으로 배제하고 ‘완전무결한 국가’로 되어버리기 때문이다.16
우리는 잠재적으로 이 단계에 도달해 있다. 지역적 혹은 직업적 이해와 관계된 행동과, 사회적 혹은 문화적 이해에 관계된 행동도 ‘관계당국’의 간섭과 인가와 규제 혹은 특별조치 없이는 당사자 자신이-설사 그가 한 채의 건물의 주인일 지라도-어느 것 하나 해볼 수 없다. 한 사람의 책임자-그것도 이웃에 대해서가 아니라 ‘법’ 앞에 책임을 지는 사람-를 지명하지 않고는 도저히 밑으로부터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다. 노동의 기회가 제도상의 ‘사용자’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는 한, 다시 말하면 ‘사용자’가 노동의 성격과 타율적인 목적에 이르기까지 미리 결정하지 않는 한 노동은 무엇 하나 행해질 수도, 시도될 수도 없다. 제도상 회계 보고를 하지 않고 또한 여러 정당들로부터 독점을 무너뜨렸다거나 자신들의 영향권 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비난받지 않고는, 자발적인 결사를 하는 것도 도저히 불가능하다. 시민은 일련의 제도, 직업, 명령, 그리고 법률에 의해 자신의 욕구에 이르기까지 제한되어 있으며, 단지 소비자로서, 이용자로서, 그리고 제각기의 급부와 설비와 사회적인 부담을 향유할 권리를 가진 자로서 행동하도록 요구될 뿐이다. 시민은 어느덧 그 자신이 자율적으로 욕구를 ‘느끼는’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적 전문가와 전문화된 제도들이 그에게 지시해 주는 타율적 욕구에 따라 소비하고 있다.17
정당간의 경쟁은 본질적으로, 제도적으로 규정된 욕구를 어떻게 제도적으로 충족시킬 것인가 하는 방법과 범위에 관한 것뿐이다. 이리하여 시민은 ‘윗사람’이 훌륭히 마무리하여 집행하는 정책의 소비자로 규정된다. 시민은 상표를 보고 세제를 고르는 것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정당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이러한 선택을 거부하면 그는 ‘비정치적’이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시민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스스로의 힘으로 노동, 거주, 생산 교통, 소비 및 생활의 방법을 고안해 내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여 무엇인가를 실행하거나 시도하려는 의욕을 잃어버렸다. 반면에 그는 그에게 남겨진 최후의 자발적 영역에까지 위로부터의 새로운 배려로 충족될 것을 바라도록 촉구되게 마련이다. 본질적인 이러한 경향에 덧붙여서, 각 지역과 기업 규모의 자주관리는 범국가주의로의 걸음을 저지하거나 역전시킬 힘이 없다. 그러한 자주관리가 의미를 가지려면 기업과 지역의규모, 기능, 생산, 조직이 단지 자주관리의 방법뿐만 아니라 대상에까지도 관계될 수 있도록 새롭고 자유로운 공간을 동시에 개척해 내야 할 것이다.
