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한 11월 말이다. 지난 주말엔 올해 들어 3번째로 필름이 끊기는 취로를 걸었다. 이렇게 한번 기억의 끝장이 날라가 버리면 머리 속의 세밀한 기관에 나사가 빠져버린 듯한 의식이 며칠간 이어진다. 촌사람이 시내에 나갈 때는 귀로를 주의해야 한다.
지난주에 이병주의 『지리산』7권을 모두 읽었다. 박경리의 『토지』에 이어 시대적 연속성을 좇아 읽은 것인데, 이야기의 구성이 다소 조잡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작가 개인의 자적전 요소와 기록적 요소, 실존한 작중 인물들의 가공, 수기의 형태( 6권의 절반과 7권)가 뒤섞여 있다. 권창혁으로 대변되는 공산주의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공격의 이면에는 파르티잔의 최후를 마감한 박태영을 비롯한 당대의 처참한 희생자들에 대한 공분의식이 있다. 남로당에 이용당하고, 결국 이 남로당의 주축인 박헌영, 이승엽 등이 전후 김일성으로부터 숙청을 당하자, 당과 북으로부터 버림받은 빨치산들은 정처 없는 신세로 몰락, 토벌군에 포위되고 만다. 자신의 선택,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되려했던 자신의 헛된 야심에 스스로를 복수하고자 최후의 파르티잔이 될 결심을 한 박태영에게서 역사는 다시 시작될 수는 없었던가?
안철수나 문재인을 지지하지 않으면 새누리와 다를 바 없는 수구꼴통으로 몰아가는 세태 속에서, 또다른 박태영을 찾고자 최인훈의 『광장』을 다시 읽어 볼까 생각중이다.
*『지리산』에서는 임철우의 단편 <아버지의 땅>의 모티브가 될 만한 지점을 찾기 힘들다. 남녘의 버려진 빨치산들이 허망한 구원을 찾아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을 넘는 월북의 루트를 이태의 수기에 기반한 6,7권에서 찾을 수 없다.
업무용 노트북이 생겨 집에서 예전 글을 들춰봤다. 일부 파일은 꺠져서 열리지 않는다. 아래글은 동양철학 수업 후 제출한 소논문이다. 주석은 생략.
주역의 자연관과 오늘의 자연관의 문제 1999.1.4
지난 여름 전국적인 수해는 중랑천을 끼고 있는 서울의 동북부에서도 일어났다. 다행히 피해에서 벗어난 지역에 속한 아파트에서 나는 동부간선도를 덮어 버리고 흘러 넘쳐나가는 무시무시한 황색 강물을 보면서 자연의 재해에 처한 태고적 인간의 공포가 온몸에서 살아나는 듯 했다. 같은 해 TV나 신문의 사진에서 황하의 범람을 보았을 때와는 다른 충격이었다. 중랑천의 범람을 대비해 지하 주자창에 있던 차들이 아파트를 빠져 나와 동일로의 가변도로에 일렬로 주차하는 긴 행렬이나 범람에 대비해 방송매체에 귀기울이라는 경고방송의 반복은 마치 북한의 무력도발이 일어나기라도 한듯한 전운(戰雲)을 감돌게 했다. 일시적으로 일어난 나의 이런 반응은 자연을 외경의 대상으로 간주해 그로부터 가치나 당위의 기획까지 이끌어내는 역학의 자연관과 부합되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돌발적 반응과는 달리 나의 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물질적 심리적 조건은 서구적 자연관의 제약을 강하게 받는다.
