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 신학정치단편

번역 Übersetzung 2024. 4. 15. 12:47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Theologisch-politisches Fragment>

Erst der Messias selbst vollendet alles historische Geschehen, und zwar in dem Sinne, daß er dessen Beziehung auf das Messianische selbst erst erlöst, vollendet, schafft.
메시아 자신이 비로서 모든 역사적인 사건을 종결시키는데, 더우기 그[메시아]가 그것[역사적인 것]이 메시아적인 것과 관련된 것을 비로서 스스로 구원하고 완결짓고 만들어내는 의미에서 말이다.
Darum kann nichts Historisches von sich aus sich auf Messianisches beziehen wollen.
이런 이유로 아무런 역사적인 것은 그 자신으로부터 메시아적 것과 관련맺기를 바랄 수 없다.
Darum ist das Reich Gottes nicht das Telos der historischen Dynamis; es kann nicht zum Ziel gesetzt werden.
이런 이유로 신의 왕국은 역사적 동력의 목표가 아니다. 이것은 목표로 설정될 수 없다.
Historisch gesehen ist es nicht Ziel, sondern Ende. Darum kann die Ordnung des Profanen nicht am Gedanken des Gottesreiches aufgebaut werden, darum hat die Theokratie keinen politischen sondern allein einen religiösen Sinn.
역사적으로 보면, 이것[신의 왕국]은 목표가 아니라 끝[의 시작]이다. 이런 이유로 세속적인 것의 질서는 신의 왕국에 대한 사유로 구축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신정정치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만을 갖는다.
Die politische Bedeutung der Theokratie mit aller Intensität geleugnet zu haben ist das größte Verdienst von Blochs »Geist der Utopie«.
신정정치에 대한 정치적인 의미를 모든 강렬함으로 부정한 것은 블로흐의 "유토피아 정신"의 가장 큰 업적이다.

Die Ordnung des Profanen hat sich aufzurichten an der Idee des Glücks. Die Beziehung dieser Ordnung auf das Messianische ist eines der wesentlichen Lehrstücke der Geschichtsphilosophie.
세속적인 것의 질서는 행복의 이념에 정항되어 있다. 이 질서를 메시아적인 것과 관련짓는 것은 역사철학의 중요한 가르침의 하나다.
Und zwar ist von ihr aus eine mystische Geschichtsauffassung bedingt, deren Problem in einem Bilde sich darlegen läßt.
또한 그[관계]로부터 하나의 신비주의적 역사관이 규정되는데, 이 문제를 하나의 이미지로 제시할 수 있다.
Wenn eine Pfeilrichtung das Ziel, in welchem die Dynamis des Profanen wirkt, bezeichnet, eine andere die Richtung der messianischen Intensität, so strebt freilich das Glückssuchen der freien Menschheit von jener messianischen Richtung fort, aber wie eine Kraft durch ihren Weg eine andere auf entgegengesetzt gerichtetem Wege zu befördern vermag, so auch die profane Ordnung des Profanen das Kommen des messianischen Reiches.
하나의 화살이 세속적인 것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목표를 지시한다고 하고 다른 하나의 화살은 메시아적인 것의 강렬함의 방향으로 지시한다면, 자유로운 인류의 행복추구는 당연히 저 메시아적인 방향으로부터 멀어지려 하지만, 자신의 길을 가는 하나의 힘이 반대 방향으로 가는 다른 힘을 촉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것의 세속적 질서는 메시아적인 왕국의 도래를 촉진할 수 있다.
Das Profane also ist zwar keine Kategorie des Reichs, aber eine Kategorie, und zwar der zutreffendsten eine, seines leisesten Nahens. Denn im Glück erstrebt alles Irdische seinen Untergang, nur im Glück aber ist ihm der Untergang zu finden bestimmt.
더우기 세속적인 것은 [이] 왕국의 범주가 아니지만 하나의 범주로서, 그 왕국에 지극히 조용히 근접하는 가장 적합한 범주의 하나다. 왜냐하면 행복에서 지상의 모든 것은 자신의 몰락을 추구하며, 오직 행복에서 몰락이 발견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 Während freilich die unmittelbare messianische Intensität des Herzens, des innern einzelnen Menschen durch Unglück, im Sinne des Leidens hindurchgeht.
반면 개별 인간이나 마음에 있는 직접적인 메시아적인 것의 강렬함은 고통이라는 의미에서 불행을 통과해 가기 마련이다.
Der geistlichen restitutio in integrum, welche in die Unsterblichkeit einführt, entspricht eine weltliche, die in die Ewigkeit eines Unterganges führt und der Rhythmus dieses ewig vergehenden, in seiner Totalität vergehenden, in seiner räumlichen, aber auch zeitlichen Totalität vergehenden Weltlichen, der Rhythmus der messianischen Natur, ist Glück. Denn messianisch ist die Natur aus ihrer ewigen und totalen Vergängnis.
불멸로 인도하는 정신적인 원상복구 명령은 몰락의 영원성으로 가는 세속적인인 원상복구 명령에 상응하며, 영원히 소멸해 가는, 총체적으로 공간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총체적으로 소멸해 가는 세속적인 것의 리듬, [저] 메시아적인 자연의 리듬이 행복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원하고 총체적인 무상함으로 인해 자연은 메시아적이기 때문이다.