타율적으로 규제되고 있는 조직의 자주관리는 애초에 넌센스이던가 기만이다. 이와 같은 ‘자주관리’가 국가 자체에 의해 제정됙, 따라서 자립적으로 존재하기도 전에 국영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러한 식의 자주관리는 경제적/기술적 생산단위의 규모가 크고 그것의 물리적/재정적 유량(流量)이 복잡하기 때문에 필요하게 되는 타율적 규제에 기초를 둔 제도와 돌발사태를 제거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며, 그것을 수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철판이나 타이어 등의 단일제품 생산에 전념하고 있고 따라서 제어할 도리가 없는 경기 변동에 좌우되는 대도시의 자주관리 따위는, 노동력을 독점하고 있는 트러스트-혹은 훨씬 좋지 않은 경우에-그 자회사의 자주관리와 마찬가지로 전혀 무의미한 제안이다. 자주관리는 필연적으로 상당히 작은 경제적/사회적 단위를 전제로 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생산활동에 의해서 뿐 아니라 일의 분배와 한정에 의해 얻어지는 능력과 재능의 다양성 그리고 인간적 교류의 풍부함을 보증하고, 둘째 적어도 생산의 일부분을 지역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며, 셋째로 관할구역을 그 구역을 갖는 하나의 공동체가 최소한도의 지역적 자급자족을 보증하기 위해서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주관리는 자주관리하기에 적합한 용구(用具)를 전제로 한다. 이 용구는 기술적으로는 실현 가능하다. 그러나 수공업과 촌락경제, 즉 중세로 되돌아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문제는 공업기술의 부단한 발전에 개인적/공동체적 자율성의 부단한 발전에 종속시키는 데 있다.18 이반 일리치의 정식을 빈다면 “총체로서의 용구체계의 가치는, 그것이 타율적 생산계획을 사람들의 자발적/개인적 행동에 통합시킬 적당한 성질을 갖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총체로서의 용구체계의 재정의와 그것의 재전개는 말할 것도 없이 제반 제도와 국가의 개선을 전제로 한다. 국가를 단번에 철폐하는 것은 가능한 해결책이 될 수 없지만, 시민사회의 확대를 꾀하면서 국가를 소멸시켜 가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19 우파와 고전적 좌파의 범국가주의적 경향에 대항하여 생태주의는 시민사회의 반역과 그것과 그것의 재건 운동을 실현코자 하는 것이다.
8. 결론- 일곱 개의 태제
이 시론을 구성하는 부분적 분석에 힘입어 몇 가지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테제의 형태로 결론을 간결하게 서술하고, 이어서 유토피아를 묘사함으로써 그것을 예증해 보고자 한다.
첫째, 현대 자본주의의 위기의 원인은 생산능력의 과잉 발전 및 극복하기 어려운 희소성을 만들어 내는 현대 기술의 파괴성에 있다. 이 위기는 오직 새로운 생산양식에 의해서만 지양될 수 있다. 이 새로운 생산양식은 경제적 합리성과 절연하여 재생가능한 자원의 절약 및 에너지와 원료 소비의 감소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둘째, 경제적 합리성의 지양과 물질적 소비의 감소는 기술 파시즘적인 타율적 통제에 의해서도 또한 공생적인 자주조정에 의해서도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기술 파시즘은 오직 시민사회의 확대로써만 회피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확대를 위해서는 기초공동체의 주권의 증대를 가능케 하는 기술용구의 채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셋째, ‘보다 많이’와 ‘보다 나은’ 사이의 관계는 단절되어 버렸다. ‘보다 나은’ 것은 ‘보다 적은’ 것을 가지고 획득할 수 있다. 만인이 그것을 손에 넣어도, 극복할 수 없는 공해와 희소성을 낳지 않으며 보다 적게 소비함으로써 보다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만인이 향유할 때 누구에게도 쓸모가 있는 것만이 사회적으로 생산될 가치가 있으며, 그 역(逆)도 또한 설립한다.”
넷째, 부유한 나라에서의 빈곤의 원인은 생산의 불충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 재화의 성격과 그것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방법에 있다. 빈곤을 절멸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희소한 부, 즉 본질적으로 특정한 사람의 요청에 맞는 배타적인 부를 ‘사회적으로’20생산하지 않도록 하는 경우일 뿐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특권을 주지 않고 또한 누구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것만이 사회적으로 생산될 가치가 있다.”