역학을 포함한 동양의 순응적이고 순환적 자연관과 첨예하게 대립되는 서양의 그것은 부정적으로는 자연(physis)을 정복의 대상으로, 적극적으로는 자연을 인간의 영원한 가공 대상으로 본다. 여기서 사용되는 방법이 기술인데, 기술은 하나의 자연물이나 원형을 전형으로 삼아 이것을 끊임없이 모방․변경․응용하는 것으로서 그 대상은 비단 과학적 장치 뿐만이 아니라 삶의 조직화로서의 법제에도 미친다. 한가지 거친 예를 든다면 동양인은 자연 그 자체의 미에 탐닉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서양인은 자연을 질료로 삼아 이것을 재현, 재창조하는 데 관심이 있다. 세계관적 관점에서 볼 때, 서구인의 이런 태도는 인간종의 역사를 직선적 발전의 선상에서 보는 히브리적 사관이나 헤겔의 이성적 사관의 영향, 자연을 그 자체로 긍정하지 않고 자연 너머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현상계와 본질계를 구분할려는 플라톤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동양인, 특히 중국인에게 이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들은 소박한 실재관으로 자연을 긍정하는 전통을 갖는다. 자연 너머의 인격신의 존재 따위를 인정하는 태도는 주(周)나라 시절에 해체되고 신성(神性)은 예(禮)라는 전형적 행위의 형태로만 희석화된 채 남아 있다. 무엇보다 중국인의 이러한 현실주의적 자연관에 영향을 준 것은 농경문화이다. 농경사회는 사계절의 뚜렷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파종과 수확을 한다. 자연의 반복적 운행에 삶의 노동이 맞춰지는 사회에서 문화적 상상 또한 이러한 자연에 속박된다. 그러면 이 상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이것은 하늘(天)을 체(體)로 땅(地)을 용(用)으로 간주해 전반적 삶의 기획은 하늘의 작용(乾)으로, 구체적 삶의 작동(만물의 생성과 유지)은 땅의 작용(坤)으로 본다. 건과 곤은 팔괘에 해당하는 것으로 팔괘의 나머지는 번개(雷), 바람(風), 물(水), 불(火), 산(山), 연못(澤)을 물상(物象)으로 한다. 팔괘의 발생을 수리적 계산의 측면에서 보면 효(양효와 음효로 나누어 지므로 경우의 수는 2가지)가 3개로 묶어지므로 ‘23=8’이 된다. 그리고 이 8괘가 8괘와 겹쳐져(예를 들어 팔괘중 양효가 3개 겹쳐진 건이 두배로 늘어나 더욱 강해진 범주인 건괘가 된다)중괘가 됨으로써 ‘82=64’괘가 되고 효는 ‘64×6=384’개가 된다. 이렇듯 역경 그리고 역전은 태극에서 비롯된 음양의 조화인 64괘 384효에 자연의 사태를 대응시킬 뿐만 아니라 대응된 괘와 효의 해석을 근거로 미정의 인사(人事)까지도 점친다. 여기서 제시되는 역의 뚜렷한 특징은 자연의 단순한 모상과 역의 기능으로서의 점이다. 팔괘는 자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추적인 8가지 물상을 모사한 것으로 본래는 은나라 때 거북의 등껍데기를 태울 때 갈라져 가는 껍질의 형태를 본 뜬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런 형상을 보고 복관(卜官)이 점을 치던 시절에서 더욱 발전된 것이 연시법인데, 이것은 산가지를 사용한 복잡한 수조작과 반복적 절차를 거친다. 천지와 만물, 그리고 인위적 사태를 64가지 라는 범주에 무작위적으로 자리매김한다는 발상은 단순한 체계에 우연적으로 함몰되고 마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64개의 괘사(卦辭)에 따라붙는 384가지의 효사(爻辭)가 상세하고 역동적인 설명을 덧붙여 줄 뿐만 아니라 사실과 가치를 망라하는 역사적 유물인 역경에 대한 텍스트 크리티시즘으로서의 방대한 주석서들은 시대를 달리하는 고고학적 지층처럼 누적되고 변화된 해석을 제시한다.