Diese zu erstreben, auch für diejenigen Stufen des Menschen, welche Natur sind, ist die Aufgabe der Weltpolitik, deren Methode Nihilismus zu heißen hat.
이러한 것을 추구하는 것, 자연이라고 하는 인간의 인간의 단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추구하는 것은 세계정치의 과제이며, 그.방법은 니힐리즘이라고 불린다.

https://youtu.be/ePREu4Q8vWw?si=3OyrMzrWI7De5VYz

https://youtu.be/YQXHu7rqUkg?si=lGfKERv_kTsz7klv

반응형

좇좇소 감상과 관련 기억들

단상 Vorstelltung 2024. 4. 8. 20:16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유트브에서 이 이해할 수 없는 제목의 드라마를 요며칠 즐겨 보면서 처음 직장생활을 할 때와 급식관련 일을 할 때의 기억이 밀려왔다. 첫직장은 금융 솔루션 중심의 벤처기업이었는데, 그 전에 나는 6개월간 개발자 교육을 받고 이곳에 기술영업직으로 입사했다. 이 업체는 이름난 대기업에서 상임이사까지 오른 사장이 퇴사 후 인수한 기업이었다.

6개월간 개발자 교육을 두 군데 교육기관에서 받았는데, 첫번째 기관에서 거의 태반 이상의 수업을 쫓아가지 못하고 수수방관한 터라 제대로 기술을 연마하지 못했다.  컴퓨터는 문서, 그것도 아래 한글의 문서작업 용도로만 활용했을 뿐, 오피스 프로그램도 사용해 본 적 없고 윈도우 탐색기라는 것도 몰랐던 컴맹인 내가 면접까지 본 첫번째 교육기관에서 수강생으로 뽑힌 것은 지금 기억해보면 "디제라티"라는 IT 관련 책을 보고 이 업계에서 꿈을 펼쳐 보겠다는 자신감의 표출이 전공과도 무관하지만 면접관에게 통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합격한 수강생들은 대부분 이공계 출신이었고 나와 마찬가지로 몇몇에 불과한 인문대 출신들은 프로그래밍 관련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심지어 이 기관의 수강기간 동안 수업을 빼먹고 피서여행을 가기도 했고 한 출판사에 입사지원해 합격했지만 단 하루 출근하고 그만 둔 후 교육장에 복귀하기도 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수업담당 실무자는 가까스로 의무 수업일수를 채운 나를 안스럽게 보면서 수료장을 건네 줬다. 이후 나는 일단 본격적으로 IT 업종 개발직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나는 거의 100 여 곳의 관련 기업에 이력서를 보냈고 두 곳에서 면접이 잡혔다. 제대로 된 기술증빙이 안되는 나를 그나마 면접기회라도 준 것으로 고마워 해야 했다. 취업이 안되자 나는 다시 두 번째 교육을 받기로 한 것이었는데, 첫번째는 비주얼 베이직 과정이었었고 두 번째는 자바 과정이었다. 이천년도 초반, 업계의 프로그래밍 언어의 대세는 로컬 기반의 비주얼 베이직이었고 웹 기반의 자바는 아직 생소한 시절이었다.    