다섯째, 풍족한 사회의 실업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감소를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일하기만 한다면 훨씬 적게 일해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모든 노동이 평등한 사회적 승인과 보수를 받는 것은 빈곤 절멸의 조건임과 동시에, 노동에 적합한 모든 사람들에게 노동을 배분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여섯째, 사회적 노동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생산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시간의 감소는 자주관리적이며 자유로운 활동의 확대와 함께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생산에 의해 확보되는 필수품 외에, 모든 개인들은 이 자유시간 동안에 홀로 혹은 집단적으로 그들에게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잉여물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집에서 가까운 작업장과 협동조합에서 생산하는 무한한 종류의 재화와 서비스는 자유의 영역 확대와 상품관계의 소멸, 즉 시민사회의 확대와 국가의 소멸을 보증할 것이다.
일곱째, 소비와 생활양식의 획일성은 사회적 불평등과 동시에 소멸될 것이다. 모든 개인과 공동체는 제각기 스스로를 영위해 나갈 것이며, 오늘날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그들의 생활방식을 다양화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차등은 자유로운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 결과이며 사회적 보수와 권력의 불평등의 결과일 수는 없다. 자유시간 동안에 자율적 능력을 발휘하는 방식만이 차등과 윤택함의 유일한 원천이 될 것이다.
다음에 이상의 테제의 예증으로서 생각될 수 있는 몇 가지 유토피아 중 하나를 묘사해 보겠다. 위에서 서술한 테제는 아래에 제시될 것과는 다른 형태의 유토피아로 그려질 수도 있다. 테제는 생활을 변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서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것 이외의 목적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9. 어떤 유토피아 - 하나의 가능한 대안
그 날 아침잠에서 깨어나자 프랑스인들은 어떤 새로운 변화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자문해 보았다. 선거가 끝난 후 권력이 이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이미 기업의 점거사태가 수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폐쇄된 공장을 2년 전부터 점거하여 모든 종류의 실용품의 ‘자주생산’을 조직하기 시작했던 실업자들 속에는 다수의 해고된 노동자와 퇴직자 및 학생들이 가담하고 있었다. 커다란 빈집은 코뮨과 생산협동조합과 ‘자주학교’로 바뀌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새로 얻은 지식을 도입하여 교사의 협력이 있든 없든 토끼장과 잉어와 송어 양식장을 만들고, 금속과 목재를 가공할 기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권력이 이양된 다음날 아침, 직장에 가던 사람들은 처음에 깜짝 놀랐다. 밤중에 모든 대도시와 간선도로의 차도에 페인트로 흰 선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간선도로에는 버스 전용차선이 만들어지게 되고, 2급 이하의 도로에는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탈 사람을 위한 차선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시가지의 입구에는 수백 대의 이륜차가 공중용으로 놓여 있었고, 헌병 및 경찰용의 대형버스가 버스를 보충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었다. 승차권은 팔지도 검표하지도 않았다.
정오가 되자 정부는 무료운임의 즉각 실시와 도시에서의 자가용차의 주행을 12개월 동안에 서서히 금지시킬 것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주요 도시의 중심가에는 7백 개 노선의 전철이 부설되든지 부활될 것이며, 12개월 후에는 2만 6천 대의 버스가 제조될 것이다. 자전거와 오토바이의 부가가치세는 폐지되었고 즉석에서 이들의 값은 20퍼센트 떨어졌다.
밤에는 공화국의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이상의 조치를 포함한 종합계획을 설명하였다. 대통령에 의하면 1972년 이래 프랑스의 GNP는 주민 1인당 미국의 수준에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여기서 차이는 잘 알려진 것처럼 낮게 평가되고 있는 프랑화의 변동에 따른 5내지 12% 정도이다. “바로 그대롭니다. 프랑스의 남녀 시민 여러분, 우리는 미국을 거의 따라 잡았습니다”라고 대통령은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특별히 자랑스럽게 여길 이유도 없습니다.”
