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용 노트북이 생겨 집에서 예전 글을 들춰봤다. 일부 파일은 꺠져서 열리지 않는다. 아래글은 동양철학 수업 후 제출한 소논문이다. 주석은 생략.
주역의 자연관과 오늘의 자연관의 문제 1999.1.4
지난 여름 전국적인 수해는 중랑천을 끼고 있는 서울의 동북부에서도 일어났다. 다행히 피해에서 벗어난 지역에 속한 아파트에서 나는 동부간선도를 덮어 버리고 흘러 넘쳐나가는 무시무시한 황색 강물을 보면서 자연의 재해에 처한 태고적 인간의 공포가 온몸에서 살아나는 듯 했다. 같은 해 TV나 신문의 사진에서 황하의 범람을 보았을 때와는 다른 충격이었다. 중랑천의 범람을 대비해 지하 주자창에 있던 차들이 아파트를 빠져 나와 동일로의 가변도로에 일렬로 주차하는 긴 행렬이나 범람에 대비해 방송매체에 귀기울이라는 경고방송의 반복은 마치 북한의 무력도발이 일어나기라도 한듯한 전운(戰雲)을 감돌게 했다. 일시적으로 일어난 나의 이런 반응은 자연을 외경의 대상으로 간주해 그로부터 가치나 당위의 기획까지 이끌어내는 역학의 자연관과 부합되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돌발적 반응과는 달리 나의 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물질적 심리적 조건은 서구적 자연관의 제약을 강하게 받는다.
역학을 포함한 동양의 순응적이고 순환적 자연관과 첨예하게 대립되는 서양의 그것은 부정적으로는 자연(physis)을 정복의 대상으로, 적극적으로는 자연을 인간의 영원한 가공 대상으로 본다. 여기서 사용되는 방법이 기술인데, 기술은 하나의 자연물이나 원형을 전형으로 삼아 이것을 끊임없이 모방․변경․응용하는 것으로서 그 대상은 비단 과학적 장치 뿐만이 아니라 삶의 조직화로서의 법제에도 미친다. 한가지 거친 예를 든다면 동양인은 자연 그 자체의 미에 탐닉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서양인은 자연을 질료로 삼아 이것을 재현, 재창조하는 데 관심이 있다. 세계관적 관점에서 볼 때, 서구인의 이런 태도는 인간종의 역사를 직선적 발전의 선상에서 보는 히브리적 사관이나 헤겔의 이성적 사관의 영향, 자연을 그 자체로 긍정하지 않고 자연 너머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현상계와 본질계를 구분할려는 플라톤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동양인, 특히 중국인에게 이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들은 소박한 실재관으로 자연을 긍정하는 전통을 갖는다. 자연 너머의 인격신의 존재 따위를 인정하는 태도는 주(周)나라 시절에 해체되고 신성(神性)은 예(禮)라는 전형적 행위의 형태로만 희석화된 채 남아 있다. 무엇보다 중국인의 이러한 현실주의적 자연관에 영향을 준 것은 농경문화이다. 농경사회는 사계절의 뚜렷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파종과 수확을 한다. 자연의 반복적 운행에 삶의 노동이 맞춰지는 사회에서 문화적 상상 또한 이러한 자연에 속박된다. 그러면 이 상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이것은 하늘(天)을 체(體)로 땅(地)을 용(用)으로 간주해 전반적 삶의 기획은 하늘의 작용(乾)으로, 구체적 삶의 작동(만물의 생성과 유지)은 땅의 작용(坤)으로 본다. 건과 곤은 팔괘에 해당하는 것으로 팔괘의 나머지는 번개(雷), 바람(風), 물(水), 불(火), 산(山), 연못(澤)을 물상(物象)으로 한다. 팔괘의 발생을 수리적 계산의 측면에서 보면 효(양효와 음효로 나누어 지므로 경우의 수는 2가지)가 3개로 묶어지므로 ‘23=8’이 된다. 그리고 이 8괘가 8괘와 겹쳐져(예를 들어 팔괘중 양효가 3개 겹쳐진 건이 두배로 늘어나 더욱 강해진 범주인 건괘가 된다)중괘가 됨으로써 ‘82=64’괘가 되고 효는 ‘64×6=384’개가 된다. 이렇듯 역경 그리고 역전은 태극에서 비롯된 음양의 조화인 64괘 384효에 자연의 사태를 대응시킬 뿐만 아니라 대응된 괘와 효의 해석을 근거로 미정의 인사(人事)까지도 점친다. 여기서 제시되는 역의 뚜렷한 특징은 자연의 단순한 모상과 역의 기능으로서의 점이다. 팔괘는 자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추적인 8가지 물상을 모사한 것으로 본래는 은나라 때 거북의 등껍데기를 태울 때 갈라져 가는 껍질의 형태를 본 뜬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런 형상을 보고 복관(卜官)이 점을 치던 시절에서 더욱 발전된 것이 연시법인데, 이것은 산가지를 사용한 복잡한 수조작과 반복적 절차를 거친다. 천지와 만물, 그리고 인위적 사태를 64가지 라는 범주에 무작위적으로 자리매김한다는 발상은 단순한 체계에 우연적으로 함몰되고 마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64개의 괘사(卦辭)에 따라붙는 384가지의 효사(爻辭)가 상세하고 역동적인 설명을 덧붙여 줄 뿐만 아니라 사실과 가치를 망라하는 역사적 유물인 역경에 대한 텍스트 크리티시즘으로서의 방대한 주석서들은 시대를 달리하는 고고학적 지층처럼 누적되고 변화된 해석을 제시한다.