아무튼 겨울기간 동안 두번째 교육을 마치고 아르바이이트를 하면서 계속 이력서를 넣다가 초여름에 두 군데서 면접이 들어왔다. 더이상 개발 쪽에서는 면접기회가
없어서 기술영업 쪽으로 방향을 튼 직후였다. 먼저 면접 본 회사는 용산에 있는 네트워크 관련 벤처였고 두번째는 포이동에 있는 금융관련 벤처였다. 면접 후 두곳 모두에서 합격했는데, 벤처라도 중소기업이기에 그래도 좀 안정적으로 보이는 두번째 회사에 입사하기로 했다.

회사는 벤처기업의 요건을 갖추기 위해 부설 연구소도 있었지만 실상은 창고에 불과했다. 그래도 15명 가량의 직원 중 총무 파트 3명과 나, 그리고 사장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전부 개발직이었고, 사장도 직접 코딩은 안해도 개발과 관련해 업계의 니즈와 트랜드에 정통해 있는 기민하고 끈덕진 기업가였다.

나한테는 이곳이 사회생활의 첫 시작인 셈이었는데 한달의 적응기 동안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사무실에서 감시의 눈은 사장 말고도 또 있었다. 오피스 프로그램에 익숙하지 않아 사장이 내게 일주일 내로 엑셀에 통달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고, 내가 만든 엑셀 양식의 기안서 틀을 놓고 그야말로 열댓번 퇴짜를 되풀이 했다. 그때는 그렇게 물러설 수 없다는 심정으로 사장의 요구에 맞추어 갔다. 그렇게 수습기간이 지나고 옹기종기한 규모의 회사임에도 업무적으로 다양한 일들을 치고 나갔고, 직장 선후배 동료들과 즐거운 술자리도 갖으며 1년이 되어갈 때 쯤, 회사는 정부과제사업으로도 눈을 돌렸고, 나는 이를 위한 문서작업을 맡았다. 이 일을 완료하고 난 후 나는 회사를 그만뒀다. 그때는 그 일이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로 여겨졌고 개발쪽으로 일을 하고 싶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반응형

기억들2 : 동양철학의 지혜

단상 Vorstelltung 2024. 4. 1. 01:54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90년대 초중반기 유가철학에 정통한 교수님을 통해 이런저런 기억에 남을 인상을 받았다. 그중 한 일화는  술에 관한 것이다. 술이라라고 한다면 가히 소크라테스를 넉다운시킬 만한 저력을 가지셨던 이분은 뜬금없게도 수업시간에 술에 관한 짧은 강론을 펼치곤 했다. 유독 이것이 요며칠 사이에 떠오르는데, 독일에서 내가 주력으로 마시는 술이 보드카이기 때문이다. 주로 반주로 드는데, 37도의 이 술을 소주처럼 목 구멍으로 바로 넘기다 보니 인후에 부담이 되는걸 느끼게 됐고, 교수님의 말이 바로 와 닿았다. 당시 중국을 학술차 자주 다니시며 독주를 마시는 요령에 관한 것이었는데, 50도 이상의 독주는 바로 넘기지 말고 혀에서 몇차례 굴려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격렬한 알콜은 혀를 일차로 강타하고 목을 타고 넘어가 위장으로 흡수되기 전에 이미 혀를 통해 취기를 일으킨다. 일상의 소소하고 평범한 진리다.

대범한 진리는 무엇인가? 부활절 기간인 지금 예수의 부활은 정말 이 휴일처럼 실재일까? 성경과 성경 외 역 사적 사료의 증거능력은 둘째치고, 사도들의 순교 자체 만으로도 증명불가능하지만 개연성있는 증거다. 믿음은 이런 차원 너머 있는 것이지만, 그런 믿음은 어렵고 좁은 길이다.