대통령은 미국인의 생활수준이 프랑스인에게는 도달 불가능한 꿈과 같이 생각되던 시대의 일을 회상했다. “프랑스인 노동자가 미국인과 같은 임금을 받는 날이 온다면 반자본주의적인 이의신청도, 혁명운동도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진보적인 사람들이 주장했던 것은 불과 1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고 대통령은 주의를 환기시켰다. 상당수의 프랑스인 노동자와 사무노동자가 오늘날 미국과 같은 수준의 급료를 받고 있지만 그럼으로써 그들의 급진화가 방해받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닙니까? 왜냐하면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우리는 점점 더 어정쩡한 충족 상태를 위해 보다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민족이 감소하고 있는데도 경비가 늘어나는 상황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확대되었다고 해서 보다 큰 공정함과 보다 많은 휴식과 생활의 즐거움이 얻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길을 잘못 들었으며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정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구조로써 다른 성장, 다른 경제’를 위한 계획을 입안했다. 이 계획의 철학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것이라고 대통령은 지적했다.
(1) 앞으로 우리는 보다 적게 일한다.
지금까지의 경제활동의 목적은 생산과 판매를 늘리기 위하여 자본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생산과 판매를 증가시키는 목적은 이익을 늘리는 데 있으며, 그 이익은 재투자되어 다시금 자본의 증가를 가능케한다. 이러한 과정이 무한히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어느 한도를 지나면 이 과정은 증가하는 잉여가치를 파괴하지 않고는 계속될 수 없게 된다. 대통령은 말했다. “우리는 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과거에는 우리의 노고와 자원을 낭비함으로써만 비로소 외형뿐인 완전고용을 실현시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장래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보다 적게, 보다 잘 일해야 할 것이다. 국무총리가 이러한 방향에 따라서 여러 가지 제안을 할 것이다. 대통령은 즉시 원칙적으로 성인은 일손이 있든 없든 간에 필요한 것을 모두 얻을 권리가 있다고 했다. 즉 사용 가능한 노동력의 극히 일부만으로도 주민 모두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정도로 생산기구의 기술적 효율이 놓아지는 날에는 전일제(full-time) 일을 맡는 사람에게만 전일제분의 수입을 얻을 권리를 주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이제 자유노동과 자유시간의 권리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2) 앞으로 우리는 보다 알차게 소비한다.
지금까지의 제품은 그것을 제조하는 회사가 최대한의 이윤을 얻을 수 있도록 고안되어 왔다. 대통령에 의하면 “앞으로, 제품은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에게도 또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도 최대한의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도록 고안되어야 할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각 부문의 지배적 기업은 사회적으로 소유될 것이다. 기업의 임무는 각 영역에서 한정된 수의, 품질이 같은 표준 모델을 모든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충분한 양만큼 제공하는 데 있다. 이러한 모델을 고안하는 데는 네 가지의 기본적인 기준, 즉 내구성, 수리의 간편성, 제조 과정의 즐거움, 공해를 일으키지 않을 것을 따라야 한다. 제품의 내구성은 사용시간으로 표시되고 값 옆에 명기하는 것이 의무화될 것이다. 대통령은 주석을 달았다. “이 제품에 대해서는 매우 큰 수요가 외국으로부터 있을 것을 예상해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제품은 세계에서도 가장 독창적이기 때문입니다.”
(3) 앞으로 우리는 모든 사람의 일상생활에 문화를 포함시킨다.