주역을 포함한 동양의 자연관에 따르면 우주는 유한한 공간(體)이라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지만 무한한 시간(用)에 의해서 생명이 끊임없이 새로이 전개되는 장이다. 즉 한정된 공간/물질 안에서의 무한한 변화가 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관은 엔트로피 법칙에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공간의 유한성을 말하는 주역의 우주관이 현대의 우주관에 접목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간접적인 관찰도구로 행해지는 물리적 우주에 대한 탐사 결과는 인간이 만들어온 가정들을 무너뜨리거나 수정시킨다. 우주의 중심으로 오직 지구와 달, 태양만을 상정한 주역의 우주관과는 달리 태양계는 우리 은하라는 거대 항성군의 외딴 점일 뿐이다. 주역에서 보이는 인간 본위의 화려한 신화적 자연관에 무색하게도, 94년 7월 목성과 충돌한 슈메이커-레비 혜성 처럼 누군가가 이름 붙일 미지의 혜성들이 무법자처럼 위협적인 궤도를 그리며 지구를 향해 달려올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언뜻 보면 노장의 무위적 자연관과 비슷하다. 이들에게 인위적인 문물이나 仁과 같은 정서는 자연의 맹목성에서 볼 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잡념일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을 알지만 인간에게는 냉혹하리만큼 무지한 과학자의 사물화된 시각과 다를바 없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사가 돌아가는 것에 비해 미래에 대한 과학적 담론들이 오히려 신화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러한 담론들이 겪을 사회적 역사적 과정의 지리함과 수고가 결여된 채 금방 그러한 담론이 실현되기라도 할 듯한 현혹감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장미빛 청사진의 이면에는 무수한 희생물이 요구된다. 이 상식적인 등가성을 무시하는 태도는 불가피하게 만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신약이나 새로운 치료술의 시행 전에 치러지는 임상 실험은 모르모트를 포함한 엄청난 쓰레기의 양산에도 불구하고 결과의 보상 때문에 정당화된다. 여기서 고약한 의미의 공리주의가 가장 많이 번식된다. 공공영역 내에서 발전되어온 민주적 절차가 약학, 의학, 유전 공학 등의 신기술 분야 내에서는 저지된다. 후자의 영역에서는 기술적 진화가 사회적 진화를 덮어 버린다. 따라서 이들 영역 내에서는 ‘밀어부쳐식’ 개발이 시행될 소지가 다른 사회 기관보다 높다. 이런 개발이 지지되는 이유는 기술경제체제라는 자본주의 체계의 근본적 특성 때문이다. 기업의 후원과 국가의 보호아래 진행되는 과학 기술의 시판(市販)이 시민사회의 공론영역을 거칠 때 화려한 외양 뒤에 숨겨진 참담한 폭력의 전체가 노출된다.
지구환경의 변화가 초래하는 위험 수위에 대한 논란 중에서 순환적인 동양적 자연관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구체적 움직임의 하나는 농경문명의 복권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논리적 헛점이 있다. 간략히 말해 선결문제의 오류에서 오는 성급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지구를 자기 생명력과 자기 자정력을 갖춘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 러브록은 인간종이 만드는 온갖 오염물을 지구의 여드름 정도로 본다. 그런데 환경의 위기에 대한 자연과학적 입장의 상이성에서 위기의 현상을 찾는 길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접근이 보다 구체적이다. 이에 따르면 이제는 인간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지위 차이가 환경 위기에 봉착하는 서열에 따른 위험의 지위 차이로 변모한다. 즉 재화 분배의 불평등이 위험 분배의 불평등으로 넘어간다. 예를 들어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방사선 오염이 근처의 셀라필드(Sellafield) 핵발전소에 확장되었는지에 대한 과학적 조사에서 셀라필드의 주민은 심각한 모순을 드러냈다. 왜냐하면 목양농들의 실질적인 방사선 피해보고에도 불구하고 셀라필드 지역 주민을 둘러싼 친족망과 사회망의 일터는 셀라필드 핵발전소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는 울산 공단의 오염 지역을 떠났던 주민들이 되돌아오는 현상이 일어났다. 중금속 오염 때문에 오염 지역의 집을 버리고 떠났던 사람들이 경제한파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듯 환경문제에 대한 위기의 징후는 과학적 데이타의 해석 보다는 실제로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위험 배분의 불평등 속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바로 여기서 과학 기술의 숨겨진 폭력이 가장 적나라하게 목격된다.