반응형

기억들 : 91년도

단상 Vorstelltung 2024. 3. 31. 16:35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고3 때 전기대 시험에 낙방한 후 재수를 하려던 계획을 접고 소도시의 후기대에 입학했다. 1년간 학교를 다니며 무수한 일들을 겪는 가운데 무수히도 재수를 고민했다. 당시 캠퍼스의 운동권은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NL과 PD로 양분되었고 신입생은 선택을 때로는 권유의 방식으로 때로는 반강제의 방식으로 받았다. 그러다 1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 때 NL진영의 과 선배들이 주도하는 MT에 마지못해 참여하면서 일단 도피해야 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 도피란 군입대를 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재수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비록 정치적 지향은 그 선배들과 달랐을지라도 그렇게 도먕친 것이 미안스러운 감과 아울러 그때 학교를 계속 다녔더라면 삶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하다.

반응형
반응형

2부 결과들 : 바울과 근대, 메시아적인 것의 변용
7장 세계정치로서의 니힐리즘과 미학화된 메시아주의 : 발터 벤야민과 테어도어 W 아도르노

166 벤야민 /신학정치 단편/ : 역사의 종말이자 파국으로서의 메시아주의
168~169 메시아적인 것과 상극인 행복에의 추구(세속화)는 몰락을 가져오고 결국 메시아의 나라를 앞당김. 행복은 무상함과 동일시되며, 괴테나 니체의 영원한 쾌락과 반대됨
170~171 고린도서와 로마서의 hos me(아닌듯한 삶)에 대응하는 벤야민의 니힐리즘 : 소멸, 무상함으로 스러져 가고자 애쓰는 것을 세계정치의 과제로 삼는 것. 바울에게 이 세계정치는 로마제국 파괴. 그에게는 로마제국에 대한 니힐리즘적 시각이 중요
벤야민의 창조에 대한 바울적 개념 : 창조는 고통이자 헛된 것(로마서 8장), 피조물의 한숨
173 무상함 아래에 있는 자연은 신음하고 한숨 지음. 이는 유대인의 통곡의 기도에 대응
174 이런 니힐리즘에 대한 저항은 니체 이전에 이미 켈수스Kelsos가 논증
175 청년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는 종교사적 논의가 아닌 믿음의 고백
177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는 아도르노에게서는 미학으로 가설화됨(Als ob). 벤야민의 해당 텍스트는 바르트의 /로마서강해/와 견주어 보면 그리스도교 외부에서 이루어진, 바르트에 비해 덜 성공적인 또다른 변증법적 신학(아마추어 신학). 이는 타우베스와 슈미트도 마찬가지. 교회와 신도(군대)의 기반이 없음.
178 바르트에 필적할 만큼의 강렬함을 지닌 벤야민에게 내재성, 선험성(자신으로부터의 완성)이 없음. 절벽을 횡단할 수 있는 다리는 건너 편에서 오는 것(외재성)