지금까지 학교의 발전은 전반적인 무능력의 발전과 나란히 진행되어 왔다. 대통령에 의하면, 우리는 이렇게 해서 육아법과 조리법과 노래 부르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요리와 노래는 임금노동자가 통조림에 담아 제공하고 있다. 대통령은 주의를 환기시켰다. “우리는 국가의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만이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울 자격이 있다고 부모가 믿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현재 소비하고 있는 재화와 서비스가 질이 나쁘다고 비난하면서도 획득한 자유시간을 전자공학적으로 날려버리는 일을 직업적 연예인에게 맡기고 있다. 대통령에 따르면 모든 개인과 집단이 자신들의 생활, 생활환경, 상호교류를 조직화할 수 있는 권력을 되찾는 것이 긴급한 과제이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그리고 공동체적인 자율을 재정복하고 확대하는 것이 국가장치에 의한 독재를 파괴하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대통령은 국무총리에게 발언을 넘기고 변혁을 위한 계획을 설명토록 했다. 총리는 우선 사회화될 29개의 기업 혹은 회사의 명단을 낭독했다. 그것의 반 수 이상은 소비재 부문에 속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보다 적게 일하고’ ‘보다 알차게 소비한다’는 두 가지 원칙을 즉시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원칙들을 구체화하는 작업은 근로자 자신에게 맡겨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총리는 말했다. “초안을 짜는 일은 분업으로, 모든 결정은 전원 공동으로 행한다”는 리프21 에서 완성된 방법을 따르며, 총회와 전문화된 작업 그룹 별로 회합을 갖는 것은 근로자의 권리이다. 총리의 어림으로는 근로자가 외부의 조언자와 이용자 위원회의 협력을 얻어 한정된 종류의 모델/품질규격/생산목표를 결정하는 데는 1개월쯤 걸릴 것이라고 한다. 새로운 관리 방법은 이미 프랑스 국립경제통계연구소(INSEE)의 반(半)비공개 그룹에 의해 안출되어 있었다. 총리에 의하면 다음 달 중에 생산은 오후에만 하고 오전 동안은 집단적 준비로 할당할 것이라고 한다. 근로자가 스스로 정해야 할 목표는 일주일의 노동시간을 24시간으로 줄이면서, 생활필수품에 대한 모든 수요를 그들의 생산으로 충족시키는 것이다. 근로자의 실제 수는 당연히 증가할 것이다. 일하고 싶은 남녀의 수에는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총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각자가 같은 기업에서 어느 때는 일주일에 24시간 이상, 어느 때는 24시간 이하 일하도록 근로자가 조직하는 것은 물론 자유이다. 또한 어느 기간은 겸임으로 동시에 두세 가지의 일을 하거나, 여름이 끝날 때는 농업을 하고 봄에는 건설에 종사하는 등 요컨대 동시에 몇 가지 직업에 몸을 담아 실천하는 것도 자유이다. 일주일 24시간 노동에 월 2천 프랑을 받는 것을 평균 임금으로 하는 것이 양해된다면 이상의 목적을 위해 일손 교환용의 기금을 설치하는 것도 근로자의 권리일 것이다.
두 사람이 그들에게 제공되는 집단적 편의와 서비스를 고려할 때 월 2천 프랑을 가지면 상당히 훌륭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총리가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강요되지는 않는다. “사치는 금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사치는 노동에 의해서 획득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점에 관해서 총리는 다음과 같은 실례를 들었다. 별장 한 채는 약 3천 시간의 노동에 해당한다. 별장을 한 채 사고 싶은 사람은 일주일당 24시간 이외에 손작업이든 건설업이든 3천 시간을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가운데 적어도 1천 시간의 노동은 별장을 손에 넣기 전에 제공되어야 한다. 자가용 승용차(약 6백 시간의 노동에 상당)와 같이 불필요한 것으로 분류된 다른 물건도 같은 원리에 따라 입수할 수 있다. “돈이 권리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물건의 가격을 노동시간으로 평가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주의를 환기시킨 후 총리는 덧붙여 이 노동(즉 가격)은 급격하게 값이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약간 손재주가 있는 아마추어가 천 5백 시간을 들이면 스스로 지을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견고한 영구’ 주택의 모든 부품을 불과 5백 시간의 노동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어떤 기초 공동체도 스스로가 소비하는 물건의 최소한 절반은 생산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생산단위를 분산화하고 소형화함으로써 서서히 상품생산과 상품교환을 폐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총리는 언명했다. 왜냐하면 모든 낭비와 좌절의 원천은 “누구도 자신이 생산하는 물건을 소비하지 않으며, 또한 누구도 자신이 소비하는 물건을 생산하지 않는”데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새로운 방향에로의 제 1보를 내딛기 위하여 정부는 자전거산업으로부터 생산을 즉시 30%늘인다는 확약을 얻었다. 