양강구도의 정치와 정치 일반을 향한 냉소적인 야유에 대한 원인 파악 보다는 감정적인 싫음 좋음이란 태도의 이분은 또다른 냉소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민주당이 한나라보다 쌓아온 공적은 인정하더라도, DJ가 떠난 대충통합당의 당색은 반한나라 외에 없다. 김어준이 말한 바처럼 보수는 이익을 중심으로 조직되는데, 내가 보기에 민주당은 노골적으로 이익을 내세우지 않을 뿐 이익의 판도에서 자유롭지 않다. 민주당의 이름으로 강원도지사에 앉은 최문순을 보라. 선거전엔 갖은 입발림으로 골프장 반대 농성장에 공감하는 척을 하다가 당선 뒤엔 철저히 무시한다. 정책의 측면에서 볼 때도, 이젠 한나라와의 뚜렷한 정책적 차이도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민주당의 반독재 운운은 족보를 거들먹거리는 퇴보적 행태에 가깝다. 오히려 한나라에서 민주보다 앞선 진보적 정책을 내세울 때도 있고, 일단 제시된 정책은 실현하려는 노력도 보인다.(아 장물을 팔아서라도 반값등록금 재원을 마련하려는 한나라에 비해 민주당은 반값 플랭카드나 붙이고 다닌다.)
비판적 지지라는 말은 분명 모순된 형용어법이다. 차라리 비관적 지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정당의 사명이 정권 쟁취라고 한다면, 정당은 가능한 수단을 발동해서 이 목적을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총선이 정당의 권력창출을 위한 현실적 무대라면 대선은 상징적 무대다. 엄연한 대통령 선거제도에서 정당이 대선 후보를 내지 못한다면 그건 정당으로서의 사명에 어긋난다. 반독재를 위해 한번 내어준 지지를 언제까지 빌려 주어야 할까? 대선이라는 상징적 무대에서 자신 색깔을 지키지 못한 당은 계속 무력해 지기만 할 뿐이다.(아쉽게도 이번 대선에 진보신당은 후보를 내지 않기로 했단다..) 그런 의미에서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후보를 낸 정당에게 다소의 관심을 가지는 것을 패배주의적 정치관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도 근시안적이다.
난 당원은 아니고 앞으로도 어느 당에도 가입하지 않을 생각인데, 이런 말을 하다보면 난 다른 사람들보다 상당히 민주당 우호적이다.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이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끼친 공로가 없을까?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좀 공정하게 보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큰 공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공이 있다면, 그들이 이끌었던, 그들을 지원했던 당의 공로는 없는가? (여기서 김영삼은 자신들의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당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이 이끌던 야당의 전통이 사멸하고 만다.)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한국의 다른 잘 나가는 직업군에 속하는 사람들보다 더 부패하고 더 무능하고, 자신들의 할 일에 더 태만할까? 그렇다는 증거가 있나? Hans님이 정의한 의미에서 "비판적" 민주당 지지는 극좌 냉소주의보다 훨씬 균형있고, 훨씬 건강하다. (난 냉소주의가 싫다. 냉소주의의 본질은 다른 사람을,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비웃고 경멸하는 것이다. )
그럼 위에서 민주당 및 소속 국회의원들에 대한 비판적 옹호는 새누리당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없다. 그들은 한국민주주의 역사에서 민주주의를 말살했고 억압했고, 그럴 수 없을 때는 항상 민주주의의 신장에 반대하고 딴지를 걸었다. 반민주주의적 수구정당. 존재가치가 없는 당. 그 안에서 개혁이다 말한 하는 사람도 다 마찬가지.
대표적으로 원희룡. 얘는 의정활동 중 한국민주주의에 무슨 기여를 했나? 전두환에게 가서 세배하는 것 외에. 미친 놈. 이놈은 이게 본질. 자신에게 유리할 것 같다 하면 전두환에게 가서 절할 수 있고. 그게 불리하게 될 것 같으면 당장 사과하고. 줏대 없는 비열한 기회주의자. 물론 나는 이런 놈은 경멸하지.
-양강구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어 잘 모르겠슴. 그러나 거대한 양강구도의 물결 속에서, 여러 군소적인 이야기들이.. 부당하게 (그것도 너무 과도하게) 파묻힌다는 점에는 캐동감. 아마 겨울산 이야기는 이거인거 같다.
-야바위정도는 아니지만, 캠프의 권력다툼에 관해서도 70% 공감.