주역을 포함한 동양의 자연관에 따르면 우주는 유한한 공간(體)이라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지만 무한한 시간(用)에 의해서 생명이 끊임없이 새로이 전개되는 장이다. 즉 한정된 공간/물질 안에서의 무한한 변화가 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관은 엔트로피 법칙에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공간의 유한성을 말하는 주역의 우주관이 현대의 우주관에 접목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간접적인 관찰도구로 행해지는 물리적 우주에 대한 탐사 결과는 인간이 만들어온 가정들을 무너뜨리거나 수정시킨다. 우주의 중심으로 오직 지구와 달, 태양만을 상정한 주역의 우주관과는 달리 태양계는 우리 은하라는 거대 항성군의 외딴 점일 뿐이다. 주역에서 보이는 인간 본위의 화려한 신화적 자연관에 무색하게도, 94년 7월 목성과 충돌한 슈메이커-레비 혜성 처럼 누군가가 이름 붙일 미지의 혜성들이 무법자처럼 위협적인 궤도를 그리며 지구를 향해 달려올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언뜻 보면 노장의 무위적 자연관과 비슷하다. 이들에게 인위적인 문물이나 仁과 같은 정서는 자연의 맹목성에서 볼 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잡념일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을 알지만 인간에게는 냉혹하리만큼 무지한 과학자의 사물화된 시각과 다를바 없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사가 돌아가는 것에 비해 미래에 대한 과학적 담론들이 오히려 신화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러한 담론들이 겪을 사회적 역사적 과정의 지리함과 수고가 결여된 채 금방 그러한 담론이 실현되기라도 할 듯한 현혹감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장미빛 청사진의 이면에는 무수한 희생물이 요구된다. 이 상식적인 등가성을 무시하는 태도는 불가피하게 만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신약이나 새로운 치료술의 시행 전에 치러지는 임상 실험은 모르모트를 포함한 엄청난 쓰레기의 양산에도 불구하고 결과의 보상 때문에 정당화된다. 여기서 고약한 의미의 공리주의가 가장 많이 번식된다. 공공영역 내에서 발전되어온 민주적 절차가 약학, 의학, 유전 공학 등의 신기술 분야 내에서는 저지된다. 후자의 영역에서는 기술적 진화가 사회적 진화를 덮어 버린다. 따라서 이들 영역 내에서는 ‘밀어부쳐식’ 개발이 시행될 소지가 다른 사회 기관보다 높다. 이런 개발이 지지되는 이유는 기술경제체제라는 자본주의 체계의 근본적 특성 때문이다. 기업의 후원과 국가의 보호아래 진행되는 과학 기술의 시판(市販)이 시민사회의 공론영역을 거칠 때 화려한 외양 뒤에 숨겨진 참담한 폭력의 전체가 노출된다.
지구환경의 변화가 초래하는 위험 수위에 대한 논란 중에서 순환적인 동양적 자연관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구체적 움직임의 하나는 농경문명의 복권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논리적 헛점이 있다. 간략히 말해 선결문제의 오류에서 오는 성급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지구를 자기 생명력과 자기 자정력을 갖춘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 러브록은 인간종이 만드는 온갖 오염물을 지구의 여드름 정도로 본다. 그런데 환경의 위기에 대한 자연과학적 입장의 상이성에서 위기의 현상을 찾는 길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접근이 보다 구체적이다. 이에 따르면 이제는 인간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지위 차이가 환경 위기에 봉착하는 서열에 따른 위험의 지위 차이로 변모한다. 즉 재화 분배의 불평등이 위험 분배의 불평등으로 넘어간다. 예를 들어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방사선 오염이 근처의 셀라필드(Sellafield) 핵발전소에 확장되었는지에 대한 과학적 조사에서 셀라필드의 주민은 심각한 모순을 드러냈다. 왜냐하면 목양농들의 실질적인 방사선 피해보고에도 불구하고 셀라필드 지역 주민을 둘러싼 친족망과 사회망의 일터는 셀라필드 핵발전소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는 울산 공단의 오염 지역을 떠났던 주민들이 되돌아오는 현상이 일어났다. 중금속 오염 때문에 오염 지역의 집을 버리고 떠났던 사람들이 경제한파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듯 환경문제에 대한 위기의 징후는 과학적 데이타의 해석 보다는 실제로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위험 배분의 불평등 속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바로 여기서 과학 기술의 숨겨진 폭력이 가장 적나라하게 목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