게다가 자전거와 오토바이의 절반은 ‘조립세트’의 형태로 판매되어, 이용자가 스스로 조립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상세한 제작법이 이미 인쇄되어 있으며, 필요한 도구류 일체를 구비한 조립대가 지체 없이 관공서/학교/경찰서/병영/공원/공공 주차장 등에 갖추어질 것이다. 총리는 장차 기초공동체가 다음과 같은 종류의 것을 솔선해서 발전시킬 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거리마다 마을마다 아니 커다란 공동주택마다 자유로운 창조와 생산을 위한 작업장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여가시간 동안에 비디오와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포함한 점점 완벽해지는 용구류 일습을 가지고 바라는 대로 물건을 만들어 낼 것이다. 즉 24시간 노동제인 데다가 자원이 확보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돕고(아이들 돌보기, 노인 보살핌, 지식의 전달) 바람직한 집단설비를 공동으로 만들기 위하여 스스로 조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대체 정부는 무엇을 해주는 것인가?’라고 묻지 말아주십시오.”라고 총리가 부르짖었다. “정부의 사명은 인민의 손에 권한을 양도하고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총리는 이어서 새로운 사회의 요체는 교육제도의 개정에 있다고 했다. 학교교육을 받는 동안에 모든 어린이들은 흙/금속/목재/천/돌을 사용하여 세공하는 데 익숙해지고 이러한 활동과 관련하여 역사와 과학, 수학과 문학을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총리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무교육이 끝난 후 5년 동안 각자는 전일제 노동의 소득을 얻는 주 20시간의 사회적 노동과 자신이 택한 연구 내지 실습작업을 병행하게 된다. 사회적 노동은 다음의 네 가지 분야 즉 농업, 제철업/광업, 건설업/공공 토목사업/공중위생, 환자의 간호/노인과 어린이의 돌봄 가운데 한 혹은 몇 가지를 행해야 하는 것이다.
총리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떠한 학생(노동자)도 3개월 이상 계속하여 청소부나 병원 노동자, 인부와 같이 극히 소모적인 일을 하도록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누구나 45세가 될 때까지 연평균 12일씩 이 일들을 떠맡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더 이상 부호도 천민도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총리가 외쳤다. 밤낮으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고 여러 과목에 걸친 자주교육/자주연수를 행하는 기구가 벽촌에 사는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는 680개소에 2년 안에 설치될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에 반대되는 작업 속에 갇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노동(교육)의 마지막 해에 학생(노동자)은 작은 자립적인 그룹으로 나누어져, 미리 지역공동체와 논의해 둔 독창적인 제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실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총리는 이렇게 많은 자발성이 발휘되어 프랑스 중앙부의 과소지대(過蔬地帶)가 새로운 생명을 얻으며, 그곳에 생태계를 존중하는 농업이 재도입되는 데 대한 희망을 표명했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가 자동차 연료와 공업용 중유를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비프스테이크를 위해 미국의 대두(大豆)에 의존하고, 곡물과 야채를 위해 석유화학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국토의 방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국토의 점령을 요청 합니다”라고 총리는 말했다. “민족의 주권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양하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매년 10만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돌보지 않게 되는 지방에 살면서, 그곳에서 유기농법, 목축과 더불어 ‘부드러운 기술(soft technology)’을 재도입하고 완성하도록 격려하는 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바람직한 모든 과학적/물질적 원조가 5년간에 걸쳐 이 새로운 농촌 공동체에 제공될 것이다. 이들 공동체는 세계적인 굶주림과의 투쟁에 원자력 발전소와 살충제 공장의 수출 이상으로 공헌할 것이다. 총리는 이야기를 끝마치면서, 상상력을 북돋우고 사상의 교류를 자극하기 위해서 앞으로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TV의 방영을 금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 앙드레 고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진보적 이론가의 한 사람으로서 사르트르가 주재했던 ‘레 탕 모데른’지의 부편집장이나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지 경제담당 기자로 활동 했다.이때 ‘미셀 보스케’라는 필명을 쓴다.)