-비판적 지지에 대해서 다른 견해 말씀 올리자면, (이에 대해 대다수와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비판적 지지 모든 지지는 99.9% 비판적 지지이다. 군소정당 후보에 대한 지지 역시, 비판적 지지 아니던가? 100% 똑같은 생각을 가진 후보라면 모를까.. (이 역시 참 이상한 일일거다.) 내 경우, 한나라, 민주, 진보정당 모두 내 생각과 다른데.. 비판적 지지를 하지 말라면 나는 투표를 하지 않아야 한다. 아마도 영원히.
-전략적 지지 비판적 지지에 대한 논쟁은 아마도 전략적 지지, 그러니까.. 자신의 지지후보가 있슴에도 다른 후보를 선택하는 것을 말할 텐데, 이 역시 정치적 입장차라고 봐야한다고 여겨진다.
당선과 관련없는 지지정당의 득표율 up보다, 한나라당의 비집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 한나라 민주당 공히 도진개진이므로, 당선과 무관하게 지지정당에 투표하는게 낫다고 보는 경우. 민주당이 되는게 자신의 지지정당의 미래에 유리하다고 보는 경우. 그 반대인 경우. 투표는 유불리로 따질 수 없는 문제로 보는 경우. 반대로 실리적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 등 모두 다 정치적인 입장에 속한다고 본다. 물론 이에 대한 논쟁은 상호가능. (대부분 소모적이고 감정적이었지만..)
-또 하나, 비판적(전략적) 지지를 하지 말라는 건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주문이다.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할 때, 아무런 계산없이, 네 이상대로 행동하라는 말과 동급수준. 일부 예술가, 성인, 위인에게만 해당될 수 있는 말이며.. 모든 이에게 이걸 주문하는 것은 불가능(심지어 부당)하지 않을까?
정치적 입장(이상)과, 그게 사회에 실현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상이 같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지지되어야 하는 건 아니란 말. 하나의 선택은 자신의 이상,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 실현방식은 물론... 그 이상이 충족되지 않는 거의 모든 경우에서, 그 차선책에 대한 입장.. 무엇을 어디까지 타협 양보할 수 있고 없는지. 무엇이 유불리한지. 현실과 미래 등. 많은 것을 포괄하고 있으므로, 일부가 맞아떨어진다고 지지되는게 아니다.
또한 최종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경우, 차선, 차차선을 취하는 영업가 또는 실용적 기질과, 이게 아니면 타협할 수 없는 고집스러운 (또는 의지의) 스타일, 완전이 아니면 무라고 느끼는 예술가 기질, 1등이 아니면 다 꼴등과 같다고 보는 1등주의 기질, 그 밖에 현실감없는 스타일, 이상 외엔 별로 관심없는 기질 등. 등에 따라서도 다 달라진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한 중생들의 생각이 모아지고 반영되고 논의되고 아젠다가 정해지는.. 대한민국, 아니 현존 모든 국가의 의사유통구조에 관련해서, 지대하고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을 깊이 공감한다. 다만, "일이 점점 커지네!"일 뿐...
-비판적 지지에 대한 논쟁은 그게 옳으냐 그르냐에서, 어떤 것을 어디까지 타협하고 양보할 수 있는지 없는지, 무엇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는지 등으로 대체하면, 더 정확한 맥락에서 더 생산적인 이야기가 될 거 같다.
내가 아는 한, 대개 우리들의 차이는, 무엇에 대한 옳고 그름이 아니다. (박정희 지지자들도 독재, 친일이 옳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무엇을 어느 수준에서 타협하고 양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차이이다.
네, 저는 저 양강구도에 큰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명박이도 견뎠는데 근혜언니 치하라고 못살까요. 어차피 정권의 탄생기 부터 혼돈과 혼란이 한국정치의 운명이니까요. 선거 때마다 단일화로 반격을 노리는 꼼수들이 지긋지긋하네요. 나름의 역동성이 흥미유발의 소재는 되겠지만요. 안테나가 끊겨 뉴스나마 보던 TV를 아예 안보다 보니 정치가 제 관념에는 아주 미미한 현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가 봅니다. 물론 정치는 중요한 것이지만, 대선이라는 빅이벤트가 정치의 전부를 잡아 삼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정치가 생활과 유리된 곳에서 오히려 정치는 중계됨으로써 생활의 소재를 점령했다고 할까요.