8장 성서 종교로부터의 탈출 : 프리드리히 니체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180~181 바울과의 첫번째 철학적 대결 : 스피노자, /신학 정치적 논고/. 이는 신학과 계시(인간의 복종을 요구)로부터 철학을 해방시키려는 싸움. 여기서 두 가지 교두보는 솔로몬과 바울. 스피노자의 예정설(필연적인 자연법의 세계) 구상에서 바울은 주요한 전거
181~182 고대와 근대 철학의 파괴자들(안티 철학) : 맑스, 키르케고르 그리고 니체
니체의 일관된 주제 : 이성, 합리성, 곧 퇴락의 역사(플라톤-그리스도교적 세계)에 대한 전면 포격
183~184 니체의 비판대상의 단계적 이동 : 소크라테스에서 사제유형으로. 데카당스(퇴락)의 역사는 원한감정의 독을 품은 사제유형의 등장으로 발생. 이 사제유형의 최상급이 바로 바울(소크라테스와 예수 등을 오고가다 /아침놀/ 이후 바울로 타격지점 고정)
184~185 타우베스가 보기에 자기모순에 빠진 니체의 전략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구가치체계에 가장 뚜렷한 각인을 남가 바울을 질투심의 감정[또다른 원한감정?]으로 전복시키고(탈가치화, 가치전복) 더 위대한 입법자로 등극하기 위한 새로운 성서 제시(차라투스트라). 바울의 상징화된 가치를 원한감정으로 물들임으로써 극복하려는 것
186 스피노자의 예정설의 주요 참조문헌 : 로마서
186~187 철학의 두 가지 방식 : [소승]진리와 [대승]진리. 전자는 고전철학으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후자는 맑스와 그리스도교로서 그리스도를 가로질러 헤겔에게로.
187~188 타자의 노동에 기생함으로써 여가를 얻어 지혜를 얻는 자는 노예를 부릴 수 있어야 함(귀족주의적 지혜, 비도덕주의). 이 테제의 결정적 적이 바울
196 바울은 십자가에 매달린 신(고린도전서)을 통해, 그 고통을 통해 영원회귀적인 삶에 유죄판결을, 저주를 내린 것(니체 유고)
197~198 우주에 관한 상반된 두 가지 이해방식 : 예외(기적)의 인정 여부(슈미트 대 니체).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한다면 1+1=3이 될 수 있음. 이것은 하나의 결정(결단). 예외가, 십자가에 매달린 신이 무한반복의 삶을 침해
203~204 그리스도교에 대적하는 니체의 휴머니즘적 동기 : 의식적인 자아 안에서 그 의지를 허물어 뜨릴 수 있는 심대한 무기력이 존재. 이는 결국 양심으로 나아가고, 이를 통해 희생제의는 폐지된 것이 아니라 실체화됨(바울의 변증법 : 죄, 희생, 화해의 영원순환). 그러나 니체에게 무한생성의 존재 자체에는 죄가 없음
198 무한생성, 영원회귀는 바울의 다마스쿠스에서의 환각경험에 대비되는 니체의 환각경험, 근본경험의 산물
204~205 여기서 프로이트 등판. 테제 : 인간 자체를 구성하는 죄의 발견, 곧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206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 무의식(바다)을 자연과학적 기술로 설명(간척)하려는 프로젝트. 그러나 근본상황(죄의 수렁)의 변화는 없음. 즉 그의 의도(계획)보다 그의 통찰이 더 강력
207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바울의 직계후손 /인간모세와 유일신교/(종교의 기원)
213 아버지의 종교인 유대교에서 아들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로의 이행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충동의 실현[소망의 충족]이자 바울에게서 이중계율[율법과 믿음, 율법과 사랑]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랑의 계율로 급진화하는 것
213~214 이러한 이행은 인류에게 죄의식을 환기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할례의 철회와 이방인 수용의 구원관으로 나아감
214~215 1930년대 쓰여진 /인간모세와 유일신교/(종교의 기원)에서 보이는 프로이트의 유려한 문체. 이는 당대의 슈미트나 하이데거의 극히 흥분된 문체와 대비.
215~216 종교의 기원 인용정리 : 야훼와의 불화(그들의 불복종에 따른 야훼의 분노에 대한 그들의 적의)에 따른 죄의식(양심의 가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남. 이 의식이 엄격한 율법주의로 나감. 즉 그들의 고도의 윤리적 관념은 야훼에 대한 억압된 적의에서 비롯된 강박신경증적 특성을 보임
215 이스라엘 민족의 죄의식이 주변이방인에게로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며 번짐(보편화). 이 울적한 상황의 해결자가 바울. 원죄에 대한 그라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관
219 바울의 역할(환상의 차원에서 구원책 제시)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프로이트 : 문화이론[정신분석학의 사회적 적용]을 통한 치료책

https://youtu.be/1A73Ecdw4sU?si=AFEP75ReoXi1BOKn



반응형