2. 이 글은 1969년 5월 혁명 이래 “생활을 변혁하자”는 슬로건 아래 이어온 여러 가지 사회운동 가운데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생태주의 운동의 이론서이다. 그는 이 글에서 새로운 기술을 채택하고, 생산양식과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며, 참다운 시민권을 회복함으로써만 자율적인 개인과 기초공동체를 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70년대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대두되기 시작한 반핵평화운동과 생태주의 운동 등의 민중운동이 지닌 특색인 생태적 위기 인식, 자본주의 및 독재적 사회주의에 대한 반발 등이 함축적인 이론화를 통해 이 글에 제시되어 있다. 그는 2007년 그의 부인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본문으로]
2. 비좁은 거리에서의 자동차가 그 예이다. [본문으로]
3. 저량(佇量, stock)과 반대되는 용어로서 일정 기간 동안 획득되든가 사용되는 양을 말한다. 경제학에서는 생산물과 소득과 연결되는 개념을 갖는다. [본문으로]
4. 反생산성의 여러 가지 수준에 대해서는 이반 일리치의 ‘탈병원화 사회’ 및 Jean Pierre Dupuy et Jean Robert, La Trahison de l'opulence, PUF, 1976 참조. [본문으로]
5. 이반 일리치의 “공생의 길(La Convivialite)의 다음과 같은 고찰을 참조할 것, 이것은 분명히 지칭은 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로마클럽을 겨냥한 것 같다. ”추상적 원리를 내세우며 성장에 반대하는 엘리트 조직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적 상상력에 대한 산업측의 해독제이다. 신엘리트층은 공업생산을 제한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민들에게 주입시킴으로써 필연적으로 최적 규모의 성장을 산출하는 관료들에게 보다 큰 권력을 부여하게 되고, 엘리트들 자신은 그들의 인질이 되어버릴 것이다. 극도로 합리화되고 규격화된 재화와 서비스의 안정생산은 성장에 기초를 둔 공업사회보다 더한층 공생을 위한 생산에서 우리를 멀리 떼어놓을 것이다.“ [본문으로]
6. 단지 성장의 자본주의와 양립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성장의 자본주의의 종말이 반드시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弔鐘을 울리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1874년부터 1893년까지, 그리고 1914년에서 1939년까지와 같이 오랜 정체와 위기의 시기를 극복하여 살아남았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축적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된 경우조차 붕괴되기는커녕 축적을 다시금 가능하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때문에 자본의 대규모적인 파괴와 전쟁이 필요하게 된다. [본문으로]
8. Gorz et al., Critique de la divisioin du travail, Le Seuil, 1975 [본문으로]
9. 1974년 3월 ‘에르’ 지에 의해 행해진 SOFRES(프랑스의 여론조사기관의 하나)의 여론조사에 의한 것 [본문으로]
10. Marshall Salinse, Age de pierre, Age d'abondance, 1976. [본문으로]마르크스의 저서를 불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꾸며낸 ‘절대적 빈곤화’라는 단어는 전혀 부적당하다. 마르크스 자신은 ‘빈곤화(Verarmutung)가 아니라 ’궁핍화(Verelendung)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1. 출입권의 설정은 소련 및 중국에서와 같이 권리를 지닌 자의 정치적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수도 있다 [본문으로]
12. 영국과 프랑스 항공회사가 9년(1968~76)에 걸쳐 공동 개발한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 성층권을 비행하며 대기오염을 유발시킨다고 함. [본문으로]
13. 이것은 모든 독재적 사회주의 사회의 경우이다. [본문으로]
이 문제에 대한 훌륭한 저작 Pierre Rosanvalln, L'Age de l'autog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