대선 때마다 비판적 지지로 군소정당을 압살하는 양강구도의 선거판을 깨기 위해서는 비판적 지지 따위의 자살책을 버리는 생존전력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 생각에 안철수 신드롬의 주요 동기에는 민주당에 대한 혐오감도 있고요.
겨울산님은 한국정치를 너무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계시네요. 그리고 단일화는 "야바위"라는, 결국 새누리당식 논리에 빠지시는군요. 둘이 지향이 상당히 비슷한 두 후보가 모두 나가면, 둘다 역사를 거꾸러 돌린다고 생각하는 세력이 집권을 하게 될 것 같고, 합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때 힘을 합치는 것을 고려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단일화과정이 자리나눠먹기식으로 되지는 말아야겠지요. 그리고 지금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고. 이거 "야바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자 대결에서는 지지도가 제일 높게 나오고, 정당 중에서는 새누리당이 지지도 높다고 새누리당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순리일까요? 그렇다면 대통령 선거를 왜 할까요, 그냥 여론조사로 하면 되지.양자대결하면 근혜언니가 지거나 비슷한 것으로 나타나고, 새누리당이 집권해야 하느냐 정권이 교체되어야 하냐, 물으면 정권교체쪽이 훨씬 높은 것은 고려되지 않아야 할까요?
나는 박근혜 대세론이 흔들리는 것을 한국사회의 역동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역동성은 물론 안정적이진 않죠. 그래도 죽은듯 한 것보다는 낫죠.
정당지지도와 대선 후보 지지도의 정상적 궤도에서 이번 대선의 승자는 박근혜다. 대중의 과대열망 속에 출현한 안철수라는 신드롬이 이 정상 궤도에 이탈 조짐을 일으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이 모두 문재인을 위한 쇼라면 그야말로 엄청난 자기헌신이지만, 강은 이미 건넜다고 한다. 극적인 단일화로 밖에는 대선에 승리할 수 없는 민주당...극적인 단일화의 꿈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문안 캠프의 동정에는 야바위같은 노림수가 보인다. 결국 대선은 과반수를 차지하기 위한 의회정치의 귀결인 양강구도의 연장선이자 대리전이면서 승자 캠프를 위한 일자리 창출로 보인다...그리고 의원수를 200명으로 줄이자는 안은 테크노크라시의 전조같다.
안철수의 정치개혁구상에 대해서 비판이 많다. 무엇보다 없어질 수 없다면 가능한 한 정치가 적었으면 좋겠다는 수준에서 사고 있다는 것이 많이 드러난 것 같다. 기술관료적 행정을 이상적 정치 형태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걱정이다. 주변 사람도 거의 다 대학교수들, 아니면 무슨 연구소 소장. 이게 대동령 후보의 선거기구인맥인지 무슨 연구소를 세우려는 것인지. 이에 대해서는 좋은 비판이 많은 고로 특별히 첨부할 것이 없다.
다만 자신에 대한 비판을 국민에 대한 비판으로 등치시키는 오만함에 대해서는 또 한번 놀랐다. 인기가 상당기간 좋다고 이제 자신의 생각을 비판하면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고, 국민이 무시당해 마음이 아프다? 거의 이명박 수준.
안철수가 이 못난 땅의 꼴동 기득권층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법과 상식에 맞게 행동해왔다. 그것만도 상당히 어렵고 후륭한 것이다. 맞다. 그러나 그 이상도 아니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 사회의 특권층에 속했으며 그 안에서 합법적 형태로 누릴 수 있는 특권 다 누렸다. 실례로 포스코사회이사하며 수 억씩 받지 않았나? 하는 일도 없이.
그래 대통령후보로 출마할 자격있다. 그러나 자신이야말로 이 사회의 부당한 특권구조를 개혁할 도덕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자신만이 구호가 아니로 실제로 국민의 후보라고 생각한다면 벌써 오만과 착각 속에 있는 것.
경제를 좀 운영할 줄 알아야겠지. 그러나 나는 그과 더불어 이 사회에 민주주의를 진척시킬 수 있는, 특별히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증진시킬 수 있는, 그리고 검찰개혁을 통해 공권력을 민주적 통제 아래 둘 수 있는 그런 식견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대통렬이 되길 바란다. 안찰수로는 뭔가 부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